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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의 찬미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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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라
@loveattack1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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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국⎯에덴에서는 단 하나의 신을 믿고 따르며,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은 이단으로 판단해 처형하거나 사냥을 서슴지 않았다. 신을 믿는 이가 많을수록, 신앙심이 높을수록 우리가 믿고 있는 신의 힘이 강해 질거라 믿었으며, 그건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신은 저를 믿어주는 사람 위에서 군림할 수 있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신은 신력이 다해 영원한 잠에 빠지곤 했다. 그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대천사의 자격이 박탈당하고 모든 이들에게서 외면당한 체 지하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져 영원한 잠에 빠져 있었다.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몇백, 몇천년이고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며 그것은 죽음과 다름없는 벌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뜨며 양손으로 귀를 막았다. 어찌나 간절히 저를 부르는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하긴, 악마를 찾는 이가 제정신일 리가 만무하며, 어쩌면 죽기 직전에 저주를 퍼붓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온몸이 관절 인형처럼 삐걱댄다. 잠에 빠진 지 얼마나 지났더라. 세어보는 건 무의미했다. 악마는 영생이었고, 그는 세상이 빛과 어둠만이 존재할 때 태어났다. 잠에 빠진다고 한들 그것이 벌이 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봉인 정도였다. 몸을 일으키자 하늘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대천사 중 하나가 저를 지켜보고 있던 참이었나보다. 저 역시 깨어난 게 달갑지 않았다. 처참하게 패하고 지하세계로 떨어져 모든 것을 잃고 잠에 빠지던 찰나, 쓰라린 패배의 기억을 잊을 수 있었던 그 순간 누군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무시하고 싶었지만 제가 깨어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천사놈에게 엿을 먹여 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럼…저를 깨운 이단의 얼굴이나 보러 갈까. 이왕 보러 갈거면 좀 단장을 하는 편이 좋겠지. 그는 너저분 하게 자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샛노란 눈동자를 검게 물들였다. 인간을 만나러 갈때는 그와 걸맞는 모습으로 가는게 좋다. 자칫하면 놀라서 죽어버리니까. 글라스까지 착용한 그가 눈앞을 가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가벼운 걸음을 했다. 간만의 지상 나들이라 그런가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상의 온도가 서늘하기 그지없다. 지하와 다를 바 없는 모습에 그가 주변을 쭉 둘러봤다. 새하얀 눈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고, 하늘이 잿빛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추위로 벌벌 떨 그가 아니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절벽 아래로 작은 마을이 보였다. 마을 전체가 악마를 숭배한다니 들키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마을은 조용했고, 누구도 문을 열고 있지 않았다. 이방인의 방문에도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으며 그는 아무래도 좋았다. 바위를 깎아 만든 집에 나무판자로 문을 덧대어 놓았고 곳곳에 가로등이 세워져 있었다. 가로등은 계속해서 깜빡였으며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가 지나가는 동안에는 완전히 꺼져버렸다. …옷이 조금 튀나. 그는 가슴팍을 털어내며 주변을 살폈다. 분명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났는데 아무도 선뜻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마을에 도착하기 전, 보았던 시체의 옷을 따라 해봤는데 아무래도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목을 옥죄어오는 새카만 사제 옷은 퍽 그와 잘 어울렸다. 아주 오래전, 하늘과 바다, 땅이 생기고 대지에 생명이 자라나기 시작한 그때. 아직 그가 빛의 존재였을 때, 신이 자신과 닮은 피조물을 만들어 생명을 주었던 그때. 이와 같은 옷을 입고 내려와 인간행세를 하며 그들 위에 군림했었다. 이후 그가 신의 자리를 탐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양옆으로는 마을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화려한 초들이 바람에 맞서 싸우며 밝게 빛나고 있었고, 계단 아래에는 은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아이가 제 본모습을 꼭 닮은 동상 아래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아직도 저게 남아있었군. 동상 가까이 다가가자 아이의 등이 흠칫 떨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동상에 손을 올려보았다. 아주 오래전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터였다. 날개는 부숴지고 얼굴엔 금이 가 있다. 그뿐이겠는가, 작은 충격이라도 가하면 부숴질것처럼 연약하고 물렁했다. 다시 만드는게 낫겠군. 아니 차라리 돌멩이를 가져다 둬도 이보단 나을게야. 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기도를 올리던 아이의 몸이 서서히 일어나 그를 바라봤다. 누구세요…?

 

태어나길 지하에서 태어나 빛 한번 보지 못해 피부는 희다 못해 창백했고, 하얀 피부 아래 핏줄이 도드라졌다. 부모를 일찍이 여의고 마을 여관에 겨우 방을 빌려 그곳에서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나이는 열아홉쯤 되어 보였다. 원래 그리 말이 없냐고 물으니 이곳에선 말할 사람이 별로 없어서 말주변도 없고,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 하였다. 책도 없으니까… 그는 아이의 말에 책과 옷가지를 들고서 돌아왔다. 아이라곤 했으나 키는 저만큼 컸고,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름을 묻자 아이는 입술을 달싹이며 말하지 못했다. 설마 이름도 없느냐고 물으니 고개를 젓는다. 그럼 무엇이 문제냐고 묻자 저를 힐끔 보더니. 손에 깍지를 끼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말할 수 없어요. 당신은 외부인이잖아요.” 그는 눈썹을 한번 씰룩 거리더니 이해한다는 듯 신전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라비라고 하는데.” 그가 말했다. 아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본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무릎 위로 팔을 걸치곤 턱을 괴고 시선을 피했다. 그가 아이에게 가르쳐준 이름은 오래전 천사였을 때, 인간계를 다스렸을 때 썼던 이름이었다. 그 외에도 그를 부르는 수식어는 많았지만, 아이가 이해하기엔 너무 어려울 듯하여 가장 간단한 이름을 말해준다. 아이가 머뭇거리더니 제게 다가온다. 검은색 눈망울에 호기심과 선망이 가득 어린 채로 저를 보며 입을 연다. “라비……” 그때였다. 계단 위쪽에서 누군가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황급히 그를 다 부서진 동상 뒤로 숨긴다. 그는 못마땅해하면서도 아이의 손길에 이끌려 얌전히 동상에 등을 기대고 선다. 헐레벌떡 내려온 이는 마을에 사는 주민인지 아이에게 아는 채를 한다. 빨리 가야해! 남자가 아이의 손을 붙잡고 달려나간다. 아, 저…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그는 무심한 눈으로 아이와 남자를 보고선 고개를 돌린다. 이내 아이는 계단 위로 사라졌고 그는 어둠속에서 숨을 죽인채 있었다.

 

너희 부모님은 의사였단다. 죽음 앞에선 누구든 똑같다고 말하는 사람이었지, 좋은 사람이었어. 양손을 꽉 쥐고 기도를 올리는 아이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의자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 같았고, 그보다 더 낡은 침대 위에는 얼굴에 온통 붉은 점이 올라온 소녀가 누워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는 거로 보아하니. “…기껏해야 오늘 새벽이겠군.” 그가 중얼거리자 기도문을 읊던 아이의 어깨가 흠칫 떨리더니 고개를 들어 저를 올려다본다. “……당신!!” 소리를 지르려는 것도 잠시, 그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아이에게 속삭인다. 가만히 있어. 그의 손이 소녀의 입 위를 살며시 짓누르다 떨어진다. 그러자 놀랍게도 소녀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아이가 놀라 손을 뻗자 그가 잡아챈다. 아직 완전히 나은 건 아니야. 그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아이의 손을 감싸 쥐고 다른 한손으론 어깨를 잡으며 뒤로 물러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달빛조차 피해가는 방안, 겨우 촛불 하나로 밝히고 있었고 한걸음만 물러나도 사방이 어둠이었다.

 

“당신은…대체 뭐예요?”

 

이름을 가르쳐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그를 부를 때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침대 위에 누워있는 소녀에게서 죽음을 가져간 건 그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소녀는 살 수 있을 것이다. 내일 아침이면 얼굴에 붉은 점도 사라질 테고 열도 내려 썩 괜찮은 상태로 보일 것이다. 그리하면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기도 덕분이라 믿겠지. 아이가 몸을 돌려 저를 바라본다. 그는 지독한 무표정이었으나 어둠 속에선 표정조차 희미했다.

 

“아까 이름 말해줬잖아.”

“…여기선 함부로 이름을 말해선 안 돼요.”

“왜?”

“규칙이에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해?”

 

그는 납득할 수 없단 말투로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와 알고 지낸 건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대체로 아이는 말이 없었고, 질문을 던지면 대답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한 그의 시간은 무한했기에 아이가 고민하는 시간 따위 느긋이 기다릴 수 있었다. 삐딱하게 서서 문에 기대자 아이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보였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저를 보는 눈에는 그만 이 질문을 거둬주길 바라고 있었지만, 그는 냉정한 눈으로 아이를 보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아이가 눈을 내리깔며 말한다.

 

“L, L이라고 불러주세요.”

 

흐음. 그가 몸을 바로 세워 앞으로 다가간다. 숨이 닿을 만치 가까이.

 

“그럼 난 R이라고 불러줘.”

 

입술 위로 말을 건다. L의 뺨이 확 붉어졌다.

 

소녀의 병이 씻은 듯 낫자 아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래봤자 마을 주민들은 스무명 남짓이었지만, 전보다 활발해진 아이를 보며 그가 말한다. 이거 일시적인 거야. 그의 손에서 또 하나의 생명이 죽음을 피해갔다. 아이는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에겐 일시적인 행복이라도 필요해요. 아이의 시선을 따라 그가 어린 소년을 내려다본다. 마을에서 자주 병드는 이는 대체로 어린아이들이었다. 이제 막 태어났거나, 아직 면역력이 떨어지는 아이들. 이곳에 도망쳐서 산 지는 20년 정도라고 들었다. 나를 임신하고 여기로 오신 거죠. 입은 웃고 있었건만 목소리는 전혀 그렇지 못한다. 그는 어린 소년 위로 기도를 올리는 아이의 얼굴을 한번 살폈다가 창밖을 본다.

 

“지상으로 올라가 볼래?”

 

그의 말에 아이가 놀란 눈을 하며 바라보다가 이내,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손을 거두고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마을이야 늘 조용했지만,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아이는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그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걸으니 마을을 벗어났고, 마을을 향해 내려오던 유일한 강줄기도 벗어났다. 가파른 절벽 아래 서자 그가 허리를 잡아 왔다.

 

“무서우면 눈 감아도 돼.”

 

무슨 소린지 몰라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으니 그가 작게 웃는다.

 

“아래를 봐.”

 

그의 말대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발밑이 텅 비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다, 발밑이 텅 빈 게 아니라 제가 하늘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며 그를 뿌리치려는 것도 잠시였다.

 

“내 어깨를 잡고.”

 

남은 한손을 그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는 얼굴 만연에 미소를 띠고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웃음소리만이 아이가 진짜 날고 있다는 것을 실감케했다.

 

“눈을 떠, 나를 봐.”

 

발밑에 푹신한 것이 닿았다. 아이가 천천히 눈을 떠 제 앞의 존재를 확인했다. 새카만, 검은 날개 한 쌍이 그의 등에서 펼쳐졌다. 환한 달빛 아래, 눈으로 희게 덮인 들판 위의 아이.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웃는다. 아이의 표정이 꽤 볼만하다, 저만 보기 아까울 정도였다. 그는 아이의 손을 잡고 눈밭을 걷는다. 걸을 때마다 발밑이 푹푹 꺼지는 아이와 달리 그의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다. 보다 못한 그가 아이의 허리를 손으로 감싸 안고 걷기 시작한다. 아이의 발끝은 그의 손에 이끌려 허공에 떠 있는 수준이었다. 둘은 한참을 걷다가 눈이 거의 쌓이지 않은 나무 밑으로 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온 세상이 눈이 부시도록 하얗게 뒤덮여있었다. 아이가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발끝에 닿은 눈이 신기한지 연신 손으로 어루만진다. 아이의 체온에 눈은 금세 녹고 만다. 그는 구둣발로 다가가 그 앞에 쭈그려 앉는다.

 

“이게 뭔지 알아?”

아이가 고개를 젓는다.

“이건 눈 이라는 거야.”

“눈?”

 

아이가 자기 두 눈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눈(雪)”

 

신기하다. 아이는 두손이 차게 식는 것도 모르고 눈을 만지작거린다. 그는 제가 끼고 있던 두툼한 장갑을 아이의 손에 끼워준다. 한손씩 붙잡고 손가락을 넣으라고 종용한다. 꾸물꾸물 손가락을 넣고는 그를 본다. 그의 얼굴은 추운 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여전히 무표정이다. 아니, 조금 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는 걸치고 있던 망토까지 아이의 어깨에 둘러준다. 추위가 두 사람을 피해가기 시작한다. 눈을 둥글게 만드는 것을 보고는 그가 말한다. 눈사람은 뭔지 알아? 그의 손에 눈이 동그랗게 만들어진다. 작은 눈덩이 위에 그보다 작은 눈덩이를 올려준다. 이게 눈사람이냐는 눈빛에 그는 조금 고민하더니 커프스의 단추를 떼어낸다. 새빨간 루비가 눈사람의 눈을 장식한다. 예쁘다. 아이가 중얼거린다. 메마른 나뭇가지를 뚝 떼어와 코와 팔도 만들어준다. 이게 눈사람이구나. 근데 입이 없어. 아이의 말에 그는 조금 고민하더니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팔찌를 뚝 떼어내 입 모양을 만든다. 아이는 보석의 가치를 몰랐고, 그에겐 차고 넘쳐났다.

 

“이거 가져가도 돼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다시 그곳으로 내려간다고?”

 

가져가도 되냐고, 묻는 건 다시 그 마을로 돌아가겠단 소리야? 그 음침하고 불행한 냄새만 나는 그곳으로 이걸 가져가겠다고? 너도 같이? 그러자 아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야죠우리 집이 거기 있잖아요. 그는 가당치도 않은 말에 눈을 부릅떴다. 마을에 사는 그놈들은 너를 전염병이 우글거리는 방에 가두고 종일 기도만 하게 만들지, 그러다 살아있으면 신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준 덕분이고 네가 죽으면 아무도 울어주지 않을 것이다. 그놈들은 신조차 버린 놈들이니까.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 모두 당연히 이단이라고 생각했다. 지하 마을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신전, 그 누구도 발길조차 주지 않고, 초라하며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신전에 찾아오는 건 아이 하나였다. 부모를 모두 여의고 갈 곳조차 마땅치 않은 어린아이! 그들은 네가 고아라는 것을 핑계 삼아 악마를 숭배하게 했고, 그 결과가 나야. 그들은 내 동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그곳에 마을을 만들고 살아남은 건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이야, 네 부모는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내려왔다가 붙잡히고 만 것이고! 허나 진실은 아이의 미소에 막혀 나오지 못했다.

 

“신님의 동상이 그곳에 남아있잖아요."

 

제가 이토록 빠르게 수긍하는 이였던가. 차오른 분노는 금세 차게 식어 사라졌고, 입가엔 은은한 미소마저 피어올랐다.

“생각해 봤는데, 나를 신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왜요?”
“진짜 신의 화를 살지도 몰라.”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아이가 몸을 일으킨다. 양손에는 보석이 덜렁 박혀있는 비싼 눈사람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는 눈사람의 머리를 다시 제자리로 올려주며 알겠지? 하는 눈짓을 한다. 아이는 잠깐 고민하더니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한다.

“그럼 천사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손으로 씰룩거리는 입가를 쓸어내렸다. 목안이 바짝 타고,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이가 환하게 웃자 그의 심장이 고장난 괘종시계처럼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한다. 머릿속 생각이 엉망진창으로 얽히고설켜 사고를 정지시킨다. 날개가 새카만 천사라, 그가 습관적으로 목을 긁어내린다.   

“그래, 그럼.”

2

기도를 마친 뒤에는 책을 읽었다. 촛불 하나에 세상을 의지하고 그가 가르쳐주는 단어를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아이는 읽고 말하는 데는 능했으나 쓰는 것에는 취약했다. 몇 번이고 낡은 종이에 잉크를 콕콕 찍어가며 글을 쓴다. 책에서 읽었는데 눈은 언젠가 녹는데요. 근데 저건 왜 녹지 않아요? 아이가 루비가 콕콕 박힌 눈사람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는 심드렁하게 말한다. 내가 마법을 걸어놨어. 마법이요?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하긴 마법은 책에도 잘 나오지 않겠지. 그가 보던 책을 덮고는 몸을 일으켜 허공에 손가락을 휘젓는다.

 

“영원히 녹지도, 썩지도, 죽지도 않게 하는 마법.”

 

보라색 불빛이 눈사람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다 사라졌다. 아이가 신기한 듯 뚫어져라 그를 바라본다.

 

“몇천 년이 지나도 안 녹겠네요?”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회색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부딪친다. 그의 구둣발 소리가 동굴 안을 가득 채운다. 뚜벅뚜벅. 흔들림 없이 아이의 앞으로 걸어가 선다.

 

“네게도 마법을 걸어줄까?”

 

일순, 아이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긴, 제아무리 선한 인간이라도 죽음 앞에선 늘 비참하게 스러졌고, 아이라고 하더라도 그럴 것이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선과 악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자신이 산 증인이었다. 천사들은 내게 같은 종족의 수치라고 하였지만 내 존재는 그저 불편한 진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어서 말했으면, 제게 영생을 달라고 영원히 살고 싶다고 딱 한 마디만 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아이에게 제 권한의 일부를 양보하여 영원히 지하와 지상을 오가며 살 수 있을 터였다.

 

“…괜찮아요.”

“왜?”

 

그의 얼굴이 대번 험악하게 구겨졌다. 인간들은 늘 죽음을 두려워하고 영생을 꿈꿔왔다. 불안한 미래와 추하게 늙어갈 스스로를 미워하고 말도 안되는 미신을 만들어내 서로를 죽고 죽였지. 나는 선한 인간을 본 적이 없어, 태초부터 단 한번도! 그의 분노가 지상을 뒤덮고 어둠을 불러왔다. 스산한 바람에 동굴을 비추고 있던 촛불이 금방이라도 꺼질것처럼 흔들렸다

.

“영원한 삶은 얼마나 외롭겠어요…”

 

 

3

아이는 노래를 잘했다. 일평생 노래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거늘 가끔 들리고 가는 이방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이 마을에도 방문객이 있냐는 소리에 아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 다치거나 거동이 불편한 자들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그는 이방인의 존재를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가 하늘을 험담했기 때문이었다. 신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단어에서 그는 인간이 제법 영특하다고 생각했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가장 강한 이가 신이었고,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신의 대리인, 신에 가장 가까운자. 라는 수식언을 붙여놓고 낄낄거리는 천사놈들을 생각하니 우습기 그지없다.

 

“…노래 별로예요?”

 

그가 인상을 쓰고 있자 제 노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아이가 소심하게 말을 걸어온다. 그는 눈을 지긋이 내리깔고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계속해.”

“…눈은 왜 감아요?”

무서워도 제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네 노래는 자장가 같아서 자꾸 졸려.”

“…신도 잠을 자나 보네…”

 

아이의 건방진 투덜거림을 뒤로 넘겨 듣는다. 아이는 영특했다.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알았고, 한번 가르쳐준 건 절대 잊어버리지 않았다. 간혹 천사 중에 제 신도를 가르치는 데 혈안이 되는 녀석이 있었는데, 그 마음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와 지내는 건 꽤 즐거웠으므로 그는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 지상에 머물렀다. 얼굴만 보고 오겠다는 게 하루를 넘겼고, 일주일만 머문다는 게 한 달을 꽉 채웠다. 봄에는 아름다운 꽃을 보러 갔고, 여름에는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러 갔으며 가을에는 세상이 온통 붉었고, 다시 겨울이 왔을 때 아이는 하늘을 나는 것에 더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츄어…”

 

애교 섞인 목소리가 품을 파고든다. 날개까지 꺼내 감싸주었는데도 아이는 몸을 떨며 가슴에 기대온다. 그럴 때면 그는 잠자코 품을 다 내어준다. 봄의 꽃향기도 여름의 햇살도, 가을의 단풍도 겨울의 눈밭도 아이에겐 생소한 것일 텐데 더 멀리 가자는 유혹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얼굴로 저를 볼 때, 그 두 눈이 정말 진실해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문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제멋대로 아이를 끌고 세상을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당장 아이를 데리고 지하세계로 돌아가 영원한 안식을 가질 수도 있었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는 초조해했고, 아이를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으나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왜? 라는 의문은 아이가 잠들고 혼자서 밤을 보낼 때 찾아왔다. 새근새근 잠에 빠진 아이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넘기다가, 동그란 이마를 따라 손가락이 쭈욱 내려가 입술 위에 잠깐 머물 때, 달빛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신들마저 버린 이 장소에서. 몸을 숙여 살포시 입을 맞출때면 금단의 과실에 손을 뻗은 아담과 이브의 결말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 이야기의 끝은 분명 비극일 것이다. 그런데도 놓지 못하는 건 내가 악이기 때문이겠지.

너는 아담이자 이브이고, 또한 금단의 과실이었으며 나는 뱀이었고, 악이었고, 네게 파멸밖에 가져다주지 못한다.

 

 

“잠시 지하에 다녀올 건데…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그의 말에 아이는 고개만 젓는다. 다녀오세요. 몇 번의 권유에도 아이의 대답은 똑같았다. 기다릴 테니 다녀오라는 말. 그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좀 오래 걸릴지도 몰라…….”

 

말끝에서 미련이 뚝뚝 흘러내렸다. 지하세계는 그의 영혼이 힘을 누르고 있음으로써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고, 그의 영혼이 지상으로 떠난 지금 지하의 질서체계는 엉망진창으로 꼬이고 있었다. 한번은 가야지. 하고 생각했던게 일년을 미루고 말았다. 더 지체한다면 지하가 아니라 하늘에서 제게 명령할지도 모른다. 그꼴만은 피하고 싶었다. 피도 섞이지 않은 제 형제가 저를 벌레보듯이 내려다 볼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치솟은 그가 불쑥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낸다.

 

“오지 않으면?”

“네?”

“내가 너무 바빠서 아예 지상에 오지 못하면? 아니, 다시 온다고 해도 그게 몇백년 후라면? 그러면 인간인 넌 뭘 할 수 있지?”

 

웃고 있던 아이의 눈이 갈곳을 잃은채 방황하고 있었다. 당혹감에 사로잡힌 모습에 그가 한숨을 후 내뱉었다.

 

“내가 심술을 부렸어. 미안해.”

 

그가 몸을 일으켜 아이에게 다가가 손등에 살포시 입을 맞췄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여기서 기다릴게요.”

 

한박자 늦은 대답에 그가 작게 웃어 보였다.

근데 천사님이 사라지면 아이들은 어떻게 되나요? 아무래도 아이의 걱정은 저보단 마을 사람들의 안위였을 것이다. 그럴 테지, 그런 점을 좋아한 거였고. 검은 날개가 펼쳐지자 바람 소리가 거세가 났다. “마법을 걸어놨어. 한동안은 괜찮을 거야.” 아이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그가 진짜 모습을 보였다. 길어진 머리카락이 거슬리는 듯 신경질적으로 뒤로 넘긴 그가 지하세계로 내려갔다.

인간 세상에 전쟁이 터졌다. 서로가 이단이라며 가차 없이 칼을 휘둘렀고, 피가 흘렀다. 그건 어른,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이루어졌으며 지하는 악이 탄생한 이래, 가장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4 그가 사라진 지 3년째,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아이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5 그가 사라진 지 5년째, 마법이 풀리기 시작했다.

6 그가 사라진 지 6년째, 마을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 아이는 홀로 노래를 불렀다.

7 그가 사라진 지 7년째, 마을이 다시 붐비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8 그가 사라진 지 10년째, 마을에 폭격이 있었다. 동굴에서 기도하고 있던 아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죽었다.

9 그가 사라진 지 20년째, 나는 늙어가고 있는가?

10 그가 사라진 지 50년째, 그는 왜 돌아오지 않지?

11 그가 사라진 지 100년째, 왜 나는 죽지 않지?

12 아이는 폐허가 된 마을을 혼자 치웠다. 늙고 지치지 않는 몸으로 무른 땅을 찾아 시체를 묻어주는 일을 하였다. 200년째 계속된 전쟁에 시체는 강을 뒤덮고, 산처럼 쌓여서 그 끝이 마치 세상의 끝과 닿아있는 듯 보였다. 몇 번의 전쟁통 속에서도 아이는 살아남았다. 타오르는 불길속에서도, 날카로운 화살비 속에서도. 죽음은 아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나쳤다. 이건 그가 내게 내린 벌일까? 아니면 시험일까? 나는 그에게 무슨 잘못을 했지? 손을 잡지 않은 것이 실수였을까. 영원한 삶은 외롭다고 한게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까. 시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려던찰나 새하얀 천사가 나타났다.

13 전쟁이 끝났다.

 

14

피와 시체로 가득한 강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늘 연기가 피어오르던 회색빛 하늘은 태양이 길을 트고 있었다. 어둠 사이로 빛이 흘러들어오더니 이내 완전히 어둠을 뒤덮고 세상을 밝게 만들었다. 허나 빛 아래 드러난 지상은 더욱 처참하였기에 신조차 비통함에 눈을 감았다. 많은 것들이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전쟁은 늘 어리고 약한 것을 제일 먼저 데려갔으며 사람들의 눈에선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아이가 마을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보름 후였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죽음의 냄새가 마르길 기도하며 마을에 도착했다. 황폐한 바람이 불었다.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마을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의 동상만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고, 그 앞에….

 

“영원한 삶이란 어땠어? 외로웠나?”

 

무표정한 그가 서 있었다. 그날과 같은 옷을 입고서.

 

“외롭고…, 무서웠어요.”

 

그제야 그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퍼진다.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에게 손을 뻗는다. 붙잡은 손에는 이전 같은 온기를 느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의 영혼만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악마인 주제에 네게 마음을 빼앗게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해왔다. *애초에 꺾어들면 내 것인 것을.

 

“…저 지하로 가기 전에 소원이 하나 있어요.”

“말해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목소리에 콧노래가 섞여 흘러나왔으며 맞잡은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생에 지금 같은 기분은 몇 번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전에…스틱스강에 맹세해주세요.”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는 아이의 얼굴에서 어떠한 결심을 읽었으며, 그건 제게 찰나와 같은 삼백년 동안 혼자 고뇌하고 내린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이가 사랑스러웠고, 혼자 내버려 둔 삼백년이란 기간이 인간에게는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허락한 참이었다. 그는 아이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으며 말했다.

 

“스틱스강에 맹세하지. 그 소원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켜 얼굴을 마주보자 아이가 환하게 웃었다.

 

“천사님의 본모습을 보여주세요.”

 

너는, 지금…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그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졌다. 하늘에서 지하로 추락할때도 이토록 비참한 기분을 맛보진 못했다. 한껏 열이 받은 그의 이마에 핏대가 불룩 솟아 올랐으며 어깨를 잡은 두 손에는 힘이 꽉 들어가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취소해.”

“싫어요.”

“당장 소원을 무르고 용서를 빌어.”

“스틱스 강에 한 맹세는 무를수 없다는거 알고 있어요.”

 

인간이란, 이토록 나약하고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지난 삼백년간 무엇이 아이를 변화시켰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태어나길 하얀 날개를 갖고 태어나, 결국 지하로 떨어져 검은 날개의 신으로 군림하게 되었으니. 평생 인간의 마음 같은 걸 헤아릴 방법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너는…왜 자꾸 나를 외롭게 하지? 왜, 왜…단 한 번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네게 영생의 마법을 걸었다. 영원히 늙지도 썩지도 죽지도 못하고, 언젠가 내 곁에 서기만을 기다릴 요량으로. 내 손을 잡아 주기를. 나를…, 나를 사랑하기를!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했나? 내가 큰 기대를 했나? 그때였다. 하늘이 번쩍거렸다. 더는 약속을 지체할 수 없었다. 스틱스는 네 영혼을 흐르지 않는 강물에 집어넣고, 다시 태어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나의 육신은 지옥의 가장 낮은 곳 영원히 타오르는 불길 속 혹은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안에 갇혀 있지만, 스틱스강에 맹세한 그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으니, 특별히 그대에게 권능을 보여주도록 하지, 부디 전지전능한 존재가 그대를 보우하사 아름다운 두 눈을 멀지 않기를, 그대의 사랑스러운 혀가 온전하기를, 그대의 순수한 영혼이 이 땅에 발붙일 수 있기를 기도하지.”

 

그의 등에서 여섯 개의 검은 날개가 솟아났다. 새까맣던 머리카락이 새벽녘에 물든 것처럼 푸른빛을 띠었고, 깜빡거리는 두 눈에는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빛이 흘러나왔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올 때마다 대지는 메마르고, 식물은 생명을 잃고 시들었으며 그의 뒤로 자욱한 안개가 꼈다. 땅 밑에 있던 온갖 생명체들이 도망치기 시작했고, 까마귀들이 낮게 날며 불길한 울음이 울려 퍼졌다.

 

“본래 나는 ‘빛을 가져다주는 자’ 또는 ‘새벽의 밝은 별’이라 불렸지. 한때 모든 천사의 존경과 신의 총애를 받았지만, 그 힘에 도취되고 오만함에 얼룩져 신에게 도전했다. ……결국 그 오만하고 경박한 행동의 대가로 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져 빛도 어둠도 존재하지 않는 오롯한 악에 물들었으니 천사들은 내게 ‘늙은 용’이라 했고, 악마들은 내게 ‘어둠의 귀공자’라 하였으며 인간은 내게 “마왕”이라고 하더군.”

 

아이는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뜰 수도 없었고, 입을 열 수도 없었다. 서서히 힘이 풀리고 앞으로 쓰러지려는 찰나 그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검은 날개가 하늘을 가렸다.

 

“안녕, L.”

 

결국 너는 내게 이름조차 가르쳐주지 않았구나.

아이가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마법을 걸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악마의 힘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는 땅으로 떨어진 아이의 육신을 안아 들고는 매서운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엉망이 되어있는 지상을 오만한 눈으로 내려다보며 제가 한 인간을 파국으로 몰아붙이는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을 한 천사가 떠오른다. K.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린다. 한때 형제였던 저를 지상으로 밀어 오롯한 악에 가둔 천군의 지휘자. 신에 가장 가까운 자.

『늙은 용이여. 끝까지 발악해라, 발버둥 치고 또 좌절해라. 너는 인간을 죽음에 데려다주는 자. 너는 본래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그의 영혼을 산산조각내며, 두 눈과 귀를 멀게 하고, 혀를 잘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하였지 않았느냐. 세상에 악이란 존재는 네가 나타나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름조차 없었다. 그 인간이 마음속에 의심을 품은 건 네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을 죽음으로 내몬건 네 존재 때문이다. 영원히 후회하고 고통받거라. 이건 신 대신 내리는 벌이다.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에 도전한 어리석은 천사의 말로다.』

 

 

4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빛과 어둠이 있었고, 하나로 합쳐졌다. 지하세계라고 해서 어둠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도 달은 떴고, 별들은 반짝였으며 오직 태양만이 달 뒤편에서 나타나지 않고, 옅은 빛만 내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레 스틱스강 위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내딛는 걸음걸음마다 물결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길을 잃은 망자들이 금세 그의 발목을 붙잡으려 따라붙었다. 하지만 가까이 오지 못했다. 그는 악 그 자체였으므로 한낱 망자들이 붙잡을 수 없었다. 허나 망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가 아니라 품에 안겨있는 인간이었다. 숨이 붙어 있는 인간. “어디로…가야 하지.” 그가 중얼거렸다. 지하의 모든 곳이 그의 집과 다름없었으나 아이를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는 곧 숨이 멎을 것이고 영혼은 천상에 사로잡혀 영영 내려오지 못하겠지,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 죽음을 관장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붙잡아 두고 있는 게 제 조악한 욕심이라는 것을 안다. 하늘을 향한 질투이자 오만이고, 또 다른 도전이었다.

만약, 네게 사랑한다고 말했다면 이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까? 너는 내 손을 잡아 줬을까? 외로움을 덜어 줬을까? 그가 아이의 몸뚱이를 제가 누워있었던 관에 눕히곤 조심스레 입가를 닦아냈다. 저주를 받은 인간에게는 검은 피가 흐른다고 하던데 이런 식으로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군.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곧 아이의 숨이 멎었다. 그 순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발끝에서부터 울컥 올라왔다. 그것은 단숨에 그를 집어삼키곤 숨도 쉬지 못하게 만들었으나 그는 죽지 못했다. 몇백, 몇천년 동안 숨을 참는다고 해도 그는 죽지 못한다. 나는 죽지 못할 것이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 내게 외로움이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의찬미 완(完)

 

 

 

*정규화 꽃을 위한 헌시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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