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6

luculéntus abýssus – 아름다운 심연

I

9

꿀시럽
@__ssirreup
  • Twitter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는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키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의 직무를 통하여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이 교우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luculéntus abýssus – 아름다운 심연

 

불규칙적으로 창을 때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 밖만 하염없이 바라보던 택운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서는 눕다시피 기대어있던 소파에서 일어났다. 시선이 검은 천의 끝자락을 따라 올라가다 부쩍 살이 내렸는지 더 날렵해진 재환의 얼굴에 머물렀다. 준비가 끝났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방을 나섰다. 짙은 녹색 카페트가 깔린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꺾으니 재환의 방이 나왔다. 임시로 묵고 있어 옮긴 지 얼마 안 된 방이긴 하나 평소보다 유독 진한 것 같은 향수 냄새가 선명하게 택운의 코 끝에 맴돌았다. 침대 앞에 깔린 자수가 놓인 카페트 위에 조용히 무릎을 꿇은 택운은 말 없이 십자가를 손에 드는 재환에게 말했다.

“향수 너무 많이 뿌린 것 같다.”

“이거 향수 아니예요.”

몇 번이고 듣던 뻔한 말투가 오늘은 조금 들떠 보였다. 전혀 그럴 기분이 아니라 살짝 짜증이 난 택운은 재환에게 어서 진행이나 하라며 재촉했다. 방문을 조금 열고 초를 켠 재환은 택운의 앞에 섰다. 택운의 손끝이 그의 어깨 왼쪽을, 오른쪽을, 머리 위와 명치께를 지나쳐 반대쪽 손과 겹쳐졌다. 재환이 입을 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어 주시니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으며 그동안 지은 죄를 사실대로 고백하십시오.”

“....아멘.”

“....”

“고해한 지 1달이 됩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고 원망하여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저를 벌하소서.

 

++++

 

택운이 가진 짐이라고는 여행용 가방 하나 밖에 없었다. 돈도 카드도 없는 가방에서 누가 택운의 물건 계속 훔쳐가는 일은 예상치 못한 사건이었다. 학교를 떠날 때 신부님에게 받았던 묵주, 잘 보지도 않는 작은 성경책,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한 것들의 행방은 묘연하였다. 그것들은 그저 택운에게 본인이 신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던 도구였던지라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어느 호기심 많은 아이의 장난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버렸다. 자신이 애지중지 아꼈던 십자가 목걸이가 사라진 날, 택운은 그 아이를 찾아내서 그동안 잃어버렸던 것들을 돌려받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고아원에서 손님은 늘 관심의 대상이라지만, 자신의 물건이 한낱 장난감으로 취급당하는 것은 영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택운이 되찾기로 마음먹은 것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괴생명체, 아니, 영혼도 귀신도 신도 아닌 그것을 담기에는 너무나 작고 약했던 그릇은 금이 가고 결국 깨지고야 말았다. 아침마다 마주보며 웃던 그 얼굴에 피를 묻히고, 신의 뜻에 따라 살리고자 애썼으나 끝내 죽어버린 그 얼굴에 택운의 세상은 무너지고 말았다. 기도와 신념은 눈물과 원망이 되어 그를 옥죄었다. 보다못한 재환이 그가 거르던 기도를 드리자며 손을 잡아 이끌었으나 한달이 지난 지금 자신에게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택운 자신이 가장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 기도가 끝나고 세 번째, 네 번째 기도를 하여도 택운의 세상은 고개를 들지 않을 것이다. 신을 저버린 자에게 자비는 없다는,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더 이상 예전같이 살아갈 수 없었다.

++++

기도문을 읽던 재환이 몸을 잘게 떨며 눈물을 떨구는 택운을 내려다보았다. 기도문 읽기를 멈춘 재환은 택운이 진정될 때까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은 하지 않았다. 금새 눈물을 닦아낸 택운은 일어나더니 재환을 보며 말했다.

“오늘도 안될 것 같아. 다음에 하자, 다음에.”

“다음에 하면 해결이 되나요?”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던 택운은 재환의 목소리에 멈춰섰다. 달랐다. 해결이 될 리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택운의 정신을 해쳐먹는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너무나도 쉽게 나오는 대답임에도 택운은 감히 재환을 쳐다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함께해온 후배에 대한 미안함인지, 마음 한구석에서 기어나오는 묘한 이질감인지 모를 감정에 심장이 튀어나올 듯 날뛰었다. 깊게 심호흡을 한 택운은 고개를 돌려 재환을 바라보았다. 그 말 한마디가 너무나도 어려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끼는 내 동생, 내 후배. 어쩌면 재환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 가장 가까이서 모든 과정을 지켜본 장본인이 아닌가. 그럼에도 쉬이 나오지 않는 말에 택운이 필사적으로 마주친 재환의 눈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택운이 늘 좋아했던 그 맑고 잔잔한 평화.

“다음에, 그 다음에 또 하면, 형이 좀 괜찮아지나요?”

“...”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되잖아요. 내가 형이 그 고생하는 걸 다 지켜봤는데.”

“그건 맞아. 맞는데, “

파리 한 마리가 날아와 재환의 등 뒤 벽에 달라붙었다. 소리는 조금도 내지 않았다. 적막 속에서 택운이 입을 열었다.

“재환아, 내가, 난....”

다 털어놓으라는 표정. 재환의 작은 몸짓 한번에 그의 향이 훅 끼쳤다. 택운은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내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그냥 다...”

“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무의식적으로 위아래로 살짝 끄덕여진 택운의 고개에 재환은 속으로 비웃음을 삼켰다. 이리도 나약한 존재이면서 그동안 저에게 괜찮은 척, 태연한 척은 다 했던 건지. 마른 입술을 혀로 핥은 재환이 말을 이어나갔다.

“꿈이었으면 좋겠고, 믿어왔던 무언가가 부질없게 느껴지죠?”

재환이 택운에게 한걸음 다가갔다. 강하게 다가오는 단 향.

“형은 최선을 다했는데, 왜 간절한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택운의 시선을 한순간도 피하지 않고 걸어오던 재환이 택운과 한뼘 차이를 두고 멈춰섰다.

“형은 왜 그런 것 같아요?”

“.....”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근데 형이 얄팍한 신념으로 소홀히 노력한 건 아니잖아요.”

“....”

무언가를 말하려다 입을 다물어버리는 택운에 재환이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제 계획대로였다. 택운은 더 이상 신을 믿지 않았다.

“형. 형은 어떻게 생각해요?”

“...뭘?”

“하늘에서 형의 기도를 들어줬다고 생각해요?”

말이 없는 택운에 재환은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았다. 택운이 바라보는 재환의 눈은 맑고 잔잔했다. 맑은 물일수록 밑바닥이 잘 보인다고 했다. 재환의 눈동자를 유영하던 택운은 결국에는 보고야 말았다. 폐를 잠식시킬만큼 진득해진 향과 깊은 심연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날개돋친 그 모습에 택운이 뒷걸음질 쳤다. 제 발로 악귀의 소굴에 들어왔구나. 내가, 내가 조금 더 주위를 살폈어야 했는데. 온몸이 굳어버린 택운을 재환이 억세게 붙잡았다. 항상 미동도 없던 그 눈이 드물게 반짝이고 있었다.

“대답 안해줄거예요?”

택운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재환이 그에게 말했다.

“정 확신이 안 서면 내가 도와줄게요.”

문을 잠군 재환이 그 열쇠를 창 밖으로 던졌다. 탁상 위 촛불에 비친 재환의 눈은 깊고 어두웠다. 욕망에 반짝이는 두눈을 바라본 택운이 뒷걸음질치다 막다른 곳에 멈춰섰다. 방안을 휘젓는 짙은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옷자락을 잡아오는 재환에 택운은 굳어버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 그대로 눈을 감고 말았다. 간신히 매달려있던 끈이 끊어지고, 그대로 나락으로 추락해버리고 말았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