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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ce Hoped

I

9

루소
@E_dean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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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빛이 스며들지 못한 지하에는 바람만이 닿았다. 남자는 서늘함을 품고 있는 벽을 손으로 쓸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작은 등불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음습한 복도 끝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나무는 썩고 손잡이는 녹슨 낡은 문. 남자의 손이 천천히 그 문을 열었다.

겨우 창틀을 넘은 달빛 한 줄기가 방 한가운데에 초라하게 놓인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침대 위에 달랑 몸만을 뉘인 사내의 동그란 귀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반응했다. 바닥에 고인 밤이슬을 밟는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은 검붉은 자국이 얼룩덜룩한 천에 가려져 있었다.

“안녕.”

“…….”

“네 소원을 들어주러 왔어.”

“……내 소원?”

사내의 목소리는 아주 낮았고, 아주 작았다. 하지만 남자는 그의 목소리를 선명히 들을 수 있었다. 아주 먼 곳에서부터 그 목소리를 듣고 왔으니까.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잠시 후에야 사내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말했다.

“응. 네가 나한테 빈 소원.”

“내 소원이 뭔데?”

“나도 몰라. 네가 기억해내기 전까지는 나도 알 수 없으니까.”

“기억이……, 안 나.”

“괜찮아. 기억이 나면, 그 때 말해.”

다시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났다.

“잠깐만.”

사내의 손이 다급히 허공을 더듬는 것을 본 남자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기다리던 사내는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조심스레 물었다.

“내일도 올 거야?”

“응. 네 기억이 날 때까지.”

작게 끄덕여지는 고개에 남자가 뒤를 돌았다. 물기 어린 발걸음이 몇 걸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느리고 길게 이어졌다.

“내일 올게.”

사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문이 닫히고, 이불도 없이 얇은 옷만 걸친 사내는 몸을 끌어안으며 다시 얕은 잠을 청했다.

 

 

 

 

 

*

 

 

 

 

남자가 방 안에 들어섰을 때 사내는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달빛을 향해 앉아있던 사내가 발걸음 소리에 휙 뒤돌았다.

“……너야?”

“응.”

바람소리를 내며 웃은 사내가 다리를 끌어올려 돌아앉으며 제 옆을 비웠다. 하지만 남자는 그저 침대 앞에 서서 사내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름 알려줘. 방금,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했거든.”

“라비.”

“……라비.”

사내의 입 속에서 한 번 더 굴려지는 제 이름을 들은 라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다리를 침대 아래로 내려 살랑거리던 사내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내 이름은 안 묻네.”

“알 필요가 없으니까. 소원은, 기억났어?”

“아니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대답한 사내가 벌렁 침대로 누웠다. 낡은 스프링이 내는 소리가 힘겹게 들렸다. 그가 몸을 둥글게 말며 라비의 목소리가 나오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나, 이야기 들려주면 안 돼?”

“무슨 이야기?”

“으음……. 그냥, 아무 이야기. 여기 이름은 뭔지, 바깥은 어떤지, 오늘 날씨는 좋았는지 이런 거.”

“이름? 그런 거 몰라. 밖은 밤이고, 날씨도 안 보여. 여기 창은 너무 작아서 바깥이 보이지 않으니까.”

“창문이 작구나. 어차피 밖은 안 보였겠네, 아쉽다……. 아니, 다른 이야기는 없어? 너는 오면서 여러 가지 봤을 거 아니야.”

“여기 오는 길은 까만 돌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꼭 이 건물 안 말고, 바깥 말이야. 이야기를 하다보면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제 무릎을 더욱 끌어안는 사내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옆머리를 긁적이던 라비는 결국 한숨을 쉬며 방을 빠져나왔다.

 

그 다음 날 밤, 사내는 잠들어 있었다. 문을 닫고 들어와 사내의 앞에 선 라비는 손을 얼굴 앞에 모으고 색색거리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사내는 쏟아지고 있는 달빛에 물들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새하얬다. 몸을 둥글게 말고 있지만 꽤 커보였던 키에 비해 작은 손이, 찢어지고 베인 흉터로 가득했다. 오늘 새로이 새겨진 것처럼 아직도 핏망울이 맺혀있는 상처도 있었다. 눈썹을 올려 뜬 라비가 천천히 몸을 내렸다. 무릎을 꿇어 사내의 얼굴 앞까지 눈높이를 내리자 눈밭 같은 얼굴에 묶여있는 더러운 천이 더욱 눈에 띄었다. 라비의 손이 천의 매듭을 향했다. 검은 장갑의 끝이 닿았을 때, 사내가 조용히 속삭였다.

“……풀면 안 돼. 보면 안 된다고 했어.”

천을 푼다고 해도 사내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테지만 라비는 그저 손을 거두고 다시 몸을 일으켰다. 애초에 자신이 그것에 손을 댄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침대 옆 구석에 놓여있는 커다란 통에 앉은 라비가 잠에서 완전히 깬 건지 자리에서 일어난 사내에게 말했다.

“여기, 도시 이름은 제이윅이야.”

“응?”

“궁금하다며. 도시 이름은 제이윅이고, 이 성 밖에는 아무 것도 없어. 오늘은 비가 오고 있고, 어제도 비가 왔어.”

“비 냄새였구나, 그게. 지금 들리는 이것도 비 소리고.”

혼잣말을 한 사내가 옆으로 흔들던 몸을 멈추었다. 사내의 얼굴이 가만히 창가를 향한다. 라비는 그가 눈을 감고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작게 벌어져있던 사내의 입이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그러자 마른 볼에 두 개의 골짜기가 폭 패었다. 사내가 말간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기 전까지, 라비는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뭐야. 그게 끝이야?”

“네가 물어본 건 이게 다잖아.”

“시시하네.”

사내가 입술을 쭉 내밀자 패었던 골이 다시 차올랐다. 보조개가 사라진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라비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네 이야기를 해봐.”

“내 이야기……?”

“나한테 들려달라고 하지 말고, 네가 말 해보라고. 그럼 더 기억나기 쉬울 거 아냐.”

“아아.”

그렇네, 하며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잠시 말을 고르는 것처럼 고심했다. 입술을 옆으로 늘리는 행동에 또 볼에 쏙 패었다 사라지는 것이 있었다. 라비는 하마터면 자신이 물어놓고 그의 말을 듣지 못할 뻔 했다.

“나는, 나는……. 사실 이 방에 들어오고, 나가는 것 말고는 잘 기억이 안 나. 내가 이 방 밖에서 지낸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가끔 무슨 약을 주는데……, 그걸 먹으면 어제가 기억이 안 나거든. 기억해보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러면…….”

조곤조곤 읊어지던 사내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말을 내뱉으며 움직이는 입술을 보던 라비의 눈이 덜덜 떨기 시작한 손으로 향했다. 사내는 딱딱한 매트리스의 얇은 커버를 자꾸만 손톱으로 긁으며 그러쥐었다. 통에서 일어난 라비가 침대로 향했다. 눈에 보이도록 떠는 사내의 손 위로,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덮어졌다.

“그만 얘기해.”

“…….”

“내일 다시 올게. 내일은 기억이 날 수도 있겠지.”

사내가 대답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지만 라비는 가만히 손을 떼지 않은 채 기다렸다. 그의 시선이 사내의 볼을 향해 있었다. 입술을 꾸욱 말아 문 사내의 볼에 다시 콕 팬 그것에. 왜인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내는 누구보다 밝고 환한 웃음을 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볼 수 있을까.”

“응?”

그런 말을 해버린 것도 뱉고 나서야 자각할 수 있었다. 사내가 라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라비는 대답 대신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덮고 있던 손이 사라지자 허전함으로 남아버린 감촉을 대신하기 위해 사내가 무릎을 끌어 모았다.

“뭐야. 말을 하다 마냐.”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사내는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질 않자 다시 얼굴을 들었다.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라비, 아직 안 갔어? 거기 있어?”

대답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았다. 사내는 무릎 위에 턱을 괴고 손가락으로 톡톡, 제 손목을 두드렸다. 옆으로 갸웃거리는 고개를 보던 라비가 조금 후에 물었다.

“이름이 뭐야?”

“내 이름? 필요 없다고 했잖아.”

볼멘 투를 하면서도 사내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움푹 패인 보조개가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이홍빈.”

“……이홍빈.”

홍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고 나직이 말한 라비가 방을 나섰다. 문이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드디어 들렸다. 하지만 홍빈은 그대로 문간을 바라봤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눕혔다.

 

 

다음 날 밤, 라비가 찾아갔을 때 방은 텅 비어있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항상 홍빈이 있던 침대 위에서 기다려보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달빛이 서서히 온기를 띠기 시작할 때까지 라비는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한 줄기 겨우 새어 들어오는 햇빛이 문까지 뻗어지자 그제야 그는 일어났다. 곧 빛의 시간이 오니 달이 비추는 곳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문으로 향하던 그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침대 위에는 홍빈의 눈을 가리고 있던 얼룩진 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달이 두 번 뜨고 졌다. 라비가 방에 들어서자 침대 위에 홍빈이 누워 있었다. 얇은 이불을 덮은 몸은 너무 미세하게 오르고 내려서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에게 작기만 한 이불이 차마 덮어주지 못한 발목이 엉망으로 비틀려 있었다. 한참이나, 서있기만 하던 라비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발소리도 나지 않았는데 홍빈이 문득 뒤를 돌아봤다.

“……라비?”

“응.”

조용히 돌아오는 대답에 홍빈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혹시 어제도 왔어?”

“응.”

“그럼 그 전날에도?”

대답 대신 고개가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홍빈이 한층 더 환히 웃었다.

“기다렸겠네.”

“……응.”

보조개가 팬 얼굴이 물기로 얼룩져있었다. 그것을 닦아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라비는 대신 허공을 더듬는 손을 잡아주었다.

“미안, 기다려줬는데 나 아직도 기억 안 났어.”

“괜찮아.”

“뭐했어, 이곳에서?”

고개를 젓고 싶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았노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너를 찾아 이곳을 돌아다니는 어리석은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고, 더 깊고 어슥한 아래에서 울부짖고 있는 너를 보지 못했다고.

하지만 라비는 어제 자신에게 애타게 소원을 빌고 있는 홍빈을 보았고, 쏟아져 내리는 그의 기억을 피할 수 없었다. 처음 홍빈의 소원을 들었던 날 또한 .

“한 번도 속세의 것을 눈에 담지 않은 검은 눈과 검은 머리의 이방인을 준비했으니, 사탄이시여……!”

홍빈의 피로 그린 알 수 없는 문양이 방 안 가득 휘갈겨져 있었다. 붉게 물든 천으로 입이 틀어 막힌 홍빈이 몸부림칠 때마다, 그를 둘러싼 이들이 더욱 크게 몸을 흔들며 소리쳤다.

“부디 이 몸에 깃들어 저희를 구원해주시옵소서!”

끝이 보이지 않는 내전에,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방치 속에 사람들은 어긋난 믿음을 만들어 그것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좁은 방에서 평생을 산 이유도, 그들이 아이의 눈을 멀게 한 것도 오로지 그 그릇된 신념 때문이었다. 그의 고통이 자신들을 고원해줄 거라는 믿음. 그가 자라면 자랄수록 고통은 견디기 힘들어졌고 하루를 약으로 지우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기억되지 못하는 밤마다 홍빈은 같은 소원을 빌고, 또 빌었다.

그리고 성년이 되기 보름 전의 밤. 자신의 피 웅덩이 한 가운데에서 홍빈은 그들이 그리 고대하던 어둠에서 태어난 이에게 자신의 염원을 전하는 데에 성공했다.

‘제발, 제발……. 이들이 그렇게 간절히 찾는 사탄에게 비나오니…….’

“오늘도 비 와?”

‘제 영혼이든, 무엇이든 가져가도 좋아요.’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제발, 제발…….’

“응? 말해 봐. 오늘도 비가 오냐니까.”

“…….”

“왜 아무 말도 안 해. 말 안 해주면 난 모른단 말야.”

“응, 비 와.”

어제도 비가 왔어. 이곳은 매일 비가 와. 이곳 인간들은 그것도 하늘의 저주라고, 무언가를 바쳐야 하늘이 용서해줄 거라고 믿어. 차마 꺼낼 수 없는 대답들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손을 홍빈이 다시 고쳐 잡았다. 한 쪽으로 쏟아진 앞머리 덕에 찌뿌둥한 눈썹이 보였다. 그 아래로 향하던 손을 깨닫고 다시 거두어야 했다. 저 천을 풀고 싶었던 이유가 생각났다. 가려져 있을 눈이 보고 싶었다.

라비가 잡힌 손을 빼냈다.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따라오는 홍빈의 손을 두고 그가 침대에서 점점 멀어졌다.

“라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여지없이 그 자리에 설 수밖에 없었다.

“내일도 올 거야? 내일은 소원이 기억이 날 수도 있잖아.”

라비가 뒤돌아 웅크리고 있는 등을 바라보았다. 바들바들 떠는 그 등이 끊임없이 빌었던 소원이 그를 맴돌았다.

‘제발 저를 죽여주세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그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홍빈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말해야 했다.

“나, 네 소원 못 들어줘.”

“……왜?”

망연한 목소리가 되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낡은 문이 끼익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적막을 기다리던 홍빈이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럽게 일그러졌던 눈썹이 그 아래로 숨어버렸다.

 

 

 

 

*

 

 

 

 

라비의 손에 들린 모래시계에는 떨어질 모래가 몇 알 남지 않았다. 거꾸로 놓아 보아도 순리대로 흐르기만 하는 그것을 빤히 보던 라비가 다시 원래대로 뒤집었다. 다가온 켄이 그의 손에서 모래시계를 거칠게 빼갔다.

“이해가 안 간다.”

“뭐가.”

“모래 몇 알 남지도 않은 거 안 보여? 이런 운명을 가진 인간 때문에 왜 신의 사자 직까지 버려가면서 권능을 쓰려고 해?”

“나도 잘 모르겠어.”

남은 모래알 중 하나가 아주 천천히, 모래시계의 허리를 빠져나왔다. 라비는 홍빈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지금에서야 했다.

“그냥,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미친놈.”

가차 없는 레오의 대답에 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켄의 미간에 깊게 패인 골짜기를 보자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 모습에 또 작게 웃는 라비를 보며, 엔이 조용히 말했다.

“……계약자가 아닌 다른 인간에게 해를 가하면, 심장이 불타 없어지고 업보에 묶일 거야. 알고 있지?”

“그 대신 내 업보는 그 아이가 되겠지.”

“그 아이는 널 다음 생에서 만나도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테고.”

“하지만 난 그 아이의 다음 생을 보고, 기억할 수 있잖아.”

그의 손이 또 하나의 모래가 떨어지고 있는 모래시계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그 다음, 또 다음……. 셀 수 없는 다음이 쌓여서 업보를 지우고 나면, 아마 연이 닿을 수도 있겠지.”

“그게 네가 살아온 만큼이나 긴 시간이 된다고 해도?”

“그것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울컥 소리치려는 켄을 막으며, 레오가 모래시계를 내밀었다.

“달 떴어. 얼른 가. 남은 모래의 시간이 얼마나 되는 지도 우리는 모르잖아.”

그 사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위 칸을 보고 라비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남아있는 것은 눈으로 셀 수 있는 정도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뒤돌아 인사를 건네고, 검푸른 바람이 훅 불어오자 그 자리에는 텅 빈 밤하늘만이 남았다.

 

 

 

 

*

 

 

 

 

창이 크게 달린 방에는 수많은 이들이 제단을 둘러싸고 있었다. 제단의 대리석을 타고 흥건히 고인 피가 아래로 뚝뚝 흘렀다. 커다란 제단을 따라 흐르는 피가 라비의 옷자락까지 물들였다. 이마를 땅바닥에 처박은 채 뇌까리던 신도들이, 폐쇄된 이 곳에서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소리쳤다.

“오, 오셨다……! 오셨어!”

제단 위에 누워있는 홍빈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평소보다 배는 하얗게 보였다. 장갑을 벗은 라비가 천천히 홍빈의 눈으로 손을 향했다. 천으로 가려져 있지 않은 눈은 일그러진 흉이 붙어있었다. 잠시 망설이다 닿은 손이 홍빈의 얼굴을 쓰다듬자, 붉은 흉터들이 사라져갔다. 팔목에 남아 있던 푸른 멍들도, 비틀어진 채로 흉하게 부어올랐던 발목도 제 형태를 되찾았다. 옆구리 깊숙이 박혀있던 은색 단도가 천천히 빠져나오고, 피가 쏟아져 나오던 상처도 아물었다.

“아, 사탄이시여……! 그 자의 죽음을 받고, 저희를 구원해주소서!”

아득. 이를 가는 소리가 입 안을 울렸다. 제단의 광경을 지켜보며 경탄을 외치던 이들이, 저마다 어딘가를 붙잡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불에 일그러지는 눈가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는 이도 있었고, 기괴하게 부러지는 발목을 쥐는 이도, 갑자기 팔을 가로지르는 자상刺傷에 피를 쏟는 이도 있었다. 하나둘씩 바닥에 쓰러지는 신도가 늘어갈 때마다 그 모습을 똑똑히 담고 있는 라비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칠흑처럼 검은 옷이 머금은 홍빈의 피가 번진 것처럼 입가에서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홍빈의 몸에 새겼던 흔적들을 되돌려 주었을 때 눈동자에 일렁이던 붉은 빛이 넘쳐흘렀다. 그 한 방울이 홍빈의 볼로 떨어졌다. 감겨있던 그의 눈이 설핏 찡그려지더니, 천천히 뜨였다.

“……아.”

홍빈의 눈앞에 넓은 정원이 펼쳐졌다. 그가 제단이 아닌 포근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흥건한 붉은 웅덩이 대신 푸른 잔디밭이 보였고, 살려달라는 비명 대신 고요한 풀벌레 소리만이 들렸다.

처음 보는 풍경을 눈에 차곡차곡 담던 홍빈이 라비를 올려다보았다. 권능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몸이 울컥 피를 토했지만 홍빈에게는 그 모습마저 평온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이렇게 생겼었구나.”

“…….”

“근데 이상하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나고 멋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슬프지.”

“……그러게, 왜 그럴까.”

흐르는 붉은 눈물도, 토해내는 피도 너에겐 보이지 않을 텐데 왜 슬플까, 너는. 라비가 자신에게 뻗어지는 손을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홍빈의 손이 닿는 것까지 아무렇지 않게 손 볼 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그가 옆에 놓인 모래시계를 곁눈질 했다. 마지막 한 알. 조금만 더 버티면 됐다.

홍빈이 조금 옆으로 비켜 앉으며 자신의 옆 자리를 두드렸다. 그마저 거절할 수는 없었다. 라비가 옆에 앉기 무섭게 풀썩 그 위로 누워버리는 머리를 밀어내지도 못하고, 그저 당황한 손이 공중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작은 손이 꼬물꼬물 움직여 그 손을 잡더니 허벅지 위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눈앞에서 곧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홍빈은 그 끝에 번져있는 검붉은 자국들을 보았다. 그가 슬핏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응.”

“이게 내 소원이었어? 바깥 보는 거?”

“아니. 이건 그냥……, 내가 바라는 거.”

“흐흥, 그게 뭐야. 이상해.”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지만, 웃을 때마다 전해지는 떨림이 좋았다. 손을 만지는 홍빈의 움직임이 서서히 느려졌다. 모래시계의 마지막 모래가 수북한 더미에 닿기 직전이었다.

라비가 스르륵 빠져나가려는 손을 다시 고쳐 잡았다. 힘없이 딸려오는 손을 당겨 젖은 입술에 가만히 맞추자 흰 피부에 다시 붉은 자국이 남았다.

“다음에 다시 올게. 그 때는, 아무 것도 기억 안 해도 돼.”

속삭이는 소리에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쌓여 버린 모래만큼이나 무거운 눈꺼풀은 감기고 말았다. 모래시계가 쩌적, 하고 금이 가더니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반짝이는 모래알들과 함께 푸른 잔디밭도, 고요한 풀벌레 소리도 모두 사라졌다. 맞잡고 있던 손도, 베고 있던 허벅지도, 내려다보던 그도 모두 안개처럼 흩어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제단 위에 달빛을 받고 있는 홍빈의 감은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

 

 

 

 

철이 끝나가는 매미 울음소리가 악다구니를 부렸다. 농구장에서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공을 가열차게 쫓아다니던 남학생 하나가 높게 튀어 오르는 순간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핸드폰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무언가 박살나는 소리가 선명히 퍼졌다.

“헉……!”

“미친, 소리 대박이었어. 액정 나간 거 아냐?”

“그러게 왜 폰을 들고 나왔냐? 우리처럼 다 과방에 두고 오지.”

한 마디씩 거드는 소리들을 싸그리 무시한 남학생이 그저 핸드폰을 손에 들고 동동 발을 굴렀다.

“아, 나 곧 조모임 연락해야 하는데. 안 켜져, 아나 진짜.”

두드려도 보고, 흔들어도 봤지만 묵묵부답인 핸드폰을 향해 간절히 부탁까지 하던 남학생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야, 잠깐만.”

농구장을 빠져나가는 남학생을 두고 다시 경기는 시작 됐고, 그는 벤치에 앉아있는 남자 앞으로 달려갔다.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남자의 눈이, 액정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에 크게 뜨였다.

“저기, 저기요.”

고개를 들자 농구복 앞 편에 흰 자수로 박혀 있는 이름이 보였다.

“저 서양학과 1-학번 이홍빈이거든요. 제가 지금 연락을 해야 하는 게 있는데, 폰이 고장이 나서…….”

검고 반질반질한 눈은 햇빛을 등지고 있어도 반짝거리는 윤이 났다. 운동을 하느라 약간 붉게 상기 된 뺨이 오르며 그가 개구지게 웃어보였다.

“제가 커피 한 잔 사드릴게요. 핸드폰 한번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눈을 접으며 웃던 홍빈의 얼굴이 당황에 굳어갔다. 툭, 투둑. 핸드폰 액정으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히 남자의 손을 잡았다가, 화들짝 떨어졌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저기……. 왜, 왜 우세요? 제가 뭘 잘못……. 저기, 저기요. 사람들이 쳐다보는……. 아, 뭐가! 나 아무 것도 안 했어! 저기, 아 미치겠네. 일단 폰 좀 들고 이리 와 봐요.”

자신을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친구들에게 빽 소리를 지른 홍빈이 일단 남자의 손과 핸드폰을 한꺼번에 잡고 일으켰다. 다급히 경보하는 그를 따라가자 등판에 더 큼지막하게 써 있는 이름 석 자가 보였다. 이홍빈. 이름을 작게 되새긴 그가 뒤늦게 웃음을 띠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사람이, 뒤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웃는 목소리에 홍빈의 얼굴이 세차게 구겨졌다. 하지만 일단 급한 대로 남자의 손을 놓지 않은 그는 바로 보이는 정원으로 향했다. 여름 잔디가 어제까지 내린 비를 촉촉하게 머금어 풀 향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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