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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realistic

얼음

@ICE_LXD_VIVID

언제나 태풍의 눈은 고요했다.

네 눈에 비친 내 모습에서 이질적인 것을 느꼈음에도 고요함을 좇았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마저 너는, 아름다웠다.

 

단조롭고 밋밋한 일상의 반복, 그 틈에 네가 불어닥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Unrealistic (Over and Over)



 

정택운 × 김원식





 

1



 

택운은 새벽의 공기를 좋아했다.

서늘한 도시의 공기는 제 빛깔을 잃지 않은 채 어슴푸레하게 빛나고 있었고, 달빛이 비쳐낸 택운의 손등은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모든 반사회적인 행동들은 처음이 무섭고 어렵게 느껴질 뿐, 수없이 반복한다면 삶을 옥죄던 죄책감과 그에 따른 적잖던 충격들에 대해 점점 무뎌지는 것이 사람의 뇌였다.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그럼에도 감각이 무뎌져선 안 되는 현실. 하지만 지금 같은 새벽은 무신경해지기 일쑤였다. 택운은 흐릿해져 가는 시야에 애써 아랫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좌우로 흔들었다.

털썩-,

막다른 골목길임이 분명할 방향에서 무언가 추락하며 바닥과 부딪힌 소리가 났다. 택운은 곧바로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곤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구둣발 소리를 내며 다가섰다.

 

분명, 이 시간엔 사람이 다니지 못할 텐데?

 

이곳은 택운의 구역이었지만, 택운조차도 유달리 해결책이 없을 만큼 특히나 치안이 좋지 못한 곳이었다. 경찰은 물론, 세력권을 잡고 있는 택운의 조직에서도 언제나 예의주시할 정도로. 애당초 경찰은 택운의 조직에 치안 유지를 조건으로 내세워 갖은 범죄를 눈감아주고 있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택운은 흐릿한 달빛에 의존하여 구두코를 따라 들어 올려 보인 시선 끝에 펼쳐진 것은 한 남자가 담장에 기대앉아있는 모습이었다. 남자는 택운의 구둣발 소리를 들었는지 한 손엔 급하게 잡은듯한 모양새의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택운은 순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깨달았다. 뼈에 아로새겨진, 위험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직감. 남자의 손에 들린 것이 나이프가 아닌 저와 같은 권총이었다면 이 새벽에 총격전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자는 택운의 발치에서부터 제가 담겨있을 눈동자까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은색의 총구가 제 머리를 겨누고 있단 사실까지 알아차린 뒤에는 손을 들어 올려 보이며 피식 웃었다. 남자가 손을 들어 올리며 떨군 나이프는 검은색으로 문양이 각인되어있었고 택운이 여태껏 보지 못한, 특이한 문양에 눈길을 주며 총구를 내리고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당신, 뭐야.”

“누구인지, 알게 되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내 구역이니까. 적어도 지금 당장의 죽음을 면할 순 있겠지.”

“라비.”

“라비?”

“다들 그렇게 날 부르니까. 당신도 그리하도록 해.”

“웃기는 놈이네, 라비? 그래, 라비. 해가 뜨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가도록 해. 녀석들은 앞뒤 가리지 않아. 난 당신이 어느 소속이고 뭘 하는지 관심 없어. 이 새벽에 날 만난 걸 다행으로 여겨. 그리고, 나이프. 잡는 법 잘 모르는 것 같더라.”

“… 신경 꺼. 당신도 이름 알려줘.”

“레오.”

“권총에 총알이 장전되지 않은 것쯤은 알고 있어. 레오-, 그럼 또 만나.”

 

라비라고 자신을 칭한 남자는 택운이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눈을 감았다 뜨자 사라져있었다. 기묘한 일이라 생각하며 택운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시 집으로 향했다. 아직도 그의 곁에는 쉬이 벗겨지지 않을 혈향이 감돌고 있었다. 제 것이 아닌 다른 이의 혈액을 뒤집어쓰고 있단 사실은 그리 썩 유쾌하지 않았다.

라비, 라-비,

택운은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대신에 자신과 연이 있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다.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눈이 마주치던 순간 드러났던 처진 눈꼬리, 그에 반해 올라가게 그려진 옅은 아이라인. 제 외모를 화장으로 감추는 남자는 들어보지 못했다. 컴플렉스, 인가 싶어도 하는 일이 무엇인지 가늠이 가지 않기에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은 한 개비밖에 남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새벽의 공기는 누군가에겐 하루의 시작이었으며 또, 누군가에겐 하루의 끝이었다.





 

2



 

“레오, 들었어? 왜 저번에 너네 조무래기들 몇 명 시체 돼서 돌아온 거. 그거 이번에 생겼다던 조직이었잖아. 무섭게 치고 올라오더니 글쎄, 걔네 보스가 사라졌다 하더라고. 걔네 사이에서도 난리인가 봐. 누가 임시로 보스 자리에 앉을 건지부터 해서 보스가 어디로 행방불명이 된 것인지조차 제대로 못 파악하고 있다던데-,”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거야?”

“블랙웨폰이, 걔네 측에 있단 소리도 세간에 떠돌더라고. 하기야, 블랙웨폰이 없었더라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치고 올라올 수 없었겠지. 근데 보스와 함께 사라졌나 봐. 그깟 무기 하나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나야 싸움꾼이 아니니 잘 모르겠지만, 상승세를 타던 신생 조직이 흔들릴 정도라면 그 무기가 설령 블랙웨폰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블랙웨폰에 버금가는 존재라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네가 듣고 싶어 할만한 소식이지 않았어?”

“…뭘 원해?”

“레오, 너와의 하룻밤-, 정도면 되려나?”

“…네 몸뚱아리를 시멘트로 발라버리기 전에 썩 사라져.”

“핫, 농담도 못 하겠네~ 하룻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나저나 너네 보스는 아직도 답이 없으시다니-, 라며 택운에게 이죽대다 결국 던져진 서류철이 홍빈의 어깨에 명중하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홍빈은 잠시 고통에 찬 소리를 뱉더니 자연스레 바닥에 떨어진 서류철을 주워 넘겨보려고 하자 어느샌가 다가온 택운이 홍빈의 손에서 서류철을 빼앗듯이 건네받곤 자리에 돌아가 앉았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서류철을 열어보지 못한 것이 억울한지-곧 아무렇지 않게 헬스장으로 갈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택운이 명중시킨 어깨를 매만지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라며 떵떵거리고 있는 홍빈은 아이러니하게도 택운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정보상이었다.

택운이 블랙웨폰을 쫓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는 세 사람 중 한 명으로, 택운에게 있어 홍빈을 만나게 된 것은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누구에게나 먹힐 잘생긴 외모에, 기억력이 좋은 것은 당연할뿐더러 하루에도 수천 번씩 듣게 되는 이야기들을 깔끔하게 정리해 포인트를 캐치해내는 능력, 넓은 인맥 덕분에 택운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었다. 종종-보단 조금 더 자주- 택운의 신경을 긁어내리는 언행을 하곤 했지만 서로 아쉬울 게 없는 관계였다.

 

정택운, 그가 어느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던 시절, 그러니까 쌩양아치 소리를 들으며 핍박받던 뒷골목에서 잠시 화젯거리에 올랐던-얼핏 들으면 전설이나 신화 속에나 존재할 법한- 블랙웨폰에 대한 이야기가 그를 자극했다. 블랙웨폰을 찾기 시작하게 되면서 찾은-거창한 계기 따위가 아녔다. 변명, 합리화 수준의 동기부여였다.- 목적은 누군갈 구하거나 도움을 주거나 복수를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집착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쫓다 보면 어느샌가 지켜야 할 것도 정해지고 이 바닥에서의 입지도 탄탄하게 굳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맞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블랙웨폰은 어느 누군가는 권총, 또 다른 누군가는 나이프라고 하는 상반된 이야기들이 난무했으며, 소유하기 까다로워 주인이 바뀌길 수십번 반복했다고 한다. 블랙웨폰의 흔적을 찾던 와중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었다고 알려진 사람에게-택운이 현재 소속된 조직의 보스- 접근해 그 무성한 소문들을 파헤치고 싶었고 그것만을 위해 조직의 간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보스는 택운이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을 일절 하지 않았다.

무슨, 어떤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기에? 택운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허상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만약 그렇다면 이곳까지 너무 멀리 돌아와 버린 건 아닐지.

 

홍빈은 골똘히 생각에 잠긴 택운의 모습에 시계를 몇 번 힐끔거리더니 급한 듯 택운의 눈앞을 손으로 몇 번 휘적였다. 그 움직임에 정신을 차린 택운은 잊고있었던 사실을 기억해낸 듯 번뜩이는 눈빛으로 홍빈과 눈을 마주했다.

 

“나 약속있,”

“라비, 알아?”

“그게 뭐야? 물건이야, 사람이야?”

“…사람. 모르는 것 같은데 라비에 대해서 조용히 알아봐줬으면 해.”

“그거야 무리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었기에 우리 레오가 신상털이를 다 요구하고 그런대?”

“… 너 약속 있다며?”

“아아, 메일이나 잘 봐줘 또 읽고 씹지 말고 답장해야 해. 돈은 있는 거지?”

 

그래 네 몸값 비싼 거 알고 있으니 어서 가. 내쫓듯이 홍빈을 보낸 택운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조용하네. 조용한 사무실을 둘러 보던 택운은 데스크 위의 노트북을 덮고 몇 장의 서류와 서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약봉지를 가방 속에 챙긴 뒤에 밖으로 나섰다.

제법 쌀쌀해진 가을 날씨는 새벽의 공기와 닮아있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골목길을 걸은 지 10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라비에 대한 물음표를 띄우려던 참에 라비와 처음 만나게 된 곳을 지나게 되었고, 택운은 홍빈이 알아낼 수 있을 정보를 유추해보며 평소와 같이 지나갔다. 아니, 지나가고자 했다. 지난 새벽, 라비가 주저앉아있던 자리에 지루하단 표정을 지은 채 서 있는 라비를 보기 전까진.

 

“레오.”

“… 뭐야.”

“이번에는 좀 멀쩡한 모습으로 찾아와봤어.”

 

저음의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제 귓가를 두드렸다. 라비, 새벽에 봤을 땐 몰랐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보다 밝은 머리카락과 저보다 어두운 피부. 사람은 서로 다른 모습에 더 끌린다고 하던 누군가의 별 시답잖은 소리가 훅, 와닿던 순간이었다. 투명한 물에 잉크가 퍼져가듯 라비의 모습이 뇌리에 깊게 박혔다.

 

“심심치 않게, 찾아올 테니까.”

“나도 계속 찾아와라. 뭐, 이런 소리인가?”

“그렇지. 부탁해. 많이 심심하거든.”

 

평범한 나날에 새로움이 피어나는 것은 한순간이다. 서로 얼굴과 이름만-그마저도 서로 가명을 알려줬을 테고, 라비는 화장을 했기에 본래의 얼굴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아는 사이에 어느 누가 갑자기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이곳에서 이런 약속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남들에겐 이상하게 비춰질 상황이었다.

새로움은 큰 위험을 동반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큰 행운을 동반할 수도 있었다. 서로의 일상을 올인한 일종의 도박이 시작되었다.





 

3



 

레오, 나 부탁이 있어.

 

오랜만에 만난 택운을 이끌고 라비는 근처 공원으로 향했다. 라비는 벤치에 앉으며 뜸을 들이더니 검은 비닐봉지에 담겨있던 맥주를 꺼내 택운에게 건넸다. 두 개의 캔 뚜껑이 차례로 열리자, 부탁이 있다는 말부터 꺼낸 라비는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말로 자신이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며-, 요즈음 코빼기도 모습을 비추지 않더니 큰 위험을 달고 나타났다. 쫓긴다는 상황은 적어도 택운이 행했던 추적은-자신의 구역이니 이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추정했다- 고위 간부의 누군가를 위협할 만한 위력을 가진 상대를 견제하기 위해 행했던 것이며, 유사시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았기에 쫓긴다는 상황만 듣고도 택운의 태도는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연거푸 맥주를 들이마시던 라비가 일어나 택운의 앞에 섰다. 라비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긴 택운은 자신의 앞에 선 라비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서 쫓기고 있다는 게…?”

“…내가 좀 대단한 사람이라서, 죽기 살기로 날 찾고 있나 봐. 하지만 레오와 내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모를 테고, 설령 알게 된다고 해도 레오에게 함부로 덤빌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말은 나보고 널 좀 숨겨 달라는 소리 같은데.”

“맞아, 그래서 부탁이 있다고 했던 거고, 날 네 집에서, 하다못해 사무실이라도 네 생활권 안에 지낼 수 있게 해줬으면 좋겠어.”

“… 안돼.”

“왜? 나는 네가 블랙웨폰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지?

택운은 분명 세 사람 외의 타인에겐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라비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인지, 택운은 곧장 일어나 라비의 멱살을 붙들었다. 단순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라비에게 알려준 것이라면, 당장 제 곁에서 잘라내야 할 일이었다. 입이 가벼운 도구는 더는 도구로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고 쓸모없어짐을 의미했다.

 

“누가 너에게 그런 걸 알려줬지? 아니, 언제부터 알고 있던거지?”

“진정해 레오, 알려준 사람은 없어. 언제부터인지는 나도 기억이 안나.”

“대체 이 이야길 나에게 한 이유가 뭐야? 블랙웨폰을 찾고 있다는 사실이 내 약점이 될 거라 생각했나?”

“지겹지 않아? 보스라는 놈은, 네가 간지러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지 못하고. 언제까지 남이 말하는 거짓에 홀려있을 셈이야? 난 당신을 도와줄 수 있어.”

“도와… 줄 수 있다고…?”

“대신 날 보호해줘. 내 목숨과 네 비밀 중 네 비밀이 더 중요한 건 알겠지만,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키가 내게 있는걸.”

“… 정말 블랙웨폰을 찾을 수 있어?”

“정말로. 약속해, 레오.”

 

택운은 라비가 하는 말을 절대 맹신할 수 없었다. 캔 속에 남은 맥주를 다 들이켰지만, 오히려 정신은 맑게 깨었다. 약속이라는 그 말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당장 뒤돌아서서 둘 중 한 명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곳에서 약속이라니, 이 사실을 알면서도 택운은 거절하지 못했다. 택운의 블랙웨폰에 대한 경외심이 집착이라는 감정으로 변질된 순간부터, 라비는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 대신, 그 약속 지켜야 해. 약속을 지킨다는 전제하에 널 거둬들이는 거니까.”

“난 네가 무슨 부탁을 하든, 망설임 없이 도와주려 애썼을 거야.”

 

라비가 별달리 챙겨올 짐은 없었고, 수중에 있는 돈으로 필요한 건 대부분 구입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에 택운은 빈 캔 두 개를 손으로 구겨버리고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어느샌가 벤치에 앉아있는 라비를 이끌고 택운은 제집으로 향했다. 택운은 오늘의 선택은, 임시방편이라며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누구나 이해받지 못할 선택을 과감히 행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설령 그것이 제 목을 죄어온다고 하더라도.





 

4




 

인연은 잉크병이 엎어지듯 갑작스레 스며드는 존재였다. 으레 동거자가 된다는 것은 서로가 사사건건 부딪치는 부분이 많아지고,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라비는 예외인 편에 속했는지 자신을 택운의 생활 패턴에 녹이려 애썼다. 식사를 같이

한다든지, 필요한 일은 택운이 딱히 언급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결한다든지. 택운은 라비에게 무관심한지 이렇다 저렇다 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고, 택운에게 서포트를 하려는 라비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함께 먹는 저녁 식사가 서로가 가장 오랫동안 마주 보고 있는 시간이었다. 라비는 그런 택운의 태도에 조금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택운과 마찬가지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유일한 일탈이라 할 수 있는 건 넓은 침대를 쓰던 택운과 같은 침대를 쓰게 된 덕택에, 택운이 오기까지 기다려서 지쳐 잠든 택운의 얼굴을 짧게라도 바라보고 잠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라비가 이런 행동을 할 때쯤 택운은 라비가 요리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잦았다. 무관심하다 하더라도 신경이 쓰이는 상대에게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신경이 쓰인다는, 그것이 정확히 어느 쪽인지에 대해선 회피하고 있었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머릿속이 어떻게 돼버린 건 아닌지 라비만 보면, 제가 도움을 받아야겠단 생각보다 도움을 주고 싶단 생각이 앞섰다. 정말로 어떻게 돼버린 게 아닐까.

 

라비와 함께 이른 저녁을 먹고 밀린 업무가 많다는 핑계로 사무실로 나선 택운은 홍빈을 호출했다. 홍빈에게 의뢰사항을 오늘 서류로 부탁한단 택운의 일방적인 호출에 홍빈은 이제 막 게임을 시작했는데 참 타이밍 천재라며 툴툴대며 금방 사무실로 가겠다고 답을 했다. 택운이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다른 처리해야 할 업무를 살펴보고 있자 홍빈은 뛰어온 듯 거친 숨을 내쉬며 택운의 업무실 문을 벌컥 열더니 라비의 정보가 담긴 서류철을 택운에게 던졌다.

 

“성격하고는… 스물여섯 살에, 라비라는 가명을 쓰고 있고, 가족은 실종, 직업은 비어있네? 비밀이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로 깔끔한 건 드문데 말야.”

“캐보려고 해도 도무지 감이 안 잡혀서 말이야.”

“네가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인 것 같네.”

“빨리 나 잘했다고 칭찬해! 지금 게임도 버리고 온 거야!”

 

누구에게 쫓기고 있는지조차도 말하지 않은 라비가 굳이 제게 은신을 부탁한 목적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막상 동거를 하게 되자 남이나 다름없었던 라비의 능동적인 태도에 택운의 긴장도 풀어진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비의 속내를 택운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홍빈은 택운이 자신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재미없다며 필요한 게 있으면 내년에나 부르란 장난을 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쟤는, 왜 갑자기 나가고 그러는 거야? 택운은 제가 주변에 무관심하단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5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호기심이란 감정은 결코 얕봐선 안 되는 존재였다. 그 감정을 지금 재환이 가지고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다. 전부터 택운이 아무것도 아닌 필기구를 보면서 실실 웃기도 하고, 담배 대신 사탕을 입에 물고 있단 사실이 재환에겐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보스와 택운 중 선택하라면 아무 말 않고 택운이라고 외칠 그였지만 이런 이상 행동을 보이는 택운이라면 다시 고려해볼 의향이 충분했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왜. 뭐 할 말이라도?”

“아닙니다.”

“네 또래 남자들은 뭘 좋아하려나?”

“저는 과자 좋아합니다. 달콤하고 폭신한.”

“미안. 네가 유별나 단걸 까먹고 있었네.”

 

…그럼 제게 왜 물어보신 겁니까? 라고 되물었다면 당장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재환은 자신의 안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이게 옳은 선택이 맞는지는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택운의 업무실 문에 작게 나 있는 창 너머로 낯선 남자가 기웃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형님, 밖에 누가 있습니다”

“…아, 라비인가?”

 

택운은 익숙한 듯 일어나 문을 열곤 남자를 반갑게 마주했다. 저번 주에도 와봐서 익숙하지 않아? 아니, 오늘은 밥 먹고 와? 아냐, 안 먹고 갈 거야. 기다릴게, 빨리와 배고프니까. 남이 들으면 연인 사이나 다름없는 대화에 재환은 택운과 남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인가보다- 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남자가 웃으며 재환에게 꾸벅 인사를 해 보이곤 돌아섰고 택운은 서류를 받아들고 그 자리에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누구…?”

“라비. 아, 나랑 같이 사는 애야. 블랙웨폰 찾는 걸 도와주고 있어.”

“아직도 그 블랙웨폰이고 웨이터고를 아직도 포기 못하신 겁니까?”

“누가 들으면 너 머리 나쁘다고 그러겠다. 포기 안 해.”

“근데… 두 분 사귀는 사입니까?”

“뭐?”

“아니,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근데 너무 다정하시길래…”

 

택운은 헛기침을 하며 재환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을 받은 재환이 멈칫하더니 커피를 다시 사 오겠다며 사무실을 나갔고, 방 안에 남은 택운은 재환의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다 함박웃음을 터트리며 라비에게 말해줘야겠다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라비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자연스레 택운이 설거지를 맡았고 라비는 식탁에 그대로 앉아 택운에게 질문했다.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야?”

“직속 부하.”

“… 이름이 재환, 이랬던가.”

“어? 어. 그렇지.”

 

택운은 문득 자신이 재환의 이름을 라비에게 말 한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새겼다. 아마도 무의식중에 흘러나왔을 것으로 생각하곤 그냥 넘겼지만, 어딘가 찝찝한 기분에 애꿎은 그릇만 박박 문질러댔다. 이상하게, 그릇이 더러워 보이네.





 

6



 

여느 때처럼 저녁을 같이 먹고 거실에서 티비를 보던 택운과 라비 사이엔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이 주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늘상 함께 나눌 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택운은 이런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내일 같이 사무실에 갈래? 블랙웨폰을 찾기에도 이게 더 수월할 것 같고.”

“내가 가도 괜찮은 거야?”

“서류 작업도 맡아주면 고맙고.”

“이렇게 말하니까, 현장… 뛰고 싶은데.”

“사방팔방에 얼굴 다 팔리고 싶나 보네? 쫓기는 신세라더니.”

“이래 봬도 나 프로인데.”

“어디가 어떻게 프로인 건데?”

“이런 거?”

 

라비는 가까이에 있던 택운의 자켓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집어 택운의 무릎 위에 앉다시피 다가가 택운의 목에 가져다 댔고 다른 한 손으론 택운의 입술을 매만졌다. 택운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는지 몸을 뒤로 내빼며 라비의 손목을 잡았다.

 

“…이래도, 현장은 안돼.”

“아~ 알겠어. 그러면 오늘은 안 나가는 건가?”

“잠깐만 나갔다 올게. 먼저 자고 있어.”

 

택운은 라비를 그대로 안아 들고 소파에서 침대 위로 옮겼다. 라비는 씻어야 한다며 욕실로 향했고 택운은 라비가 제게 겨눴던 나이프와 자켓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아무런 말 없이 나가는 택운을 지켜보던 라비는 택운의 뒷모습에서 귀가 빨갛게 변해있는 걸 발견했다. 동시에 심장이 철렁하는 느낌이 들었고 한동안 라비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택운은 잠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라비를 깨워 사무실에 갈 준비를 했다. 라비는 오랜만에 쐬어보는 아침 공기에 심호흡했고, 택운은 라비에게 업무실로 들어가기 전까진 모든 외부 자극을 무시하라고 당부했다. 사무실은 택운의 집에서 도보를 통해 갈 수 있는 거리인 동시에 공원도 지나고, 처음 두 사람이 만난 골목길도 지나가는 경로였다. 괜히 떠오르는 기억들에 발걸음이 빨라진 택운을 따라가기 벅찼던 라비는 천천히 걷자며 택운의 손을 잡았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택운은 라비의 손을 쳐냈고 사태를 파악하고선 미안하다며 곧바로 사과했지만 라비는 조금 토라졌는지 땅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옮겼다.

사무실에 도착하자 택운을 발견한 직원들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고 그런 대우가 당연하단 듯 고개만 끄덕이며 ‘LEO’라는 명패가 붙여진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방 안에선 재환이 상자를 옮기고 있었고 두 사람을 발견하더니 황급히 상자를 내려놓으며 인사를 했다.

 

“어, 라비…씨? 도 오셨습니까!”

“응. 같이 할 일이 좀 있어서. 나 잠깐 저번에 그쪽 돌아보고 올게. 홍빈이도 데리고 오려고. 급한 일 생기면 연락해.”

“네! 연락 드리겠습니다!”

 

재환은 택운이 밖으로 나가자 라비에게 다가가 잠시만 기다리라며 상자를 마저 밖으로 옮긴 뒤에 다시 돌아왔다. 라비는 책꽂이에서 서류를 꺼내던 재환에게 어깨 근처에 파스를 붙여줄 수 있겠냐고 부탁했고 재환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택운의 책상 서랍 속을 몇 번 뒤적거리더니 파스를 꺼낸 재환은 쪼르르 라비에게로 다가갔다.

 

“그… 라비씨, 셔츠 좀 벗어주실 수 있습니까?”

“아, 잠시만.”

 

라비가 셔츠의 단추를 풀어내자 적당하게 근육이 잡혀있는 구릿빛 몸이 드러났다. 셔츠를 벗은 라비는 소파 등받이에 셔츠를 걸쳐두며 재환에게 어깨에 새겨진 타투를 따라서 파스를 붙여달라 부탁했다. 재환은 아무 말 없이 파스를 붙여주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짤막하게 나눴고 라비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파스를 다 붙인 재환은 라비가 셔츠를 걸치자 자리를 옮겨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잠가주기 시작했다. 절반쯤 잠군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에 라비가 놀란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고, 누군가 재환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뭐야, 이재환 지금 뭐 하는 거야?”

“아, 아니, 형님, 오해십니다!!! 여기 딱 봐도 파스가 탁자 위에 있지 않습니까!!!”

“훠오~ 레오 나랑도 한 번,”

“사라져.”

 

문에서 바라보면 보이는 모습은 라비의 가슴팍이 훤히 드러나 있고 재환이 셔츠를 매만지고 있는 뒷모습만 보이니 충분히 오해를 살 풍경이었고, 택운도 마찬가지로 오해를 격하게 해버린 상태였다. 뒤따라 들어온 홍빈은 그새를 놓치지 않고 택운에게 농을 던졌다 싸늘한 언사만 되받았다. 라비는 셔츠를 잠가보려 노력했지만 허둥대는 바람에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본 택운은 라비에게로 다가가 하나하나 단추를 잠가주었고, 재환은 택운에게 잡힌 어깨를 매만지며 택운의 밖으로 나가라는 제스쳐에 홍빈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택운은 라비의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가주고 어깨를 붙잡고서 말했다.

 

"라비, 내가 왜 둘을 밖으로 내보낸 줄 알아? 이런 꼴 너에게 보여서 미안한데… 아 씨, 네가 재환이랑 그러고 있는 거 본 순간 아무 생각도 안 들고 몸이 먼저 반응하더라. 그래도 내가 재환이에겐 최대한 손을 안 대는데… 그래서 재환이도 많이 놀란 것 같아 보였고… 너도 이해가 안 되지,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근데 네가 다른 남자랑 아니, 다른 사람이랑 이러는 꼴 앞으론 잠자코 못 볼 것 같아. 그래서,"
"하핫, 지금 이거… 고백인 거야?"
"… 그래서, 아까부터 생각해 봤거든? 사랑하는 것 같아. 라비, 너를."

 

라비는 웃으며 택운의 볼을 붙잡아 제 입술로 택운의 이마에 도장 찍듯 꾹 입을 맞췄다.

모든 동화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끝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지, 하지만 이건 동화도 아니고, 행복을 위해선 다른 행복을 망쳐야만 하는걸.

 

“근데… 미안, 레오. 나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네게 온거지, 사랑놀음 따윌 하려고 온 게 아니라서.”

“…아, 내가 조금… 나 혼자만 생각했나…?”

“미안. 아직은… 네가 어제 말했던 것처럼 난 쫓기는 신세에 언제든 널 배신할 수도 있는걸.”



 

아직은, 끝이 아니니까.





 

W. 얼음 (@ICE_LXD_VIV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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