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들샘
@PlainSpring_46
#1
“안녕하세요, 저희 아름이 찾으러 왔습니다.”
“삼촌!”
안타깝게도 제비를 잘못 뽑아 시작한 방과후 돌봄 교실이었다. 하필이면 근무도 얼마 안 남았는데, 윗선에서 손을 쓰지 못한 탓이 컸다. 선생님들은 아무리 사정사정을 해도 다 뽑기에 참여하는게 우리 전통이라면서 원식을 꼬드겼다. 운 좋게도 원식은 빨간 제비에 덜컥 걸려버리고 말았고 이제 아이들과 정 들 일만 남았던 것이다.
특히 아름은 원식이 처음 교사로서 근무할 때 굳은 표정에도 굴하지 않고 원식에게 시도 때도 없이 장난을 쳐서 정이 많이 들었던 아이였다.
“선생님,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름이 내일 봐~”
생긋 웃으며 해맑은 아이들을 보내주는 것은 원식의 직업 상 쉬운 일은 아니었다. 사회로 나오고 나서는 평생을 차갑게 지낸 삶인데, 처음에는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아 어린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리기 부지기수였다. 지금은 꽤 익숙해진 편이라서 매일을 방과후에 함께 보내는 아름에게는 헤픈 웃음을 내보였다. 아름은 삼촌이라기에는 제법 젊은 남자의 손을 꼭 잡고는 교문 밖으로 걸어갔다.
#2
“우리 아름이 잘 있었나?”
“삼촌!”
“안녕하세요, 원식씨?”
“홍빈씨가 또 데리러 오셨네요.”
아름은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데리러 올 때보다 삼촌이라는 사람이 오는 것을 줄곧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맞게 그날 이후로 삼촌이라는 사람은 매일같이 아름을 데리러 왔다. 심지어 나이대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지 홍빈은 원식에게 통성명을 제안했다. 물론 얼마 남지 않은 근무에 원식은 믿어 의심치 않고 홍빈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이름 정도 알려 주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니까.
“가끔 보면 원식 씨 어떻게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나 싶어요.”
“예?”
“아름이가 집에 와서 선생님 정색하는게 너무 무서웠는데 지금은 괜찮다고 해서요-”
그 뒤로 호탕하게 웃는 홍빈은 충분히 원식을 소름 돋게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굳은 표정에서 해맑게 웃는 표정으로 변하는 홍빈의 순간적인 변화를 원식은 느꼈다.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표정의 변화가 있다는 건 진실된 말이 아니었다. 내가 요새 너무 예민해진 건가? 원식이 홍빈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드실 의향이 있으세요?”
“죄송해요. 딴 생각 하느라 잘 못 들었습니다.”
“아,”
근무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까, 이것도 인연이라고 한번 밥이라도 먹자고요~ 홍빈이 너스레를 떨며 원식에게 친근함을 드러냈다. 그래, 내가 최근 들어 외근 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린 거다, 예민한 거다. 원식이 자신의 뺨을 두어 번 때려댔다. 홍빈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원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직은 어색한 사이였던 건지 둘 사이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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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오늘 먹을까요?”
아차, 원식은 자신이 또 실수했다는 것을 느꼈다.
#3
“홍빈 씨는 어떤 일 하세요?”
“저는 아버지가 사업 하신 거 물려받아서 하고 있어요.”
되게 잘 사시는 분이었구나... 원식의 혼잣말에 홍빈이 빵 터져버렸다. 아름을 집에 보낸 후 처음으로 둘만 갖는 시간에 어색한 듯 보였지만 곧 둘의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원식은 홍빈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고 홍빈은 그 물음들에 흔쾌히 대답하며 서로에 대한 호감도를 쌓아 갔다.
대화는 겉으로 보았을 때 순조롭게 이어졌다. 물론 홍빈과 대화할 때마다 다음 질문과 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원식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 원식은 지금 상황이 소개팅 같다고 생각했다. 질문하고, 대답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미묘하게 반복되는 것 같았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꽤나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 알아서인지 원식은 제법 신나 있었다.
“그럼 취미는요?”
“네?”
“원식 씨 취미요.”
“저는 사격 좋아합니다.”
저도 사격 좋아하는데, 우리 공통점 찾았다! 홍빈은 어느 때면 원식의 장단에 맞춰 아이같이 해맑게 웃었다. 홍빈의 보조개가 깊게 패일 때마다 원식은 생각을 멈추고 뚫어져라 미소와 함께 보조개를 바라보곤 했다. 홍빈이 어리둥절해 할 때마다 아무 것도 아니라며 상황을 무마하는 질문을 또 던지는 것도 원식이었다. 홍빈은 원식의 행동에 다소 이유가 궁금했지만 즐거운 상황에서 혹 분위기를 깰까 묵묵히 질문하고, 대답하고를 반복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내겠습니다.”
“그럼 커피 값은 제가 낼게요!”
“네?”
우리 커피도 먹는 거 아니었어요? 긴장하시기는. 홍빈은 딱딱하게 굳은 원식에게 피식 웃어주고는 여유롭게 주변의 카페를 찾기 시작했다. 반대로 원식은 능구렁이 같은 홍빈의 행동-사실 원식이 쑥맥이었던 것이지만-에 죽을 맛이었다. 손님, 손님- 종업원이 건네 주는 카드도 받지 않은 채 원식은 밖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홍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원식은 종업원에게서 카드를 뺏듯이 가지고 저만치 가있는 홍빈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4
“상혁아.”
-네, 형.
“나 데이트 나가는데 무슨 옷 입어야 되냐. 옷장에 검은 정장밖에 없다.”
-그냥 정장 입으십쇼. 여자들 정장이면 껌뻑 죽어나지 않습니까.
“음... 근데 문제가 있어. 여자가 아니야.”
-그럼 그냥 편하게 입고 가십쇼. 저는 바빠서 이만.
“야, 야!”
보스가 말하는데, 새끼 듣지도 않고. 하는 수 없이 홍빈은 옷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보스까지 올라오기 전까지는 꽤 사복을 많이 입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왜 없을까... 홍빈은 겨우 구석에 뽀얗게 먼지가 쌓여있는 스웨터와 스키니 진을 발견했다. 먼지를 털고 꺼낸 옷은 꽤 괜찮아 보였다. 그래, 이걸로 입어야겠다. 홍빈은 체념한 듯이 성재를 불러 옷들을 세탁 맡겼다.
#5
“저 오늘 괜찮아요?”
“...네.”
아주 좋아요. 원식은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뒷말에 목 너머로 삼켰다. 터틀넥 스웨터에 검은 스키니, 거기에 베이지 코트까지. 니트에 검은 스키니, 카키 코트를 입은 원식 자신과 매우 비슷한 착장이라고 생각하니 커플룩... 이라는 생각이 원식의 머리를 온통 지배했다. 안 어울릴까봐 긴장했다는 홍빈의 조잘거림을 들어주어야 하는 것이 원식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들리지 않았다.
“...듣고 있어요?”
“우리 커플룩 같네요.”
“뭐야, 갑자기- 갑자기 설레게 하네요?”
설레게 한다니. 지금껏 홍빈과 만날 때마다 두근거렸던 것이 단순히 마음이 잘 맞기 때문에 라고 생각했다. 평생을 헤테로라고만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홍빈에게 설레고, 두근거리고, 보조개에 빠져들고, 웃음에 빠져들고... 전부 친구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홍빈이 너무나도 예뻤으니까.
드디어 결론은 세워졌다.
“홍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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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귈래요?
#6
“보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아니, 들어가겠습니다. 성재는 문 밖에 서서 대답 없는 질문을 내뱉다가 성급한 제 볼일을 이기지 못하고 벌컥 문을 열었다. 쨍그랑, 성재의 머리 바로 옆에서 홍빈이 아끼던 꽃병이 날아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내가 혼자 있을 때 들어오지 말랬지. 창문 밖을 응시하고 있던 홍빈이 의자를 돌려 살기를 띤 채 성재를 노려보았다. 확실히, 홍빈은 혼자 있는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편이었다.
“그래, 들어나 보지. 무슨 일인데.”
“보스께서 요즘 어울리시는 김원식 씨 말입니다.”
다른 사람, 그것도 조직에 몸 담그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는 것이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홍빈 자신이 신뢰하는 성재라도 말이다. 그의 이름은 성재의 입에서 나오자 마자 홍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홍빈은 마이 주머니 안에 있는 리볼버의 방아쇠를 만지작 거렸다. 그한테 허튼 수작 부리면 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성재는 홍빈의 살기에 뒷걸음질 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희 언더커버로 국정원에 한 명 가 있잖습니까. 직속 상관이 김원식 씨라고 합니다. 프로필이 뜨지 않아서 혹시나 해서 연락했더니...”
아니야, 그는 초등학교 교사야. 공무원이라는 것만으로도 짜증나 죽겠는데, 무슨 개소리를 그렇게 정성스럽게 지껄이고 있니, 성재야. 홍빈이 비소를 흘리며 성재의 앞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내딛었다. 차가운 리볼버의 총구가 성재의 가슴팍에 세게 닿았다. 뒷걸음질 치던 성재는 등에서 느껴지는 거친 문의 촉감에 순순히 고개를 떨궜다.
“그렇게 순순히 죽음에 굴복하려 하지마.”
자꾸 그러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것 같잖아. 홍빈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은 가라, 성재야. 날이 아닌가보네. 성재는 홍빈에게 인사도 않은 채 황급히 문을 열어 집무실을 빠져 나왔다. 미친 새끼. 드디어 성재는 조직에서 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저 싸이코 밑에서 일할 바에는 나가고 말지.
#7
“원식 씨.”
“아무 말도 하지 마.”
원식이 홍빈에게 말도 하지 않고 달리고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한 이름 모를 바닷가였다. 홍빈 씨랑 같이 한 번 와보고 싶었어. 홍빈은 아무 말도 없이 모래사장에 앉은 원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원식도 아무 말 않고 홍빈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려 갔다. 내려다 보이는 동글동글한 머리가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홍빈은 제대로 자세를 고쳐 앉아 원식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곧장 원식의 입술로 돌진한 것은 홍빈이었다. 홍빈은 부드럽게 촉촉 소리가 나도록 원식의 입술을 물어댔다. 원식은 홍빈의 목덜미를 살며시 감싸 안고 홍빈의 입 속에 침투했다. 서로의 혀가 얽혀가며 질척거리는 야시시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홍빈이 원식에게서 떨어지자 서로에게서 은색 실이 길게 늘어지다 끊어졌다. 홍빈은 싱긋 웃으며 촉, 소리가 나도록 원식에게 버드 키스했다. 원식은 사랑스럽다는 듯이 홍빈을 허리가 끊어지도록 세게 껴안았다. 아, 아파 원식씨! 원식은 홍빈의 외마디 외침에 부끄럽다는 듯 홍빈을 놔 주었다.
“나 비밀이 하나 있는데.”
“말해봐.”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할 수 있어? 원식은 홍빈의 진지한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되려 겉으로 티내지 않고 의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홍빈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쓸어내려가면서 원식은 홍빈의 스웨터를 살짝 걷어 올려 그의 허리에 가볍게 키스했다. 홍빈이 아무 말 없는 원식에게 대답을 재촉하자 원식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를 떠날 리 없잖아.”
홍빈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우리의 사이가 끝날 수도 있는 이야기다. 이미 말을 꺼낸 이상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가야 했지만 끝날 수도 있는 미래를 상상하자니 홍빈의 가슴이 너무나도 두근거려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두어 번 정도 가슴을 쓸어내린 후 홍빈은 원식의 귓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큰 조직이 하나 있어.”
언젠가 찾아오길 바라. 국정원 요원 김원식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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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romise the moon, my dearest.
#8
“급습이다!”
복도에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울려댔다. 시끄러워. 홍빈이 두 귀를 틀어막고는 원식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들어있는 폴더를 열어 스크롤 해댔다. 원식의 어설픈 표정에 피식, 조그마한 웃음이 났다. 키스하면서 찍은 사진에서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했던 나머지 옅은 미소를 자아냈다. 성재의 쾅쾅거리는 거센 노크에도 이미 문을 잠궈 놓은 홍빈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조직원들이 복도에서 경찰의 실탄에 픽픽 쓰러져갔다. 경찰들은 이러한 전투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기관총 따위를 들고 조직원들을 학살해갔지만 조직원들은 고작 손에 붙는 조그마한 리볼버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경찰 중 다친 사람이 분명히 있었지만 확실히 경찰이 우세했다. 살아남은 조직원들은 비상 탈출구로 몸을 피한 뒤였다. 성재는 등에서 수도 없이 피가 흐르면서도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보스, 경찰이 들이닥쳤습니다. 어서 피하십쇼!”
“난 안 가.”
누군지 다 알거든.
#9
“내가 원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해?”
“이쪽도 마찬가지야.”
홍빈이 살기를 띤 채 원식을 노려보고 있었다. 원식은 그에 응해 차가운 말과 함께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미소를 지고 있었다. 둘의 힘싸움은 막상막하처럼 보였지만 알고 보면 원식이 살짝 우세한 편이었다. 칼과 칼이 서로의 눈 앞에 맞닿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힘을 발산하는 타입이었기 때문에 시간을 끄는 싸움에서 불리했던 홍빈이 숨구멍을 만들기 위해 힘을 뺄 때 원식은 홍빈의 우위를 장악했다.
“어라.”
시시하게 왜 그래, 홍빈씨. 원식의 칼날이 홍빈의 눈 앞까지 다가왔다. 원식은 홍빈의 칼을 바닥으로 내동댕이 쳤다. 이제 끝이구나. 아찔한 정신에 홍빈은 머리를 흔들고는 두 손을 들어 올려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뜻을 내보였다. 아마도 아까 칼로 싸울 때 살짝 긁힌 건지 볼을 타고 검붉은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원식 씨.”
“닥쳐.”
“내가 여기서,”
키스해달라고 하면 미친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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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식은 칼을 바닥에 뿌리고는 곧장 홍빈의 팔을 포박한 채 입술로 돌진해왔다. 홍빈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매혹적인 너를 내가 잡을 수 있을 리 없잖아. 원식은 평소와는 다르게 거칠게 홍빈을 이리저리 탐했다. 홍빈의 부드러운 머리칼 사이를 원식의 손가락이 헤집어 놓았다. 홍빈은 위로 손이 포박되어 있자 어쩔 줄 모르고 순순히 원식을 받아들이다가 원식의 분위기에 맞춰 갔다.
키스는 짧은 시간 내에 끝나지 않았다. 홍빈은 숨을 헐떡거리며 포박되어 있는 손을 떨었고 원식은 더욱 거세게 홍빈을 밀어 붙였다. 홍빈의 검은 정장을 타고 타액이 흘러내렸고 원식은 입을 떼고는 목에 흘러내린 자신의 타액을 키스하듯 핥아댔다. 홍빈은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원식이 홍빈의 셔츠를 빼고 허리에 짧게 키스하자 홍빈은 긴장이 풀려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식은 살기를 띤 채 홍빈을 노려보았고 홍빈은 딱딱하게 굳은 원식의 손을 어루만지며 피식 웃었다. 원식은 여전히 홍빈을 이길 수 없었다.
“도망가. 내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당신이 나를 절대 떠날 리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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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promise the moon, my dea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