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aritia
미열
@inf_ever
학연아, 보스.
응.
나 갖고 싶은 게 있어.
다정하디 다정한 우리 보스. 회색 침대 시트로 내려앉은 검은 옷의 사람. 누가 봐도 마른 몸이면서 탄탄한 허벅지는 베고 누우면 기분이 좋다. 허벅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관찰하고 있으면 한순간에 까맣게 가라앉은 눈이 가까워졌다가, 마냥 부드럽지는 못한 입술이 이마에 내려온다. 립밤을 발라주면 뭐해. 작게 인상을 찌푸리면 하하, 웃는 학연이의 웃음소리와 함께. 뭐 가지고 싶은데? 학연아, 나는. 작게 속삭이는 소리를 가져가 들은 우리의 보스는, 비릿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입가에 띄우면서. 우리 택운이는 욕심도 많지.
avaritia
_부를 향한 탐욕을 뜻하는 라틴어로, 일곱 가지 대죄 중 한 가지로 꼽힌다.
-VIXX X 정택운 (빅스X레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유혈, 폭력에 대한 묘사가 나오니 주의해서 읽어주세요.
"또 어딜 가."
"너 점점 말이 짧아져,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
"아 예, 예. 어디 가시냐고요."
짜증 나 김원식. 어이없는 표정으로 안경을 손바닥 끝으로 올려 쓰는 김원식이 보인다. 어디서 머리는 또 보라색으로 염색하고 온 거야. 조직 내부의 마련된 병실 아닌 보건실, 그 이상의 공간이지만 병원이라고 칭하긴 애매한 곳의 문 앞. 김원식이 가장 많이 머무르는 곳이고, 내가 나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장소. 그냥 그때 학연이가 아무리 부탁했어도 싫다고 해야 했어. 애초에 조직 내에서 이 위치에 있는 애를 내 경호로 왜 붙이냐고. 이 잔소리꾼을 왜 만나서. 아아아, 귀를 막고 지나가자 펄럭이는 의사 가운 끝을 잡고, 당겨서, 내 허리를 감고, 그대로.
"너 내가 멋대로 안고 하지 말랬지."
"말을 안 듣는데 어쩝니까."
"넌 말 안 듣는 애들 다 안고 살 거야? 어?"
뭔 그런 끔찍한 소리를 해요 다 쏴 죽여버릴 건데. 너가 더 끔찍한 소리 하는 거 자각도 없고 자각할 마음도 없지? 알면 조용히 하세요. 반 명령에 가까운 어투가 어이없어 웃는다. 기분 더럽게 진짜. 탄탄한 팔은 안겨 있으면 근육이 그대로 느껴진다. 괜히 행동대장 아니다 이거지. 어디 가시는지 말하면 놓아주겠다고. 뒤에서 느껴지는 매서운 눈빛에 기분이 나빠지기도 잠시 내뱉는 숨이 부딪힌다. 목에서부터 뜨거운 숨이 툭, 하고 부서져서, 바스라져서. 새로 생긴 메이드 맨(*조직의 정회원) 만나러 가니까 놓으라고. 제약받는 행동은 기분 나쁘다. 어떠한 것도 나를 구속한다는 자체에 불쾌한 게 언제부터였지. 날카로운 말투에 김원식은 순순히 팔을 풀고 친히 등까지 툭 밀어주며 모여있는 곳을 알려줬다. 보스랑 제일 친한 사람이 가면 애들 부담 느끼니까 적당히 마주치다 와. 쓸데없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진짜 좆도 쓸모없는 충고인 거 알아? 날 선 눈으로 돌아봐도 김원식은 기분 나쁜 티 한 줄 내지 않는다. 턱을 몇 번 매만지다가, 씩 웃는 것도 한결같이 재수 없어서.
세대교체가 된 지 얼마 안 된 조직에서 끌려 온 의사. 뒷골목인지도 몰랐던 변두리에 차린 작은 외과의 유일한 의사. 하얀 가운과 하얀 셔츠와 하얀 살결과 하얀 집과 하얗고 하얗고 하얀 곳에 검은 정장에 검은 총에 검은 피에 검은 눈을 한 사람들이 둘, 다섯, 오십. 찾아오다 못해 무려 보스가 찾아왔다. 우리 조직에서 의사를 해달라. 3년, 그 말 한마디 이후 내게 얼굴도 안 비치던 보스는 총에 맞았다. 그 조직에 속한 다른 조직의 보스에게. 카포레짐 (*행동대장)을 죽이고 언더보스(*부보스)를 죽이고 보스를 죽이고 총으로 쏴대고 갈기고 해도 다치지 않고 남의 피를 잔뜩 뒤집어쓴, 잔뜩 더럽혀진 천사의 모습으로, 운아, 보고 싶었어. 하고 해사하게 웃던 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의 일. 겨우 나 하나를 가지고 싶어서, 무엇이든 해주겠다고. 자신의 위의 조직을 부수고, 뒷골목을 휘어잡은 게 2년 전의 일. 그러니까, 그때도.
"애를 왜 이렇게 패대, 쟤 치료하는 건 난데."
한순간에 열댓 명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인다. 아는 얼굴 둘, 모르는 얼굴 나머지. 오셨습니까, 하고 발로 밟아 패던 놈의 머리를 꽉 눌러 밟고 깍듯이 인사하는 이홍빈, 이홍빈이 눌러 밟은 사람을 보고 닥터 하며 나한테 뛰어오기도 전에 경악하며 애 피 얼굴에 번지잖아!! 하고 성질내는 이재환. 이홍빈이 깍듯이 인사하자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이는 이번에 새로 생긴 메이드 맨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받고 쓰러진 놈에게 휘휘 손짓하자 이홍빈이 발을 치운다. 가까이 다가가 쭈그려 앉아 얼굴을 보자 코피는 이미 진작에 터졌고 입술도 터질 대로 터졌다. 이제 막 메이드 맨 됐을 텐데 애를 뭐 이렇게 패, 학연이가 시키든? 아무렇지 않게 나온 보스의 이름에 메이드 맨들 사이에서 술렁댄다.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한참 맞은 놈을 내려다보던 이홍빈은 한숨을 푹 내쉬며 한 놈을 지목한다. 이제보니 죄다 얼굴이 만신창이다. 그 중에서 가장 멀쩡한 한 놈. 아, 메이드 맨들 단체로 사고치고 왔구나? 이재환은 하하 크게 웃으며 방 끝에 있는 의자를 가져온다. 닥터, 여기 앉아요 응? 오래 쭈그려 앉아 있으면 쥐나. 저 대책 없는 밝음을 어째. 이재환을 쳐다보자 어깨를 으쓱이면서 내 등을 이끌어 의자에 앉힌다. 다리를 꼬고 어떻게 된 건지 이야기나 들어보자고 눈썹을 까딱이자 아까 지목당한 남자애가 나와 눈치를 살펴댄다. 겨우 닥터한테 말하기에는 조직의 보안이 의심된다 이거지. 착하네 교육도 잘 받고, 응? 실실 웃음을 흘리자 우습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는 지목당한 남자.
"못 말하겠음 이름이라도 말해. 너 이름이 뭐야?"
"혁, 한상혁이라고 합니다."
이름 멋지네. 가만히 눈을 마주치자 아직 눈이 반짝인다. 학연이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눈이 반짝이고, 다른 조직원들과 같이 가라앉지 않은 그런 눈이 있었을 때가. 언제 적이람. 혀를 차고 마주친 시선을 거두자 이홍빈이 슬슬 다가온다. 닥터, 그래서 볼 일은? 사람 구경. 보스가 시킨 거 아니고요? 학연이가 나를 퍽이나 시키겠다. 하긴 그렇다는 듯이 이홍빈이 씩 웃는다. 잘생겼어, 저래서 내가 믿었지. 마주 웃어주자 괜히 고개를 돌린다. 무안하게 진짜. 언짢게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아까부터 서 있던 혁이가 보인다. 음.
"그래서 메이드 맨들 다친 거 치료는 내가 하는데."
"..."
"팼어 애들을 아주, 어? 피떡으로. 다음에 나갈 때 내 병원에 박스들 있으니까 붕대랑 밴드 가지고 들어와."
저번처럼 까먹고 들어오면 학연이한테 말해서 너희 직접 패라 할 거야. 공기의 분위기가 얼었다. 섬뜩하게 굳었다. 메이드 맨들은 눈치를 살피고, 이홍빈과 이재환은 삼키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침을 삼킨다. 치료는 귀찮지만 못할 것도 아니다. 이번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잘하자? 목을 두어 번 꺾고 일어서자 이홍빈이 고개를 숙인다. 이재환도 따라 숙인다. 손을 몇 번 흔들어주자 뒤에서 안도의 숨소리와 함께 말소리가 들린다. 이홍빈 특유의 미성으로. 메이드 맨 다 닥터 따라가. 입 열지 말고 조용히 쫓아가면 언더보스 계실 거야. 언더보스한테 카포레짐이 보내서 왔다 그래. 다시 말하지만 아가리 열지 말라고 했어. 미성에 거친 말씨는 들을수록 어색하다. 처음 왔을 때는 거친 말도 돌려서 했으면서. 메이드 맨 모두의 발소리가 내 뒤를 따라 타박, 타박. 어두운 복도에서 여럿의 발소리가 부딪혀 시끄럽다. 옆에 창문으로는 밤의 빛이 달빛과 합쳐져 밝게 들어온다. 블라인드 몇몇 개에 걸린 빛들이 일렁이며 쪼개진다.
"늦게도 온다?"
"애들 다 처맞은걸 어떡해. 애들 피 번진 거 닦고 들여보내, 내 공간에 피 떨어지는 거 별로야. 네 판단 심한 순서대로 들여보내."
아 그리고. 어련하시겠지, 하고 혀를 차는 김원식의 정강이를 퍽 차고 김원식이 들릴 정도로만 속삭인다. 애들 중에 한상혁이라는 애 있을 거야. 걔는 무조건 마지막에 들여보내. 김원식은 눈썹을 까딱인다. 보스에게 허락은 받은 거고? 당연한 걸 말해. 고개를 끄덕이자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김원식의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해, 하면 김원식은 궁시렁 궁시렁 불만을 털어낸다. 한두 번도 아니면서 말이 많아 진짜.
메이드 맨 중 마음에 들어서 여태껏 높은 자리에 올라선 게 총 셋, 김원식, 이재환, 이홍빈. 학연이가 나를 가지고 싶다는 욕구 하나로 조직을 부수고 나를 데려왔을 때, 가장 먼저 만난 것이 김원식이었다. 지금과 같이 카포레짐에게 맞고 있던, 왼쪽 팔 한쪽이 칼에 베인 듯 길게 찢어진 김원식. 마취하고 팔을 꿰매면서 원식아, 너 때린 사람들 다 죽이고 와도 좋아. 라고 이야기했을 때 번뜩이던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예전 어느 조직의 보스가 키우던 흑표범의 눈과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제 살의를 못 이겨 카포레짐은 물론이고 뜯어말리던 메이드 맨 몇까지 같이 죽인 김원식을 보고 크게 박수치며 웃던 학연이는 김원식에게 덜컥 언더보스의 자리를 맡겼다. 그 다음에 본 게 이재환. 코 진짜 크다, 하고 얼굴에 살살 연고를 바르다가 밝은 목소리로 닥터 왜 이렇게 예뻐요? 하고 물어보던 게 기가 차서 머리를 쥐어박았지만 오히려 더 크게 웃으며 닥터는 지키겠노라 다짐하던 이재환을 보고 카포레짐을 맡겼지. 그다음으로 만난 이홍빈은 메이드 맨 주제에 깡이 엄청났다. 물론 내가 누구였는지 모르니까 보인 깡도 있겠지만, 다친 복부를 치료하다 말고 이홍빈의 얼굴을 쓸어내리자 손을 쳐내며 치료나 마저 해주라고 했던 애. 그 말을 듣고 학연이가 고른 카포레짐을 죽이라 시키고 그 자리에 이홍빈을 앉혔다. 그리고 그다음에 눈에 든 게.
"한상혁."
"네 닥터."
어쩌다가 마피아가 됐어? 낳아준 부모 다 뒤지고 저 주워다가 키운 분이 마피아라서요. 어쩌다 보니까. 그대로 이어 자란 거죠. 보고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뒷골목 헤매던 거 카포레짐이 주워 오셔서요. 허어, 애기가. 애기 아닌데요. 맞받아치는 혁이의 말에 우스워 웃음을 터뜨리자 오히려 반대로 표정이 굳는다. 닥터, 닥터는 어쩌다 조직의 닥터가 되신 거예요. 거의 부탁받듯 끌려왔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인상이 급하게 찌푸려진다.
첫 번째로 학연이에게 부탁 한 건 이재환의 카포레짐, 그때도 학연이는 나를 쳐다보고 아무렇지 않게 허락했다. 두 번째로 부탁한 건 학연이가 고른 카포레짐을 죽이는 일. 사실 이미 죽여놓고 부탁했다. 학연이도 알고 있었다. 우리 택운이 거짓말만 늘었어. 알아. 그 날 결국 학연이와 같이 잠드는 조건으로 허락받았다. 세 번째는 이홍빈을 카포레짐에 앉히는 일. 학연이는 그 날 내게 네 탐욕이 강해서 평생 안 사그라들 거라며 제 허벅지를 베고 누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네 번째 부탁. 학연아, 나 찾은 거 같아.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학연이를 붙잡고 했던 집착 수준의 부탁.
이번 임무에서 한상혁은 크게 다쳐서 오겠지. 짠 작전을 그대로 전달받은 카포레짐 둘은 한상혁을 선두에 세울 테니까. 한상혁은 충실한 메이드 맨이니까 착실히 선두에 서서 임무를 할 테고, 임무의 강도가 약한 것은 아니니 며칠을 앓을 만큼은 다쳐 오겠지. 언젠가는 사람을 살릴 거라며 순진하게 의학을 공부했다. 사람을 죽이는 놈들이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고 자란 것이 있으니까 더 그랬다. 자네는 참 어리면서 생각이 깊어. 책을 사러 자주 다니던 낡은 책방의 할아버지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었을 때 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누군가를 죽이는 마피아를 치료한 것은 마피아 역시 사람이라. 그들 역시 누군가에게 쉽게 목숨이 꺼질 수 있는 촛불 같은 사람들이라. 마피아들은 죽음으로써 얻는 가치가 없다. 다른 이들과 다르니까. 죽을 거면 이왕이면 가치 있게 죽어야 하잖아, 가치 없이 죽는 건 불쌍하잖아. 그러니까 살려야지. 아무 생각 없이 살리다, 마피아 조직의 의사가 됐다가, 학연이를 만났다가.
어느 날 학연이에게 불만을 품은 조직이 기어코 조직의 아지트를 찾아 죄 헤집었다. 사방에 총성이 울렸다. 학연이와 같이 있던 나는 학연이 방의 이불을 뒤집어쓰고 총성을 애써 무시하던 내 머리를 학연이는 다정히 쓸었다. 내 눈을 가리고 방까지 쳐들어온 상대 조직원의 머리와 몸에 총알을 박아가면서. 총성이 멎었을 때 학연이의 손을 치우고 바라본 방은 시체와 비릿한 혈향으로 난잡했다. 아직 살아 손을 뻗어 꿈틀대는 사람이 죽어가는 지렁이같이 보여서 섬뜩했다. 가만히 죽은 사람들을 바라보는 내 손에, 느긋하게 긴 칼을 쥐여주며. 택운아, 그냥 찔러. 괜찮으니까. 못 하겠으면 내가 할게.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찔렀을 때 튄 피의 온기가 따뜻하기만 해서.
그러니까 너가 이렇게 다쳐와도 딱히 무섭지 않다고, 너만 모르지. 너는 순진하게 내가 사람 살린 일만 한 줄 알지. 너처럼 반송장을 내 손으로 직접 죽여본 적도 있는데. 잔뜩 찢어지고 망가져서 온 눈 감은 한상혁의 몸을 쓸면서. 너는 내가 널 다치게 한 걸 모를 거야 평생. 사람 죽인 의사가 사람 일부로 다치게는 못 하겠니. 원식아. 당분간 상혁이 임무에서 제외시켜. 예 예.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서 있던 이홍빈과 이재환에게 시선을 돌린 김원식이 들었냐는 듯 턱을 까딱인다. 어이없는 듯 쳐다보는 이홍빈을 가뿐히 무시하고 김원식은 내게 총 하나를 쥐여준다. 보스가 주래요.
택운아, 의사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으니까. 학연이가 그렇게 말했다. 의사로써 스스로 걸어 놓은 마지막 규율을 아무렇지 않게 학연이는 깨부수면서 천진하게 웃었다. 건네받은 권총이 따뜻하다. 분명히 총알이 한 개도 들어있지 않을 것이다. 학연이는 나한테 누군가를 죽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죽이고 싶으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대신 내 손을 더럽히지 말라고 나와 색 차이가 분명히 나는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학연이는 크게 동요하는 일이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렇게 무서운 말을 하면서도 보스답게 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담담함으로 날 지탱할 때마다 말을 줄이고 학연이는 나에게 총을 건넸다. 언제든지 너를 방해하는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표시로. 지금 나에게 이걸 건네준 이유도 뻔했다. 원한다면, 네 생각이랑 맞지 않는다면 한상혁을 죽여도 좋다고.
비가 쏟아졌다. 천둥은 안 쳤는데 소나기도 아니었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가 특유의 소리를 내며 쏟아지느라 그나마 밝던 의료실 안도 어두워졌다. 빗소리를 듣고 깨어난 한상혁은 제대로 일으켜지지도 않는 몸을 일으켜 내 눈을 가리려고 애썼다. 가만히 누워 있어. 시선도 안 마주치고 총을 매만지고 있자 상혁이는 표정을 굳히더니 얌전히 눕는다. 몸 좀 얌전히 써. 제가 말단인데 그게 말이 쉽죠. 너 말고 어소시에이트(*조직의 준회원)들 있잖아. 카포레짐이 저만 시키는데 어쩝니까. 이홍빈? 아니요, 다른 분이. 이재환이구나? 재환이가 못됐네. 예 뭐. 시답잖은 이야기가 오가고 내 자리로 돌아갔을 때 커튼이 밀려나는 소리가 났다. 상혁이는 기어코 걸터앉아 내 쪽을 바라봤다. 이번 임무가 뭐였길래 그렇게 다쳤어.
닥터는 저번에 끌려와서 의사가 됐다고 했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카롭다. 닥터는 왜 자꾸 임무에 대해 알려고 해요? 닥터는 우리 조직이 무슨 일 하는지 정확히 알기는 해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하기 싫다는 듯 양심에 저버리지 않은 목소리. 일과 어울리지 않게 곧고 단단하기만 해서 빤히 쳐다보다가, 상혁아. 그래도 우리 조직은 다른 조직이랑 다르잖아, 다른 조직처럼 마약 거래도 안 하고, 사람도 많이 안 죽인다고 그랬어 학연이가. 되지도 않는 거짓말을 순진한 아이에게 뱉으면 아이는 그렇구나, 순응한다. 한상혁이 그래, 자신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지. 상혁이는 오만대로 구겨진 얼굴로 다가온다. 번진 피로 가득한 정장을 갈아입히지 않아서 그런가,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다. 몸을 어떻게든 이끌고 다가와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매섭다.
"형,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닥터는 우리 조직이 그래도 깨끗한 줄 알죠, 다른 조직이 하는 것처럼 마약 거래도 뭣도 안 하니까 우리가 되게 깨끗한 줄 알죠. 나나 제 동료 같은 메이드 맨들이 무슨 일 하는 지도 닥터는 모르잖아요. 왜냐면 형은 닥터니까요. 조직원들에게 주워듣는 이야기가 다일 테니까요. 아무리 형이 보스나 언더 보스, 카포레짐이랑 친해도 그분들도 전부 형한테 이야기를 숨기고 있을 텐데 겨우 그거 듣고 다 안다고 생각해서 이래요? 형, 닥터. 가끔 보면 닥터가 왜 여기 있나 싶어요. 이렇게 순진하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씨발. 혁이는 노려보다 싶이 응시하던 눈을 풀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뒷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어떻게든 만들어낸 감정으로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다가 혁이와 눈을 마주치자 혁이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인다. 자신이 던져놓은 말을 주워 담지는 못하니까. 후회와 죄책감에 차서 하는 행동에 내가 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보지도 못하고 뒤 돌아 자신이 누워있던 침대로 걸어간다. 착각하는 순진한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이렇게 즐겁다. 상혁아, 너는 모르지. 내가 그냥 학연이의 눈에 들어서 닥터가 된 거 같지. 내가 전대 언더 보스의 아들인 건 모르지, 알 리가 없지. 내가 학연이랑 소꿉친구인 것도, 너가 하는 작전도 전부 나랑 원식이가 같이 짜는데. 왜 우리 마피아에는 콘실리어리가 없는지 모르지. 넌 죽어도 모르지. 모르고 네가 보이는 것만 믿고 있지. 순진한 게 누군데.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자만감에 빠져 이렇게 멍청하게 쏟아내는 게 누군데. 그렇게 쏟아낼 거면 순진하게 자책하는 모습이라도 보이지 말지.
저, 그... 상혁아. 나 학연이한테 좀 다녀올게. 충격받은 목소리를 연기하면 상혁이는 한참 등을 돌리고 있다가 대답 없이 커튼을 쳤다. 상혁아, 너랑 내가 사람을 속이는데 다른 점은 죄책감의 유무야.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죄책감을 안 느끼는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나한테 거짓말 치는 건 죄책감 느끼지. 나가는 발걸음이 가볍자 김원식이 쳐다보다가 혀를 찬다. 가졌어요? 응. 순진한 애 가지고 뭐 하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면서 뭘 새삼스럽게. 김원식은 맘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옷자락을 정리해주고 턱짓한다. 보스는 방에.
"학연아."
"우리 택운이 왔어?"
응, 가진 거 같아. 잘했네, 마음에는 들고? 아직 안 죽였잖아, 마음에 들지. 학연이가 뻗은 팔을 따라 안기면 학연이는 툭 웃음 짓는다. 온기가 따스하다. 넌 언제까지 이 온기를 품고 살까. 어깨에 기대 가만히 눈을 감으면 뒤통수부터 목까지 쓸어내리는 손이 거칠다. 옛날에는 그래도 부드러웠는데. 뭐가, 손이? 응. 그래서 지금은 싫어? 누가 싫대. 그럼 됐어.
어느 날 학연이에게, 너 그렇게 살면 아무도 보스로 안 봐. 하고 쓸데없는 충고를 한 날에. 그때 이불을 치우고 부스스 앉아 나를 바라보며, 택운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너가 원하는 걸 주기 위해서야. 하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네 목소리가 여전히 뇌리에 깊게 박혀서. 내게 연기를 가르치고, 거짓말을 가르치던 학연이는 네가 얻고 싶고 원하는 것이 있을 때 필요할 테니까, 하고 지친 나를 달랬다. 학연아, 너는 내가 다른 사람을 가지고 좋아하는 게 좋아? 라고 물었을 때,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너가 좋아하는 것들을 얻게 해주는 데 뭐가 중요하겠어. 하던 학연이는 분명히 우리가 같은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살아온 시간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모든 걸 안을 수 있어? 그냥 그렇게 멍청한 질문을 했을 때도 너는 뭐라 했었지.
참 잘 뻗은 턱선이다. 그새 잠들어 침대에 어정쩡하게 옆으로 누운 상혁의 곧은 턱선을 슬슬 따라 올리며 깊게 미소 지었다. 얻었어, 그 하나로 탐욕으로 잔뜩 번들거리는 마음에 진정 시킨 느낌이다.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그 옛날에 학연이가 내게 보이던 그 눈빛마냥 내 눈빛도 그리되어있을 거라고.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다. 욕망을 충족한 눈은 다 똑같은 법이다. 손을 뻗어 남색 머리를 매만지면 군데군데 피가 눌러붙은 안 좋은 결의 머리가 손에 쓸린다. 그래, 있지.
학연아, 나는 사람이 가지고 싶어.
그것도 내가 순진하다고 믿는 사람이 가지고 싶어.
내가 순진해서, 너무너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착각하는 애가 가지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