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와 개
W. 별빅토끼
@ravightsm94
창문 하나 없이 전부 하얀 벽지로 둘러싸인 이 공간에 피아노 한대가 있었다. 문고리가 드르륵 돌아가더니 백발의 젊은 남자가 들어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백발임에도 그의 외모는 젊고 아름다웠다. 하얀 건반위에 가느다란 손가락을 올리고 부드러운 선율의 곡을 연주했다. 그의 연주가 텅 비어진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때, 문고리가 다시 돌아가더니 하얀 정장을 갖춘 남자가 들어와 그의 연주를 방해했다.
“저, 저기 레오님....”
탕-
남자가 쓰러졌다. 자신의 공간에 허락없이 들어와 연주를 방해한 것이 몹시 기분이 언짢았다. 망설임 없이 허리에 찬 총을 들어 남자의 머리통을 날렸다. 하얀 벽면이 검붉은 피로 물들고 바닥은 흥건하게 젖었다. 총 소리가 들리자 옆방에 있던 홍빈이 놀라 복도로 나왔다. 피아노방, 살짝 열린 문틈으로 시체가 보였다.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갔다. 피비린내.
“레오님?”
“치워”
홍빈은 그의 명령에 시체의 양쪽 겨드랑이에 자신의 두 팔을 끼우고 시체를 일으켰다. 레오는 홍빈의 손에 끌려 나가는 시체를 가만히 보다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레오는 다리를 구부리고 앉아 시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홍빈아”
“네. 레오님”
“죽이자”
그의 말에 동공이 흔들리더니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레오가 평소 불면증과 악몽에 자주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도 원인도 모든 화살이 그 하나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도... 결국 오고야말았다는 생각에 두통이 찾아왔다. 스스로를 파괴하는 그 원인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을 거라는 불안감. 레오는 화이트폭스의 1인자 자리를 굳건히 지켜왔다. 그 누구도 그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는 잔인하고 냉정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는 조금씩 자신이 약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앞에선 실실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아무 일 없는 듯.. 광대같은 놈이... 사람을 아주 가지고 놀지. 내 자리를 노리는게 분명해”
“제가 아는 켄은 저희 조직 2인자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녀석... 조만간 나를 죽일거야. 내가 죽기 전에 그 녀석을 먼저 처리하자”
그는 단호했다. 용기 내어 말한 것조차 묵살 당했다. 화이트폭스의 숨겨진 2인자 켄은 레오와 달리 정이 많고 폭력과 불법이 판치는 조직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화이트폭스의 부하들은 켄을 히어로처럼 여기고 따랐다. 그것을 눈치 채자 자신이 키운 화이트폭스가 자신을 배신할거란 생각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끝내 불면증과 환각의 원인이 되어버린 켄이 남모르게 죽기를 바래왔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뛰어난 실력으로 불구덩이에서 살아 돌아왔다.
“홍빈아... 설마 사소한 감정 때문에 너도 나를 떠나려는 거니?”
“아닙니다. 레오님... 지시대로 하겠습니다.”
“역시 홍빈이, 우리는 오래봐야지. 이 시체랑 같이 그 녀석도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막상 처리하려니 머리가 복잡했다. 이 둘은 화이트폭스에 들어와 서로 의지하며 오랜 기간을 함께 지낸 사이였다. 자신을 받아준 레오를 종교처럼 믿는 홍빈과 다르게 켄은 떠돌이 고아였던 자신을 구해준 은혜를 갚고자 화이트폭스에 남아있는 이유였다.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한 한 마리의 까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시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한 달도 되지 않은 신입이었다. 그 누구도 피아노방에 들이지 말라 신신당부하던 곳이었다. 총소리를 듣고 몰려온 부하 몇 명에게 시체를 건네주고 켄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달라 지시했다.
-
해가 지고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킬 때, 밤하늘의 횃불은 모두가 잠든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홍빈아!!”
켄은 간만에 보는 그의 얼굴이 반가웠다. 그가 앉은 책상 건너에 놓여진 손님용 소파에 몸을 던지며 누웠다. 홍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처럼 켄이 누운 소파 건너에 있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정장 안쪽 주머니에 있는 담배 한 개피를 꺼내 입에 물었다.
“담배 안피지 않았어?”
“답답해서”
“그러다 일찍 죽는다.”
“지금처럼 살면 형이 먼저 죽어”
그는 스파이였다. 모든 연기에 능숙했고 총을 잘쓰며, 싸움 실력도 훌륭했다. 그러나 그는 사람에 약하고 정에 약한 남자였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꺼려하고 힘들어했다.
“레오님의 명령이야. 장기밀매 조직 클린에 트레이더(거래자)로 가서 시체가 든 캐리어 거래하고와”
“또 이상한 미션을 주시네... 난 스파인데 대놓고 트레이더로 가라고?”
“그냥 거래 아니야. 그 놈들 우리랑 직접적으로 거래한적도 없는 놈들인데 해외에서 유통해오는 우리 무기들을 중간에서 빼돌리고 있어. 거기다 V구역 통합 조직들 중 하나야.”
클린은 돈이 되는 건 뭐든 하는 놈들이었다. 홍빈은 청부살인도 돈만주면 해주는 악질 중에 악질인 클린을 미리 포섭했었다.
“증거가 되는 장부와 중간 유통과정에서 우리 물건을 어떻게 빼냈는지 알아오면 돼?”
“응. 조약을 깼다는 증거만 가져오면 V구역 조직들이 우릴 도와 클린을 제거할 수 있어”
“가기 싫다... 클린이면 조직도 크고 잔인한 놈들도 어마 어마 할 텐데”
“형. 나는 형이 좀 더 그 능력을 헛되게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레오님이 쓰레기더미에서 우릴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잊지마.”
“...........알겠어.”
-
오로지 별빛만이 가로등이 되어 도시를 비추는 밤. 어둑하고 으슥한 길은 낯선 이의 발소리에 잠시 눈을 뜬다. 골목을 지나 낡은 상가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홍빈이 알려준 I-25로 시체가 든 캐리어를 끌고 이동했다. 그 곳엔 다른 차들은 없이 검은 봉고차 한대만 주차되어 있었다. 조심스레 캐리어를 가지고 다가가자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 켄의 양팔을 잡아끌어 곧바로 차에 태웠다. 덩치는 산만한 놈이 옆에 앉아 곧 바로 켄에게 안대와 자갈을 물렸다.
“몸 수색해봐”
혹시나 가져 온 총 한 자루를 뺏겼다. 클린이 거칠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런 접대는 처음이었다.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는지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탄 차는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장기밀매가 가능한 작은 항구나 불법체류자들이 사는 구석진 동네로 갈 거라 짐작했다. 그때, 달콤하고 씁쓸한 향기가 났다.
“일어나”
켄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꽤나 푹 자고 일어났다. 이미 안대는 벗겨져 있었고 눈을 뜨니 생각보다 익숙한 공간이었다. 고기창고. 빨간 조명들과 죽은 돼지들의 비릿한 비계 냄새. 어째서인지 자신이 의자에 묶여있다. 목적을 들키지 않는 한 이런 취급을 받을 리 없던 켄은 고민과 동시에 고갤 들어 자신 앞에 서있는 클린의 수하들을 노려봤다.
읍-
더구나 입까지 테이프로 꽁꽁 싸매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치 차오르지만 할 수 없었다. 클린의 수하 중 하나가 앞으로 다가와 눈높이를 맞추며 자신이 피던 담배 연기를 켄의 얼굴에 뿜었다.
“나는 이미 죽은 건 거래 안해. 고작 시체 하나로 우리랑 거래할 생각이었다면 아주 큰 오산이야.”
“…………”
“우린 신선하고 싱싱한거... 팔딱팔딱 뛰는거…. 딱 너 같은 놈.”
“…………”
“거, 용구야 좀 이따 재료 손질하게 도구 좀 깨끗이 씻어 놔라”
“옙!!!”
켄은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이해하려 했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홍빈이 자신에게 말한 것과 달랐기 때문에. 비린내가 진동하는 이곳에 용구라는 남자와 켄 단 둘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켄에게 안대와 자갈을 물린 덩치 산만한 놈이었다. 그는 바닥에 놓여있던 공구함에서 여러 종류의 칼들과 도구들을 일일이 씻어냈다.
굳은 피가 칼 면에 덕지덕지 붙어 역겹고 더러웠다. 도망칠 궁리를 하던 켄이 번뜩 생각이 났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이런 날을 대비해 항상 뒷주머니에 손톱만한 면도날을 넣어 다녔다. 다행히 뒤로 묶인 덕에 들키지 않게 손을 꿈틀거려 면도칼을 꺼냈다. 다음 자신의 팔목에 묶인 밧줄에 손을 팔목 안쪽으로 숙여 면도날로 조금씩 끊어냈다. 그러던 중 실수로 자신의 손목이 긁혀 피가 조금 흘렀다. 신음소리가 새어 나갈 뻔 했다. 쓰라림을 참고 다시 밧줄 끊어내는데 집중하자 금세 뚝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밧줄이 끊어졌다. 테이프까지 조심스럽게 뜯어내고 덜그럭 거리며 도구 씻는데 바쁜 용구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자신이 묶여있던 의자를 들어 그의 머리로 내리쳤다.
“으억!!”
그가 쓰러지긴 했지만 기절하지 않자, 켄은 옆에 도구 중 몽둥이로 다시 그를 내리쳤다. 두터운 마찰음과 함께 그가 신음을 뱉었다. 살이 두꺼워서 그런지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야 이....!! 쓰러져라 좀!!!”
발로 머리를 내리치고 나서야 그가 기절했다. 흐르는 땀을 닦고 쓰러진 용구 주머니에서 총과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홍빈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왜 중요할 때 안받는거야!! 애들 번호라도 외워둘걸….”
핸드폰은 뒷주머니에 넣고 총을 장전했다.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살펴보니 평범한 정육점 식당이었고 가게 밖은 이미 해가 뜬 오후였다. 가게는 생각보다 넓어 많은 조폭들이 고기를 먹고 있었다. 우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조용히 손님인척 나가면 아무도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조심스레 밖으로 발소리를 죽이고 나왔는데 갑자기 정전이라도 된 듯 가게 안이 조용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식당에 앉아 밥 먹던 약 50명 되는 손님들이 모두 정색하고 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게 안은 고기 익는 소리만 날 뿐 아무도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때, 아까 본 수하가 화장실에서 손을 털고 나와 손님들의 시선을 따라 켄을 바라보았다.
“뭐여? 도망가잖아 잡아!!!!”
50명 중 약 30명이 켄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켄은 손에 든 총으로 자신에게 달려는 녀석들의 허벅지만 노려 총을 쐈다.
탕- 탕 탕탕탕 --
총소리가 가게 내부에 울리고 몇 명의 부하들이 총을 들어 켄을 노렸다. 켄은 빠르게 탁자위로 올라가 총을 쏘며 돌다리 건너듯 식탁을 옮겨가며 움직였다. 스쳐가는 물건들이 발에 치여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으윽-”
총을 들었던 오른 팔에 총알이 스쳤다. 다른 총알보다 더 쓰라리고 찌릿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기엔 당장이라도 목숨을 잃을 판국이었다. 슬쩍 가게를 나가는 문을 보니 이미 가게 문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가게 벽면이 모두 유리로 이루어져 있으니 최대한 벽면으로 붙어 그 곳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거란 판단이 들어 유리 벽면을 향해 3발을 쐈다. 유리벽은 다행히 총알이 뚫고 가 유리 구멍과 금이 생겼다. 그 곳으로 당장 몸을 던졌다. 유리벽이 깨지고 유리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밖에 있던 부하들과 안에 있던 부하들이 토끼몰이 하듯 모두 나와 켄을 쫓았다.
“더럽게 많네!!”
켄은 다친 팔을 부여잡고 계속 해서 나오는 골목들 사이사이를 뛰었다. 그렇게 쫒기고 쫒기다 폐가 터질듯 숨이 차던 중 회색 시멘트 꾸역꾸역 발라놓은 대형 공장이 보였다. 공장을 향해 앞만 보고 뛰었다. 공장 전용 주차장에 다다를 때 쯤 뒤에서 4명의 부하들이 켄을 발견하고 쫒아왔다. 켄은 총으로 쏴보려 했지만 총알이 떨어졌는지 애꿎은 방아쇠만 당겼다. 총을 버리고 주변에 숨을 곳이 있나 두리번거리던 중 주차장에서 검은 승용차 한대가 나오고 있었다. 켄은 생각할 틈도 없이 다짜고짜 차로 달려가 가는 차를 막았다. 그것이 최선의 살 길이라 생각했다. 운전대를 잡던 남자가 놀라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멈추었다. 창문을 열고 비키라는 손짓을 했지만 켄은 오히려 그 차로 달려가 열린 창문 틈에 자신의 손을 넣고 올리지 못하게 막았다.
“살려주세요!!”
결국 창문이 더 내려가고 약간의 앳된 얼굴의 남자가 인상을 구기고 켄을 올려다보았다. 켄은 더욱 간절하게 부탁했으나
“내가 왜 그 쪽을 살려야합니까?”
그의 반응은 냉랭하게 돌아왔다. 마음이 급해지고 식은땀이 온몸에서 흘러내렸다. 오싹한 기운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놈들이 주차장 입구까지 다가왔다. 잠시 한 눈판 사이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다시 창문을 올리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제발 돈이고 뭐고 다 줄테니까 한번만 태워주세요!! 사람이 죽는 다구요!!”
부상당한 팔에서 피가 흘러 손끝까지 타고 내려왔다.
피 묻은 손으로 닫히는 창문을 간신히 막자 피 묻은 손을 본 남자는 다시 창문을 내렸다.
“하... 이게 무슨 택시도 아니고, 일단 타요.”
달칵-
켄은 차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다급하게 뒷좌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한 숨을 돌리기도 전에 앞에서 총알이 날라 왔다.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총을 쏴댔다. 운전석의 남자는 들릴 듯 말듯 욕을 하곤 악셀을 급하게 밟았다. 차가 앞으로 튕기듯 나가니 총을 쏘던 놈들이 옆으로 몸을 굴리고 차를 향해 총을 쏘며 뛰어왔다. 그러나 사람이 달리는 차를 잡을 수 없었고, 차는 넓은 도로로 나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달렸다.
“아윽... 아퍼라”
따돌리고 나서야 마음이 놓인 켄은 그제서야 다친 오른 팔이 눈에 들어왔다. 총알이 스친 팔은 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왼 팔로 오른 팔을 부여잡고 지혈하자 옆에서 보라색 손수건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써”
옆에 사람이 있는지 몰랐다. 남자는 중저음의 목소리로 손수건을 건넸다. 약간의 구릿빛 피부와 다부진 팔과 어께, 오똑한 콧날.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받은 손수건 역시 익숙하고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손수건으로 떨어지는 핏물을 조금 닦은 후, 총상 입은 팔을 손수건으로 묶어보려 했으나 한 손으론 역시 무리였다. 남자는 켄의 손수건을 낚아채더니 총상 입은 팔위에 묶어주었다.
“아파?”
“아뇨. 묶으니까 좀 괜찮아요.”
굵직한 목소리로 걱정해주었다. 아프고 정신없던 켄에게 안정제마냥 매우 안심되는 목소리였다. 따듯함은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손목은 왜 그래”
“아.... 밧줄 끊다가... 잡혀있었거든요.”
“뭐하다”
“납치당했다가 도망쳤어요. 노량진 고시원에 살면서 취업 준비하고 있었는데... 새벽에 저를 차에 태우더니 막... 뉴스로만 보다 직접 겪으니까 정말 무섭더라구요. 전 날 편의점에서 면도칼 사고 주머니에 넣은 게 신의 한수였죠.”
거짓말은 어렵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것은 켄에게 지극히 자주 있는 일이니까. 그 평범함을 간절히 바라며 살아왔으니까. 거짓말은 익숙했다.
“아까 보니 총도 가지고 있던데”
“당연히 훔쳤죠. PC방에서 총 게임 하던 실력이 여기서 쓰이네요. 하하...”
그는 무표정으로 켄을 바라봤다. 어떤 대화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켄은 그의 눈을 피했지만 그의 시선은 부담스럽기만 했다. 결국 고갤 들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 눈이 마주쳤고, 그는 핸드폰에 있는 카메라 어플을 실행해 셀카로 돌려 켄에게 바짝 다가갔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자 켄의 심장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 것 같았다. 이유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오른팔을 쭉 뻗어 자신의 얼굴을 켄의 얼굴에 밀착했다. 아주 미세한 거리만 두고 서로가 붙어있는 지금. 스마일~
핸드폰에서 웃기를 강요당했다. 켄이 웃지 않자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어봐”
찰칵 소리가 나자 그는 다시 폰을 거두고 사진을 확인했다. 셀카가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말했다.
“합격”
켄이 도착한 곳은 XX오피스텔이었다. 호수만 달랑 적힌 306호에 다다르니 정장입은 남자들 수십명이 모두 나와 길을 트고 인사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보스!!”
보스라 불린 이 남자는 실로 대단한 사람인가보다. 보스가 306호로 들어가자 켄과 그의 운전사도 함께 따라 들어왔다. 안은 제법 회사 사무실처럼 깨끗하고 깔끔한 분위기였다. 그가 자신의 자리에 앉자 켄 역시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운전하던 남자가 인상을 구겼다.
“보스가 앉으라 하지도 않았는데 왜 멋대로 앉습니까?”
켄은 언제부터 자신이 이 곳 명령에 따라야 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차 안에서 들은 합격이란 소리가 사진이 아니라 켄인 듯 했다.
“혁아”
“보스! 이 사람 진짜 저희 조직에 넣으실 겁니까?”
“멋대로 차에 태운건 너야. 요즘 인원도 부족한테 여기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계약서부터 쓰라해.”
도끼눈이 된 혁이 투덜거리며 책장 아래 서랍에서 종이 한장과 펜을 켄 앞에 툭 던졌다. 켄은 혁과 종이를 번갈아 쳐다보다 펜을 들고 종이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흩었다.
“무기거래조직 도베르만의 갑 김원식과 을은 세 가지 규칙을 지킨다. 첫 번째, 을은 갑에 대한 정보를 밖으로 구설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을은 갑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세 번째, 을은 갑에게 진실만을 말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계약 위반으로 갑의 형벌을 달게 받는다”
“싸인 하시죠.”
맙소사. 도베르만은 화이트폭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과거 도베르만이 화이트폭스를 포함한 모든 조직들을 누르고 통합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진 원수와 같은 곳이었다. 켄은 원수의 집에 스스로 들어온 꼴이 되어버렸다.
“저 잠시 화장실 좀...”
“싸인 하고 가시죠?”
“진짜 급해서.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복도 끝에 있는 방 화장실로 가요.”
복도로 나와 그가 말한 복도 끝 방으로 갔다. 휴식공간으로 쓰이는 곳인 듯 했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그고 뒷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을 꺼내 다시 홍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받아라... 받아, 이홍빈”
길고 긴 신호음이 끊기고 홍빈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아까 전화는 왜 안받았어”
- 왜, 무슨 일이야?
“말할게 많지만 시간이 없어서 급한 것만 말할게”
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문과 거리가 있는 벽면에 몸을 밀착했다.
“클린이 나를 죽이려했어. 겨우 도망치다 차를 탔는데... 어쩌다보니 그게... 도베르만이 타고 있는 차를 탔어.”
- 도베르만?!
“어.. 내가 일단 신분은 숨겼는데, 이 쪽 보스가 나를 자기 조직으로 들어오래”
- 일단 들어가
“일 잘못 꼬이면 피바다가 될 거야, 그냥 어린애들 패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거라고... 그래도 괜찮겠어?”
- 이런 기회 흔하지 않잖아... 레오님도 허락해 주실거야.
“알겠어, 일단 끊자”
켄은 다시 폰을 뒷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 없다는 듯 돌아와 머쓱하게 웃으며 펜을 집었다.
“을 이재환은 갑 김원식에게 진실만을 말한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계약 위반으로 갑 김원식의 형벌을 달게 받는다.”
홍빈은 급하게 레오가 있는 방을 찾았다. 레오는 자신이 키우는 쥐를 돌보고 있었다. 털은 하얗고 눈은 새빨간 하얀 쥐.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홍빈의 노크에 레오가 웃으며 반겼다.
“레오님, 켄이 살아서 빠져 나갔습니다. 죄송합니다.”
“...좋은 소식이 아니구나”
레오의 표정이 굳었다. 홍빈을 등지고 다시 쥐에 눈길을 돌렸다. 홍빈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켄이 도망치던 중 도베르만이 타고 있던 차에 탑승해 함께 도베르만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도베르만? 켄이 도베르만과 손을 잡았어?”
“아니요, 우연인듯 합니다. 켄이 신분을 숨기자 저희 조직인줄 모르고 도베르만으로 들어오라 한 것 같습니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잠시 생각에 빠진듯 하더니 홍빈의 주변을 맴돌았다. 홍빈의 두 어께를 감싸고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두 마리 다 잡을 수 있는 기회야. 경계가 치밀한 도베르만에 스파이를 심어두지 못한 게 흠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데려갈 줄이야. 들려오는 소문으론 도베르만이 신무기를 만들어 다른 국가와 거래할거란 소리를 들었다”
“네, 소재파악은 못했으나 신무기를 개발한다는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켄에게 당장 신무기에 대한 정보 알아오라 시키고, 거래 시간, 장소 등등 전부 파악해서 도베르만을 친다.”
“저 그럼 켄은….”
레오는 홍빈의 목덜미를 손톱으로 조심스레 그었다.
“도베르만과 함께 켄은 죽는다.”
태양과 달이 수차례 뜨고 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식이 켄의 방을 찾았다. 곤히 잠든 켄을 바라보다 전에 다친 켄의 오른팔을 보았다. 덕지덕지 대충 묶어둔 붕대와 널부러진 소독약들. 작은 한숨을 내쉬고 붕대를 집어 들어 자신의 옆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켄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아물기는 했지만 흉터는 남아있었다. 그의 흉터를 만지자 켄이 신음소리를 내고 인상을 구겼다. 잠든 그의 얼굴을 구경했다.
“과거, 내가 처음 도베르만에 들어왔을 때 살인에 미쳐 날뛰던 적토마였다. 그 날도 조직 하나를 무너뜨리고 돌아가는 길이었지. 싸우다 다친 상처로 잠시 길에 쓰러져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내 또래 남자가 날 찾아 온거야. 그는 피로 젖은 나를 무서워하면서도 자신이 가진 손수건으로 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며 말했지.”
‘다들 너보고 싸움 실력이 대단하데, 나도 너가 대단하다 생각해. 그리고 너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사람 죽이지마. 네가 죽인 사람들, 누군가에겐 정말 소중한 사람이었을거야... 내가 널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야... 너도 죽지마.’
“소중한 사람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그가 보였다. 울고 있는 그의 눈, 코, 입.... 전부 내 눈에 담았다. 나를 위해 울어준 사람. 이후 살인을 하려는 순간이 오면 그 얼굴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처음으로 내게 친절을 베푼 그가 소중해진거야. 그렇게 얼굴밖에 모르던 그를 찾으려 몇 년을 헤맸는데.... 정작 너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네”
켄이 뒤척이자 흘린 이불을 끌어올려 그에게 살포시 덮어주었다. 켄이 악몽이라도 꾸는지 신음을 뱉으며 괴로워했다. 원식은 켄이 식은땀까지 흘려가며 힘들어하자 그를 깨웠다. 잠에서 깬 켄이 다짜고짜 그를 덥석 안았다. 원식은 그런 그를 밀어내지 않고 똑같이 안아주었다.
“너를 좀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원식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이곳이 편해서였을까 아님 잊고 있던 기억을 잊지 말라 깨우쳐주기 위함인 것이었을까. 자신의 죽은 동료들과 부하들이 꿈에 나온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살아있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더욱 더 그들의 몫까지 행복하려 했다. 겉으로 보이는 행복보다 죄책감과 미안함이 더 가슴속 응어리로 남아있었는지 또 다시 악몽을 꾸었다.
“미안해요.... 미안해.”
울다 지쳐 온 몸에 힘이 풀린 켄이 원식의 어께에 얼굴을 묻었다. 원식은 어린 아이를 달래듯 아무 말 없이 그의 등을 다독여주었다. 문이 열리고 혁이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에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언제부터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신 겁니까?”
“악몽을 꾼 것 같다. 아무래도 그 곳에서 겪은 일이 후유증이 된 모양이야”
원식은 따듯한 눈빛으로 그를 달랬다. 여전히 그 모습이 혁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표정을 찡그리고 가져온 커피를 탁자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 진정된 켄이 어께에 묻던 얼굴을 들고 원식의 얼굴을 확인했다.
“앗, 죄송해요”
그는 켄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주며, 얼굴을 마주보고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다”
혁은 그들을 두고 다시 방을 나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혁이 걸음을 빨리 했다. 복도를 조금 지나다 자신의 부하와 마주쳤다. 혁은 그를 은밀히 불렀다.
“이재환, 진짜 신상을 털어와”
“네, 알겠습니다.”
-
시간의 흐름처럼 구름도 같이 서서히 어둠에 물들어 검게 변했다. 자신의 변함이 익숙치 않은 듯 비를 내려 씻고자 했다. 뜻밖의 비에 거리를 거닐던 사람들이 비를 피해 뛰었다. 비를 맞는 사람도 비를 피해 뛰는 사람도 그저 켄에겐 평범함을 가진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지-- 잉 ---
켄은 주변을 경계한 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나야
“응. 말해”
- 레오님께서 도베르만이 만든 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캐오래. 그 무기를 거래하는 날, 도베르만을 칠 예정이야
“도베르만을 친다고?”
- 응. 그러니까 형이 정확한 거래 날짜와 장소 등 그에 대한 정보를 알려줘야 돼
“도베르만 스파이라...”
- 왜 말끝을 흐려, 도베르만의 일원이라도 된거야?
“아, 아니야... 알아내는 대로 다시 연락 줄게.”
전화가 끊기고 다시 창가로 고갤 돌렸다. 거리에 사람은 줄고 비는 거칠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여전히 하늘은 흑 빛을 띄우고 먹구름은 비를 내렸다.
“너도 검게 변한 네 모습이 싫어서 우는 거지?”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생각보다 할 일이 없었다. 중요한 임무를 주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내 할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내며 지냈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서점에서 책을 구입해 영어공부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저녁이 되면 스케줄을 마친 원식과 혁을 만나 함께 저녁을 먹었다. 혁은 여전히 켄이 못마땅하나 원식이 계속 켄과 함께 저녁 먹는 것을 원했다.
“오늘도 공부했나?”
그는 스테이크를 자르며 켄의 일상에 관심을 가졌다. 켄이 하는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좋은 책을 추천하기도 했으며, 켄이 좋아하는 음식을 같이 먹어주기도 했다. 오늘도 켄이 쉽게 먹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레스토랑에 데려와 같이 스테이크를 먹는 중이었다.
“아, 네. 여기서 제가 쓸모 있으려면 영어 공부를 좀 해두는게 좋을 것 같아서요”
“도베르만에 대해 배우는 것도 필요하니 내일은 혁이랑 함께 다녀와”
“보스!!!! 거긴….”
혁이 놀란듯 나이프를 손에 쥔 채 탁자를 치곤 말을 잇지 못했다. 혁은 켄을 쳐다보고 인상을 구겼다.
“어딘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냥 혁이 따라 가보면 알거야”
식사를 마치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혁은 여전히 마음에 안드는지 입을 꾹 다문 채 주차를 하러 갔고, 원식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려는 켄의 손목을 붙잡았다.
“고시원에 살면서 늘 혼자라 했었지?”
“네...”
“보여줄게 있어”
원식은 자신의 방으로 켄을 데려갔다. 문을 열자 작은 강아지 한마리가 후다닥 뛰어왔다. 강아지는 원식을 보고 짖기도 하고 꼬리를 흔들기도 하고 바닥을 뒹굴기도 했다.
“엉덩이다”
“에?”
“강아지 이름”
흔하지 않은 강아지 이름에 실소가 나왔다. 강아지의 화려한 애교기술에 홀려 같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엔 화려한 제품들로 가득했고 비싼 물건들이 잔득 장식되어 있었다. 그 중 눈에 들어 온건 엉덩이 간식이었다.
“이거 엉덩이 좋아해요?”
육포같이 생긴 간식을 들어 원식에게 보여주자 원식은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다 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레가 걸려 거친 기침을 하더니 입가에 묻은 물을 닦았다.
“..........좋아한다”
“아, 좋아해요?”
“그래. 좋아해”
켄은 해맑게 웃으며 엉덩이에게 육포를 조금 뜯어 주었다. 그러나 엉덩이는 육포 냄새를 맡더니 킁 소리를 내며 육포를 피해 자신의 보금자리로 재빠르게 돌아갔다. 엉덩이가 자신을 거부하자 기분이 나빴다.
“이 엉덩이야!! 육포 좋아한다면서 왜 안먹어!!”
다음 날, 혁은 켄과 함께 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 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숲속 길이 거칠어 자동차로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자 혁과 켄은 걸어서 길게 자란 풀을 헤치며 산길을 걸었다.
“여긴 올 때마다 적응이 안돼.”
“컨테이너박스...?”
드넓은 숲 한 가운데 거대한 컨테이너가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컨테이너의 크기는 거대한 공장처럼 보였다.
“들어가면 그쪽보다 더 제 정신 아닌 사람 있습니다.”
“누군데요?”
“저희 소속 미친놈이요”
“근데 왜 존댓말해요?”
“그 쪽과 별로 친해지고 싶지 않아서요.”
컨테이너에 다다르자 장미 덩쿨에 가려진 문이 들어났다. 혁은 주머니에서 가위를 꺼내 덩쿨을 자르고 문고리를 당기자 쇳소리가 거슬리게 들리더니 안에서 분홍빛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켄은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옆에 있는 혁의 옷깃을 잡았다. 그렇게 그와 함께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니 검은 도포를 입은 누군가 네모난 욕조에 들어가 장미꽃 잎이 가득 든 물을 얕게 받고 머리를 욕조 끝에 기댄 채 누워 있었다. 마치 그의 모습은 과거의 시간에 멈춘 남신의 모습 같았다.
“엔”
“내 라비는 어디가고 꼬맹이가 왔니?”
혁은 그를 엔이라 불렀다. 안개가 조금 옅어지고 엔이 일어났다. 안개 사이로 몸이 젖은 그가 혁과 켄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의 검은 머리와 젖은 옷이 몸에 딱 붙어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바람에 눈을 어디에 두어야할지 몰랐다. 그러다 급 그가 말한 라비란 사람이 궁금해 혁의 귓가에 다가가 들릴 듯 말듯 조심스레 물었다.
“라비가 누구에요?”
“푸하하핫, 라비도 모르는 애송이라니... 안녕. 넌 처음 보는 아이구나”
호탕하게 웃으며 혁의 말을 가로챘다. 그는 켄을 보곤 살며시 웃으며 그의 앞을 지나쳐 옆에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었다. 켄이 엔을 따라 가려다 혁이 붙잡았다.
“보스의 예명이 라비에요!! 그것도 몰랐습니까?”
라비... 기억났다. 라비가 도베르만의 보스라는 것을. 과거 켄이 막 화이트폭스에 들어갔을 때 지역간의 분쟁에 모든 조직들이 서로를 물어뜯기 바빴다. 그때, 도베르만에선 켄과 비슷한 또래 아이를 혼자 그 싸움에 보내면서 모든 싸움을 종결시켰다. 그 아이의 이름은 라비였고 켄에겐 동경의 대상이었다. 거의 살인 무기였던 라비를 보고 무서웠지만 마음 한 구석에 그가 있었다. 어린 라비는 도베르만의 보스자리를 얻는 댓가로 각 조직의 에이스들을 처참히 죽였고 보스들을 죽이지 않는 댓가로 그들에게 모두 조직 통합을 위한 조약서를 쓰게 했다. 고작 앳된 소년에게 패배한 거대 조직들이 이를 갈았다. 몇몇의 조직들이 약속을 깨고 도베르만을 치려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화이트폭스의 레오 역시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를 잃고 도베르만에 복수 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실패한 조직들이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도베르만에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엔은 조향사에요. 위험한 사람이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향사면 향수를 만드는 사람? 그게 왜 위험해요?”
“평범한 조향사가 아니니까요. 시체로 향을 만들고 독으로 안개를 만듭니다. 무기제조도 직접 하는 사람이라 시체되지 않게 조심하시라구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농담인지 겁주려 하는 말인지 으름장 놓듯 켄에게 말한 뒤 혁은 다시 엔을 따라갔다. 도베르만의 비밀 신무기. 켄은 그제서야 자신이 엄청난 곳에 와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식이 아니 도베르만의 보스 라비가 켄에게 도베르만의 전부를 직접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혁이 더 켄을 경계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이해가 됐다. 혁의 뒤를 따라 엔이 들어간 문으로 따라 들어갔다. 긴 복도 양쪽으로 실험실이 줄지어 있었다. 투명한 유리창으로 보여 지는 실험실 안에는 각 종 기계들이 작동하고 있었다. 복도 맨 끝 실험실에 서있던 엔이 혁과 켄에게 방독면을 주었다.
“라비가 너희를 보낸 건 그만큼 신뢰하고 있다는 거겠지. N의 Bar에 초대된 너희를 환영해”
그가 문을 열자 유리 진열대 위에 바르게 진열된 향수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향수가게도 이토록 많지는 않을 것이다. 진열대 아래엔 와인바가 있었는데 엔은 와인바 안쪽으로 들어가 뒤에 놓인 노란 향수병을 가지고 돌아왔다.
“나의 귀여운 혁아, 내가 널 위한 향수를 만들어봤어”
“내가 왜 그쪽 혁입니까? 그리고 당신이 만든 향수는 사절입니다”
엔은 혁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향수 뿌리는 시늉을 했다. 혁의 반응을 즐기는 듯 그의 몸짓은 몹시 즐거워보였다. 혁은 이런 상황을 이미 겪어본 듯 가만히 서있을 뿐이다. 엔은 혁의 뒤로가 그의 어께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너무해. 이 향수는 세상에 단 하나 뿐이라구. 향을 맡은 모든 이들이 널 위해 옷을 벗을 거야"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필요 없고 보스가 맡기신 물건이나 빨리 줘요”
혁은 그를 매정하게 뿌리쳤다. 엔은 아쉽다는 얼굴로 켄에게 다가왔다.
“이름?”
“이재환이요.”
“재환이는 어떤 향수를 받고 싶니?”
“저도 괜찮습니다.”
“아니, 너는 이 향수가 좋겠다!”
엔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우더니 향수 진열대에서 향수 2병을 가지고 왔다.
“먼저 이 향수는 진실만 말할 수 있는 향수고, 두 번째 이 향수는 죄책감을 지워주는 향수란다. 어떤 향수를 원하니?”
엔은 마치 켄의 모든 것을 꽤 뚫어 보는 것 같았다. 엔의 눈동자가 마치 뱀의 눈으로 변해 자신을 보는 것 같은 환상마저 들었다.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혁이 잡아주었다.
“엔이 장난치는 거에요. 진짜 그런 향수를 만들 재주면 조향사가 아니라 마법사였겠죠.”
“그, 그렇죠. 하하”
아무렇지 않은 척 살살 웃으며 넘어갔지만 들킬까봐 조마조마 했던 건 사실이었다. 자신이 스파이라는 것을 들킬까 무서웠다. 가까스로 혁의 목소리에 안정이 되었다.
“흥. 재미없게 그러지마.”
“그만 장난치고 물건이나 줘요”
엔은 와인바에 위에 놓여진 투명한 향수병을 들고 와 혁에게 건네주었다. 50ML의 투명한 향수병은 정말 진열대에 놓인 향수들과 다르게 더 평범하고 볼 품 없었다.
“무취, 무향, 환각 향을 맡는 즉시 5분 내로 환각에 시달리다 사망”
“정말 엄청난 걸 만들었네요”
“그치? 내가 죽은 장 바티스트의 시체에서 가져온 무향의 체취와 카멜레온의 땀방울 그리고 독사의 송곳니로 만들어봤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르겠네요.”
“결과물만 엄청나면 된 거 아냐?”
엔은 자부심을 내비치며 기뻐했다. 그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혁과 켄은 엔에게서 받은 향수를 들고 다시 분홍빛 안개가 가득한 공간으로 돌아왔다.
“나의 라비에게 내 안부 전해주고 우리 혁과 재환이는 조심히 가렴”
“우리 보스가 싫답니다!!”
컨테이너를 나왔다. 새삼 자신이 있던 곳이 컨테이너 안이 었다는게 믿기지 않았다. 혁과 켄은 다시 차를 세워둔 곳으로 내려갔다. 어느 새 밖으로 나온 엔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우새끼가 강아지 흉내라니….”
-
「 7/14. PM 8. 러시아. 경호 30. R이 직접 거래. S호텔. 1804호.」
켄이 보낸 문자를 레오에게 전했다. 레오는 러시아 조직과 부딪치지 않게 도베르만이 머무는 1804호에 미리 잠입해있다 그들을 치고 신무기를 빼내오기로 했다. 이 소식 역시 홍빈이 켄에게 일러주었다.
혁은 다급하게 노크도 없이 원식의 방문을 열었다.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원식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갔다. 그는 별 반응 없이 크게 신경 쓰지 않자 혁은 종이 한 장을 원식 앞에 던지듯 놓았다. 그는 쓰고 있던 안경을 내려놓고 아무런 표정 없이 혁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뒷조사하라 시킨 적이 없는데”
“이재환, 그 자식이 어떤 놈 인줄 아십니까?!!”
“........알고 있다”
“안다구요?!!”
그는 종이를 흩어보다 켄의 사진을 쓸어 만졌다. 종이의 부드러운 감촉이 낯설었다. 혁은 당황스러움과 이해 못한다는 얼굴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소속은 화이트폭스. 본명은 이재환. 활동명은 켄. 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지만 특별한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지 않아 그림자들 사이에서 유명하지.”
“그걸 알면서도 저희 조직에 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차에 탔을 때, 그가 켄인지 몰랐어. 내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그가 평범한 놈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지. 일부러 도베르만에 접근한 거라면 어디 소속인지 알아낼 겸 잡아 둔거였다.”
“그럼 지금도 일부러 저희 곁에 두시는 겁니까?”
“적어도 그때는 그랬지. 지금은 아니다. 그는 내게 소중한 사람이고 우리 조직에 소중한 일원이야.”
“.....보스, 제정신이십니까? 저희는 생각안하십니까? 그는 화이트폭스의 스파이에요!! 이번 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빼내려 들어 온거라구요!!”
“혁아, 미안하지만... 난 도베르만도 이재환도 포기 못한다. 이미 준비는 끝났거든.”
“준비요? 무슨 준비요?”
원식은 아련한 눈빛으로 혁을 올려다보았다.
“켄을 아니 이재환을 이제 완벽한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
7월 13일. 장마가 시작되었다. 더운 날씨와 습기는 최악의 날씨였다. 레오는 홍빈에게 지시해 미리 자신의 사람들을 호텔에 머물도록 시켰다. 홍빈은 그의 지시에 따라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쓰곤 부하들을 일반 호텔 숙객처럼 위장시킨 뒤 미리 1804호에 숨어들어 곳곳에 부하들을 숨겼다.
-
7월 14일. am 10. 홍빈은 켄에게 미리 따로 보자며 연락을 취했다. 켄은 원식을 찾아가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거짓말하려다 끝내 말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십니까?”
밖으로 나오자 혁과 마주쳤다. 혁은 체념한 듯 켄을 바라보았다. 켄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친구를 좀 만나고 오려 구요”
“저는 당신이 싫지만 믿고 싶습니다”
뜬금없는 그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그의 말이 가슴 한 구석을 모질게 팠다.
“보스는 당신을 아주 많이 믿으니까요. 도베르만으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아, 금방 다녀올게요.”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혁을 뒤로 한 채 걷던 켄은 괜히 찝찝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몇 분 뒤, 홍빈이 오라고 한 장소로 도착했다. 준비된 차에 탄 켄은 차를 타고 호텔 부근 건물에서 홍빈을 만날 수 있었다.
“형”
“아, 홍빈아”
“잘먹고 잘잤나보네? 살도 붙고 얼굴이 좋아 보여”
“나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뭔데?”
“라비... 기억해? 그가 이끄는 조직이 도베르만이야. 우리가 그들을 이기는건 불가능해. 우리 여기서 그만두자.”
“형, 형답지 않다. 레오님은 이미 준비를 마치셨어. 마지막까지 우릴 실망 시키지마”
“홍빈아, 나는 싸우는게 싫고 죽는게 무섭다. 화이트폭스가 우릴 구해준건 맞지만 그 만큼 잃은 것도 아팠던 것도 많았잖아. 우리 모두 내려놓고 평범하게 살면 안될까?”
“형..... 형이라 불러주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인거 같다. 미안해.”
홍빈의 부하가 뒤에서 켄의 머리를 과격했다. 딱딱한 둔기에 머리를 맞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PM 6:48. 잿빛 하늘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비는 거칠게 쏟아져 내렸다. 도베르만의 조직원들과 경호들이 호텔로 모였다. 원식도 정장차림으로 나타나 혁과 함께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발렛파킹 직원으로 위장한 화이트폭스의 부하가 그 모습을 보고 바로 홍빈에게 전했고 홍빈은 1804호에 숨어있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준비하라 일렀다. 부하들은 모두 자신이 소유한 무기를 꺼내 준비 태세를 갖추었다. 엘리베이터가 18층에 도착하고 1804호가 있는 복도를 따라 걷던 중 원식이 자신의 안주머니에 있는 총을 들어 옆 호실 1802호 문틈으로 총을 쐈다. 문틈으로 보고 있던 화이트폭스의 일원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화이트폭스에선 예상 못했지만 미리 무기를 든 덕에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탕- 탕탕탕ㅌ-탕탕--!!
총 소리가 가득 복도에 울려 퍼지고 경호와 도베르만의 부하들이 모두 무기를 꺼냈다. 1802호에 숨어 있던 화이트폭스가 모두 뛰쳐나왔고 도베르만을 1804호로 몰았다. 1804호가 열리면서 화이트폭스의 조직원들이 우루루 몰려 나와 무기를 들고 싸웠다. 혁이 역시 양손에 총을 들고 하나하나 쓰러뜨리기 바빴다. 원식의 정장에 붉고 작은 핏방울들이 튀었다. 얼굴에 스치는 총알과 앞에서 죽어가는 부하들을 보면서도 그는 멈추지 않고 총을 쏘았다. 그가 화이트폭스의 부하들과 싸우던 중 홍빈이 부하들에게 지시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그에게 달려가 총을 겨누었다. 홍빈도 원식을 발견하고 마침 잘만났다는 듯 원식에게 총을 겨누었다.
“무기를 원해?”
“대화가 쉬워지겠군요. 켄을 봐서 목숨은 살려드릴테니, 도베르만이 만든 신무기 순순히 주시지 않겠습니까?”
“없다”
“무슨 소릴하ㄴ...”
“이 곳에 없다. 또한, 진짜 거래는 오늘이 아니다. 오늘 거래는 너희 화이트폭스를 몰살하기 위한 내가 만든 무대지. 너희는 살아서 못나가”
“하.... 씨발. 이봐, 라비. 너는 뭐 살아서 나갈 자신있나보지?”
원식의 미간이 구겨졌다. 홍빈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큰 불안감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홍빈이 원식에게 총을 쏘고 원식은 가까스로 총알을 피해 굴렀다. 홍빈에게 두 발의 총을 쐈지만 전부 빗나갔다. 원식은 돌려차기로 그의 명치를 때렸다. 홍빈이 배를 부여잡고 다시 일어나 원식에게 총을 겨누었다.
“이재환이 어디 있을 거 같아?”
“뭐?”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이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없더라고. 옥상에서 널 애타게 찾고 있으니 얼른 가보는 게 좋을 걸?”
“................이재환을 찾고 나서 넌 내 손으로 죽인다.”
홍빈을 뒤로 한채 문밖으로 달려가는 원식의 뒷모습에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묵직한 발차기가 총을 든 홍빈의 팔을 찼다. 총이 땅으로 떨어지고 홍빈은 다시 날아오는 발차기를 팔로 막았다.
“보스!! 여긴 걱정 마시고 가십시요!!”
총을 떨군 홍빈이 주먹을 날렸으나 혁이 다시 그의 팔을 막아냈다.
원식은 순식간에 계단을 올라 옥상에 도착했다. 옥상에는 켄이 폭탄과 함께 묶여 기절해 있었다.
“이재환, 정신차려.”
“아.... 라비?”
“괜찮아? 어디 다친데는 없어?”
“다친데는 없지만... 그, 그것보다 이거!! 이 폭탄.... 아마 나는 죽을거에요.”
“무슨 소리야”
재환은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팔찌와 폭탄을 번갈아 보았다.
“심장과 연동된 폭탄이에요. 즉, 폭탄이 제 시간에 터질 때까지 누군가 폭탄과 함께 묶여있어야 당장 터지지가 않아요.”
“당장 터지면 호텔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위험해진다는 소리네, 해제방법은?”
원식은 켄이 묶인 밧줄을 풀며 폭탄을 해제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나 켄은 원식과 반대로 절망에 빠진 얼굴이었다.
“없어요. 사람의 맥박을 이용한 저희 쪽 신형무기에요. 누군가는 꼭 폭탄과 연결된 이 팔찌를 차고 있어야 해요. 희생 없이는 폭탄을 해제할 방법은 없어요.”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 다짐이라도 한 듯 마른 침을 삼키며 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비밀 정보 누설한 것도 미안하고 내 정체를 속인 것도 전부 미안해요”
원식은 계속해서 밧줄을 풀었고 묶여있던 밧줄이 풀렸지만 켄의 손목과 연결된 폭탄은 끊을 수가 없었다. 켄은 울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번복했다. 갑자기 원식이 웃으며 그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켄의 시선이 자연스레 원식의 손목으로 가면서 검은 팔찌가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팔찌 하나가 아니더라”
“미쳤어?!! 그걸 왜 당신이 차!!”
폭탄 옆에 하나 더 연결되어 있던 비워있는 팔찌를 발견하곤 고민할 틈도 없이 바로 자신의 손목에 찼다. 그리곤 원식은 켄의 팔찌를 거칠게 빼버렸다. 그 덕에 켄이 찼던 팔찌가 끊어져 다시는 낄 수 없는 불능이 되어버렸다.
“뭐, 뭐하는 거야!!”
“계약을 위반했으니 형벌 대신이야. 계약서 두 번째 조항. 을은 갑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한다.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이재환으로 살아”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김원식!!! 이거 당장 풀어!!!!!”
원식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재환의 손목에 묶어주었다.
“조심히 가, 재환아.”
원식은 몸을 일으켜 자신의 몸에 체중을 실어 있는 힘껏 재환을 옥상에서 밀쳐 재환을 떨어뜨렸다. 재환이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그는 서글픈 웃음으로 재환을 배웅했다.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았다. 주마등처럼 머릿속 기억은 떨어지는 속도와 달리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피 범벅으로 쓰러져 있던 아이. 보랏빛 손수건. 라비와 만났던 어린 시절. 그와 함께 했던 짧은 순간들. 전부 기억이 났지만 이미 늦었다는 것을. 순간 폭발음이 귀에 울리고 모든 소리가 세상에서 사라지더니 모든 것이 현실로 돌아왔다. 딱딱한 시멘트 바닥이 아닌 미리 준비되어 있던 에어매트로 재환이 떨어졌다. 빗방울이 재환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진짜 옥상에서 사람이 떨어졌네.”
“아까 걸려온 전화 아니었으면 사람 여럿 죽을 뻔 했어”
“호텔에 더 사람 없는 거 맞지!!”
“건물에 있는 불부터 끕시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 소리도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방관 한 명이 재환에게 다가와 물었다. ‘괜찮냐’ 외치는 입모양만 보일뿐 그의 목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제 말 들리세요? 괜찮습니까?”
고통스러웠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무슨 기분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파요”
“아, 어디가 제일 아프십니까?”
“가슴이 제일 아파요... 아파 죽겠습니다..... ”
“의료진을 금방 불러 올테니 조금만 참으세요!!”
의료진을 불러오겠다며 소방관은 저 멀리 구급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재환은 심장을 부여잡고 새우잠 자듯 몸을 옆으로 구부렸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 숨 쉬는 것조차 벅차게 만들었다.
“살은 나도 이렇게 아픈데... 당신은 얼마나 더 아팠을까... 죽지말라 그랬잖아...!! 왜 마지막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어... 남은 나는 어떻게 살라고.....”
온 몸이 비로 다 젖었다. 소리치며 울었다. 주먹 쥔 손에서 피가 나도록 땅을 치고 가슴을 쳤다. 그의 행동에 의료진이 가까히 갈 수 없자 경찰들이 그를 제지하려 달라 붙었다.
“제발 나 좀 내버려둬, 이 개새끼들아!!!!”
그의 외침에 모두 멀찌감치 바라만 볼 수 밖에 없었다.
-
4개월 후.
제법 바람이 불었다. 뜨거웠던 여름도 길고 긴 장마도 모두 떠났다. 차가워진 공기에 엔은 벗어둔 코트를 다시 입었다. 약속시간에 맞춰 나가기 전에 그는 아련하고도 씁쓸한 눈빛을 남기고 옆에 놓인 향수를 집어 밖으로 나왔다. 문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있던 곳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하얀 코트를 입은 남자가 엔에게 다가왔다. 그는 하얀 가죽장갑을 벗으며 엔에게 악수를 청했다. 엔은 웃으며 그와 악수를 나눴다. 그는 가져온 가방을 엔에게 건네주었다.
“말씀하신 돈 입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어.”
“무슨 말씀이시죠?”
엔은 곤란하다는 듯 자신의 뒷머리를 만졌다.
“내가 이 향수를 조금 썼거든”
“괜찮습니다.”
“이거 정말 위험한 무기인거 알지? 무취, 무향, 환각…. 한번만 뿌려도 5분내 사망”
“정말 좋은 무기군요.”
그는 세상 해맑게 웃어 보였다. 그의 미소는 정말 아름다웠다.
“어디에 쓰려는 건지 물어봐도 될까?”
“.......그냥 누구를 좀 편히 쉬게 해주려합니다.”
향수를 받은 그는 용건을 끝낸 듯 미련 없이 뒤돌아 다시 가던 길로 내려갔다. 멀어지기 직전 엔이 그를 불러 세웠다.
“당신!! 이름을 좀 알 수 있을까?”
“홍빈 입니다.”
그가 완전히 사라지자 엔은 자신의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자신의 있던 곳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5분....... 지났네. 붉은 여우야, 좋은 무기일수록 부작용이 심하단다.”
엔은 문을 열 자신이 없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곁에 머물렀기에...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