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혈
백신xx
@xxvaxxine
삶은 붉구나. 그게 학연의 첫 견해였다. 이 사회를 이루는, 제 모든 걸 결정했던 거대한 존재들이 손끝에서 시들어간다. 통제는커녕 관여조차 엄두도 못 냈던 규칙 법칙 망할 놈의 룰들이 옆구리는 연했다. 돌아가면 다 되었을 것을. 가엾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 앞으로 되어있는 좌석에서 관전자 짓거리를 신중하게 차근차근 밟아나간다. 느낌을 정제하고 생각을 정리해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과분한 행운을. 계속 관찰했다. 그렇게 드디어 한 입 씹어 삼켰다. 구역질할 수 있어 되려 편했다. 내장 속속들이 들어차는 실체화된 개념이 소화되어 활력을 준다. 움직인다, 내가. 실재한다. 손에 쥐고 주물럭거릴 것이 있다. 모방, 쥐고, 겨누고, 셋, 그냥 죽여. 멍청하게 쉽다. 이해하고 나니 역겹게 좋았다. 고작. 아버지, 이게 권력이랍니다. 학연은 자꾸 다리 밑의 자갈을 발로 찼다. 마찰음이 젖어드는 순간들을 귓가에 담아두려고. 셋, 셋, 셋··· 낡은 총신을 연신 닦아 넣고 머리를 세었다. 낮게 널브러진 것들은 더 이상 흑백이 아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극단적으로 몰아세우는 총구에는 고스란히 되돌려주면 될 일이었다. 혹은 그보다 더 일찍. 착실한 아이였다. 덕분에 예쁨을 많이 받았다. 까만 머리칼이 흐부끼는 강가에서, 진심이든 아니든 울었던 만큼 웃었다. 이제 혼자서도 잘한다. 쥐어틀고 밀어붙이고 치고 받는 생을 흘러넘치지 않게끔 손에 쥘 줄을 안다. 쓸모 있다는 말을 주워다 일기장에 담는 일과가 이것을 더 뿌듯하게 해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손힘이 는다. 아직 무엇을 단단히 잡아야할지 몰랐지만.
학연은 갈 곳이 없었다. 할 것도 없었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었다. 자꾸 발가에 걸리는 깡통을 차고 불안한 눈으로 올려다보는 것만 고작이다.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붙잡아야만 됐다. 어린 학연의 곁에는 자꾸만 나자빠지는 생명들이 그득했다.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멍청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모습이 학연을 더 불쌍하게 만들었지만 어쨌든 차악이었다. 매일 더 열심히. 매일 더 극단적으로. 딱 한 줄 비친 빛에 득달같이 달려들어 악착같이 붙은 것도 그 덕이다. 수많은 권력을 업은 그 사람은 되려 그 꼴을 기특하게 봐줬더랬다. 천운을 얻은 학연은 곧장 그 사람의 손을 잡았다. 힘들 거란 말을 듣고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건만 올라오는 구역질을 다른 손으로 틀어막을지언정 고개를 돌리지 않았고, 그러려 하지도 않는다. 저게 내가 살아남을 방법이구나.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환경에서 안간힘을 썼다. 그 사람은 그런 학연을 가엽게 봐주었다. 복에 겨워하면서도 학연은 혹여 내쳐질까 가끔 제지당할 정도로 앞서나가려 했다. 나름 완곡한 거부를 듣고 나면 강박적으로 지키는 게 당시의 룰이었다. 참고 인내하자. 몇 번을 외웠더라. 하나하나 속속들이 내 것으로 만들어 내일 일 모르는 이 곳에 어떻게든 발 디딜 곳 만들어야겠구나. 온몸에 힘을 품고, 웅크려서, 고개 숙이되 매서운 눈 감지 않는다. 어차피 뒤는 걱정할 것 없다. 그런 학연에게 입을 틔여준 것은 완전히 잘못한 시작이었다.
행운은 오래 가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작년에는 좋은 날씨가 이어졌었다. 학연은 파르라니 자란 풀길을 걸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드러난 목을 햇빛이 감싼다. 슬픔이 큰지 두려움이 큰지 재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이 죽었다. 장례식은 없었다. 따라 들어오는 검은 발걸음들이 죄 저를 잡아 끌어내려는 것 같았다. 고요 뿌리치며 먼저 꽃 한 송이를 올려놓고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 컸던 사람도 저렇게 작은 곳에 담겨 간다. 누군가 단단히 잘못 설계된 총을 부러 쥐어줬다뿐, 그래서 어떻게 죽었는가 정황을 모르는 것이 남겨진 학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문득 제 등에도 칼을 꽂을 부드러운 살이 있는지 만져보고 싶었다. 있나요, 여기? 또 이곳? 물을 상대가 없어서 학연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걸 자꾸 주변에서 답지 않게 상심했다고 표현하더라. 슬픔은 나약함이라 오히려 곧게 자세를 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불쾌함에 되는 데까지 부딪혀나가기로. 아직은 조금 더 그 사람의 이름을 등에 지고 살아남을 수 있으니. 생각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끄집어올리는 것이 그 때부터 주요 일과가 되었던 것 같다.
···
이를테면. 학연 또 펜을 내려놓았다.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예를 들면 뭐 어쩌란 말인가. 세세한 것은 잊혀지고 일상과의 끈은 툭툭 끊어졌다. 학연에게는 기록보다 현장이 쉬웠다. 신중을 기해야 하건만. 절제와 정제. 중용. 손마디는 연신 그것을 무시하고자 한다. 분명 터져나오는 감각은 분열과 닮았는데 그 범람을 형용하는 단어가 머릿속에 있지 않은 거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줄글로 익히는 사람이 없듯이. 반질한 총기를 굳은살 하나 없는 불어터진 손에 감싸쥐고 경직된 어깨를 굴려서 벌벌 기고 있는 덩어리를 마주보게 한다. 겁에 질린 말간 얼굴은 앞이 아니라 제 뒤를 연신 돌아보며 이것의 존속 가치를 계속 묻고, 참 답답하게 해, 탕, 탕탕. 총에 매달려 반동하는 팔 너머로 생이 흩뿌려진다. 혹은 진득하게 배어나오거나. 한 번 저지르면 돌아갈 수 없다. 절대. 학연은 살짝 감상적으로 눈을 감고 몸을 젖혔다. 곧추세운 손가락은 총의 모양을 닮고, 덮은 마디마디 손우물까지 짧은 진동이 울린다. 귀가 멀고 눈이 물들고 문득 헐떡이게 되어서, 작은 세계를 찢어발겼다는 죄악에서 오는 기쁨에 푹 젖는다. 그래야 하기로 오래전에 정했다. 이건 미쳤다. 회상하며 작은 입술로 뇌까렸다. 냉한 제 인상이 잔뜩 튀기는 따뜻한 생에 달아오르는 모습을 사랑해보면 어떨까 싶다. 매번 바뀌는 고깃덩어리의 가장 추한 순간은 널려서 담길 가치는 없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제 얼굴을 보는 것이 옳다. 수많은 목숨을 깨뜨려 슬슬 금이 가고 있는 아름다운 자태를.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뚝. 펜심이 부러졌다. 거울 조각이 바스락거리며 흩어졌다. 자꾸 눈을 가렸다. 누군가는 필히 이 총신의 맹신으로 죽었을 터인데.
괘종시계가 뎅 울렸다. 홍빈이 무미건조하게 책장을 넘겼다. 다시 펜을 든다. 벌써 수십 번을 필사하는 내용에 손은 계속 앞서갔지만 사고로 잡아 끈다. 폭력적으로 이분화된 생명에 용서는 쉽게 없다. 인내와 관용이 총구를 되돌리니 부디 옳게 참회하라. 단어 하나씩 혀에 아로새기고 획 하나마다 손가락 힘을 실었다. 모순된 작업으로 건조한 구원을 받고자. 적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 사람과는. 한 장을 마친 홍빈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하루 일과를 시작할 차례였다.
팔 쭉 뻗으며 흘러나온 신음 소리가 적막을 깼다. 잠시 앉아있었을 뿐인데도 몸이 자주 굳었다. 최근 일이 묘하게 돌아가고 있는 터라 평시에도 여간 긴장이 가시지 않는 탓이다. 천천히 입 안에서 혀를 굴린다. 자칫하면 굵은 밥줄이 끊어짐은 물론이고 집안도 어찌 될지 몰랐다. 지나치게 우직한 아버지의 영업 방침 덕에 가세가 이미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니. 쓰러지는구나. 밉보이고 척진 일 많은 직업이 힘을 잃는 날 다음은 뻔했다. 감당은? 홍빈의 몫이다. 자꾸 입이 쓰다. 치울수록 쌓이는 것을 어째야 한다는 것인가.
소매 걷어붙이며 제 책상의 세 번째 서랍 열어 권총 장전하는 와중에도 시선 치켜세운다. 누가 가르쳤기보다 스스로 습득한 방법이다. 아버지는 알지도 모르는 것을 팔아넘기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 일러왔다. 직접 만지고 쥐고 쏘아봐서 꿰고 있어야 한다고. 혼자 익히려다 눈가에 흉한 상처를 입은 홍빈은 걱정 받기보다 수치스럽다며 외면당했다. 이 바닥에서 그렇게 어리숙해서야··· 언젠가 거래를 했던 이에게 사정 사정하며 겨우 배운 총을, 굳은살 박히도록 연습해 아버지 앞에서 쏴보였을 때야 시원찮은 인정을 받았을 뿐이다. 그제서야 아버진 홍빈을 사업에 관여할 수 있게 해줬더랬다. 흰 손이 제 눈썹께를 어루만졌다. 흉터가 까끄러웠다. 집중해야 하는데. 언제 저에게 불리하게 돌아갈지 모르니. 총을 품 속에 숨긴 채 쓰리 피스 정장을 차려입는다. 잘난 허울이었다. 거울에 비치는 모양이 영 까끄랍다.
학연이 눈을 뜬 건 늦은 오후다. 소파 위. 잠들다니 단단히 정신 나갔나 봐. 짧게 끙 소릴 내며 몸을 일으킨 후 마른 세수를 두어 번 했다. 누가 또 날 들어다 갖다놓은 거지. 깨우랬는대도. 땀에 젖어 달라붙는 셔츠 떼어내며 정수기서 목 축인 학연 고요한 사방 둘러봤다. 나직한 소음 멀리서 흘러올 뿐이었다. 문에 손 한 번 대었다가, 입 꼭 다문 학연 아주 얌전하게 기다란 책상에 걸터 앉았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주 높은 직급이라는 걸 달고 여기에 그 사람 이름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짙게 쌓인 먼지를 닦아내도 이제는 좀처럼 찾아낼 수가 없다··· 멍하니 바라보던 붉은 손바닥이 새까매진 후에야 학연 비척이며 내려왔다. 어찌 되었건 계속 존재해나가야 하니까.
좋은 수트가 자꾸만 배긴다. 마른 침이 숨 넘어가듯 넘어간다. 들어서 뭐 나아지기라도, 달라지기라도 하겠는가. 모두 동의하는 듯 공명하는 목숨들. 전등이 흔들리고 거기 많은 것들이 매달렸다. 뇌리에서 흩어지는 소음들. 연루에 배신에. 벌어진 판이 큰 만큼 고루 질근질근 짓밟힌다. 뻔히 알고도 겉치레상 나온 자리다. 홍빈 일어나고 다들 손에 힘 주며 악수를 했다. 아직 대놓고 총을 빼들지는 않는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 등을 내보인 채 퇴장한다. 시선들이 섬찟하게 날아와 꽂힌다.
각자의 문을 나서던 학연과 홍빈이 우연찮게 대면했다. 어두운 복도에서 둘 다 서로를 알아보려 눈 치켜뜬다. 정적. 학연은 이런 사람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말을 텄다. 이OO은 갔어? 그 사람이 부르던 호칭을 고대로 따와 묻는다. 홍빈이 답했다. 돌아가셨고 내가 물려받았는데. 홍빈의 아버지와 그 사람이 거래를 했던 것을, 학연은 기억은 하고 있었으나 그날 이후 그 사람 덕에 받던 대우 등은 싹다 색을 바랬다. 회의도 결정도 참여 못하는 학연은 홍빈을 못 본 게 당연했다. 지는 노을이 더러운 창으로 학연을 비춘다. 그제사 홍빈은 그 사람이 죽었고 그가 데려온 고아 아이는 처치 곤란한 상황이란 걸 들었던 게 얼핏 기억났다.
- 어떻게 됐어?
- 알면 어쩌게.
- 네가 죽인 거잖아.
- 누구를?
- 나를.
쓴웃음 지은 홍빈이 학연을 스쳐 걸어나간다. 어차피 신경을 써야할 상대가 아니다.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었지만 제 자신 수습이 급하다. 야. 불러세우는데도 계속. 양손에 차오르는 것을 고개 떨구고 보던 학연의 시선 별안간 묘해지더니 홍빈에게 박힌다.
순식간이었다. 둘다 실력은 비등했으니 판가름은 속도에서 난다. 비겁하게 등 뒤에서 달려든 학연이 우위를 점했다. 쾅, 잠깐의 마찰음과 몸싸움 소리가 텅 빈 곳에 울리고. 몸들이 시멘트 벽에 부딪친다. 주체 못한 총구가 코앞에 드밀어진다. 창을 등지고 홍빈을 내리누른 학연의 얼굴은 온통 검어서 분간할 수가 없고 그저 숨소리만.
- 그냥 죽여.
아쉬울 것 없는 홍빈 자조한다. 어차피 몸 비틀어봤자 얻을 것도 얻을 수도 없다는 걸 안다. 학연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걸렸다. 모방, 겨누고, 셋, 그냥···
- 내가 너 살려줄까?
숨소리.
- 뭐?
- 너 살려줄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 좀 살려줘. 학연이 웃는다. 아직 그 정도 힘은 있거든, 너 매장 안 되게 해줄게. 미쳤구나, 왜 나를? 너만 알잖아, 그날을. 홍빈이 입을 다물었다. 몰아치던 생각을 방임하다 도출한 결과다. 먼저 내려놔. 총구가 치워지고. 그림자가 진다. 기다렸다는 듯 잘못된 선택이 내려진다. 서투르게 배운 언어가 뜻을 정반대로 전한다. 굳게 잡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악연을 오독하고 싶다고 외치는 발악이 쉽게 묵살된다.
표지가 탁 덮이는 소리가 났다. 학연이 매일 써넣는 그 일기장이다. 그걸 들고와서는 대단한 비밀처럼 홍빈에게 쥐여준 거다. 둘은 마주보고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낀다. 홍빈은 순간 아주 아름다운 소설을 읽었다고 착각한다. 주인공은 앞의 아이와 사뭇 다르다. 무엇보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 나를 봐줘. 계속 봐주어야 해. 그래서 네가 이어서 써주어야 해. 학연이 연신 홍빈의 손을 붙들었다. 죄 많은 손가락들이 엮인다. 내가 보지 못하는 내 얼굴을 꼭 봐. 많은 게 겹쳐보여야 하는데 자꾸 말갛다. 기억이 튿어지고 우리를 같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구태여 서로를 불행으로 밀어 떨어뜨린 경험을 문대어 해석하고 싶은 대로 삼켜낸다. 근처에 사람이 없고 없어서 하필 붙든 게 너고 나다. 피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여진 비극적인 연인처럼 굴어본다. 억지와 외면으로 점철되었으면서도 사랑 행세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쫒겨난 둘이 안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이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있게만 해줘. 알겠지? 근데 아직도 날 감당해줄 수 있어? 뒤섞이는 사고에 홍빈 방금 목격한 끔직한 것을 기억해내려 해도 자꾸 사라진다. 기억이 점점 드문드문해진다. 별것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학연은 그토록 긴 시간을 홍빈과 함께 했다고 기억한다. 수많은 치부가 흘러나온다. 오직 학연만 들었지만. 자신이 침몰하는 걸 구경하며 홍빈의 품에 더 파고든다. 애초에 모든 게 다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의 죽음조차 어깨 너머로 들었을 홍빈을 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걸 그때 즈음에 인정했다.
···모든 게 더 나빠진다. 뚝 끊겼던 테이프가 다시 돌아간다. 필요없는 컷은 건너뛰어지고, 난장판 가운데 서있는 학연이 막 뛰어온 홍빈에게 고개를 돌리는 장면이다. 눈이 이상하다. 감정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땀에 흠뻑 젖고 흐트러진 머리칼로, 미안, 안 되겠어. 끝났나 봐. 나는. 학연의 일은 모르던 홍빈이 그것만은 단박에 알아들었다.
- 너도 도망칠 거지?
- 네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 너만 죽지 않을 생각이지?
메마른 시선이 오갔다. 서로 살려주기로 했으면서. 그 누구도 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은 것을 애써 탓한다. 흘리지 않은 것을 안에 쏟아부어 몇은 익사시키고 떠오른 지독한 감정만 건져 쳐바른다. 절망은 둘 다 숨이 질기다. 굳이 설명하자면 학연은 예정된 끝을 맞은 거고 홍빈은 그저 급박한 거다. 홍빈이 자꾸 깍지 낀 손을 풀어낸다.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다. 오명을 벗길 때가 되었다. 학연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인다. 하지만.
학연의 양손이 거칠게 홍빈의 귀를 막았다. 반사적으로 욕지거리를 내뱉는 와중에도 학연 오른손에 아슬하게 쥔 총 고쳐잡는다. 차라리 눈을 가려, 팔 떼어내려는 손 뿌리친 학연이 홍빈과 얼굴 똑바로 마주한다. 너도 느껴봐. 무너져. 입모양을 잡아내기가 무섭게 총성이 울린다. 날것의 진동이 골을 울린다. 먹먹함이 그를 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숨소리를 짓씹고 심장 소리가 자꾸 살아있음을 직시하도록 뛰고 학연의 손에서 땀이 조금 났다 피가, 아니 생이··· 몇 번 더 총소리가 찢어지듯 난다 쓰러진다 또 뒤집히고 압도하는 감각에 요동친다 아득히 멀어지면서 뚜렷하게 생생하게 아주 선명하게, 질기게 이어나가기 위해 사고를 끝장내는 돌아버린 방법이 마치, 마치 이게 총의 존재 의의라도 된다는 것처럼··· 홍빈이 학연을 밀쳐냈다. 세상의 소음이 화악 들어온다. 중심을 잃은 학연은 쉽게 넘어졌다. 총은 바닥에 떨어져 조잡한 소릴 낸다. 이제야 달아오른 공기가 느껴진다. 더운 숨이 끼치고 헐떡이며 저를 올려다보는 학연이 두 눈에 들어온다. 그 누구도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총을 대한 적 없다. 비정상이다. 팽 도는 정신을 부여잡고 불결한 감각을 벗겨내며 홍빈 시선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 제정신이야? 이런 짓을 하고 살아?
- 홍빈아···
너는 날 이해해준댔잖아. 동의하지 않은 말이 허망하게 흘러나온다. 근데 네가 이렇게 그 사람을 죽였잖아. 허위를 간절하게 지껄인다. 그만큼 몰려있다. 옳게 참회하라··· 불행에 미친 것들이 손을 뻗는다. 붉어진 얼굴의 학연이 홍빈을 가리키며 헛웃음 지었다.
- 너 피나···
홍빈이 손을 들어 눈썹께를 만지자 말 그대로 피가 묻어나왔다. 흉터가 자극에 터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홍빈을 향해 허탈히 웃고 있는 학연의 손에서 역시 한 줄기 피 주륵 흘러내리는데도.
-
대낮에 수 번 울려퍼진 총성은 그 구역에서 소소히 말이 나왔다고 했다. 이제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학연이 지나갈 때마다 미쳤다는 말을 내뱉는다. 홍빈이 총을 주워 학연을 겨누지 않으려 애쓰면서 건물을 나섰을 때 이후로 들은 소식이 그게 다였다. 언젠가 문제를 일으킬 줄 알았다는 말이 입을 맞춘 양 여러 사람에게서 나오기도 했다. 그 다음 학연이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선 하나같이 입을 다문다.
홍빈은 그날 이후로 총을 완전히 손에서 놓았다. 몸을 숨기고 손을 씻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전혀 다른 모양의 총기를 쥐어도 학연이 잡는 방식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볍고 부드럽게 받치고, 곧은 엄지로 고정해 단단히 밀착하는 손짓은 예술이라 믿는 것과 가까웠다. 손바닥 안부터 충격을 타고 흐르도록 뻗는 팔은 죄악에 휘감아지도록. 저를 자꾸 보던 시선이 뒤늦게 자국을 꾹 남겼다. 나 좀 봐줘. 표적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도취하는 대상은 적의 머리 정중앙이나 가슴팍 따위의 정반대인 자기 자신이다. 자신은 생이고 눈앞은 혈인 거다. 보는 것이 붉음인 대신 내면은 텅 빈 흑백인 거다. 나 좀 살려줘. 학연이 울듯한 표정을 하던 게 떠올랐다. 그토록 직접 보고 싶다던 얼굴이.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