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less Fight
에피네프린
@epinephrine_Y
Endless Fight
w. 에피네프린
2048년의 대한민국. 언제부터인가 세계적으로 계절에 상관없이 맑은 날보다 흐린 날이 많아졌다. 해가 지날 수록 흐린 날들이 더 길어졌다. 원인은 알 수 없었다. 혹자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소빙하기가 도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날씨를 인위적으로 조절하기 위해 연구한 인공강우의 부작용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줄어든 일조량은 식량난으로 이어졌지만 문제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곳곳에 시위와 테러가 일어났다.
원식은 종로 3가에 있는 소규모 무기상을 운영했다.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은 총기 소지 금지 국가였다. 하지만 시위와 테러가 일상이 되자 사람들은 너도나도 호신용 권총을 구비했다. 정부에서도 암묵적으로 소형 권총의 거래는 용인할 정도였다. 귀금속 상가와 전자·기계 부품 상가가 대부분인 종로 3가 일대는 단순한 호신용 공포탄부터 살상용 권총까지 간단히 제작, 거래가 가능한 최적의 장소였다.
드물게 맑은 날이었던 10월의 어느 초저녁, 원식이 운영하는 무기상에 한 남자가 찾아왔다. 순해보이는 눈매와 살짝 올라간 입꼬리 덕에 골든 리트리버가 연상되는 외모였다. 거기다 180cm 중반의 큰 키, 넓은 어깨와 균형 잡힌 탄탄한 체격이었다. 검은색 트렌치코트 안에 몸에 딱 맞춘 검은 정장과 흰색 셔츠, 검은색 얇은 넥타이를 착용했다. 그가 가게로 들어오자 작은 무기상이 꽉 들어찼다.
"낮에는 장사 안 하시나 봐요."
남자는 익숙치 않은 복장인 건지 손을 목 근처로 올려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면서 벽에 진열된 총기류들이 신기한 듯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맑은 날에는 저녁에 엽니다."
원식은 '나 이런 데 처음이에요.'라는 티를 팍팍 내는 남자에게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일광욕이라도 하러 가세요?"
"……."
"정장 쫙 빼입으신거 보니 약속 있으셨나 보네."
"……."
"머리색이 특이한데요. 맑은 낮의 하늘 같아요. 제가 아는 형도 비슷한 색으로 염색했는데."
"……."
남자는 원식의 무반응에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정장 자켓에서 두툼한 봉투를 꺼내 진열장 위에 올렸다.
"총이 필요해요. 아주 많이."
"총은 한 사람 당 한 정만 팝니다."
"아,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저도 심부름 온 거란 말이에요. 돈이 부족해서 그래요? 이건 선불금이고 나머지는 심부름 시킨 형이 물건 확인하면 준다고 했어요."
"대한민국이 암묵적으로 총기 거래가 가능하다지만 엄연히 총기 소지 금지 국가입니다. 한 사람 당 한 정. 신분이 확실한 사람하고만 거래합니다. 정 필요하다면 다른 데로 가시든가."
"형이 꼭 여기여야 된댔어요. 서울 변두리에서 바이크 타고 여기까지 오는데 몇 군데의 시위 현장을 지나쳤는 줄 아세요?"
"그건 당신 사정이고. 그 형한테 전해. 본인 물건은 본인이 알아서 사라고."
어느 순간 말이 짧아진 원식이 내뱉는 무심한 말투에 남자는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나 곧바로 한쪽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형이 당신한테 이 말을 전하랬어요."
그는 원식의 귓가에 한 단어를 속삭였다.
"ROVIX."
원식은 진열장 너머로 몸을 날려 남자를 쓰러트렸다. 남자를 몸으로 누르면서 허리춤의 총을 꺼내 머리를 겨눴다.
"너 누구야?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형이라는 녀석이 알려줬어? 그 자식은 대체 누구야!"
남자는 기세에 눌리지 않고 원식을 노려봤다.
"사장님 질문이 참 많네. 알고 싶어요? 알고 싶으면 물건 내놔요!”
"건방진 자식! 진짜 죽고 싶어?"
원식의 위협에 남자는 갑자기 피식 웃더니 여유롭게 손으로 총구를 막았다.
"워워, 진정하세요, 사장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그냥 형이 그 단어를 말하면 된다고 해서 말한 것 뿐이에요. 원한다면 형한테 안내해줄 수 있어요. 대신 물건들은 챙겨주셔야겠어요. 후불금에 출장비까지 확실하게 드릴 거니까 돈은 걱정 마시구요."
원식은 잠시 고민했다. ROVIX. 원식의 과거와 관련 있는 단어였다. 남자를 살리고 쫓아내든, 죽이고 골목 한 구석에 버리든 찝찝함이 남기는 마찬가지일 터. 원식은 총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좋아, 네 말대로 하겠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통성명이라도 하지. 이름이 뭐야?"
"한상혁이라고 합니다. 사장님은요?"
"김원식."
자정이 가까운 시간, 우렁찬 바이크 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원식과 상혁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서울 변두리의 한 동네에 도착했다. 두 사람은 공영 주차장에 바이크를 주차했다. 헬맷을 벗자 각자의 검은 머리와 푸른 머리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원식은 권총을 가득 담은 대형 더플백을 들고, 앞서가는 상혁의 뒤를 따랐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무거운 적막 만이 그곳을 감쌌다.
그때,
픽-!
원식의 발치에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내리꽂혔다. 원식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야?"
원식은 몸을 굽혀 발치에 박힌 것을 주웠다. 쇠구슬이었다.
휘익-!
이번에는 쇠구슬이 원식의 뺨을 스쳤다.
"이봐, 한상혁.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보시지?"
상혁은 몸을 돌려 굳은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원식은 몸을 일으키며 허리춤의 총을 꺼내 상혁에게 겨눴다.
"뭐하자는 거냐구?"
그 순간,
휘익-!
탕!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거의 동시에 원식이 방아쇠를 당겼다. 원식을 향하던 쇠구슬은 총탄에 튕겨 근처 상가의 벽에 박혔다.
"거기 있다면 봤겠지! 이 자식 머리에 바람 구멍 나게 하고 싶지 않으면 숨어있지 말고 나와!"
원식이 다시 상혁에게 총을 겨누며 외쳤다. 그 와중에 상혁의 표정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침묵의 대치 상태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원식은 자신의 양옆에서 인기척을 감지했다. 그들은 원식을 사이에 두고 조금씩 서로의 거리를 좁혔다. 원식은 흔들림 없이 상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원식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들은 상혁을 지키려는 듯 아주 천천히 둘 사이를 끼어들었다. 잠시 후, 장신의 두 남자가 원식의 시야에 들어왔다.
한 명은 페도라를 눌러써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넓은 어깨와 가는 허리가 돋보이는, 몸에 딱 맞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양손에는 30cm 길이의 검은색 쌍검을 들었다. 원식은 쌍검을 빠르게 관찰했다. 칼날과 손잡이가 하나의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손잡이는 고리형. 한쪽 칼은 칼날과 손잡이 사이에 홈이 파였고 다른 쪽 칼은 같은 위치에 홈과 비슷한 크기로 금속이 튀어나왔다. 쌍검이 아닌 분리형 가위였다. 다른 한 명은 창백한 피부에 흑요석 같은 머리카락이 대비되어 체스판이 의인화한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녀 예민해 보이는 인상의 남자였다. 페도라 쓴 남자 못지 않은 건장한 체격이었다. 그 역시 검은 정장을 입었는데 단추가 열려 있어 바람이 불 때마다 자켓이 펄럭였다. 손에는 검은색 슬링샷을 쥐고 있었다. 쇠구슬을 날린 무기의 정체였다. 그는 쇠구슬을 끼운 고무줄을 당겨 원식을 겨냥하고 있었다.
"새총으로 날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목표물 조준 실력이 완전 개판인데."
"칫."
슬링샷을 쥔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원식을 노려봤다.
"날 이리로 끌어들인 게 너네들이냐? 니들이 ROVIX을 어떻게 알아? 정체가 뭐야?"
"오랜만이야, 원식아."
페도라를 쓴 남자가 탈모를 하고 얼굴을 드러냈다. 원식은 그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봤다. 이홍빈. 10년 전에 헤어진 옛 친구였다. 그때보다 어른스러워진 모습이었지만 웃을 때 드러나는 양볼의 보조개는 그대로였다. 홍빈의 머리색도 원식과 비슷한 계열의 푸른색이었다.
"홍빈아."
원식은 총을 거둬 다시 허리춤에 찼다. 옛 친구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과 달갑지 않은 방식의 환영 인사 때문에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식으로 불러내서 미안해. 우리도 함부로 움직이기 힘든 상황이거든. 네 실력이 변함 없나 확인도 해야 했고. 동체 시력 뛰어난 건 여전하구나."
"내 위치는 어떻게 알았지?"
"얼마 전에 일 있어서 그 근처 지나가다 봤어."
"……."
"아, 그때 인사하려 했는데 택운이 형한테서 급한 연락이 와서 빨리 가야 했거든. 참, 소개가 늦었지? 이 분이 택운이 형이야. 상혁이하고는 통성명했지?"
슬링샷을 든 남자가 무기를 거두고 원식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정택운이다. 만나서 반갑다."
하지만 택운의 표정은 방금 전 원식의 지적 때문인지 별로 반가워 보이지 않았다. 원식은 무덤덤하게 택운과 형식적인 악수를 나눴다.
"이런 식으로 날 불러낸 이유가 뭐야?"
"네 도움이 필요해서."
"네가 한상혁한테 ROVIX을 알려줬어? 그게 니가 말한 도움과 관련 있는 건가?"
"잠깐."
택운이 원식과 홍빈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랑 상혁이는 ROVIX이라는 단어만 알지, 그게 뭔지 전혀 몰라. 홍빈아, ROVIX이 지금 우리 일이랑 관련 있는 거야?"
"택운이 형, 상혁아."
홍빈이 택운과 상혁을 돌아봤다. 원식에게 지었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곳에서 우리가 겪었던 일이 여기에서도 일어나려는 것 같아."
ROVIX은 국내 제약회사에서 비밀리에 만든 연구소, 정확히는 인간 병기를 만들기 위한 훈련소이자 실험실이었다. 그곳에 온 아이들 대부분은 폭력적인 시위와 무차별 테러에 휘말려 가족을 잃은 고아들이었다. 아이들은 연구소장과 연구원들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했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강도 높은 신체 훈련과 고통스러운 인체 실험을 견뎌야 했다. 원식과 홍빈도 그런 아이들의 일원이었다.
가끔 훈련이나 실험 중에 죽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원들은 친구의 죽음을 슬퍼할 시간 따위는 주지 않았다. 남은 아이들은 평소처럼 훈련과 실험에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그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그런 삶에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16살 생일이 되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연구소를 나가게 되는데 나간 아이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어떤 임무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진 적이 한번도 없었고 성공 여부 또한 전혀 알 수 없었다.
"알려줄 수 없어요?"
어느 날, 원식이 한 연구원에게 물었다. 그가 연구소에 들어왔을 때 신입이었던 연구원이었다. 연구원들 중 아이들에게 제일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차학연 연구원. 항상 하얀 정장에 하얀 셔츠, 연구원용 하얀 가운을 걸쳤는데 그의 어두운 피부색과 대비되어 언제나 눈에 띄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앞머리에 흰머리가 군데군데 섞여 있는 점도 한몫했다.
"미안해. 나도 잘 몰라. 임무 관련해서는 우리 연구원들도 아는 게 없어. 소장님만 알고 있어."
"에이, 형, 연구소장이 제일 아끼는 제자라면서요. 그래도 다른 연구원들보다 뭔가 더 알고 있지 않아요?"
"소장님은 공과 사가 확실한 분이라서."
"그럼 먼저 나간 형, 누나들은 잘 지내는지 그것만 살짝 알려주시면 안 돼요? 저 한 달 뒤면 16살 생일이잖아요."
학연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나는 정말 몰라. 혹시나 안다고 해도 규정 상 알려줄 수 없어. 그리고 좀 전에 소장님한테 호출이 와서. 먼저 가볼게."
학연은 원식을 뒤로 하고 자리를 떠났다. 원식은 멀어져 가는 학연을 바라보다 방으로 돌아갔다.
"뭐 좀 건진 거 있어?"
방에 들어온 원식을 홍빈이 맞이했다. 방에는 다른 친구들도 모여 있었다. 원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역시 이곳을 빠져 나가야겠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렇게 갇혀 사는 건 말이 안 돼."
"학연이 형은 뭐라도 좀 알려주려나 했는데. 어쩔 수 없지."
홍빈이 책상에 건물 내부 도면을 펼쳤다. 아이들이 우르르 모였다.
"그 동안 우리가 여기 살면서 각자 돌아다닌 곳을 조합해 정리한 도면이야. 건물 규모는 5240평에 지하 3층부터 지상 2층까지. 우리가 있는 곳이 바로 지하 3층이야. 2인 1조로 구역을 나눠 연구원들이랑 경호원들을 처리하면서 지상으로 올라가자. 내일 바로 시작하는 걸로 하자구."
"학연이 형도 죽여야 돼?"
한 친구가 홍빈에게 물었다.
"학연이 형은 건들지 말자. 여차하면 기절만 시키고."
"연구소장은 누가 처리하지? 그 사람이 우리의 신상 정보를 갖고 있잖아."
다른 친구의 물음에 원식이 답했다.
"소장은 나랑 홍빈이가 처리하겠어."
연구원들이 취침 지시를 내리러 방문할 때까지 회의가 이어졌다. 잠들기 전, 원식이 홍빈에게 물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뭘 하고 싶어?"
"나는 아버지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을 거야."
"양복점?"
"응. 그럼 너는 뭐 할 거야?"
"글쎄, 어디서 뭘 하든 여기서 이러는 것보단 낫겠지."
작전은 알람이 울리자마자 시작됐다. 원식과 홍빈은 순조롭게 적을 제압했다. 가혹한 훈련과 실험 덕이었다. 경호원들을 처치하며 권총과 칼을 획득하자 더욱 빠른 속도로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2층의 연구소장실이 나타났다.
원식은 연구소장실의 문을 발로 차 부쉈다. 그런데 연구소장이 방 한가운데에서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곁에는 학연이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하는 모니터들의 빛을 받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권총을 쥔 채.
"학연이 형!"
홍빈이 경악했다. 학연은 모니터들을 보며 힘없이 웃었다. 각 모니터마다 치열한 전투가 생중계 됐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어.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인간을 착취하면서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다니. 웃기지도 않아."
학연이 원식과 홍빈을 바라봤다.
"소장이 연구소의 자폭 스위치를 눌렀어. 모니터로 상황 파악하자마자 스위치 눌러놓고 내뺄 준비를 하고 있더라구. 그래서 죽였어. 연구소장이라는 사람이 자기 목숨 챙기는 데만 급급하다니. 내가 그런 인간의 제자였어."
"형, 빨리 여길 떠요! 지금 나가면 살 수 있어요."
원식의 말에 학연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랑 관련된 모든 기록을 없애야 돼. 폭탄이 터진다고 해도 복원전문가가 손을 쓰면 너희들 신상 털리는 건 시간문제야. 완벽하게 없애려면 내가 남아야 돼. 이게 너희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곧 10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될 거야. 살고 싶으면 어서 나가!"
학연이 원식과 홍빈에게 총을 겨누었다. 홍빈은 이를 악물었다.
"고마워요, 학연이 형."
원식의 작별 인사와 동시에 두 사람은 소장실을 뛰쳐나갔다. 폭발 10분 전 카운트다운 안내 방송이 연구소 전체에 울려 퍼졌다. 원식과 홍빈은 몸을 날려 2층 창문을 부수며 뛰어내렸다. 유리 파편을 흩뿌리며 안정적으로 착지한 그들은 전속력으로 정문을 향해 달렸다.
탈출에 성공한 그들은 연구소 근처에서 친구들을 기다렸다. 하늘이 일년 중 드물게 맑은 날이었다. 추운 겨울임에도 지상을 선명히 비추는 태양의 온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하지만 카운트다운이 끝나 폭탄이 터져 건물이 완전히 붕괴될 때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직감했다. 자신들 이외에는 모두 실패했음을. 둘은 새로운 신분을 만들 때까지 한동안 붙어 다녔다. 하지만 자신들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서로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결국 각자의 길을 떠났다. 그 후, 서로 다른 곳에 정착한 두 사람은 아주 가끔 있는, 태양이 선명히 지상을 비추는 맑은 날에는 해가 질 때까지 밖에 나가지 않았다.
택운과 상혁은 원식과 홍빈에게 있었던 일을 듣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기사 한 줄이 나지 않은 거야?"
"진실이 드러나면 그 제약회사가 타격을 입으니까요. 결정적으로 학연이 형이 모든 기록을 없애서 건질 것도 없었을 거예요."
"그 얘긴 이제 됐고."
원식이 끼어들었다.
"여기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다구?"
상혁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애들이 납치됐어요."
"납치?"
"하얀 정장을 입은 녀석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아이들을 강제로 끌고 갔어요."
그들은 홍빈이 우연히 원식을 목격했던 날에 동네를 습격했다. 적은 인원으로 이루어진 조직이었음에도 주민들을 단번에 제압했다. 보스는 연회색 머리에 높은 콧날이 돋보이는 서구적인 외모의 남자였다. 보스의 눈빛은 어린 아이가 위험한 장난을 시도할 때의 그것과 같은 불길함이 담겨 있어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예감은 들어맞아 조직원들은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갔다.이유는 알 수 없었다. 아이들 중에는 택운과 상혁의 동생들도 있었다. 다행히 택운의 동생은 며칠 뒤에 가까스로 탈출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조직원이 다시 데리러 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혁의 동생을 포함한 다른 아이들이 아직 그 조직 내부에 갇혀 있었다.
"희운이가 그랬어. 이 근처 버려진 연립주택을 아지트로 삼아서 애들을 가뒀다고. 잘 듣지는 못했지만 실험이 어쩌고 수술이 어쩌고 하는 말도 들었댔어."
택운은 자기 동생만 무사히 돌아온 게 내심 미안했는지 상혁의 눈치를 살폈다.
"경찰에 신고는 했어?"
"경찰들은 근처 시위 진압에 신경 쓰느라 여기 일은 관심도 없어. 무기도 변변치 않아서 우리가 직접 쳐들어갈 엄두도 못냈구."
"그래서 날 불렀군."
"그나마 다행인 건 조직의 규모가 별로 크지 않다는 점이야. 우리가 10년 전에 했던 것처럼 작전을 짜면 애들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원식아, 부탁이야. 도와줘."
원식은 권총이 담긴 더플백을 홍빈에게 넘겼다.
"손님을 계속 밖에 세워둘 거야? 그 작전, 한번 짜보자구."
홍빈의 양복점에는 젊은 남녀 여럿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눈 원식은 연구소에 있었던 시절이 떠올랐다.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들이 겹쳐져 순간 울컥했다.
"우리 같은 훈련을 안 받은 사람들인데 괜찮을까?"
"원식아, 여기 있는 분들은 수많은 테러에 휘말리면서도 스스로와 가족을 지켜낸 사람들이야. 걱정하지 마."
홍빈은 책상 위의 원단과 재봉 도구를 치우고 종이를 펼쳤다. 연립주택의 도면이었다. 다들 도면을 보러 책상에 모였다.
"다행히 어르신들 중에 그 건물에 살았던 분이 있어서 도면을 구할 수 있었어요.복도식 연립주택이고 4층이에요. 사실 아이들이 정확히 어디에 갇혀 있는지는 몰라요. 희운이도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니까. 조직원들은 10명 내외. 우리 인원이 좀 더 많지만 방심하면 안 돼요. 처음 녀석들이 쳐들어 왔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거 기억하시죠? 보스 이름은 이재환. 무슨 생각인지 애들 방에 자주 찾아와서 같이 논다고 했어요."
"뭐야, 진짜 애라도 되나?"
상혁이 인상을 썼다.
"아이들의 경계심을 풀어주려는 술수일 거야. ROVIX에서도 써먹었던 수법이야."
원식이 이를 갈았다.
"우선 아이들을 무사히 구출하는 게 제일 중요해요.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다른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우리가 처단했으면 해요. 시간이 지체될 수록 아이들이 위험해져요. 날이 밝는 대로 시작하죠."
홍빈의 의견에 모두 동의했다.
"근데 옷은 좀 편한 걸로 갈아입죠. 홍빈이 형이 맞춰준 정장이 불편한 건 아니지만 몸을 움직이기 편한 걸 입는 게 싸우기 수월하지 않겠어요?"
상혁이 제안했다. 홍빈이 상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상혁아,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우리 중에 희생자가 생길 수도 있어. 장례 때 입을 정장을 미리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해주겠어?"
"그리고 그거 알아? 옛날에는 죽은 사람을 장사지낼 때 수의(壽衣)가 따로 없이 그 사람의 가장 좋은 옷을 입혔어."
원식이 홍빈의 말을 이었다. 상혁은 검은 정장이 상복이자 수의라는 그들의 말에 수긍했다. 회의는 동이 틀 때까지 계속됐다.
아침이 오자 사람들은 원식이 가져온 권총으로 무장했다. 아이들을 발견하면 바로 연락할 수 있는 무전기도 하나씩 챙겼다. 바이크를 타고 조금 이동하자 동네 외곽에 있는 4층 연립주택이 보였다. 건물 앞에 바이크를 세우고 원식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평소와 같은 흐린 날씨였다.
"다들 살아서 만납시다."
홍빈의 그 말을 신호로 사람들이 일제히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각자 맡은 구역으로 일제히 움직였다. 건물 입구를 중심으로 택운과 상혁은 2층 오른쪽 구역을, 원식과 홍빈은 4층 왼쪽 구역을 맡았다. 4층에 다다르자 하얀 정장을 입은 조직원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권총을 쏴댔다. 하지만 ROVIX 시절에 받았던 훈력 덕에 완벽한 호흡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었다. 홍빈이 가위날을 방패 삼아 총알을 튕겨내면 원식이 총으로 조직원들의 손을 맞춰 무기를 놓치게 했다. 마무리로 홍빈이 조직원들의 발목을 그어 아킬레스건을 끊었다.
“여기는 정택운. 204호에서 아이들을 찾았어. 다들 무사해.”
택운의 무전이었다. 원식과 홍빈은 아이들이 무사하다는 말에 안도했다. 홍빈이 응답했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아직 보스를 찾고 있어요."
“합류할게요.”
상혁이 갑작스레 제안했다.
“아냐 상혁아. 애들 데리고 빠져 나가.”
“다른 분들한테 맡기면 돼요. 지금 바로 택운이 형이랑 올라갈게요.”
“응? 나랑?”
서로 상의한 바가 없었는지 택운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 그 자식을 제가 직접 박살내겠어요.”
“알았어. 애들 안전하게 다른 사람들한테 넘기고 하고 싶은 대로 해.”
“오케이!”
원식의 허락이 떨어지자 상혁은 바로 무전을 끊었다. 택운과 상혁이 4층으로 올라오는 동안 원식과 홍빈은 보스를 찾았다. 그들이 합류한 건 401호만 남겨뒀을 때였다.
원식이 문짝을 걷어차 열고 총을 겨눴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거실로 들어가자 하얀 정장을 입은 한 남자가 컴퓨터 화면을 켜고 FPS 게임을 하고 있었다. 보스 이재환이었다. 상혁이 기가 차서 헛웃음을 지으며 재환에게 총을 겨누었다.
“팔자 좋네. 조직 초토화되게 생겼는데 게임이나 하고 앉아있고.”
재환은 고개를 살짝 돌려 곁눈질을 했다. 게임에서 나오는 소리 말고는 아무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다 재환이 자켓 안주머니의 권총을 꺼내 무작위로 쏴댔다.
‘’크윽-!”
하마터면 상혁이 맞을 뻔한 것을 택운이 몸을 날려 살 수 있었다. 홍빈이 왼손에 든 가위날을 던졌다. 가위날은 재환의 자켓을 뚫고 벽에 박혔다. 재환이 벽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이씨, 귀찮게."
재환은 몸을 비틀었다. 그 때문에 자켓이 뜯어졌다. 홍빈이 다른 가위날을 던졌다. 이번에는 가위날이 재환의 몸을 스쳤다. 셔츠가 찢어져 그 틈으로 근육질의 맨몸이 살짝 보였다.
"이재환!"
상혁이 소리치며 총을 재환의 심장에 겨눴다.
"죽어!"
상혁이 방아쇠를 담기자 굉음이 울렸다.
"잠깐!"
원식이 재빨리 재환을 뒤에서 끌어 안으면서 총을 쏴 상혁의 총탄을 튕겨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상혁이 절규했다. 원식은 그의 외침을 무시하고 재환의 셔츠를 잡아 뜯었다. 온 몸에 희거나 붉은 튼살이 가득했다. 원식은 재환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야, 너 몇 살이야?"
"…살."
"뭐?"
"7살! 7살이라구! 이제 됐어? 이거 놔!"
재환이 원식을 뿌리쳤다. 택운과 상혁은 경악했다. 겉보기에 20대 중후반의 멀쩡한 성인 남성이 스스로를 7살 어린이라 주장하다니. 두 사람은 재환이 아까 벽에 머리를 박을 때 다친 게 아닌가 의심했다. 홍빈은 곧 상황을 파악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런 애들이 있었어. 성장 주사를 맞아서 몸만 큰 애들."
튼살과 연회색 머리는 그런 실험의 후유증이었다. 하지만 홍빈도 보스가 그런 실험을 받은 어린아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럼 진짜 보스가 따로 있기라도 한 거야? 쟤는 누구한테 실험을 당한 건데?"
"나야."
모두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정장에 흰색 연구원용 가운을 입은 남자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원식과 홍빈은 경악했다.
"학연이 형!"
"살아있었어!"
“오랜만이네. 원식아. 홍빈아.”
차학연. 죽은 줄 알았던 그가 살아있었다. 10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의 얼굴에서는 노화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앞머리에 있는 흰머리도 그대로였다. 재환이 학연을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학연 삼촌! 도와줘요!"
"너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진짜 나이 말하지 말라고 했지?"
"삼촌! 조금만 더 연구하면 엄마, 아빠랑 형들 살릴 수 있다면서요."
재환이 울먹였다. 좀 전까지의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래, 그러기로 했지. 근데 니가 꼬맹이들하고 히히덕거리느라 연구가 늦어진 건 알아? 한 녀석이 도망쳤는데 모르는 척하기까지 해? 진짜로 가족들을 살리고 싶긴 한 거야?"
"그치만...."
원식과 홍빈은 재환과 영문 모를 대화를 나누는 학연이 낯설었다. 학연은 그들이 10년 전에 알았던 때와 너무도 달랐다. 10년 전에는 연민과 따뜻함으로 가득했던 눈이 지금은 광기로 번뜩였다.
"이젠 니가 쓸모 없어져서 약속은 못 지키겠다."
학연이 가운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재환을 겨눴다. 그리고 원식과 홍빈을 보고 비소(誹笑)를 지었다.
"그래, 너희들. 내가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 주지. 죽을 땐 죽더라도 진실은 알고 죽게 해줄게."
ROVIX에 있었던 10년 전, 사실 16살이 된 아이들은 임무를 나간 게 아닌 불법 장기·조직 거래의 희생자가 되었다. 연구소장이 학연에게만 귀띔했다. 학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더 오래 쓸 수 있는 실험체를 엉뚱한 데에 갖다 바쳐야 하다니. 학연은 윗선에 순응하는 스승을 향해 끓어오르는 반항심을 온화한 얼굴 속에 숨겼다.
학연은 연구에 대한 열망을 점점 숨기기 힘들었다. 그때 일어난 연구소 아이들의 반란은 아주 좋은 기회였다. 학연은 연구소장실에 들어가 연구소장을 죽였다. 필요한 자료들은 개인 외장하드에 옮기고 본 서버는 완전히 파괴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는 연구소장실에 쳐들어올 아이들을 기다렸다. 학연의 예상대로 원식과 홍빈이 연구소장실에 침입했다. 훈련을 받은 녀석들이라도 그들은 아직 애송이에 불과했다. 학연의 연기에 완벽히 속은 둘은 그를 두고 도망쳤다. 그는 자신만 알고 있는 안전한 경로를 통해 후문으로 빠져 나갔다. 공식적으로 ROVIX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학연은 모든 책임을 죽은 연구소장에게 돌리고 자신이 새로운 연구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 제약회사에 소속된 이상 모든 연구를 자기 뜻대로 할 수는 없었다. 임원진들의 입맛대로 휘둘리던 데에 지친 학연은 임원진 중 어린 자녀가 있는 한 사람을 골랐다. 연구 중 흥미로운 발견을 했다는 구실로 그 사람 집을 찾아갔다. 학연은 그 사람과 배우자, 두 아들을 죽였다. 제일 어린 남자아이 한 명만 남겼다. 그 아이가 재환이었다.
학연은 어린 재환에게 죽은 사람을 살리는 연구를 하고 있으니 시키는 대로 하면 가족들을 살려주겠다 설득했다. 재환은 그 말을 믿고 학연에게 성장 주사를 놓았다. 학연은 제약회사를 퇴사했다. 몇 달 만에 성인으로 자라난 재환을 앞세워 조직을 만들었고 그 계획은 이제 시작 단계였다.
"그런데 하필 너희를 만나게 될 줄이야. 하긴, 살아있을 테니 언젠간 다시 만날 거라 생각했어. 좀 더 늦게 만났다면 좋았을 텐데."
"우릴 속였어!"
"차학연, 너!"
원식과 홍빈은 ROVIX의 진짜 목적과 학연의 배신에 부들부들 떨었다. 먼저 떠난 형, 누나들 만큼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남은 건 둘 뿐이었다. 둘은 학연에게 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학연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모든 총탄을 피했다
.
"나도 너희들과 비슷해. ROVIX에서 얻은 데이터 중 쓸 만한 걸 나한테도 적용시켰거든!"
학연이 두 사람에게 전혀 지지 않자 택운과 상혁도 가세했다. 학연은 4명을 상대해도 전혀 지치지 않았다. 그때, 하필 택운의 총알이 떨어졌다. 택운은 잠시 멈칫하다 슬링샷을 꺼내 학연에게 겨눴다. 당긴 고무줄을 놓자 쇠구슬이 일직선으로 학연을 향해 날아 어깨에 꽂혔다.
"으윽!"
쇠구슬에 맞은 학연은 통증을 못 견디고 총을 놓쳤다.
"제기랄! 내가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학연은 자켓 안주머니에서 주먹 크기의 알류미늄 캔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적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캔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막탄이었다.
"오늘은 이대로 물러나지. 내 아지트는 여기만 있는 게 아니거든. 인연이 있다면 또 보자구!"
눈앞을 가리는 연기가 사라졌을 때, 학연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차학연!"
"이 자식이 어디로 사라졌지?"
원식의 주먹이 떨렸다. 홍빈도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둘은 건물을 이잡듯이 뒤져 학연을 찾아내기로 했다. 그런데
삐----익!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원식과 홍빈은 그 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10년 전처럼 건물이 무너지려 했다. 홍빈이 이성을 되찾고 모두에게 외쳤다.
"다들 여기서 나가! 어서!"
모두 탈출을 위해 계단으로 내려갔다. 원식은 계단을 내려가다 멈칫했다. 택운의 재촉에도 꼼짝 않더니 도로 올라가 버렸다. 택운과 상혁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재환이 있던 방을 다시 찾아갔다. 재환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원식이 재환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느 새 홍빈도 올라와 재환의 반대쪽 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이미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벽에 균열이 일어났다. 원식과 홍빈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재환을 이끌고 창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재환을 사이에 두고 끌어 안으면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땅바닥에 닿는 충격이 온몸에 전해졌다. 다행히 몸은 멀쩡했지만 그렇다고 통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건물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으윽! 죽는 줄 알았네."
"보통 사람들이었으면 살아 있어도 거동은 꿈도 못 꾸지."
홍빈의 말에 원식이 씨익 웃었다.
"왜 날 구한 거야?"
갑작스레 들린 재환의 목소리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다행히 재환은 무사한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린다는 점만 제외하면.
"오늘 작전의 일순위는 아이들 구출이었거든. 네가 어린 아이라는 걸 알게 된 이상 두고 갈 순 없었어."
홍빈의 다정한 말투에 재환의 호흡이 잠시 흔들렸다. 심호흡을 한 재환이 말을 이었다.
"……다들 무사할까요?"
"그건 봐야 알지."
원식은 몸을 일으켜 앞장 섰다. 멀지 않은 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다행히 다들 무사한 것 같았다. 모두 가족과 이웃을 찾은 기쁨에 밝은 표정이었다. 세 사람이 곁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은 재환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공격하려 하지는 않았다. 택운과 상혁이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한 덕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재환이 형!"
상혁의 곁에 있던 아이가 재환에게 달려왔다. 재환이 아이를 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우혁아."
다른 아이들도 재환의 곁으로 모였다. 아이들의 밝은 목소리에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근데 형, 형이 아니라며? 우리보다 어리다던데?"
"미안……."
"괜찮아. 거기 있는 동안 우리 지켜준 거 알고 있어. 고마워."
갑자기 바깥이 점점 밝아졌다. 모두 고개를 들었다. 구름이 걷히고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식과 홍빈도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앞으로도 맑은 낮의 하늘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식은 결심했다.끝까지 학연을 쫓아 처단하기로. 하지만 언젠가 학연을 처치하더라도 이런 짓을 일삼는 자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남은 삶을, 자신 같은 일을 겪는 아이들을 구하는 데 쓰기로 했다. 평생을 끝없는 싸움과 함께 하겠지만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일 끝났으니 이제 갈게."
"간다구? 좀 더 있다 가지 않구."
"잘 해결됐으니 내 역할은 여기서 끝이야."
그는 홍빈과 악수를 했다. 그들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자 택운과 상혁이 합류했다. 원식은 두 사람과도 악수를 나눴다.
"원식아, 정말 고마워. 오늘 일은 잊지 않을게."
"덕분에 살았어요. 좀만 더 연습하면 더 잘하겠어요."
"원식이 형, 저희 동생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래, 너도 고생했다. 너는 깡은 있는데 성질이 급해. 성질 좀 죽여."
원식은 두 사람에게 작별 인사 겸 조언을 하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재환과 눈이 마주쳤다. 둘은 미소 지으며 눈인사를 나눴다. 바이크를 탄 원식이 시동을 걸었다.
"조만간 정장 맞추러 올 테니 곧 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