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중(暗中)
꽃
@blossom1206
암중(暗中)
암중(暗中): ①어둠 속
②은밀(隱密)한 가운데
학연은 눈을 떴다.
어둡고 끈적한 공기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몽롱한 상황 속에서 학연은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자신의 것인지, 혹은 타인의 것인지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학연은 애써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기분 나쁜 쇳소리가 좁은 방을 울렸고, 학연은 자신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발견했다. 수갑을 멍하니 바라본 채로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겨우 제정신을 차린 학연은 문득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누구세요?”
재환은 낮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려달라는 말 대신 자신의 정체를 묻는 아이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고민했다. 대답을 해줘야 하는 걸까.
“정신이 들어?”
재환의 물음에 움찔 놀란 것도 잠시, 학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저 이 수갑 좀, 풀어주면 안돼요? 도망 안 갈게요.”
“내가 널 어떻게 믿니.”
“진짜예요, 갈 데도 없단 말이에요.”
“안 돼. 그냥 얌전히 있어.”
안된다고 말할 줄 알았어요, 학연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재환은 학연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기 시작했다. 고작해야 열아홉, 어린 소년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이런 상황에 저렇게 침착할 수 있는 걸까.
그리곤 머릿속으로 대충 시간을 가늠했다.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그런 유흥가엔 왜 있었어?”
“도망치다 길을 잃어서요.”
“도망? 누구한테서?”
그러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학연은, 재환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난 어둠이 익숙해요.”
재환은 그런 학연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있죠, 학연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껏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뭐든 다 했어요.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턴 쉬워지더라고요. 양심의 가책도 어느 정도 사라지고.”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냥요. 난 늘 혼자였으니까.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생겼잖아요, 반가워서요.”
재환은 느릿하게 자세를 추스른 다음 생각에 잠겼다.
수갑 정도는, 풀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재환은 학연을 험한 일에 휩쓸린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다.
날카로운 금속 소리와 함께 학연의 앞에 열쇠꾸러미가 던져졌다.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는 학연에게 재환은 제안했다.
그 많은 열쇠 중에서 네 수갑 열쇠를 찾을 때까지, 네 이야기를 들어 줄게.
네 이야기가 끝나기 전까지 열쇠를 찾지 못하면 난 널 넘길 거야.
넘기다니, 누구한테요?
널 찾는 사람에게. 그리고 넌 아마 죽겠지.
학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이것뿐이었으니까.
그리곤 열쇠꾸러미를 들어 하나씩 맞춰보기 시작했다.
잠시 수갑을 푸는 것에 열중하던 학연이 입을 열었을 땐, 시간이 꽤 흐른 후였다.
난 태어났을 때부터 혼자였어요, 학연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가족도 없었죠. 내가 자란 고아원의 원장님은 늘 말했어요.
네 가족이 널 버렸어, 넌 버려진 거야. 난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어요. “
“하지만 아니었구나?”
“음, 원장님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내 가족들은 다 사고로 죽었다고. 그리곤 이야기했죠. 데려가라고. 조건에 딱 맞는 아이라고.”
학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원장님은 누군가에게 아이들을 공급하고 있었어요. 잃을 것이 없는 아이들을, 달콤한 말로 유혹했죠. 그 곳으로 가면 일자리가 있을 거야, 너희 같은 아이들도 그 곳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어.”
“결국엔 너도 그 말에 넘어간 거잖니.”
재환의 말에 학연은 가만히 하던 일을 멈췄다. 재환은 슬쩍 웃으며 말을 이었다.
“틀려? 너도 그 달콤한 말에 홀려 그 곳에 갔잖아. 하지만 꿈꾸던 세상이 아니었나보지, 나한테 잡혀온 걸 보면.”
“내가 그 곳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알고 있나요? “
뻔하지 뭐, 재환은 여유롭게 옷매무새를 만지며 말을 이었다. 온갖 지저분한 일은 몽땅 맡아서 했겠지, 일을 해내지 못하거나 약한 아이들은 버려졌을 게 분명해. 어때, 내 말이 맞니?
학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도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았군요.”
“왜, 동질감이라도 느껴져?”
“음, 그럴지도.”
재환은 묘한 눈빛으로 학연을 바라보았다. 동질감, 그 단어가 늘 인간을 약하게 만들어. 재환은 살아남으려 열심히 열쇠를 꽂아 넣는 학연의 모습에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에요, 학연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자 재환은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학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이 잘못한 사람을 죽이는 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래? 이유는?”
“말 그대로 잘못한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억지스럽네. 순 자기합리화야.”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는 데요?”
음... 재환은 고민했다.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질문을 재환에게 하는 아이는 정말 처음이었으니까.
“...죽는 사람도, 죽이는 사람도 죄인이 되는 거겠지.”
“왜요?”
“왜냐니, 살인은 당연히... 아니다. 네 이야기 마저 해.”
재환은 그만두었다. 자신보다 대여섯 살은 어려보이는 아이와 쓸데없는 주제로 말다툼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재환의 말에는 모순이 숨어 있었기에. 죄인이라니,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계속 이야기 해, 수갑 아직 못 풀었잖아?”
“음... 나는 고아원 원장을 찾아갈 거예요. 왜인지 알아요?”
복수하려고? 재환은 지루하다는 듯 느릿느릿 반문했다. 원망과 증오로 가득 찬 이야기의 끝은 너무나도 뻔했으니까.
“물어봐야죠, 그렇게 해서 얻는 게 뭐냐고.”
“뭐긴 뭐야, 돈이지. 너 아직 많이 어리구나.”
인간들은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선 뭐든지 하거든. 나도 마찬가지지만.
재환은 자켓 주머니에 손을 넣어 안에 든 차가운 물체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잠시의 착각이었던 것 같다. 재환은 흥미를 잃었고, 이 모든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반항하면 언제든 죽이라고 했었는데. 그 이야긴 아직도 유효한 걸까.
아이를 죽이려는 생각을 시작으로 재환은 학연이 앞에 있는 것도 잊고 홀로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부터 학연을 잡아오라 의뢰한 사람과의 대화까지. 재환은 문득 회의감을 느꼈다. 자신은 돈을 좇은 것뿐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죄악을 당연하게 여기는 지경까지 이르렀으니까. 재환은 망가져버린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평소답지 않게. 재환이 현실로 돌아온 건 꽤나 크게 들려온 쇳소리 때문이었다.
학연이 드디어 수갑을 풀었구나, 싶어 고개를 들었을 땐 학연은 그 자리에 없었다. 잠시 멈칫했던 재환은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멍청하게도 그 소리는 수갑의 소리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뒤통수에 닿는 차가운 물체가 말해주고 있었다. 재환이 자신의 꾀에 넘어갔음을.
“당신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잖아요.”
도대체 총은 어떻게 숨겨 들어온 걸까. 재환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을 만큼 학연이 기특했다. 단순히 한 명에게 복수를 하려는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너는 결국 복수를 하려는 거구나, 그렇지? 모든 사람에게 말이야.”
“응, 맞아요. 당신이 첫 번째가 되겠네요.”
“총은 어디서 가져온 거야? 아깐 분명히 없었는데.”
재환은 능청스레 대화를 이었고, 아 이거요? 학연은 잠시 재환의 머리에서 총을 떼었다.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한 재환이 우악스레 학연의 팔을 붙잡았을 때, 예상했다는 듯이 웃는 학연과 마주한 재환은 전엔 느낄 수 없었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직감했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해사하게 웃는 학연과 어느새 자신의 이마에 놓인 총구가 말해주고 있었다.
“있죠, 난 이런 걸 배우려고 일부러 원장을 따라갔어요. 돈에 환장한 당신들과는 다르단 말이야.”
“또 자기합리화... 복수와 살인을 택한 네가 나와 뭐가 그렇게 다르기에.”
“그건 앞으로 내가 생각해야할 문제겠죠. 당신들 같은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학연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재환에게 정말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안녕, 이야기 즐거웠어요.”
학연의 말을 끝으로, 낡은 건물 안에는 큰 파열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모든 것이 소멸한 것일까 싶을 즈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파동처럼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공기만큼 어둡고 끈적한 발걸음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