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LIVION
느루별
@nerubyeol_vixx
도시 외곽에 자리한 빈민가로 소리 없이 들어온 매끈한 세단은 다 쓰러져가는 집들을 지나쳐 빈민촌 가장 구석에 위치한 집 앞에서 멈추었다. 차에서 내린 홍빈은 폐까지 깊숙이 스며드는 매캐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꾸미는 것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는 자신에게 아무한테나 얼굴을 보여줄 수는 없지 않겠냐며 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워준 보스 덕분에 기분이 썩 좋지 않던 참이었다. 밀려오는 짜증에 구두 굽으로 탁탁 바닥을 치니 동네가 텅 빈 듯 소리가 울렸다.
“여기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나?”
“한창 재개발 문제로 시끄럽다가 얼마 전에 주민들이 다 쫓겨나서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래? 그래도 일단 찾아보도록 하지.”
그의 손짓에 양복을 빼 입은 부하 몇 명이 집의 문을 부수듯 열어젖혔다. 요란한 소리 후 몰려든 정적을 깬 건 홍빈의 구두소리였다. 구두에 먼지 하나 묻을까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내디딘 홍빈은 탁 트인 마당 뒤로 무너져 내린 저택을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이런 곳에 그자에 대한 단서가 있을 리가 없었다. 의심 반 호기심 반의 마음으로 그는 부하들에게 집을 뒤지라고 지시한 뒤 걸려오는 전화에 너 잘 걸렸다 라는 표정으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때 B? 뭐가 나올 만 해 보여?”
“주민 한 명 없는 마을에서 뭐가 나올 것 같지도 않고 집까지 반쯤 무너져 있습니다. 정말 여기 그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절 보내신 겁니까?”
“사람이 없다고 해서 단서도 없다는 법 있나? 그리고 아직 후보지는 많아. 거기 없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다고.”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전국에 있는 그 많은 곳을 다-”
“내가 말했잖아. 추리고 추려서 더 줄어들 거라고. N이 아직도 분석 중이고 R이랑 H가 다른 지역 돌아보고 있으니까 늦어도 한달 안에는 끝날 거야.”
“한 달이면 우리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충분히 도망가고도 남을 텐데요.”
“글쎄...... 잠깐만.”
수화기 너머로 보스가 다른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아까와는 다르게 한껏 격양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이면 충분히 도망가고도 남는다고 했지? 회장 금방 찾을 수 있어.”
“예?”
“철수하고 본부로 돌아와. L한테 연락 왔다.”
무심하게 끊어진 전화에 황당해 할 틈도 없이 홍빈은 부하들을 다시 불러모아 서둘러 마을을 빠져 나왔다. 2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기업들만 모인 빌딩가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느껴지는 이질감에 홍빈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도 그렇고, 조직의 본부를 이곳에 두기로 한 판단은 위험하다 못해 대담해 보였다. 누가 서울 한복판에 뒷돈 거래하는 조직기업이 있다고 상상이나 하겠어. 홍빈은 10분정도만 차를 타고 가도 정부기관이 즐비한 이곳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가 몸 담고 있는 조직 ‘LETHE’ 는 원래부터 조직이 크고 작은 기업들의 뒷거래와 밀수입을 도와주어 입지는 상관이 없었으나, 구치소와 경찰청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홍빈의 불안감을 초래하기 충분했다. 전국을 들썩거리게 만든 소매치기로써 홍빈은 이런 기분으로 본부를 들락날락 거리는 것이 거북했다. 경찰과의 마찰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 보스를 몰아내고 세력을 뒤집으며 LETHE의 최고 권력자가 된 현 보스는 대기업과의 거래가 왕성해지기 시작하자 아예 조직의 중심부를 서울로 옮겼다. 확실히 저를 거둬준 전 우두머리 때에 비해 조직의 크기도 불었고 부하들의 평도 좋아졌으나 본부가 수도 한가운데에 떡 하니 있다니, 홍빈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건물 맨 꼭대기 층에 도착한 홍빈은 넓은 복도를 지나 위치한 사무실로 들어갔다. 노크도 없이 들어갔으나 그에 개의치 않은 듯 의자를 빙글 돌리며 누군가와 통화하던 재환은 홍빈을 보자 전화를 끊고 그에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오만 가지 불만이 가득하더니 오긴 금방 오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굳이 사과 할 필요는 없고, 앉아봐.”
홍빈이 자리에 앉자 재환은 책상 위에 있던 서류철을 그에게 건내주었다. 고작 종이 한 장인 서류를 훑던 홍빈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보스, 이건,”
“L이 마카오에 갔잖아. 거기서 회장을 아는 사람을 만났대. 최근까지 그 새끼랑 연락했다고 하더라고. 아직 회장은 출국하지 않았다고 하고, L이 본 사람은 의심스러워서 데려오라고 했어.”
“그 사람 말은 믿을 만한 겁니까? 회장이 손을 썼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왜? L을 못 믿겠어?”
홍빈이 잠자코 있자 재환은 나머지 애들도 모이라고 해야겠다며 중얼거린 뒤 홍빈에게 가도 좋다고 다시 그를 서둘러 내보냈다. 홍빈이 집무실을 나간 뒤 재환은 다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R, H와 본부로 복귀해. 상황 설명은 여기서 할 테니 최대한 빨리 오고.”
바다냄새가 물씬 나는 해변가마을에 기다란 인영이 보였다. 우중충한 날씨에 회색빛깔을 띄는 바다를 바라보던 상혁은 무전기에서 들리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쾌재를 부르고는 걸터앉아 있던 차에 타 마을을 빠져나갔다. 그는 마을 외곽쯤에 도착해 내린 후 멈춘 차 옆으로 다가온 원식을 보며 말했다.
“왜 갑자기 오라고 하는 거예요?”
“L이 마카오 갔잖아. 인질 잡아서 데려오고 있대.”
“L형이 잡은 거면 확실히 인질인가 보네요. 그럼 이 짓은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건가요?”
상혁의 말에 원식은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언제 어디서 증언이 조작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택운이 데려오는 사람이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애물단지일 확률은 적었지만 전적으로 인질을 믿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원식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상혁을 조수석에 태우고는 차를 몰아 서울로 달려갔다.
“무슨 소리야 그게.”
경호를 어떻게 했길래 인질이 죽어!!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가 요란하게 깨지는 소리가 났다. 택운이 잠자코 재환이 육두문자를 내뱉는 소리를 듣고 있자 곧 가라앉은 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와서 가만히 놔두진 않을 거니까 마음의 준비는 하는 게 좋을 거야, L.”
“잠깐만요, 보스.”
택운의 다급한 목소리에 재환이 전화를 끊으려다 뒤에 이어지는 그의 말에 욕을 뱉으며 통화종료버튼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었다.
“인질이 죽기 말했던 증언들이 있습니다. N에게 분석을 부탁했어요.”
“그게 큰 의미가 있나?”
“보스께서 시키신 대로 N이 저희가 조사한 자료를 분석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N에게 자료를 넘겨주었는데 인질이 죽기 전에 저와 만나 했던 말을 이용하면 회장의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그건 N한테 물어보면 알겠지. 일단 한국으로 당장 복귀해. 어떤 말을 하던 처벌받을 테니 내뺄 생각은 하지 말고.”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드는 재환의 말에 택운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고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바라보고 서 있던 서리 낀 창문에 입김이 뿌옇게 서렸다. 얼마나 길어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전 보스 때 회장과 거래한 일이 파토나 버린 뒤, 처벌을 피하고 손해배상금을 지불하느라 막대한 피해를 얻어 재환이 아니었다면 크고 작은 피라미들에게 먹혀 사라지고 없을 조직이었다. 재환이 악착같이 회장을 찾아내 족치려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택운이 보스의 그러한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처벌에 대해서는 잠시만 잊어버리자는 듯 고개를 털던 택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겨울이 늘 그렇듯 하늘이 더럽고 뿌옇게 보였다. 한국은 맑은 날씨겠지. 택운은 학연이 지금쯤이면 분석을 마치고 화가 단단히 난 재환에게 결과를 보고했을지 생각하며 방을 나섰다.
LETHE의 본부빌딩 맨 위층 방에서 학연은 몇 대의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택운이 보내준 자료와 그동안 자신이 완성해오던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예민한 제 보스와 맞닥트리느니 방에 있는 게 낫겠다 싶어 학연은 가끔 머리를 식히러 산책을 가는 것 외에는 방에서 일만 하고 있었다. 천재 소리 들으며 공부했을 때보다는 지금이 몇 배는 더 여유롭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기에 싫증이 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회장의 추적이 여기까지 이뤄지도록 제일 많은 힘을 보탠 게 학연이었다. 한창 컴퓨터만 만지작거리던 그는 저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구두 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또 뭔 일이 있구나. 택운이 무슨 말을 했을지,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대충 감이 온 학연은 재환이 그의 방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말했다.
“여기는 왜 오셨어요?”
“L이 너한테 증언자료 줬다면서.”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얼마나 대단하길래 인질 목숨이랑 맞먹는 건지 보자. 재환의 말에 학연이 키보드를 몇 번 두드리더니 대형 스크린에 자료를 띄웠다.
“L한테 보고 받고 바로 오셨나봐요.”
“인질이 죽어버렸다는 게 말이 돼?”
저승길 동무라도 되고 싶어서 환장했는지. 아직도 화가 난 재환을 보며 학연은 스크린을 가리켰다.
“인질이 했던 말 중에 회장이 있을 것 같은 지역을 암시하는 부분이 있어요.”
“회장 하수인이 그걸 말했을 확률은 굉장히 낮지 않나?”
“이 사람 아니면 누구한테서 회장의 거처를 알아내겠어요. 제가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확실하지 않아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런 거라도 믿어야 해요. 애들 시켜서 찾게 하는 건 인력낭비라고요.”
학연의 말에 재환이 불편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L이 인질을 잡았다고 연락 오기 전까지는 그 방법 밖에 없었다는 걸 몰라? 그리고 그 입 좀 신경 쓰면서 나불대. 아무리 네가 빌고 빌어서 데려온 사람이라도 네 보스는 나야. 허구한 날에 산채로 묻히기 싫음 이곳 질서를 지켜.”
“예, 보스.”
무미건조한 학연의 말에 재환은 진심으로 얘가 자고 있을 때 바다에 던져버릴까 고민하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데려와야 하는 수고가 생기기 때문에 포기해버렸다. 학연은 자연스럽게 다시 스크린을 보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을 가지고 그동안 애들이 돌아다니면서 들은 목격담이랑 경찰들한테서 훔친 정보랑 연결시켜서 분석해봤어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회장이 숨어있을 만한 장소가 몇 군데로 추려졌어요. 그리고 제가 보니까 회장이 전에도 뇌물 사기며 탈세로 숨어다닌 적이 많더라고요? 그 데이터도 합쳐서 같이 분석해봤더니,”
“………”
“남쪽에 있는 섬이에요.”
“……섬? 그 새끼가 숨을 만한 곳 치고는 많이 큰데.”
“회장이 돈 가지고 튀었잖아요. 돈 쓸 곳은 있어야죠. 섬에 학교도 있고 있을 건 다 있어요. 거기 있을 확률이 제일 커요.”
“아니라면 너부터 바다에 던져줄게. 불만 없지?”
“없으면 그렇게 하세요.”
생글생글 웃는 학연에 재환은 욱하려는 성질을 죽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렇게 웃고 있지만 한번 제대로 건드리면 개인정보부터 시작하여 은행과 정보기관 어느 곳이든 털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였다. LETHE가 갓 대학을 졸업했던 그를 일치감치 영입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머리 좀 편하게 굴리려다 능구렁이 한 마리를 들였다는 생각을 하며 재환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는 책상 앞에 놓인 마이크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재환을 제외한 나머지 조직의 간부 5명의 인이어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원 회의실로 모인다.”
“작전을 저희끼리 계획하라고요?”
홍빈이 놀란 듯한 표정으로 묻자 재환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왜? 어차피 너희가 투입되는 작전인데. 전원 투입이야. 회장이 섬에 숨어있다는데, 마을까지 작아서 도망 못 가게 하려면 철저하게 짜야 해.”
“언제까지 계획하는 겁니까?”
원식의 물음에 학연이 입을 열었다.
“일주일. 조그만 남쪽 섬이니 거창하게 계획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우선 거기에 잠복할 두세 명만 추려서 먼저 내려보내죠.”
학연의 말에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기회에 회장 쪽 세력 다 매장 시킬 테니 그에 맞도록 짜.”
“섬 마을 주민들에게 들키지 않고 회장을 잡기에는 어려울 텐데요.”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금방 잊을 걸. 우리도 아무리 큰 이슈라도 누가 다시 상기시켜주지 않으면 까먹잖아.”
“그럼 일주일 안에 짜서 보고하겠습니다.”
“잘 짜야 돼. 이 바닥에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싹 쓸어버릴 만큼.”
15일 후.
차에서 내린 원식은 맑게 갠 하늘에 기분이 좋은 듯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바다의 짠 내음이 느껴지는 듯 하더니 서늘한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흩날리는 머리를 정돈하고는 원식은 섬으로 들어가는 작은 배에 기다란 몸을 구겨넣었다. 배가 덜덜거리며 바다를 가로지른 지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맑은 날씨 덕분인지 저 멀리서 조그만 항구가 원식의 눈에 들어왔다. 원식과 택운이 섬에 발을 디디고 몇 분 지나지 않아 학연과 재환까지 모두 섬에 도착하였다. 재환의 지시대로 먼저 와 있던 홍빈과 상혁까지 합세하자 재환이 입을 열었다.
“이렇게 날씨가 좋아서는 총질할 맛도 안 나겠어. 다들 숨어있다 밤에 숙소로 다시 모이도록 해. 눈에 띌 만한 짓은 하지 말고.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 이상.”
재환의 말에 여섯 명은 제각기 숙소 방으로 들어갔다. 늘 긴장감 속에서 지내온 그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평화로운 섬 마을의 해가 지고, LETHE는 홍빈과 상혁이 머무는 집에 모였다. 얼마 뒤, 달도 구름에 가려져 어둠만 짙게 내려앉은 마을의 적막을 깨고 대문이 끼익하며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상혁이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몸짓 하나하나, 숨 쉬는 방법조차 의식할 정도로 온갖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그였지만 눈빛만큼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났다. 앞 주머니에 꽂아 넣은 리볼버를 확인한 상혁은 날래지만 소리 없이 구불구불한 마을의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미로 같이 얽힌 길을 벽을 따라 하염없이 걷던 그는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지붕과 문은 새로 지은 듯 반들 반들거렸고 안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섬이라도 그렇지, 도피 중인 처지에 도박을 하다니. 기가 찬 듯한 표정을 지은 상혁이 자켓 안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끼고는 대문의 자물쇠에 손을 가져다 대려는 찰나 그의 목에 서늘한 쇠붙이가 닿았다. 동작을 멈춘 상혁은 고개를 슬쩍 돌려 자신의 목에 칼을 가져다 댄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쪽이 저절로 찾아와줄 줄은 몰랐는데.”
백발의 노쇠한 회장은 칼을 든 손에 힘을 주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쪽 사람이 여기를 찾아 올 줄은 몰랐는데, K의 감은 아직 녹슬지 않았나 보군.”
그래도 새파랗게 어린 것이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내 거처를 들락거리는 걸 보니 여전히 조심성은 없구먼. 회장이 상혁의 목덜미를 내리친 건 순식간이었다. 축 늘어진 상혁의 몸이 아까와는 달리 조용해진 대문 안으로 사라지고 마을은 다시 정적 속에 빠졌다.
상혁이 눈을 뜨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상혁은 자신이 결박되어 있는 걸 보고 살며시 웃었다. 한상혁이 저 늙은이한테 제압당하다니. 이쯤이면 다른 동료들도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알 때였다. 상혁은 동료들이 오기 전까지 회장이나 붙잡아 두자는 마음에 묶여있는 의자에서 벗어나보려고 했다. 줄에 묶여 있었지만 어떻게 묶은 것인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고군분투 하던 상혁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표정을 굳히고는 들어오는 회장을 가만히 쏘아보았다.
“무섭기도 해라. 아직 너무 어린데 K가 자네를 이곳에 보냈다니, 좀 의외야.”
“요즘에 나이로 업무 분담하는 경우가 어딨어. 상당히 낡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계시네. 그나저나, 지금 나랑 이렇게 노닥거리고 있을 여유가 돼?”
“K가 너를 내 거처로 보낸 건 말 다한 거 아닌가? 나머지들도 보나마나 오합지졸이겠지.”
회장의 말에 상혁은 이를 빠득 갈더니 말했다.
“곧 그 말 후회하게 될 걸. 그쪽 혼자서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상혁이 조금씩 조바심이 나려던 찰나, 밖에서 탕 하고 총성이 울려 퍼졌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문을 따고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회장이 상혁에게 다가가 총을 들이밀려고 하자 상혁은 의자에 결박된 채로 있는 힘껏 몸을 휘둘러 회장의 총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상혁이 있던 창고의 문을 열어젖히며 홍빈이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나타난 택운은 회장에게 총을 겨눴고 홍빈은 상혁을 묶고 있던 줄을 칼로 끊어주었다.
“조용히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좋을 겁니다.”
택운의 말에 회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가볍게 손짓하였다. 그러자 창고 곳곳에서 무장한 회장의 부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무기 내려놓는 것이 좋을 거다.”
“젠장.”
회장의 말에 나지막하게 투덜거린 홍빈은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헝클더니 택운에게 속삭였다.
“R은 왜 안 와?”
“몰라. 최대한 빨리 온다고 해 놓고선…”
“셋 샐 동안 무기 내려놓지 않으면 쏜다. 하나…..둘…..”
탕 탕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깨지더니 훤칠한 사내가 그 사이로 훌쩍 뛰어들어와 회장의 부하들을 하나하나 쏘기 시작했다. 아수라장이 된 틈을 타 홍빈과 택운, 상혁은 몸을 숨기고 합세하여 총을 쏘기 시작했다. 창문 위에서 타겟을 쏘던 원식까지 어느새 자신들 옆에서 공격 하고 있는 걸 본 홍빈은 주변을 둘러 보았다. 회장이 보이지 않았다. 점점 약해지는 반대편의 공격에 홍빈은 몰래 창고를 빠져나와 회장을 찾았다. 대문 바깥에서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문 밖으로 달려나간 홍빈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검은색 차의 꽁무니만 볼 수 있었다.
“타깃 도주. 검은 차량으로 도망가는 중이야.”
“카피.”
원식이 자신의 말을 전달받았음을 확인한 홍빈은 죽을 힘을 다해 뛰어 골목길을 벗어나 큰 길가로 나왔다. 때마침 자신의 앞에 정차하는 차에 홍빈은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학연은 홍빈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회장은 어느 쪽으로 토꼈어?”
“항구 쪽으로.”
“이거 잘하면 플랜이고 뭐고 다 파토나 버리겠는데? 회장이 배 타고 이 섬 빠져나가면 다시는 못 찾아. 한방에 끝내야 돼. 알았지?”
“실전에는 참여하지도 않는 놈이 말이 많아. 다른 애들은?”
학연은 기분 상한 티를 팍팍 내며 운전 속도를 더 높였다.
“보스가 데려온대. 그리고 내가 이 작전을 계획한 사람이야. 너한테 말하는 것도 허투루 얘기하는 게 아니라고. 한번에 못 죽이겠으면 붙잡아 두기라도 해.”
속도계의 바늘이 120아래로 떨어지지 않게 운전한 학연 덕분에 둘은 순식간에 섬의 항구에 도착하였다. 차에서 내린 홍빈은 매섭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몸을 움츠렸다. 홍빈이 주변을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사이 학연은 차 트렁크에서 권총을 꺼내어 탄알을 장전하고는 홍빈에게 물었다.
“이렇게 깜깜해서 전면전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조명탄이라도 쏴야 하나.”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야. 홍빈은 파도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항구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주변이 온통 시커매 괴물의 뱃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진짜 조명탄이라도 쏴야 하는 건가. 홍빈이 차의 트렁크로 걸음을 옮기자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둔탁한 소리와 함께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저 비겁한 새끼가 소음기를 달아서 쐈어.”
홍빈이 재빨리 차량 뒤에 몸을 숨긴 학연의 옆에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학연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노린 거야? 왜 저렇게 준비가 철저해?”
항구 주변에는 그 흔한 가로등 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둘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고, 어느 정도 항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홍빈은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매섭게 노려봤다. 상자를 쌓아놓은 구석 쪽에서 작은 형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홍빈은 곧바로 인이어로 나머지 조직원들에게 말했다.
“회장은 항구에 있어. 상자 쌓아놓은 구석에 있고 총에 소음기 달고 있으니까 조심하고. 여기 진짜 더럽게 깜깜해. 항구 전체를 환하게 비출 만한 거 가져오지 않을 거면 진짜 조심해서 와야 한다.”
“알았어. 창고 반대편으로 돌아서 갈게.”
택운의 목소리를 확인한 홍빈은 미동도 없는 상자더미를 향해 총을 몇 발 쏘았다. 적막한 마을에 총성이 울려 퍼졌고 몇몇 집에 불이 켜졌으나 감히 누구 하나 밖에 나올 용기를 내지 않았다. 내심 다행이라 생각하던 학연은 등 뒤에서 자신들을 향해 오는 차를 보고는 총을 쏘느라 서 있던 홍빈을 끌어당겨 앉혔다. 예상대로 자신들과 달려오는 차량 쪽으로 무차별적인 총격이 가해졌고 빠르게 정차한 차에서 조직원들이 내렸다.
“여기 왜 이렇게 깜깜해?”
다시 주변이 잠잠해진 틈을 타 택운이 말했다. 이어서 상혁이 홍빈에게 물었다.
“이대로는 하는 것도 없이 회장만 보내주겠어요. 조명탄이라도 쏴야 하는 거 아녜요?”
“조명탄이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지 않아서 위험해.”
“그럼 무슨 수로 회장을 잡아요?”
답답한 마음에 상혁이 고개를 푹 숙였다. 누구보다 속이 타들어가던 재환은 어두웠던 주변 시야가 확보되자 눈앞에 들어오는 항구에 눈썹을 치켜 올리고는 택운에게 말했다.
“L, 우리 차 안에 다이너마이트 있잖아. 그거 좀.”
의아해하는 나머지 5명에 재환은 목소리를 낮추고는 말했다.
“잘 들어. 우리 이번 작전은 절대로 실패하면 안돼. 내가 이 방법까지는 안 쓰려고 했는데, 저 새끼가 비겁하게 나오니까 우리도 비겁하게 가자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을은 다시 고요해졌다. 몇 분 후,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재환이 던진 다이너마이트가 상자더미로 날아가더니 폭발하였다. 불은 상자더미로 순식간에 옮겨 붙었고 환해진 항구에 조직원들은 회장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공격해.”
재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5명은 회장을 저격하며 그와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갔다. 회장이 워낙 맹렬히 저항하여 좀처럼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지 않자 재환은 회장에게 보이지 않도록 상혁을 넌지시 불렀다.
“H, 몰래 상자 뒤쪽으로 가서 회장 제압할 수 있겠어?”
“회장을 제압하라고요? 저 혼자서 어떻게 그래요?”
“그럼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래? 알았어, 이 일만 끝나면 휴가 보내줄 테니까 얼른 잡아가지고 와.”
“그럼 휴가는 하와이로 보내주세요.”
“일단 알겠으니까 빨리 가!”
“무르기 없기에요!”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는 재환에 상혁은 그를 재촉했고 원하는 대답을 얻어내고서는 유유히 뒤쪽으로 살며시 빠졌다. 홍빈이 회장의 주의를 돌리고 있는 사이 상혁은 재빠르게 차가 있는 곳의 반대편으로 달려가 컨테이너 뒤로 숨었다. 일렬로 세워져 있는 컨테이너를 지나고 지나 상혁은 화염에 휩싸여 있는 상자더미 뒤에 자리했다. 열기로 인해 온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지만 불과 몇 걸음 앞에 회장이 5명의 LETHE 조직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순간 회장은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는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상혁은 주저 않고 회장에게 덤벼 그를 결박하였다. 제압 도중에 얼굴을 한 대 맞긴 하였지만 결국 상혁은 회장을 잡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 광경을 본 나머지 조직원들은 달려와 회장을 잡아갔다. 재환은 상혁에게 수고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돌아가는 길에 휴가비용은 내일까지 입금해 달라는 상혁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그에게 휴가를 내주었다.
회장과 남아있던 그의 세력은 그날 밤 이후로 뒷세계에서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가장 큰 장애물을 제거한 LETHE는 회장이 아직까지 보유하고 있던 주식과 땅까지 모두 흡수하였고 그로 인해 다른 조직들이 넘보지 못할 탄탄한 체제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후 정부가 비리를 색출한다고 하며 대대적인 조사를 실시하였을 때도 LETHE는 그 규모를 이용하여 감시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국가의 허술한 정책 아래 조직은 한국 최대의 마피아 세력을 구축하였으며 곧 그 영향력을 해외로도 미치기 시작하였다.
얕은 언덕을 올라온 원식이 언덕 꼭대기에 자리한 고딕 풍의 대성당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촛불 몇 개만이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진 성당의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원식은 가만히 안을 둘러보다 고개를 들어 아치형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바라보았다. 죽어라 일만 하다 간만에 얻은 휴식시간에 왜 여기를 찾아왔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잠깐 명상의 시간이 필요한 건지 고민하던 원식은 문자 한 통을 받고는 다시 성당 밖으로 나왔다. 슬슬 재환이 말한 집합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원식은 뒤를 돌아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성당의 외관을 한번 훑어본 뒤 서둘러 언덕을 내려왔다. 걸어가는 내내 자켓 안에 있는 그의 총이 거치적거렸다.
부지런히 타자를 치던 학연이 엔터키를 누르고 전송하기를 누르더니 해방감에 가득 찬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딸기음료를 쪽쪽 빨고 있던 택운이 학연을 보더니 말했다.
“다 끝났어? 뭘 하길래 해외 임무 나와서 쉬는시간에도 일을 해?”
“아니, 지난번에 맡은 일 뒤처리하느라. 조직이 세상에 공개되어서 좋을 건 없잖아?”
“그렇지. 이제 다 끝난 거야?”
“응. 아직 시간 좀 남았지? 쇼핑하다 가자. 파리까지 와서 빈손으로 가기는 그렇잖아.”
“그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 그래도 일하러 온건데.’
“누가 본다고. 어차피 다들 기억도 못할 텐데.”
학연과 택운이 북적거리는 거리로 들어가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학연이 말한 대로, 아무도 그 둘을 신경 쓰지 않았다. 다음날, 파리에 사는 한국인 억만장자의 금고가 털렸다는 소식은 언론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되더니 곧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사람들의 망각을 이용한 LETHE의 짓이라는 걸 그들은 영원히 알지 못하였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