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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밤하늘별지도

@StarryNight_Map

맴...맴...매앰... 창밖을 두드리는 매미의 울음에 눈꺼풀을 조심스레 열었다. 오늘도, 눈을 떴다. 후유. 조금의 피로와 몸을 채우는 안도감이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증거이다. 내가 있는 곳은 햇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는 반지하 방. 이 정도면 꽤 좋은 방에 사는 축에 속했다. 누구에게나 짠돌이 소리를 듣는 보스는 부하들의 의식주 중에 특히 주에는 지독히도 관심이 없었으니까. 덕분에 아침에 눈을 뜨는 장소가 창고에서 반지하 방이 되는 데에는 10년이 넘게 걸렸다. 고막을 때리는 듯한 매미 소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던 것도 잠시, 매일 아침 하던 대로 머리맡을 훑어 손에 쏙 들어오는 총의 존재를 확인하고, 총을 서너 번 닦았다. 잠잘 때 옆에 총이 있지 않으면 불안한 일상이었다. 언제나 탄환을 넣어놓고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도 바로 꺼내 쏠 수 있는 더블 액션 리볼버. 가끔 구할 수 있는 Chiappa Rhino 40DS. 그리고 새겨진 내 이름 ‘홍빈’. 총구도 아래쪽인 제품이라 비교적 반동이 덜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한 총기에 대한 지식은 배게 옆에 언제나 놓인, 위급 상황에 재빠르게 꺼내어 쓸 수 있는 총을 고르는 데 쓰였다. 째깍째깍. 시침이 숫자 6을 정확히 찌르고 있다. 조직의 일과는 원칙적으로 6시 30분부터 시작되었기에 분침도 6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시침과 분침에 찔려버린 시계는 자신과는 달리 별생각이 없는 듯했다. 자꾸만 뻗어 나가는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나는 침대 앞에 덩그러니 놓인 앙상한 나무 책상 아래에서 검고 길쭉한 가방을 꺼내 열었다. 달칵. 쇠로 된 잠금장치가 풀리고 가방의 겉처럼 새까만 벨벳에 덮여있는 물체가 보였다. 천을 들추어낸 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저격 소총, 흔히 말하는 저격용 총이었다.

-

나는 간단히 이야기해서 저격수다. 조직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아이 중 내 사격 실력은 단연 으뜸이었고 자연스럽게 나보다 머리 한두 개 정도는 큰 스나이퍼들 사이에서 훈련을 받게 되었다. 작은 손에 들린 큰 저격총으로 목표물을 정확히 맞히는 일은 고단했다. 주변의 아이들은 하나씩 사라져갔다. 쥐도 새도 모르게. 그럴 기회도 별로 없었지만, 내가 볼 수 있었던 몇몇 마지막 모습은 전부 같았다. 총알이 박힌 몸. 이쯤 말해두자. 어린아이의 눈에도 어른들이 어떤 일을 벌이는지는 뻔했다. 그들은 소모품이었다. 재력이 있고 지위가 높은 집안의 아이들은 언제나 보호받고, 궁핍하고 최하층인 집안의 아이들은 언제나 죽어 나갔다. 나는 어중간했다. 이 세계의 중간계급 어디쯤. 천국과 지옥 사이 어디쯤. 생존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자유란 없었다. 그래서 소모품이 아닌 주 무기가 되기로 하였다. 무뚝뚝하고 무관심한 어른들 사이에서 눈에 띄고, 관심을 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발전과 성취였다. 총의 반동이 상체를 굳게 만들 때까지, 발사되는 탄환에 수없이 데여 손이 단단해질 때까지 쏘고, 또 쏘았다. 심하게 부서져 버려진 연습용 목표물이 넘쳐나도록 연습한 대가는 쓸만한 무기와, 사람들의 대우와, ‘RED’라는 그럴싸한 작전명이었다. 이는 곧 지위의 상승을 의미했다. 성인이 되고 잡다한 전투가 아닌 본격적인 작전에 투입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굶을 일은 없었다. 믿을 만한 스나이퍼. 내가 따낸 훈장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였다.

저격용 총을 손보고 다시 시계를 보았다. 분침은 빠르게 움직여 숫자 3과 4 사이에 꽂혀 있었다. 총을 가방에 넣고, 방탄조끼 위에 셔츠를 입고, 하네스와 총이 든 가방을 걸쳤다. 부츠를 신은 후, 조심스레 문을 열고,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빛이 조금씩 밝아지던 그때, 반갑지 않은 또 다른 빛이 나타났다.

모든 이야기는 이 작은 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RED. 맞지?”

귀에 걸린 무전기에 듣기 거북한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은 6시 30분이 되기 전이였다. 조직은 이 시간에 지령을 내리지 않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직감적으로 손을 들어 이마에 가까이 가져갔다. 역시나, 손바닥에 찍힌 건 빨갛고, 작은 점이었다. 자신이 매일 쏘아대던 저격 소총의 레이저, 레이저 사이트의 불빛이 지금 내 머리로 향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행동을 해야 하지. 자신이 조준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빨간 점이 찍히고, 한순간 빨간 액체로 변한다. 그 외의 상황은 없었다. 그리고 자신은 애초에 조준된 타깃에게 무전을 한 적이 없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

“RED 맞냐고.”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쏠까?”

“……”

“…쏜다니까.”

“…….맞다.”

도대체 뭐지.

“RED! 반가워. 머리에 점 찍힌 상황은 맨날 보던 거니까 설명할 필요 없을 거고, 그치? 바로 말하지. 그냥 시키는 거 좀만 해 주면 피부과보다 안 아프게 그 점 빼준다.”

“농담 재미없다. 용건.”

“…아이 좀 웃어주면 얼마나 좋아. 아무튼, 일 처리가 빠르신 타입인가 봐. 별거 아니야. 특히 자네한테는.”

“…용건.”

“어이구 이마에 왕 점 달고 급하기도 하셔라, 그래그래. 한 명만 저격해서 쏘면 돼, 쉽지?”

“누구.”

“알 바 아니야, 얼른 옥상으로나 올라오셔. 너네 편 감시랑 보초 없으니까 맘 놓고.”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층들을 지나 옥상에 도착했다.

“옥상에 세팅 다 해놨어.”

척 봐도 비싸 보이는 도트 사이트 조준경 하나와 등에 멘 것과 다른 기종의 저격 소총이 있었다.

“이걸로 타깃 찾고, 조준하고, 쏘면, 끝!”

“누구냐고.”

“너 같으면 알려주겠냐! 아무튼, 타깃은 북서쪽 방향 500m 떨어진 노란 빌딩에서 5분 후쯤 나타난다. 정문으로 나올 거고. 거기 인상착의는 다 적혀있고. 그냥 나오면 쏴. 이만하면 알겠죠, 우리 조직 최고 저격수 RED님?”

말투가 재수 없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일단 말을 듣기로 했다. 과연 북서쪽 500미터쯤에는 노란 6층짜리 빌딩이 하나 있었다. 손목을 보았다. 손목시계의 시간은 6시 25분. 30분에 쏴야 할 사람의 인상착의를 적은 쪽지가 저격용 총 밑에 깔려 있었다. 친절히 사진도 있었다. 턱 끝 정도까지 오는 어중간한 머리 길이. 백발이 섞임. 30대 후반쯤. 간혹 검은 뿔테 안경을 씀. 언제나 갈색 구두를 신고 있음.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있음. 안짱걸음.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조직 내의 인물 같았다. 불길했다.

“…이거 누구냐.”

“감시병도 다 처리했고 쏘기만 하면 된다니까 왜. 추가근무라고 생각해. 수당은 목숨 연장!”

정말 막무가내인 사람이다. 아무튼, 조준경을 옥상 끄트머리에 올려놓고, 노란 건물을 관찰했다. 숙소인지 일하는 곳인지는 가 본 적이 없는 구역이라 확실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일하는 곳 같았다. 행인은 아무도 없었다. 정문 쪽에 조준경을 맞추어놓은 뒤, 준비된 총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총을 준비시켜 놓은 것은 의외였다. 내 총으로 쏘면 안 될 이유는 쏜 사람이 나라는 걸 들키면 계획이 틀어지는 때 외에는 없었다. 탄환 검사만 하면 누구의 총, 총알인지 바로 알 수 있으니까. 왜 내가 쏜 것을 숨기려 하지? 심지어 레이저 조준경 대신 도트 조준경을 준비해 놓았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이걸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홍빈은 도트 사이트만 사용하는 저격수였으니까. 물음표가 너무 많아졌다. 케이스 안에는 총알 한 발이 함께 들어있었고, 그 총알을 장전했다. 역시나 내가 원래 사용하는 총알이 아녔다. 장전된 저격용 총에 조준경을 달고, 총구가 노란 건물 쪽을 향하도록 했다. 다시 손목을 보았다. 28분. 2분쯤 뒤 타깃이 등장한다. 총을 단단히 잡았다. 틱, 틱. 초침은 분주히 움직였고 초들은 모여 2분이 되었다. 30분이다. 분침이 6을 향하자, 귀에 차고 있는 무전기에서는 평소처럼 아침 집합 장소가 공지되었다.

“6시 30분이다. D-1 구역 공터로 10분 내 집합.”

지금 당장 집합 장소로 갈 수 없는 상황. 타깃을 기다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사진과 정확히 일치하는 한 사람이, 정확히 정문으로 걸어 나왔다. 베이지색 양복을 입고 안짱걸음으로 걸으면서. 언제나 그랬듯이, 나도 당하고 있듯이 타깃의 머리를 조준했고, 몇 초간 망설인 후 쏘았다. 탕. 타깃은 쓰러졌다. 성공이다. 그러나 좀처럼 개운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일에 휘말린 거지.

“수고했어! 점 지웠으니까 앞으로도 깨끗한 이마 잘 지키고! 그 총이랑 도트 사이트는 그냥 거기 놔두고 가고. 어디 가서 이 일 말하면 다시 점 찍힐 거니까 잘 해봐. 간다.”

-

교신이 끊겼다. 아무래도 불길했다. 그렇지만 D-2 구역은 열심히 걸어 7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기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집합장소로 갔다. 바삐 걸음을 옮겨 공터에 도착했다. 39분. 휴, 간신히 시간을 지켰다. 1분 뒤 보고 담당이 사람 수를 셌다.

“D 구역 이상 없음.”

부족한 인원은 없었다. 아까 타깃의 위치가 D 구역인지 C 구역인지 애매했는데, 아마 C 구역이었나보다. 그때, 급히 뛰어온 한 사람이 D 구역 총괄 대변인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대변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안 그래도 피곤해 보이던 얼굴이 더 초췌해졌다. 대변인은 단상 앞으로 다가가 마이크를 몇 번 톡톡 두들겼다. 소리가 울렸다. 마이크를 들어 올려 입 가까이 가져갔다.

“오늘은 별다른 지시사항이 없다. 이상.”

“D 구역 임무 시작!”

우렁찬 구호와 함께 사람들은 흩어졌고, 대변인은 황급히 어디론가 달려갔다. 아마 내가 벌인 일 때문이겠지. 작전 지령을 기다렸다. 치…치익….

“좋은 아침이다. 어젯밤은 달이 참 예쁘더군.”

“네, 세 번째 상현달이었죠.”

D-3 구역에 소속된 사람들의 암호였다. D를 닮은 상현달. 세 번째는 3구역.

“게다가 블러드문이었어요.”

이건 나만 쓰는 암호였다. 블러드문은 작전명 RED에서 착안한 단어였다.

“좋아. RED. 오늘은……음 1명이네. A-4 구역 외곽 경계지역에 있다. 조직에 잠입한 지는 이틀 되었으니 어느 정도 지형을 파악하고 숨어있을 거다. 인상착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 까만 천으로 입 부분을 가리고 있음. 무기는 리볼버 종류로 추정됨. 매우 날렵함. 이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시간은 오늘이 가기 전까지, 넉넉하지? 단 A-4 를 벗어나기 전에 처리하도록. 이상”

“D-3 구역 RED. 임무 시작합니다.”

“아, 미안, 하나 빼먹었네. 이번 임무는 RAVI와 같이 움직인다. RAVI에게 아침에 집합했던 장소로 다시 오라고 지시하였다. 접선하도록. 작전암호는 ‘오늘 점심 메뉴는? 로제 파스타, 돈 있으면 푸딩도.’ 이다. 네가 질문이다. 이상”

“D-3 구역 RED. 임무 시작합니다.”

A 구역은 D 구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창고에 오토바이를 가지러 갔다. 빨갛고 조그만 오토바이에 몸을 싣고 시동을 걸었다. 불안감에 집 앞을 지나치는 길 대신 조금 돌아서 가는 길을 택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각기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이 바람처럼 훅훅 스쳐 지나갔다. 본인의 임무는 본인만 알고 있을 것, 암묵적인 원칙이었다. 가끔 몇 명이 같이 움직여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꽤 친한 사이에서도 상대가 저격수인지, 보병인지, 기갑부대인지, 어느 정도 직급인지 정도만 알고 있지 구체적인 임무는 모른다. 하지만 RAVI는 다른 경우였다. RAVI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수많은 임무를 함께했고 합도 잘 맞아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실행한 작전의 성과가 좋았기에 조직에서도 둘을 같은 작전에 배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죽하면 서로 본명도 안다. RAVI의 본명은 김원식. 서로가 본명을 안다는 건 같이한 시간이 길고, 정말 신뢰한다는 의미이다. 접선을 위해 D-1구역 공터로 갔다. 그는 먼저 와 있었다.

“오늘 점심 메뉴는?”

“로제 파스타, 돈 있으면 푸딩도.”

“RAVI, 오랜만이다.”

“너도. 아 오늘 일하기 싫다! 날도 우중충하구먼.”

“먹고 살아야지.”

“하하하! 역시 현실적이야. 가자.”

원식이 일하기 싫다고는 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들떠 보였다. 원식은 자신이 빌려온 하얀 오토바이를 가볍게 점프해서 올라탔다. 나도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하며 적당한 속도로 A 구역으로 이동했다.

“아 맞다, 그거 들었냐.”

“뭐.”

목소리를 작게 낮춘 원식이 무전기의 마이크가 꺼진 것을 확인하고 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에 C 구역에서 누구 죽었다더라.”

소문은 너무 빨라서 흠이다. 나는 최대한 평상시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것도 저격당했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진짜라니까! C 구역 친구한테 들었어. 근데 탄환 종류가 우리 조직에서 쓰는 게 아니었대. 도대체가 어떻게 된 일인지. 그래서 C 구역 아침에 단체로 조사받았대. 뭐 본 거 있는지.”

“별일이네.”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라 다행이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별일이네.’ 두 단어로 끝내버렸으니.

“에…아무튼 조직 생활 무섭네! 나도 아무도 모르게 저격당하면 어쩌냐.”

“조용히 해 듣겠다. 위험해. 조직 생활 하루 이틀 하냐.”

“아이고, 그래. 얇고 길게 살아야지. 다른 얘기나 하자.”

“작전 어떻게 할 거야?”

“1명이라며? 별로 안 걸릴 듯. “

“근데 인상착의 너무 애매하더라. 본 사람이 없나?”

“그러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까만 옷이 뭐냐. 그렇게 말해주면 어떻게 알아.”

“또 찾는 데 시간 걸리겠네. 귀찮아.”

“진짜로 로제 파스타랑 푸딩이나 먹고 싶다! 지긋지긋한 임무 속 한 줄기 빛!”

원식이 크으 하는 소리와 함께 입맛을 다셨다.

-

어느새 오토바이 두 대는 A-2 구역에 도착했고, 나와 원식은 길가에 오토바이를 주차한 뒤 근처 빈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타깃은 근거리 싸움에 익숙한 것 같으니, 옥상으로 올라가 먼저 찾아내는 게 유리할 것 같아서였다. 타깃을 찾고 나면, 일차적으로 나와 원식의 저격으로 암살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근거리 전투를 해야 할 터이다. 원식은 나보다는 저격 실력이 떨어지지만, 근거리 전투에는 능숙했기에 나의 단점을 보완해줄 수 있었다. 다부진 몸이 그의 고된 훈련의 흔적이었다. 이 넓은 구역을 하나하나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일단 무전을 취해 감시 초소에서 현재 타깃의 위치에 대해 더 알아낸 정보가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둘은 마이크를 켰다. 원식이 먼저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어젯밤 나비가 날아다니는 걸 봤네.”

“네, 한 마리 봤어요. 오른쪽 날개가 예뻤어요. 코코넛을 들이부은 것 같더군요.”

“알겠다. RAVI, 용건이 무엇인가?”

“D-3 구역 소속 RED와 B-1 구역 RAVI가 수행 중인 작전에 대한 질문입니다. 타깃 현 위치에 대해 추가적인 정보 있습니까?”

“잠깐 기다려보게. 하나 있군. 보초가 방금 타깃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본 모양이다. 자네들이 있는 위치에서 3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방향은 북동쪽이다. 숨어서 자네들 쪽으로 이동 중이니 근거리 전투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대비하도록. 이상”

“B-1 구역 RAVI 임무 진행합니다.”

“D-3 구역 RED 임무 진행합니다.”

원식과 나는 마이크를 껐다. 내가 말했다.

“다행이다 보초가 목격이라도 해서. 종일 수색만 할 뻔했네.”

“무전 하길 잘했네!”

원식이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고 방긋 웃는다.

“타깃 찾아서 조준하고 있을게.”

“오케이, 저격 끝판왕 RED님의 저격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너도 해.”

“아이 준비 하고 있어~!”

나는 북동쪽 건물들 사이사이와 창문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액땜해서 그런지 오늘은 타깃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찾을 수 있었다. 확대된 타깃은 역시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입에는 까만 천을 두르고. 문제는…그 옷이 몸에 꼭 맞는, 팔 부분이 없는 두루마기 같은 옷이었다. 허리 부분은 입에 두른 천과 같아 보이는 천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팔과 다리에는 검고 쫙 붙는 옷을 입고 있었다. 이건 전에 본 적 있는 옷이다. 전쟁터에 내몰려 누구도 자신을 지켜주지 않던 소모품 시절에 수없이 마주치고 피를 묻혀야만 했던 그 옷. 그건, 옆 조직의 전투복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아니 왜 저 옷이…”

원식도 홍빈 못지않게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했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지잖아. 간단한 조무래기 하나 잡는 임무가 아니었네. 상대 조직이네, 상대 조직. 어쩐지 하루에 임무 하나만 준다 했다.”

“아니 근데 쟤네가 왜 우리 쪽에 먼저 잠입하냐고.”

“원래 그런 거지 뭐…하루아침에 웬수 되는 거지.”

그 조직은 근 10년 넘게 내 조직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딱히 크게 일어난 일도 없는데, 저쪽 조직에서 먼저 공격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원식의 말도 이 세계에서는 논리적이었기에, 일단 임무를 수행하고 보기로 했다.

“그럼 쏜다.”

“어서 하셔.”

도트 사이트가 타깃의 이마에 빨간 점을 그린다. 나는 이 순간이 항상 떨렸다. 저격 실력은 늘어도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봤던 이 순간만큼은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긴다. 탕. 성능 좋은 소음 저격 소총은 적당한 소리와 함께 총알을 날렸다. 빨간 점이, 빨간 액체가 되었다. 임무는 끝났다.

“상대 조직이라니 좀 찝찝한걸?”

“그래도 임무였는데 뭘. 보고하자.”

나와 원식은 마이크를 켰다. 내가 말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어젯밤은 달이 참 예쁘더군.”

“네, 세 번째 상현달이었죠. 게다가 블러드문이었어요.”

“RED. 용건이 뭔가?”

“D-3 구역 RED와 B-1 구역 RAVI 임무 완료했습니다.”

“빠르군. 그럼 들어가 쉬도록.”

순간, 머릿속에 오늘 하루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런데, 오늘 타깃 도대체 누굽니까?”

“그건 왜 묻나?”

“오늘 타깃의 인상착의가 옆 조직과 매우 흡사, 아니 같았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알았다. 일단 상부에 보고는 해 보겠네. 이상”

“감사합니다. D-3 구역 RED 임무 완료.”

“B-1 구역 RAVI 임무 완료.”

대답하는 원식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무전에 집중하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원식의 얼굴을 보았다. 식은땀이 조금 흐르고 있었고 표정은 많이 놀란 듯했다.

“야, 말 가려서 해…진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겁도 없다. 타깃 정체도 대놓고 물어보고.”

“…미안. 궁금했어.”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 네가 얼마나 힘겹게 이 자리까지 왔는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순간 원식에게 오늘 아침의 일을 말하고 싶어졌다. 튀어나오는 말들을 간신히 가슴 속으로 집어넣었다. 입 밖으로 꺼내진 말은 언제 다시 날카롭게 돌아오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

“…오늘 안 좋은 일 있어? 작전 시작할 때부터 표정이 안 좋던데.”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든 둘의 작전은 끝났고, 다시 주차해둔 오토바이 두 대에 올라타 숙소 방향으로 향했다.

-

또 아침의 그 공간이다. 매미가 지독히도 울어대는 건 여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없어진 물건이 없는지 살피지만 방은 그대로였다. 반지하 방의 약한 햇빛이 조금이나마 더 따스해지는 점심시간이었다. 냉장고에서 로제 파스타, 푸딩이 아닌 샌드위치를 꺼내 우걱우걱 먹었다. 먹었다기보다는 살기 위해 집어넣었다. 치직. 무전이 온 모양이다.

“좋은 점심이다. 어젯밤은 달이 참 예쁘더군.”

“네, 세 번째 상현달이었죠. 게다가 블러드문이었어요.”

“RED, 상부 소환이다. 지금 즉시 D-3 본부로 오도록. 이상”

“D-3 구역 RED. 이동합니다.”

상부 소환이라니. 발걸음을 본부로 옮기면서 머릿속에 생각을 뿌렸다. 그 속에서 아침의 일과 타깃을 물어본 일은 꼭 작게 그어진 금 같았다. 하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전체를 붕괴시켜버리는. 오랜만에 도착한 본부 건물의 입구에서는 신원 확인 후 사무실을 안내해 주었다. 업무로 바쁜 사람들 틈에 홀로 정지한 사람이 시선을 끌었다. 조직원들의 일을 관리하고, 작전을 지시하는 등의 일을 맡은 사람이었다. 직업이 감독관일 뿐이지 특별히 직급의 차이가 있지는 않다. 오늘 무전으로 지시를 내린 사람도 이 사람이다.

“RED,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아까 네가 타깃이 옆 조직이랑 인상착의가 비슷하다고 한 거, 알아봤다. 수습된 타깃의 시신이 네가 말한 옷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 상부에 보고해놓았다. 말해줘서 고맙다.”

“네, 다른 건 없…”

그때, 멀리서 움직이는 사람 중에 유독 다급해 보이는 한 사람이 다가와 감독관의 어깨를 두드리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감독관의 표정이 한순간 서늘해졌다. 내가 물었다.

“무슨…일입니까?”

“…보스가 부르신다.”

건물의 꼭대기 층에 있는 보스의 방. 한옥 문살무늬의 나무문을 열었다. 상상 그 이상의 장소였다. 바닥에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각진 물줄기들이 흘러가고 있었고 보스의 자리 바로 앞에는 작고 네모난 연못이 있었다. 물길을 따라 하얗고 은은한 조명들이 쭉 설치되어 있었다. 언뜻 들여다본 물속에는 물고기들, 피라냐들이 있었다. 물줄기들 위를 가로지르는 조그만 다리를 건너 정중앙에 있는 하얀 단상 위에 올라섰다. 지나는 곳마다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꽃향기 같았다. 가야금 연주도 공기 중에 조용히 퍼지고 있었다. 보스의 자리는 단상에서 5m쯤 떨어진 조금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자리 앞을 가리고 있던 반투명한 커튼이 서서히 올라갔다. 일월오봉도를 배경으로 금테가 둘린 빨간 벨벳 의자가 보였고, 의자의 뒤에는 공작의 꽁지깃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는, 보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음악이 멈췄다.

 

“LEO님 안녕하십니까.”

“네가, RED냐.”

귀를 얼려버릴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묻고 싶은 게 있어 불렀다.”

“……”

“봐봐.”

 

앞의 연못 속에서 기둥이 천천히 솟아올랐다. 투명한 기둥 안에 파일이 하나 있었다. 기둥의 뚜껑이 열렸고, 홍빈은 파일을 꺼냈다. 사건 보고서. C 구역에서 저격당한 사람에 관한 보고서였다…

 

“익숙하지?”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이걸 너한테 왜 보여주겠어.”

“……”

“말해봐, 이렇게 한 이유.”

 

어쩔 수 없었다. 그날 아침의 일은 고스란히 보스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내 이야기가 끝난 후, 그는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알다시피 여기가 우리 구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고, 내 구역 전체가 훤히 보이지. 사실, 봤어. 창문으로. 꼭 보려고 일찍 일어난 건 아닌데, 이렇게 됐네. 역시 우리 구역 최고답게, 한 방에 성공해내더군. 꽤 거리가 멀던데.”

 

그는 손을 총 모양으로 만들고는 쏘는 시늉을 했다.

 

“우리 구역 일은 아니니까, 비밀로 해 주지. 대신…

 

…나도 일 하나만 부탁하겠네.”

 

-

 

그가 맡긴 일도 오늘 아침의 일처럼 단순했다. 숙소로 돌아와 밤이 낮을 삼키길 기다렸다. 반지하 방의 좁은 창문에 이제 어떤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한 명만 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보스 LEO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나를 보았던 것처럼 이 일이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한밤중, 3시쯤에 지시를 내리겠다고 했다. 또, 까만 옷을 입고, 손전등만 사용하고,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시간은 빠르게, 그러나 존재를 느낄 수 있을 만큼 무겁게 흘렀다. 이잉-. 드디어, 휴대전화 알림이 울렸다. 화면에는 03:00라는 숫자가 빛났다. 그는 칼 같은 사람이었다. 알림이 울리기 무섭게 귀에 건 무전기에서 낮의 그 차가운 음성이 들렸다.

 

“좋은 밤이다. 오늘 밤은 달이 참 예쁘군.”

“네, 세 번째 상현달이죠. 게다가 블러드문이에요.”

“그래 RED, 시작하지. 먼저 아침에 했던 것처럼 옥상으로 올라가게나. 이번엔 정말로 지켜보는 사람이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손전등을 켜고 문을 나섰다. 밖에는 그의 목소리와는 반대로 여름의 더위가 떠다녔다. 또다시 정적이 흐르는 여러 층을 지나쳐 옥상에 왔다. 틀린 그림 찾기처럼, 아침과 같은 풍경에 사물만 달라져 있었다. 도트 사이트 조준경 대신 적외선 조준경, Barrett M98B 대신 CheyTac Intervention 저격 소총.

 

“인상착의는 네가 아침에 쏜 사람처럼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있다. 위치도 북서쪽 방향. 이번엔 400m 떨어진 훈련소 건물 근처다. 언제 타깃이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곧 나타난다는 건 확실하니, 대기하도록. 적외선 조준경이라 네 시야에서는 타깃의 옷 색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타깃이 나타나면 확인 후 지시하겠다.”

 

아침에 했던 것처럼, 훈련소 간판을 찾아 그쪽을 향해 조준해 놓았다. 적외선을 통해 보이는 풍경이 오랜만이면서도 낯설었다. 손목시계를 손전등에 비추어 보았다. 3시 15분이 조금 지났다. 그로부터 10분쯤 더 기다렸을까, 조준경에 누군가가 보였다. 급하게, 그러나 들키지 않게끔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옷의 색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낮에 본 정장과 생김새가 똑같았다.

 

“저 사람이다. 준비되면 발포하도록.”

 

총구를 옮겼다. 조준점은 타깃을 정확히 향했다. 또다시 떨린다. 그렇지만 난 쏘아야만 한다. 틱. 또다시 쓰러졌다. 또다시 불안함에 휩싸였다.

 

“잘했네, 사용한 장비는 옥상에 놔두지 말고 2층 빈 곳에 놔두게. 이제 쉬게. 수고했네.”

“…그런데, 도대체 이 2명은 누구입니까?”

“…알게 될 걸세.”

무전이 끊겼다.

 

-

 

방으로 돌아왔다. 넘쳐흐르는 생각과 초조함을 이불 속에서 같이 잠재웠다.

 

-

 

시야가 갑자기 트이고, 나는 트럭 속에 있었다. 창문이 없는 덜컹거리는 차 밖에서는 여기저기 총성과 비명이 솟아났다. 밖이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나는 전쟁터에 있었다. 어린 원식, 어린 상혁, 어린 나. 그리고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트럭에 실려 전장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리는 손을 꼭 잡았다. 서로의 눈빛을 바라보다, 피하기 일쑤였다. 여기 있는 아이들의 눈 속에는 확인할 수 없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불안감과 공포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것 만으로 이 감정들은 증폭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손만 꼭 닿아 있었다. 쉴 새 없이 출렁이던 트럭이 멈췄고, 문이 덜컥 열렸다.

 

“뛰어!”

 

덩치 큰 트럭 운전사 아저씨가 외쳤다. 우리는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죽음. 그뿐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으로 달려나갔다. 선택지는 없었다. 맞닿아 있던 손들이 떨어지고 함성과 함께 모두가 트럭에서 뛰쳐나갔다. 총을 쏘고 또 쐈다. 사람들은 죽고 또 죽었다. 친구들은…죽고 또 죽었다. 순간 허벅지가 아렸다. 총알이 스쳤다. 아린 것은 놀랍게도 그리 큰일이 아녔다. 내가 있는 이 상황 자체가 지옥이었고 이건 지옥의 우스운 일부였다. 이 지옥을 상혁과, 원식이 같이 누비고 있었다. 울음이 섞인 듯한 괴성은 총소리와 다른 비명에 묻혀 누구도 들을 수 없는 혼자만의 감옥이 되었다. 왜 이래야만 해, 왜 싸워야만 해, 왜 쏴야만 해. 왜. 왜…

 

“아악!”

 

상혁이의 목소리였다. 나는 직감했다. 다음 장면은 썩 좋지 않을 거야. 원식과 나는 상혁이에게로 달려갔다. 상혁이는…상혁은…심장 쪽에 총을 맞았다. 나는 상혁이에게 외쳤다.

 

“왜! 왜! 왜냐고 상혁아 왜!”

 

원식이는 상혁이의 등 쪽을 받치고 울음과 함께 외쳤다.

 

“상혁아!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왜! 상혁아!”

 

우리는 악마가 만들어낸 듯한 상황 속에서 제대로 말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가장 논리정연한 말을 뱉은 건 죽어가는 상혁이었다.

 

“형들…그…거…내가…만든 탈출 계획…꼭 해봐…알았지…? 나…처럼…그…전에…전…쟁…나가지 말고…언젠가는…우리도…자…유로워…질 거야…언…젠…가는…내가…꼭….자유로워 질 거라고….했잖아….”

 

상혁이가 말을 멈췄다.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일 수 없었다. 환각에 휩싸인 사람처럼 공포가 온몸을 찔러왔다. 머릿속에 한 장면만 수십 번 맴돌았다.

 

“우리도…자…유로워…질 거야…”

 

그의 영혼이 자유로워졌다.

 

-

 

후다닥 머리맡의 리볼버를 집어 허공을 겨눴다. 흐릿했던 시야가 개이고 아무도 없는 반지하 방, 내 방이 보였다. 옷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상황을 인지한 후, 긴장이 풀리고, 침대에 축 늘어졌다. 꿈이었다. 또 똑같은 꿈이었다. 언제나 이 꿈이었다. 며칠 안 꾼다 싶더니, 또 찾아온 악몽이었다. 어찌나 생생한지, 정말 과거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때로.

 

-

 

아침 집합 시간이 돌아왔다. 오늘도 보고 담당이 사람을 세고 있었다.

 

“D 구역 이상 없음.”

 

역시나 그 타깃도 C 구역 사람인 듯하다. 어제의 그 우리 구역 총괄 대리인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지시 사항이다. 최근 통행금지 시간에 돌아다니는 조직원이 적발되었다. 통행금지 시간의 통행은 조직에서 신변을 보호해줄 수 없으며 규칙에 위반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한다. 이상.”

“D 구역 임무 시작!”

 

다시 뿔뿔이 흩어지는 무리 속에서 무전 지령이 내려왔다.

 

“좋은 아침이다, 어젯밤은 달이 참 예쁘더군.”

“네, 세 번째 상현달이었어요. 게다가 블러드문이었지요.”

“오늘은 조직 바깥에서 하는 임무다. 옆 조직에 가서 한 명을 저격하도록. 타깃은 저격수고, 키가 160cm 정도이고, 주변 환경에 맞게 위장을 하고 다녀 알아보기 쉽지 않다. 팔이 매우 긴 편이며, 머리카락이 검다. 구체적인 위치를 알고 있으니 찾는 건 쉬울 것 같네. 위치 정보를 곧 전송하겠네. 이상.”

“D-3구역 RED, 임무 시작합니다.”

 

조직 영토의 경계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가기로 했다. 어제는 빨간 오토바이를 빌렸으니 오늘은 까만 오토바이를 골랐다. 까만 기계가 길을 달린다. 나는 그 위에 앉아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을 터트린다. 어제는 너무 복잡한 하루였다. 멀쩡히 일과를 시작하려 하는데 저격을 당하고, 누군가를 쐈다. 임무로 처리한 사람은 상대 조직원이었다. 내가 누군가를 몰래 쐈다는 사실을 아는 보스에게 호출당하고, 또 다른 사람을 쏘게 되었다. 이 사건들은 살짝 어긋난 태엽 같았다. 분명 꼭 들어맞는 구석이 있을 텐데, 군데군데 무언가 빠져있는. 폐허로 가득한 A-3 구역 외곽에서 생각이 나를 완전히 감싸던 그때였다. 검은 형체가 건물 뒤로 숨는 것을 보았다. 그 알 수 없는 무언가는 내가 자신을 발견했음을 단박에 알아챈 모양이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하기도 전에 그것은 나를 향해 총을 쐈다. 다행히 총알은 다른 곳에 꽂혔고, 나는 그 형체를 또렷하게 볼 수 있었다. 팔 부분이 없는 두루마기, 동여맨 허리와 입, 검고 붙는 옷. 어제 임무로 죽인 그 조직원과 옷이 같았다. 안돼. 또 옆 조직이다. 다음 총알이 순식간에 날아와 내 귀 옆을 스쳤다. 무전기 마이크가 부서졌다. 젠장, 이제 보고할 수도 없다. 그러나 망설일 수도 없다. 나도 옆구리에서 총을 꺼냈다. 탕. 탕. 탕. 탕. 탕. 탕. 6구경 리볼버에서 6개의 총알이 발사되었다. 운 좋게 한 두 발이 저 사람의 종아리를 스친 듯하다. 그는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면서 손에서 총을 놓쳐버렸다. 기회다. 나는 재빨리 달려가 떨어진 그의 총을 챙기고, 그의 머리에 양손으로 총을 겨누었다. 그가 항복의 의미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입에 있는 천 치워.”

 

붉은 눈화장을 한 그는 시선을 한번 흘기더니, 손을 천천히 내려 천을 풀었다. 드디어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긴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표정은 곧 비웃음인지 허망한 웃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나에게 그에 대해 분명한 것은 없었다. 단 하나, 또렷한 눈빛을 빼고.

 

“누구야.”

 

그의 미소가 더 커졌다.

 

“아, 나름 유명한데. 얼굴은 몰랐나 보네. 이제 알았으니까 됐지 뭐. 반가워, N이야.”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무도 모르게 한 조직의 보스를 암살한 것으로 유명한 암살자 N이라고?

 

“그러니까 어떤 멍청이가 나한테 지시를 잘못 해줘서 말이야, 길도 헤매고 너 같은 애한테 들키고. 이게 뭐냐!”

“그래서 여기 온 목적은.”

“얼레, 딱 보아하니 내가 마이크도 부쉈는데, 보고도 못 하는데 나한테 정보를 캐신다. 대단한 사람이네, 마음에 들어!”

 

N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해맑은 웃음을 띄웠다.

 

“근데 당신, 그 조직 소속 아니잖아. 왜 옷이 그래.”

“아, 내가 아무리 프리랜서라지만 조직 의뢰받으면 유니폼 쫙 빼입고 탕탕! 하고 다니는 게 기본이라. 무슨 조직인지 티를 내놔야 나한테 후환이 없지 않겠어?”

“…그럼 그 조직 의뢰라는 말…”

“그래 의뢰 맞는데 왜. 좀 심심해지려고 하는데 빨리 할 말 해라.”

 

불현듯 어제의 일 사이에 빠진 퍼즐 조각이 이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무슨 사람 찾아?”

“에에 고작 그거 때문에 이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뭐 고객 비밀 보장 이딴 거 없어서 문제될 건 없는데…아니 지시가 그게 뭐냐고! 여기 이 구역 지나서 베이지색 정장 입은 사람 찾으라는 거 말고는 없더라! 어휴 진짜 내가 아무리 암살자라지만 암살할 사람을 모르는데 어떻게 암살하라는 건지 원, 기가 차서. 나도 그것밖에 몰라. 걔가 뭘 훔쳐 갔다나, 뭐라나…”

“…베이지색 정장이라고 했나?”

“호오, 뭔가 아시는 게 있나 봐? 궁금한데? 안 그래도 그쪽에서 이따구로 지시해서 계약 파기할 생각인데, 말해봐. 지금 일 하나 줄었으니까 도와줄 수도 있는데?”

 

그의 눈이 흥미로 반짝였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무전도 안되는 마당에 혼자 이 수수께끼를 풀기는 무리였다. 게다가 이 사람은 정말로 나를 도와주려고 안달이었다. 물론 자기만족을 위해서였지만. 총을 한 손으로만 겨눈 채 그늘로 가서 나는 어제의 일을 N에게 털어놓았다. N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간단하네! 그 베이지색 정장 입은 사람들을 찾으면 되잖아.”

“왜 타깃을 찾으려고 하는…”

“걔들이 훔쳤으니까! 뭔가 알고는 있겠지.”

“…훔쳤다니?”

“엥, 그것도 모르고 이러고 있냐. 저 옆 조직 애들이 숭배하는 상 있잖아. 동상. 그거 걔들이 훔쳤다면서? 이미 소문 쫙 났는데…”

“몰랐는데.”

“이상하네, 사실 내 임무가 걔 죽이고 그거 가져오는 거였거든.”

 

눈을 흘기는 건 그의 습관인 듯했다. 그는 눈을 또다시 흘기고는, 주변을 둘러보다 갑자기 가까이 다가와 내 귀에 속삭였다.

 

“야, 나 데리고 가주라. 여기 지리는 네가 더 잘 알 거 아니야? 타깃 위치 아니까 안내해줘. 나는 그 동상 가져가서 돈 좀 벌고, 너는 이 미스터리 풀고, 어때?”

 

-

 

그렇게 적군도 아군도 아닌 애매한 팀이 하나 만들어졌다. 하나는 순전히 자신의 쾌락과 돈을 위해 움직이고, 하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의 해소를 위해 움직이는. 그의 입에서 푼 천으로 종아리를 지혈해주고 동여매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타깃이 도대체 어디 있는 건데.”

“아, C-1 구역에 있다고 그러더라. 너네 조직 완전 중심부 아니냐? 이 정도로 깊숙이 침투해야 하니까 비싸도 날 불렀겠지. 망할, 처음에 A-1 이라고 알려줘서 한참을 헤맸다고. 이 더운 날에!”

“그래서, 구체적인 타깃의 정보는?”

“C 구역에 노란 건물이 하나 있다던데, 거기서 알짱거리는 녀석이래. 아까 말했듯이 베이지색 양복 입고.”

 

내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반면 그의 표정은 용돈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해졌다.”

 

“맞다! 네가 저격한 사람도 C 구역 노란 건물에 있었다고 했지! 진짜 재밌네. 같이 가길 잘했구먼!”

 

그는 새파랗게 질린 내 표정을 보고 말했다.

 

“에, 너무 그렇게 안 좋게 생각하지 마, 더 좋잖아? 거기만 가면 뭐든 술술 풀리겠네. 아니야?”

“…틀린 말은 아니군.”

“그럼, 거기로 안내해주시죠!”

“그 전에 그 조직 옷부터 어떻게 좀…”

“너 혹시 여분 옷 없어?”

“…나한테는 없다. 대신 물품 창고가 근처에 있다.”

 

-

 

나는 물품 창고에 들려 N이 변장할 만한 옷을 살폈다. 어느 정도 방탄 효과가 있는 전신을 감싸는 검은 옷. 검은 셔츠. 종아리에 붙고 잘 늘어나는 까만 롱부츠. 위에 입는 하네스. 가지런히 쌓여있는 옷 사이에서 그에게 맞을 법한 치수를 찾고 있었을 때, 누군가가 창고로 들어왔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난다. 물품 창고를 지키는 조직원은 저런 구두를 신지 않는다. 게다가 방금 허가까지 맡고 들어온 터라 그가 입구를 지키지 않고 창고 안을 돌아다닐 이유는 없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침착하게 계속 옷을 살폈다. 또각또각.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마침내 시야에 소리를 낸 장본인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훈련소 복도에 항상 사진으로만 걸려있던, 집합 때 말로만 듣던,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으로만 떠돌던 그가 내 앞에 있었다.

 

“자네는 여기서 뭐 하나?”

 

그는, C 구역의 보스이자 우리 조직 전체의 보스인 KEN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날카롭고, 위압적이었다.

 

“옷을 보급받으러 왔습니다.”

“옷이 망가졌나?”

“네, 작전 중에 등 부분이 찢어져서 새로운 옷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자네가 입은 옷과 다른 치수의 옷을 찾고 있는가?”

“아, 동료의 옷도 상태가 좋지 않아 같이 가지러 왔습니다.”

“…그렇군. 작전 잘 수행하도록.”

“네, 감사합니다.”

 

그는 서서히 뒤돌아, 올 때와 같은 구두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하필이면 마른 체구의 N은 나와 옷 사이즈가 달랐고, 그는 그걸 알아차렸다. 일단 다른 말로 둘러대긴 했지만 서둘러 옷을 챙기고, 창고를 나왔다.

 

-

 

“여기도 옷 예쁘네, 고마워!”

“…저기,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겨서 말이다.”

 

나는 그에게 내가 KEN을 만났다고 털어놓았다.

 

“헐! 나도 보고 싶다! 내가 너희 보스 얼마나 좋아하는데. 멋있잖아. 21세에 조직 평정! 저격이든 근거리든 뭐든 간에 절대로 지지 않는! 물론 10년도 더 된 이야기지만.”

“아니 그래서, 당신이 잠입한 게 들켰으면 어쩔 거냐고.”

“별수 있나? 들켰으면 이미 들킨 거 하루빨리 동상 훔쳐야지. 얼른 가자! 네 입장까지 곤란해지기 전에.”

 

그가 옷을 갈아입은 후 우리는 까만 오토바이를 하나 더 빌렸다. 그리고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고 한적한 길을 통해 C-1 구역까지 달렸다. N은 가는 내내 자신이 난생처음으로 작전 중 누군가에게 들킨 것에 대한 짜증과 보스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한참을 달린 후 노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남은 거리를 걸어갔다. N도 암살자이고, 나도 저격수였기 때문에 둘 다 들키지 않고 잠입하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노란 건물의 창문을 넘었다. N도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건물 내부는 예상과는 다르게 텅 비어있었다.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조직의 다른 건물들처럼 오래전에 쓰다 버려진 폐허 같았다. N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아.무.것.도.없.잖.아.”

“위.층.으.로.”

 

구석에 위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우리는 계단을 살포시, 발소리가 나지 않게끔 올라갔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갔을 때, 삐-. 갑자기 경보음 같은 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사람이 우리를 습격했다. 그는 총을 마구 쏘았다. 탕탕탕탕탕탕. 예전에 한 번 스쳤던 허벅지를 또다시 스쳤다. N은 무사히 모든 총알을 피했다. 내가 피가 옷에 스며드는 느낌에 괴로워하는 사이, N은 자신의 명성에 맞게 순식간에 그 사람의 어깨에 총을 쏘아 쓰러뜨렸다. N은 그 사람에게 말했다.

 

“오호, 넌 뭐 하는 애니?”

 

그 사람은 N과 나를 번갈아 쏘아보더니, 순식간에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그 속의 액체를 마셨다. 그의 몸이 크게 경련하더니, 얼마 안 가 축 늘어졌다. 맥을 짚어 보았다. 죽었다. 독약이었나보다.

 

“…죽었어. 저 약이 독약이었던 것 같다.”

 

잊고 있던 허벅지의 상처가 다시 아파졌다. 저격 소총 케이스에 넣어둔 천으로 상처를 지혈하고 대충 동여맸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닌 듯했다. 응급처치를 마친 후, 시체를 건물의 구석진 곳에 숨겼다. 바닥의 혈흔도 어느 정도 닦고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상자로 가려놓았다. 일을 끝마친 후 N이 말했다.

 

“거 참…이 건물에서 뭐라도 얻을 게 있으려나? 난 찾아본다!”

 

나도 건물 내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2층짜리였다. 아까 1층은 아무런 물건도 없고 휑했기 때문에 2층을 뒤졌다. 1층과는 달리 2층은 정돈되어 있었다. 책장 몇 개, 책상 몇 개, 소파 하나. 옆 방에는 침대도 몇 개 있었다. 화장실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생소한 기계와 컴퓨터 여러 개가 놓여 있었다. 기계 옆에 두꺼운 책이 보였다. 책의 제목은 “Understanding Radio Intercept & Web Tapping”. 무선통신 주파수를 엿듣는 방법과 인터넷으로 주고받는 정보를 빼내는 방법에 관한 책이었다. 책 속 삽화에 이 기계와 비슷한 그림이 보인다. 아마도 이 기계는 무선 도청이나 정보 해킹을 위해 설치한 것 같다. 책상 바로 옆의 고풍스럽고 짙은 색의 나무 책장에는 총기 관련 서적, 판타지 소설, 시집 등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그중 두꺼운 파일이 몇 개 보인다. 하나를 뽑아 표지를 살폈다. 표지에는 “7월”이라고 적혀있었다. 책장을 넘기고 본 것은 충격적이었다. “어젯밤은 달이 참 예쁘더군.”, “네, 세 번째 상현달이었죠…” 조직 내의 모든 무전 내용이 파일 안에 담겨 있었다. 모든 무전이 도청당하고 있었다…

 

“야! 너, 이게 뭔지 알아?”

 

N이 무언가를 찾은 듯했다. 그가 건넨 것도 역시나 파일이었다. 파일의 제목은 “관계도”. 안에는 우리 조직 내 주요 인물들의 관계가 사진과 함께 정리되어 있었다. 어제 만난 우리 구역 보스 LEO와 오늘 만난 보스 KEN도 있었다. 원식. RAVI도 있었다. 그리고…나도 있었다. 홍빈. 너무 낯선 곳에서 발견한 이름이었다.

 

“너 이름 예쁘네, 홍빈이! 작전명은 RED구나. 내 이름은 알려줬는데, 네 이름은 몰라서 궁금했는데.”

 

내가 그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그가 재빨리 덧붙였다.

 

“어디 가서 본명 이야기 안 할 테니, 걱정은 하지 마시고! 그리고 파일 하나 더 있어.”

 

그가 또 파일을 건넸다. 제목은 “KEN”. 그 속에는 보스의 이력과 재산, 지내는 곳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급하게 휘갈겨 쓴 듯한 메모가 붙어 있었다. “그가 알고 있다. 당장 작전을 시행하라.” 메모를 떼고 다시 파일을 살폈다. 메모가 사라진 곳에는, “작전 장소:C-1 구역 KEN의 방”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직감했다. N에게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어서 KEN의 방으로 가야 해.”

“갑자기?”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이 사람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곳으로 떠났어. 아마도 조금 전에.”

 

-

 

보스의 방이 있는 본부 건물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내가 입구에서 신원을 확인받는 사이, N도 본부 건물에 잠입했다. 이제 꼭대기 층인 보스의 방으로 가야 했다.

 

“어떻게 올라가지?”

“글쎄, 누가 먼저 갔다면 길이 있지 않…어? 쟤 뭐냐?”

 

N이 가리키는 곳에는 베이지색 정장을 입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꽤 빠른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따라가자.”

 

N과 나는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를 미행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다. 이미 사람이 북적북적해 1층 엘리베이터 버튼은 이미 눌러져 있었고, 기다리는 사람도 서너 명은 되었다. N과 나도 그 틈에 섞여 있었다. 띵-. 홀수 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타지 않았다. N은 나를 쳐다보더니 엘리베이터 쪽으로 눈을 흘겼고, 즉시 나와 N은 발걸음을 옮겨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그는 7층 버튼을 눌렸다. 나는 9층 버튼을 눌렸다. 문이 서서히 닫히고 공간이 완전히 외부와 분리되었다. 싸늘한 금속제 엘리베이터 속 싸늘한 분위기. 같은 공간 속의 셋 사이에는 침묵과 긴장감이 섞여 나뒹굴고 있었다. 베이지색 정장 속으로 그의 손이 슬며시 들어간다. 손에 총이 딸려 나오기도 전에, 나와 N은 총을 재빨리 꺼내 그의 머리에 겨눴다. 그도 우리를 겨누고, 우리도 그를 겨누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수세에 몰린 그는, 총을 떨구고 손을 올리는 듯싶더니 다시 정장 속으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급히 그에게 달려들어 손에 있는 물체를 뺏었다. 아니나 다를까,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이었다. 그는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내가 말했다.

 

“안내해, 네가 가던 곳으로.”

 

-

 

엘리베이터는 7층에 멈췄다. 7층은 고위직 조직원들의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사방이 말린 장미색으로 칠해진 큰 복도에 작은 복도들이 가지를 내듯 달려 있었다. 사무실마다 문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복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총구 2개가 머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그는 천천히 큰 복도를 걸었다. 7-1, 7-2, 7-3… 작은 복도 번호가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그는 7-5번 복도 앞에서 속도를 늦추더니 7-5번 복도로 진행 방향을 바꾸었다. 나와 N은 여전히 그를 조준한 채 그를 따라갔다. 복도의 끝까지 왔다. 그는 벽에 있는 소화전을 열고, 안에 있는 호스를 치웠다. 그리고는 호스 뒤에 있던 철판을 들어냈다. 놀랍게도 그 속에는 사다리가 보이는 통로가 있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입니다.”

 

N이 말했다.

 

“어디로 가는 통로야?”

“보스의 방문 앞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내가 말했다.

 

“먼저 가.”

 

그는 몸을 구겨 소화전 안의 작은 통로에 집어넣었다. 그가 들어간 후 나와 N도 통로에 들어갔다. 통로는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 네발 동물처럼 기어가야 할 정도의 크기였다. 앞에 있는 사다리를 타고 하염없이 올라갔다. 문득 쳐다본 아래는, 마치 답답한 나의 심정을 대변이라도 하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가득했다. 보스 KEN의 방은 12층이었기에, 도착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조그만 문이 나타났다. 그가 문을 열었고, 아까 소화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판자가 보였다. 그는 판자를 옆으로 밀었다. 판자가 소리 없이 치워졌다. 세 명 모두 그 문을 통해 사다리가 있는 통로에서 나왔다. 밖의 풍경은 익숙했다. 한옥 문살무늬의 나무문. LEO의 방문과 같았다.

 

“여.기.가.보.스.의.방.문.앞.입.니.다.”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N과 나는 여전히 그를 겨눈 채, 소리를 엿듣기 시작했다. 먼저 들린 목소리는 창고에서 들은 보스 KEN의 목소리였다.

 

“그래서 네가 뭐라고?”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반란군, 아니 혁명군. 네가 앗아간 수많은 것들을 바로잡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혁명군인 건 알겠다. 너 자신이 누구냐고.”

“나는 너와 네 조직의 수많은 희생양 중 하나지. 당신은 기억도 하지 못하는 소모품 말이야.”

“소모품? 재밌네. 소모품 씨, 원하는 게 뭔지 말해보도록.”

“조직의 붕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다. 그리고 당신은 조직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고. 나는 기둥을 제거하러 왔다.”

“그래? 기둥을 제거하기 전에, 방해꾼들부터 제거해야 하지 않을까? 내 생각에는 저기 문밖에 손님들이 온 것 같거든.”

 

생각할 틈이 없었다. 나와 N은 즉시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보이는 형체를 향해 총을 겨눴다. 그리고 나는 불가능한 풍경을 보았다.

 

“환영합니다. 손님.”

 

비아냥거리는 KEN의 말 사이로 보이는 것은.

보이는 것은.

것은…

 

8년 전 원식의 품에 안겨 피를 흘리던 상혁이었다.

 

이건 꿈인가? 현실이 아닌가? 수만 가지 감정이 몰아쳤다. 내 눈앞에 있는 상혁은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는 KEN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상혁과 나의 시선이 만났다. 트럭 안에서 공포에 질려 요동치던 그 눈이었다. 상혁이 입을 뗐다.

 

“홍…홍빈이 형…”

 

그의 주위에도 수천수만 가지 생각이 떠돌아다니는 듯했다.

 

“…상혁이?”

 

상혁은 입을 움찔거렸지만 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시종일관 여유롭던 KEN이 갑자기 총을 꺼냈기 때문이다. 탕탕탕탕탕탕. N은 총을 쏘면서 분주히 동상을 찾았고. 나와 상혁은 KEN과 대치했다. 상혁이 어깨를 총알에 스친 듯했다. 그래도 싸워야 했다. 탕탕탕탕탕탕. 탕탕탕탕탕탕. 총성이 계속되고 나도 팔 쪽을 스쳤다. KEN도 옆구리에 상처가 난 것 같았다. KEN이 상처를 만진 후 붉어진 손을 보며 말했다.

 

“한상혁. 네가 여기서 얻는 게 뭔데. 아무것도 없어. 내가 죽으면 달라질 게 있어?”

 

상혁은 말했다.

 

“응, 자유가 부활할 거야.

 

 

우리는 꼭 자유로워질 거야.”

 

갑자기 다른 방향에서 총성이 들렸다. 문 쪽이었다. 그곳에는…LEO가 총을 들고 서 있었다. 그가 말했다.

 

“미안, 재환아.”

 

탕.

한 발의 총성 후, KEN이 쓰러졌다. 갑자기 허리 쪽에서 통증이 퍼졌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눈앞이 밝아지고 원식이 보였다. 원식이 말했다.

 

“잘 잤어? 음…사실은 네가 나흘 동안 의식이 없었어. 여기는 조직 내 병동이고.”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을 말로 뱉었다.

 

“상혁이는!”

 

원식의 표정이 놀람에서, 차츰 미묘한 표정으로 변했다.

 

“상혁이는…그냥 들어봐.”

 

원식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었다.

 

-

 

모든 것은 KEN의 계략이었다. KEN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세력이 조직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혁명군으로 부르며, 베이지색 양복을 입어 자신이 혁명군이라는 것을 표시한다는 점도 알아냈다. 하지만, 조직원들을 보스가 직접 죽일 수는 없는 법. 그의 소문에도 악영향이 있을 터였다. 그는 나를 이용하기로 했다. 보초가 없는 시간이 생기도록 보초 교대를 교묘하게 수정해 집을 나서는 나를 저격했다. 그리고는 혁명군 한 사람을 쏘게 한 것이었다. 일종의 경고였다. 만약 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들킨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빠지고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려버릴 심산이었다. 내가 KEN의 협박으로 혁명군의 한 사람을 저격하기 3일 전, 그는 혁명군의 수장인 상혁을 제거하기 위해 옆 조직에서 신성시되는 동상을 훔쳤다. 그리고는 정보통에게 베이지색 양복을 입은 모임의 수장이 동상을 가져갔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고 상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역시나 옆 조직의 보스는 우리 조직에 조직원을 하나 보내 우리 조직이 혼돈에 빠지게 한 뒤, 내가 KEN에게 협박을 당한 날에 N을 고용해 동상을 가져오라는 임무를 주었다. 나와 원식이 옆 조직의 조직원을 죽인 후 상부는 옆 조직에서 사람을 보낸 이유를 알지 못해 전전긍긍했다. 같은 시각, 우연히 내가 아침에 누군가를 쏘는 모습을 본 LEO도 계략을 꾸미고 있었다. LEO는 이 조직의 2인자였다. KEN 바로 밑. 그는 언제나 이 조직의 최고가 되고 싶어 했고, 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KEN이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는 낌새를 맡았다. 그는 조직 내 무전의 일부를 지속적으로 도청해 항상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항상 정보를 캐고 다녔다. LEO는 혁명군의 존재와 관련 정보를 알고 있었고 아침의 일이 이와 연관된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KEN에게 다른 누군가가 KEN이 꾸미고 있는 계획과 혁명군에 대하여 알고 있다고 귀띔하고 싶었다. 하지만 KEN과 마찬가지로 한 구역의 보스였기에, 직접 손을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는 내가 조직 내의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을 상부가 알게 되면 신변이 위태로워진다는 점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새벽에, 나에게 혁명군의 또 다른 일원을 쏘게 시켰다.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고 그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KEN은 그 소식을 접한 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자신의 위상도 위험할 뿐 아니라 혁명군의 공격이 빨라질 듯했다. 그는 자신의 방 부근 경비를 3배로 늘렸다. 그리고 나는 작전 중에 옆 조직에서 보낸 암살자 N을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아니, 사실 완전한 우연이 아니긴 했다. LEO가 무전 신호를 조작해 N에게 길을 잘못 알려준 장본인이었으니까. LEO는 KEN을 제거할 수도 있는 상혁을 N이 암살해 버리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LEO의 생각대로라면 상혁이 작전대로 KEN의 방에서 KEN을 죽인 뒤, 자신이 상혁을 죽이고 조직의 최고가 되어야 했다. 곧이어 KEN은 암살자가 C-1 구역에 한 명 더 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암살자는 분명 조직의 옷으로 위장을 시도할 것이기 때문에 그는 물품 중 옷의 지급을 중지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로 했다. 무전 등은 도청의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구역 내 창고에 직접 명령을 전달하러 갔다. 그곳에서 자신과 다른 치수의 옷을 챙기는 나를 보고 내가 모든 일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암살자와 한 편이고, 곧 자신의 방으로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조직원을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는 재빨리 방으로 돌아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비하기로 했다. 아무튼, 나는 N과 한배를 탔고, 혁명군의 본거지인 노란 건물로 갔다. N과 내가 노란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혁명군이 보초 한 명을 남기고 C 구역 본부 건물로 떠난 이후였다. KEN이 혁명군에 대하여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작전을 감행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동안 상혁과 아직 도착하지 못한 한 명을 제외한 혁명군들은 본부의 비밀 통로로 보스의 방에 갔다가, 증가한 경비 인력에 죽어 나갔다. 경비와 혁명군 모두가 죽었다. 뒤를 봐주며 늦게 도착한 혁명군 한 명이, 나와 N이 협박해 비밀 통로를 안내하게 한 그 사람이다. 그리고 상혁과 KEN 둘이 대치하고 있었을 때, 나와 N이 도착한 것이다. LEO는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기 위해 몰래 KEN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고, 방에 와서 나와 N을 보고 놀랐다. 그는 KEN과 상혁, 그리고 자신 이렇게 3명 외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잠시 누구를 먼저 처리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처음의 결심대로 KEN을 쏘았고, 조직의 1인자는 제거되었다. KEN은 쓰러지면서 나를 쏘았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그 후 N은 동상을 챙긴 후 달아났고, 상혁도 달아났고, 남은 혁명군 한 명도 달아났고, LEO는 C 구역의 보스가 되었다.

 

-

 

“상혁이는 8년 전 간신히 살아서 도망쳤던 거야, 조직 외부 지역 있잖아? 거기서 자란 거지. 우리한테 했던 말을 현실로 바꾸려고…훈련을 한 거야. 그리고 사람들을 모은 거야. 자유가 올 거라는 그 말, 그걸 믿었던 거야.”

“그럼 너는 상혁이 만났어?”

“상혁이가 보스 방에서 도망쳐서 바로 나한테 왔어.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 준 거야. 상혁이가 전해달래. 8년 전, 우리가 세웠던 탈출계획. 같이 하자고. 우리는 꼭 자유로워질 거라고. 나는 자유를 따라갈 거야, 너는?”

“…당연히, 나도지.”

 

-

 

나의 허리 부상은 회복되었다. 조직의 1인자는 LEO가 되었다. N은 동상을 얻었다. KEN은 사라졌다. 혁명군은 없어지고 상혁이는 달아났다. 원식이는 여기 그대로 있다. 우리는 무사했다. 하나의 점으로부터 시작한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우리 셋은 이루지 못한 것이 있다.

 

우리는 꼭 자유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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