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nc
w.은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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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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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백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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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으로) 흰, 밝은 색의, 무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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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그을지 않은
동그란 원형 테이블에 두 사람이 마주본 채로 앉아있다. 다리를 꼬고 앉은 두 남자의 앞에는 간단한 과일들과 몇 조각의 카나페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와인 잔과 와인이 함께였다. 상대편의 와인잔이 거의 빈 것을 확인한 남자가 느긋한 움직임으로 와인을 따라주었다. 그리곤 남자는 와인 잔의 스템 아랫부분을 쥐더니 간단히 스월링을 한 후 옅은 황금색을 띠는 와인을 한 모금 넘겼다. 달달하면서도 상큼하고, 약간의 떫음과 신선한 과일 향. 혀 전체적으로 퍼진 탄산의 느낌에 미소를 지은 남자가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이 와인은 레드와인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라해서 블랑 드 누아르(blanc de noir)라고 해. 검은 것의 껍질을 벗겨 하얗게 만들어냈단 소리지. 난 이 와인에서 영감을 얻었어. 검고 타락한 것들을 하얗게 만들어 질서를 바로 잡아야겠다 생각한 거야.
삑삑삑삑-
일정한 기계음이 공허한 공간을 메우며 울려댔다.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던 공간을 침범한 소리에 하얗다 못해 투명한 손이 신경질적으로 알람을 껐다. 그 뒤로 몇 분을 뒤척이던 몸뚱이는 결국 현실에 순응하듯 몸을 일으켰다. 그 덕에 몸 위를 덮고 있던 하얀 이불이 하얀 침대 위로 추락했다.
꿈이었나.
노랗게 탈색된 듯한 머리를 탈탈 턴 남자가 침대 아래로 발을 디딘 후 천천한 동작으로 일어났다. 그리곤 몇 초간 서서 뒷머리를 긁적이더니 무심결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의 세상은 몇 년 만의 폭설로 인해 온 세상이 새하얗다 못해 시릴 정도였다. 출근하기 힘들겠네. 일어나자마자 내뱉은 한 마디가 푸념인 것도 모른 채 남자는 비척비척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아, 젠장- 렌즈 다 쓴 걸 깜빡했네.
아까완 달리 멀끔한 상태의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다시 한 번 서랍을 구석구석 뒤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어디에도 남자가 원하는 검은색의 렌즈는 찾아볼 수 없었다. 며칠 전에 렌즈가 곧 떨어질 것을 알고선 사야지 다짐했었으나 일이 일인지라 시간을 내질 못했다. 온라인 쇼핑이라도 해야 하나. 혼자 중얼거린 남자가 결국 차선책으로 선글라스를 집어 쓰고선 나갈 채비를 마치고 보금자리를 떴다.
사실 일을 시작하고 처음부터 제 눈을 가린 것은 아니었다. 죄도 아닌 것을 뭐 하러 가리나 싶어 당당히 제 파란 눈을 드러내고 다녔으나 돌아오는 건 저를 구경하는 듯한 눈동자들과 아니꼽게 여기는 상사들이었다.
-정경위, 웬만하면 그 눈동자라도 가리는 건 어때? 알비노라고 광고하고 다니는 거도 아니고 말이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불같이 화를 냈다. 아무리 상사라도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잔뜩 퍼부으니 나이 먹은 그 경감은 제 앞에서는 알았다며 얼버무려놓고 윗선에 자신을 고발해버렸다. 상사를 때릴 듯이 대드는 후배와는 같이 일 못하겠다나 뭐라나. 다른 곳으로 배치를 명하는 서장에 알겠다는 한 마디만 남기고선 홀랑 다른 서로 넘어갔다. 그 경감 얼굴 보기 좆같아서가 가장 컸고 또, 다시 배치 받은 서가 집보다 훨씬 가까워서였다.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부턴 웬만하면 눈동자만 검은색 컬러렌즈로 가리고 다녔다. 제가 알비노란 사실이 부끄럽거나 감추고 싶어서가 아니라 또 그런 눈초리들과 트러블을 겪고 싶지 않아서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이 알비노란 사실을 일일이 말하기도 귀찮기도 했고. 정말 단지 귀찮아서 눈동자를 가리기 시작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가끔 이렇게 렌즈가 떨어지는 날엔 출퇴근길에 선글라스를 썼다. 서에는 이미 자신이 알비노라는 사실이 어쩌다보니 쫙 퍼졌으니 상관없었으나 파란 눈동자를 그대로 내놓고 다니면 길을 지나다닐 때마나 자신을 힐끔대며 쳐다보는 눈이 셀 수도 없었기 때문에 택운은 하는 수 없이 선글라스를 눈 위에 얹었다. 이제 그런 눈빛은 지긋지긋 했다.
-아빠 이 아저씨 좀 봐, 눈도 파랗고 머리도 새하얘!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네 손가락이 붙어있는 벙어리장갑을 낀 채 굳이 자신에게 삿대질을 해대는 어린 꼬맹이를 본 택운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서 앞이라고 선글라스를 벗었더니만. 자신이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모습을 본 꼰대들이 하는 설교에 서 앞에서는 선글라스를 벗는 택운이었다. 신호 건너 보이는 자신의 직장에 선글라스를 벗은 택운을 보고 기어이 손가락질을 하고 신기하다며 꺄르륵 웃는 아이에 택운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신호등만을 바라보았다.
저걸 순수하다 해야 돼, 싸가지가 없다고 해야 돼. 속으로 중얼거린 택운이 고개를 내 젓고 사무실까지 한, 두곡 들을 심산으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으려던 참이었다.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말이 이어폰 보다 먼저 택운의 귀로 꽂혔다.
-저 아저씬 병에 걸렸나보다.
-병?
-응. 백색증이라고 온 몸이 하얘지는 병이 있어. 저 아저씬 그 병에 걸려서 저렇게 이상한 거야.
-이봐요.
듣다 못한 택운이 결국 고개를 돌리고 자신보다 꽤 작은 남자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말이면 다인 줄 압니까? 주위 쌓인 눈처럼 하얀 얼굴 위의 푸른 눈동자가 매서웠다.
-예?
-앞에 사람 떡하니 놔두고 병이니, 이상한 거니 그딴 말 하는 건 어느 나라 예의입니까?
-아니, 내가 뭐 언제 그랬다고...
-그런 얘기는 최소한 당사자 지나가고 하시죠. 듣는 병자 기분 더러우니까.
자신 보다 월등한 신체조건의 사람이 말해오니 한 풀 꺾여 듣기만 하던 남자가 그래도 제 아이 앞이라 이건지, 도리어 큰 소리를 내오기 시작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그리고 애 앞에서 말버릇이 그게 뭐야! 애가 뭘 보고 배우겠어?
-너나 잘해, 처음 보는 사람한테 반말 늘어놓지나 말고. 그리고 니 애는 교육 다시 시켜야겠더라. 남한테 삿대질해가면서 신기한 동물 보듯 말하는 애가 어디 있어? 부모가 이 모양이니 애도 배우는 게 그거뿐이지.
이 새끼가! 얼굴이 새빨개져 울컥하는 남자를 뒤로 하고 바뀐 신호등에 택운이 이어폰을 꽂으며 길을 건넜다. 뭐라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가 아득해져갔다. 어차피 끝까지 신경 안 써도 될 일이었다. 저런 새끼는 자신을 끝까지 쫓으려다가 경찰서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멈칫할 것이 뻔했다. 형사들에게 경례를 받는 모습을 봤으면 더더욱.
아침부터 개새끼하나 때문에 기분 잡쳤네. 풀리지 않는 불쾌감에 인상을 팍 쓴 채 이어폰을 신경질적으로 빼 정리한 택운이 우산 없이 오느라 머리와 옷 위로 쌓인 눈을 털어내며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런 그에 몇 명이 인사와 경례를 건넸고 택운도 그저 사무적으로 상대에 따라 손을 흔들거나 고개를 숙였다. 벌써부터 지치는 느낌에 택운이 털썩 의자에 앉으니 옆 자리의 주인이 손 인사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뭐야, 렌즈 다 썼어?
-응. 그래서 안 그래도 오다가 웬 찌질한 새끼 하나 만나서 기분 잡쳤어.
또 한 지랄 하셨나보구만.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원식이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 말 없이 제 모니터를 보는 원식의 채도 낮은 빨간 머리칼을 보던 택운이 평소답지 않게 붕 떠있는 사무실 분위기에 결국 원식의 어깨를 툭툭 쳐댔다. 뭔데 이렇게 시끄럽냐. 그런 택운의 질문에 원식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주변에 관심 좀 가지라고 했지.
-왜. 뭔데.
-우리 팀에 신입 하나 들어온대. 근데 경찰대 졸업이라 바로 경감이라던데. 우리보다 직급이 높아.
아, 그래- 궁금해서 물어본 사람이라기엔 정말 무던한 반응에 원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설레 내 저었다. 알비노라는 것 때문에 자신을 지키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재일지도 모르는 택운의 저 무신경에 원식은 결국 두 손 두 발을 다 든 지 오래였다. 몇 년을 같이 일했지만 택운이 저에게 가장 큰 반응을 보인 것은 머리를 샛노랗다 못해 하얗게 탈색하고 온 날이었다. 머리가 왜 그러냐며 묻는 택운의 얼굴을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표정과 어조에 큭큭 웃은 원식은 그저 딱 한 마디를 건넸다.
-그냥, 형보다 제가 더 하얘지면 형의 불편함을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택운은 동료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모든 면을 원식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제게 모이는 시선을 가져가고 싶어 탈색을 했다는 원식이 고마워서도 있었지만 자신을 그렇게 위해준 사람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일부러 인지는 모르지만 매번 탁 튀는 색으로 염색을 해오는 원식에 팀원들은 놀라다가도 그러려니 하기 시작했다. 덤으로 같이 다니는 택운까지도. 쟤네는 원래 저런 애들이지 뭐, 하며.
-근데 형 뺨에 그 밴드는 뭐야?
-아, 이거.
쓸데없는 잡념에 빠져있던 택운이 뺨에 밴드를 가리키며 묻는 원식에 손가락으로 밴드를 한 번 쓸었다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택운의 행동에 원식이 아아- 하며 입을 열었다.
-또 몽유병?
-그렇지 뭐. 기억도 안 나니까.
-형, 그 정도면 병원 가라니까. 그러다 큰 일 나.
걱정스레 말해오는 원식에 휘휘 손을 내저은 택운이 서류를 보기위해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택운에게 안보이게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을 한 원식이 걱정스런 눈빛을 거두지 못했다. 몽유병 때문에 매번 다쳐오는 택운이었기에 항상 병원에 가보라 했지만 별거 아니라는 태도로 나오는 택운에 원식도 이젠 형식상 말을 건네는 입장이 되었다. 저러다 진짜 큰 일 한 번 나려고, 저 인간. 택운에게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 원식이 다시 모니터에 집중하려던 참이었다.
-주목. 니들이 그리도 말해대던 신입이다.
웅성거리던 사무실이 팀장의 목소리로 인해 고요해졌다. 정확히는 팀장 옆에 서있는 그 ‘신입’때문이겠지만.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서있는 그는 사무실에서 거인들로 불리는 택운, 원식과 덩치나 키가 비슷해보였다. 그리고 짙은 이목구비와 눈썹 아래로 진 음영에 그의 분위기는 냉소하기 그지없었다. 머리칼, 눈동자, 눈썹, 심지어 옷까지. 피부 빼고 모두 검은색인 덕에 그의 아우라는 더더욱 무거운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경찰대를 졸업해 경감이란 직급을 달고 이 서로 처음 배치 받았다는 팀장의 목소리에도 그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런 그의 모습이 괜히 아니꼬워 몇몇 형사가 들리지 않을 만큼만 그에게 비아냥댔다. 자기소개나 하라는 팀장의 말에 마치 듣기라도 한 듯, 자신에게 비아냥댄 형사들 하나하나에게 눈길을 준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런 그와 눈을 마주친 형사들은 입을 다물고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경감 이재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짧고 굵은 소개가 허스키한 목소리를 타고 나왔다. 그런 재환에 보답하듯 짧고 굵게 박수를 보낸 형사들이 배치 받은 자리로 향하는 재환을 보다가 일이나 하라는 팀장의 호통에 다들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관심도 없던 택운은 이미 자신의 몫으로 던져진 서류를 읽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앞자리에 재환 역시 말없이 착석했다.
반갑습니다, 경감님. 자리에 일어서며 까지 재환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원식에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그 뒤로 이어지는 원식의 간단한 자기소개를 들은 후 잘 부탁드린다는 말에 저도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건넨 재환이 앞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눈길을 던졌다. 샛노란 머리칼에 파란 눈동자, 창백해 보일 만큼 하얀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야 김경위, 일해.
-갑자기 왜 일하래. 형이나 해.
-우리 해야 할 일이 쌓였거든? 블랑 전담팀, 우리 쪽으로 넘어왔잖아.
가만히 택운을 보고만 있던 재환의 눈빛이 바뀌었다. 그런 재환의 낌새를 눈치 챈 택운이 왜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냐 묻자 금세 눈빛을 푼 재환이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블랑 얘기라면 예민해져서요.
-블랑을 아십니까?
-물론이죠. 유명하지 않습니까, 조직 ‘블랑’
재환의 말에 택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유명한 조직이긴 했다.
‘블랑’ 최근 들어서 한참 화두에 오른 이름인데 한 마디로 뒷 세계의 조직이다. 생긴 지는 몇 년이 되었지만 최근 움직임이 수상쩍고, 활동 수가 빈번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대상이었다. 돈만 주면 그 표적이 누구든, 어떻든 간에 깔끔히 목숨을 끊어놓는 짓에 경찰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심지어 가끔은 무작위로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들의 짓이라고 밝히고 다니는 사이코적인 면도 보이는 극악무도한 조직이었다. 최근에는 해외까지 활동 반경을 넓힌다는 소문이 있어 모두 블랑을 뽑아내려 혈안이 되어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황을 모를 리는 없지만 블랑이라는 단어에 저렇게 민감히 반응하는 사람은 처음이어서 택운의 눈초리가 의심으로 가득 찼다. 그런 택운을 아는지 모르는 지 재환은 제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그 조직 때문에 여기로 배치 받았거든요. 블랑 제거 작전에 저도 참여하기 위해.
-죄송합니다만, 경감님이 왜 굳이 이 일에 참여하셔야 하죠?
택운의 날카로운 질문에 재환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의 반응에 어느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사무실 안의 모든 형사들이 흠칫했다. 그 웃음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울컥 치솟는 화에 택운이 뭐라 말하려할 때, 재환이 그의 입을 막듯 말을 꺼냈다.
-그 이유는 같이 일하시다보면 아시지 않겠습니까?
씨발, 씨발. 그렇게 모두의 앞에서 보란 듯이 저에게 엿을 먹인 재환 덕에 택운은 퇴근 때까지 미간을 펼 줄 몰랐다. 자신의 할당량을 다 해놓고선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봐도 되겠냐는 재환의 말에 팀장은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형사 둘이 붙어서 해야 할 양을 혼자 깔끔히 해놔서도 컸지만, 올 블랙에서 뿜어져 나오는 설명 못할 분위기 때문도 있었다. 그렇게 재환이 가고 나선 사무실을 재환의 욕으로 가득 찼다. 어린 새끼가 건방지다는 둥, 지 잘난 맛에 산다는 둥. 별에 별 얘기가 다 오가던 와중에 꿋꿋이 화를 삭이며 제 몫을 끝낸 택운이 소리가 나게 의자를 끌며 일어섰다.
-저 퇴근해도 되겠습니까.
누구 하나 죽일 듯 이를 갈며 말하는 택운에 모두가 얼른 가보라며 그를 등떠밀었다. 일하는 내내 옆에서 원식이 진정하라며 그를 달랬지만 미안하게도 택운은 전혀 진정이 되지 않았다. 곱씹을수록 짜증이 치밀었다. 이제 막 배치 받은 새끼가 말하는 투하고는. 차마 입 밖으로는 내뱉지 않고 속으로 계속해서 재환을 씹어대던 택운이 앞의 빨간 불에 쿵쿵대듯 걷던 걸음을 겨우 멈췄다. 답답함에 하얀색에 가까운 노란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으니,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옆을 보니 자신보다 조금 작은 남자가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평소 같음 무시하고 말았을 테지만 오늘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택운이기에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화를 내버리고 말았다.
-뭡니까. 뭔데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봐요?
-아, 죄송합니다. 기분 나빴죠. 너무 예쁘셔서 보고 있었어요.
-뭐요?
-아니 예쁘다는 게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머리색이랑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아니 이게 아니라...
당황해 횡설수설 대는 남자를 이젠 덤덤한 감정으로 보던 택운이 바뀐 신호등에 말했다. 신호, 바뀌었어요. 그에 아-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낸 남자가 허둥대며 신호를 건넜다. 그런 남자의 뒤를 좇아 신호를 건너니 남자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해와 이번엔 택운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가 많았어요.
-아, 아니 저기. 그 정도로 사과하실 필욘 없어요. 괜찮습니다.
-저랑 너무 다른 분이셔서 부러워서 그랬어요.
네? 남자의 말에 택운이 찬찬히 그를 살펴보다 그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가 입은 햐얀 외투와는 달리 남들 보다 까만 피부, 머리칼과 눈동자마자 새까만 그에 택운이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었다.
-혹시, 흑색증이신가요?
-아, 네 맞아요. 그럼 그 쪽은... 백색증 맞으세요?
학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택운이 갑자기 바삐 움직이는 까무잡잡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건네줄 모양인지 급하게 가방을 뒤적이던 학연이 찾았다는 듯 조금은 풀어진 표정으로 지갑을 꺼내들더니 그 안에서 흰 종이를 스윽 꺼내보였다.
[정신과 의사 차학연]
주인만큼이나 가지런히 쓰여 있는 글씨를 읽어낸 택운이 다시 앞을 보니 학연이 악수를 청하듯 손을 건넸다.
-차학연이라고 합니다.
-아, 정택운입니다. 저는 저기 강력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얼결에 내밀어진 손을 맞잡은 택운이 남은 한 손으로 신호등 뒤에 경찰서를 가리켰다. 그에 우와- 하는 소리를 내며 감탄한 학연이 지금 경찰과 악수한 거냐며 웃어보였다. 그런 학연의 아부 아닌 아부에 피식 웃은 택운이 웃을 줄도 아냐는 물음에 아직은 웃음기가 남아있는 얼굴을 한 채 대꾸했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처음 보는 분한테 이래저래 실례가 많았어요. 제가 원래 이러는 사람은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 택운씨한테는 이랬네요.
-괜찮습니다. 저도 괜히 큰 소리를 낸 거 같아 죄송하네요.
-아뇨, 그러실 수 있죠. 이해해요.
아, 벌써 이렇게- 둘의 대화 아닌 대화는 손목시계를 보며 놀란 학연 덕에 끝이 났다. 어디 갈 곳이라도 있던 것인지 시간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학연이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네요. 제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그럼 먼저 가볼게요.
-아, 네. 얼른 가보세요.
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둘이 등을 돌리며 가던 길을 가던 중, 학연이 먼저 뒤를 돌아 택운을 불렀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택운이 자신에게 소리치는 학연의 말을 들었다.
-혹시나 제 도움 필요하시면 연락하세요! 상담 정돈 해드릴 수 있어요!
그리 말하곤 금세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검은 머리칼에 그가 지나간 자리에 여전히 쌓이고 있는 하얀 눈을 가만히 보던 택운이 주머니에 쑤셔 넣어 두었던 흰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정신과라. 작게 혼자 중얼거린 택운이 이내 다시 종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발을 뗄 뿐이었다.
******
-역시 경찰대 출신은 다르구먼! 대단해!
재환의 브리핑을 들은 팀장이 만족한다는 듯 두어 번 크게 박수를 치며 말했다. 그에 감사하다며 웃은 재환이 화이트보드에 정리해둔 사진들을 가리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명함 사진을 조금 크게 인쇄한 듯한 사진들 밑에는 빨간색 표시로 X표가 되어있었다. 세 명은 동양계 사람이었고 둘은 흑인들이었는데, 셋은 이미 블랑이 자신들이 죽인 게 맞다 밝힌 피해자들이었다. 남은 둘의 시신 옆에는 검은 종이 위에 알파벳 ‘B’가 써진 쪽지가 놓여있는 사진이 다섯 명의 사진 옆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즉, 이 피해자들의 공통점은 흑색증에 가까울 정도로 남들에 비해 까만 피부와 머리, 홍채 등을 가졌다는 특징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세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알아보니 미국 쪽에서도 2명의 흑인이 심장부근에 총을 맞은 채 숨졌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블랑이 노리는 무작위 살인의 대상은 흑색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나 흑인들일 것이라는 것이 저의 예상입니다.
재환의 말을 끝으로 침묵만이 가득했다. 다들 잘난 신입의 말에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반박할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완벽에 가까운 재환의 브리핑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택운이 턱을 괴고 있던 걸 풀고 팔짱을 끼며 재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럼 다음 타겟은 누군지 감이 옵니까?
-알아보니 우리나라에서 사망한 세 명은 남들에 비해 까맣다는 특징 이외에도 경찰 쪽과 연관되어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경찰의 지인이거나, 은퇴한 경찰이라던가. 그런 것들 말입니다.
-그래서 경감님이 생각한 블랑의 다음 타겟은 누구죠?
-...저입니다.
재환의 발언에 모두가 놀란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택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경찰과 연관되어있으며, 흑색증에 가까운 사람은 재환이 가장 유력했다. 소란스러운 주위에 책상을 두어 번 내리친 택운에 일순간 조용해졌다. 큰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택운을 본 형사들이 나른히 앉아있는 택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의 눈은 렌즈를 사지 못한 모양인지 푸른빛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 이 경감님을 다음 타겟으로 생각한 후 저희는 플랜을 짜보도록 하는 게 어떻습니까. 현직 경찰을 과연 건드릴까 싶지만 상대는 그 유명한 블랑인데다, 이 경감님께선 경찰이 되신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손 놓고 블랑의 뒤를 좇기보단 저희도 나름의 계획을 짜는 게 낫다 생각합니다.
일목요연한 택운의 말에 형사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와중에 재환에게 한 방 먹인 택운이 재환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 택운에 얼굴을 굳힌 재환이 시선을 피한 채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단서를 잡아 기쁜 것인지, 드디어 해볼만 하다고 느낀 것인지, 모두가 상기된 채 회의를 시작할 때 쯤 택운 역시 화장실에 간다는 말만 남기고 유유히 재환을 좇았다.
화장실에 다다르자 들리는 물소리에 택운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고개를 트니 보이는 재환의 몸에 조금 더 들어가니 재환이 눈이 아픈 것인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그런 재환을 보고 세면대로 시선을 옮기니 보이는 렌즈 통에 택운이 눈을 찌푸릴 무렵, 붉은 눈동자가 거울에 비춰졌다. 알비노. 속으로 중얼거린 택운이 뒤에 있는 지도 모른 채로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재환이 잠시 빼두었던 검은 렌즈를 꺼내 다시 제 눈에 꼈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살피던 택운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피곤하겠네요, 경감님도.
-네?
손을 씻던 재환이 깜짝 놀라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벽에 기대서 팔짱을 낀 채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 두 개가 있었다. 놀라 굳은 재환과 달리 택운은 여유로워 보였다. 그 여유로움에 마른 침을 삼켜낸 재환이 경직된 몸을 서서히 풀며 반문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렌즈 말입니다.
-아.
보신 겁니까. 재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택운이 몸을 움직여 재환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런 택운을 바라보던 재환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아무에게도 말씀 말아주십쇼.
-왜죠?
-전 제 자신이 싫습니다. 정 경위님이야 푸른색이라 덜 튀지만 전 붉은색이라서요. 악마의 눈 같기도 해서 싫어합니다. 그래서 머리도 새까맣게 염색하고, 옷도 어두운 계열만 입는 거거든요.
제대로 눈도 안 마주치며 말해오는 재환에 택운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니 재환이 고맙다는 말과 함께 렌즈 통을 자켓 안주머니에 챙기며 먼저 공간을 떴다. 덜 튀진 않는데. 방금 재환이 했던 말을 되새기며 거울을 보던 택운이 조용히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재환은 언제 의기소침했냐는 듯 동료들과 열심히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그런 무리들과 조금 떨어져 뒤에서 가만히 생각에 잠긴 빨간 머리칼을 발견한 택운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한참 생각 중이었는지 아직 펴지지 않은 미간이 택운을 향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아니, 이 경감님 말이야. 뭔가 이상해서.
-뭐가?
-우리도 몰랐던 미국에서의 블랑의 활동을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것도 막 경찰이 된 저 사람이.
날카로운 원식의 말에 택운이 화이트보드의 사진을 보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했다. 우리는 전혀 몰랐던 블랑의 만행을 재환은 어떻게 알아내고 브리핑까지 한 것 인지. 하지만 브리핑 초반에 혼자 조사하다 알게 되었다는 재환의 말을 떠올린 택운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어떻게 알게 됐나보지. 미국에 아는 경찰이 있을 수도 있고.
-....그런가.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해. 그럴 시간에 가서 블랑 꼬리라도 더 잡아봐.
택운의 등떠밈에 알았다며 짜증 아닌 짜증을 낸 원식이 제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원식을 보다 재환을 무심코 쳐다본 택운이 뭔가 깨달은 듯 아- 하며 멍청한 소리를 냈다. 차학연. 얼마 전에 만난 그 사람이 떠올라서였다. 흑색증을 앓고 있다던 남자. 그 남자를 떠올림과 동시에 정신과라는 단어를 생각해낸 택운이 자리로 돌아가 외투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조금은 구겨진 명함을 손에 쥐었다.
******
재환의 활약 아닌 활약으로 수사는 점차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거기에 검사로 일하는 홍빈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블랑의 근거지를 알아내게 되자 판은 경찰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것인지 한참 활발히 자신들의 활동을 넓혀가던 블랑은 사라진 것처럼 잠잠해졌다. 그렇게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집에 제대로 들어가지도 못해가며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택운은 여전히 검은색 렌즈를 사지 못해 푸른 눈을 드러낸 채였다. 그 푸른 홍채 주위의 흰 색이 충혈 되어 빨간색으로 거의 덮일 때 쯤, 택운은 겨우 쉴 수 있었다. 블랑과의 전면전을 앞 둔 며칠 전이었다. 그리고 폭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되어서, 몇 년 만의 폭설은 몇 십 년 만의 폭설로 기록이 바뀌고 있었다.
-저 좀 만나주시겠습니까?
카페에 나란히 앉은 둘 사이에 별 말이 오고 가지 않았다. 먼저 만남을 제안한 택운이 입을 열지 않아서였다. 카페에 먼저 도착한 채 오셨냐는 한 마디로 학연을 반긴 후 택운은 자신의 몫으로 나온 라떼를 이따금 마실 뿐 본질적인 말은 꺼내지 않았다. 미리 시켜놨어요, 드세요. 학연의 몫으로 사둔 모카를 조용히 건네며 한 저 말이 마지막이었다. 여전히 묵묵부답인 택운을 지켜보던 학연이 아직은 식지 않은 모카를 제 입 근처로 들었다. 코를 가득 채우는 커피향과 그 사이사이의 초코향, 마지막으로 미미하게 느껴지는 데워진 우유의 고소한 향기를 느끼던 학연이 차마 모카를 마시지 못한 채 머그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택운이 입을 연 탓이었다.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놀라셨을 텐데.
-아뇨. 먼저 필요하시면 연락하라고 한 건 저인걸요. 괜찮아요. 근데...
-...
-절 부르셨다는 건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신 건가요?
학연의 질문에 택운이 쉬이 답을 내놓지 못했다. 꿈처럼 단편 단편 저장되어있는 기억들. 이게 정말 생생한 꿈인지, 아님 정말 나의 기억인지. 도대체 알 수 없는 제 자신에 결국 정신과 의사라며 자신을 소개한 학연의 명함 속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최대의 혼란 속, 택운은 참담해보일만큼 어둡게 입을 열었다.
-사실 전 몽유병을 가지고 있어요. 그래서 자고 일어나면 언제 생겼는지 모를 상처들이 가득이죠.
-그러시군요.
-근데 최근 이상한 기억들이 생겨납니다.
천천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인지 꿈일지 모르는 것들을 털어놓는 택운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학연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꼭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라는 택운의 말을 끝으로 끝난 이야기에도 별 다른 대꾸 없는 학연에 오히려 초조해진 건 택운이었다. 제 앞의 모카를 한 모금 마신 학연이 고개를 들어 택운과 눈을 마주쳤다.
-몽유병이 있다고 했죠?
-네... 그렇긴 한데,
-본인이 몽유병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이유가 뭐죠?
-언제부터인진 모르지만 자고 일어나면 나도 모를 상처들이 생기고, 심지어는 침실이 아닌 곳에서 눈을 뜨는 경우도 종종 있었어요. 여기저기 물어보니 그건 몽유병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연히 몽유병으로 생각한 거죠.
택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학연이 묘한 표정으로 택운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표정에 택운은 왜 그러냐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채인 학연이 입을 열었다.
-아직 확실히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어쩌면 택운 씨는 몽유병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앓을 수도 있겠네요.
-네?
-제가 지금 휴직 중이라 정확한 검사도 못하지만 택운 씨의 말만 들으면 몽유병 그 이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이상이라니...
섣불리 확답은 드릴 수가 없어요. 나긋나긋한 학연의 말에 택운이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한 채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정말 그 꿈같은 기억들이 현실이었다는 건가. 그럼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란거지. 알 수 없는 미로에 갇힌 듯 복잡한 머리에 택운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눈을 감아버려 사라진 푸른 눈동자를 보던 학연이 다시 떠지는 푸른 눈을 보았다.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조만간 병원에 가봐야겠네요.
-제가 오히려 혼란만 드린 거 같아서 죄송하네요.
-아뇨, 괜찮습니다. 갑자기 불러내 죄송합니다.
괜찮다며 웃는 학연에 같이 미소를 지은 택운이 불현 듯 떠오르는 기억에 자리에서 일어선 학연의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검은 눈이 택운에게로 와 닿았다.
-요즘 블랑이 흑색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나 그와 비슷한 사람을 타겟으로 잡고 살인을 저지르고 있어요. 그리고 그 중에서 경찰과 연관된 사람으로.
-아...
-조심해요. 게다가 학연 씨는 나와 만남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타겟이 될 수도 있어요. 이상한 느낌이 들면 바로 신고하거나 날 찾아와요.
알겠다며 걱정해줘 고맙다는 학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택운이 먼저 자리를 뜨는 학연의 동그랗게 검은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것들은 모두 죽어야 해. 검고, 타락한 것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에 택운이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문득 이렇게 고개를 쳐들고 자신에게 들어오는 이 기억들이 정말 나의 것인 걸까. 자꾸만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에 택운이 카페를 뜨지 못하고 자리에 다시 앉고 말았다.
Rrrrrr-
갑자기 울리는 벨소리에 멍한 정신을 겨우 잡은 택운이 발신자를 확인한 후 초록색 버튼을 누르곤 핸드폰을 귀 가까이로 가져댔다. 어- 느긋하던 말투 뒤에 붙는 상대의 다급한 말투에 택운이 의자에 기댔던 상체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냐며 묻는 택운의 어투는 평소완 달리 굉장히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던 지라, 꽤 늦은 오후에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던 사람들이 모두 택운을 바라보았다. 그런 시선은 아랑곳 않고 한껏 격양 되어있던 택운이 알았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외투를 챙겨 금세 차에 올라탔다.
-이재환 경감님의 단독 행동이야! 스스로 블랑의 본거지에 들어가곤 문자만 남긴 채 연락이 안 돼!
방금까지 들은 원식의 말을 곱씹은 택운이 핸들을 잡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손톱을 깨물기 시작했다. 택운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휘몰아치는 눈 보라 덕에 와이퍼가 미친 듯이 앞 유리창을 왔다갔다 거렸다. 원식에게 들었던 주소를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의 말에 미친 듯이 페달을 밟아 겨우 도착한 곳은 만들어진 지 꽤 되어 보이는 버려진 폐건물이었다.
여기가 블랑의 본거지라고? 의아함을 가진 채 택운이 천천히 건물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아직 다른 동료들은 도착하지 않은 것인지 인기척 하나 없는 빈 공간에 택운이 재환을 찾기 시작했다.
-이 경감님! 이재환 경감님!
부러 큰 소리를 내며 재환을 찾아다녔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택운이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답답함에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작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 얇은 소리를 잡아낸 택운이 발소리를 죽인 채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경감님?
-정경위님....
쪽문처럼 보이는 것을 천천히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벽에 잔뜩 붙어 간간히 숨을 내쉬고 있는 재환이 보였다. 놀라 재환의 이름을 크게 부르려던 택운이 아랫배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막느라 새빨개진 손을 들어 검지를 입술 근처로 가져다 대는 재환에 겨우 소리를 삼켰다. 하지만 다급하게 자신에게 다가오는 택운을 재환은 차마 막지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총격 당하신 겁니까?
-네.... 갑자기 저희 정보가 새어나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먼저 치려고 이렇게 왔는데, 생각보다 다른 분들이 많이 늦네요...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무모하게 행동하면...!
-쉿. 목소리 낮춰요. 지금 겨우 숨어있는 거니까.
윽- 택운에게 훈수를 두자마자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던 재환이 조금 진정된 것인지 고개를 벽에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큰 소리를 낼 수 없어 통화 대신 문자로 원식에게 상황을 전달한 택운이 다시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여는 재환에 그를 바라보았다.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것인지, 검은 렌즈 주변의 흰 자위가 재환의 홍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블랑의 보스를 만난 거 같아요.
-....보스?
-네. 블랑의 보스, w말이에요. 얼굴을 본 적은 없어 정확하진 않지만 맞는 거 같아요. 거구에 흰 피부톤, 그리고 레드와인 계열의 붉은 머리칼. w가 확실해요...
재환의 말에 택운이 굳었다. w와 블랑의 보스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자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잇는, 미성인 자신보다 낮은 목소리.
-넌 이제부터 블랑의 보스야. 날 대신해 움직이도록 해.
-좋아. 그럼 내 이름은 w로 해야겠어. white의 w. 간단한 게 가끔은 아주 편하고 좋거든.
도대체 누구의 기억인거지. 그리고 내 목소리 다음으로 등장하는 이 목소리는 누구 꺼야. 정말 내가 블랑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 건가? 왜, 그 빨간 머리를 본 거 같지.
정경위님? 멍하니 엉뚱한 곳에 초점을 둔 채 생각에 잠식해 버린 택운을 약한 손길로 흔든 재환이 아직은 멍한 초점을 그대로 둔 채 자신을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정신 차리라는 말에 겨우겨우 초점이 돌아온 택운을 확인한 재환이 아직 전할 말이 끝나지 않은 것인지 말을 이었다.
-w가 그랬어요, 이홍빈을 데려오라고. 아마 이 검사님을 말하는 거 같아요.
-w가 이 검사님을 왜 찾죠?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절 쏜 후 그렇게 말했어요. 이홍빈 검사님을 데려오면 목숨을 부지 시켜준다고.
-그래서 이홍빈 검사를 불렀어요?
-아뇨, 아직...
재환의 답에 택운이 답답함에 큰 숨을 내쉬었다. 택운이 입에서 흰 입김이 크게 퍼져나갔다 금세 사라졌다. 여전히 끙끙대는 재환을 말없이 바라보던 택운이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갑작스런 택운의 행동에 재환이 놀라기도 전에 택운은 누군가에게로 전화를 걸었다. 어, 이홍빈 검사님도 데리고 와. 필요한 말만을 한 채 끊어진 전화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은 택운의 행동에 재환이 경악하듯 말했다. 소리가 밖으로 세어나갈까, 말 크기는 여전히 작은 상태였다.
-뭐하는 거예요! 이홍빈 검사님을 왜 이리로 데려옵니까?
-w가 원하는 게 이 검사님이라면서요. 그래서 불렀습니다. 어차피 이홍빈 검사와 w 단 둘이 만나는 것도 아닐 테고, 주위에 경찰들이 대기하고 있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탕-
그 때였다. 서 있는 택운의 귀 옆을 스쳐 지나간 총알이 재환의 귀 바로 옆으로 가 박혔다. 놀라 굳은 재환이 총알이 날아온 곳을 살피기도 전에 택운이 재환의 팔목을 붙잡고 그 공간을 빠져나갔다. 재환이 일어나 움직이자마자 재환이 앉아있던 자리에 총알이 날아가 박혔다.
들켰군. 아랫입술을 콱 깨문 택운이 숨을 곳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총을 맞아 꽤 많은 양의 피를 흘린 재환의 속도는 택운의 속도에 턱없이 부족했다. 씨발- 곱지 않은 말을 입 밖으로 꺼낸 택운이 결국 재환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겨우 큰 기둥 뒤에 숨은 택운이 재환을 내려주곤 헉헉 대며 숨을 골랐다. 하얀 입김이 끊일 줄을 몰랐다.
-하아, 괜찮습니까?
-네 아직은요...
-망할, 도대체 지원팀은 언제 오는 거야.
계속해서 날아오던 총알이 멈추고, 총소리에 가려져 겨우 숨을 몰아쉬던 택운과 재환도 숨을 죽였다. 그것도 잠시 아래층에서 시끌시끌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익숙한 목소리들에 택운이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웃음은 금세 거두어졌다.
이미 밖은 해가 모두 져 컴컴한 어둠만이 찾아온 폐건물에, 한 목소리가 가득 메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와인 중에 블랑 드 누아르(blanc de noir)라는 와인이 있어.
‘이 와인은 레드와인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이라해서 블랑 드 누아르(blanc de noir)라고 해.’
-레드와인의 껍질을 벗겨 화이트 와인을 만들어냈단 소리지.
‘검은 것의 껍질을 벗겨 하얗게 만들어냈단 소리지.’
-우린 이 와인에서 영감을 얻었어. 검은 것들을 하얗게 만들어 사회를 바로 잡아야겠다 생각한 거야.
‘난 이 와인에서 영감을 얻었어. 검고 타락한 것들을 하얗게 만들어 질서를 바로 잡아야겠다 생각한 거야.’
며칠 전, 잠에서 깨기 전 자신의 목소리가 했던 말을 똑같진 않지만 거의 비슷하게 말해오는 남자에 택운이 얼어붙은 듯, 꿈쩍을 하지 않았다. 택운과 재환을 발견해 뛰어오려던 다른 형사들도 폐건물을 울리며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 채였다. 그런 군중들의 반응이 웃긴지 한 번의 코웃음 소리가 들리더니 남자는 말을 이었다.
-너흰 내가 블랑의 보스라 생각할 테지. 뭐, 아니진 않지만 그렇다고 꼭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
-뭔 개소리야! 당장 나와, w!
아리송한 남자의 말에 택운이 소리쳤다. w가 아닐 수도 있지만, 택운은 지금 확신했다. 기억 속의 저 목소리와 자신의 목소리가 했던 말을 똑같이 내뱉는 자. w가 확실하단 생각이 들어왔다. 택운의 목소리에 잠깐 멈칫한 남자가 이내 하하하 거리며 크게 웃어댔다. 남자의 섬뜩한 웃음소리가 폐건물을 덮치듯 가득 들어찼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겨우 그치고, 여전히 웃음기 서려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웃기지도 않아, 정말.
-뭐?
-적어도 당신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잖아. 안 그래?
-지금 무슨,
-이제 그만 정택운 속에서 나와, 레오.
남자의 말에 혼란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택운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정 형사님? 자신을 부르는 재환의 목소리에 서서히 고개를 든 택운이 조용히 재환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푸른 눈빛과 마주친 재환의 표정이 사악 굳더니 뒤의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건 정 경위님이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지금 저 사람이 정택운이 아니면 누구겠어!
-시끄럽네.
혼란한 목소리들 속, 차가운 음성이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단 한 마디 만이었지만 평소의 택운과는 전혀 다름을 느낀 형사들이 모두 주춤대기 시작했다.
-그래, 난 정택운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뭐?
-지금의 난 레오야. 블랑의 보스, 레오.
w, 그만 나와. 레오의 말에 어둠 뒤편에서 가만히 숨어있던 w가 모습을 드러냈다. 소문으로만 듣던 w의 등장에도 모두는 어찌할 생각도 못한 채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w뒤로 다가오는 무수히 많은 숫자의 조직원들 때문도 있었지만, 블랑의 보스로 불리는 w에게 명령을 내리는 택운의 모습 때문이었다.
-다 없애.
레오의 한 마디에 고개를 끄덕인 w가 손짓하니 조직원들이 일제히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총을 들어 경찰들을 쏴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총격 질에 형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몇몇 형사들은 살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총을 쐈지만 결국 붉은 액체를 내뿜으며 쓰러질 뿐이었다.
한 순간에 정리된 상황에 겨우 기어가 몸을 숨겼던 재환이 이를 악 물었다. 어떻게든 자신은 살아남아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상하게도 재환의 앞에 하얀 구둣발이 섰다. 떨리는 고개를 들어 w와 눈을 마주친 재환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홍빈을 데려오랬잖아. 그러게 왜 말을 안 들어.
-이 개새끼...
재환이 말을 마치자마자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 w가 총을 겨눈 채 방아쇠를 당겼다. 총을 맞고 몇 번 숨을 내쉬던 재환이 숨을 멈췄다. 재환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w가 발걸음을 돌려 레오에게로 다가갔다. 수고했다는 레오의 말에 w는 차갑게 대꾸했다.
-대체 언제 정택운을 죽일 거야? 그 몸을 언제 가질 거냐고.
-진정해. 그게 말처럼 쉬운 줄 알아? 내가 이 몸을 가지려면 일단 정택운으로 살아왔던 모든 기록을 없애야해. 모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차근차근 없애고 있다고.
-그래서 이렇게 많은 형사들을 죽였다?
맞아. 정택운을 기억하던 사람은 모두 죽어야지. 레오의 말에 w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곤 손짓했다. w의 손짓에 뒷짐을 진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들이 금세 레오을 결박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해하며 무슨 짓이냐고 소리치는 레오를 보던 w가 천진하게 웃어보였다.
-정택운을 기억하던 모두를 죽인다라- 그럼 나도 포함 되는 거 아닌가?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맞잖아. 정택운의 모든 걸 알고 보스 역할까지 해준 나인데. 그리고 그 전에 정택운의 사촌 동생인 한상혁인데. 아닌가?
-내가 널 왜 죽이겠어. 너 덕분에 블랑이 이렇게 컸는데.
-그러니까. 그러게 말이야. 나 덕분에 블랑이 이렇게 커졌는데, 난 언제까지 레오 너의 밑에서 살아야하지?
-뭐?
제대로 잡아. 상혁의 말에 조직원들이 레오를 절대 움직일 수 없도록 붙잡았다. 그에 이거 놓으라며 발악하는 레오의 턱을 세게 붙잡은 상혁이 레오와 눈을 마주치며 한자 한자 또박또박 말해왔다.
-너의 그 이중인격을 믿지 못하는 조직원들이 점점 늘어. 나 또한 그렇고. 게다가 니 정체를 눈치챈 이홍빈이 우릴 배신하고 경찰 쪽으로 정보를 넘겼어. 이 정도면 이해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릴... 이홍빈이 배신한게 니 탓이란 생각은 안 하나? 니가 제대로 했음 이홍빈이 뒤통수를 치는 일은 없었을 거라고!
-이홍빈을 제쳐두고라도, 요즘 점점 니가 정택운을 이기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어. 정택운의 자아가 널 누르고 있단 소리지. 그렇게 되면 레오는 영영 사라질 거야. 아니, 반대로 니가 이긴다 해도 택운이형의 자아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일이지. 그렇게 줏대 없는 보스를 우린 받들고 싶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정택운은 곧 사라질 거야! 내가 이 몸의 주도권을 가질 거라고!
-글쎄. 미안하지만 블랑 전체는 널 버리고 날 택했어. 이제 내가 블랑의 주인이야.
없애. 간결한 두 글자를 말한 상혁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고 레오를 무차별 적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워하는 신음들 틈새로 들리는 욕지거리에 상혁이 웃음을 흘렸다. 정택운이고 레오고 이젠 세상에서 사라질 시간이었다. 곧 다가올 자신의 시간에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상혁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얼굴을 굳혔다. 택운을 미친 듯이 구타하던 조직원들 역시 당혹감에 행동을 모두 멈춘 채였다.
-알고는 있었지만 나름 놀랍네.
-누구야.
경계어린 상혁의 말에 남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블랑의 대가리가 되길 원하는 사람치곤 겁이 너무 많은데?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신경을 건드리는 말을 내뱉는 남자에 상혁이 소리가 날만큼 이를 세게 깨물었다. 잡아와. 뒤에 서있던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니 조직원이 한 발자국을 내딛을 때였다.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조직원의 가슴에 박혔다. 순식간에 쓰러진 조직원에 모두가 우왕좌왕 거리니 상혁의 심기를 건드린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뭐, 아주 난장판을 만들어 놨네.
-너, 넌 뭐하는 새끼야!
쓰러진 사람들을 헤치며 느긋이 걸어오는 남자에 상혁이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 그의 뒤로 익숙한 얼굴이 보여 상혁이 소리쳤다.
-이홍빈!
-아, w. 오랜 만이야.
-이 개새끼가! 다 니가 꾸민 짓이지?
-무슨 소리야, 나도 몰랐다고. 블랑이 CIA에도 좇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홍빈의 말에 상혁이 벙찐 표정을 한 채 시선을 돌려 홍빈 옆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에 씨익 웃은 남자가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CIA 소속, 엔 슈미첼이다. 한상혁을 비롯한 조직 블랑을 모두 체포하러 왔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릴...
-택운이형!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 젓는 상혁을 뒤로 하고 돌아다니며 상황을 지켜보던 원식이 꿈틀 대며 일어서려는 택운을 발견하곤 달려갔다. 그러는 동안 잠복해있던 경찰들과 CIA가 들이닥쳐 블랑을 하나, 둘 검거해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다 뭐야...
-형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정택운. 전혀 기억이 나질 않나?
원식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일어선 택운이 온 몸에 전해지는 고통에 고통스러워할 무렵, 엔이 다가와 택운의 앞에 서보였다. 그런 엔을 손가락질하며 가리킨 택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택운에게 간단히 상황에 대해 설명해준 엔이 말을 이었다.
-정택운 넌 인격 장애를 앓고 있어. 그 덕에 경찰 정택운의 자아와 레오의 자아로 인격이 나뉘게 됐지. 몽유병 따윌 앓고 있던 게 아니란 소리야.
-그, 그럼 내가 블랑의...
-너의 또 다른 인격, 레오가 블랑의 진짜 주인이었지.
엔의 간결하고 단호한 대답에 택운이 아니라며 중얼댔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주변 상황에 택운의 푸른 눈동자가 초점을 잃었다. 모두 쓰러진 제 동료들과 자신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블랑의 조직원들, 그리고 눈을 감고 쓰러져있는 재환.
-이 모든 게 내가 한 짓이란 말이야....?
-그래, 다 저 새끼가 벌인 일이야! 난 죄가 없다고!
벌벌 떨며 주저앉는 택운에게 삿대질을 해가며 핏대를 세우고 소리치는 상혁을 한심하단 표정을 한 채로 바라보던 엔이 씩씩대는 상혁에게로 다가갔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상혁과 눈을 마주친 엔이 표정을 거둔 채 일말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얼굴빛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처음에 블랑이란 조직을 만든 건 정택운, 레오야. 하지만 블랑이 이렇게 되기까지 가장 영향력을 많이 미친 건 누구일까? 너의 말처럼 오락가락해서 조직원조차 믿지 않는 저 자일까 아니면, 권력에 눈이 멀어 사촌 형까지 죽이려 든 너일까?
-이 씨발, 다 죽어!
자신에게 죽일 듯이 달려드는 상혁을 가볍게 내친 학연이 넘어진 상혁의 팔에 총을 한 발 쐈다. 고통스러워하며 남은 한 팔로 총 맞은 부위를 감싸 쥔 상혁이 흥분해 붉게 충혈 된 눈을 하고 여전히 소리 질렀다.
-나만 그런 줄 알아? 블랑 모두가 동의한 일이야! 나 혼자 단독으로 한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이홍빈, 저 새끼도 같이 가담했어! 나만 죄가 있는 줄 아냐고! 말해, 이홍빈! 빨리 말하란 말이야!
-이거 놔, 이 미친놈아! 무슨 개소리야!
악에 받혀 소리치던 상혁이 온전한 팔 하나를 가지고 홍빈의 멱살을 쥐며 말했다. 당혹감에 상혁을 밀어냈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상혁을 상대하기 힘들어하던 홍빈이 주머니에서 단도를 꺼내들고 제 목으로 가져다 대는 상혁에 욕을 내뱉으며 소리를 질렀다.
발포해. 감당하기 힘들만큼 미쳐 날뛰는 상혁에 엔이 인이어에 대고 말하니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와 상혁을 관통했다. 그대로 뒤로 쓰러지는 상혁에 홍빈이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건 홍빈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블랑의 주인이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택운을 제외하고 모두가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굳어버렸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엔이 가볍게 뒤를 돌아 원식을 향해 말을 붙였다.
-김원식 경위님?
-네, 네?
-여기 형사분들 시신은 그 쪽에서 해결해 주시죠. 블랑은 저희 측에서 처리할 선만 처리한 후 한국 경찰 쪽으로 넘기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엔의 말에 원식이 여전히 혼란에 빠진 택운은 한 곳에 잘 앉혀두고 같이 온 지원팀을 불러 시신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런 원식을 보던 이번엔 엔이 얼이 빠져있는 홍빈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홍빈 검사님은 알아서 자백하시는 게 좋을 거 같군요.
-...
-저희 측에선 손 댈 영역이 아니긴 합니다만, 이 검사님이 블랑과 주기적으로 컨택한 자료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경찰 측에서 필요하다 하면 곧바로 넘길 생각이고요.
-한상혁 이 미친 새끼가... 나까지 걸고넘어지다니...
모두가 상혁의 외침을 들은데다가 CIA가 저렇게 말해오는 상황에서 더 물러날 곳이 없다 생각한 홍빈이 푸념을 늘어놓더니 원식에게로 가 두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에 형식적인 말을 하며 뒷주머니서 수갑을 꺼내 채운 원식이 여전히 주저앉아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택운을 바라보았다. 그런 택운에게로 엔이 다가갔다. 이제 마지막 차례였다.
-정택운 씨, 저랑 같이 가시죠.
-모두, 모두 기억 나버렸어요... 내가 다른 자아로 했던 짓들 모두...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려 와서 듣는 사람의 좋지 못했다. 하지만 엔은 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이중인격자인지도 몰랐으니까요.
-내 자신이 두려워요, 또 이런 짓을 벌일까봐.
-안 그러도록 해야겠죠.
-안 그럴러면 내가 사라져야겠죠.
-잠깐,
엔의 말보다 택운의 행동이 더 빨랐다.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언제 챙겼는지 모를 권총을 머리에 가져댄 택운이 그대로 방아쇠를 당기고 말았다. 힘없이 쓰러지는 몸에 엔도 원식도 그대로 굳은 채였다. 씨발, 자살을 해버리다니- 입술을 짓이기며 중얼댄 엔이 검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한숨을 내쉬니 하얀 입김이 엔의 주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진짜, 죽은 거예요? 원식의 물음에 보면 모르냐 대꾸한 학연이 몸을 돌려 원식과 눈을 마주쳤다. 원식의 눈이 울음을 참는 건지 벌게져 있었다.
-이제 그만 가보시죠. 뒤처리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믿을 수 없게 덤덤하시네요.
-뭐, 이 쪽일 하다보면 이런 일이 가끔 있어서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학연에 고개조차 끄덕이지 못한 원식이 두 눈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더니 제법 강단 있는 눈빛을 한 채 엔과 눈을 마주쳤다.
-CIA가 원래 그렇게 인정이 없는 겁니까, 아님 당신만 그런 겁니까.
-무슨 소린 지 잘 모르겠네요.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죠?
-레오가 저희 동료들을 모두 죽일 것도, 이홍빈 검사가 블랑과 짝짝꿍 하던 것도 모두 알고 있어놓고 왜 진작에 나서지 않았냐는 말입니다. 미리 나섰다면 불필요한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화가 난 것인지 이를 악 물며 말해오는 원식에 엔이 픽하는 웃음을 흘렸다. 그에 발끈하려던 원식이 엔의 낮고 차가운 대답에 입을 다물었다. 분명 대답이었지만 그 속의 뜻은 너 따위가 뭘 어쩌겠냐는 것이 분명했다.
-죄송하지만, 지금 그 말은 굉장히 적대적으로 들리네요. 제가 CIA임을 밝히며 당신과 이홍빈 씨를 이끈 건 맞습니다만, 모든 책임이 저한테 있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건 불쾌하군요. 솔직히, 저희 아니었음 블랑 이렇게 뽑아내지 못했을 거 아닌가요?
-...
-혹시 뭐 저희가 뒤에서 뭘 꾸미고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만 두시죠. 블랑은 미국 내에서도 골칫덩이였습니다. 웬 한국인들이 미국인들을 끌어들여 범죄를 발생시키고, 애꿎은 흑인들을 죽여 대는데, 뭐 하러 저희가 무슨 짓을 꾸미겠습니까?
우다다 쏟아내듯 말해오는 엔에 뭐라 말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고만 있던 원식이 제 빨간 머리칼을 쓸어 올리더니 엔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건넸다.
-제가 너무 예민했나보군요.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이제 볼 일 보러 가시죠. 뒤 처린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 폐건물을 빠져나가려던 원식이 멈추더니 그대로 엔에게 등을 돌린 채 입을 열었다. 일부러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원식의 말에 눈썹을 꿈틀 거린 엔이 그대로 원식이 건물을 빠져 나가는 것을 창문을 통해 지켜봤다. 주위형사들과 몇 마디를 나누더니 경찰차를 타고 사라지는 원식을 보던 엔이 중얼거렸다. 제법이네.
주위를 둘러 본 엔이 진동하는 피비린내에 어서 여길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심결에 창밖을 보니 거세게 내리치던 눈보라는 그친지 오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린 눈의 여파로 인해 세상은 온통 하얀 색이었다. 그와 반대로 하늘을 칠흑같이 어두웠다. 지금은 소복이 쌓인 눈은 결국 녹아버릴 터였다. 마치 세상을 제 것처럼 만들려던 블랑처럼.
레오가 블랑이란 조직을 만든 이유는 아무래도 지금까지 자신이 받아온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남들보다 하얗다는 이유로 온갖 조롱과 욕을 들어왔을 테니.
레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한 검은 눈동자가 감겼다가 뜨였다. 하지만 분명 이건 잘못된 일임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블랑은 사라졌다. 그리고,
-일어나.
-...
-그만하고 일어나라고. 다 정리됐으니까.
-...
-시체놀이 재밌냐, 켄.
-으으, 방탄조끼 입어도 꽤 아프네. 그것보다 김원식은? 우릴 의심하는 거 같더니.
-일개 경찰이 뭘 어쩌겠어. 그것도 겨우 경위인데. 자기 동료들과 이홍빈을 데리고 갔어. 아마 거나하게 포상을 받겠지. 그리고 알고 있더군, 니가 CIA라는 걸. 어쩐지 시신 수습할 때 니 근처론 가지도 않더라.
-그럴 거 같긴 했어. 계속 날 의심쩍게 바라봤거든. 근데 한상혁은 왜 죽인 거야? 굳이 그럴 필욘 없었잖아.
-사실 나도 안 죽이려했어. 근데 저 새끼 생각보다 눈치도 좋고 약삭빠르더라고. 우리 편에 두면 엄청난 인재지만 저런 놈들은 한군데 붙어있지 않지. 그리고 무엇보다 이중인격자인 지 친척 형을 이용해 권력을 가지려한데다 미친 듯이 날뛰던 걸 보면, 확실히 살려두기엔 위험한 놈이야.
-아깝네. 너무 좋은 인재상이라 죽다니.
-근데 정택운이 자살한 건 의외더군. 거기엔 너도 한 몫 한 듯하지만. 이럴 거면 정택운의 자아와 만나려고 그렇게 성질 죽여가며 애쓰진 않을텐데.
-그러게. 날 되게 특별히 생각했나봐, 정택운. 끼지도 않던 렌즈 끼고, 머리 염색까지하며 알비노를 혐오하는 척 연기한 게 먹힌 모양이지. 그래도 나의 죽음과 자신의 정체에 대한 충격으로 자살하다니. 뭐 물론 자살하지 않았어도 레오는 죽게 만들 거였지만.
-이래서 약하고 착하면 안 돼. 결국 손해 보는 건 본인이니.
-그러고 보면 참 불쌍하게 됐네. 선한 이 같았는데.
-선한 이였지만 동시에 악한 이였지. 세상에 선한 이와 악한 이는 없어. 모두 양면성을 지녔지. 때론 선인이 되기도, 악인이 되기도 하니까.
-그래서 지금 우린, 뭐지?
-아마 선인? 블랑을 없앴으니. 정택운은 살리려고 성질 죽여가며 정신과 의사인 척 연기까지 해댔으니까.
-난 악인에 한 표. 블랑을 없앤 건 좋지만 우리 좋자고 뒤처리할 거 없게 둘을 죽이고, 이홍빈을 감옥으로 보냈으니.
-뭐 어때. 상부에서도 정리하기 깔끔하고 좋을걸. 어찌됐든 다 끝났으니까 우린 이 나랄 뜨자고. 뒤처리 더 깔끔하게 할 겸 여긴 태우고.
-얘네 둘도 같이?
-이 나라에선 죽으면 태워준다며. 그러지 뭐.
-이렇게 건물이랑 태우진 않아, 멍청아.
-뭐 어때. 가자고.
-...블랑이었던 그들이 정말 이름처럼 하얗게 재가 되겠군.
모든 게 하얗게, 점멸.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