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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ITOR

샤르망

@Fantasia_VIXX

도시는 달의 그림자처럼 어두운 이들을 끌어안아 숨긴다. 그림자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대부분 뒤늦게 빛을 보기 마련이다. 대도시라 불리는 V시도 예외는 아니다. 표면에는 시시한 건달이 있지만 경찰조차 손대지 못한 어두운 바닥엔 흔히 말하는 조직들이 있다.

그 그림자 속에서 상대의 목을 움켜쥔 이는 ‘올림포스’의 번견, 재환이다. 특유의 장난스러운 웃음기는 사라지고 날카로운 정적만이 맴돌았다.

 

“배신은 곧 죽음이라고 말했는데...내 말이 그렇게 가벼워보였나?”

 

재환이 흰 구둣발로 사내를 밟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뻐끔대는 입모양으로 보아 무조건 살려달라는 말일 것이다.

 

“현 시간부로 올림포스는 S 그룹과의 거래를 중단합니다. 암호명 K.”

 

냉랭한 목소리로 결정타를 날리고 게임을 하는 것처럼 간단하게 권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에 쏜다. 생선처럼 버둥대던 움직임이 멎자 재환은 귀찮다는 듯 가죽장갑을 주머니에 거칠게 집어넣고 제 흰 정장에 튄 피를 쓱쓱 문지른다. 단정하게 넘긴 아이스 블론드가 흐트러지자 그는 약간의 신경질을 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어, HB. 24번가로 차 한 대만 보내줘.”

 

전화 속 상대는 나긋나긋한 어조로 금방 도착할 것이라고 재환을 달랜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 속 짜증을 눈치 챈 것이리라. 전화를 끊고 몇 분 후, 재환이 서있는 골목 입구로 차 소리가 났다.

그는 제 비싼 신발에 오물이 묻지 않도록 조심하며 은색 메르세데스에 타 부하가 건네주는 마티니 한 잔을 들었다.

 

“형, 다친 곳은 없지?”

 

재환을 마주보고 있는 남자가 마치 밥은 먹었냐는 느낌으로 말했다. 그는 조직 올림포스의 정보원이자 멤버인 HB, 홍빈이다. 노트북을 살피던 홍빈의 얼굴에 짧게나마 경악의 빛이 서렸다. 그는 노트북을 재환의 쪽으로 돌렸다. 푸른 화면엔 상혁과 나눈 대화창이 띄워져 있었다.

 

“제우스의 급습에 황금사과 거래처 A 조직 파괴, 제우스 조직원이 우리 조직으로 찾아왔다고?!”

 

재환은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듯 했다. 황금사과라면 소량에도 강렬한 효과와 최소한의 부작용, 대단한 가격에 적은 공급량으로 수요가 폭발같이 치솟았다는 마약이다. 모든 제조와 공급은 비밀스러운 조직, 제우스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그리고 올림포스 산하의 조직이 대신 판매한다.

 

“A 조직은 우리 산하에 있는 조직이잖아!”

“상부에선 명백한 도발로 받아들였어. 지금 급히 회의 중이래.”

 

재환은 술을 바닥에 흘릴 정도로 흥분하며 크게 외쳤다. 홍빈은  그에게 한 영상을 보여준다. A 조직이라면 재환도 가봤기에 외관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영상 속에 나오는 아지트는 완전히 박살이 나 처참한 상태였다. 시신은 이미 다 치워진 듯 핏자국만 있었다.

 

“조직원의 신분은?”

“이름은 차학연, 29세, 간부계열. 제우스의 급습 직후에 우리 건물로 찾아왔어. 요구사항은 아직 밝히지 않음.”

“제우스의 간부가 무슨 일로? 제 발로 죽으러 온 꼴 아냐?”

“배신일까?”

 

차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차는 은빛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둘은 문이 열리자마자 빠르게 나와 제 동료들과 합류한다.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어. 간부들이 조직 제우스의 파괴와 황금사과 유통 금지를 원해.”

 

여린 미성으로 재환과 홍빈을 반기는 은발의 사람은 L, 택운이다. 택운의 옆에서 재촉하는 이는 막내 H, 상혁이다.

 

“제우스 건은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겨졌어요. 형들, 빨리 움직이는 게 나을 걸요.”

 

넷은 빠르게 학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무채색으로 도배된 취조실 안에 학연이 앉아있었다. 재환이 바깥에서 지켜보기로 하고, 셋이 동시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우스의 간부가 왜 올림포스에 찾아온 거지? 너희 조직이 올림포스 산하의 조직을 급습한 걸 알기는 하나?”

 

홍빈이 물을 천천히 마시며 나른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학연은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홍빈을 똑바로 바라본다.

 

“알다시피 제우스는 위험해. 마약을 만들어서 팔질 않나, 정계 인사들과 뇌물을 주고받거나...워낙 큰돈이 오가서인지 멤버들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아. 늘 서로를 의심하고 뒤를 밟는다고.”

 

학연은 제 구릿빛 팔목이 그대로 들어나게 옷소매를 걷어올렸다. 홍빈이 중얼거린다.

 

“그런 이유로 배신을...?”

“보스만큼은 날 믿는 줄 알았는데, 어느새 보스가 날 의심하고 있었어. A 조직을 공격함과 동시에 제우스 내에서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졌지. 난 간신히 빠져나왔어. 비록 상처를 얻었지만 살아 있는 게 어디야?”

 

학연이 천천히 검은 라이더 자켓 밑의 니트를 들어올린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는 피에 푹 젖은 붕대가 둘러져있었다.

상혁은 밖에 있는 재환에게 의사를 불러 달라고 말한다. 그러자 학연이 사양하는 듯 손을 흔든다.

 

“난 제우스의 파멸을 원해.”

“믿었던 보스에게 당해서 복수하려는 건가?”

 

상혁은 조용히 말한다. 학연은 그를 쳐다보다 머리를 쓸어 넘긴다. 부드럽던 검은 눈이 분노와 증오로 이글거린다.

 

“맞아.  날 먼저 의심하고 공격했으니 나도 걔의 나락을 봐야겠어.”

"잠깐만. 나머지 애들은 나 따라와.”

 

조용하던 택운이 천천히 일어나며 손짓했다. 택운, 재환, 홍빈, 상혁은 취조실 바깥의 의자에 앉아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제우스가 누구인지,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확한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도 모르잖아. 저 사람의 말을 섣불리 믿어도 될까? 만약 제우스의 첩자라면?”

“잠깐만, 오래전 다른 조직의 문서를 뒤져보니까 차학연의 언급이 나오긴 해. 흑표범을 지키는 까마귀.”

“제우스의 보스를 흑표범이라고 부르니까 차학연은 보스와 매우 친밀한 관계라는 거네.”

 

상혁이 천천히 말했다.

 

“그렇지만 스파이라면 신분이 노출되거나 얼굴이 알려진 적 없는 사람을 보내지 간부라는 게 다 알려진 사람을 보내진 않잖아. 그리고 중요한 건 제우스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저 사람이 가지고 있다는 거.

우리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일단 차학연을 믿어야 할 것 같아요.”

 

홍빈은 상혁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같은 상황에서는 무조건 그를 믿어야한다. 택운은 팀원들의 표정을 살피고는 다시 취조실 문을 열었다.

 

“그래서 제우스의 위치는 어디지?”

 

학연은 자신을 믿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웃으며 입을 연다.

 

“X구역으로 진입하면 나오는 도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돼. 흑표범은 경계심이 강해서 거처를 자주 옮기거든.

부하들이 보스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게 아니라 두려움에 떠는 거니까 빈틈을 헤집고 들어가면 돼. 내가 옆에서 지켜본 바 걔는 절대 사냥감을 놓치지 않아. 총도 잘 다루지.”

 

“흑표범의 이름이나 체격, 생김새는?”

“이름은 김원식, 암호명은 R. 키는 나보다 커. 가면을 쓰거나 목소리만 노출시켜서 생김새는 잘 몰라. 음...보라색 머리라는 것만 알고 있어.”

 

택운은 녹음기를 끄고 잠시 뜸을 들이다 말한다.

 

“작전은 언제 실행하면 좋겠어? 너도 같이 가는 거니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상부에선 내일이라도 해결하라고 난리지만 컨디션 문제로 다 망칠 수도 있잖아?”

“난 내일이라도 괜찮은 걸? 진통제 몇 알 먹고 잠만 자면 돼.”

 

학연이 태연하게 말하며 다리를 꼰다. 홍빈은 그의 건방진 태도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자신도 고개를 끄덕인다.

 

“형, 우린 언제든지 상관없어. 다친 곳도 없고 요즘 컨디션도 최상이니까.”

 

택운은 모두의 동의를 얻어내고 시계를 가리킨다.

 

“내일 밤 24시. 작전을 개시한다. 새벽 5시까지는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할 수 있도록 하자. 차학연,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되지? 암호명이 있으면 얘기해.”

“나는 N. 너희들의 암호명은 이미 알고 있어. 무기는 언제 지급받으면 돼?”

“상혁이와 함께 창고에 다녀오도록 해. 우리는 이미 다 가지고 있으니 네가 쓰기 편한 걸 골라와.”

 

택운이 모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이번 작전은 쉽지 않을 것이다. 부상당하거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 무운이 따르기를 바란다. 그럼 해산.

택운과 오래 알고 지낸 재환은 그 말에 담긴 따뜻함과 걱정을 알아채고 괜히 코를 훌쩍였다. 그리고 내일 있을 중요한 작전을 위해 누구보다 신속하게 움직였다.

 

***

 

해가 저물고, 이들의 정장만큼이나 어두운 밤이 하늘에 카펫처럼 깔렸을 때. 다섯 남자는 검은 차 안에 타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재환은 가죽 장갑을 만지며 상념을 떨치려 노력했고, 홍빈은 모두가 사용할 이어마이크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상혁은 창밖을 응시하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택운은 그런 모두를 바라보며 회의실에서 들은 동선과 시간을 천천히 다시 떠올린다. 학연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칠흑같이 어두운 풍경을 바라본다.

 

“X구역 진입.”

 

사형선고처럼 무감각하고 텁텁한 문장이 들리자 모두 동시에 고개를 든다. 이제부터 5시간. 그 안에 임무를 완수하고 우린 무사히 돌아간다.

홍빈이 이어마이크를 나누어주자 전원 능숙하게 낀다. 차는 점점 깊숙한 골목으로 접어든다. 사람 없는 거리엔 네온사인만이 번쩍이며 빛을 발한다.

 

“여기야.”

 

골목 사이에 길이 있었다. 빛이 거의 들지 않아 입구만 조금 보일 뿐 끝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학연은 조용히 차에서 나와 어둠 속으로 성큼 성큼 걸어 들어갔다. 상혁이 학연을 따라 차에서 내리며 주변을 경계했다. 물웅덩이를 밟아 찰박찰박 소리가 나자 학연이 급히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해 보인다. 상혁은 제 눈에 의지해 최대한 침묵을 유지한 채 학연을 따랐다.

학연이 어느 문 앞에 멈춰선다. 상혁은 빨리 근처의 상자 뒤로 숨어 그를 지켜본다. 문고리를 일정한 간격으로 두드리니 천천히 문이 열리고 학연이 그 안으로 들어간다. 상혁은 들어가지 않고 초조하게 학연을 기다린다.

 

“형님...!”

“오랜만이야.”

 

문을 열어준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학연을 바라본다. 죽었다고 알려진 까마귀가 어떻게 여기에?

 

"당황스럽겠지만 이번 암호가 필요해.”

 

그는 약간 당황하다 학연의 눈치를 살핀다.

 

“형님, 제우스를 상대할 수 있는 조직이 온 겁니까?”

“맞아. 그러니까 빨리 알려줘.”

 

남자는 그의 눈을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이번 암호는 I526. 위치는 여기서부터 4블록 뒤, 5로 끝나는 검은 차가 주차된 곳 앞의 골목입니다. 문으로 들어가면 경비원이 5명 있습니다. 건물 구조는 이 종이를 가져가십쇼.”

 

남자는 책상 위에 있는 구조도를 건넨다. 학연은 지도를 받아들고 살짝 웃어보인다. 

 

“꼭 성공하세요.”

 

남자의 간청을 뒤로 하고 학연은 골목으로 나와 상혁에게 종이를 건넨다. 상혁은 닫힌 문을 바라보다 종이를 펼쳐본다.

 

“제우스의 건물 구조도인데 암호를 말하고 들어가야 돼. 암호는 I526. 위치는 내가 안내하지.”

 

학연은 이어마이크를 작동해 정보를 전달한다.

 

“제우스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 걸어서 가는 게 더 빨라. 그리고 차로 진입하면 눈에 띌걸.”

 

상혁과 학연이 골목에 입구에 다다르자 인영 셋이 보였다. 가로등조차 없는 거리라 앞에 있는 적조차 잘 보이지 않을 듯하다.

 

“내가 아는 골목이니 내가 안내할게. 골목 사이로 이동해서 서로 놓치면 안 돼.”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한 학연은 천천히 건물 사이의 틈새를 능숙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다들 날씬한 몸을 가지고 있어 딱히 끼이거나 가로막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벽에 밀착해 걷는다.

 

“쉿.”

 

선두로 걷던 학연과 택운이 뒤의 멤버들에게 멈추라는 사인을 보낸다. 제우스의 심장부에 가까이 왔는지 앞에는 수상해 보이는 인영 하나가 보였다. 권총에 소음기를 장착한 택운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머리를 조준했다. 숨이 막힐 듯한 정적에 모두가 압박받고 있을 때, 인영이 뒤로 쓰러지며 택운의 완벽한 실력을 보여준다. 조그만 소리도 내지 않고 사람을 쓰러트리는 모습이 마치 뛰어난 사냥꾼 같았다.

 

학연이 골목 밖으로 나가 거리의 표면을 보았다. 1블록 쯤 앞에 번호가 5로 끝나는 검은 차가 세워져 있었다.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모두에게 접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전하고 앞장서 걸어간다. 한 발 한 발 신중히 밟아 작은 구두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때, 침묵을 깨는 소리가 났다.

상혁이 밟은 캔이 아주 커다란 소리를 내며 찌그러졌다. 너무 어둡고 긴장해 발밑에 있는 캔을 못 본건지. 하지만 용서해주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 소리조차 희미하게 들리는 이 곳에서 상혁이 낸 소리는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모두가 숨조차 멈춘 채 들키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 다행히도 어딘가에 있을 부하들은 듣지 못했는지 정적만이 가득했다.

 

상혁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다시 천천히 걸었다. 만약 적이 들었으면 자신은 이미 죽어서 싸늘해졌을 것이다. 소름이 오싹 돋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앞에 있는 재환이 밟은 곳을 따라 밟았다.

 

“여기다.”

 

학연이 멈추어 선 곳은 어느 조직의 은신처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폐허가 된 건물이었다. 그럼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는 문으로 다가가 벨처럼 보이는 것을 누른다.

 

“I526.”

 

택운, 재환, 홍빈과 상혁은 손에 땀을 쥐고 뒤에서 학연을 지켜본다. 이윽고 문의 잠금이 풀어지는 소리가 나자 모두 숨을 죽인 채 문 쪽 벽에 붙어선다.

 

“하나, 둘, 셋.”

 

학연이 낡은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간다. 경비원 다섯. 모두 해치워야한다. 건물 안에도 빛이 없어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학연은 노련하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총을 쏜다. 소음기를 껴 두어 맞는 사람은 총알이 날아오는 지도 모르겠지. 5번의 단말마가 들리자 1층에선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와도 돼.”

 

셋은 경계하며 문턱을 넘었다. 까만 구두가 대리석 재질의 바닥에 부딪히며 청아한 소리를 낸다. 건물의 구조를 완벽히 외운 홍빈이 이어마이크로 말한다.

 

“지하엔 황금사과 제조소가 있고 3층에 보스의 방이 있어. 3층에 부하들이 많을 것 같으니 먼저 지하부터 다녀오자.”

 

모두 동의의사를 밝히고 홍빈이 앞장서 지하로 연결되는 계단의 문을 연다.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음성이 나오고 문이 열리는 즉시 공격당할 가능성이 있어 계단을 택했다.

계단엔 비상등이 켜져 있어 적어도 발밑에 뭐가 있는지는 보였다. 홍빈이 먼저 발을 내딛으며 차근차근 내려갔다.

육중한 회색 문이 제조소를 지키고 있었다. 재환은 문 틈 사이로 안의 상황을 엿보고 재빠르게 들어가 옆의 케비닛에 은신한다.

제조소는 1층과 다르게 매우 환한 전등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제 팔만한 총을 든 조직원들이 마약을 만드는 사람들을 경호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재환을 따라 택운이 들어왔다. 택운은 재환과 시선을 교환하고 양쪽의 조직원을 빠르게 쐈다.

차례로 동료가 쓰러져나가자 조직원들은 금세 택운과 재환이 숨은 케비닛을 발견하고 무차별적으로 쏘아댔다.

 

안의 상황을 지켜본 홍빈이 문 틈 사이로 뭔가를 던지고 들어갔다.

택운과 재환은 그게 연막탄이라는 걸 보자마자 알아차리고 남은 조직원들을 해치웠다.

하얀 연기가 온 방을 가득 채우자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출구를 찾아 헤맸지만 홍빈의 총알에 맞아 곧바로 쓰러졌다.

 

상혁이 마지막으로 들어와 황금사과를 만들던 장비와 기계에 폭탄을 부착했다. 시한폭탄의 시계는 20분에 맞춰져있다. 특별히 위력이 쎈 폭탄을 부착했으니 이 안의 문서도 시체도 모두 날아갈 것이다.

 

20분 안에 흑표범을 죽이고 건물을 벗어나야한다.

 

택운은 아까의 접전으로 다친 팔을 지혈하고는 묵묵히 일어났다. 총알이 꽤 깊게 스쳐지나간 것 같지만 지금은 그 어떤 치료도 할 수 없다. 그걸 잘 알기에 아픔을 속으로 누르고 가장 앞에서 계단을 올라간다.

재환은 탄창을 갈아끼우며 또 발생할 총격전을 대비한다. 학연은 아까 조직원에게서 주운 총을 양손에 들고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따른다. 3층을 알리는 회색 표지판 밑의 회색 문이 보인다.

택운이 다쳤으니 이번 선두는 상혁이다. 상혁은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문 옆의 두 적을 처치한다. 쓰러지는 소리가 크게 울리자 주변의 조직원들이 몰려들어 문을 에워싼다. 상혁은 심장이 세차게 뛰는 걸 느끼며 문을 열려고 한다. 그때, 홍빈이 상혁의 옆에 서며 보조를 맡는다. 숨을 들이마시고 문을 연다.

총알이 빗발치지만 상혁과 홍빈은 간헐적으로 문을 열었다 닫으며 정확한 공격을 했다. 총알의 힘으로 문이 뚫려버릴 것 같았으나 재환이 합세하고 적들의 총알이 떨어져 상황은 쉽게 종결되었다.

재환은 문을 완전히 열고 양쪽의 코너를 주시하며 경계의 자세를 늦추지 않았다.

 

“저 코너 중 하나가 보스의 방으로 가는 길이야. 그럼 갈라질까?"

 

홍빈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반대한다. 부상자가 발생했으니 더 위험할 텐데. 시간이 없더라도 다같이 움직이는게 좋을 것이다. 택운은 자신때문에 홍빈이 반대하는 걸 알고 손을 내저어보인다. 자신은 괜찮으니 갈라져도 괜찮다.

피가 멈춘 듯하자 택운은 상혁과 함께  왼쪽 코너로 가겠다고 말한다. 학연은 무표정하게 쳐다보다가 홍빈과 재환이 오른쪽 코너로 가는게 어떻겠냐고 묻는다. 저쪽은 부상자가 있으니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하지 않겠느냐며. 택운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고 왼쪽 코너의 벽에 붙어 걸어간다. 홍빈은 그런 택운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임무에 집중한다.

 

학연은 얼굴이 창백해진 택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속삭인다.

 

"굉장히 조용하다. 그치."

 

택운은 영문을 몰라 대꾸도 하지않고 총을 만지작거린다. 상혁이 뒤쳐지는 택운과 학연을 제치고 앞으로 나가 코너를 천천히 돈다.

 

"너희, 나 너무 잘 믿더라. 신기하게도."

 

학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택운의 뒷목을 잡았다. 택운은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학연의 손을 붙잡지만 학연이 더 빨랐다. 권총의 뒷부분으로 그의 뒷머리를 내려쳐 기절시킨다. 택운은 짧은 비명도 내지르지 못 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다. 상혁은 그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어두운 방으로 한 발자국 걸어들어간다. 학연은 그런 그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가 택운은 뒤에 남았노라고 속살거린다.

 

"택운이형이?"

 

한번도 뒤로 처지는 적 없던 택운이 그럼에 상혁은 약간의 의구심이 들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그도 많이 지칠거라 생각하고는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 정신을 모은다. 학연은 자신보다 키가 큰 상혁을 올려다보다 옅게 웃는다. 그리고 우아하게 발을 건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상혁은 큰 소리를 내며 앞으로 꼬꾸라진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학연을 황망하게 올려다본다. 자신을 일으켜 줄 줄 알았지만 학연은 상혁에게 총구를 들이민다. 그게 어떤 뜻인지 아는 상혁은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들지만 학연이 더 빨랐다. 그는 가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상혁은 그대로 어깨에 총을 맞고 바닥에 완전히 쓰러진다. 끔찍한 고통에 처절한 비명을 지르는 것 밖에 하지못했다. 어째서? 왜? 

학연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바라보다가 발로 권총을 멀리 차버린다. 그리고 태연하게 오른쪽 코너로 향한다.

 

홍빈과 재환은 누구것인지 모르는 비명을 듣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러다가 그것이 막내 상혁의 것이라는 걸 알고 얼굴이 단숨에 창백해졌다. 당장 상혁을 도우러 달려가고 싶지만 임무를 꼭 완수해야한다. 보스를 처치할 때까지 상혁과 택운, 학연이 버텨주길 바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그때, 가벼운 발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 학연이 서 있었다.

 

"사...상혁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재환이 상혁의 안부를 묻는다. 뭐가 어떻게 되었길래 저런 비명을 지르는거지?

 

"응? 한상혁이 왜."

 

학연은 걱정하는 둘을 이해가 안된다는 듯 쳐다보며 손을 들어올린다. 천진난만한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혁이가 너희 둘 걱정된다고 보낸건데...?"

 

홍빈은 입술이 떨리는 걸 느꼈다. 저 사람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의 직감은 늘 정확했다. 차학연은 지금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고있다. 아니라면 아까 상혁의 그 비명은 무엇이며 반대편 코너가 쥐죽은 듯 조용한 이유는 대체 뭔가?

재환도 홍빈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손을 신경질적으로 만지고 있었다. 홍빈은 자신이 위기에 처해있음을 알고 빠르게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차학연이 배신한 게 틀림없다. 여기서 그를 죽이면 더 불리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 재환이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하자 홍빈도 빠르게 재환의 시선을 따랐다. 갑자기 방 안이 은은하게 밝아져 앞이 그나마 보였다. 앞엔 철로 만들어진 뼈대 위에 붉은 천을 씌운 의자가 있었다. 그 의자에 앉아 있는 이는...보랏빛 머리의 흑표범.제우스의 보스 원식이였다.

 

나른하게 웃으며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뜬다. 동물의 것처럼 번들거리는 눈이 재환과 홍빈을 내려다 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대면이지만 홍빈은 온 몸이 얼어붙어 총을 들 기력조차 없었다. 재환이 용기를 내 자신의 권총을 들고 겨누지만 학연이 뒤에서 총을 쏴 실패한다. 학연의 총알은 재환의 다리에 명중해 그는 그저 앞으로 넘어져 비명을 지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홍빈은 제 동료의 끔찍한 모습을 보며 패닉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런 홍빈을 보며 원식은 옅게 웃는다.

 

"이런 자들이 우릴 없애려했다고?" 

 

그 웃음엔 명백한 비웃음과 조롱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으나 쓰러진 재환과 굳어버린 홍빈은 그 어떤 대응도 하지 못했다. 재환이 흘린 피가 제 구두에 닿는 것을 본 홍빈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원식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원식은 그를 가볍게 피해 제가 가진 총으로 맞춰버린다. 홍빈은 팔이 불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다. 올림포스 멤버들의 절망을 모두 지켜본 학연은 곱게 눈을 접어 웃는다. 

 

흑표범의 곁으로 다가가 의자에 걸린 왕관을 쓴다. 그 당연한 움직임은 우아하고도 신성했으나 왕관을 쓴 배반자는 지옥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미안하지만 사실 내가 제우스였어."

 

노랫말을 읊듯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쓰러진 홍빈과 재환에게 속삭인다. 출혈로 인해 정신이 흐려짐에도 재환은 권총을 잡아 학연의 머리에 겨누지만 마지막 발악마저 원식이 쏜 총에 의해 묵살된다. 그래도 폭탄이 있으니 괜찮을 거라 다짐하지만 학연이 내뱉는 말에 의해 무력하게 고개를 떨어트린다. 

 

"폭탄도 설치했었는데 그거 내가 멈춰놓고 나왔어. 그러니까 너희들의  20분은 처음부터 흘러가지 않았던 거야."

 

재환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에 숨을 쉬지 못하며 죽어간다. 이 곳에 온 올림포스의 모두가 차학연의 배반으로 쓰러진 것이다. 

 

조직 제우스의 까마귀이자 흑표범의 머리에 앉은 왕. 차학연은 제우스 그 자체였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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