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i want
스티
@leo_chu_ti
일주일에 사흘 이상은 흐리고 비가 오는 론시티의 시민들에게 맑은 날이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해져야 하는 때이다. 물론 꼭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겠으나 어두침침한 날씨에 정비례한 범죄율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살아가는 게 얼마나 우울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었으므로, 어느샌가 너도나도 쾌청한 날엔 기쁜 일만 있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그 바람은 대부분 이루어졌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이쯤인가….”
오늘은 모처럼 화창한 날씨였다. 그리고 어쩐지 종일 운이 좋은 날이기도 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방향과 각도를 보면 여기가 맞아.”
사건이 일어난 곳에선 언제나 말단이 고생하는 법. 보니타스 패밀리의 자·타칭 잡무처리반 세 명은 상부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와 있었다. 한참 건축 중으로 보이는 빌딩 3층의 내부는 회색빛 시멘트 기둥과 철근 자재들로 가득했고 그곳에서 그들은 단서를 찾아야만 했다.
“보스는 괜찮으실까?”
“글쎄…. 바로 구급차가 왔다니, 이제 뒷일은 의사들의 몫이겠지. 그렇게 가고 싶다 노래 부르던 식사 모임에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은 몰랐네.”
기둥 주변을 살피던 라비의 물음에 홍빈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오늘 열린 보스의 식사 회동은 보니타스 패밀리의 정기적인 행사였다. 시내의 레스토랑에서 이뤄진 이 모임은 겉보기엔 거창하기만 할 뿐이지만 대다수의 -말단을 제외한- 조직원들이 참여해 결속을 다지는 중요한 자리였다. 20년 가까이 치러왔던 의식이고 식사 외엔 별다른 일이 없는 자리였으므로 그곳에 있던 누구도 보스를 향해 총알이 날아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썩 조용하진 않았으나 비교적 차분했던 레스토랑의 분위기는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유리를 뚫고 내부로 들어온 총알은 모두의 중심에 앉아있던 패밀리의 보스, 저스틴의 흉곽에 정확히 박혔고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그의 이름을 외치며 테이블로 뛰어들었다.
“그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도 보스를 지키지 못했다니….”
기둥을 치며 침통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하던 라비는 퍼뜩 옆을 돌아보았다. 아직 유리틀을 해 넣지 않은 창문 앞에서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는 사람. 그는 이곳에 올라오는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레오형..”
라비는 레오의 이름을 부르며 창가로 다가갔다. 단서를 찾는 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오랜 시간 함께 해왔던 동료도 그만큼 중한 그였다. 라비가 레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독이자 어느새 그들 곁으로 온 홍빈도 말을 이었다.
“괜찮으실 거야.”
“…….”
레오의 오늘은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작은 창문 가득히 햇빛이 들어오는 느낌이 좋았다. 프라이팬의 서니사이드업은 성공적이었고, 말단인 자신이 패밀리의 식사 모임에 함께할 수 있게 된 일은 전에 없던 행운이었다. 피오니 스트릿의 레스토랑으로 향하는 내내 신호 한번 걸리지 않은 것 역시 작지만 흔하지 않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가깝다면 가깝고 멀다 치면 한없이 먼 사람. 론시티를 좌지우지하는 보니타스 패밀리의 처음을 연 인물, 동경의 대상인 저스틴을 만나는 일은 레오에게 무척이나 가슴 벅찬 일이었다. 순탄치 않은 유년 생활을 겪으며 홀어머니와 함께 밑바닥 생활을 하던 그가 그나마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보스 덕분이라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얼굴을 자주 보거나 이름을 불리지 않더라도 같은 패밀리에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런데… 레오는 당시의 상황을 생각하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식사 동안 가드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갈 수 있었던 자리. 레스토랑 2층 대형 홀의 창문에선 햇살이 내리쬐었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 순간엔 모두가 바라던 행복한 날이라는 감정에 고무되어 조금 느슨해졌는지도 모르겠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동시에 테이블 아래로 쓰러지는 보스의 모습, 급하게 그의 곁으로 다가가 그를 감싸고 주변을 둘러보는 조직원들, 개중에 자기는 살겠다고 몸을 숨기는 나이든 이들까지... 입구 쪽을 지키고 있던 레오는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미처 손을 쓰지 못한 채 그 장면들을 고스란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보스에게 달려가는 길은 까마득하게 느껴졌고, 자신이 총에 맞은 것도 아닌데 그동안 살아왔던 인생이 비디오처럼 그려지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그가… 보스가… 저스틴이 죽기라도 하면…….
“형….”
“미안, 잠시 딴생각을 했네. 계속 찾아보자.”
레오는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라비의 손을 두어번 두드리더니 이내 밖을 보던 몸을 틀어 나머지 창문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홍빈과 라비도 각자 흩어져 창가를 보았다. 이 곳에서 저격한 것이라면 어딘가에는 총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서 무슨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레스토랑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창 4개의 주변 어디를 살펴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말이 되나? 그 빠른 시간에 모든 흔적을 지우고 갔다고?”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한참을 창틀 구석까지 살피던 홍빈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레오와 라비의 생각 역시 홍빈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상부의 명령을 받아 이곳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분. 레스토랑으로부터 사방 한블럭까진 모두 패밀리의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때문에 현장에 있던 레오가 밖에 있던 라비와 홍빈을 만나 이곳까지 빠르게 올 수 있었던 것인데 그동안 수상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심지어 흔적까지 다 지우고 나온 사람을…
“용병일지도 모르겠다.”
“론시티에? 용병? 하~?”
패밀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 ’Lacrima’는 론시티 보니타스의 명성만큼이나 그들에겐 안전한 곳이었다. 도시 내에서 보니타스 패밀리에 반하는 자들은 전무하였고 감히 수십 명의 조직원이 참여하고 있는 자리를 망칠 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그러한 힘을 가진 위치에 있으면서도 다른 패밀리들 간의 안전과 이익을 위한 협약을 맺어 수년째 나름의 평화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용병이라니… 홍빈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레오를 바라보았다. 라비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다. 용병까지 들이며 굳이 협상조약을 깨려는 멍청이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형, 힘든 건 알겠는데 조금 비약적이다.”
“자, 자~ 너무 가지 말고 일단 최대한 찾아보자. 창가에 없다면 오가는 동선 어딘가에 뭐라도 있겠지.”
“너네…. 자연스럽게 날 무시한다?”
레오의 용병설(?)에 오히려 무겁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그의 의도야 어쨌든지 간에 동생들은 이때다 싶어 다소 오버스러운 손동작으로 레오를 도닥거렸다. 두 사람의 말대로 조직과 용병은 너무 안 어울리는 조합이기는 했다. 마음이 조급하니 작은 실마리도 확대해석하게 되는 경향이 있군. 레오는 설핏 웃고는 다시 마음을 잡고 주변을 살피기로 했다.
건물 안의 온갖 자재들과 쓰레기, 먼지들 때문에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자 화창하던 날씨도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워졌고, 내부를 몇 번씩 돌아다니던 세 사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오늘 여기서 아무것도 찾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한참 동안 바닥을 살피다가 앓는 소리와 함께 허리를 편 라비는 문뜩 뇌리에 스쳐 지나간 생각을 물었다. 물론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생각만 해도 아득한 상황에 잠시간의 정적만 흘렀을 뿐.
“… 철근 아래도 다 살폈니?”
“날이 어두워져서 잘 보이지 않더라고.”
어느덧 저녁을 향해 가는 시간과 더불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 때문에 난항을 겪고 있던 차였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단서가 있을 리 만무한 철근 더미의 아래, 벽돌의 틈새까지 살펴볼 요량으로 레오는 홍빈에게 물었다.
“휴대폰 플래시 없어? 난 아까 레스토랑에서 휴대폰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레오는 다급한 상황에 어디서 떨어뜨렸는지도 모를 휴대폰을 생각하며 괜스레 재킷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다.
“아~! 그 방법이 있었네.”
평소 전화할 때와 게임을 할 때 말고는 휴대폰을 잘 사용하지 않는 홍빈은 뜻밖의 발견이라도 한 듯 손뼉을 치고는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 타이밍 보게. 혁한테 전화가 왔는데? 잠깐만.”
마침 진동이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한 홍빈이 양해를 구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혁…. 후계자의 오른팔이자, 다음 대의 언더보스가 될 인물인 그와는 잡무처리를 위해 만나는 것 외에 개인적인 친분은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의 용건이라면 아마도 보스와 관련된 일일 것이다.
“여보세요.”
“형, 그럼 일단 내 휴대폰으로 하자.”
홍빈이 전화를 받는 동안 라비가 휴대폰을 꺼내어 플래시를 바닥에 비추었다. 레오는 홍빈의 통화내용이 신경 쓰이는 한편,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상황도 상황이기에 철근 더미 앞에 엎드렸다.
“아, 레오 형은 아까 휴대폰을 잃어버렸다고 하더라고.”
“뭐 좀 보여?”
“아…”
불빛이 닿아 겨우 보이기 시작한 아래는 아니나 다를까 돌멩이와 먼지로 가득했다. 기대 없이 시작한 일인지라 레오는 이에 실망한 기색도 없이 그저 의식적으로 팔을 넣어 휘휘 둘러보았다. 손바닥에 잡히는 작은 돌, 모래들….
“형은 같이 있어. 무슨 일인데 그래?”
“레오형? 뭐 좀 있어?”
“…!”
두어 번 바닥을 쓸자 손가락 사이로 돌이나 먼지의 질감과 다른 이질적인 조각이 느껴졌다. 레오는 재빨리 그 조각을 손에 쥐고 꺼내 올렸다. 어두운색의 재킷과 바지가 흙모래로 하얗게 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먼저 조각에 묻은 먼지를 털던 레오는 그것이 어딘지 낯익은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이건….”
“뭐야, 그게 뭔데? 단서를 찾았어?”
“뭐?! 보스가?”
“??!!”
겨우 찾은 단서에 기뻐할 틈도 없이 홍빈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라비와 레오는 일제히 홍빈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망연자실하게 듣고만 있던 홍빈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지 않은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쳤다.
“… 무슨 일이야…보스가 왜?”
어쩌면 홍빈의 입에서 보스라는 말이 들렸을 때 순간적으로 짐작했는지도 모르겠다. 레오는 감정적으로 다그치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통화내용을 물었다. 어쩐지 목소리엔 물기가 섞여 있는 듯도 했다.
“보스가….”
비가 온다. 아직 이른 오전이지만 바깥은 마치 밤이라도 된 듯 컴컴하다. 주룩주룩 내리는 빗소리가 너무 크고 슬퍼서 서럽게 우는 것만 같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잠에서 깬 후 몇 시간을 침대에 걸터앉아 비가 오는 것만 바라보던 그는 사이드 테이블에 있는 시계를 확인하고 그제야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 하나 켜지 않은 실내는 어두웠고 얼핏 보이는 곳곳엔 술병들이 쓰러져있었다.
‘형, 내일은 하관하는 날이니까 꼭 와야돼.’
어젯밤 왔던 라비의 신신당부가 떠올랐다. ‘그날’ 이후 레오가 집 밖으로 나오지 않자 걱정이된 라비와 홍빈이 집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당연하지만 말단인 저는 보스의 마지막을 볼 수 없었다. 병원 주변을 서성이다 집으로 돌아온 것이 사흘전. 부검을 마친 후 장례예식은 패밀리의 중심간부들과 조용히 치뤘다고 했다. 그래. 적어도 안장하는 모습은 봐야지. 터덜터덜 욕실로 향한 레오는 세면대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두워도 또렷이 보이는 부어오른 눈이 우스웠다. 이 모습을 어제 두 사람이나 봤다는거지? 피식 하고 실없이 웃은 그는 수도의 콕을 열었다.
보스가 죽었다.
생각해 보면 별로 놀라울 것도 아니었다. 온갖 불법적인 일을 저지르는 폭력집단의 대장이 죽는 것은 막연하나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상상과 실제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 함께 살던 레오에게 청소년기는 한없이 우울한 시기였다. 어려서부터 계속된 지독한 가난은 자연스럽게 영양실조로 돌아왔고 열다섯 무렵엔 또래보다 작은 덩치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예삿일이었다. 저스틴을 처음 만난 때도 동네 녀석들에게 한차례 얻어맞은 날이었다. 집에 들어가면 속상해하실 어머니가 아른거려 집 밖을 서성이고 있을 때 웬 시커먼 아저씨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제가 무슨 생각으로 겁 없이 그들을 따라갔는지 모를 일이었다.
- 네가 노라의 아들 레오냐.
- 그런데요. 아저씬 누구세요?
- 네 어미의 오랜 친구이지.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때 만난 저스틴은 레오에겐 구세주와 같았다.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기름지고 맛있는 음식도 주었다. 사실 그가 누구인지는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평범하게 누리던 것들이 그시절의 레오에겐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기에 부자 아저씨를 또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던 것 같다. 다행히 그는 이후에도 저스틴을 만날 수 있었다. 두 번째 만난 날은 옷을 사주었고, 그 다음부턴 용돈을 주기도 하였다.
아저씨가 원하지 않아 어머니에게는 비밀로 했던 만남이 한 해, 두 해를 지나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그 시간 동안 레오는 키도 크고 건강해졌다. 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것도 더 이상 우울하지 않았다. 열아홉이 된 그는 저스틴의 저택에 머무는 사내들에게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고 자신을 구원해준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평범하지 않은 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자신이 사는 도시를 아우르는 마피아의 보스일 것으로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그 얘길 들어도 크게 와닿지는 않았던 것 같다.
- 요즘 어딜 그렇게 자주 가는 거니?
모처럼 날이 맑았던 어느 날,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던 중이었다.
- 아는 형님들에게 운동을 배우고 있어요. 복싱이나 호신술 같은 것을 배우는데 재미있어요.
- 엄마는 네가 힘쓰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과일가게 앞에서 과일을 고르던 어머니가 무심한 듯 건넨 말에 레오는 그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는 들은 적 없던 이야기였다. 물론 전에는 스스로가 힘을 쓸 수 있다는 생각조차 가져본 적 없긴 했지만…….
- 네가 건강해져서 좋긴 하다만, 아무래도 그런 건.. 조금 위험하잖니….
- 어머니, 그건…
- 레오?!
뜻밖의 갈등에 당황하던 찰나 레오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는 저스틴의 저택에서 종종 만났던 또래 친구인 엔이 있었다. 그는 저스틴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보니타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레오와 같은 나이지만 어른스럽고 차분한 모습이어서 내심 동경하는 친구이기도 했다.
- 엔! 무슨 일이야. 이 시간엔 보통 집에 있지 않았어?
- 오늘은 모처럼 론시티에 해가 들은 날이니까, 기분전환을 할 겸 몰래 나왔지.
- 하하, 네가 그럴 때도 있구나. 나는 어머니와 장을 보러…. 아 참! 어머니, 이쪽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반가워 밝게 웃으며 소개를 하려던 레오는 잔뜩 일그러진 표정의 어머니를 보고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치…친구라고?
귀신이라도 본 듯이 파랗게 질린 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상하다고 느낀 레오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네. 운동하는 곳에서 만난 친구예요. 엔이라고.
- 운동하는 곳…. 엔….
자신이 수년째 저스틴을 만나고 있는 것은 어머니께 비밀이었다. 저스틴 본인이 원하지 않기도 했고, 그가 마피아의 보스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레오 저조차도 당당히 밝히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에둘러 운동하는 곳에서 만난 친구라고 변명했지만, 어머니의 표정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엔 폴스라고 합니다.
- 폴….폴스……. 그래요. 폴스군. 미안하지만 내가 오늘은 조금 바빠서 이만 가봐야겠군요. 가자, 레오.
- 네? 아.. 앗 미안 엔! 다음에 봐.
급작스레 레오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이동하는 어머니에 당황하면서도 엔에게 인사하는 것을 잊지 않은 레오는 그와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며 어머니를 따라갔다. 엔은 퍽 마음에 드는 친구였다. 마피아는 불법과 불의의 집단이라고 생각했지만 레오가 본 엔은 올곧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저스틴의 집에서 그렇게 숱한 조직원들을 봤어도 그 집단이 마피아라는 것에 현실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집근처에 도착하고 나서야 레오는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어머니의 손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녀에게 일어난 일이라곤 친구를 소개해 준 것 뿐이다. 첫인상이 서글서글하고 깔끔하기 때문에 자신이 느꼈던 것처럼 어머니도 엔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 그곳엔 가지 않는 게 좋겠구나.
-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어차피 안정된 생활이라는 것에 미련을 둔 적은 없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지낸 탓에 하루 먹어 하루 살게 된다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장에서의 일 이후 벌어진 상황은 당황스러우면서도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요 몇 년간 그새 편안함에 안주하게 되어 자신의 처지를 잊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레오는 생각했다.
- 그래, 이사를 간다고…?
- 네. 어머니가 그리하자고 하셔서요. 작별인사를 드리러 왔어요.
- 조금 갑작스럽구나.
레오의 어머니는 느닷없이 이사를 한다며 집을 알아보셨다. 론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면 좋겠다 하더니 결국 교외의 어느 마을에 작은 방을 얻은 것이었다. 불과 며칠만의 일이었다.
레오는 그동안 신세를 진 저스틴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저택으로 찾아왔고 정말 오랜만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언제나 바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몇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아야 한다고 들었지만, 레오가 만나기를 원하는 날엔 어김없이 저스틴이 먼저 자신의 서재에서 기다리곤 했다.
- 제 생각엔 시장에서 엔을 만난 뒤로 그러신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어요. 아니면 다른 일이 있었을 수도 있고요.
- 엔을…?
- 네. 엔의 이름을 듣고서 갑자기 그러셨거든요.
- …그래. 그럴 만 하구나.
조용히 중얼거린 저스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서재 한편에 있는 서랍에서 잠금장치가 달린 상자를 꺼냈다. 영문모를 소리에 멍하니 자리에 앉아있던 레오는 자신의 앞에 상자를 내려놓는 그를 보며 네? 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저스틴은 대답 없이 재킷 안 주머니에서 작은 열쇠를 꺼내 상자의 뚜껑을 열 뿐이었다. 어두운색의 나무 상자는 면면마다 음각으로 세밀한 조각이 되어 있었고 각 모서리에는 금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잠금장치까지도 장인이 조각 했으리라생각되는 정교한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들어있는 두 자루의 나이프가 보였다
- 이것을 이렇게 빨리 주게 될 줄은 몰랐지만….
- …?
저스틴이 두 자루의 나이프 중 하나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 그가 들고 있는 나이프는 그리 크지 않은 크기의 잭나이프였다. 날을 폴딩 해서 사용하는 것은 잭나이프의 그것이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디자인의 것은 아니었는데, 날이나 손잡이의 형태가 마치 단검 같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두 자루는 한 쌍인 모양으로, 그 손잡이가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어 고가의 예술작품과도 비견할 만했다.
- 굉장히 멋있는 칼이네요.
- 패밀리를 만들 당시 사용하던 것들이지. 지금은 쓰지 않는 물건이야. 언젠가 이 나이프를 받기에 합당하다 생각되는 이가 나타난다면 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한 자루는 네가 갖거라.
저스틴은 손에 든 한 자루를 레오에게 건넸다.
- …제가요?
- 멀리 가게 되면 보지 못할 테니 기념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 그렇지만….
엉겁결에 손에 쥔 나이프를 살피던 레오는 말을 잃었다. 얼핏 봐도 이 나이프는 제가 가져도 될 만한 금액과 가치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까이서 본 나이프는 생각보다 더 훌륭했다. 검은색 바탕에 금과 은으로 새겨진 가는 곡선이 화려하면서도 우아했고, 손잡이 끝에는 독특한 모양으로 컷팅된 붉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보석을 감싸고 있는 장식에는 ‘J’라는 이니셜이 적혀있었는데 오로지 저스틴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보물임을 뜻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나는 이 나이프에 더는 미련이 없다. 언젠가 때가 된다면 나머지 한 자루도 엔에게 물려줄거지. 아니, 어쩌면 미련이 남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구나.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말이야. 하하핫.
“형 우리 왔어.”
레오가 적당히 세면을 마치고 옷장에서 검은색 정장을 꺼내 입는 찰나 홍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옛 생각을 하며 울적하던 머릿속이 현실로 돌아왔다.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보니타스 패밀리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온갖 임무로 바삐 보냈기 때문에 그동안은 우울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그다. 오늘처럼 옛날 일을 회상한 것도 정말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일어나있었네.”
“굳이 뭘 또 왔어, 안 그래도 오늘은 갈 거였는데….”
부러 튕기듯 이야기했지만 자신을 걱정해서 와준 동생들이 못내 고마워 레오는 집으로 찾아온 홍빈과 라비의 머리를 한 번씩 툭 하고 쓰다듬었다. 자신이 패밀리에 들어온 이후 가족같이 지내온 동생들이었다. 잡무처리반으로 지내며 산전수전 다 같이 겪다 보니 서로 챙겨주고 도와주는 것은 일상이 되었다. 어쩌면 이들을 만난 것도 저스틴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비약일까? 레오는 작게 웃으며 현관을 나섰다.
론시티의 서쪽 외곽에 위치한 오베스트 공동묘지에는 이미 많은 이들이 모여있었다. 대다수가 갑작스러운 보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원통함으로 며칠이 지난 오늘까지도 과열된 분위기였지만, 하관식을 앞두고 있어 정숙한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어두워서 예식을 기다리는 이들을 우울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 같았다.
식이 시작되고 관을 내리기 전 목사가 기도했다. 이 세계에서 종교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저마다 진중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렸다. 허망하게 보낸 마지막이지만 내세에서 행복하길 기도하는 이들이 있는 한편, 아직 실마리를 찾지 못해 오리무중인 범인을 잡길 신에게 바라는 이도 있었다. 레오는 전자도 후자도 아니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
간략한 예배를 마치고 나자 관은 미리 파놓은 구덩이 안에 안치되었다. 잠시 뒤 저스틴의 가족들이 손에 장미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곳에는 그의 오래전 친구인 엔도 있었다.
- 혁…이라고 했었나…? 요?
- 네.
- 저기, 내가 엔을 만나고 싶은데….
스물여섯이 되던 해, 패밀리의 일원이 되어 돌아온 보니타스의 분위기는 꽤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니, 달라진 것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 엔님은 지금 ‘Lacrima’와 ‘Aurora’의 경영문제로 경영진을 만나고 계십니다.
- 그럼… 언제쯤 끝날까요? 오랜만이라 꼭 인사를 하고 싶은데….
- 이 미팅 건이 끝나면 에스트 항구에 수출입 품목 확인 하러 가셔야 합니다.
일단 열아홉 그 당시에 저택에서 본 적이 없던 청년이 있었다. 혁이라고 첫 만남에 이름을 밝힌 그는 자신보다 앳된 모습이었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있어 보였는데, 이미 후계자로서 패밀리의 일을 하고 있던 엔을 보좌하며 그의 비서 또는 오른팔로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워낙 단호하게 말을 하는 통에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떠났지만 레오는 그날 이후로 꽤 오랜 시간 엔을 만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나 그를 다시 본 것은 패밀리의 식사 모임 때였다. 자신은 신입이었기 때문에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레스토랑의 입구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7년만인 엔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변해있었다. 외모가 아닌 풍기는 느낌이 그랬다. 어릴 적 그와 나누던 수다, 함께 먹던 식사 등 그 당시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 어느 것도 그에게는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려니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지만 시선은 일순간에 거두어졌다.
- 이야… 살벌하다 살벌해. 벌써 보스 행세네.
- …? 무슨 소리야?
레스토랑 앞에서 함께 대기하던 조직원 하나가 혀를 차며 말하는 소리에 레오가 궁금한 듯 물었다.
- 엔 말이야. 보스가 정식으로 후계자에 세운 후부터 난리도 아니거든. 패밀리 사업들을 싹 다 본인이 관리한다고 하고 몽땅 뒤집어엎는 중이라나 봐. 이제 자기가 보스다 이거지.
- 잘 이해가 안 가는데, 후계자이니까 관리를 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 답답한 소리 하네. 지금 패밀리의 돈줄을 다 엔이 잡는 거라니까? 소문에는 보스가 사유재산에 가보까지 싹 다 넘겼다더라고. 보스도 무슨 생각이신지 참…
어쩌다 만난 파트너가 참 말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레오는 적당히 흘려듣기로 했다. 엔이 후계자가 되어 패밀리를 관리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변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일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았고, 여전히 저보다 더 어른스러운 그가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 ……근데 그 가보 중에 하나는 글쎄 무려 ‘양날의 저스틴’이 살아 숨 쉬는 증거였다는 거야.
- 양날의 저스틴?
계속되는 스토리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와중에 조금 우스운 닉네임이 들려서 레오는 저도 몰래 자신의 파트너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주절주절 떠들던 이는 더욱 신이 나서 과장된 제스쳐를 사용해 가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보니타스가 생기기 전에 보스를 그렇게 불렀다고~! 이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가 휘두르는 두 자루의 잭나이프는 아직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는데, 바로 그 잭나이프를 엔에게 가보로 물려줬다는 거지. 그 소중하고 기념비적인 물건을 아들이 아니면 누구에게 주겠냐마는 그에게 주는 것은 개인적으로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라는데 나도 보스의 아들이 되어 받을 수 있다면 좋겠군! 물론~! 소문으로만 들려오는 얘기라 그 나이프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야. 와하하핫~!
“이제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하려 합니다.”
식을 주관하던 목사의 말에 맞춰 장미를 놓는 모습을 바라보던 레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엔에게 향했다. 일찌감치 헌화를 마친 엔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슬픔인지 좌절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감정인지… 그의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네가 먼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레오는 눈앞에서 일렁이는 풍경을 미처 막지 못한 채 도르륵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늘만큼은 엔이 자신의 친구, 열아홉 살 그때의 엔이길 바랐다. 보니타스의 차기 보스가 아닌 저스틴의 아들인 엔이길 바랐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조금이라도 나눌 수 있게… 그러길 바랐다…….
“레오형?”
“형, 울어?”
갑자기 눈물을 흘리는 레오를 발견한 홍빈과 라비가 깜짝 놀라며 다가왔다. 조금 부끄러운 상황이었지만 레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없이 울었다.
식이 끝난 후 사람들은 다들 자리를 떠났지만, 레오는 관을 완전히 땅에 묻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둡던 하늘에서 다시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금세 굵어진 빗줄기가 가만히 서 있는 레오를 온통 적시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몸이 다 젖도록 세차게 자신을 때리는 비를 맞으면서도 레오는 그곳을 떠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가 죽었다.
보스가 죽었다.
내 아버지가 죽었다….
차기 보스가 된 엔은 그동안 보니타스 패밀리가 하고 있던 사업을 하나 둘 씩 접기 시작했다. 론시티 뿐만 아니라 해외까지 밀수출·입이 행해지던 마약사업이 제일 먼저였다. 공권력도 미처 손대지 못할 정도로 대규모였고, 패밀리의 가장 큰 수입원이기도 했기 때문에 조직원들의 반발이 컸으나 엔의 입장은 완고했다. 심지어 이 일은 엔이 후계자로 사업들을 맡게 되었을 때부터 조금씩 준비되고 있던 것이었다.
“너무 심한 것 아니예요, 엔?”
“무슨 소리야. 이 일을 접겠다고 했을 때 제일 좋아했던 것은 너잖아.”
저스틴이 저택에 있을 때 주로 머물며 집무를 보던 서재에는 이제 엔과 그의 수하들이 드나들게 되었다. 엔은 방의 가운데에 자리한 소파에 앉아 그동안 골머리를 썩이던 마약과 관련된 일들을 마무리 짓는 기념으로 켄과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솔직히 이렇게 크고 오래 하는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엔이니까 같이 한 거예요. 나중에 호호 할아버지가 되어도 잊지 말고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
“참… 너는 한결같아서 좋아.”
켄이 엔을 향해 넉살 좋게 웃어 보이자 엔은 그가 귀여운 듯 미소지었다. 패밀리의 일원은 아니었으나 켄은 엔에게 꽤 많은 도움을 준 그의 파트너였다. 마피아라고 생각되지 않는 발랄한 몸짓들로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곤 했지만, 의외로 수완이 좋아서 엔이 손쓸 수 없는 어려운 일도 해내곤 했다. 이번 마약 건도 켄의 도움이 없었으면 해내지 못했을 일이었다.
“근데 혁은 어디 갔어요? 오늘 보이질 않네요.”
“아마 지금 오고 있을 거야. 다른 쪽 사업 때문에 심부름을 보냈거든.”
“혁 오면 저녁 먹으러 가요 우리. 오랜만에 셋이 뭉치죠!”
“그래. 그러자.”
엔은 켄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흩트려 놓으며 대답했다. 곱슬한 머리카락이 기분 좋았다. 그래. 가끔은 머리를 식혀도 좋겠지. 아마 켄도 저를 걱정해서 한 말이었을 것이다. 장례식이 끝난 후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보내며 며칠째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그였다. 온 신경이 곤두서있어 예민한 상태가 계속되었지만 오늘은 큰 일이 끝났으니 조금은 편하게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똑똑]
“누구 올 사람 있어요?”
“아니? 혁이면 그냥 들어올텐데….”
엔은 예고 없이 들린 노크 소리에 서랍에 있던 콜트M1911을 꺼내 조심스레 문을 향해 다가갔다. 서재에 있는 동안은 그가 허락한 이가 아닌 이상 주변에 들지 못하게 했었기 때문에 밖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엔은 손에 든 권총을 장전한 후 밖에 있는 이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차분히 물었다.
“누구지?”
“나야. 레오.”
레오가 저스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런 그가 다른 이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느 평범한 가족만큼의 친분은 없었지만 멀리서라도 그와 함께하고 싶어서 보니타스에 들어왔다. 물론 그전까진 저스틴이 자신의 아버지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으나, 저스틴에게 받은 잭나이프의 정체처럼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된 여러 사실이 레오가 그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려 주었다. 레오는 더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알아주지 않아도 좋았다. 평생에 갖고 싶던 존재가 본인을 향해 애정을 주었고, 그저 그것에 보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레오를 힘들게 했던 것은 저스틴을 살해한 자에 대한 것이었다. 그날… 저스틴을 저격했던 그 건물에서 발견했던 작은 단서.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물건…….
“어이쿠, 엔. 나는 이만 가볼게요. 저녁은 다음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켄은 문 앞에 서 있는 엔과 레오의 사이를 요령 좋게 빠져나가며 말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손 키스를 습관처럼 날리며 떠난 켄의 빈자리는 순식간에 거대하게 번졌다.
“네가 어쩐 일이야? 이곳엔 너 같은 말단은 들어올 수 없었을 텐데.”
몇 분 전까지 미소지으며 친근하게 대화하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차가운 표정이 된 엔은 레오를 쳐다보지도 않고 소파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할 얘기가 있어.”
“…….”
사실 레오가 엔에게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은 수년만이었다. 그에겐 아직 어렸을 때 만났던 엔의 모습이 선명했지만, 자신의 앞에 있는 이는 그러지 않았는지 엔은 레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등을 보인 채였다.
“왜 사업을 접은 거야?”
“…뭐?”
“왜 패밀리의 사업을 하나씩 접으려 하냐고 물었어. 남길 것이 있기는 한 거야?”
“하!”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갈무리하던 엔이 그제야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이 바보 같은 인사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아마도 비밀리에 들어왔을 서재의 문을 두드리고, 비장한 표정으로 할 얘기가 있다 하고는 고작 꺼낸 말이 사업의 행방이라니…! 엔은 레오의 질문에 헛웃음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가 저스틴의 아들이라는 것은 알겠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공공연하게 아는 이들도 꽤 되긴 하니까. 네 의견을 주장하는 것도 좋아. 하지만 건드릴 것을 건드려야지. 지금 뭐 하는 거야?”
“패밀리의 사업은 보스가 오랜 시간 이끌어 온 것이잖아. 네 아버지의 일이잖아.”
“그리고 네 아버지의 일이기도 하니까? 잘 들어. 네가 저스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나는 너무 싫었어. 아니, 저스틴에게 숨겨둔 자식이 있다는 사실이 너무 역겨웠지. 한 명이 있는데 두 명, 세 명은 없을까? 그를 의심하며 사는 하루하루가 최악이었다고. 그런데 갑자기 나타나선 뭐?”
열아홉의 그때, 엔은 자신의 아버지가 레오에게 젊었을 적 사용하던 나이프를 줬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충격을 받았다. 후계자로 사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저 자신의 인생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워하던 차였다.
어린 시절 레오와 시간을 보냈던 4년여는 답답한 삶에 지쳐있던 엔에게 위로가 되는 시간이었다. 조용하고 말이 없는 편이지만 다정한 레오가 저택을 오가며 자신을 만나는 것은 마치 자유로운 길고양이를 만나는 것 같아서, 엔이 패밀리를 맡게 된다면 꼭 레오를 곁에 두고 그의 눈으로 보는 론시티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저스틴의 아들이었다니, 자신과 이복형제였다니……. 그렇다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자신과 어머니를 속이고 낳은 아들. 자신에겐 칭찬 한마디 해 준 적 없는 엄격한 아버지가 건네는 따뜻한 관심은 존재도 몰랐던 형제에게 돌아간다. 그 상황을 깨닫자 엔에게 찾아온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박탈감과 허망함이었다.
“패밀리의 사업을 왜 접냐고?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
“마약, 밀수, 매춘… 온갖 더러운 일들을 사업이랍시고 벌이고 있는 범죄집단인데?”
“엔!”
레오는 순간적으로 엔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래도 자신이 3년 넘게 몸담고 있던 곳이다.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엔이 지금 하는 말을 막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더럽고, 끔찍하고, 엉망진창이야.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난 이 일을 끝내기 위해서 보스가 된거야. 레오. 네 그런 평화로운 머리로는 날 막지 못해.”
레오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손은 아랑곳하지 않고 봇물 터지듯 쏟아내는 엔의 분노를 들으며 아찔해졌다. 그는 그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었다. 레오와의 관계, 자신이 속한 패밀리 까지도 모두 끝내려고 하는 중이었다. 레오가 평생에 가져본 적 없는 것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는 그것들을 버리려 한다. 그 사실은 레오를 슬프게 했다.
“…우린 다시 가까워질 수 없겠구나.”
“태어날 때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러니 넌 너의 길을 가. 레오. 이곳을 떠나.”
바보가 아닌 이상 마피아라는 조직이 평범하고 안정된 일터는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엔이 자라면서 봐왔던 보니타스의 실체는 어린 아이 때 느꼈던 자랑스러움, 동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레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 엔은 이참에 그가 패밀리를 떠나길 바랐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자유로운 삶이 어울리는 그였다.
어차피 보니타스는 곧 해체될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래…. 보스가 그렇게 명령한다면 그래야겠지.”
레오는 엔의 재킷을 붙들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엔은 서서히 손을 내리고 있는 레오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찌푸린 미간 사이에 진 주름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만들었구나.
사실은 한 번도 레오에게 화가 났던 적은 없었다. 그저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 일찍 깨달았을 뿐이었다. 길고양이와 한가하게 지내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엔형, 나 왔어요.”
정적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심부름을 마치고 돌아온 혁의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서재로 들어온 혁은 곧바로 자신이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닫고 소리 없이 서재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잠깐의 구둣발 소리가 멈추고 난 뒤 레오는 말을 이었다.
“그날…. 총격이 있던 날.”
“…?”
“단서를 찾으러 갔었어. 보스를 죽인 범인을 찾으려고.”
그는 재킷의 안쪽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던 주머니를 꺼냈다. 손가락 한 개 길이에도 못 미치는 작은 것이었다.
“찾았어. 범인. 이건 그날 찾은 물건이야. 알아서 처리해줘.”
“…….”
“안녕.”
마지막 말을 남긴 레오는 그대로 서재를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며 그는 엔이 자신에게 다시 웃어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했던 지난날을 떠올리곤 쓰게 웃었다. 이 얼마나 단순한……. 바보 같은….
그래. 태어날 때부터 그럴 수 없었던 거야. 우린 다른 사람이고, 아마도 끝까지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겠지. 그래도 레오는 엔이 미워지질 않았다.
“뭐예요?”
서재 옆에 나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 있던 혁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음을 느끼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엔이 작은 주머니를 들고 서서 말없이 그것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증거.”
“증거?”
알 수 없는 대답을 남긴 엔은 주머니를 혁에게 넘기고 소파에 앉아 아까 켄과 마시다 남은 와인잔을 들었다. 엔의 반응에 의아함을 느낀 혁은 넘겨받은 주머니를 열어보았다.
“이건….”
주머니 속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힌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챈 그는 손가락으로 보석을 감싸고 있는 장식에 각인되어 있는 ‘J’ 를 쓸어내렸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