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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should see me in a crown

@yam_vixx

You should see me in a crown

 

※ 차학연과 정택운이 악역으로 나옵니다.

※ 흡연, 음주 요소가 있습니다.

 

 

 

 

“죽이든 살리든,”

“….”

“우리가 가지면 이기는 거야.”

숨 막히는 정적을 나긋한 음성으로 누른다. 차학연은 책상에 댄 검지에 힘을 줬다가, 얄팍한 사진을 모서리까지 밀어낸다. 사진이 곧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앞에 우두커니 서 있던 정택운이 허리를 숙였다.

이재환은 알 수 없는 탈력감에 고개를 떨궜다.

 

차학연이 한상혁에게 행동대장의 자리를 내린 그 날, 한상혁은 조직의 절반을 떼어 도망쳤다. 그중에는 간부진이었던 김원식과 이홍빈도 있었고, 학연이 애지중지 키우던 행동팀도 다수 속해 있었다. 그토록 싹싹하던 그가 그 날 제 사무실을 아주 작살냈던 것, 또 앙다문 입술, 평소보다 파리한 안색이 꼭 전쟁의 서막처럼 희뜩하던 것…. 다른 이들은 모르겠으나 이재환만큼은 그 광경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건사한 흉내를 내봤자 범죄자는 범죄자고 이 바닥은 다 비슷한 사람뿐이란 말이다. 상기하지 않으려 하더라도 불현듯 그러한 기억을 지나곤 하였다.

 

출처 모를 꽃내음으로 혼몽하던 그 날, 문득 뒤를 돌았을 때 우리의 목적지는 애초부터 달랐다는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위를 볼 때 너희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을 테고 또 우리가 정신없이 걷는 동안 아마 너희는 걸음을 늦추고 열에서 벗어나려 애썼을 것이다.

 

 

“어쩌잔 건데….”

시작점이 불분명한 학연의 분노는 종종 진력이 날 때가 있었다. 공사 구분, 웃기고 있네…. 감정은 그 공과 사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모양이지. 재환은 바싹 마른 입술 새로 장초를 비집어 넣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완연한 봄인지라 옥상만 나와도 확실히 공기가 더웠다. 넥타이를 헐겁게 끄르며 지포 라이터를 튕기자 일렁이는 불꽃이 핀다. 막대 끝에 갖다 대고 깊게 숨을 들이쉬자 종이가 벌겋게 타들어 갔다. 서늘한 연기가 목구멍을 한 번 훑고 올라온다.

잇새로 뿌옇게 연기를 뿜어내다 입술을 핥으며 제 머리를 헝클였다. 그래도 한 때 간부진 막내라 하여 예뻐하던 모습이 유독 눈에 밟혀 마음이 내키질 않았다. 애초 말처럼 쉬웠다면 이렇게 질질 끌지도 않았겠다만. 난간에 팔을 기댄 채로 필터 끝을 잘근거리다 한 번 더 숨을 들이쉬려던 참이었다.

“…,”

“아, 뭐야. …형?”

어깨 위로 무게감이 일어 고개를 돌리자 택운이 있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말끔한 얼굴에 꼭 다문 입술. 이 상황에도 고민이라곤 없어 보여 괴리감이 든다. 그 탓인지 택운이 손을 뻗어 재환의 담배를 잡아챌 때까지도 그는 형, 한 마디 이후로 멍하니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뭐 해? 바보 같아.”

“아니, 형이 올 줄 몰랐거든? 그래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가벼운 한 마디에 긴장이 풀려 핑계라도 늘어내려던 차에, 택운이 말을 끊는다. 그 음성이 유달리 매서워 재환은 숨을 삼켰다. 찰나 의심받고 있다는 감각이 온몸으로 전해져 왔다.

 

 

정택운은 하나의 정보망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조직의 모든 것을 관리 감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일전 차학연이 몸소 스카우트한 인재로 무슨 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예민한 성정의 택운도 학연에게는 순순히 고개 숙이기 마련, 실상 학연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그에게 실력만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도리어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분명 존재했다. 일례로 최근 도주했던 간부진 세 명-한상혁, 이홍빈, 김원식-도 있고 말이다.

 

그리고 이재환은 어느 쪽인가 묻는다면,

 

“…진짜 별생각 안 했다니까?”

택운은 눈을 굴리다 그래, 한마디 하고 반쯤 타들어 간 재환의 담배를 제 입에 물뿐이었다. 자기 담배나 가져와서 피우지, 내지도 못할 투덜거림을 삼키곤 재환은 쓴 한숨을 뱉는다. 늘 솔직하게 제 속을 내어놓았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영 내키질 않았다. 택운의 팔이 오늘따라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느낌이었다. 정말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택운은 멍하니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며 희뿌연 연기만 퐁퐁 뿜어내고 있었다.

“……재환아.”

“응?”

“잘 하자.”

“….”

택운은 한참 짧아진 꽁초를 제 발치로 떨궜다. 아직까지 남은 불씨를 발로 꾹 밟고 비비자 시멘트 바닥에 검은 그을림이 남았다.

“그런 뜻 아니야, 정말로 잘하자고.”

자신이 예민한 것인지 다들 날을 세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퍽 굳은 표정으로 제 손만 꼼질이고 있자니 택운이 한 마디 덧붙이곤 재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그 감각에 잠에서 깨어나듯 재환은 몸을 떨고, 발을 돌리는 택운의 뒤로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뒷모습이 계단 아래로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그는 긴 탄식을 내뱉을 수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한 번 더 담배를 꺼내 들며 똑똑히 직감했다. 그것은 즉 교전의 조짐이리라고.

 

 

발신 번호 없이 연락이 온 것은 어느 한가한 저녁쯤으로,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냉랭한 분위기 속 서류를 갈무리하던 중이었다. 핸드폰이 울리는 것조차 폐가 될 법한 정적이라 화면이 켜지자마자 이재환은 핸드폰을 잡아채고선 복도로 나와 수신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리고 정말,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심장이 곤두박질치는 듯싶었다.

 

‘어, 받았다 받았다. 형?’

“…너 홍빈이야?”

‘어 재환이 형, 난데!’

순간 재환은 수신부 스피커를 손으로 틀어막고 급하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는 것 같았으나 긴장을 놓칠 수는 없다. 잽싸게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잠그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맨 끝 칸에 들어와서야 다시금 귀에다 휴대폰을 가져다 댔다.

“미쳤어? 너 지금 이 판국에 나한테 전화를 하면 어떡해!”

‘아~ 미안, 근데 택운이 형한테 전화를 할 순 없잖아.’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단순한 화법에 얼이 빠져 말문이 막혔다. 어깨를 웅크린 채 잠시 멍하니 말을 잃은 재환에게 홍빈은 개의치 않고 종알대기 시작했다. 다름이 아니고 자신들이 살아나가려면 정택운의 USB가 꼭 필요한데, 그걸 조달해줄 사람이 이재환 자신 말고는 없으니 언제 한 번 도와달라는 소리다. 뻔뻔한 요구에 재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아주 작게 한 마디 쏘아붙였다.

“그거 들키면 나는 어쩌라고?”

‘괜찮아, 그거 혁이가 알아서 해줄 거! 다음 주 이 시간에 근처 카페에다 맡겨주라, 카페는 우리가 확인할 거고 나중에 원식이가 찾으러 갈 거야. 그냥 맡기기만 하면 돼.’

“나 안 할 거야. 너희 도망치고 배신까지 했는데 내가 왜 도와주냐?”

‘아, 형 진짜 이렇게 나올 거야? 옛정이 있지….’

순간 덜컥거리는 문고리에 이재환은 소스라치듯 문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껏 숨죽인다. 줄곧 능청스럽게 굴던 수화기 너머도 한순간 조용해진다. 인기척이 잦아들 때에야 그가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 일단 빨리 끊어, 밤에 다시 전화해. 12시쯤에.”

‘아냐, 지금 해야 돼. 한 번 더 하면 밟힌다니까. 그리고 형,’

“…,”

‘언제까지 그 아래서 살 거야? 학연이 형 욕심 채우려고….’

“야,”

‘끊는다! 다음 주에 잘 부탁해! 까먹지 말고!’

뚝, 가벼운 진동과 함께 전화가 칼같이 끊겼다. 두 손이 벌벌 떨려 이재환은 심호흡과 함께 뜨뜻한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대충 찔러넣었다. 모르는 척하는 거다, 아무 일 없었던 척. ……그러나 없던 일이라 하기엔 너무 큰 일이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이라도 식히려 수도꼭지를 젖히고 차가운 물을 두어 번 얼굴에 끼얹던 중, 문득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재환은 마지막으로 숨을 고르고선 문으로 다가섰다. 젖은 손을 셔츠에 대충 문질러 닦는다. 다시 한번 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서면 되는 거다…. 마지막으로 다짐하고선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보스?”

그러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문 너머에는 차학연이 멀뚱히 서 있던 것이다.

“뭐야, 왜 이 문을 잠갔어? 불편하잖아.”

그가 가볍게 웃으며 몸을 틀어 화장실로 진입했다. 아무렇지 않게 거울을 확인하다 물을 트는 학연을 보고 안심하며 걸음을 돌린 참이다.

“재환아, 무슨 문이든 잠그지 마. 나 그거 싫어.”

순간 목덜미가 싸하게 식는 감각을 느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저도 모르게 도망치듯 화장실을 나와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가슴께에 손을 얹으며 재환은 피가 맺히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정말로 이건 잘못됐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마저 숨이 막히는 생활이 옳을 리 없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 혹시 모르니까…

 

이번 주는 이재환의 생애 최고로 긴 일주일이 될 모양이었다.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재환은 정택운의 USB 복사본을 손에 넣었다. 정택운도 차학연을 따라 제법 의심의 날을 세우는 듯했으나 어쨌든 접근하기는 쉬웠던 것이, 일이 없는 날의 택운은 이상하게도 아주 무방비해지는 데다가 이재환도 조직에서는 내로라하는 인재인 까닭이다. 목표를 생각보다 쉽게 손에 넣었으나 자고로 임무라 함은 끝의 끝까지 긴장을 놓치면 안 되는 법이기에 재환은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날을 지새웠다. 택운은 날카로운 눈매로 사람의 속까지 헤집는 듯했고, 한 번 눈 밖에 든지라 학연의 눈길도 영 좋지 않았다.

그는 불안감을 삼켜가며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넣은 채 거리를 활보했다. 주먹을 쥔 오른손 안에는 USB 복사본이 들어있었고, 이것을 아무 카페에나 전달한 뒤 떠나면 다시 조직에 한 몸 바치는 이재환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것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유리문을 어깨로 조심스럽게 밀자 문 위 달려있던 풍경이 부드럽게 울렸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그 소리조차도 경종으로 들려 기분이 영 어수선하다.

“저기….”

카운터로 성큼 걸어간 이재환은 카운터 위로 손을 턱 짚었다. 캡을 푹 눌러쓴 알바생이 재환의 손 위로 시선을 떨군다.

“네, 주문하시겠어요?”

“어,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랑….”

손가락 틈으로 USB를 밀자 끄트머리가 비죽 튀어나왔다. 왠지 목이 붓는 것 같아 그가 침을 꿀꺽 삼킨다. 비교적 단란한 카페 내의 분위기에도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다. 그래도 손을 털 시간이 코 앞이었다.

“이거 좀 맡아주실래요? 누가 와서 찾을 거예요, 아마.”

“아….”

“…?”

이해가 간다는 듯 끄덕거리던 알바생은 USB를 앞치마에 딸린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안도감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서던 재환의 손목을 그가 그대로 붙잡은 것이다. 찰나 이재환은 숨을 참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크게 치떴다.

“……야, 너….”

“커피는 가지고 가시나요?”

“김원식, 너 왜….”

챙 아래로 얄궂은 웃음이 피었다. 재환과 마주한 이는 익숙한 인물로 만면에 장난기를 흠뻑 머금고 있었다. 찾으러 온다는 게 이런 말이었나…. 재환이 헛웃음을 지었다. 이렇게 이상적인 시나리오였다면 걱정할 필요조차 없었지 않나.

 

…그러나 어쩐지 이상하다. 일이 눈에 띄게 잘 풀리고 있음에도 불안감이 곧장 가시질 않는다. 웃는 와중에도 재환의 머릿속에서는 언제부턴가 다시 경종이 울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천천히.

“계산은 해드렸고요, 영수증….”

“…나 갈게.”

김원식이 눈썹을 추어올렸다. 의외라는 표정이다. 그러나 잠행의 기본은 태연함으로, 곧 그가 표정을 바꿔 웃는다. 캡을 조금 더 눌러 썼다.

“…네,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재환은 픽업대에 놓인 음료도 집지 않고선 급하게 몸을 돌렸다. 왜인지 이곳에 더 머무르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만나 가벼운 인사라도 나눴으면 좋았겠지만, 어째선지…. 일단 팔을 뻗어 손잡이를 잡고 당겼다. 급한 마음에 손짓이 거칠었는지 다시금 풍경이 요란하게 울리고, 그 순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그의 앞으로 바싹 다가왔다.

이번에야말로, 그것은 경종이었다.

 

“-컥,”

뒷걸음질 칠 새도 없이 다부진 주먹이 명치에 와 꽂혔다. 그리곤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그의 턱과 맥을 차례로 후려치는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이재환은 비척이다 앞으로 고꾸라졌다. 웅웅 울리는 귓전에 사람들의 비명과 바쁜 뜀박질이 메아리친다. 바닥에 눌린 시야로 익숙한 구둣발이 보여 그가 몸을 힘없이 바르작거린다.

 

차학연이 몸소 온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알 턱이 없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도 미행이라는 명백한 선택지를 납득하는 것이 그에게는 힘겨운 일이었다. 한 조직의 간부가 이렇게 솔직하게 목적지를 드러냈다는 그 사실이 수치스러워서 더더욱.

숨이 차츰 얕아진다. 원식이는 도망갈 수 있을까? 홍빈이는, 설마 상혁이까지…. 눈 앞이 먹먹하게 잦아든다. 이재환은 마지막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가 결국 의식을 놓고 만다.

 

이렇게 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으….”

그가 눈을 뜬 곳은 조직의 본진, 그 뒤의 제법 넓은 지상 주차장이었다. 손목이 묶여있다거나 어딘가가 구속되어 있진 않았으나 반격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건물에 남아있던 조직원들을 다 밖으로 끌어낸 모양이었다. 이쪽이 오히려 더욱 악질이다. 검은 정장의 향연에 이재환은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작게 탄식한다. 자책과 경멸로 심중이 복잡했다.

“깼어?”

넌지시 묻는 물음에 대답하려다 재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을 향한 질문이 아니었다. 정택운이 저 멀리서부터 긴 보폭으로 걸어와 제 앞에 쭈그려 앉는다. 그리고 재환의 눈을 한 번 들여다보고선, “응.” 짧은 대답과 함께 물러섰다. 그는 비틀대며 몸을 제대로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무너지듯 주저앉은 한상혁, 그리고 그 주위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이홍빈과 김원식이 눈에 들었다.

최악의 상황이다.

 

“재환이는 다 좋은데 가끔 주위를 못 둘러봐서 탈이야.”

검은 총신을 헝겊으로 정성 들여 문지르며 차학연이 입을 열었다. 주위, 한 마디에 이재환은 이를 악물었다. 말을 끝맺자마자 제게 와닿는 셋의 시선, 그 안에 어떤 감정이 깃들었든 간에… 마주 보기가 두려웠다. 남을 사지로 몰아넣고서 이토록 죄책감이 들었던 적이 없다. “형,” 절박하게 튀어나온 옛 호칭에 학연이 되레 눈을 부릅뜬다.

 

“누가 네 형이야?”

“….”

“배신자는 입 다물고 있는 거야, 알겠어?”

짐짓 타이르는 말투에 이젠 막막하기까지 하다. 더 이상 방도가 없는 것 같았다. 한때 형제라고 부르던 것도 잊고…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냔 말이다. 언제부턴가 땅을 짚은 재환의 팔이 분노와 책망으로 떨리기 시작했으나 그 누구도 개의치 않았다. 이제 차학연은 권총의 슬라이더를 가볍게 잡아당기고 방아쇠를 확인하고 있었다. ‘안 돼,’ 이재환은 무력하게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다시금 군중의 시선이 제게로 쏠렸다.

 

언젠가 우리는 건사한 시늉을 하더라도 범죄자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 있다. 차학연을 보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러한 이유로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았나? 범죄자들의 세상이라면 이 안에서 나 좋은 대로 사상을 가져도 되지 않나?

위선적이어도 좋을 곳이니 마음대로 가치를 부여하고 행동해도 괜찮을 거라고 믿었다.

 

이재환은 천천히 걸어 체념하듯 앉은 한상혁의 앞에 섰다. 학연이 겨눈 총구를 가로막았다. 겁먹은 강아지처럼 연신 떨면서도 재환은 애써 숨을 참고 한 때 상사였던 이의 시선을 마주했다.

“이재환, 안 비켜?”

 

몸이 뻣뻣하게 굳는다. 그러나 꿋꿋이 버텨 섰다. 마주한 학연의 눈에서 노골적인 분기가 흘러넘친다.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것 같은 차학연은 고사하고, 등 뒤로 선 한상혁이 제 편을 들리란 보장도 없었다. 실상 이 행위는 무모한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맥동한다.

 

그렇지만 재환은 비키지 않았다.

 

 

“그만 해요, 그냥 보내면… 되는 거잖아. 서로 다른 길 가는 셈 치자고요.”

“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쟤네 배신자야. 조직원들 데리고 도망친 거라고, 쟤네가. 한상혁이.”

“나도 아는데, 근데, 이걸… 꼭 이렇게,”

“비키면 넌 살 수도 있어. 갱생할 수 있다니까?”

“안 돼, 형.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차학연은 잠시 고민하다 바닥으로 총구를 돌렸다. 탕, 귀를 울리는 격발에 얼떨떨한 심정으로 재환은 학연을 응시한다. 그러나 그로 말미암아 가진 희망도 잠시뿐이다.

 

“택운아,”

 

한숨 섞인 외마디 부름에 차학연 뒤에서 택운이 성큼 걸음을 뻗는다. 그가 허리춤에서 망설임 없이 권총을 뽑아 들고 이재환의 미간으로 총구를 향한다. 아, 젠장. 이어질 상황은 지극히 자명해… 눈을 질끈 감던 순간이었다.

 

 

“어허, 정 없이 왜 이래요?”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순간 중심이 옆으로 쏠렸다. 재빠르게 몸을 일으킨 한상혁이 이재환을 밀친 것이다. 누군가가 재환의 팔을 잡아채 뒤로 끌어당겼고, 기어코 바닥에 넘어져 몸이 끌린 후에야 재환은 비척거리며 눈을 떠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택운 쪽으로 총을 겨누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도 단념한 듯 굴던 한상혁의 눈빛이 형형하다. 반면 택운의 표정은 짜증스럽게 일그러진 채다. 어떤 상황에서도 잠잠했던 그가 말이다.

 

“왜 이렇게 무모해요, 형.”

 

오래간만에 듣는 원식의 투덜거리는 말투에도 그는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그야, 상혁의 총구가 향한 곳은 정택운보다는, 그 어깨 너머의….

 

 

“한상혁.”

 

날 선 목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왜 불러요?”

“얼굴 보니까 좋다? 더 빨리 좀 오지 그랬어.”

“내가 왜요, 형 속셈 뻔히 아는데?”

“말하는 꼴 보니까 많이 컸다, 그치? 얘들아, 우리 혁이 되게 컸어.”

 

차학연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돌리자 그에 뒤따르듯 전투원들의 형식적인, 허나 일면 진심이 배어 나온 비웃음이 뒤따랐다. 제 팔을 붙잡은 원식의 손끝에 힘이 실리는 것을 재환은 놓치지 않았다.

분위기는 점점 극으로 치닫는다. 상혁의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쥘 듯 가볍게 경련하고 있었다.

 

“보내줘요. 지금 싸우면 우리는 잡을 건데, 아마 형도 혼자 남을걸?”

“무슨 수로 장담해?”

“재환이 형도 저한테 있는데요? 진짜 혼자 안 남을 자신 있어요?”

 

상혁의 승부수였다. 이제 주위를 맴도는 공기조차 날카로워 베일 성 싶다. 와중 귓가에 남은 한마디가 뜨거워 재환은 숨을 참았다. 충동적인 선택으로 이제는 자신 또한 배신자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큼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이게 나을 듯싶었다. 이제 차학연은 웃음기 없이 한 때 제 편이었던 간부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다 못해 들여다 볼 수조차 없는 그 두 눈으로. 오래도록 봐 온 사람만 알 수 있는, 고민의 방증이다.

 

이윽고, 학연이 얕게 벌어져 있던 입술을 천천히 달싹인다.

 

 

“…퇴각한다. 각자 팀원 챙겨.”

 

 

 

 

***

 

 

 

 

“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재환이 형 아니면 다 죽었다니까요? 운전석에서 들려오는 엄살 섞인 홍빈의 목소리, 다소 우악스럽지만 염려 어린 손길에 떠밀려 재환은 제일 안쪽 좌석에 몸을 붙인다. 그 뒤로 김원식이 차에 올라타고, 한상혁이 끝자리에 몸을 기대며 차 문을 닫았다. 차체가 흔들림에 고개를 돌린 재환과 시선이 마주치자 상혁은 눈을 가늘게 휘어 웃었고, 그 모습에 그는 멋쩍게 마주 웃으며 무의식중 짙은 안도감을 느낀다.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또다시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퇴각 명령을 내린 후 차학연은 한껏 살벌한 기운을 풍기며 뒤돌아 떠났고, 택운도 망설임 없이 학연의 뒤를 쫓았다. 자신이 그러했으니 택운 또한 무언가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했으나 그만의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경계가 차츰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상혁 쪽 무리도 슬금슬금 뒷걸음치다 안전히 후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재환은 원식과 홍빈에게 끌려가다시피 한상혁을 쫓으면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곤 했다. 차학연이 한상혁을 잡겠다 선언한 그때와 비슷한 탈력감이었으나, 이 감정은 곧 후련함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혁아, 어디로 갈 거야?”

“일단은 본진으로 가요~ 재환이 형한테 사람들도 소개해주고, 밥도 먹고 하려면?”

 

가죽 시트에서는 옅은 비린내가 났다. 그러나 이런 냄새에는 진즉 익숙해진 그들이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방향을 틀기 시작해, 이재환은 시트 위로 몸을 깊게 파묻으며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아마 정택운은 머지않아 우리의 본진을 찾아낼 것이고, 차학연의 성격상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곧장 전투원을 끌고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승패는 쉬이 가늠할 수 없으나 수적으로 불리한 싸움인 만큼 결과는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끝이 가깝다 하더라도… 우리는 멀리 떠난다. 학연의 손바닥 안에서 마침내 벗어나는 것이었다.

혼자가 싫었을까? 그래서 모두에게 목줄을 채운 것일까? 그의 의중은 알 수 없지만, 한마디 덧붙여 보자면 참 안 된 일이다. 그뿐이다.

 

차창 너머로 스치는 바람이 세차다. 바람 소리에 가늘게 눈을 뜨자 어둠 속 아른아른 번진 가로등의 노란 불빛이 보인다. 다시 잠에 들려던 참에 꾸벅꾸벅 졸던 원식의 고개가 제 어깨로 툭 떨어져, 재환은 잠시 내려다보다 그 위로 고개를 기댄다. 맞닿은 곳부터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 이번에야 비로소 긴장을 놓았다.

 

우리의 새로운 낙원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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