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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의 죽음

​여랑화

@j_klove_524

온 세상을 씻어내려는 것처럼, 하늘은 아주 오랫동안 비를 내렸다. 이 이상 더 내릴 비도 없는 것 같은데. 이 이상 씻을 것도 없을 것 같은데. 여름의 장마는 그렇게 멎질 않았다. 솨아아아- 하늘에 구멍이 뚫린 건 아닌지 싶을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많이.

 


비가 오는 날에 그는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하늘은 비가 오는 날마다 그의 편이였다. 증거를 씻어버리고, 흘려보내고. 자신의 소리로 우리의 소리들을 덮어버리고 늘 우리의 일을 도왔다. 한결같이.

 


그런 나날들이 있었건만, 비는 그를 철저하게 배신했다.

 

비가 유난히 검고 짙게 세상에 흩뿌려지던 그 날. 

 

“무슨……!”
“윽, 흐윽…도와줘… 피가 안 멎어… 학연이가, 학연이가…숨을 안, 쉬어….”

 

우리의 형제가 살해당했다.
 

 

* * *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비가 그치고, 또 시간이 흘렀다. 숨이 턱 막힐 것 같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와 선선한 바람에 가끔 겨울의 서늘함이 섞여 흐르곤 했다. 

 

익숙해 질 것 같지 않던 맏형의 빈자리도 어느새 익숙해졌다. 이제 택운은 끼니를 거르지 않았고, 재환은 이따금식 멍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이상은 없었다. 원식은 아직도 총을 들진 못했지만 나름 웃으면서 잘 지내곤 했다. 홍빈은 이상한 맛의 요리를 가끔 만들어주기도 했고, 홍빈이 요리에 설탕을 뿌릴 동안 상혁은 옆에서 소금으로 눈을 내리곤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었다.

 

원식은 이따금 학연이 쓰던 칼을 닦았다. 학연이 없어서 이젠 쓸 일이 없는 칼이었지만, 녹이 슬지 않도록 매주 칼을 닦았다. 원식이 잊는 날이면 재환이, 혹은 홍빈이. 혹은 상혁이 닦으며 늘 학연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칼은 매일 닦아야 한다고 했어.”
“…….”
“그래야 언젠가는 쓰이니까.”

 

우리도 똑같다고 그랬지. 자신은 칼을 들어 죄악을 범해도, 동생들 만큼은 그러지 못하게하며 번 돈으로 공부를 시키고, 먹이고 운동을 시켰다. 피를 나눈 사람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학연은 늘 최선을 다했다. 택운은 어느날 갑자기 어린 애를 데려온 학연을 떠올렸다.

 

‘……뭐야, 얜.’
‘……애야.’
‘그러니까 왜 뜬금없는 꼬맹이야.’

 

자신의 집은 더럽다면서 데려왔던 어린애. 지금은 형들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커졌지만, 학연이 데려왔을 당시만 해도 쪼끄만 어린애였다.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당시에는 감기를 그렇게 달고 살았는데.

열다섯 살이었던 상혁은 이제 스물 다섯이 되어있었다. 스물이었던 자신과 학연은 서른이 되었고, 이후에 같이 지내게 된 원식, 홍빈. 그리고 재환이까지. 모두 길에서 불량한 짓을 하던 청소년들을 데리고 들어와서 자신의 집에서. 무려 택운의 집에서 살게 한 학연은 늘 말했다.

 

‘아직 어리잖아.’

 

스무 살. 이상할 정도로 열심히 어린애들을 데려온 학연은, 늘 얘기했다. 이 아이들만큼은 자신처럼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혈 향을 가득 담은 그 손으로 잠든 상혁의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며 늘 말했다.

 

‘가족이 되어주고 싶어.’

 

택운은 늘어난 애들만큼 돈을 가져오는 학연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아, 아아아! 진짜 이홍빈! 파스타에 왜 설탕을 넣어!”
“난 원래 모든 음식에 설탕을 넣어.”
     
이제는 이 소란스러운 풍경을 보면서 그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다. 학연은 처음부터 자신을 위한 가족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칼잡이의 인생. 언젠가 죽을지도 모르는 그 삶을 살면서. 가족 없이 친한 친구 하나와 함께 세상에 떨궈져있던 택운을 위해. 언젠가를 위하여 남겨두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마지막에도 끊임없이 말했던 거겠지.

 

‘괜찮아, 택운아.’
     
괜찮아. 택운아.
나는 이제 그 아이에게 ○○○ 괜찮아.

 


섬짓하는 느낌이 택운의 온 몸을 감쌌다. 뭐지? 방금? 마지막으로 했던 대화에 왜 모르는 기억이 담겨있지? 택운은 불안한 느낌에 제 팔을 감싸안았다. 아직도 파스타 가지고 싸우고 있는 재환과 홍빈을 보며 웃고있는 원식과 상혁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됐어. 그만싸워.”

 

내가 할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홍빈에게 다가가면서도 택운은 불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이 기분은 대체 뭐지?
껄끄럽고, 매끄럽지 못한 느낌이었다.

.
.
.
선잠을 자다가 한밤중에 깨어난 택운은 주방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방을 벗어났다. 주방으로 걸어가던 택운은 주방의 보조 전등이 켜진걸 보고 소리를 내었다. 누구 있어? 그 소리에 토끼마냥 자리에서 튀어오른 홍빈이 위스키잔을 들고 말했다. 나 있어. 그 모습에 웃음을 피식 터트린 택운이 물었다.

 

“왜 혼자 마셔. 안 자?”
“그러는 형은.”
“나는 자다가 깨서 물 마시려고.”
“마실래?”

 

홍빈이 들고있던 위스키 잔을 건네자 택운은 고갤 저으며 컵을 한개 꺼냈다. 나 술 못하는 거 알잖아. 그 말에 고갤 끄덕인 홍빈은 손을 거두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그 모습에 작게 웃은 택운이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어 컵에 따르고 있었다.

 

“요즘에는 그게 좀 줄었네?”
“뭐가?”
“자면서 돌아다니는거.”
“어? 아, 몽유병.”

 

그러게. 요즘엔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긴 해도 몽유병으로 집 안을 헤집고 다니는 일은 없어진지 오래였다. 몽유병 때문에 매일 팔이며 다리며 할 것 없이 멍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팔다리는 물론 그 어느 곳에서도 이젠 멍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젠 형 몽유병으로 집 탈출하면 내가 잡아와야했나 싶었는데.”

 

이젠 이런 말도 우스갯소리로 할 수 있게 된 홍빈은 웃으면서 마지막 남은 위스키를 홀짝거렸다. 입술을 스치고, 목으로 금새 넘어가는 알콜이 싸하게 느껴진다 싶더니, 각이 진 투명한 글라스 잔에 비쳐보이는 택운이 멍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말이야?”

 

홍빈은 택운의 물음에, 순간적으로 뭔가 이상함을 느낌에 되물었다.

 

“……무슨, 말이냐니.”
“내가 몽유병으로 집밖을 나갔었어?”
“어?”
“내가?”
“어……그랬지. 그래서 차학연이 맨날 너 찾으러 나갔었어.”

 

기억 안나? 몽유병이니까 당연하긴 한데. 홍빈은 기억이 전혀 안나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에 잠긴 택운을 바라보았다. 택운은 계속 찜찜한 얼굴을 한 채로 홍빈과 시선을 마주쳤다.

 

“하지만 늘 눈을 뜬 곳은 집이었는데?”

 

그럴리가 없는데. 홍빈은 중얼거리려던 말을 삼키고 말했다. 그럼 집에 오기 전까지 자고 있던 거 겠지. 그렇게 입으로 중얼거리면서도 이상하게도 마음이 흔들리는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 기분은 뭐지.
     
중요한 무언가를 이상하게도 놓치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관없으리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제는 몽유병을 앓지 않는 택운이다. 그런데 뭐가 더 문제가 생길까. 하고 생각했다. 
     
그 날 밤. 홍빈은 꿈을 꾸었다. 저의 발을 적시는 피가 스멀스멀, 몸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도망치려 몸을 비틀면 덩쿨 마냥 자신을 옭아매는 그 소름끼치는 감각에 연신 소리를 쳤지만,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그 꿈 속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웠던 것은…….
     
학연의 칼을 들고 있던 사람. 단 한 사람이었다.
     
.
.
.
     
“이리줘, 내가 해.”
“…….”
     
택운은 요새 얘가 왜이러지, 하는 생각에 고개를 기울였다. 홍빈이 이상해졌다고 해야하나. 자신은 물론 다른 애들과 눈도 안 마주치고 자신을 도와주는 홍빈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나? 싶긴 했지만, 눈치를 보며 물어보아도 계속 이런식이니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택운은 계란 후라이를 마저 대신 하는 홍빈을 보다가, 어느새 하품을 하며 방 문을 열고 나오는 상혁을 보고 말했다. 오늘 알바 일찍 가야하는 날 아니었어? 그의 물음에 상혁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그건 내일이고. 오늘은 쉬어도 되는 날이야.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택운이 토스트 기계에 빵을 넣는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재환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 벌써 아침이야! 짜증스러운 목소리. 재환의 말에 피식 웃은 상혁은 자신의 밥그릇에 우유를 부었다. 그리고는 초코맛 시리얼을 왕창 부어놓곤 소리쳤다. 혀엉- 빨리 나와요! 그런데 이 양반은 아직도 주무시나.. 원식의 방이 있는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아직도 열려있지 않은 방문을 보곤 상혁이 입을 비죽였다. 
     
하여간에 막내보다 더 게으른 사람들. 고개를 절레절레 거리며 자신의 시리얼 그릇을 내려놓고 주방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원식의 방 문 앞에 선 상혁이 문을 두들겼다. 형, 해가 중천인데 아직 자요? 문을 열고 들어간 상혁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어느새 방에서 내려와 선 재환이 '굿모닝, 혁아.' 하는데.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지. 재환은 멈춰서있는 상혁을 보다가 이상한 느낌에 기지개를 켜다 말고 다가갔다. 뭐야, 뭐길래 그러는……. 말을 채 잇지 못한 재환이 방 안으로 뛰쳐 들어가자 상혁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그래, 혁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홍빈과 택운이 눈을 마주치곤 달려갔다.
     
“혁아, 무슨일…….”
“구급차 불러! 어서!”
     
재환의 다급한 목소리, 그리고 이어 보이는 시야 속에 갇혀 멎어가는 숨 속에 피를 내뿜으며 복부를 감싸고 있는 원식. 이미 피로 물든 바닥. 그 모습을 보고 주저앉아 떨고있는 상혁을 서둘러 감싸 안은 택운이 덜덜 떨어대자, 119에 전화를 걸던 홍빈이 두 사람을 막아섰다. 보지마. 안돼. 괜찮아. 홍빈이 떨면서 전화를 걸자, 재환은 소리쳤다.
     
“전화 넘기고 와서 김원식 좀 잡아, 이홍빈!”
“…….”
“……정신 안 차려?!”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에 덜덜 떨던 홍빈이 택운에게 핸드폰을 넘기고 달려가 자신의 남방을 벗어 원식의 복부를 감쌌다. 대체 누가,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연에 이어 원식까지. 어제까지만해도 분명 무슨 일이냐고, 기분 풀어라! 하며 자신의 어깨를 감싸오던 원식의 아침이 망가졌다.
     
……16-9번지요, 네. 빨리 와주세요. 울먹임 가득한 택운의 목소리와 상혁의 훌쩍이는 소리에. 그리고 욕짓거리를 내뱉는 재환의 성난 목소리와 손을 축축히 적셔오는 끈적하고 뜨거운 피. 머리가 아득해지는 상황 속에서, 결국 홍빈은 눈을 감았다.
.
.
.
재환은 피투성이가 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원식의 병실 앞에 앉아있었다. 대체 누가, 대체. 왜 원식을 공격했을까. 급소가 아닌 곳을 두 군데찔러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게 만든 그 끔찍한 악마는 대체 누구인가.
     
아직 학연이 세상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럼에도 다들 마음을 잡고 살아가려고, 겨우 그렇게 하나 없는 퍼즐을 서로의 손으로 채워 막으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째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이상했다. 막 내뱉을 말은 아니지만 학연은 살인마였으니 원한 살 일이 많다고 쳐도. 원식은 대체 왜? 누가 카페에서 일하는 저 순둥이한테 원한을 가지고 이런 짓을, 그것도 집 안에서 저지르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자꾸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고에 재환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었다.
     
아닐거야. 설마 자신이 생각하는 그 최악은 아닐 거라며 재환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어느것도 상황을 배제 할 수 없었다. 만약 생각하는 그 것이 맞다면 나는 뭘 해야하지? 경찰에 말 해야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젠장, 학창시절에 공부 좀 제대로 할 걸. 재환은 머리를 뜯던 손에서 나는 비린내에 한숨을 내쉬며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이젠 모르겠다. 어찌 되건, 이젠 모르겠다.
     

 


***
     

 


재환이 병원에 머무르는 동안, 홍빈이 왔다가 다시 돌아가고 이어서 상혁이 병원을 찾아왔다. 혀엉. 그 날 원식을 발견 했던 날과 달리 혈색이 다행스럽게도 제대로 돌아온 상혁을 보고 재환이 힘없이 웃음을 지었다. 괜찮냐? 그 말에 말 없이 웃은 상혁이 고갤 끄덕였다.
     
“형은 아직이에요?”
“그렇지 뭐.”
“어휴, 양반아. 좀 빨리 일어나라. 속 탄다.”
     
회복실 창을 사이에 두고 원식에게 핀잔을 준 상혁이 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창에 이마를 기대고, 산소 호흡기를 달고있는 원식을 보던 상혁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재환이 한숨을 내쉬며 상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상혁은 입술을 꾹 깨물다가 말했다. 제발 좀 빨리 일어나요. 제발. 꽃집 가서 꽃도 돌보고, 빙구 웃음도 지어야지. 왜 아직도 안 일어나요? 울상을 짓는 상혁의 어깨를 토닥이던 재환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계속 그렇게 안 일어나면 네 옷 갈아서 섬유질 쉐이크로 먹어버릴거니까. 
     
그들의 말을 듣고 있는지, 혹은 듣지 못하는지 원식은 그저 죽은 듯이 누워있을 뿐이었다. 아주 긴긴잠을 자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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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원식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조명도 없이 검은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은 똑똑히 볼 수 있는 거울 앞에 서있던 원식은 자신의 복부를 매만졌다. 상처는 커녕 아픔 하나 없었다. 분명 그날 칼에 찔렸는데. 이게 무슨일인가 싶어 고민하던 그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두 발목이 아작났는데 서있는 걸 보니. 이건 꿈이었다.
     
‘원식아.’
‘……형?’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 자리에는 학연이 서 있었다. 웃음을 짓고 있는 모습이, 늘 저희에게 지어주던 그 웃음과 같아서 원식은 그대로 학연에게 다가갔다. 형, 미친, 차학연……. 반가운 마음에 욕이 섞여 나오는 그 입술에 학연은 푸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원식을 끌어안았다. 
     
‘미안해. 놀랐지.’
     
괜찮아. 괜찮아. 자기보다 작은 그 체구의 사람이 원식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원식아. 이제 괜찮아. 다 끝나가. 그 말에 원식이 무슨 소리냐며 덧붙이려 했지만 입술은 정상적인 목소리가 아닌 고통에 찬 숨을 터트렸다. 
     
‘컥, 커헉…형, 혀엉…….’
‘이제 다 끝나가. 원식아.’
     
닿을 줄 몰랐던 그 칼을 시야에 담던 원식이 끔찍한 감각으로 욱신거리는 두 발목으로 인해 자리에 무릎을 꿇고, 이내 바닥에 몸을 뉘였다. 허억, 헉……. 검붉은 피가 섞여 바닥에 떨구어지는 숨의 끝에서 올려다 본 사람은…….
     
‘정……택운?’
     
낯선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 보는 그 사람은 분명 학연이 아닌, 정택운이었다.
     
맞아, 그 날 나를 이렇게 찌른 건 정택운이었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원식의 눈에선 알 수 없는 눈물이 차올랐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그의 살의에 벌벌 떨면서 복부를 쥐고 쓰러진 순간, 새벽 달빛을 받으며 고개를 기울인 그가 눈을 감다 중얼거렸었다.
     
왜 깬거야. 귀찮게. 그냥 자다 죽는 게 나았잖아. 평소에는 잠들면 깨지 않는 놈이 왜 깨어나서 이 사단을 만들어. 응?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는 검은 가죽 장갑을 낀 한 손, 그리고 검은색의 칼을 쥐고 있던 한 손으로 문을 가리키던 그는 말했다. 소리치면, 모두 죽어. 그 말에 원식은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하루라도 더 네 형제들을 살리고 싶으면, 참아봐. 그 말에 고개를 든 순간, 한 번 다리를 들어, 제 발목을 쾅 짓누른 그 강렬한 고통에 숨을 헉 들이마셨다.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왼쪽 발목을 무자비하게 내리 찍는 발길질에 이를 악 물었지만, 정신이 절로 아득해졌다. 하지만 소리 한번 낼 수가 없었다. 내서는 안됐다. 아픔에 컥컥거리긴 했으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할 수가 없었다. 
     
소리를 참기 위해 힘을 줄 때마다 복부가 타는 듯 뜨거워졌다. 어릿한 그 아픔속에서 놓쳐가는 그 정신을 참던 한 순간. 쾅, 오른쪽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끔찍한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나 한 번이 아니었다. 두 번, 세 번. 숨을 타고 올라오는 비명을 삼키며 그저 빨리 모든 것이 끝나길 바란 그 순간.
     
젠장,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원식을 걷어찬 ‘그’가 말했다.
운도 좋네, 지금 죽지 않고 살게 생겼으니.
     
대체 뭐가 운이 좋다는 거야. 개새끼가. 차마 내뱉지 못하고 입에 삼킨 욕이 쓰게 남았다. 이 고통은 대체 누구를 위한 고통인지. 미쳐버릴 듯 웃음이 나와도 소릴 낼 수가 없었다. 그저 고요히 그는 그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참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금껏 숨겨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리고 무감각한 눈을 올려다보며 원식은 말했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개새끼야. 그 말 한마디 이후. 그의 악몽은 툭 하고 끊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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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홍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악몽 같았다. 왜 하필 이런 꿈인가. 그는 머리를 잡아 뜯으며 고갤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내가 너무 예민해서 그래. 정말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덜덜 떨리는 숨을 겨우 내쉬었다.
     
그 날의 일을 제대로 본 것도 아닌데. 아니, 아예 보지도 못했는데 이런 현실같은 꿈을 꾸고 났더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대체 왜, 어째서. 제대로 된 범인은 유추하지 못하는 바보같은 뇌는 계속 최악만을 생각하는지. 홍빈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익숙하지 않은 장소에서 자서 그런가. 홍빈은 원식이 다친 날 이후, 경찰 조사로 인해 상혁과 택운과 함께 근처의 여관에서 지냈다. 아무래도 정신적인 충격이 있어서, 그 집에 바로 머무르기에는 모두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고작 일주일. 원식을 바로 옆에서 지키고 앉아있는 재환을 제외하고 세 사람은 있는데로 머리를 굴리며 경찰에게 협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건져지는 건 없었다. 아무리 수사를 해도 나오지 않는 증거들. 집 안으로 들어와서 밖으로 나가는 CCTV영상은 잡혔지만 그 이상 드러나는 것 없이 지속되는 답답함에 모두가 피폐해졌다. 홍빈은 물론 밝았던 상혁까지. 그 날의 충격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일주일 내내 제 때 잠들지 못해 매일 새벽에 겨우 지쳐서 잠드는 상혁과, 오히려 저녁부터 힘없이 잠드는 택운의 사이에서 유일하게 제 시간에 잠드는 홍빈은, 흐트러진 상혁의 이불을 바로 덮어주곤 한 숨을 쉬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택운이 형이……어디 갔지.”
     
상혁의 너머에서 잠들었던 택운이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은 충전되고 있는데. 핸드폰의 주인인 택운이 없었다. 지금 시간은 새벽 4시. 동이 트기도 전인 어두운 시간이었다. 화장실에도 없는 것 같은데……. 설마 또 몽유병이 도졌나 싶은 마음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으응, 뒤척이는 상혁을 한번 돌아본 홍빈은 망설임 없이 위에 흰 가디건을 걸쳤다. 상혁이 자주 입는 것이었다. 자신의 것보다 품이 한 뼘은 더 넓은 가디건을 입고, 홍빈은 핸드폰을 들고 방을 나갔다.
     
깜박, 원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어둠 속에 형형히 빛나던 눈을 발견치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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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빈은 혹시나 해서 재환에게도 전화를 해본 뒤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동안 괜찮았는데 대체 왜! 왜 이 시점에? 홍빈은 새벽 4시 31분, 아직 깜깜한 거리를 뛰어다녔다. 서늘한 새벽이건만 땀이 등 언저리에 가득했고, 입고 나왔던 가디건은 손에 걸친채로 뛰어다녔다.
     
택운이 형, 혀엉- 그가 다닐만한 곳을 돌아다니면서 작은 목소리로 택운을 불렀지만, 잠든 사람이 알기나 할까.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않는 그를 원망하며 그가 머리를 털었다. 머릿속이 땀으로 가득했다. 
     
학연은 매번 택운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냈던 것일까. 홍빈이 거친 숨을 몰아내쉬며 다시 한번 핸드폰을 확인했다. 여전히 묵묵부답. 재환도 함께 찾아보겠다곤 했지만, 사실상 원식이 사경을 헤매는 와중이라 차마 부탁할 수 없어서 그 도움을 거절한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를 굴렸다.
     
정말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일어난 일이다. 갑작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학연은 늘 택운이 ‘자주 가는 곳’ 이라고 이야기 했으니까. 잘만 생각하면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잘 생각해. 이홍빈.. 정택운은 그렇게 나돌아다니는 인간이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린 그는 더운 숨을 후욱 내뱉으면서 머리를 차갑게 식혔다. 집이랑, 집 앞 골목.. 혹은 병원과 꽃집. 이미 지나온 길들은 다 제외하고 남은 곳은 자주 향하던 버려진 공원.
     
있을지는 모르지만, 일단 공원으로 가기 위해서 몸을 틀었다. 그 때였다.
     
“어, 정택운!”
     
질질, 바닥에 다리를 끌며 멍하니 걸어다니는 사람. 바보같이 모자라보이는 사람. 아무리 봐도 그가 찾던 정택운이 맞았다. 아이씨, 한참 찾았잖아. 반가움에 웃음이 터져나와 택운에게 달려간 그는 곧장 택운의 어깨를 잡고 이곳 저곳을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깨달았다.
     
“어디 다친데는 없……!”
     
푸욱, 날선 칼이 제 옆구리를 찔러온 순간.
     
“…왜……?”
     
고통에 주저앉은 다리를 ‘그’가 짓누른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 * *
     

 


허억, 숨을 몰아내쉬며 잠에서 깨어난 원식은 복부와 자신의 목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말라 쉬어버린 탓에 목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아악.. 악, 무음과 같은 비명이 입에서 터져나오고, 온 몸의 근육이 아우성을 치며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온 몸이 끊어질 것 같았다. 다리는 움직일 수 없었고, 목에서 오는 뜨끈한 고통에 눈물이 절로 고였다.
     
카학, 하악- 성대를 긁는 듯한 숨소리가 터져나왔다. 아프다, 더럽게 아프다. 아픔에 온갖 분노와 슬픔이 섞여 떨어졌다. 대체 왜, 그 새벽. 왜 나는 그 새벽에 일찍 잠에서 깨어났을까. 왜 당신은, 그 칼을 쥐고 있었을까. 그 칼을 왜 내게 향하게 했을까. 왜 하필 당신이었을까?
     
근육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도 원식은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그는 기어이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귓가로 스미던 눈물이 후두둑, 뺨을 타고 흘러내려 옷을 적셨다. 눈 앞이 흐렸다. 흐린 눈 앞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들어와 저의 뺨을 감싸쥔다. 다급했다. 하지만 이 마음보다 더 처절했을까. 이기적인 생각들과 서러움이, 그리고 고통이 뒤섞여 그의 목에선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가. 수많은 사람들이 들어와 자신을 보려 했지만 원식은 눈을 감아버렸다. 대체 무엇을 봐야하며, 들어야하고, 믿어야 하는가. 이젠 무엇이 뭔지 알 수 없는데. 자신조차 믿을 것이 될 수 없는 이 가여운 생을 신은 어찌 여기실까. 그 이전에 우리를 이 악에서 구해줄 신은 존재하던가.
     
“김원식!”
“아악, 아아악!”
“위험……!”
     
와장창, 원식이 링거를 쓰러트리자 그의 손목에 있던 바늘이 뽑혀나갔다. 그와 동시에 후두둑 떨어진 핏방울이 새하얀 그의 환자복에 흩뿌려졌다.
     
짐승처럼 울부짖는 원식을 끌어안은 재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째서인지 알 수가 없었다. 몸부림치는 그 모습이 안쓰러워서, 그리고 기어이 저가 생각하던 일 같아서. 재환은 필사적으로 그를 꽈악 끌어안았다. 괜찮아. 괜찮아, 김원식. 괜찮아. 언젠가 자신이 울 때 학연이 해주었던 것처럼, 재환은 원식이 마음을 추스리길 기다렸다. 원식의 복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진한 피내음과 소독약 냄새가 코 끝을 찔렀지만 재환은 모든 아픔을 눈에 담았다.
     
“어…허, 어째서…! 왜…대체…왜…!! 그 새끼…가……대체 왜……!!”
“…원식아.”
“대…체…왜…….”
     
어쩌면 평생 이 아픔을 안고 살아야할 이 가여운 인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꺽꺽 울음을 토해내며, 홀로 그 끔찍한 시간동안 고통을 받아내고 있던 원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후 다만 고개를 돌렸던 것은, 신이 너무나도 잔혹했기 때문이었다. 모순되어 엉망진창인 상황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해야했던 것일까.
     
귓전을 때려오는 울부짖음과 전화벨소리. 소란스러움에 머리 끝이 아득해지는 느낌에 눈을 감은 재환은 후에 생각했다.
     
아, 죽어도 눈을 감지 말아야했는데. 처절하게 무너져 내린 재환은 며칠 전 원식과 똑같이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홍빈을 보며 생각했다. 죽어도 그 전화를 받아야만 했는데. 잠식되어가는 어두움이, 그들을 잡아먹고 있었다.
     
     


* * *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들으면서도 이름을 알지 못하는 그 신비롭고 처연한 바이올린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어려운 곡이라고 알려진 그 바흐의 파르티타의 샤콘느를, 학연은 이따금씩 연주하곤 했었다.
     
어떻게 저런 연주를 할 수가 있지. CD로 듣거나 혹은 어딘가를 지나가며 들어봤던 그 샤콘느는 비장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학연이 연주하는 그 샤콘느는 늘 처연하고 슬프게 들렸다.
     
첫 부분을 왜 그렇게 연주 하느냐고 물으면, 학연은 늘 그렇게 말했다.
     
‘바이올린이 내는 비명이야.’
     
바이올린이 내는 비명. 슬픔에 못 이겨 결국 자신을 다 뜯어가며 내는 소리. 학연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 물음에 재환은 늘 고개를 기울였다. 뭔 소리야...10년을 알고 지냈지만 학연은 늘 알 수 없는 말만 했었다. 재환은 학연이 왜 그런말을 하는지, 그 말들의 의미는 뭐인지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머리만 아플 게 당연하니까.
     
아직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자길 거둬준 사람이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이상한 소리한다고 멀리했을 사람 중 하나였던 이인데. 이해를 하고 말고, 그런게 따로 있었을까.
     
‘재환아.’
     
저를 보며 웃어왔던 사람의 미소가 어땠는지. 그 해사한 미소 속에 뭐가 있었는지. 이젠 알 수가 없었다.
     
재환은 원식의 병실에서 나오는 형사들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사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금 상황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했다. 그 말에, 재환은 고갤 기울였다. 정말 단 하나의 단서도 없습니까? 믿기 힘들어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재환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여관에 머물고 있던 한상혁씨도 그렇고. 현장에 유일하게 있던 정택운씨 조차, 이전에 몽유병으로 정신과를 들락거린 기록이 여러 번 있고……. 그 보다는 문제가, 범행에 사용 된 칼이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왜 문제야. 재환이 모르겠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형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범행이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보호자분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혹은 이홍빈씨와 김원식씨를 다시 죽이러 올 수도 있고요. 아니면……막내분까지 타겟으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담담한 그 말투와 달리, 그 속에 담고있는 위험성은 너무나 커서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건지.
     
“혹시 보호자님을 비롯해, 피해자분들까지. 원한을 샀던 분이 있습니까?”
     
그 물음에 재환은 딱히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있다면 있다. 한 사람. 그 한 사람이 워낙 사람을 많이 죽이고 다녀서 원한 산 사람이 한 두명이 아닌데. 재환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결국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석연찮은 대답에 형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고갤 끄덕였다. 뒤돌아서 가려는 형사를 붙잡은 재환이 물었다. 
     
“그, 범행이.”
“네?”
“끝나지 않았다는건…….”
“……아니길 바라야죠.”
     
아니길 바란다, 그 한마디에 재환의 머릿속은 더더욱 엉망이 되어버렸다. 가족같이, 형제처럼 지내온 사람 한명이 죽고 두 명이 크게 다쳤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어찌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자신 또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경찰 측에서 보호를 해주겠다곤 했지만, 그것도 어찌 믿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살인청부일을 해왔던 학연을 정말로 경찰들이 모를까. 그럼 그 학연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우리를 모르기는 할까? 제대로 알 수 없는 의미 없는 고민들이 뒤섞였다.
     
어느 날 들었던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가 귓가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아, 결국 참지 못할 어지러움에 재환은 두 눈을 감아버렸다.
     
.
     
그 날 밤, 재환은 악몽을 꾸었다. 익숙했던 그 칼이, 익숙치 않게 제 몸을 찔러오는 꿈.
     
그리고 깨어났을 땐…….
     
“……김원식?”
     
텅 비어버린 원식의 침대와, 벽과 함께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있는 형사들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이쯤 되니 모든 것이 악몽 같았다. 재환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이 장소가, 하얀 색으로 가득하던 그 병실이 맞았는지.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재환은 허탈히 웃음을 내뱉었다. 처음부터, 당신이었구나. 꿈에서 보았던 그 익숙한 검은 칼이 저를 향해 달려들었다. 재환은 이내 눈을 감고, 순식간에 다가온 죽음이라는 것을 감내하여 받아들였다.
     
쾅, 복부가 아닌 머리 끝에서 느껴진 그 둔탁한 고통과 함께 느껴진 향기는, 코 끝을 지독히 맴돌던 혈 향이 아니었다. 
     
생전, 학연이 즐겨쓰던 향수의 향기.
지금은 피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향기였다.
     
.
.
.
     
아, 택운은 뼛속까지 시린 차가움에 몸을 웅크리다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어제까진 조사실에 있었는데…. 여름인데도 차가운 냉기 가득한 숨이 덜덜 터져나왔다. 콜록, 콜록. 모래에 얼굴을 부비며 자리에서 일어난 택운은 익숙하지않은, 혹은 익숙한 장소를 보고 몸을 굳혔다. 뭐야, 여기. 내가 왜 여기에 있어. 머리 털 하나하나가 쭈뼛 서오르는 기분에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
     
학연이 종말을 맞이한 장소였다. 학연이 그렇게 되고, 절대로 오지 않았는데. 택운은 제 팔을 쓸면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뻥 뚫린 천장. 그래. 그 날 학연이 종말을 맞이했던 때에. 저 뚫린 천장으로 검은 비가 수없이 세차게 내렸었다.
     
눈을 내리 감았다. 하지만 가려지는 것이 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누군가의 속삭임까지 들려왔다. 
     
‘눈을 뜨고 똑바로 봐.’
     
학연의 목소리일까. 악마의 속삭임일까. 택운은 덜덜 떨리는 숨을 가다듬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택운아.’
“……대체.”
‘눈을 뜨고 봐.’
“나한테 왜 이러는 거…….”
‘네가 한 짓을.’
     
택운은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나니, 모든 것이 흐릿하다가 이내 참혹하게 선명해졌다. 콜록, 하고 들려오는 기침소리에 택운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 신이시여……. 덜덜 떨리는 입술로 내뱉은 한마디가 부서지듯 땅에 떨궈졌다. 
     
‘어때?’
“아……아아…….”
‘네가 만든 그 동안의 나날들이…….’
“안돼…….”
‘마음에 들어?’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냉기는 가셨지만 떨림이 멎질 않는 몸에서 물었다. 정말로 그럴리가 없어? 네가 기억 못하는 건 아니고? 가슴 속 깊이, 어디에서부터인가 올라오는 끔찍한 물음에 그가 눈을 감았다. 그럴리가 없어. 그럴리가 없어……. 내가, 내가 재환이를 때렸다고…….
     
바르작거리는 움직임에 모래가 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이 끙끙거리며 숨을 내쉬는데, 덜덜 떨리는 고개를 저으며 택운이 눈물을 떨구었다. 이내 무시할 수 없는 소름끼치는 음성이 귓가 언저리에 속삭였다.
     
‘그 뿐만이 아니지.’
     
그 뿐만이 아니야. 이제 네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서 현실을 마주해, 택운아. 이제는 학연과 같아진 그 목소리 톤이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다정함이 깃든 그 잔인한 말에, 택운은 흐려진채로 잔뜩 성난 재환과 눈을 마주했다.
     
대체 왜, 너는 그 짓을 한거야……. 눈가에 어려있는 그 눈물이 택운의 심장을 관통해왔다. 재환 뿐만이 아니었다. 재환 혼자서 택운과 마주해 있으면서도, 재환만이 그 원망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 말을, 직접 들었었다. 지금의 그에게서도, 그때의 그들에게서도.
     
“…….”

 

그럴리가 없는데, 그런 말을 들었다. 그런 말을 들을 행동을 하지 않았는데. 그런 말을 들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홀로 동떨어진 듯한 기분을 가졌었음에도 일부러 외면했는데. 설마, 설마 정말 저가 생각하는 그 최악일까봐. 택운은 고갤 젓다가 눈을 감았다.

 

찰그랑, 익숙한 가는 쇠의 소리에 눈을 뜨고 고갤 든 택운은 속절없이 떨리는 눈으로 재환을 바라보았다. 검은 칼, 학연의 손길이 닿아있는 그 생명과도 같은 칼이 재환의 손에 들려있었다. 재환은 연신 끓어오르는 눈물을 떨구며 택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직 맞은 머리가 제대로 회복되진 않은건지, 주춤거리며 서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네가 대체 왜…….”
“…….”
“왜…우리를….”
“…….”
“왜…이렇게…….”

 

왜 이렇게 만든거야……? 비참함에 울먹임이 섞여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택운의 숨이 떨렸다. 네가 우리한테 어떻게 이래? 우릴 왜 이렇게 만들어……. 꺽꺽거리는 울음소리에 택운이 숨이 멎은듯 가만히 재환을 응시했다.

 

재환이가, 이유없이 화를 내는 애가 아닌데. 그런데 택운에게 화를 내는, 그 분을 이기지 못해 떨리는 손을 보며. 그는 무슨 말을 해야 했던 걸까.

 

학연아. 나는 모르겠어.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재환을 보면서 택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택운은 눈을 감자마자 눈물을 떨구며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로 내가 그런거라면, 나는 용서받기 위해 뭐라도 해야하는 거 아닐까. 이 아이에게,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 아닐까. 작은 그 물음과 동시에 복부를 파고드는 끔찍한 고통에 택운이 감았던 눈을 뜨고, 헉 숨을 내쉬었다.

 

악, 아악…….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택운이 자리에 주저 앉으며 제 뺨 위로 쏟아져 내리는 저주같은 눈물에 울부짖었다. 죽어, 죽어! 이 새끼야! 이 악마같은 새끼,  지옥에 가버려……! 저주의 말을 쏟아내며 피가 금방 스며들어 붉게 빛나는 흉기를 뽑아낸 재환이 미친 사람처럼 외쳤다.

 

형제라고 부르던 이의 칼 끝이 다시 택운에게로 향한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총성이 들려왔다.

 

타앙- 숨이 멎을 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한번 더 복부를 찔러온 칼 끝과 그 찢어질 듯한 총성에 재환과 택운 둘 다 숨이 멎은듯 허물어져, 쓰러졌다.

 

아, 안돼. 숨조차 내뱉을 수 없는 입술 끝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재환을 향한 아픔이 터져나오지 못하고 머무름과 동시에. 택운은 쓰러져서 빛이 가득 스민 천장을 바라보았다.

 

택운아, 괜찮아. 
나는 이제 그 아이에게 죽어도 괜찮아.
괜찮아. 
네 손끝에서,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그 어느 날 학연이 했던 그 아이와 저를 향한 말들이 머리 끝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아, 숨이 내뱉어지듯 한숨이 터져나왔다. 아, 학연아. 내가, 너를……죽인거구나. 뒤늦게 기억해버린 진실에 심장이 멎을 듯 아파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 날 새벽, 원식에게도. 홍빈에게도 그런 몹쓸 짓을 한 것이 나였구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 돌린 시야 끝에 여전히 가슴 아프게 울고 있는 재환이 숨을 헐떡이면서 그 입술로 읊조렸다.

 

절대, 용서, 안, 해. 숨조차 뱉기 힘들어하는 입술에서 검붉은 피가 후두둑 튀어나왔다. 재환은 손에 쥐고있던 그 검은 칼을 이내 손에서 놓아버렸다.

 

학연이 쥐었던 그 칼. 하지만 결국에는 택운 자신이 쥐었던 그 칼. 검은 색으로 칠해져, 모두의 생명을 하나 둘 앗아간 그 저주같은 칼을 바라보다가 재환은 눈을 감았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는가. 우리들에게는.
처음부터 얽혀서는 안 될 관계였는데 얽힌것?
혹은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버림 받은 것?

 

아니면 처음부터 너무 서로를 믿었던 죄였을까.

 

알 수 없었다. 이젠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힘도 없어서 재환은 제 오른쪽 가슴에서 느껴지는 멍한 감각에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지키고 싶었던 것이, 결국 나를 죽이는 구나.

 

재환은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
.
.

 

원식과 홍빈은 약국에서 일하던 재환의 계략으로 인한 약물 과다 치사로 죽음을 맞이했다. 택운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들은 소식은 허무한 거짓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택운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진실들이 떠올랐건만. 그 누구도 택운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그저, 죽음에서 살아돌아와주어서 고맙다는 말 뿐. 하루아침에 재환은 택운은 물론 학연이 했던 모든 일들을 뒤집어 쓴채로 사라져있었다.

 

학연을 죽인 것도, 원식이와 홍빈이를 죽게 만든 것도 자신이건만. 상혁은 그것도 모르고 울면서 그 커다란 체구로 택운에게 안겨 말했다. 지켜주지 미안하다, 고맙다. 살아와줘서 고맙다. 자신이 한 일을 알면 절대로 하지 못할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택운은 허탈함에, 혹은 죄책함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세상은 거짓 연쇄 살인마의 등장과 그의 죽음을 시끄럽게 외치며 욕했다. 그 모든 말들이 저에게 돌아와서 꽂히고 나니, 택운의 가슴 한켠이 저릿했다.

 

퇴원을 하고, 택운은 모두의 발길을 제한시킨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아니, 모두의 집으로 향했다. 학연이 죽은 뒤로 더 똘똘 뭉쳐서 서로를 도왔고 끌어안았고, 모든 애정과 믿음을 쏟아 부으며, 살 부벼가고 다투고 싸우면서 지내온 그 집에는 사람의 온기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만들어낸 장소에는 이제 남은 것이 없었다. 경찰에게 들어보니, 다음달에 철거할 예정이란다. 모든 지원을 해줄테니, 정신적 보상을 해줄테니 떠나라는 말에 상혁은 해외로 가자고, 가서 새로이 시작하자고 애꿎은 눈물을 씩씩하게도 훔치며 말했다.

 

택운은 가만히, 아주 가만히 집 안을 훑어보았다. 추억이 곳곳이 스민 장소에는 어두움들이 가득하여, 이젠 말 할 수 없는 슬픔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느 날, 어느 어린 날.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파르티타 2번 중 샤콘느가 듣기 좋아서 CD로 몇번 들었던 택운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습해온 학연과 툴툴거리면서도 몸이 약한 저를 위해 약을 챙겨주고 온갖 비타민이고 영양제고. 정성을 쏟아부었던 재환의 엉성함. 집안을 가득 꽃으로 채우기 시작한 원식과, 그 꽃들을 보고 가끔 구박하며 설탕으로 모든 요리를 했던 홍빈과, 소금으로 눈 내리게 하는 상혁의 그 자그맣고 귀엽던 다정함들이 부서져 내렸다.

 

택운의 눈에서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미 가슴 속 깊이부터 차오른 고통스러운 눈물이 뺨을 타고 바닥에 떨어졌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얘들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부서져버린 나날들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음을 깨닫고 흘러내렸다.

 

상혁은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있는 택운에게 다가가 얼른 그를 끌어안았다. 형, 혀엉……. 울지 마요, 네? 상혁은 택운이 깨어난 뒤로, 택운의 작은 반응 하나에도 벌벌 떨 정도로 택운에게 모든 것을 맞췄다. 그 어리던 15살의 상혁은 25살의 상혁이 되었지만 여전히 택운을 믿고 의지하고 끌어안으려 노력하며 눈물을 삼켰다. 택운은 상혁의 품에 안겨서 한참을 울다가, 이내 누구도 보지 못하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눈물속에 씻겨 내려간 감정은 대체 무엇이었기에 그리고 한 순간에 마음이 편해져버린 것일까. 택운은 상혁의 옷자락을 쥐고 울음과도 같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미안해…상혁아….”

 

너에게 거짓을 고해서 미안해.

 

.
.
.

 

미국, 로스앤젤레스. 천사들의 도시로 향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때. 아무도 저들을 모르는 곳에서 살게 되었을때. 그는 비로소 정택운이 아닌…….

 

 

“Bartender, I don't think you're from this place. Is that right? (바텐더, 자네 이 곳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맞나?).”
“I'm from Korea. With my brother.(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동생과 함께요.)”
“ Really? What is your name?(정말? 자네 이름은 뭔가?) .”
“Leo.(레오).”

 

가슴 속 한 켠 자리잡고 있던 그 아이. 레오, 검은 칼을 쥐었던 자신 그대로가 되어 있었다.

 

.

 

갓 서른이 된 그는 아직 다정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매일 아침 따뜻한 식사를 만들었고, 늘 그랬던 것처럼 매일 아르바이트를 나가는 상혁에게 웃음을 내지으며 배웅을 건네었다.

 

다만, 이따금씩 누구도 모르는 이질적인 미소를 터트렸을 뿐.

 

그는 천사들의 도시에서, 아직도 천사와 같은 위선적인 웃음을 터트리며 날마다 자신을 위해 손바닥 안에서 돌아다니는 검은 저주를 갈아내면서 학연의 연주보다 못한 CD의 샤콘느를 들으며 매일을 곱씹었다.

 

J의 죽음, 그리고 찾아온 L의 자유.
모든 것이 완벽한 나날 속에서, 그는 매일 신의 앞에서 거만한 감사인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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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시여, 들으소서. 당신의 자녀는 결국 이렇게 마귀의 본능 앞에서 솔직하니. 
아, 어찌 이리 모든 죄악이 아름다운지요. 신이시여.

 

신이시여, 그대가 소멸하지 않으신 죄는 검디 검게, 잔상에 남아 모두를 죽음에 이르게 할테니.

 

그때는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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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th of 'J'_

 

_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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