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igger
PINK RAVI
@ravithepink
*이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은 사실과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이 글은 원색적인 욕설, 범죄묘사, 다소 폭력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손 안에서 맴도는 묵직한 금속성의 무기는 불안을 고스란히 머금고 미지근히 달아 올라 있었다. 손을 미끄러트리는 땀이 공포인양 그 위에 묻어 검게 반질거린다.
그는 몇 번을 더 고쳐 쥔 그 것을 다시금 매만졌다.
오직 한 발. 단 한 번의 총성을 기다리며.
<Trigger : 덫>
몇 번 빨지도 못한 담배가 구두 굽 아래서 짓이겨졌다. 채 뱉지 못한 연기가 푸스스 흩어지고, 어둑한 실내에 흔적 없이 녹아 내린다. 택운은 습관적으로 코를 찡그렸다. 지하의 나이트클럽은 담배 냄새로도 못 가릴 정도로 쩐내가 심했다.
나이트 룸의 싸구려 소파는 기댈수록 푹 꺼져서 오래 앉아 있을 곳은 못 되었다. 손 안에서 깨작이던 카드를 테이블 위로 던져버린다. 어차피 시간이나 끌려고 하는 짓이었다. 택운이 자리서 일어나자 하품이나 쩍쩍 하며 상대해주던 남자가 대강 테이블을 쓸어 정리한다. 근처에 삐딱하게 서있던 건달이 뒤로 따라붙어서 속삭거렸다.
"물건 준비 해뒀슴다."
"물건은 무슨 물건이야. 내가 무슨 약 받아처먹냐?"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용어에 택운이 진저리를 쳤다. 그냥 차에 실어 뒀다고만 하면 되잖아. 타박하며 문을 나섰다. 복도서 마주치는 어깨들마다 재수 종쳤다는 눈들을 하고서도 마지못해 인사는 하는 게 꼴같잖아서 코웃음이 나왔다.
"인상들 풀어. 나는 좋다고 이 찌린내 나는 데에 오는 줄 알아."
대번에 얼굴들 구겨지는 걸 보고 택운이 낄낄거렸다. 뒤통수에 와 꽂히는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저벅저벅 걸어 건물을 벗어났다, 지긋지긋했다.
건물 뒷문을 나와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담벼락 옆 틈새를 좀 걸어 나가야 차를 대어둔 곳이었다. 택운은 어깨로 담을 긁으며 걸었다. 입고 있는 라이더자켓에 돌가루가 묻어 갈렸다. 한 명 서 있기도 비좁은 곳을 휘청이며 걷는다.
막다른 길을 다 가로막고 주차된 까만 SUV 운전석에 올라타 백미러를 흘끔 보니 뒷자석에 놓인 '물건'이 보인다. 택운은 건성으로 있는 지만 확인하곤 시동을 걸었다. 빨리 이 구덩이를 벗어나고 싶었다.
차르르, 찰칵.
차량이 측면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 창문가에서 까만 렌즈가 반짝거렸다. 묵은 매연을 토하며 골목길을 나서 사라지는 차의 번호판까지 또렷이 잡고 나서야 남자는 카메라를 내렸다. 그리고 찍은 것을 확인했다.
청춘나이트 뒷문으로 들어가는 택운의 모습과 그를 맞는 남자, 그리고 시간이 지난 후 둘이 들어간 곳에서 나와 택운의 차 뒷좌석에 무언가 실어두는 남자, 택운이 다시 건물에서 나와 차를 타고 사라지는 것까지. 모든 것이 담겼다.
이거면 충분했다. 남자는 잠시 턱 밑으로 내려두었던 마스크를 다시 올려 쓰고 서둘러 카메라를 백팩에 우겨 담았다. 바삐 건물을 벗어나는 뒷모습을 배웅하듯 묵은 먼지가 담배연기처럼 흩어진다.
"씨발."
택운은 봉투 안에 든 걸 확인하고 대뜸 욕부터 뱉었다. 인천 서부 경찰청 정택운 경사님 앞, 인쇄 라벨지로 그렇게 붙어 자리에 놓여있던 누런 종이봉투 안에는 언제 찍혔는지 모를 사진들이 아주 두툼했다. 반지르르한 사진에는 여태 택운이 '외근'이라는 명목으로 행했던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시기는 한달 전부터 바로 어제의 것까지 아주 꾸준했다. 청춘나이트 뒷문으로 출입하는 택운과 무언가 싣고 나와 그의 차에 넣는 조직원이 분명한 사내들 그리고 차량 번호판까지 또렷했다.
봉투 내용물을 빠르게 훑어본 택운은 흘긋 주변에 누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팀원들은 외근인 건지 띄엄띄엄 보이지 않았고, 평일 밤 9시가 지난 경찰청 형사3과 사무실은 인적이 드물었다.
곱게 사등분으로 접혀 사진과 함께 끼워져 있던 종이가 펼쳐졌다. 그리고 곧 손 안에서 사정없이 구겨졌다.
어디서 좆같은 날파리 새끼가 꼬여서, 택운이 이를 으득 갈았다. 종이에 적힌 건 단 한 문장이었다.
[곧 전화 드리겠습니다]
택운은 별 것 아닌 듯 그것을 추슬러 일단 사건 파일이 든 발치의 쇼핑백에 넣었다. 그 때 마침 들어오는 동료들에게 여상한 인사를 건네며 구겨진 종이를 재킷 주머니 안으로 쑤셔둔다. 손에 땀이 배어 나고 있었다.
그 동안 그렇게 미행을 했으면 이미 행동반경 같은 건 손바닥 안에 꿰이고도 남았다. 청에 있을 때는 연락하지 않을 거란 짐작대로 택운이 청을 나서 차에 올라타자마자 전화벨이 울렸다. 발신자표시제한. 웃기지도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택운이 순순히 전화를 받았다. 곧바로 녹음 버튼을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뭐 하는 새끼야."
[보내드린 건 확인하셨죠?]
"겁도 없이 경찰 뒤를 밟아?"
[그쪽이 협박할 처지가 아닌 건 댁도 알고 나도 아는 건데 왜 가오를 잡고 그래요.]
택운이 시건방진 말투에 인상을 구겼다. 별달리 대꾸할 말이 없어서 더 성질이 뻗쳤다. 하지만 맹세코, 자신만 그 짓을 한 건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해룡과 눈 감아 줄 것 감아 주면서 좋게 좋게, 넘어갈 수 있는 선 안에서 처리 하는 게 인천서부청 비공식 룰이었다. 물론,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물질적인 -직접적인 보상으로 받긴 했지만.
하지만 제 아무리 청 내에서 눈감고 쉬쉬 해준다 해도 그게 민원으로 올라가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청장은 조직과의 전쟁을 선포 하겠다고 휘황찬란하게 선언한 만큼 잡소리가 나오는 걸 극도로 싫어했다. 귀에 들어간 그날 부로 싸대기 맞고 옷 벗고 쫓겨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더 이상 경찰이 아니게 되면 해룡 측이 어떻게 나올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거에 비하면 옷 벗는 거야 대수로운 문제가 아닐 정도였다.
"...용건이 뭔데 그래서."
[당분간 협조 좀 해줘요. 쉬워요, 경찰 노릇 해달라는 거니까.]
"...."
[해룡 적당히 엿먹이고 치고 빠지면 돼요.]
"니가 지금 누구랑 붙어 먹은 경찰한테 말하는 건진 알기나 해?"
[그러니까 정경사님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택운이 기가 차서 헛웃음쳤다.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나보고 지금 쥐새끼 노릇을 하라고?"
[쥐새끼라니요, 본업에 충실하게 해드린다니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새끼가..."
[안 내키면 마시고요.]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묘하게 차분했다. 성별과 나이는 조잡한 변조 때문에 가늠되지 않았지만 말투가 분명 어렸다. 택운은 머릿속으로 해룡과 원한관계에 있는 자들을 차례로 떠올리며 용의선상에 나란히 줄 세워 보았으나 그 중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누구야. 대체 어떤 놈이야. 택운이 초조하게 머리를 굴릴 때 신원미상의 협박자는 길어지는 침묵을 승낙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는 언제 한번 만나 점심이라도 먹자는 듯한 톤으로 화두를 던졌다. 물론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해룡이 곧 숙원사업을 하나 시작해요.]
"...."
[서구에 해룡 소유 나이트, 뒤에 도박장 열리는 거, 이건 이미 알고 계실 거고. 그거 눈 감아 준다고 받아 챙긴 게 꽤나 쏠쏠 하셨을 테니까.]
택운은 조용히 이어폰을 꼽았다. 라디오 듣듯 수화기 너머 지껄이는 말을 들으며 차의 시동을 킨다. 끼이이익, 지하 주차장의 고무 바닥 마찰음이 신경줄을 북북 긁으며 뒤로 늘어진다. 창백히 질린 실내등이 그 아래를 지나는 검은 SUV를 서늘히 훑는다.
[이제 거기 기점으로 홍콩에서 가져온 약이 돌 거예요. 해룡이 백륭파랑 계약을 하나 땄거든요.]
끼이이이익.
코너를 돌아 나가다가 무의식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순간 앞으로 쏠렸던 몸이 반동으로 시트에 쳐박히자마자 그가 헐떡거리며 되물었다.
"뭐? 어디서 뭘 가져와? 무슨 파?"
[이미 초대장 돌 곳은 다 돌았어요.]
"이 새끼야. 니가 지금 뭔 말을 하는 건지 알기나 해?"
택운이 경악에 찬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약이야 돈다. 그런데 홍콩 포트마피아가 손을 뻗는 건, 판국이 많이 바뀐다. 약만 들어올까. 절대 아니었다. 해룡 구조가 바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제껏 경찰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 어디서 되도 않는 구라를 쳐. 사실일 리 없다. 자신을 당황시켜 몰아가려는 수작이겠지. 택운이 접촉사고라도 낸 표정으로 숨을 몰아 쉬는데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여상히 지껄인다.
[그게 다는 물론 아니에요. 아직 걔들 빅픽쳐는 시작도 안했어요.]
"니가 망상으로 소설 쓰는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제가 선택지 드린 적은 없는 거 같은데.]
뇌물수수 정황 증거 사진이 손에 있는 이상 일단 까라면 까라? 나오지 않은 뒷말을 이어 붙이며 택운이 조소했다. 떫게 남은 웃음기는 얼마 가지 않아 일그러지는 눈매에 짓눌려 사라진다.
"시덥잖은 경찰 놀이 한번 같이 해 준다 치자, 애기야."
[한 번이라뇨? 아무리 정형사님이 쓰고 버리는 패여도 한 번으론 아깝죠.]
그동안 제가 형사님 뒤꽁무니 들여다보면서 한 고생을 봐서 라도, 하고 마저 덧붙이는 개소리는 안 들어도 뻔해서 택운이 욕을 푸지게 늘어 놓으며 애꿎은 운전대만 퍽 때렸다. 씨발 짭새 6년차에 재수 한번 더럽게 없네. 들으라고 하는 말을 웃어 넘기며 간 큰 협박자가 나지막히 덧붙였다. 여전히 고저 없는 톤이었다.
[이렇게라도 진짜 경찰 노릇 하셔야지 않겠어요? 어머님을 봐서라도요.]
"-뭐?"
뚜-뚜-뚜-뚜-
미처 되묻기 전에 전화는 끊겼다. 택운은 한동안 얼어 붙어 까맣게 꺼진 폰 화면만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잿빛으로 죽은 형광등이 오락가락 껌벅였다. 귓전에서 맥박이 덩달아 펄떡거렸다. 갑자기 하수구냄새가 올라오는 듯 해 그는 코를 찡그렸다.
불길했다.
*
착하게 살기 싫었다. 현직 민중의 지팡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택운은 그랬다.
평생 착하게 살던 아버지는 단 한번의 실수로 사채를 덤탱이 쓰고 식구들 인생까지 한 순간에 진창으로 빠트렸다. 그마저도 다 책임지기도 전에 홀로 목숨을 끊었다. 택운이 중학생 때였다.
흔하디 흔한 싸구려 시나리오 같은 이야기가 그에게는 구렁텅이였다. 발 한 발자국 놔주지 않는 시궁창에서 택운만이라도 건져내려 어머니는 생을 통째로 갈아 넣었다. 아침에는 시장 식당에서 일을 하고 낮에는 미싱공장 시다 일을 하고 새벽엔 건물 청소를 하고. 겨우 들어와 눈 붙이는 밤의 고작 3시간, 그녀는 앓아눕듯 잠을 청했다.
택운은 방학이 제일 싫었다. 돈이 없어 밖에 나가도 할 짓거리가 없어서. 여름이면 습하고 겨울이면 관짝처럼 추운 집 안에 웅크려 앉아 있는 날마다 빚쟁이들이 문을 두드리고 창문을 깨부쉈다. 양복 입은 어깨들은 모자가 사는 퀴퀴한 반지하에 몰려들어 온 동네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고함을 질러댔다. 돈 받아쳐먹고 뒤지면 끝인 줄 알아. 자리를 비운 사이 엉망이 된 집안을 보고 어머니는 주저 앉아 택운을 붙들어 안고 밤새 울었다. 어느샌가부터 아버지의 사진이 담긴 액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택운은 겨울 이불을 정리하다가 장롱 안 비닐봉지에 꽁꽁 싸여 숨겨져 있던 쥐약을 발견했다. 그의 기억엔 아무리 쥐가 끓어도 어머니가 쥐덫을 놓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들고 나가 한 톨도 남김 없이 하수구에 부어버렸다. 비강을 찌르는 날카로운 약 냄새가 하수구 냄새와 뒤섞여 눈이 매웠다. 지독했다. 그건 이미 제 몸에 배어버린 냄새였다.
시뻘개진 눈으로 택운은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집 주위를 쳇바퀴 타듯 돌았다. 차라리 쥐새끼가 되고 싶었다.
택운은 열일곱이 되자 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안 해 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주유소에 배달에 편의점에 서빙에. 운이 좋으면 주말에 공사장 일용직도 하루 이틀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가 그렇게 일 하는 걸 못 마땅해 했다. 다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 자식은 공부해서 떳떳히 팔자 피기를 원했다. 택운이 보기에는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부친이 남긴 빚은 몇십억이었고 이자만 억이 넘어가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아직 원금 상환은 발가락 끝도 못 닿고 이자 갚기 바빴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택운은 꼬박꼬박 돈을 벌어 모아 어머니의 조그만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흰 봉투가 경대 위에 올라와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내가 못나서. 이 애미가 못나서. 마른 가슴팍을 내려치는 주먹을 막지 못하고 택운은 뒤돌아 누워 귀를 틀어 막고 잠을 청했다. 세평 남짓한 집 안은 몸을 한껏 웅크려도 너무 비좁았다.
시간이 갈수록 깡패들이 집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일이 빈번해졌다. 짐 싸서 야반도주를 해도 한 달을 못 가 들켰다.
그때 또래 친구들은 학원에 다니거나, 멋 내려고 오토바이를 타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떼로 몰려 다니며 싸움판을 벌였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그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자각할 때 마다 그 때 그 쥐약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뒤이어 하수구 냄새가 토기처럼 올라와도, 택운은 꾸역꾸역 밥을 씹어 넘길 수 있었다. 살아야 했으니까.
고2에서 고3을 넘어가던 겨울이었다. 북향의 반지하, 아무리 연탄을 때도 자려고 누우면 등골이 시린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드물게 활짝 웃고 있었다.
아들. 이제 우리 고생 안해도 돼. 다 끝났어.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그를 끌어안는 엄마의 품에서 택운은 뜻 모를 한기를 느꼈다. 이렇게 쉽게 끝날 것이었나. 그가 옷처럼 지어 입고 다니던 불행이 가슴팍에서 꺼끌대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이죽거리듯이.
봄이 되자 거짓말처럼 집을 찾아와 행패 부리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어머니는 더이상 새벽같이 일을 나가 밤 늦게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무엇을 하는지 밤에 나가 아침에 들어왔다.
택운에게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라고 했다. 공부를 하라며 사온 문제집들 중 택운이 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책장 넘기는 시늉이라도 했다. 어머니는 여전히 그가 대학에 갈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택운은 굳이 꿈에 부푼 그녀에게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다.
여름방학때였다. 수능을 100일 앞두고 어머니가 백숙을 해줬다. 허겁지겁 한마리를 다 해치운 택운에게 닭죽을 퍼주는 어머니 뒤로 현관문이 쿵쿵 울렸다. 택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를 먼저 제 뒤로 감췄다. 역시 이렇게 쉽게 끝날 리 없었다.
괜찮다 말하려 뒤돌아본 어머니의 얼굴은 이상하게 질려 있었다. 매번 빚쟁이들을 상대하며 나무껍질처럼 뻣뻣해지던 그 체념이 아니었다.
택운은 그 때 기다렸다는듯 명치에서 꺼끌대는 불행의 소리를 들었다. 찐득하게 눌어붙어 손톱으로 긁어내고 문대도 짙은 회색으로 자국이 남은 그것이 낄낄대는 불길한 소리를.
굳은 택운이 현관을 열자 퀴퀴한 땀냄새가 하수구냄새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앞에 버티고 선 험상궂은 남자가 뭔가 눈 앞으로 들이밀었다. 경찰뱃지였다.
뜻 모를 말을 지껄이며 들이닥친 남자들은 희게 질려 반항도 못하는 어머니의 팔을 끌고 연행했다. 팔을 붙들고 늘어지다가 택운은 발에 채여 나동그라졌다. 밥상은 이미 엎어져 흰 죽이 오가는 구둣발 아래 거무죽죽하게 밟혔다.
택운은 기어코 따라나가 어머니를 태우고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경찰차의 뒤 꽁무니를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이 고개를 빼고 수군거렸다. 저 집 아줌마가 무슨 사기를 쳤대나봐. 세상에, 간도 크지.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 못할 짓이 뭐 있겠어. 아이고, 저 아들내미는 어쩌고.
떠드는 소리가 파리처럼 왱알댔다. 택운은 땡볕 아래 놓인 쓰레기봉투처럼 한참을 우두커니 파리떼들 가운데 서 있었다. 쥐약냄새. 하수구냄새. 찐득히 눌어붙은 불행의 냄새.
"...내가 엄마 아들이 맞긴 한가봐."
택운이 자조했다. 병실 침대에 앉아 있는 어머니는 흡사 링겔바늘 꽂힌 나무조각 같았다.
긴 복역을 마치고 나온 후 몇 년 되지 않아 그녀는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았다. 병은 무섭게 진행되어 어머니는 이제 택운을 알아보는 날이 더 드물었다. 그나마 이렇게 아무것도 못 본 척 하는 날이 나았다. 최소 조용하기라도 했으니까.
택운은 창문 옆에 앉아서 싸구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우중충한 하늘만 노려보았다. 그러다 가끔 창문에 비치는 어머니를 살폈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경찰씩이나 되어서는. 하는 짓이 어째 똑같이 가네."
나는 이거 한다고 그때 엄마가 사기친 5억정도 까진 받아 챙기지 못 할 것 같지만. 기어코 조소가 기어나온다.
어머니가 미웠다. 하지만 그녀를 이해했다. 그렇지만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득바득 경찰이 되었지만, 결국은 자신이 그녀보다 나은 인간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업보겠지."
그가 뿌린 쥐약은 분명 그때 하수구 속으로 사라졌는데. 뒤꽁무니에 붙어 퍼렇게 가루를 흘리며 아직도 그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꼬리표처럼.
너덜거리며 옷처럼 기워 입고 다니던 불행은 이미 단단히 굳어 그의 겉가죽이 되었다. 웬만한 것으로는 그것을 뚫고 그에게 상처 주지 못했다. 그건 그나마 다행인 부분이었다.
택운이 자리서 조용히 일어났다. 여전히 어머니는 목석처럼 앉아있었다. 오늘은 이렇게 넘어가려나보다, 생각한 그가 한발자국을 떼자 마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아아아악!! 사람 살려!!!"
또 시작이었다. 택운은 저를 보고 병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긴다.
"아저씨 진짜 나 돈 없다. 먹고 뒤질래도 없다!!! 뱃가죽 다 긁어내도 땡전 한 푼 안 나온다고. 그냥 가. 가라고!!!! 아아악!!!!!"
병실을 나서는 택운 옆으로 간호사들이 뛰어들어간다. 택운이 오는 날에는 으레 있는 일이라 그네들의 표정은 그다지 당황도 없었다.
"사람살려어어!!! 경찰불러!!!! 누가 경찰 좀 불러주소!!! 택운아!!! 택운아아!!!"
닫히는 문 너머로 비명이 꿀꺽 먹힌다. 택운이 입술을 질끈 깨문다. 뚜걱, 뚜걱, 점점 빨라지는 발소리 뒤로, 창백한 복도 위에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퍼렇게 꼬리를 문다. 쥐약처럼. 택운아, 택운아. 살려주세요. 제발. 제발. 제발.
어두운 비상구에 들어와서야 소리가 그친다. 택운은 무너지듯 계단에 주저앉았다. 숙인 뒤통수 위로 퍼런 비상구 불빛이 어른거렸다.
그는 한참을 쓰레기봉투처럼 그렇게 퍼질러 앉아있었다. 아까 들은 비명소리가 여전히 귓전에서 맴돈다. 파리처럼 왱알댄다. 택운아, 택운아. 그를 부르는 처절한 절규가.
*
"원스타나이트, 불법도박장 운영 현장적발. 축하드리고요. 그동안 많이들 해드셨어. 그지? "
이죽거리며 택운이 담배 한까치를 빼어 물었다. 차례로 연행되어가는 사람들 뒤를 따라 나온 업장 매니저는 택운을 보며 눈을 부라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사님이 이러시면 안되죠. 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최실장. 경찰이 경찰 일 한다는데. 공무집행에 불만 있어?"
그 동안 받아 먹은 게 있지 않냐는 눈빛을 뻔뻔하게 받아 넘기며 택운이 턱짓했다.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이는 택운의 어깨 너머로 죽상을 쓴 매니저가 경관들에게 끌려 경찰차에 몸을 구겨 넣는다.
그러게 적당히 눈치 보면서 몸 사렸어야지. 그랬다고 없었을 일은 아니지만. 택운이 담배연기를 뿜으며 줄줄이 굴비처럼 연행되는 사람들을 훑었다. 창백한 가로등이 지나는 사람들 머리통 위를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춘다.
맹랑한 협박자의 '지명'은 오늘로 세번째였다. 형사3과 정또라이가 갑자기 경찰 놀이에 맛들려 '관리'하던 업장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얘기는 돌만큼 돌았을 건데, 이것들은 그렇다고 몸을 사리지도 않았다. 여기 하나 영정 때리면 아 좆됐구나 하겠지. 경찰 업수이 여기는 게 하루 이틀이겠냐만은. 묘하게 입맛이 써서 택운이 인상을 쓰는데, 지원 나온 같은 과 차학연 형사가 다가와 옆에 섰다. 담배연기를 손으로 파득파득 헤치며 얼굴을 구긴 학연이 그에게만 들릴 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장님이 눈치 주는 건 귓등으로도 안 쳐먹냐?"
"...."
"주기적으로 군기 잡는다지만 한 두번이면 종칠 일이었잖아."
딱히 할 말이 없어 택운은 필터만 질겅거렸다. 정기 청소랍시고 뱀굴 들쑤시는 거야 분기별 행사였지만 이번엔 좀 스케일이 과했다. 올라간 보고에 형사3과 황과장은 딱히 달가워하지 않았다. 해룡쪽에서 말 나오기 전에 그쯤 하라고 눈치 주는 걸 번히 들었으면서 택운은 기어코 오늘도 서 하나 인원을 끌고 나와 업장 하나를 조져놓은 것이었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야."
"세 번 하면 많이 했다. 이쯤 해."
"뭐... 돌아가는 상황 봐서."
"상황을 보긴 뭘 봐, 언제는 꽤나 전략적이었던 것처럼 말하지 말고."
학연이 기가 차서 빈정거리든 말든 딴청 피며 눈을 돌리는데, 앞쪽 빌라 건물 어딘가에서 까만 무언가 반짝였다. 택운은 자연스럽게 발을 물려 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로등 빛 아래서 한 발 물러나 그림자 속으로 섰다. 그리고 티 나지 않게 고개를 틀어 눈을 훑었다. 벌레 날개처럼 반들거리는, 그래, 저거.
"나 화장실 좀."
"또 뒷처리 내가 하라고?"
"수고 해라."
"야!"
담배를 바닥에 대충 비벼 끄고 어깨를 툭툭 쳐준 택운이 차형사에게 뒷덜미 잡히기 전에 뒤돌아 골목길 사이로 사라졌다. 학연이 그가 내뺀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사라진 후였다. 가로등 불빛 너머로 그의 그림자가 금세 자취를 감춘다. 따라온 내가 등신이지, 중얼거리며 차형사가 애꿎은 경관들에게 빨리 빨리 하고 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붉고 푸른 사이렌을 요란히 울리며 길을 빠져나가는 경찰차 뒤에 서있다가, 학연이 그 골목 어귀에 주차된 택운의 까만 차를 흘긋 보았다. 매사 의욕 없기로 유명하던 그의 동기는 요즘따라 좀 이상하게 적극적이었다. 수상할 정도로.
맞은 편 건물 복도 창가에 있던 남자는 낭패감에 욕을 중얼거리며 주저 앉아 몸을 숨겼다. 낡은 창틀이 어깨에 부딪히며 요란히 삐걱거렸지만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들고 있던 카메라에서 메모리카드부터 빼서 챙기며 남자가 혀를 찼다.
대체 어떻게 본 거야, 이 야밤에. 무슨 고양이 새끼도 아니고. 카메라까지 백팩에 집어넣고 몸을 빼려는데 저 아래서 두걱거리며 계단 올라오는 소리가 난다. 이런 씨발. 남자가 재빨리 서있던 복도 양 옆을 보다가 일단 내려가는 통로가 하나 더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발소리가 들리자 쫓아오는 소리도 덩달아 빨라진다. 하지만 아직 거리는 있다. 복도 코너를 돌아 조금만 더 가면 출구다. 실외에 매달린 철제 계단 구조물을 타고 내려가 건물 밖으로 뛰어 내릴 심산이었다.
달려가 문을 열려는데 아무리 힘껏 잡아 끌어도 열리지 않는다. 잠겨있었다. 씨발. 씨발! 창문이라도 깨고 뛰어내려야 하나, 하고 밖을 흘긋 보는데 복도 끝에서 인영 하나가 몸을 드러낸다.
불 하나 키지 않은 까만 복도는 이어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요란한 나이트 간판의 불빛만이 유일한 조명이었다. 껌벅이는 노랗고 뻘건 조명에 얼굴 한 쪽을 울긋불긋 물들이며 택운이 씨익 웃었다.
"어이. 드디어 보네?"
남자는 앞에 있는 복도 끝으로 내뺐다. 택운이 바로 뒤쫓아 따라붙었다. 비상구 계단 문을 열어제끼자 턱턱턱턱, 숨가쁜 발소리가 계단 위에서 떨어진다. 택운이 성큼 성큼 계단을 올라붙으며 뛰었다. 초록색의 비상구 불빛이 어슴푸레한 층계참으로 까만 모자를 눌러쓴 머리통이 살피듯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사라진다. 바로 한층 위다.
"야!! 좀 서봐! 씨발! 얘기 좀 하자고!!"
비상구 계단에 윙윙 울리는 택운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남자가 문을 열어제꼈다.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었다. 이 층에서 돌아서 빠져나갈 심산으로 일단 뛰쳐들어간 그가 낭패감에 얼굴을 사정 없이 구겼다. 옥상이었다.
바로 뒤이어 들어온 택운이 옥상 가운데 선 까만 남자를 보고 숨 넘어가게 헉헉대면서도 씩 웃었다. 까만 캡모자에 까만 마스크를 눌러쓰고도 까만 후디, 청바지에 백팩을 맨 남자는 그가 '지명'을 받아 업장을 털 때마다 어디선가 카메라를 대고 찍던 그 놈이 맞았다. 이제껏 쥐새끼처럼 숨어 보는 걸 발견 했으면서도 놓아 둔 건 다 심산이 있어서였다. 택운은 궁지 몰린 쥐처럼 뒷걸음질치는 남자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안 들킬 줄 알았냐, 이 새끼야? 내가 너일 줄 알았지."
주춤거리다가 뒤로 튀려는 남자의 등허리를 택운이 냅다 달려가 발로 차 쓰러트렸다.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위에 올라타 일단 허리춤에서 수갑부터 꺼내 걸자 그제야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 아저씨! 저 진짜 아무것도 몰라요. 전 그냥 사진만 찍으래서. 악!"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개소릴 해. 내가 cctv도 안 뒤져 봤을 줄 알아?"
바르작대는 뒤통수를 퍽 때리고 잡아 누르며 택운이 윽박지르자 남자가 나지막히 욕설을 씨부린다. 피해 다닌다고 다녔는데, 어디서 밟혔지.
"형사님, 이렇게 보니 영 구제불능은 아니었네요?"
본색 드러내고서 하는 뻔한 도발에 택운이 코웃음 쳤다.
"애기야. 딴 사람을 갖고 놀 땐 적어도 걔보다 더 영리해야 되는 거라고 엄마가 안 가르쳐주던?"
콘크리트 바닥에 볼을 비비면서도 바르작대던 남자가 아득바득 대들었다.
"그래서 어쩔 건데요, 끌고 가서. 사진 나열하면서 얘가 나 뇌물수수 한 거 미행 했다고 하게요?"
"아니, 뭐 그렇게 서두를 거 있나."
택운이 짐짓 여유롭게 수갑 채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일단 신원조회 먼저 해야지. 어디 사는 누구고 몇살이고, 어디서 경찰을 협박 하는 발칙한 짓거리를 구상해냈는지, 천천히 이야기 좀 나누고..."
"불란다고 술술 불 것 같아?"
"뭐, 말 안 하면 별 수 있겠어."
남자가 쓰고 있는 마스크와 모자를 벗겨 던지자 드러난 날카로운 눈매가 택운을 쏘아봤다. 지지 않고 마주보며 택운이 즐겁다는듯 말했다.
"해룡한테 데려다주는 수 밖에."
기대한 그대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택운이 유쾌하게 웃어제꼈다. 열라게 굴리고 있을 머리통을 애정을 담아 퍽퍽 쓰다듬어 주고는 택운이 남자를 이끌고 옥상 출구를 향했다. 남자가 끌려 가면서도 주절거렸다.
"형사님, 다시 생각해요. 우리 서로 니즈 맞지 않아요? 당신 경찰이잖아."
"그래, 경찰이지. 마계도시 인천에서도 아주 기강 빠져있기로 유명한 서부청 형사."
"사람이 직업 윤리도 없어? 형사 되고 나서 한 거라곤 몇 년 째 뒤로 돈 받아 처먹는 거 밖엔 안 했어도 일단 휘두를 수 있는 공권력이란 게 있잖아. 정의구현 할 의무도 있고!"
"드라마 엥간히 봐라, 애기야. 이게 무슨 셜록홈즌줄 알어."
"해룡 골치 아프잖아 솔직히. 깡패새끼들이 지주랍시고 경찰한테 꼴값 떠는 거 짜증나지도 않아? 알아서 기어야 할 놈들이 고개 빳빳이 쳐들고 개기는 거 엿같지 않, 악!"
"니나 개기지 마, 니나."
"그러지 말고 좀 합시다. 예? 우리 콜라보 하면 해 먹을 수 있다니까!"
기어이 머리통을 한대 더 얻어 맞고도 씨부리길 멈추지 않는 주둥이를 노려보며 택운이 끌고 가던 걸음을 우뚝 멈췄다. 세상 물정 몰라서 하는 말 이라기엔 쎄한 구석이 있었다.
"너 뭐하는 새낀데? 뭔데 해룡을 해먹네 마네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똥만 차서는 못하는 말이 없어. 저번에도 대뜸 백륭이 어쩌고 하고 말이야. 니가 해룡이 어떤 덴지 알기나 해? "
"아니까 이런 말도 할 수가 있는 거지. 내가 괜히 할 짓 없이 아저씨 뒷꽁무니나 쫓아다닌 줄 알아?"
"그건 내가 만만해서 였을거고. 적어도 이제껏 니가 털라 한 데는 죄다 공쳤잖어. 약? 씨발 무슨 약? 노름하다 좆빠진 꼰대들만 오조오억이드만."
"그렇게 여기저기 쑤셔놔야 안 걸릴 데를 찾아 숨을 거 아냐."
그 말에 택운이 조용히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러니까 아닐 게 뻔한 곳을 일부러 들쑤시며 토끼몰이를 했다는 말이었다. 좆뺑이에 이용 당해서 기분 좆같은 건 둘째 치고 짜고 있는 판이 생각보다 큰 것 같아 뒷골이 쎄했다. 이거 이미 발 들인 게 새는 것만으로도 좋은 꼴 나긴 글렀는데.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택운에게 조금 더 다가서며 남자가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 해룡 통째로 낚을 수 있는 건이 있어. 딱 깔끔하게 일 전면전으로 안 벌이고 알짜배기만 싹 골라서 넣을 수 있는데. 근데 그럼 뭐 해, 난 수갑이 없는데. 체포를 못해요. 그러니까 형사님이 좀 도와주라고요. 난 정보 주고, 판 짜주고, 행동은 아저씨가 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내가 니 뭘 믿고."
택운이 삐딱하게 고개를 틀었다. 넘어올듯 구는 태도에 남자의 깊게 진 눈 그림자 아래서 형형하게 불이 튄다. 원한관계인가, 짐작하는데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협박자, 상혁이 짓씹듯이 내뱉었다.
"못 믿겠으면, 괜찮은 거 하나 주고 시작하면 되잖아."
*
해룡은 인천 앞바다에만 머리 박고 사는 놈들은 아니었다. 근거지는 크게 두군데였다. 인천 서부항만과 강원도 강릉. 반도를 횡단해서 항구도시 두 군데를 거점으로 삼고 핑퐁을 하는 식이었다.
강릉 쪽은 블라디보스톡과 북해도, 인천 항만은 동남아와 청도, 상해 등 중국 쪽을 관리하는 구조다. 암묵적으로 청룡의 회장은 이 인천지부와 강릉지부 - 서부와 동부 두 지부장 중 하나에서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
서류상으로 해룡무역의 본사는 강릉, 인천은 지사였지만 당대 회장이 어느 지부 출신이냐에 따라 실질적 세는 바뀌기 마련이었다. 이번 대 회장은 동부출신으로, 회장직에 오른 지 5년이 지난 지금도 자리를 제법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점점 세가 동부 쪽으로 기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나름의 질서에 폭탄을 터트리며 들어온 신흥세력이 바로 서부 출신 해외사업본부장 이홍빈이다.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쟁쟁한 틀딱들을 다 제치고 팀장 자리를 꿰찬 남자는 수완 좋은 만큼 손속도 봐주는 게 없었다. 회장은 출신지인 서부에서도 워낙 유명했던 그를 키운다 하며 동부에 떨어트려 뒀지만, 어린 것 기를 꺾어 놓겠다는 그 능구렁이의 뻔한 속을 비웃는 것처럼 그는 보란 듯 강릉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제법, 아니 혀를 내두를만한 수완가였다.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 텃세 부리던 꼰대들을 제 편으로 만들어놓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일 커지지 않는 선에서 '처리'했다. 그 과정에 뒤에 탈이 될 만한 건 아예 싹을 자르다 못해 땅을 헤집어 잿가루를 뿌려놓은 것은 물론이었다.
그가 땅을 헤집는 1년 남짓한 동안 떨어져 나간 인원만 원래 동해룡의 3분의 1은 되었다. 지들끼리 알아서 솎아주니 경찰은 그때까지만 해도 손 안대고 코 푼다고 좋아했지만 그게 오산이라는 게 밝혀지기까지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동해룡뿐 아니라 해룡 전체가 그 하나 때문에 술렁이고 있었으니까. 회장이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난데없는 개싸움의 전조가 풍겨오는 것이었다.
경찰측에서 해룡 돌아가는 꼴을 보며 슬슬 쎄해지는 뒷골을 더듬고 있을 때 선수를 친 것은 해룡 회장이었다. 구렁이 새끼인 줄 알고 풀어둔 것이 독니 퍼런 독사가 되어 발목을 물 것을 걱정했는지, 회장은 동부가 독사굴이 되기 직전 이홍빈에게 해외사업본부를 던져주며 해외로 치워버리는 것을 택했다. 말만 본부장이지 저 해먹을 동안은 얼씬도 못하게 하겠다는 고약한 심보 앞에 그는 의외로 산뜻히 승복했다. 그리고 2년후 백륭의 손을 잡고 서해룡에 들이닥친 것이다.
하지만 말했듯 그는 수완가였고, 확실한 걸 원했다. 이를테면, 지금 그가 끌고 오려는 백륭파처럼. 삼합의 분파로 시작한 백륭은 10여년 전만 해도 꽤나 이름 날리는 강호였지만 지금은 전성기만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삼합지파중 가장 컸고, 그만큼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이로 인해 확실해진 건 회장도 홍빈을 멋대로 주무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서해룡의 구역에서 조금 비껴간 송도에 있던 해외사업본부 빌딩, 그 귀양지나 다름없던 유명무실한 곳에 홍빈이 곧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리며 기세는 박차가 더해졌다. 회장 아래 동서부로 나뉘어 세력싸움하던 해룡의 질서는 옛말이 되었고, 이미 홍빈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세력이 생겨나고 있었다.
한 편 얼결에 집 앞마당에 독사 한마리를 풀어둔 꼴이 된 서해룡이 잠이 제대로 올 리가 없었다. 해룡무역 인천지사 부회장 이재환도 그 밤 잠 못 이루는 서해룡 땅뱀중 하나였다.
[해룡 회장 그 능구렁이가 그걸 보고만 있겠어요? 분명 서해룡이랑 싸움 붙이려고 하겠죠. 물론 지 아들 유리한 쪽으로다가.]
택운은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상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를 몰았다. 주말이면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해수욕장 근처는 평일 낮이라 그런지 항구 쪽 드나드는 커다란 화물트럭 말고는 인적이 드물었다. 승용차 하나 간신히 들어가는 골목을 구비구비 비집고 들어가서야 보이는 횟집 간판을 확인하고 택운이 근처 골목에 차를 일단 세웠다.
"판은 깔아 놨고?"
이재환 부회장, 못 들어 본 인물은 아니었다. 애비 닮아 성격 불 같고 수 틀리면 끝장 보기로 유명한, 이라는 수식어가 으레 따라다니는 자. 부친이 해룡 회장으로, 일찍부터 이 쪽으로 꽤나 굴러먹어서 해룡 내에선 그저 도련님 취급이 아니라 어엿한 간부급 대우였다.
뭐, 싸움 붙이기엔 최적의 상대였다. 이재환 측에서는 그대로 두기만 하면 손에 들어올 해룡을 웬 굴러 들어온 독사새끼에게 눈 뜨고 빼앗기느니 전면전이 낫다고 생각할 게 뻔하다. 그 성격에 지금껏 궁둥이 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게 오히려 용했다. 그래도 눈치는 생겼는지 각이라도 재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둘이 치고 받다가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인천에 둘로 나뉜 세력을 하나로 응축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은 구렁이 손바닥 안인 것이다.
[들리는 말론 회장이 판 깔기 전에 지가 선수 쳤다는데. 뭐, 까 보면 알지 않을까요?]
"확실한 거 던져 준대매, 이 새끼야."
[상은 제가 차려도 숟가락질은 셀프거든요.]
택운이 욕을 한 사발 하기도 전에 잽싸게 전화가 끊긴다. 신호음만 뚜 뚜 가는 폰을 어이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다가 택운이 차를 나섰다. 문을 열자마자 바다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소금기에 허옇게 절은 골목 끝에 위치한 횟집은 꽤나 컸다. 다른 식당과는 조금 떨어진 언덕진 곳, 바로 앞에 바다를 마주보고 뒤로는 야트막한 상가건물 하나를 둔 구조였다. 운송차량은 그 상가건물 뒤에 있는 주차장으로 드나드는 걸 보아 식당과 이어져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택운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리 점심시간이 한 김 지났어도 식당 안은 조용하다 못해 개미새끼 하나 없이 을씨년스러웠다. 택운이 태연히 앉아 왼 무릎에 다리 하나를 얹고 발을 까닥거리고 있으려니, 얼굴 거멓게 탄 남자가 다가왔다. 인상 쓴 남자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택운이 대뜸 주문했다.
"여기 해물칼국수 하나."
"오늘 영업 안 합니다."
"허어. 영업을 안 한다고?"
짐짓 놀라는 척 하며 택운이 남자를 올려다봤다.
"맛집이라고 해서 멀리서 왔는데. 그러지 말고 칼국수 한 그릇만 해줘."
"아저씨, 영업 안 한다니까요. 가세요."
"왜 갑자기. 단체손님이라도 받으시나봐?"
택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슬슬 걸었다. 주방 쪽을 향하는 그의 앞을 가로막고 남자가 윽박질렀다.
"이 아저씨가 진짜. 좋은 말로 할 때 가시라고요."
"아니 궁금해서 그러지. 주방 이모도 안 나왔어? 이모!"
"아, 이 씨발놈이!"
막무가내로 주방에 들어가려는 택운에게 남자가 욕을 씨부리며 그를 밀치려 할 때, 택운이 코 앞으로 무언가 들이밀었다. 경찰뱃지였다.
"비켜라. 공무집행 하러 왔으니까."
"하. 이건 또 무슨 경우야."
남자가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건지 입꼬리를 비틀었다. 하지만 짭새 떴다고 쫄지 말라는 메뉴얼은 배웠는지 퍽 당당하게 개겼다.
"형사님. 무슨 공무집행이면 다 되는 줄 아쇼? 이 쪼만한 음식점에 뭐가 있다고 여기서 행패를 부리고 그러십니까. 예? 영장이라도 가져오든가!"
"내가 이 좆만한 음식점 뒤지겠다고 영장씩이나 가져와야 하냐?"
택운이 기가 찬듯 말하면서도 알았다 알았어, 하며 자켓 품을 뒤졌다. 안주머니를 부산스럽게 뒤지는 택운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남자는 이윽고 택운이 내지른 팔꿈치에 퍽 맞아 나가떨어졌다.
엎어져서 못 일어나는 남자의 배를 다시 한번 걷어차주고 택운이 그대로 주방 안으로 향했다. 뒷문으로 나가자 냉동창고로 향하는 문이 있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인다. 계단을 내려가자 길다란 복도가 있다. 건물로 이어지는 통로겠거니 생각하며 거침없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불 하나 안 켜진 복도는 바닷물인지 뭔지 밑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물곰팡이 냄새가 진동을 했다. 택운은 무심코 자켓 소매로 코를 부볐다. 딱 뱀 나오기 좋은 곳이었다.
'물건'을 보고 있던 재환이 소란을 감지하고 한쪽 눈썹을 쓱 치켜떴다. 무슨 일인지 보고 오라는 얼굴에 옆에 서있던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주먹에 얻어맞고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 모양을 보고 재환이 미간을 일그러뜨릴 때 택운이 손을 탁탁 털며 가뿐한 걸음으로 남자의 배를 밟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어디 관광이라도 온 듯한 폼새였다.
"어이고, 여기들 계셨네. 수고들 하십니다."
"...."
택운은 들어가자 마자 보이는 재환을 발견하고는 사실 좀 놀랐다. 이재환 쪽에서 지시한 일로 꼬투리를 잡아 발을 거는 게 목적이었지 여기서 보게 되는 건 예상에 없긴 했다. 직접 뛰쳐나온 걸 보니 몸이 달긴 단 모양이라 생각하며 택운이 주위를 훑었다. 기다렸다는 듯 앞에 늘어져 있는 박스를 보니 맞춰 오긴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물건 들어오는 날인데 경비가 이렇게 허술해서야, 얼마나 경찰을 물로 봤으면. 괜히 입맛이 써서 택운이 미간을 구겼다.
그 앞에서 재환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택운을 훑어볼 때, 뒤늦게 건물 안에서 씩씩거리며 달려온 거한들이 우르르 뒤꽁무니로 빠져나왔다. 재환이 턱짓하자 남자들이 택운에게 달려들려다 말고 주춤주춤 뒤로 시립한다. 소란을 한번에 정리한 재환이 기묘한 정적 속에서 입을 열었다.
"형사님이 여기까진 어쩐 일로."
"아니, 칼국수 먹으러 왔는데, 영업을 안 한대서."
재환은 눈썹만 치켜 뜨고, 양 옆에 서있던 서해룡 간부들이 불편한 얼굴로 쳐진 볼을 떨어댔다. 그러건 말건 괜히 그들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지나간 택운이 시장이라도 둘러보는 것처럼 건들거리며 주차된 8톤 트럭 앞으로 다가갔다.
트럭에 실린 컨테이너는 록lock이 풀려 안에 쌓인 나무박스들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고, 그 중 몇 개는 들여다보려 했는지 친절하게 땅바닥에 내려와 있었다. 그 사이를 헤집는 택운을 보는 재환의 눈이 점점 가라앉았다.
"맛집이라고 그래서 힘들게 찾아 왔는데, 국수 한 그릇 못 먹고 가면 섭섭하잖아."
"...."
땅에 놓인 박스 하나를 발 끝으로 툭툭 차며 헛소리를 하는 택운을 잠자코 보다가 재환이 입을 열었다. 멀끔하게 차려 입은 흰 셔츠 위에 갖춰 맨 짙은 네이비의 타이를 느슨히 잡아당기는 것이 불안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형사님. 이때껏 저희측 업장에서 섭섭하지 않게 조건 잘 맞춰 드린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 그랬지 그럼."
"이야기가 통하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어떻게 사람이 밥만 먹고 배가 부르나."
가끔은 외식도 하고, 칼국수도 먹고... 하며 택운이 박스를 열어보려는데 누군가 팔을 턱 잡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재환이 귓가에서 으르렁댔다.
"의욕 넘칠 시기는 지나신 거로 아는데. 괜히 감당도 못 할 거 건드리지 말고 우리 좋게 좋게 갑시다."
"좋게 가는 건 여기 뭐가 들었냐에 따라 좀 갈릴 것 같은데."
".....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린 재환이 뭐가 그리 웃긴지 박장대소하며 물러나다가, 옆에 서있던 장정 하나의 정강이를 대뜸 후려찼다. 억 소리도 못 내고 고꾸라졌던 어깨가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재환이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 듯 남자의 뺨을 후려갈기기 시작했다. 손에 주렁주렁 끼고 있는 실버링 때문에 맞는 남자의 얼굴은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올랐지만 재환은 멈추지 않았다. 망나니라고 말은 들었지만 이건 좀 신선한 쇼맨쉽인데, 생각하며 택운이 팔짱을 끼고 잠자코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말리는 이 하나 없는 기묘한 정적 속 퍼억, 퍽 하고 사람 패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던 남자는 다섯대가 넘어가자 결국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부들부들 떨며 잘 못 일어나는 게 골이 울리는 모양이었다. 피가 묻은 손을 털며 재환이 택운에게 씨익 웃어보였다. 그 얼굴을 마주보며 택운이 한 쪽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널 못 패니 쟤라도 팼다는 뻔히 보이는 쇼. 택운은 재환의 평가를 수정했다. 가오 잡는 버르장머리 없는 도련님에서 맛간 개새끼로.
"형사님. 진짜 마지막으로 권유 드리는 건데. 서로 감정 상하지 말고 제 발로 걸어나가십시다. 다 보는 앞에서 제가 형사님 가오 안 살게 상황을 만들어야겠습니까?"
택운이 그 말에 대놓고 피식 비웃었다. 자기도 맛 간 걸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을 자신 있었다.
"어디 끌어내 보든가."
"뭐 하냐. 형사님 모셔라!"
"어어, 잠만 잠만."
재환이 시퍼런 눈으로 소리질렀다. 하지만 택운이 갑자기 이걸 까먹을 뻔 했다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어깨들이 우르르 달려들려다 말고 멈칫거렸다. 이게 무슨 쇼하는 것도 아니고, 재환이 빡쳐서 장난하냐고 성깔 부리기 직전에 택운이 대뜸 어디론가 걸려온 전화를 걸었다.
"어, 한팀장. 지금 만나러 왔지. 바꿔줄까? 어, 그래."
택운이 재환에게 까닥까닥 손짓했다. 재환이 이건 또 무슨 미친짓이냐는 표정으로 보고만 있자 택운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우르르 몰려선 어깨들을 밀치고 그에게 다가가서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우리 팀 팀장인데, 함 받아봐. 난 사실 오늘 말 전하러 온거거든."
폰을 받아 들고 조용히 그를 쏘아보는 눈에 택운이 자신은 더 볼 일 없다는 듯 두 손을 올리고 물러났다. 옆에서 어떻게 할거냐고 묻는 장정에게 가만히 손을 들어 보이곤 재환이 폰을 귀에 댔다. 눈은 여전히 택운을 매섭게 주시한 채였다. 난데없이 잔챙이 짭새 새끼가 기어들어와선 쇼를 한다 했더니 목적이 따로 있었다.
재환이 가만히 두라 하니 남자들이 몸을 물리고 택운은 짐짓 여유로운 걸음으로 바닥에 쌓인 상자 사이를 걸어 다녔다. 어쩌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재환이 그 모양을 눈으로 좇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나지막히 말을 꺼냈다.
[부회장님. 요즘 백륭 때문에 걱정 많으시죠.]
난데없는 말에 재환이 눈썹을 쓱 치켜올렸다.
[듣기론 이번에, 늘 갖고 오시는 거 말고 좀 특별한 것도 같이 온 걸로 아는데.]
'물건'을 들여온 게 샜다. 어디서 샜지. 내부 아니면 거래처. 재환이 머리를 굴리는데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여상히 말을 이었다. 그 와중 택운이 나무 박스 하나의 뚜껑을 열고 속을 헤집었다. 어깨들이 달려나가려 움찔 움찔 하는 걸 재환이 눈짓으로 저지해서 그들은 입으로는 욕을 시부리면서도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저희한테는 대강 평소에 하던 거만 던져주시면, 적당히 서로 좋은 선에서 넘어갈 수 있겠죠.]
"그래서?"
[뭐 저희가 편의를 봐드린 대신, 서해룡에서도 뭔가 돌아오는 게 있으면 금상첨화고요.]
"'팀장'님, 말은 똑바로 하십시다. 뱀굴 먼저 들쑤신게 누군데 지금 거래 운운 하시나."
[이홍빈.]
그 이름 석자를 듣는 순간 재환의 눈이 변했다. 이를 빠득 무는데 저쪽에서 우당탕 소리가 났다. 택운이 기어코 상자 하나를 엎은 것이다.
택운이 집은 건 빈 박스였다. 안의 내용물은 흰 완충제밖에 없었다. 택운이 그래도 한번 보자 싶어 박스를 뒤집으려고 들어올리는데, 표정이 변했다. 빈 박스가 이렇게 무거울 리 없었다.
[백륭 뒤에 업었다고 위세가 등등하던데. 이쪽에서도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거든요.]
"지금 깡패 싸움에 경찰이 손에 흙 묻히시겠다 이겁니까?"
[솔직히, 지금 부회장님 있는 서해룡이랑 같이 가는게 우리한테도 이득 아닙니까.]
"이득인지 아는 분이 오늘은 왜 이 깽판을 치셨을까."
[그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말꼬리를 늘이는데, 택운이 뒤편 상자에 꽂혀있던 망치 하나를 들고 와 말릴 새도 없이 빈 상자 위로 내리찍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너덜해진 나무상자를 걷어차 부쉈다.
[아무래도 확실한 게 좋잖아요.]
산산조각나 부숴지는 잔해 속에서 상자 밑바닥에 바닥을 덧대 감춰져있던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스티로폼 사이를 파서 박아놓은 것은 9mm 자동피스톨 3대. 까만 총신 옆으로 탄약창도 갯수를 맞춰 박혀있는 꼴을 보고 택운이 얼굴이 싸해졌다.
그걸 보면서도 재환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택운은 옆에 있는 상자도 퍽퍽 부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공팩에 쌓여 벽돌처럼 쟁여진 LSD크리스탈이었다. 원래 동해룡이 러시아에서 받는 물건. 이것은 새로울 게 없었다. 저 총을 들여오기 위한 이중 위장이었다.
그 때 주차장 건너편 야트막한 상가건물에서 어떤 훤칠한 남자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검은 생머리를 눈이 안보이게 덮어 기르고 장례식 가듯 까만 정장에 까만 넥타이를 한 그는 커다란 보폭으로 아스팔트 위를 가로질렀다.주차장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아직 택운이 부리고 있는 소란에 정신이 팔려 누가 다가오는지도 모른채 우왕좌왕 했다.
주차장 앞 야트막한 담벼락을 엄폐물 삼아 몸을 숨긴 그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들어올렸다. 철컥. 가죽장갑을 낀 손이 슬라이더를 당기고 잠금장치를 쩔꺽 밀어내린다. 까만 눈이 조용히 가라앉고, 곧 바위처럼 굳어 대기신호를 기다린다. 한쪽 귀에 꽂은 인이어가 양서류의 비늘처럼 반짝인다. 보스는 아직 그에게 사인을 주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시종일관 태연자약했다. 그게 더 성질을 돋궜다. 재환은 바닥에 널브러진 물건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점점 인계심의 한계가 오고 있었다.
[그냥 적당한 거 줘서 돌려보내세요. 거기 있는 망나니는 이 쪽에서 컨트롤 할테니까, 부회장님은 딜 사인만 주면 되는거예요. 이홍빈 넘긴다, 안 넘긴다.]
"그 적당한 거 넘기면 여기 손해가 얼마인진 알고 지껄이는 거지?"
[나쁘지 않잖아요. 오히려 지금 넘기는 게 손 안대고 코푸는 거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재환이 수화기를 든 채로 상자를 깨부수는 택운 앞으로 걸어갔다. 택운이 신나게 망치질을 하다 말고 망치를 한쪽 어깨에 걸치고 삐딱하게 서서 다가오는 재환을 마주봤다. 재환의 입꼬리가 조소로 말려올라갔다.
"이 자리 마련하려고 그 동안 그렇게 열심히 여기저기 파고 다니신 거구만?"
[....]
"이거 뭔, 쥐새끼 몰듯이 그러시면 쓰나."
[부회장님이랑 약속 잡기가 워낙 힘들어야죠.]
"니 경찰 아니지?"
택운을 똑바로 보고서 내뱉은 말에 택운이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듯 눈썹을 치켜떴지만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알고 곧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서 굴러먹던 잡놈이야?"
[지금 처리 안하면 언제 하려고요?]
재환이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치려면 돌아와 자리잡기 전인 지금이었다. 그 전면전을 대비하느라 '물건'도 들여온 것 아닌가. 서해룡 개판 내며 내부전 하는 것보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손해가 적은 편이 이득일지 몰랐다.
[엄한 거 안 건드릴 거니까 이홍빈만 넘겨요. 일 볼 거 끝나면 깔끔하게 빠져 드릴거니까.]
"넌 뭔데 이홍빈에 목숨 걸어?"
갑자기 재환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여기저기서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부회장이 눈엣가시로 여기는 이름은 그의 앞에선 입에 올리는 것도 금기였다. 그 반응을 지켜보며 택운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재환은 흥미진진해졌다. 이것 봐라.
"동해룡 찌끄래기냐?"
수화기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이었다.
-탕!
총성이 하늘을 울리고 억 소리와 함께 재환의 옆에 있던 남자가 거꾸러졌다. 상황파악이 되기도 전 이번엔 그 옆에 있던 남자가 다리를 맞았다. 이미 주차장은 아수라장이었다. 어디서 총을 쏜 건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통에도 재환은 두다리 꼿꼿이 버티고 서서 주위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또 뭐하는 쇼야?"
[...오해하실까봐 말씀드리는데 이쪽 아닙니다.]
총성이 수화기 너머에도 들렸는지 굳어진 남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재환이 문득 무언가 깨닫고 중얼거렸다.
"....씨발, 그 개새끼가!"
[중요한 물건만 챙겨서 빠지세요. 다시 연락 드릴테니까.]
재환이 제 할 말을 끝내고 신호가 끊어진 폰을 신경질적으로 내던졌다. 발 밑으로 피 웅덩이를 구른 그것을 주워들며 택운은 몸을 낮추고 주위 먼저 둘러보았다. 원거리 저격은 아니고, 가깝다. 게다가 충분히 재환을 노리고 쏠 수 있을 법도 한데 옆을 골라서 쐈다. 죽이려는 목적은 아니고 판을 깨는게 급선무였던 모양이다.
그 때 주차장 입구쪽에서 어떤 남자가 권총을 손에 들고 걸어오는게 보인다. 총을 앞으로 겨눈 채 다가오는 모습에 서해룡 어깨들이 쉽사리 다가가지도 못하고 멈칫거리는데, 판단을 마친 택운이 상의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일단 공포탄 먼저 하늘로 갈겼다. 꽝!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커다란 소음이 가시기도 전에 택운이 총을 겨눴다.
"동작 정지. 무기 내려놓고 손 머리 뒤로 붙여!!"
택운이 경찰뱃지를 들어보이며 말 하는 것에 아랑곳 않고 남자는 그를 향해 총구를 향했다. 그래, 이깟걸로 겁 안먹는다 이말이지. 택운이 입꼬리를 비틀고 자리에서 튀어나갔다.
남자가 방아쇠를 당기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듯 택운이 성큼 안으로 다가서서 총을 든 팔꿈치 아래를 움켜잡고 넘겨 꺾으려 했으나 남자도 만만치 않았다. 무릎을 올려 배를 걷어차려는 것을 간격을 넓혀 피하며 택운이 발을 돌려찼다. 하지만 들린 팔에 번번히 막히고 만다. 눈을 덮은 머리칼이 흐트러지며 그 사이로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돌처럼 무감한 눈동자였다.
아주 잠시의 정적 후 택운은 허리를 걷어차여 나동그라졌다. 그를 처리하고 남자가 뒤를 도니 이미 재환은 중요한 물건을 챙겨 자리를 뜬 후였다. 쯧, 혀를 차며 남자가 잔당들에게 아무렇게나 총을 쏴 갈겼다. 귀가 멍멍한 총성이 천둥소리처럼 공기를 찢고 총에 맞은 사람들의 비명이 뒤를 이었다.
이래서야 동네방네 총싸움났다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든 택운이 뭔가 깨달은 듯 고개를 팍 쳐들었다. 처음부터 제거가 아니라 판을 키우는 게 목적이었던 거다. 경찰이 개입해서 발목 잡힐 수 밖에 없도록.
놀아났다는 생각이 든 순간 건물 안에서 경찰측 지원 인력이 둑 터진 듯 우루루 몰려나왔다. 총을 든 남자는 이미 어디로 증발했는지 내뺀 후였다.
총상을 입고 주차장에 널부러진 서해룡들을 보며 뒤따라 나온 학연이 얼굴이 굳어 택운부터 찾았다. 택운이 오늘 미리 한 지원요청에 마지못해 나올 때 까지만 해도 또 업장 하나 뒤집어 엎었겠거니 했는데 그가 차에서 내렸을 때엔 총성이 꽝꽝 울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갈비뼈가 한두대 부러진 것 같았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몸을 일으키는 택운에게로 다가온 학연이 그를 부축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난리야."
"해룡 개싸움 시발점."
꽤 아픈지 얼굴을 구기고 대뜸 하는 소리에 학연이 눈을 치켜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총 쏜 새끼는 어딨어."
"토꼈어. 그리고 저거 LSD다."
총에 맞아 산산조각 난 나무상자의 잔해 사이로 보이는 하얀 결정들을 보고 학연이 바로 폴리스라인 먼저 치고 감식반 불러오라고 지시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택운이 차형사의 손을 뿌리치고 절뚝거리며 걸어 나간다. 그 뒤통수에 대고 학연이 짜증이 치밀어서 소리쳤다.
"사건정황 보고는 하고 가야 할 거 아냐!"
"대충 보면 모르냐. 이따 청에서 해. 병원 갔다 갈 거야."
"미친새끼, 안 하던 짓을 열심히 하고 지랄이야. 몸 좀 사려!"
택운이 어깨너머를 향해 손만 휘휘 저어보이곤 주차장을 벗어난다. 몸은 온통 먼지와 흙과 구정물 범벅이 되어서도 눈은 시퍼렇게 형형했다. 바닷바람 소금기에 콧속까지 절여진 것 같아 찝찝했다. 자켓 주머니를 뒤져 다 구겨진 담배곽에서 하나를 빼 물고 불을 붙인다.
상혁의 호언장담대로, 큰 건 하나를 잡긴 잡았다. 여태 서부청이 손놓고 방관한거나 마찬가지던 서해룡 약 조달현장을 잡은 거니까. 파급도 클 것이다. 서해룡이 오늘 손해 본 액수만 해도 상당할 것이고. 자신은 그 최전선으로 몰렸다. 쩐내나는 지하 나이트를 순회하며 뒷돈이나 타먹던 짭새에서, 갑자기 여기저기 들쑤시다가 거래 하나를 다 말아먹은 요주의 인물이 돼버린 것이다.
해가 지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은 구름만 잔뜩 껴 눅눅했다. 후, 자신이 내뱉은 잿빛 연기 사이를 헤쳐 걸으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드윽, 드윽, 절뚝이는 보폭 사이로 아스팔트 사이 희게 남은 소금기가 검게 갈려나갔다. 그림자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이 발목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
사건 후 약속장소는 그때 그 옥상이었다. 구정물처럼 텁텁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인기척에 택운이 뒤돌아섰다. 상혁이 택운의 얼굴을 확인하고 쓰고 있던 마스크를 벗는다.
택운은 새삼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키는 훤칠하게 크고 등치가 있어도 아직 앳된 티가 완연한 얼굴에 눈만 옹골지게 굳어 번쩍거린다. 독기로 똘똘 굴려 박아 넣은 구슬처럼.
"나 이제 그만 할랜다. 할 만큼 했어."
"...이제 막 시작인데 뭘 할 만큼 해요."
"다들 대갈빡이 돌아가지고 총 들고 설치는데 그럼 볼장 다 본 거 아니냐. 지들끼리 총질하다 뒤져나가면 막말로 나야 편하지."
택운이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았다가 내뱉는다. 흩어지는 연기 사이로 상혁이 사납게 눈을 치떴다.
"처음에 합의 본 건 그새 잊어먹었어요?"
"니가 말한대로 잡아 넣었잖아 그래서. 니 경찰놀이 장단 맞추느라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이 됐는지 알어, 이 속 편한 새끼야?"
다 태운 담배를 발로 비벼 끈 택운이 상혁에게 머리를 들이박을듯 갖다대며 으르렁댔다.
"그래, 한 번 해 봐. 정택운 경사가 해룡한테 뇌물 받았습니다, 꼰질러 보라고. 내가 널 경찰 협박으로 수갑 채우는 게 빠를지 그게 빠를지 안그래도 궁금했거든. 잃을 것도 없는 차에 잘 됐네. 내가 지금 옷 벗나 계속 짭새 노릇하면서 개기나 해룡이 내 관짝 닫는 건 매한가지 일거 같은데. 어? 해 보라고!"
"애초 쥐새끼 노릇하던 놈한테 내가 뭘 바래. 됐어, 관둬요 그럼."
"쥐새끼?"
택운이 빈정거리며 뒤돌아서려는 상혁의 멱살을 잡아챘다. 담배연기처럼 흐릿하던 눈이 순식간에 뒤집혀 분노로 번들거린다.
"너, 처음에 어머니 들먹였었지. 지금 자기 아들도 못 알아보는 그 사람이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도 알아? 캐봤으면 알 거 아냐, 내가 경찰 하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그 좆같은 깡패새끼들이 이뻐서 이러고 산 것 같아?"
악문 잇새로 씹어뱉듯 나오던 게 어느새 핏대세운 절규처럼 커졌지만 택운은 알아채지 못했다.
"조폭들 똥묻은 돈 받아서 호의호식 하고 사는 게 고까워서 나한테 이 지랄 하는 거면 이제 좀 봐 줘라. 응? 아직도 내 앞에 빚이 얼만줄 알아? 이자 내고 월세 내고 병원비 내면 쥐꼬리도 안 남아. 니가 말하는 경찰의 의무같은거 주워섬기다가 산 입에 거미줄치고 뒤지느니 노모 병수발하고 빚 갚으면서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은 쳐 보는게 인간 존엄성 지키는 일 아니겠냐? 어? 아니겠냐고."
"씨발, 구질구질하게."
멱을 잡고 흔드는 택운의 손을 뿌리치며 상혁이 짓씹어 뱉었다. 돌멩이처럼 단단했던 눈이 흔들린다. 눈사위가 붉게 일그러졌다.
"댁만 그러고 산지 알아요? 난 뭐 쓰레기장 안 굴러본 줄 알아. 그래요, 하지마요. 관둬. 평생 그렇게 해룡 똥이나 닦다 뒤지시든가."
"뭐 이 새끼야?"
택운이 분에 못이겨 급기야 주먹을 들어올릴 때 덜컹,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둘은 동시에 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가 다 져서 어둑한 사위에 온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의 인영은 그림자와 잘 분간이 가지 않았다. 검은 정장 바지에 검은 셔츠 검은 타이 검은 머리칼, 늘씬하게 키가 큰 남자는 거침 없는 걸음걸이로 성큼성큼 둘을 향해 오고 있었다. 눈을 좁히고 남자를 보던 택운이 그가 이재환에게 총질을 했던 그 놈이란 걸 알아차렸을 때는 원식이 이미 손에 든 권총을 올리고 있었다,
"....!"
택운이 그 까만 것을 보자마자 순간적으로 상혁을 밀치고 자신도 바닥으로 굴렀다. 피슉, 소음기를 채운 권총 탄환은 소리도 없이 바닥에 박혀 파편을 튀긴다. 곧바로 상혁을 향하는 총구에 택운이 곧바로 몸을 일으켜 원식의 무릎 뒤를 노리고 걷어찼다. 원식은 순간 휘청 했으나 다른 발로 중심을 잡고 택운을 향해 총을 겨눴다. 피슉 피슉,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택운이 바닥을 구른 궤적을 따라 박힌다. 저만치 굴러간 택운이 몸을 일으키는 사이 원식은 문 쪽으로 달리는 상혁의 뒤를 조준했다.
"...!!"
달리던 상혁이 휘청하더니 무너진다. 어딘가 맞은 모양이었다. 원식이 쓰러진 사냥감 뒤를 쫓는 맹수처럼 다가가려 할 때 옆에서 택운이 몸을 던져 그를 밀쳤다. 바닥을 구르며 권총이 저만치 내팽개쳐진다. 택운은 놓치지 않고 엎어진 원식 위로 올라타 몸을 짓눌렀다.
"너 아까 그 새끼 맞지."
대답 대신 주먹이 날아왔으나 가볍게 피하고 팔을 잡아챈다. 저만치에서 상혁이 옥상 문을 열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택운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누구야. 이홍빈이냐? 걔지?"
"...."
"이재환쪽에 일부러 깽판놔서 경찰한테 넘기고. 그렇지? 근데 이건 뭐야. 누굴 조용히 골로 보내려고 소음기까지 쳐 달고 와? 니가 필리핀 킬러야 뭐야?"
택운이 이죽대느라 방심한 사이 원식이 택운이 잡은 팔을 뒤틀며 반대편 팔꿈치로 명치를 찍어올렸다. 억 소리도 못내고 뒤로 나자빠진 택운을 다시 한 번 걷어찬 원식이 저만치 굴러간 권총을 다시 집어들고 와서 겨우 몸을 일으키는 택운의 뒤통수에 가져다 댔다. 서늘한 금속의 냉기가 머리칼을 헤집고 닿는 느낌에 택운이 이를 사리 물었다.
원식은 택운을 제압해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사라진 상혁을 찾는듯 했다.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상혁이었던 것이다. 택운이 그걸 알아차렸을 때 원식이 총신으로 택운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뻑 소리와 함께 택운이 쓰러지고, 원식은 그대로 옥외비상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그의 모습은 밤에 녹아들어 곧 완전히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택운이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몸을 간신히 비적비적 일으켰다. 쇳덩어리에 맞아서 역시 찢어졌는지 피가 손에 질척히 배어나온다. 새끼, 칠라면 확실히 칠 것이지 어중간하게 쳐서.
일어서니 눈 앞이 일순 하얗게 바래며 시야가 빙글 돌았다. 휘청이다가 또 넘어질뻔 한 걸 겨우 벽을 잡아 지탱한 택운이 더럽게 아프네, 잇새로 욕을 갈며 고개를 들었다. 조금씩 촛점이 돌아오는 시야로 문이 열린 옥상 입구가 보였다. 그리고 그 밑으로 점점히 이어진 핏자국도.
핏자국은 얼마 가지 않아 끊겼다. 상혁은 계단 밑에 널브러진 채 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택운이 주저앉은 상혁을 내려다보다가 또 골이 띵하게 울려 인상을 있는대로 찌푸리고 물었다.
"그 새끼 니가 목적이었던거 맞지."
"씨발, 들켰네. 아, 존나..."
이홍빈. 상혁은 해룡 전체라고 잡아 묶었지만 애초 상혁의 타겟은 그였던 모양이었다. 그 쪽에서 낌새를 알아채고 먼저 상혁을 노린 건가. 그래서 상혁이 판을 짠 대로 굴러가지 않도록 이재환쪽을 휘저으며 낌새를 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뒤로 따라붙었겠지. 택운이 짐작하며 피가 뚝 뚝 타고 떨어지는 상혁의 왼팔을 보았다.
"총 맞았냐?"
"관심 꺼요."
"병원도 못갈 새끼가. 지금 니가 가오잡을 상황이야?"
택운은 일단 피를 절절 흘리는 상혁을 부축해 건물을 나와 제 차에 태우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안들어간다고 버팅기는 것을 집에 밀쳐넣고 옷을 까 확인해보니 팔에 입은 상처는 다행히 총탄이 박히지는 않았으나 길게 스쳐간 자상이었다. 집에 상비해두는 의료키트로 대충 소독을 마친 후 붕대까지 감아주니 상혁은 심기는 불편해도 할 말은 없는지 입만 부루퉁해선 얌전히 앉아있었다.
진통제 한알을 꺼내 먹으라고 생수통과 함께 던져 주고 택운이 냉장고에서 맥주 한캔을 꺼내 마시려는데, 상혁이 어느새 옆에 다가와선 캔을 뺏어들고 벌컥 벌컥 들이켰다. 그 모양을 보곤 택운이 기가 차서 말했다.
"피 한바가지 흘린 새끼가 얼른 뒤지구 싶어서 환장했나. 술은 왜 쳐마셔."
"해룡 그새끼들 진짜 악랄한 개새끼들이야."
"맥주 한입 마시고 취했냐?"
"그 새끼들이 우리 가족한테 어떤 짓 했는지 알아?"
튀어나온 말에 택운이 상혁에게서 맥주를 뺏던 손을 멈칫 한다. 상혁이 놓치지 않고 캔을 가져가 그대로 마셔 비워버리고 손에서 우그러트렸다. 끼기긱, 듣기 싫은 쇳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사업한다고 접근해서는. 처음엔 투자자인줄 알고 소개받았지. 그렇게 같이 술 마시고 골프치러 다니고 하면서 친해지고."
상혁이 한숨을 토하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택운은 불빛 하나 없는 부엌에서 미동 없이 흐릿한 상혁의 윤곽만 뚫어지게 응시했다. 열린 방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형광등 빛만이 희게 질린 그의 얼굴 위로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친하니까, 큰 돈 덥썩 빌리게 만들고. 애초부터 지들이 만들어 놓은 성공할 리 없는 사업에 손 대게 만들고. 갚으라고 갈구면서 다 떼먹는다고. 밀어서 쓰러트려놓고 발을 조져버리잖아, 평생 진창만 기어다니게."
똑같았다. 택운의 아버지도 그렇게 당했다. 알고보면 그 쪽에서는 자기들한테서 나온 돈이 다시 자기들 주머니로 돌아가는 잃을 것 없는 순환고리였지만 그걸 몰랐던 그의 아버지는 원금에 이자까지 고스란히 짊어지고 모든 걸 다 빼앗겼다.
택운이 경찰에 들어오고 나서야 알게된 바로는 그건 일반적인 조직 사채업자들이 쓰는 수법은 아니었다. 더 교활하고, 악랄하고, 집요한 방법이었다. 상혁은 그게 지금 해룡의 수법이라고 했다. 택운은 목젖까지 치밀어오르게 역류하는 뜨겁고 쓰라린 것을 애써 뱃속으로 삼켰다. 위장이 들끓는 것 같았다.
"어머니랑 동생은, 도망치다가.... 밤에, 도망치다가."
상혁은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던 주먹이 억세게 우그러들더니 쿵 쿵 내리쳐댄다. 그 요란한 소리에 목이 메인듯 밭아진 숨소리는 가려진다.
"난 그런 줄도 몰랐어. 그냥 멀리 도망쳐 버렸다고만 생각했어. 나랑 아버지 버리고. 아버지도 존나게 미웠어. 홀라당 속아 넘어가서 가족들은 도망가고 씨발 나는, 나는 남자새끼라 부려먹기 좋다고 옆에 두고. 그딴 한심한 사람이랑 나는 다르다고, 난 씨발 그렇게 안살겠다고. 그래서 내 발로 해룡에 들어갔다고. 그 뱀 굴을, 내 발로. 씨발!"
반쯤 삼키던 울음은 기어이 말머리를 타고 터져나와버린다. 빈 깡통을 쥐어짜듯 텅 빈 흐느낌이 상혁의 목을 긁으며 나온다. 식도를 다 긁혀 신음하듯 그가 울었다. 택운은 우두커니 서서 문득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림자만 꺼멓게 고인 진창. 누군가 짓이겨 놓은 발.
"이홍빈, 그 새끼가 나한테 뭐라했는 줄 알아? 나한테 총 쥐여주면서. 달라지겠다 말 뿐인 사람을 어떻게 믿냐고. 이거로 증거 만들어서 가져오라고. 내가 그 때, 그 때..."
상혁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꺼끌히 수염이 돋아난 턱이 부르튼 손바닥 아래서 짓뭉개진다. 택운은 미동도 못하고 상혁의 위태로운 말 위에서 침묵했다. 흔들리고 있는 것은 상혁인데 제가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아들이 제 머리에 총 겨누는데 눈 하나 깜짝을 안하더라고. 어쩌면, 내가 해룡 들어갔다는 순간부터."
상혁이 삼켜버린 말을 알 것 같았다. 아마 그는 각오했을 것이다. 상혁이 어떤 마음으로 해룡에 들어갔는지, 자신의 앞으로 상혁이 쌓아둔 원망의 벽이 어느 정도인지.
상혁이 입은 티를 끌어올려 벗었다. 등 뒤에서부터 또아리를 틀어 양 갈비뼈까지 몸을 늘어트린 용의 꼬리 부근에 선명한 흉터가 있었다. 총상. 가까운데서 맞았는지 말끔하게 뚫고 지나간 흉터였다. 마치 제 몸을 쏜 것 처럼.
"아무리 인간백정짓 하고 다닌대도 그건 못하겠어서, 이홍빈 앞에서 이짓거리 하고 기절해서 눈 뜨고 났더니."
병원에서 상혁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그 일주일 사이 아버지가 자살했다. 상혁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다. 아직도 그는 아버지의 유골이 어디 묻혔는지조차 몰랐다. 이홍빈은 넋 나간 그의 어깨를 두들기며 이제 다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 때 그가 어떤 표정이었는지 상혁은 기억이 안났다. 그 때부터 모든 게 다 흐릿했다.
"난... 그 새끼들 용서 못해. 진짜 내가, 이러다 총맞고 뒤지더라도."
숙인 얼굴 밑으로 둑둑 눈물 방울이 비처럼 떨어진다. 떨리는 어깨를 향해 택운이 손을 뻗다가 멈칫 하더니 이내 거두었다. 상혁의 등에 새겨진 용이 눈깔을 뒤룩뒤룩 굴리며 그를 감시하는 것 같았다.
그의 과거는 그의 것이었다. 그가 오롯이 짊어진 짐이자 굴레. 누군가 쉽게 동정하고 위로해서는 안되는 것. 택운은 그걸 말없이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눈에 보이는 것은 지표가 된다. 몇번을 되새겨 그 곳을 전환점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구멍같은 것 말이다. 상혁은 저 총구멍을 몇번이고 후벼파며 제 머리를 디밀었을 것이다. 감히 안다고는 못하지만 모르지는 않았다. 그 총구멍이 자신에게는 어머니였다. 저 대신 모든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무너져버린 어머니. 자신을 보며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
쥐약냄새는 나지 않았다. 벽돌 모서리가 다 바스라진 담장 옆 널브러진 쓰레기더미의 냄새도, 하수구를 타고 올라오는 역한 썩은 물의 냄새도 없었다. 그 모든 기억의 잔재들을 다 짚고 올라가서, 택운은 그의 집을 찾아오던 험상궂은 남자들의 희미한 얼굴을 떠올렸다.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라이터 끝에 잠깐 맺혔다 사라지는 불꽃이 눈동자 안으로 빨려 들어간듯 이글거린다. 해룡. 해룡이라고 했다. 상혁은 그게 해룡이라고 했다.
택운이 다시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발 밑에 흐르는 것은 더이상 진창이 아니었다. 매캐한 연기를 뿜어올리는 용암이었다.
*
낮 내내 날이 궂더니 밤이 늦게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발은 제법 거셌다. 어둑한 항구, 작은 부둣가는 파돗소리마저 비에 묻혀 외려 고요했다. 어둠을 갈라 움직이는 인영들은 밤을 덮어쓴듯 다 검었다. 우산도 쓰지 않은 검은 구둣발들이 땅을 울렸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쏴아아, 쏟아지는 빗줄기만 핏대세워 으르렁대고 있었다.
열을 맞춰 지나가는 무리 곁, 옆사람이 들고 있는 검은 우산 속에 서있던 남자가 조용히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흰 손이 까만 코트 아래로 초승달처럼 빛났다.
머리를 깔끔히 넘겨 드러난 이마 밑으로 진 어둠보다 짙은 그림자 밑, 드러나지 않는 눈으로 남자가 앞을 지나는 행렬을 훑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말없이 보고를 기다리는 그에게 말했다.
[주시중입니다만, 특이점은 없습니다. 조금 더 몰아둘까요.]
"됐어. 지금은 그쯤 해둬."
[알겠습니다. 지금은 둘이 독수리 집에 있습니다.]
"호오."
흥미로운듯 입꼬리가 늘어진다.
"그래야지. 비슷한 상처가 있는 처지끼리, 서로 보듬고 감싸주고...다 그러면서 사는 거 아니겠어? 그게 인생의 묘미지."
남자가 시선을 멀리 던져 저 끝에서 흔들거리는 배를 보았다. 꺼멓게 일렁이는 파도 위, 지게차들이 덜컹거리며 물건을 실은 팔렛트를 실어내리고 그 옆, 한무리의 남자들이 우산을 쓰고 배에서 내린다. 그들에게 얕게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지시했다.
"지켜봐. 어차피 곧이니까."
[알겠습니다.]
단정히 떨어진 대답 뒤로 그가 전화를 끊었다. 실어나온 물건은 트력에 실려 창고로 갈 것이다. 그래도 들어오자마자 확인은 해야지. 그게 그의 방식이었다. 뒤를 돌아볼 필요가 없도록, 눈 앞에 들이닥치는 즉시 모든걸 다 낱낱이 짚고 넘어가며 문제가 될 법한 것들은 씨앗도 남기지 않고 뭉개버려야 했다. 그랬어야 했다.
하늘이 움틀 하더니 바다를 쪼갤듯 번개가 쳤다. 순간 하얗게 점멸하는 빛에 대리석으로 빚어놓은 듯 날카로운 콧날 옆, 일그러진 눈동자가 뱀비늘처럼 번쩍인다. 용의 세번째 머리가 인천항에 도착했다.
홍빈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뒤에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시립해있던 검은 무리가 일제히 그의 뒤를 따른다. 더욱 더 거세진 빗줄기가 세차게 들이쳐도 그의 윤기나는 구둣발엔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
그 약은 정말 별다를 게 없는 물건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강릉으로 들어오고 동해룡이 서해룡에게 넘겨주는 약, 서부서 모든 경찰들이 알지만 묵인했던 그 것. 상혁이 처음 언급했던 백륭이 새로 들여온다는 것이랑은 1도 연관 없는 기성품이다.
몰라서 못 잡았던 게 아니라 건드리면 일이 커지고, 일이 커지면 복잡해지니까 안건드렸던 거지. 택운은 청장실에 불려가 청장의 어딘지 떨떠름한 격려를 받으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큰 건 하나 했으니 말은 수고했다 해도 뒤로는 골머리가 빠질 것이다. 더군다나 어제의 그 총격전 현장을 택운이 목격했으니 해룡 싸움에 경찰이 고스란히 낑겨버렸다. 이홍빈이 노린 건 서해룡을 견제하려는 요량이었겠지만 얼떨결에 경찰에게 넘긴 꼴이 된 것이다.
벌인 일 자기 손으로 마무리하라는 뜻에서였는지 그 총격사건의 수사도 택운에게 넘겨졌다. 물론 제대로 할 의사는 없었다. 지금까지 한 것만 해도 충분했다. 택운은 사무실 대신 차 안에 앉아 습관적으로 담배를 빼물고 시동을 걸려다 멈칫했다. 무언가 시야에서 움직인 것 같았다.
한참을 살핀 어둑한 지하주차장 내부는 듬성듬성 주차된 차량 말고는 인기척이 없었다. 신경이 어지간히 곤두선 모양이었다. 불 안붙인 담배 필터를 질겅질겅 물며 택운이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왠지 가야될 것 같은 곳이 있었다.
김여사는 잠들어있었다. 택운은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기척을 죽였다. 평소에는 그녀가 질색을 하고 피하는 통에 앉지 못했던 침대 옆의 야트막한 간이침대에 몸을 구기고 앉았다.
무릎이 침대의 철제 프레임에 닿을 정도로 비좁은 공간. 4인실을 나눠 쓰던 환자들은 다 퇴원하고 어머니 혼자만 남아있다. 이 휑한 미색의 상자같은 병실에서 하루 종일 어머니는 잠을 자거나, 악을 쓰거나, 그러다 지쳐 잠에 든다고 했다. 발작하는 주기가 조금씩 잦아지고 이제 그를 알아 보는 날은 손에 꼽았다.
어머니는 다 커버린 아들을 무서워했다. 아마 그녀의 기억 속 택운은 깡마르고 수척했던 고등학생 때에서 멈춰있을 것이다. 그 이후의 택운은 줄곧, 그녀를 원망하고 탓하고 외면했으니까. 택운은 그녀의 몸 위를 덮은 낡은 이불만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엄마. 나 나쁜놈들 잡아넣었다."
그녀는 미동도 없다. 마른 몸 위에 얹어진 주름진 손을 바라보다가 택운이 시선을 거둔다.
"남의 돈 뜯고 사람 패고 다니고 인신매매하고, 그런 못돼 처먹은 새끼들 잡아 넣고 왔다. 그 놈들 이제 빵에서 썩을 거야."
"...."
"우리 아빠 죽인 새끼들처럼, 우리 가족 박살낸 새끼들처럼. 그런 놈들 잡아 넣었다고 내가. 쇠고랑 채웠다고."
"...."
"...나 잘했지?"
목이 메여 이내 고개를 떨궜다.
왜 경찰이 되었는지는 잊고 살았다. 잊고 싶었다. 치기 없고 한심했던 이유라서. 부모처럼은 살기 싫다는 반항마저 결국은 그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삶의 증거나 다름 없었다. 그걸 부정하며, 스스로를 짓눌러 뭉개며 살아온 시간들이 이제야 허무했다. 잡아 넣은 해룡들을 보며 가슴에 차올랐던 그 생소한 감정을 느낀 순간 깨닫고 말았다. 처음부터 조금은 화 내도 되지 않았을까. 나를 지키려고 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이렇게 만든 조금 더 본질적인 것들에 대해, 그 하나가 맞서기엔 너무 큰 질서라고 여겼던 것들 말이다.
고개 숙인 그의 머리맡에서 조그마한 목소리가 물었다.
"아저씨 경찰이에요?"
"...."
택운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깨어난 어머니가 그를 보고 있었다. 흐릿한 눈동자에 비친 것은 택운이지만 택운이 아니다.
"나쁜놈들 다 잡아야해요."
"...."
"막, 남 못살게 굴고. 죽을 때까지 괴롭히고. 그런 애들 다 잡아야 해요."
"...."
"그래야 경찰이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가 참은지도 모른채 꾸역꾸역 되먹던 울음이 부지불식간 터져나와서 택운은 입을 막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가까이에서 몸을 일으키자 어머니는 삽시간에 희게 질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아저씨! 아저씨 이러지마라! 내 잘못했어요! 아아아악!! 때리지마라! 돈 없다! 우리집 돈 없다! 탈탈 털어도 십원 한장 안나온다! 왜이리 못살게 구는데!!! 돈 없다!! 먹고 칵 죽어뿔래도 없다고!!!"
고개를 푹 숙인채 도망치듯 나오는 택운을 간병인과 간호사들이 지나쳐 들어가고 그는 등 뒤로 조용히 문을 밀어 닫았다. 문 안에서 어머니의 비명이 물먹은 솜을 귀에 쑤셔넣은듯 멍멍하게 울린다. 그녀는 또 목이 쉬도록 소리친다. 돈 없다! 가라고! 아아악! 사람살려! 사람살려어! 째지는 비명을 들으며 택운이 스르르 주저앉았다.
택운은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꺼억, 꺽. 숨죽인 울음소리와 카랑카랑한 비명소리가 텅 빈 복도에 짓이겨진다. 비참하게 그림자 진다. 떨어진 눈물자국은 희여멀건한 타일바닥에 녹아 자취를 감춘다.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쥐약처럼, 사라진다.
병원을 빠져나가는 택운의 차량을 지켜보던 원식이 차가 더이상 보이지 않자 몸을 숨겼던 벽에서 빠져나왔다. 주차장에서부터 따라붙은 걸 용케 눈치채고 경계하는 통에 애를 먹었다. 이마를 덮은 머리를 습관처럼 쓸어넘기자 총신처럼 서늘한 눈동자가 드러났다가 곧 머리칼 사이로 사라진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옆모습의 날카로운 콧날을 타고 건물 그림자가 비스듬히 발을 걸쳤다. 오후 5시가 좀 안된 시각이었다,
"이동합니다. 마무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짧은 대답만 남기고 통화는 끊겼다. 해가 진다. 원식이 발걸음을 빨리 했다. 계단을 돌아내려가자 펄럭이는 수트 자켓 안으로 홀스터에 매인 까만 권총이 드러났다가 곧 옷자락 사이로 사라진다. 두걱, 두걱, 구둣발소리가 잠자코 뒤를 따랐다.
*
경찰은 약 건은 해결했지만 여전히 총기사고의 정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허탕만 치고 있었다. 주변 cctv도 깨끗했고 이상하게 그 상가 건물 주변만 교묘한 사각이어서 누가 드나들었는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그려둔 그림 대로, 서해룡 제 2의 세력이 나타나 내부분열이 일어난 것 아니냐는 추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들이 거래를 하는 장소와 시간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받는 루트는 필연적으로 내부자일테니까.
여태 적절한 무관심으로 일축하던 경찰측에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이대로 가다간 안되겠다 싶었는지, 이재환측에서는 상혁이 말을 흘리자마자 덥썩 물었다. 이홍빈을 치워버리는 것이 그쪽 입장에선 급선무일 터였다. 단 몇년이라도 빵에 붙잡아둘 수 있으면, 지금 야금야금 세를 불리는 것들을 와해시키고 백륭도 은근슬쩍 가져갈 수 있는 시간은 버니까.
그래서 재환이 흘린 정보는 아주 굵직하고 제대로 된 한 방처럼 보였다. 백륭과 홍빈의 첫거래 장소. 재환의 말로는 홍빈이 며칠전 입국해 거래 준비에 여념이 없다고 했다. 그가 이 건을 어떻게 성사시키느냐에 따라 앞으로의 입지가 달라질 일이니까. 비위 맞춰 달래듯 데려온 홍콩마피아를 어떻게 구슬려 자본을 끌어내는 가에 사활을 걸 것이었다.
그런데.
학연이 텅 빈 공사부지, 콘크리트로 구조만 지어올리다 그만 둔 허술한 지붕 밑 덩그러니 놓인 소파들을 보며 발 앞에 굴러다니는 깡통을 걷어찼다. 불빛 하나 없는 을씨년스러운 공터가 경관들이 휘젓는 손전등 불빛에 드문드문 머리털 헤집듯 들여다 보였다. 관리가 오래 전부터 되지 않은듯 잡초가 무성한 공터 옆, 콘크리트로 다져올린 층 위에는 누군가 드나들기는 한 듯 플라스틱 의자들과 불 피우는 연통같은 것들이 뒹굴고 있었다.
옆에서 택운은 가라앉은 눈으로 쥐새끼 하나 없는 그 어둠 속을 훑어보았다. 이 곳이 재환이 말한 거래장소였다. 그의 말 대로라면 지금쯤 백륭과 이홍빈은 여기에서 화기애애하게 친목을 나누고 있어야 맞았다.
"어떻게 된 거야. 얘기가 흘러나간 게 샜다고?"
"아니면 처음부터 제대로 된 정보가 아니었거나."
학연이 차게 말하며 택운을 쏘아보았다. 질책하는 눈빛이었다.
"까고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휘둘린거야?"
"휘둘렸다니 무슨 소리야."
"건덕지 주는 대로 철썩 같이 믿고 여기저기 쏘다니게 만든 걔."
할 말 없단 듯 택운이 담배를 꺼내 물고 라이터를 꺼내 드는데 성큼성큼 다가온 학연이 그걸 잡아채서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졌다. 콘크리트 바닥에 챙 소리를 내며 깨지는 라이터를 보고 택운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뭐하냐. 시비거냐 지금?"
"답답해서 하는 소리잖아요, 정택운 형사님."
학연은 그들 주위로 포진해있는 지원나온 경관들에게 들릴새라 잇새로 말을 자근자근 씹어뱉었다. 그가 짜증이 치밀 때면 하는 버릇대로 양 손이 허리로 올라간다.
택운이 그 모양을 보며 귀찮게 됐군 싶어 속으로 혀를 찼다. 학연이 지금까지 이상하리만치 그에게 간섭하지 않았던 것은 어떻게 되나 지켜보자는 심산이었으리라. 그의 동기는 이런 식으로 늘 차분하고 계획적이었다.
"누굴 등신으로 알아? 갑자기 안하던 짓 하던 것도 모자라서 뜬금 없이 월척 낚아오는데. 사람들이 이걸 니가 드디어 정신차린 거라고 생각하겠어, 아님 누울자리 쏙쏙 골라 던져주는 엄한 놈한테 휘둘린다고 생각하겠어?"
"...."
"지금 니 정보통."
가까이 다가오는 학연의 시선을 택운이 가만히 되받았다. 옆을 훝고 지나가는 손전등 불빛에 학연의 눈동자가 노랗게 번뜩인다.
"대체 뭐하는 놈이야? 뭘 어떻게 구슬렸길래, 정신차리고 보니까 니가 총대 메고 개싸움 한가운데 뛰어든 꼴이 된 거냐고, 평소엔 뭐가 어떻게 굴러가건 관심도 없었으면서. 뭔가 이상하단 생각 안들어?"
택운은 그의 말투 끝에 묻은 걱정을 헛웃음으로 일축하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학연은 택운이 부인하기도 전에 이마를 찌푸리며 경고했다.
"잘 생각해서 행동해. 허탕이야 있는 일이고, 지금은 철수하면 그만이지. 근데 이 다음엔? 내부에서 지금 말이 안 나오는 줄 알아? 쟤는 뭐 믿고 나대냐. 어디서 정보 받아서 지 혼자 특수팀 된 것처럼 움직이냐. 저렇게 휘젓고 다니다가 다 들쑤셔서 개판 내놓는 거 아니냐."
"애초에 거기서 더 개판 날 게 뭐 있었다고-"
"사실 짜고 쳐서 한탕 하고 빠지려는 거 아니냐."
"-뭐?"
삽시간에 택운의 눈이 치켜 올라갔다. 욱하는 성격 고스란히 드러내며 멱살을 잡으려는 걸 학연이 거칠게 뿌리쳤지만 택운의 목소리는 이미 날카롭게 튀어나온 후였다.
"누가 누구랑 짜고 쳐?"
"그러니까 잘 생각하고 행동 하라는 거 아니야, 주위도 좀 돌아봐 가면서. 억울하게 꼬투리 잡혀서 타겟 되기 싫으면. 청에 해룡쪽 사업 투자한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위이이잉.
둘의 언성이 차츰 높아져갈 때 택운의 자켓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택운이 학연을 쏘아보던 눈을 돌리자 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경관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대강 주변조사 끝내고 복귀 하자고 소리치는 학연을 곁눈질하고 택운이 발신화면을 확인했다. 상혁이 그와 통화할 때 쓰던 낯익은 번호였다.
학연과의 대거리로 짜증이 치민 택운이 수신 버튼을 누르자마자 목소리를 낮추고 따지고 들었다.
"어떻게 된거야. 백륭은 개뿔 쥐새끼 한마리도 없..."
[정형사님.]
낯선 목소리가 대답했다. 낮고 나지막한, 기분 나쁠정도로 침착한 중저음. 택운은 등골을 타고 오르는 한기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말아쥐었다.
"누구야, 너."
[안녕하세요. 얼굴 뵙고 인사 드린 적은 없지만, 아실거라 생각합니다. 해룡그룹 해외사업본부장 이홍빈입니다.]
머리가 희게 바래는 느낌. 상혁이 꼬리를 밟혔다. 어디서, 언제?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이 정보를 주고 추후 작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통화를 했었다. 그가 현장에서 허탕치는 그 몇 시간 사이에 발각된 것인가.
아니, 전부터 그들은 줄곧 뒤를 밟아왔을 지 모른다. 택운은 옥상에서 총을 쏴대던 검은 옷의 남자를 상기했다. 그렇게 계속 감시하다가 가장 결정적인 때에 움직인 것이다.
택운이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떠오르는 추측을 끼워맞출 때 홍빈이 퍽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들었다는 투로 말했다.
[듣자하니 두 분이서 참 알찬 계획 세우셨던데요. 이 번에 화려하게 피날레 장식하고 손 떼셔도 될 법 했는데. 근데 그렇게 되면 저희도 좀 곤란해져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부분은 형사님이 이해 좀 해주세요.]
"들어? 누구한테 뭘 들었는데."
[이야, 이 친구, 의리있대요. 입으로 들은 건 얼마 안되지만 이것 저것 찍어둔 게 제법 많더라고요.]
덕분에 그거 도움을 좀 받았죠, 덧붙인 홍빈은 손에 들린 인화 사진을 차례 차례 넘기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거수 일투족을 찍은 덕에 꽤나 두툼한 사진 뭉치를 살피던 홍빈이 손을 문득 멈췄다. 청춘나이트에서 택운이 '물건'을 받은 그 날의 사진이었다. 뒷문을 나온 남자 한명이 쇼핑백 하나를 택운의 차에 싣고 있다. 조그맣게 찍힌 쇼핑백 위에 손톱을 세워 긁어내리며 홍빈이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하는 택운에게 퍽 비밀스러운 어조로 속삭였다.
"일단 와서 얘기 나누시죠. 통화로는 중요한 이야기는 못 전해드리니까요. 저희 회사로 오시면 어떨까요. 마침 '파트너분'도 여기 와계시기도 하고요."
['파트너'?]
택운의 조소에 홍빈이 다 안다는듯 덧붙였다.
"아, 구하러 오실만큼 그렇게 돈독한 사이 아니실 건 아는데요. 어쨌든 마무리를 지으려면 대면을 해야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보고 들은게 있으니 따지고 보면 나도 자의로 한 일은 아니라는 거 알텐데. 피차 곤란해질 일 만들지 말고 조용히 넘어 가는 건 어때.]
성질 죽이고 한발 물러나는 택운의 말에 홍빈이 피식 웃으며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최근에 해룡한테서 '물건' 받으신 거 있죠.]
홍빈의 한마디에 택운이 쩡 얼어붙었다. '그 것'은 받아 놓은 후로 열어보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택운의 침대 머리맡 스툴 서랍에 처박혀있었다. 지금도 '그 것'이 거기에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택운의 표정이 심상찮아지자 멀찍이서 학연이 무슨일이냐고 물었으나 택운은 손만 휘저어 보이고 그대로 건물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택운의 틀어막힌 침묵 위로 재수 없을 정도로 유창한 홍빈의 말이 거침 없이 흘렀다.
[오해는 말아주세요. 저희가 그러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서해룡측에 들어간 거 세어보다가 이게, 하나가 비더라고요? 어디갔을까~ 하다가, 기록을 찾긴 찾았는데. 아, 이것들이 깡패 주제에 이제 장사 좀 해 봤다고 장부를 적어놓더라고요. 하하. 이거 채권 써놨다가 나중에 받아 먹기라도 하겠다는 건지. 아! 이럴 때 증거자료로 쓰려고 한건가?]
쾌활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가 숫제 대놓고 빈정거렸다. 아까의 단정함 위로 미끌한 기름물처럼 무언가가 끈적히 흘렀다. 조소, 멸시. 택운이 입고 있는 불행의 갑옷을 조이는 나사들의 이름이었다.
[최근 경찰에서 이 총기사고 범인을 애타게 찾고 있는거 같은데. 같은 경찰에서 등록 안 된 총기 갖고 난동피고 다닌다는 거 알면...]
택운이 서해룡에게서 부탁해 받은 '물건', 미등록된 밀수입품의 총기. 반자동식 피스톨, 일전의 총기난사에서 사용된 것과 같은 구경의 탄환을 사용하는 종류.
택운은 미친듯이 뛰는 심장에 덩달아 숨을 씨근덕 대며 대어둔 차를 향해 뛰듯 걸었다. 운이 더럽게 없는 걸까. 아니, 그가 그 장소에서 그 사건에 휘말렸을 때 부터 충분히 끼워맞춰질 수 있는 퍼즐이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서해룡 본사 빌딩입니다.]
가면 너머 도사린 무언가가 입을 찢어 웃었다.
[기다리겠습니다, 형사님.]
*
인천 항만 서해룡 본사 빌딩, 쓸데없이 높은 건물은 외벽을 죄 유리로 해놓는 바람에 한층의 반을 터놓은 26층 부회장실에서는 밤이면 한쪽으로는 인천 끝자락의 지평선까지, 다른 쪽으로는 거먼 인천 앞바다의 수평선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며칠 전 내린 비로 하늘이 깨끗하게 트여서 유난히 도시의 불빛들이 선명하게 어둠을 수놓고 있었다.
그 야경을 등지고 선 홍빈은 오늘도 흠 잡을 곳 하나 없이 멀끔한 차림이었다. 그의 사무실에 빼곡히 들어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으로 맞춰 입은 부하들 사이에서 그의 흰 셔츠는 건물 안에 뜬 달처럼 유독 창백했다. 얇은 블랙 타이에 흰 셔츠, 검은 수트팬츠를 단정히 입은 그에게서는 법조인같은 엄숙함마저 흘렀다.
구김 하나 없는 법복같은 생김새 뒤로 그는 자기 자신을 잘 감추어 둘 줄 알았다. 그래서 그가 잔혹해지는 모습은 사람을 더 섬짓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바늘구멍 하나 안 들어가도록 덮어 쓰고 있던 가면 너머의 작은 틈은 함부로 들여다 보아선 안되는 지옥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그것을 엿본 이들은 다 알고 있었다.
홍빈이 손을 들어 매끄러운 턱을 매만졌다. 이마가 드러나게 넘긴 갈색 머리칼 밑으로 언뜻 유순해보이는 둥근 눈매가 생각에 잠겨 반쯤 내리깔려있었다. 무언가 묘수라도 생각하는듯 톡, 톡, 턱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맞춰 쥐죽은듯 조용한 부회장실에는 시계초침소리만 성마르게 딸깍거렸다. 입을 틀어막힌 듯한 정적이 공기중에 진득했다. 홍빈의 주위는 항상 이랬다. 시끄러운 건 딱 질색이었다. 성가신 것도, 계획된 것이 틀어지는 것도. 그는 무언가 제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대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 때, 그의 곁에 동상처럼 시립해있던 원식이 무전을 듣고 보고했다.
"건물 로비 도착했다고 합니다."
"꼬리는."
"아직까진 없는 걸로 보입니다."
"매너 있으시네."
홍빈이 피식 웃으며 턱짓했다.
"너넨 가서 형사님 모셔와라. 넌 '준비' 하고."
지목당한 남자 셋이 말 없이 고개를 숙여보이고 문을 빠져나가는 옆으로 원식은 조용히 부회장실 옆 딸려있는 비품실로 향했다. 가면처럼 눈을 가린 앞머리 너머에서 내내 비어있던 무기질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이.
하나같이 시꺼먼 정장을 입은 장정들이 건물 안에 즐비했다. 반은 정신을 잃거나 바닥을 질질 기고 있는 것이 이미 한바탕 하고 난 후라는 소리였다. 상대가 정비할 시간을 주지도 않고 돌아오자 마자 들이닥친게 과연 확실한 거 좋아한다던 사람 답다고 생각하며 택운이 앞장서서 안내하는 장정 뒤를 따랐다. 이 상태라면 이재환의 안위도 장담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택운이 문득 깨달았다. 이홍빈은 그와 한 통화에서 '들었다'고 했다. 이재환이 몸을 못 빼고 앉은 채로 당했다면 그에게서 이야기가 샜을 가능성도 있었다. 상혁은 말 했을까. 택운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층 버튼을 누르는 남자의 손을 흘끗 본다. 26층. 최상층이다.
상혁은. 거기까지 생각만 하면 머릿속이 암전된다. 어떻게 여기까지 운전을 해서 온 건지도 가물하다. 혼란스러움이 미간을 타고 식은땀처럼 흐르는 것 같았다. 건방진 애새끼, 간 큰 협박범. 범죄모의를 작당하는 주제에 경찰한테 정의감 찾으라고 부추기고. 같은 진창에서 굴렀던, 어쩌면 자신보다 더 비참한 구렁텅이에서 득득 기어나와 복수 할 거라고 설쳐대는게 왜, 두고 볼 수가 없었을까.
사실 그랬다. 무시하려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런 같잖은 협박, 대수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엇이, 그 되바라진 새끼의 어느 부분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이렇게 흔들어 놓은 것인지 택운은 시작점을 짚을 수 없었다. 상혁이 말하는 모든 것이 자신이 살아온 정반대의 방향이었다. 그 곳으로 달려오면서 그는 약간은, 통쾌했던 것도 같다. 어머니 앞에서, 무너져버린 나의 성벽 앞에서. 그 곳을 버티는 것이 조금은 더 담담했던 것도 같다.
열린 문 너머로 장정들이 시립해있다. 다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있던 1층과는 다르게 벽에는 핏방울 하나 흔적도 없었다. 아직 사달을 낸 건 아닌가보군 생각하며 택운이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길목을 지키고 선 남자들이 하나같이 불손한 눈빛으로 꼬나봤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형사님."
언제 얼굴이나 봤다는 듯이 친근한 얼굴을 하고 홍빈이 그를 맞았다. 홍빈도 온통 까만 수트에 까만 넥타이, 장례식 가는듯 옷이 죄 검었다. 장례식. 택운이 한쪽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서해룡 장례식이다, 이 말인가. 꽤 사람 기분 나쁘게 하는데 재능이 있는 새끼 아닌가.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진작 뵙고 이야기 드렸어야 했는데, 여차저차 하다보니 늦어졌네요."
"너랑 좆목하려고 온 거 아니니까 본론부터 말해."
거칠게 튀어나간 언사에도 홍빈은 눈하나 깜짝 안하고 반반한 낯으로 씩 웃기만 했다. 마치 제 집처럼 테이블 상석에 앉고 택운에게 자리를 권했지만, 그가 싸늘히 보고만 있자 어깨를 으쓱 하곤 저만치 앉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뭐하냐, 손님 오셨는데. 시원한 물 가져다 드려. 속 타실텐데."
택운은 조용히 자리에 서서 홍빈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가,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마찬가지로 새카만 정장에, 까만 셔츠에 까만 넥타이, 까맣게 빛나는 구두.
상혁은 테이블에 가져온 생수를 내려놓고 조용히 홍빈의 뒤에 시립했다. 퍽 익숙한듯 그 자리에 손을 모으고 서는 모습에 택운이 눈만 크게 떴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 관자놀이가 멍멍히 울렸다.
"놀라셨죠? 상혁이는 보시다시피 잘 있습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여러가지로 답답한 부분들 많으셨을텐데. 애가 생긴건 우직해도 사람 속 긁는 게 있어서."
홍빈이 상혁을 흘끗 돌아보며 꽤나 괜찮은 농담이라도 한 양 피긋 웃는다. 상혁이 장단 맞추듯 입매를 늘이는 것을 보고 택운의 눈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전부 니가 짠 판이었어?"
"음. 이것 저것 미흡한 면이 있었지만, 상혁이와 형사님이 잘 협공 해주신 덕분에 큰 산은 넘겼습니다. 그 부분에서 저희가 나름, 감사의 표시로 준비를 한 게 있는데요."
홍빈이 뱉는 말은 하나같이 기름칠 한듯 매끄러웠다. 과연 뱀의 입 다웠다. 하지만 그런 말은 하나도 귀에 담지 못하고 택운의 시선은 돌담처럼 커다란 어깨를 펴고 그의 뒤의 선 상혁만 보았다.
잘 빠진 정장을 입은 모습이 낯설었다. 다른 사람은 아니겠지. 쌍둥이라던가. 용 허리를 꿰뚫은 그 총자국을 보여주며 내 쥐덫 같은 조그만 아파트에서 오열하던 그 새끼가 저기 서있는거 아니지. 그런 생각들이 매끄러운 홍빈의 말 위에서 발을 미끄러트리며 쿵쿵 넘어져댔다. 그것이 바닥에 무릎을 깨박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속이 드글거렸다.
택운이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리에 못박혀 서있는데, 홍빈의 손짓에 맞춰 문이 턱 열리며 뭔가 소란스러운 것이 뒷쪽에서 가까워져 왔다. 악다구니 받쳐 내지르는 소리가 무언가에 틀어막힌듯 억눌려 있었다.
원식의 손에 이끌려 그것이 자신의 발밑에 내팽개쳐질때 까지 택운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있다가 남자의 목소리가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시선을 돌렸다.
재환은 먼저 봤을 때에 비해 꼴이 굉장히 엉망이었다. 원식에게 뒷덜미를 잡혀 질질 끌려 오느라 비품실부터 택운의 앞까진 그의 피로 줄이 쩍 그어져있었다.
제 피로 문댄 그 흔적 위에서 재환이 두 팔다리가 결박된 채 생선처럼 펄떡대었다. 눈은 당장이라도 택운을 찢어죽일듯이 형형했다. 입에 물려놓은 재갈 사이로 분노가 피가래 끓듯이 새고 있었다.
홍빈이 자리에서 일어서 건들거리며 다가왔다. 예의같은 것을 가장하고 있던 눈이 숨길 수 없는 고양감으로 반들거린다. 뱀눈알처럼.
"형사님, 개인적인 부분 언급해서 죄송한데. 앞으로 빚이 좀 많으시더라고요. 이거 꽤 오래된 빚이죠? 양친께 받은 거."
택운은 그날 밤 상혁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었다. 어떻게 어디서 살았고 그 곳에서 어떻게 도망 왔는지 같은 것. 그가 읊은 개인사 모두, 고스란히 홍빈에게 들어갔을 터였다. 택운이 발자국으로 먼지투성이인 재환의 셔츠에서 시선을 들어 그의 옆을 맴도는 홍빈을 노려보았다.
"짐작은 하셨겠지만, 그거 해룡에서 받은 빚인거 알고 계셨어요? 형사님 강원도 출신이시잖아요. 그 때 당시, 그러니까 형사님 아버지가 사업 한창 시작하시던 20년 전 전이죠. 그 때 동해룡 회장이 누구였는지 아세요?"
재환이 몸을 뒤틀며 무어라 소리지르자 원식이 사정없이 등허리를 걷어찼다.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재환이 다시 잠잠해지고 홍빈이 말을 이었다.
"...지금 해룡 회장이 그 때 동해룡 회장이었습니다. 그런, 악질적인 수법으로 돈 불리기에 한창이었죠. 실제로도 꽤나 짭짤해서 나중에, 아주 나~중에 그 때 한 밑천 마련한 걸로 해룡 회장까지 올라간 거예요. 그리고 그 회장 아들이 저기 저 이재환 부회장이고요. 그렇지?"
홍빈이 재환을 향해 제법 친근하게 물었으나 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건 한 때 라이벌이라 간주하던 사람이라기보다는 혐오스러운 벌레를 보는 눈에 가까웠다. 홍빈이 성큼 성큼 제 쪽으로 다가오자 재환이 반항하듯 몸을 꿈틀거렸으나 뒤에서 원식이 등을 밟고 있어 그저 벌레처럼 꾸물거릴 뿐이었다. 홍빈이 바닥에서 바르작거리는 그를 향해 몸을 낮추자 재환이 단단히 입을 틀어막은 재갈 너머로 무어라 소리질렀지만 곧 뺨을 내려치는 홍빈의 손에 잠잠해졌다.
"시끄러워, 이 새끼야."
시끄러운 거 싫다고 아까부터 몇 번을 말해, 중얼거리며 홍빈이 저쪽에 선 상혁을 향해 고갯짓했다. 그에 상혁이 이 쪽으로 다가오자 택운이 흠칫 하며 발을 물렸다. 그 모양을 보며 홍빈이 재미있단 듯 삐뚤게 웃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이었다.
"마저 설명 해드리면. 제가 짠 그림은 이래요. 해룡이 받을 빚이 있었는데, 들고 나르는 바람에 못찾았다. 뭐, 5억이면 꽤나 짭짤히 큰 돈이죠. 근데, 알고 보니까 지들한테서 돈 받아먹던 썩은짭새가 그 빚지고 튄 놈이었다. 열 받겠죠? 당연히 열 받죠. 근데 알고보니 자기들이 이 형사한테 총을 팔았네? 그런데 형사님이 원한 가진 대상은 지금 해룡 회장인거예요. 등골 쎄하죠. 이거로 뭐 하려는지 알고?"
그게 퍼즐의 첫번째 조건이었다. 택운이어야 했던 이유. 택운은 멍한 눈으로 상혁이 읊었던 그 말을 떠올렸다. 형사님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적어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것 저것 알고나서 보면 나름 일리 있는 소리예요, 지금 회장이 따악 형사님 바닥 기던 그 시절 동해룡 이거였으니까. 그러니까 원한을 지금 회장 아들인 이재환에게 풀려고 한다. 그래서 저번에도 총 가지고 이재환 찾아가서 그 난리 피운 거고, 이번에도 결국은~ 이재환 찾는다고 해룡 다 모인 자리에 찾아와서 설치다가, 결국 이재환을 죽인다. 물론 형사님이 구매하신 그 총으로요."
홍빈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상혁이 바지춤에서 권총 하나를 꺼내들었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눈꺼풀이 깜빡, 깜빡 할 떄마다 철컥, 철컥 금속의 총신이 검은 가죽장갑을 낀 상혁의 손 안에서 몸을 틀고, 마침내 경악으로 눈이 부릅떠질 때 이미 총신은 불을 뿜고 있었다.
-탕! 탕!
격발음이 사무실 벽면에 빼곡한 유리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나 귀를 후벼팠다. 정확히 양쪽 허벅지와 어깨에 두 발을 맞은 재환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홍빈이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기 전에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총은 상혁의 손에 쥐어진 채로, 이번엔 택운을 겨냥하고 있었다. 허튼 짓 말라는 듯이.
눈가를 죄 덮은 앞머리 너머로 상혁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택운은 멀거니 그 자리에 서서 이유없이 가빠지는 호흡만 턱턱 들이삼켰다. 재환의 다리에서 검붉은 피가 둥근 원을 그리며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과다출혈로 순조롭게 죽을 거예요. 뭐, 그동안 저흰 이야기를 마저 하죠."
영화 결말 읊듯이 말한 홍빈이 상혁의 옆을 지나며 어깨를 턱 짚었다. 홍빈이 꽤나 멀쓱하게 큰데도 상혁의 덩치 옆에 있으니 한김 작은 느낌이었다. 산처럼 우뚝 선 상혁의 옆에서 그가 젠틀하게 웃었다.
"우리 상혁이. 아~ 상혁이가 큰 역할 했죠. 뭐랬더라, 처음에. 너 뭐라그랬더라. 아! 해룡 다 집어 넣을 수 있다고. 하하! 그 허무맹랑한 얘기 들으면서 뭐가 이상하다고 생각도 안하셨어요?"
호쾌한 웃음소리가 아까의 총성처럼 머리를 울렸다. 친근하게 상혁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홍빈이 시원스러운 입매를 찢으며 마음껏 웃어제꼈다.
"물론 얘가 믿음직하게 생기긴 했지만, 얘 혼자서 어떻게 해룡을 쳐요. 그리고 그 정보가 어디서 다 나오는 건지 의심도 안했어요? 얘가 무슨 수로 이재환이 물건 거래 하는 곳을 알아요. 딱 봐도 어린 이 쪼만한 애가. 과거 사연도 그래. 어떻게 주위에 사람 하나 없이 살았다고 해도 그렇지, 어렸을적 자기가 못되었던 그런 정의 넘치는 애송이가 옆에서 알짱거린다고, 자기 의지하는 티 좀 냈기로 서니, 어디서 뚝 떨어진 지도 모르고 그렇게 덥썩 정을 주나?"
이제 홍빈은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해답지 읽어주듯이 술술 풀리는 퍼즐에 택운이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꾹 다물린 입을 비틀었다.
"게다가 쟤가. 또 저런 재능도 있는 줄은 몰랐네? 어떻게 연기까지 잘하니. 야, 상혁아. 너 배우해야겠더라. 얼굴도 잘생긴 게. 밀어줄게. 소속사 하나 차리자."
홍빈이 킬킬거리며 상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테이블로 향했다. 검은 가죽소파에 늘어지게 기대앉아 다리를 꼰 홍빈은 그가 입을 닫자 쥐죽은 듯 조용해진 그 무거운 공기를 기꺼운듯 깊이 들이쉬었다.
이래야 했다. 그가 말 할 때엔 모두가 경청해야 하고, 계획은 틀어지는 것 없이 진행 되어야 했고 모든 일에 여지를 남겨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말끔하게 뿌리 하나까지 뽑아내서 땡볕에 버석히 말려 죽인후 자근자근 밟아 짓이겨 놔야 한다. 다시는 돌아 볼 필요 없도록, 무언가의 싹이 될 여지 하나 없도록 말이다.
홍빈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상혁을 보았다. 총구의 끝은 미동 없이 형사를 겨누고 있다. 솔직히 처음 상혁에게 이 건을 맡겼을 때만 해도 조금씩 상황을 조작하는 곁가지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렇게 수월히 서해룡을 뒤집을 수 있는 카드가 되어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형사님. 이제 마지막 마무리만 남았습니다. 형사님 협조가 좀 필요해서요. 미리 양해 좀 구하겠습니다."
홍빈의 말을 신호로 상혁이 총을 든 채 저벅저벅 걸어 택운의 앞으로 다가왔다.
검은 총신을 쥔 검은 장갑, 검은 정장 위의 검게 가려진 눈 그림자. 그를 따라 시선을 타고 올라가 마침내 눈가를 가린 앞머리 사이로 얼핏 비친 눈동자를 보았을 때 택운은 흠칫 놀라 눈을 치켜떴다. 그건 택운이 익히 아는 눈이었다. 독기로 옹골차 단단히 번뜩이는 안광.
원식은 몇걸음 너머에서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택운에게 다가가는 상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재환의 몸에서 흐른 피 웅덩이가 발밑에 닿았다는 것을 깨닫고 발을 물렸다. 하지만 이미 묻어버린 피가 구둣발 아래 진득하게 선을 그었다. 젠장.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린다.
홍빈이 직접 스카웃한 해룡 최고의 히트맨, 홍빈의 그림자는 아이러니하게 피냄새를 지독히 싫어했다. 손에 묻히는 것은 물론이고 옷이며 소지품 어딘가에 묻는 것도 질색이다. 그래서 무기는 총만 쓰고, 작업할 때 입은 옷은 두번 다시 입지 않았다. 밑에 쓰러진 재환에게서 풍기는 피냄새도 코가 떨어지도록 지독한데, 이 구두를 신고 걷는 내내 코가 절여질 생각을 하니 심기가 불편해서 원식이 구둣발을 바닥에 득득 피를 닦듯 문댔다. 발 아래로 그가 재환을 끌고 올 때와 같은 핏자국이 남는다.
구두를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원식이 고개를 드는데 문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과정은 저 총에 형사의 지문을 묻히는 것이다. 직접 쏘았다는 것이 증명 되도록 방아쇠에까지 확실히, 총을 손에 쥐여 주고서. 그런데 저 총, 쥐어주기 전에 실탄을 뺐던가.
거기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상혁이 택운의 손에 총을 쥐어주고 있었다. 원식이 몸을 날림과 동시에 상혁이 택운과 손을 겹친채 방아쇠를 당겼다.
-탕!
어디선가 총소리가 난 듯해 학연이 흠칫 놀라 주변을 돌아 보았으나 주위는 잠잠하기만 했다. 드문드문 켜진 노란 가로등이 비추는 골목길에 주차된 차 운전석에 앉아 학연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작전은 허탕을 치고 택운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위에는 어떻게 보고를 해야할지 벌써 앞이 깜깜했다.
택운이 처음 이상한 행동을 할 떄 부터 뜯어 말렸어야 했다. 그러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전면적으로 번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불필요한- 기존에 있던 구린 질서를 어떻게든 정의롭게 바로잡아 보려는듯한 웃기지도 않은 소용돌이의 중심에 택운이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가 그동안 알아온 택운은 자발적으로 이런 일에 발을 들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벌써 7년간 같은 서에서 동고동락한 그의 동기는 늘 어딘가 불만에 차 있었지만 그걸 행동으로 표출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부조리에 대한 모든 반발을 무관심으로 일축하며 그 가운데서도 착실히, 순응해오지 않았던가.
그에게 무언가 이변이 있었다. 학연은 그렇게 단정지었다. 그리고 그 촉발제는 높은 확률로, 택운을 고분고분 따르게 한 그-
[차학연경사. 차학연경사 현장 나와있습니까.]
노이즈 끓는 무전소리가 생각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학연이 서둘러 무전기를 꺼내 응답했다.
"차학연 경사, 현장 순찰중입니다."
[정택운 경사 불법총기소지혐의로 즉시 체포 요망.]
이게 또 무슨 개소리야, 하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삼키느라 학연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 사이 무전기 너머에서 자글거리는 목소리가 줄줄이 택운의 혐의를 읊었다. 청으로 증거자료 뭉텅이가 도착했다고 한다. 이 새벽에, 당직형사의 책상 위에 기다렸다는 듯 올려져 있는 서류봉투 안에는 택운이 청룡 소유의 나이트에서 물건을 전달받는 사진과 그 장부 내역이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빌어먹을 정도로 확실한 증거였다. 그리고 너무나 명확한 노림수였다.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학연은 싸해지는 손 끝을 말아쥐고 숨을 골랐다. 처음부터 이걸 노린 거였다. 이 덫이었다.
"정택운경사 GPS 위치추적 요청."
그가 위험할지도 몰랐다.
*
원식이 정강이에 총을 맞고 그대로 바닥으로 무너졌다. 홍빈이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데 상혁이 택운의 손에 들린 권총을 겹쳐 쥔 그대로 저만치서 우왕좌왕하는 남자들에게 총구를 향하고 사정없이 갈겼다.
탕!탕탕탕! 탕탕!
몇 발의 총성이 이어졌는지 택운은 세보지도 못한 채 빈 탄창이 튕겨져 나올 때 마다 그 반탄력을 고스란히 온 몸으로 얻어맞으며 휘청였다. 하지만 팔과 손을 움켜쥔 악력때문에 간신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독기에 가득찬 그 거센 힘이 택운을 지탱하고 있었다. 택운이 멍한 눈으로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장정들을 바라보았다. 몇몇은 쓰러지고 몇몇은 머리나 심장을 맞아 즉사했다. 담을 쌓듯 무너진 그들의 몸 너머로 주춤거리는 남자들을 보며 상혁이 팔을 옮겨 그대로 총구를 홍빈에게 향했다.
"더 가까이 오면 바로 하나씩 대가리 터질 줄 알아. 얌전히 닥치고 보기나 해. 뭐, 경찰에 신고라도 해보든가."
일갈한 상혁이 홍빈을 응시했다. 줄곧 가려져 있던 눈이 흘러내린 땀에 갈라진 앞머리 사이로 드러난다. 온갖 적의로 뭉친 그 것을 마주하고 홍빈은 경악으로 굳었다.
"...한상혁 너."
"형. 모두 다 거짓말은 아니에요."
홍빈의 희게 질린 낯을 퍽 즐거운듯 보며 상혁이 택운에게 말했다. 택운은 총구 끝에 박힌 눈을 떼지 못했다. 상혁이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기 위해 시선을 돌리는 순간 어디에선가 날아온 총알이 제 머리를 꿰뚫고 지나갈 것만 같았다.
상혁은 얼어버린 택운의 팔을 잡은 그대로, 신음하면서도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키려는 원식의 다리를 구욱 밟아눌렀다. 아악, 고통에 찬 비명이 입술을 짓씹는 홍빈의 얼굴 위로 덧씌워지는 것을 감상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형이랑 다른게 있다면, 나는 이 날을 위해서 살아왔다는 거지. 아버지, 어머니, 동생... 내 가족을 죽이고, 내 모든 걸 다 쓰레기로 만들어놓고, 구원자인척 날 속인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이 날을 위해서."
"한상혁!!!"
탕!
분노에 찬 홍빈의 외침이 울릴 때, 어찌할 새 없이 격발된 탄환이 그의 배를 꿰뚫었다. 배를 움켜쥐고 서서히 무너지는 홍빈을 찬 눈으로 일별하고 아직 총구는 숙인 정수리 바로 위로 향한 채, 상혁이 주춤거리는 해룡 무리들을 곁눈질했다. 입꼬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 죽여주게 통쾌했다.
"쉽게 죽이면 아깝죠. 똑같이, 아주 서서히, 말 그대로 피가 말라가도록 허덕이면서 죽어야 해요. 그러니까 이정도가 낫지."
"이 미친, 미친놈아."
택운이 가까스로 뱉은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사람을 죽였다. 제 의지는 아니었으나 방아쇠를 당긴 것은 자신이었다.
"이게, 왜 다..."
"복수요. 말했잖아요, 찢어죽일 거라고. 다 똑같이 돌려줄 거라고. 그게 거짓말 같았어?"
상혁의 목소리는 쾌활하기까지 했다. 바라고 염원하던 것, 그것을 손가락 끝으로 이뤄내는 순간의 희열을 고스란히 담은 체온이 함께 쥔 검은 쇳덩이를 달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상혁의 손이 그것의 끄트머리를 그 자신에게로 인도했다. 언제라도 총을 뺏어들 수 있단 듯 눈은 형형히 택운의 등 뒤 사람들을 견제했으나, 친절히 타겟을 정해주는 손길만은 더없이 부드러웠다. 단단한 총구의 끝을 옷자락 하나 들어갈 빈틈도 없이 제 가슴께에 고정한 상혁이 시원히 눈매를 휘며 웃었다.
"자, 이제 내 차례. 나만 처리하고 나면, 형은 그거로 원래 하려던 일 끝내면 돼요."
"내가, 내가 이거로 뭘-"
"죽으려고 했잖아. 어머니랑 같이."
돌덩이처럼 차가운 상혁의 단언이 택운의 머리 위로 떨어져내렸다. 택운은 대꾸도 못하고 가빠오는 숨을 몰아쉬며 눈을 일그러뜨렸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뭐야, 진짜 그런거였어? 그건 좀 실망이네, 형."
방아쇠 위로 겹쳐진 손에 식은땀이 흥건해서 상혁이 낀 가죽장갑을 적시고 있었다. 자꾸 미끄러지는 그것을 고쳐잡아 단단히 개머리판 위로 손가락을 얽으며 상혁이 치부를 들켜버린듯 절망적인 눈을 하고 자신을 보는 택운에게 덧붙였다.
"의외로 소심하고 또 의외로 철저하단 말야. 맨날 갖고 다니는 총도 있으면서 왜 다른 총을 구하려고 하겠어? 뒷북으로 다 죽이려고 복수에 불탄다기엔 삶에 의욕이라곤 좆도 없는 사람이, 자기만 죽어서 끝나는 거면 굳이 총을 구할 이유가 있나."
"....."
"조폭한테서 받은 총으로 그렇게 죽는 거 자체가 소심한 복수가 될 거라고 생각한 거, 아냐?"
아마 총을 찾는다고 택운의 집을 뒤졌을테니 다 보았을 것이었다. 택운이 그간 모아온 서해룡의 자금조달 루트에 관한 자료와 인천에서 행해온 불법 부동산 투기와 마약밀매와 인신매매 등등, 그가 수금한다며 뻔질나게 드나들며 야금야금 긁어모았던 놓지 못한 응어리의 적나라한 실체를.
자신은 그렇게 정의롭게 살기 싫다며 발버둥치다가도 지나치지 못해 주워모으던 것들이다. 그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죽은 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밝혀지기를 바라며 쌓아두고만 있던 그의 본심이었다. 소심하고 나약한 본심.
"근데 아이러니하게, 진짜 자기한테 그 짓 한게 해룡이란건 몰랐단 게 신기해. 어차피 형이나 나나,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거야."
상혁이 자조했다. 뿌리를 뽑고 싹을 자른대도, 무언가는 꼭 아득바득 살아돌아와 꺼지지 않는 불씨가 된다. 모든 걸 태워야만 비로소 숨죽는 불의 씨앗.
"근데 참 비겁하네. 사실 조용히 둘 인생 마무리 하려고 했으면 총 같은 거 없어도 되는 거였잖아? 어차피 죽일 거면서 그 순간의 죄책감을 못 견딘다니,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 어떻게 경찰을 해? 그러니까 이런 미친놈 손에 걸려 들어서 이용이나 당하지."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그의 말에 택운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제가 우는 지도 모른채 흐른 눈물이 둑둑 턱 밑으로 흘렀다. 턱을 타고 떨어진 것은 바닥에 흥건한 피웅덩이 속으로 흔적도 없이 섞인다.
제 죄책감 따위는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이미 알맹이를 다 파먹혀 빈껍질만 남아 말라가는 어머니 앞에서는, 제 엉망인 생을 고스란히 빚어둔 듯한 그 사람 앞에서는 그건 변명거리로 삼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게 저라는 인간의 밑바닥이었다. 추하고 비겁하다. 그것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자신이 그녀에 대한 죄책감을 쥐어 터트리듯이, 그렇게 끝내기는 싫었다. 그것만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눈 감았다 뜨면 끝나는 게 낫잖아. 내 손으로 목 졸라 죽이는 것 보다!! 한번 마음 먹어버리면 순식간에 끝나버리는 게!"
"존나 쉽게 말하네, 빈정상하게. 그건 뭐 쉬운 줄 알아?"
상혁의 말에 택운의 입이 굳었다. 그의 몸통에 난 흉터가 그 증거다. 그는 제 아비의 머리에 총을 겨눴었다. 그리고 끝내 당기지 못해서 제 몸을 쏘았다.
"근데 그거 알아?"
상혁이 힘없이 웃었다.
"-그냥 그 때, 여길 쏠 걸 그랬어."
택운이 알아채고 미처 손을 빼기도 전에, 우악스러운 힘이 택운의 손가락을 뒤틀다시피 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우그러드는 손가락에 기어코 걸쇠는 부드럽게 맞물리며 고개를 젖힌다. 미지근히 달아오른 쇠를 타고 오르는 그 감각에 택운은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쩔꺽!
"...."
쩔꺽! 쩔꺽!
빈 탄창이 불만스럽게 우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렸다. 탄환이 바닥나 있었다.
",,,씨발."
"하.... 하!"
택운은 안도인지 비명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며 총을 놓고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까만 피스톨이 피웅덩이 위에 철퍽 떨어져 굴렀다. 주저앉은 발 밑으로 그 검붉은 피의 선이 그를 집어삼킬듯 도사리고 있는 걸 허겁지겁 뒤로 몸을 물리며 택운이 쫓기듯 숨을 헐떡였다. 힘 빠진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 앞이 노랗게 돌았다.
"이 미친... 미친새끼...!"
택운이 비명처럼 중얼거리며 놀란 숨을 꺽꺽 토할 때, 상혁이 택운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리춤 홀스터에 차고 있는 보급용 리볼버를 노린 것이었다.
쓰러지다시피 무너져있던 택운이 그의 등허리를 향하는 상혁의 손이 무엇을 향하는 지 알아채고 재빨리 몸을 굴렸다. 거리를 벌려 급히 일어나려다 바닥에 흥건한 피에 발이 미끄러져 휘청일때 상혁이 그의 옷을 잡아채고 끌어당겼다.
택운이 잠시 중심을 읽은 사이 상혁의 손이 리볼버를 잽싸게 채어 가져간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갈겼다.
꽝!
쨍그랑-!
공포탄이 귀가 얼얼한 소음을 내며 천장을 찢고 줄줄이 이어져있던 조명유리를 박살낸다. 상혁이 총을 놓치자 뒤에서 달려오던 해룡 떼거지들이 머리 위로 후두둑 비오듯 떨어지는 유리파편을 피해 몸을 사리는 사이 택운이 상혁의 손을 노리고 발을 올려찼다. 탄실의 첫발은 공실, 두번째 공포탄, 실탄은 3발 남았다.
상혁이 하늘로 향했던 총구를 되돌려 제 머리를 겨누려 할 때 길게 뻗은 다리가 단번에 그의 손등을 되게 후려치고, 손에서 놓친 리볼버가 다시 저만치로 피바닥을 굴렀다.
"씨발...!"
상혁이 그것이 떨어진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으나 이번에는 택운이 빨랐다. 택운은 몸을 숙인 상혁의 등을 무릎으로 찍어누르며 올라탔다. 유릿조각이 자글히 깔린 바닥 위로 상혁의 볼이 짓이겨지며 투명한 파편을 붉게 물들이지만 뻗은 손은 저만치 떨어진 총에는 닿지 못한다.
"으아아아!!!"
상혁이 절규하듯 소리치며 몸을 뒤틀었다. 큰 몸에서 나오는 가공할 힘에 굴러떨어질 뻔 한 택운이 겨우 중심을 다시 잡고 두 팔을 잡아 수갑을 채워 단단히 결박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총을 다시 주웠을 때였다. 낯익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동작정지. 총 내려놓고 손 머리 위로 붙여."
부회장실 입구에는 학연이 총을 들고 택운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정택운 경사, 불법총기소지혐의로 체포한다. 다시 경고한다. 무기 버리고 투항해."
학연은 흥분한 둘을 보고 뒤의 병력에게 괜한 자극 하지 말고 대기하라고 수신호했다. 그리고 주위를 훑었다. 저 쪽에 버려진 총이 하나, 그리고 택운이 든 리볼버가 하나. 택운을 구슬려 대치를 끝내고 총을 받아내야 한다. 지금 접근하면 택운이 어떤 짓을 할지 몰랐다. 그의 동기는 지금 본적도 없는 얼굴을 하고 울고있었다. 그가 알던 택운이 아닌 것 같았다.
학연의 까만 눈이 주위를 분주히 살피며 동요하는 것이 보인다. 택운은 동료의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을 보며 대체 어디서부터 그에게 설명해야할지 먼저 떠올리다가 이내 조소했다. 설명해서 뭘 할 것인가. 누가 경찰측에 타이밍도 좋게 정보를 흘린...
"...너냐?"
택운의 물음에 그의 밑에서 몸을 뒤채던 상혁이 침묵했다. 잘만 주절대던 새끼가 지 불리하니 입 닫는 것 봐라. 택운이 허탈감에 이어 몰려오는 분노에 버럭 소리질렀다.
"왜!! 씨발 왜!!! 끝나고 나면 내 맘대로 하라며! 개씨발 그래놓고 나는 왜 맘대로 죽지도 못하게 연막을 쳐두고 지랄이야!! 끝까지 지 좆대로 써먹고 니는 맘편히 뒈지실라고!!"
"씨발, 니 머리 터지기 전에 내가 먼저 고이 뒤져얄 것 아냐!!!!!"
악을 쓴 상혁이 숨을 씩씩대며 들썩거렸다. 그가 꾸역꾸역 먹어대며 토하지고 배설하지도 못하고 꾸욱꾸욱 몸안에 돌처럼 궁글리던 그것이 지금 위장을 다 찢으며 비집고 나올것 같았다. 기어코 제 몸을 갉아먹고 나와 심장을 찢어발길 것 같았다. 받치는 숨에 눈가가 붉게 일그러진다. 뒤이어 나온 목소리는 끊어질듯이 위태로웠다. 방향감각을 죄다 잃어 어느 곳이 아래고 어느곳이 허공인지 모른채 간절한 바람은 헛바퀴를 돌았다.
"형은, 형은 나 이해하죠. 당신도 평생을 원망하면서 살았잖아.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자기만 좀먹으면서 살았잖아. 나도 그랬어. 총 들 때마다 앞에 인간이 내가 못 죽인 그 꼰대로 보이는거야. 그렇게 누구 하나 죽일 때마다 난 매번 아빠를 죽이고 또 죽였어, 이 머릿속에서. 와, 미쳐버리겠더라고."
미처 웃음이 되지 못한 기괴한 소리로 상혁이 끅끅댔다. 그리고 돌아본 눈은 온통 붉었다. 핏발 선 눈에 올랐던 독기가 눈물을 머금고 뭉글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좀 편하게 해줘 이제. 우리 이 지긋지긋한 거 끝내버리자. 어?"
"...."
상혁은 이제 숫제 빌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는 간절했다. 오직 이 순간이 그가 바라온 끝이었다. 정말 이제 거의 다 왔다. 그건 지금 택운만이 줄 수 있는 결말이었다.
"우리 꽤 괜찮은 파트너였잖아. 의리랄 것도 없지만 내가 부탁할 사람이 형밖에 없어서 그래."
"....아니야. 나는, 그래도 나는-"
"씨이발 좀,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상혁이 핏대 세워 절규했다. 바닥에 흥건한 피를 죄 제가 토해낸 것 같은 목소리로.
"속였잖아 내가!! 기어코 너 여기까지 끌고와서 사람 죽이게 만들었잖아!! 뭐가 그렇게 힘든데 이제와서. 여기서 나 안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쏴!!! 쓰라고!!!!"
"나는!!!!"
택운이 다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살고 싶다고 생각했어, 처음으로."
"...."
"끝내잔 생각 없이 내일을 걱정했다고."
"...이런 씨발."
상혁이 푸스스 웃다가 이내 박장대소했다.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아, 진짜 개 좆같아... 난 씨발 죽을 날만 기다리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누구는 씨팔!!"
웃다가 흐느끼다가 절규하며 상혁이 바르작거렸다. 얼굴 아래에는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이 유리파편 위로 진득했다. 그것들을 씹어삼킬듯 이를 갈며 상혁이 중얼거렸다.
"제발... 나좀 구해줘, 형."
"...."
"나 이제 편해지고 싶어. 이제 그만... 그만 하고싶어."
흐느낌이 섞여 갈라진 목소리로 하는 애원이 불현듯 그가 질리도록 들었던 절규와 오버랩된다. 택운은 손을 떨기 시작했다. 귓가에서 들려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살려주세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그냥 한 발이면 돼. 딱 머리에 대고, 그게 지저분해서 싫으면 그냥 심장에 대고 한발만. 한 발만 쏘면 돼. 응?"
"......"
상혁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고 있었다. 끝내 흘린 피보다 눈물이 그의 얼굴을 흥건히 적실 때에는 오로지 택운만이 그의 목소리를 간신히 들을 수 있었다.
"평생을, 평생을.... 남이 시키는 대로 죽이고 패고 빼앗고 하면서 살았는데."
"....."
"내가 정한 끝 마저 누군가한테 방해받지 않게 해줘."
택운이 고개를 떨궜다. 눈물이 상혁의 등 위로 후둑 떨어졌다. 저가 울고 있었나. 그래서 앞이 이렇게 보이지가 않았나. 열오른 눈가를 찌뿌리며 택운이 상혁의 뒷덜미를 잡고 그를 일으켜세웠다. 빠드드득, 구둣발 밑에서 눈물과 피로 젖은 유리조각이 자글히 밟힌다.
문득 택운은 본 것도 같았다. 그가 생각한 희망이라는 쥐새끼의 기름진 꼬리 끝자락을. 그것이 맴돌던 자신의 쥐덫 안, 퍼렇게 녹아 슬어있던 것은 하수구 안에 부어버린들 사라질 리 없는 것이었다. 제 발 끝에서 손끝에서 피부조각처럼 후둑후둑 떨어져 온 사방에 흩어진 맹독, 어느 곳으로 도망친들 같은 곳을 맴돌게 할 진원지.
"택운아. 총 버려."
학연이 긴장으로 굳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택운은 연신 손에 쥔 리볼버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눈물로 번들거리는 홀쭉한 뺨이 본적 없는 비참함으로 그늘져 얼룩덜룩했다.
"정택운!! 총 버리라고!! 안들려!!"
"학연아."
유릿조각을 삼킨듯 목소리가 다 찢겨나온다. 택운이 멍한 눈으로 지껄였다.
"어머니한테, ...어머니한테."
무어라 말 할 것인가. 나쁜놈들 죽이고 나도 죽습니다. 먼저 가서 미안합니다. 당신 인생 그렇게 만들어서 미안합니다. 당신만큼 고군분투 못하고 되는대로 살다 뒤져서... 씨발. 택운이 고개를 젓곤 총을 들어올렸다. 학연의 비명같은 외침이 찢어졌다.
"정택운!!!!!!!!!!"
손 안에서 맴도는 묵직한 금속성의 무기는 불안을 고스란히 머금고 미지근히 달아 올라 있었다. 손을 미끄러트리는 땀이 공포인양 그 위에 묻어 검게 반질거린다.
그는 몇 번을 더 고쳐 쥔 그 것을 다시금 매만졌다.
오직 한 발,
탕!
-단 한 번의 총성을 기다리며.
탕!
<Trigger : 덫,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