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6

발밑의 그림자

I

9

허밍
@A_j_025
  • Twitter

홍빈아, 내 아가. 명심하렴. 악마는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영혼을 야금야금 먹어치운단다. 늘 숨어서 기회를 노리지.

“엄마? 아빠?”

보통 악한 사람이 악마와 계약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다. 정말 힘든 사람들이 도저히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자신을 구원처럼 여기도록 나타나. 거부할 의지도, 결단력도 없어진 이들은 쉽게 홀려 영혼을 내어주지.

“홍빈아! 도망쳐!! 집에서 나가 멀리 도망쳐!”

“어딜 가려고! 이리 오지 못해?!”

“홍빈이는 안 돼! 아악!!”

결국엔 미쳐서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이들도 해치고 그들의 영혼까지 악마가 가져가게 한단다.

“엄마, 안 돼요!그만 두세요!!”

“어서 도망치라니까!!”

홍빈아. 마음을 항상 단단하게 만들렴. 낮고 평평하더라도 좋단다. 비가 내리고 벼락이 치더라도 굳건히 버틸 수 있게 너를 쌓으렴. 사랑하는 내 아들.

 

엄마는 네가 항상 태양빛 아래서 살아갔으면 좋겠구나.

 

“안 돼.....안 돼요....엄마...!!”

벌떡 일어난 홍빈은 어둠 속에서 숨을 헐떡였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가 이내 꿈이었음을 깨닫고 두 손으로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아, 젠장.”

“으....뭐야. 너 또 악몽 꿨어?”

옆 침대에서 자던 학연이 홍빈 때문에 잠에서 깼는지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네. 다시 자.”

“한동안 괜찮은 것 같더니....힘들면 언제든....형한테 말하고....그리고....”

“알았어. 진짜 괜찮으니까 어서 자.”

“엉....”

졸려서 눈도 못 뜨면서 위로를 해주려는 학연에 작게 웃음 지었다. 요즘 제국 수도 내에 뒤숭숭한 일들이 일어난 탓에 몇 년간 안 꿨던 악몽을 다시 꾸게 된 것 같았다. 온 몸이 땀범벅이라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씻기 위해 일어났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창 밖에는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 홍빈이 일찍 일어났네.”

씻고 나온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저거라니. 홍빈은 조금 어이없는 기분이 되었다.

“아까 나 깨어난 거 보지 않았어?”

“기억 안 나는데...웬일로 나보다 먼저 일어났어?”

“어휴, 내가 이런 인간한테 감동을 받다니.”

“감동? 나한테 감동받았다고?”

“됐네요. 곧 아침 예배할 시간이야. 빨리 준비해.”

“아, 뭔데. 말해봐!”

“나는 모르는 일이야~. 어이쿠, 늦겠네. 먼저 간다!”

“앗. 시간이 벌써 이렇게...이홍빈! 같이 가!”

지난 밤 악몽을 꾼 사람치곤 기숙사를 나와 대예배당을 향하는 홍빈의 발걸음이 가볍다.

 

곁을 스쳐가는 사제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며 대예배당에 도착하여 자리를 잡자 얼마 안 있어 학연이 바로 옆에 앉았다.

“치사하다, 진짜. 그거 조금 안기다리고 나가냐?”

“쉿. 형제님, 곧 예배 시작합니다.”

“이홍빈 너...”

소곤소곤 자신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학연에게 능청스레 말하며 기도하는 손모양을 했다. 분한 얼굴로 쳐다보는 것에 얄미운 웃음을 짓고는 앞을 봤다.

“실은 어제 악몽을 다시 꿨거든.”

“뭐? 이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그러게 말이다. 요즘 수도가 시끄럽잖아. 그래서 그런가 봐.”

“네가 이겨낸 악몽을 괜히 다시 꿨을 리는 없잖아. 왠지 안 좋은 예감이 드네. 홍빈아, 몸조심하고 입도 조심하고.”

“오,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돌려 까다니.”

“뭐래. 진짜 조심하라고.”

“알았어. 걱정해줘서 고마워. 진짜 시작하니까 잡담은 이제 끝.”

학연은 옛날부터 감이 좋았다. 홍빈은 그의 말을 들어서 나쁜 일은 없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모르겠고 몸은 조심해야지.’

학연이 들었다면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을 것이 뻔한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사람이 조심한다고 해도 재앙은 그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법. 예배가 끝나갈 무렵 대주교의 설교가 끝나고 공지사항이 있었다.

“요즘 수도 내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이 악마와 관련 있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현장에 악마소환 의식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는군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예배당이 크게 술렁였다. 단순히 연쇄살인인 줄 알았는데 악마라니. 홍빈의 얼굴이 굳어졌다.

“조용! 누군가가 일반인에게 악마와 계약하는 방법을 퍼트린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성기사들과 수석사제로 이루어진 조사단을 구성하였으니 수석사제들은 예배가 끝난 후 돌아가지 마시고 자신의 조사단원 명단을 받아가도록 하십시오. 이상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태양의 빛이 그대들에게 머물기를.”

““태양의 빛이 당신께 머물기를””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예배가 끝났고 학연은 걱정스레 홍빈을 바라보았다.

“홍빈아.“

“너무 걱정하지 마. 신께서 다 뜻이 있으신 거겠지.”

홍빈과 학연은 대신전의 인재들로, 젊은 나이에 수석사제 직함을 달고 있었다. 조사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대주교님.”

“아, 자네들 차례군. 여기 명단 받게.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악마와 관련된 일이네. 누가 벌이는 짓이고 목적이 무엇인지 반드시 밝혀야해. 황실에서도 기사단을 지원해준다고 했지만 그 사이에 범인과 관련된 자들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 홍빈군은 부모님의 일을 잘 이겨내어 수석사제가 되었다고 들었네. 그렇지만 마음 단단히 먹게나. 악마는 어둠속에서 기회를 엿보는 것들이니 말일세.”

“네. 명심하겠습니다.”

부모님의 일을 언급하자 학연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졌으나 당사자인 홍빈의 표정은 담담했다.

 

명단을 받아 식당으로 향하는 길에 역시나 학연은 화를 냈다.

“거기서 왜 네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의심할거라면 조사단에서 배제했어야지!”

“형. 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화내지마. 예전에 악마와 접촉이 있었던 사람이니까 더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건 사실이잖아.”

“알아. 하지만 어떻게 화가 안 나? 네 곁에서 쭉 너를 봐왔는데. 네가 얼마나 곧은 사람인지...!”

“진정해. 주변에 널린 게 사람 눈과 귀야.”

“떠들 테면 떠들라지.”

“평소에는 참 성격 좋은 형제님이 왜 이러실까. 우리 어서 식사하러 가자고. 새로운 사람들이랑 인사하고 조사 시작하려면 힘내야지.”

“알았어. 그만할게”

입이 삐쭉 튀어나와서 툴툴대는 것이 웃기고 고마워서 학연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쳤다. 이에 학연도 결국 기분을 풀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부모를 잃고 혼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집에서 머물게 해주고 이후에는 같이 대신전에 들어와 지금껏 쭉 함께해 준 친형제 같은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하여 홍빈은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더라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조사단 단장은 누구야?”

“너.”

“뭐?”

“너라고. 이홍빈.”

명단을 확인하고 배치된 구역을 본 홍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조사실로 주어진 방 안에 다섯 명의 사람이 모였다.

“좋은 오후입니다, 형제님들. 6조사단의 단장을 맡게 된 민간지원부 이홍빈입니다.”

“저는 같은 부서의 차학연입니다.”

홍빈과 학연의 인사를 시작으로 다들 자기소개를 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제 2성기사단의 라비입니다.”

“같은 기사단의 한상혁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역사부서의 레오입니다.”

민간지원부 둘에 성기사 둘, 그리고 역사부서 하나. 모인 이들을 쭉 둘러본 홍빈은 나쁘지 않은 조합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저희는 배치된 구역으로 가서 조사할 겁니다. 이미 수도경비대에 의해 한차례 조사가 끝난 곳이지만 일반인들에게 보이는 것과 우리 사제들에게 보이는 것은 다르니까요.”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지도의 한 곳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장소는 여기입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불과 3일 전으로 일가족 3명이 모두 죽었죠. 경비대에서 준 보고서를 보시면 간략하게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아들이 부모를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보임. 이웃들의 증언으로는 화목한 가정이라고 함. 아들의 방에 제단이 숨겨져 있었음. 악마를 숭배한 것으로 보임.]

“이걸로 끝입니까? 너무 짧아서 보고서랄 것도 없는데요.”

상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보고서를 팔랑거렸다.

“네. 사실 증거나 정황도 불확실합니다. 저희가 그 진실을 밝히러 가야죠. 진짜 악마숭배자인지 누명을 쓴건지.”

“그런데 이 동네 십여 년 전에도 비슷한 사건이 있던 곳이네요. 무언가 단서를 찾을지도 몰라요.”

레오가 지도를 보며 이야기하다 자신을 바라보는 홍빈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습니까? 어쩌면 연관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빙긋 웃으며 답하는 홍빈에 무언가 떠올린 듯 파드득 놀라며 눈동자에 미안함이 가득 찼다.

“아,,,저, 그게...”

“괜찮습니다. 애초에 제가 이 구역에 배치된 이유일겁니다. 증명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

 

이른 아침, 홍빈을 비롯한 조사단이 사건 현장으로 모였다. 보고서는 엉망이어도 현장통제는 잘 하는지 집 앞에 있던 경비대원이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비켰다. 그에 마주 인사하고 집 안에 들어갔다.

“윽, 냄새. 얼마나 잔인하게 죽였으면 집 안에 피가 안 묻은 곳이 없네요.”

“우욱. 죄송합니다.”

거실은 피범벅이었다. 시체를 수습했음에도 처참한 광경에 비위가 약한 학연이 구역질을 했다.

“일단 나눠서 조사하죠. 저와 레오씨가 이곳을 조사할 테니 나머지 세분이 위층의 아들 방을 조사해주세요.”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시죠, 형제님.”

세 명이 위층으로 올라가고 남은 둘은 조사를 시작했다.

“피로 무엇을 그리려고 한 것 같은데....이런 쪽은 잘 모르겠네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 영혼을 바치는 주술일거에요. 악마가 계약자 이외에 피해자들의 영혼도 원했다면....”

거실을 살펴보는 홍빈의 눈치를 보며 말하던 레오가 덧붙였다.

“형제님.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괜히 그때의 일을 말해서....”

“어제도 말했지만, 괜찮습니다. 성기사분들은 모르는 눈치였지만 저와 동기인 사제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니까요.”

“하지만....정말 죄송합니다.”

“별로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일인걸요.”

덤덤한 홍빈을 바라보던 레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제님, 그림자를 조심하세요.”

“네?”

“악마는 어둠 속에만 웅크리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곁에 머무르다 기회를 노립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이제 거실은 더 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위층과 합류하도록 하죠.”

곁에 머무른다니. 어머니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레오에게 적당히 대답하며 말을 돌렸다. 대화를 마친 홍빈과 레오가 계단을 오를 때 위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형제님!”

황급히 올라가자 보이는 것은 방 안에 짙게 깔린 검은 연기와 악마 하나였다. 둘은 악마에게 무기를 겨누고 있었고 학연은 악마에게 목을 붙잡혀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이를 본 홍빈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커헉....”

“어떻게 악마가...!”

“아까 형제님이 제단 위의 거울을 만졌을 때 갑자기 튀어나왔습니다. 저희도 이게 무슨 일인지.”

“안녕? 인간이 두 명 더 늘었네? 나는 켄. 심연의 셋째 아이지. 내 소개를 했으니 너희도 같이 인사해줘야지?”

긴장한 사람들과는 달리 웃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천진해보였으나 방안의 모든 이들은 경악했다. 사람과 꼭 닮은 외양, 붉은 눈, 뾰족한 귀, 그리고 등 뒤에 펼쳐진 날개. 틀림없는 악마였다.

“간만에 인간 세상에 나와서 기분이 좋아. 너희가 태양신의 자식들만 아니었다면 살려줬을 텐데. 아, 어떡하지?”

“당장 본래 있던 곳으로 사라져!”

상혁이 신성력을 두른 검을 휘둘렀고 켄이 학연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무례하기는. 사이좋게 대화하다가 무슨 짓이야?”

정신 차린 학연이 사람들 쪽으로 가려하자 켄은 손을 휘둘러 불을 일으켰다. 레오가 재빨리 학연을 끌어당겨 간신히 불길을 피했다.

“윽!”

“형제님! 괜찮으십니까?”

“네.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보다 계약자도 없는데 어떻게 힘을....”

“응? 무슨 소리야. 계약자가 없다니. 저기 떡하니 서있는데. 물론 한 다리 거친 계약이라 정식계약으로 보긴 어렵지만.”

켄의 손가락이 가리킨 사람은 홍빈이었다.

“뭐?”

“기억 못하나보네. 나는 너를 다시 만나고 얼마나 반가웠는데. 그 조그맣던 인간이 어느새 자라서 더 풍성한 영혼을 가진걸 보고 하마터면 먹어치울 뻔했단 말이야.”

“그게 무슨...?”

“홍빈아, 도망쳐. 집에서 나가 멀리 도망쳐! 이래도 기억 안나?”

그 말을 들은 홍빈은 떠오르는 기억에 이를 악물었다.

“너 이 빌어먹을 악마새끼.”

“형제님. 악마의 도발에 넘어가지 마세요. 어떻게든 돌려보내거나 이곳을 빠져나가 대신전에 지원요청을 해야 합니다. 계약은.... 일단 저 악마부터 해결하고 이야기하도록 하죠.”

레오가 홍빈의 팔을 당기며 작게 속삭였다. 홍빈에게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인 레오는 곧장 상혁과 라비에게 부탁을 했다.

“잠시 악마의 시선을 끌어주세요. 제게 방법이 있습니다. 악마가 들을 수 있으니 말씀은 못 드리지만 걱정 마시고 일단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인간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빤히 지켜보던 켄은 검을 휘둘러오는 라비와 상혁에 놀라서 소리쳤다.

“위험하게 검을 휘두르면 어떡해!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지? 곱게 죽여주진 않을 테니 각오해.”

화난 표정으로 장난치는 것은 끝이라는 듯이 몰아붙이는 켄에 상혁과 라비는 힘겹게 맞섰다. 그 사이 레오는 제단으로 다가가 학연이 만졌던 것으로 보이는 거울을 집어 들었다.

“젠장할. 인간놈이!”

그것을 감지한 켄이 황급히 레오를 보고 공격했지만 그보다 레오가 거울을 깨뜨리는 것이 빨랐다.

“생각보다 멍청해서 다행이네요. 악마는 소환의 매개가 된 물건을 파괴하면 다시 심연으로 돌아갑니다. 보통은 그 물건을 감춰두던데....”

“아, 안 돼! 아직 저 놈의 영혼도 가지지 못했는데!”

거울이 깨지 듯 켄의 몸도 서서히 깨져나갔고 이내 사라졌다. 남은 이들은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돌렸다.

“조사를 하면서 악마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무슨 첫날부터 이런답니까?”

“너무 당황해서 배후를 밝혀야한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면 여기서 조사하는 게 아니라 위쪽에서 명령을 내리고 있었겠죠. 학연 형제님은 좀 괜찮습니까?”

“괜찮습니다. 그보다 레오 형제님 덕에 살았습니다. 저는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못했는데 대단하십니다.”

학연의 말에 레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악마가 그렇게 쉽게 사라진 것이 수상해요. 말하는 것과 행동이 무척 작위적이었어요. 저렇게 가볍고 무방비할 리가 없습니다. 심연의 셋째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의심스러워요.”

“그럼... 저 악마가 우연히 나타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계획적으로 나타난 것이란 말입니까?”

라비의 물음에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아까 들었던 계약자라는 말도 걸리는데 홍빈 형제님, 예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계약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지만 혹시 모르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금 긴 이야기가 될 거에요.”

홍빈은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다정하고 선한 분이셨습니다. 태양신을 섬기는 신실한 신도이기도 했지요. 항상 하시는 말씀 중에 악마에 대한 것들도 있었습니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결국엔 그 사람의 영혼뿐만 아니라 사랑했던 것들까지 앗아간다고요. 아버지와 사이도 좋았습니다. 웃으며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날이 대부분이고 두 분이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 어머니가 무슨 생각으로 악마를 불러냈는지는 모릅니다. 기억하는 것은 그저 11살이 되던 해 악마에게 마음을 빼앗겨 저와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달려들던 모습뿐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막으며 도망가라 하셨죠. 겁에 질려 뛰쳐나갔다가 다음날 돌아가니 어머니에게 살해당한 아버지와 자살한 어머니가 거실에 덩그러니 있더군요. 이후에 거리를 떠돌던 저를 학연 형제님이 도와주셨고 함께 신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야기가 끝나고 방 안은 침묵에 잠겼다. 계약자와 관련된 내용도 없거니와 어린 홍빈이 겪었을 끔찍한 일에 다들 입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었다.

“어....다들 너무 심각한 표정 짓지 마세요. 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겨낸 지 오래입니다.”

“괜한 의심으로 들쑤신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였어도 의심했을 테니까요. 그보다 여기서 계속 앉아계실건가요? 모두 휴식이 필요한 것 같은데 이만 돌아가죠.”

홍빈의 말에 다들 머뭇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아, 벌써 해가 지네요.”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정신없는 하루였어요.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회의 때 뵙죠. 저는 학연 형제님과 천천히 들어가겠습니다. 먼저들 가세요.”

“네.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나 둘 멀어지는 사람들을 쳐다보던 홍빈은 제 옆에 선 학연을 보고는 웃었다.

“형, 오늘 좀 힘들었지? 하필 여기서 악마를 만날게 뭐람.”

“힘들기는 네기 더 힘들지.”

“아까 레오 형제님이 그러더라. 그림자를 조심하라고.”

“응?”

“웃기지 않아? 그림자는 항상 내 곁에, 내 발밑에 붙어있는데 어떻게 조심하라는 걸까. 태양이 비추는 반대편에 생기는 그림자는 어찌 보면 나와 하나일 텐데. 안 그래?”

“이홍빈 혹시, 너....”

“형. 난 형이 있어서 정말 좋아. 친형제 같고. 언제나 힘들 때 의지할 곳이 있다는 건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주니까. 아, 배고프다. 우리도 어서 돌아가자.”

홍빈은 웃으면서 앞서갔다. 뒤에서 비추는 노을에 학연 얼굴은 그림자 져서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홍빈은 그 역시 웃고 있을 거라는 걸 알았다.

“이홍빈. 너 말 돌리는 거 진짜 못한다. 알고 있지?”

“네네. 알고 있습니다.”

그림자. 발밑에 붙어 떼려야 뗄 수 없는 나의 어둠. 앞으로도 조용히 숨죽여 나를 노릴 테지. 마음 약한 인간은 제게 스며든 그림자를 거절하지 못한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