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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만(慢)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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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
@nisita_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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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태초의 어둠을 가르고 그 사이에 흰빛으로 세상을 여니 그 속에서 생명이 자라나고 죽은 것들이 어둠으로 사라졌다. 신이 빛에 고결함을 하사하고 어둠에는 그 외의 것들을 던져버리니 세상의 추악함과 불온함이 어둠 속에 사라지고 눈에 보이지 않았다.

신이 인간을 심판할 때에 악한 것들을 어둠으로 보내고 선한 것들을 빛으로 이끄니 점점 그 무리의 색이 짙어졌다. 결국 어둠의 것들은 이 우주의 시작이 어둠이라는 교만함에 빠지고, 빛의 것들은 신께서 직접 선택하시었다는 오만에 빠졌다. 교만과 오만은 모두 신의 눈에 악한 것이라 결국 신은 직접 그것들을 벌하려 하였으나 서로가 자신의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빛과 어둠은 늘 서로를 밉게 여겼다. 대부분은 어둠이 먼저 빛에 시비를 걸고 위협을 했다. 빛은 신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신은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원인이라 말하며 등을 돌렸다.

 

*

 

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피를 흘리는 눈에 붉은 천을 감는다. 라비는 긴 잠을 마치고 눈을 뜬다. 켄은 오래된 활의 끈을 새로 맨다.

레오는 희게 빛나는 망토를 어깨에 두른다. 홍빈은 다른 이들과 손을 이어 잡고 힘을 나눈다. 혁은 낫을 꺼내 날을 닦고 갈아낸다.

어둠과 빛이 서로를 죽일 준비를 한다. 어느 한쪽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 서로의 목표이다. 인간의 시간과 관계없이 늘 빛이 가득한 곳에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천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갖추고, 지시에 따라 밑으로 떨어진다. 오만 것들의 비명이 난무한다. 빛의 창이 어둠을 꿰뚫고 어둠의 손이 빛을 잡아 찢는다. 등돌린 신은 어느 편에 도움을 주려 하지도, 이들을 막으려 하지도 않는다. 감히 조화와 평화를 꿈꾸는 신의 뜻에 반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레오가 엔의 목으로 빛줄기를 던진다. 라비의 방패가 그 빛을 막아내고 안개 사이로 스며들어 혁의 목을 죈다. 홍빈의 손짓에 라비가 흩어진다. 홍빈을 향해 켄의 화살이 날아온다. 화살대를 맨 손으로 잡은 혁은 힘을 주어 그 화살을 부러트리고 높을 곳을 찾아 도망가는 켄을 뒤쫓는다. 엔이 안대를 풀자 눈에서 피눈물이 떨어지고, 괴상한 것들이 자라난다.

어떤 빛도 라비의 방패를 함부로 뚫지 못하고 그 방패 속으로 흡수된다. 한껏 눈물을 흘린 엔은 다시 천을 눈에 감는다. 눈을 뜨지 않아도 앞을 보기에 빛을 찾아 고개를 돌린다. 빛의 심장을 레오가 가졌을 것이라 추측한 그는 안개 틈으로 숨어들어 혼란 속에서 머리가 가장 흰 것을 찾는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켄은 숨어있는 것들을 찾아 활시위를 당긴다.

레오가 빛을 흩뿌리자 그 빛을 맞은 악마들이 녹아내린다. 레오는 다가오는 엔의 기척을 느끼고 빛을 터트려 몸을 숨긴다. 그는 엔이 어둠의 심장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떻게든 자기 쪽으로 시선을 끌어와 죽이려 한다. 레오가 빛으로 여섯 개의 기둥을 세우자 그 사이에 있던 것들이 녹아 아무것도 없었던 듯 말끔해진다. 엔의 추측과 달리 빛의 심장을 가진 것은 홍빈이다. 홍빈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손으로 잡는다. 천사들은 빛의 힘을 얻고, 악마들은 손이 닿은 부분부터 서서히 녹아간다. 홍빈은 멀리서 날아오는 무기를 피할 방법이 없기에 레오가 씌워준 빛에 의지하고 있지만, 많은 공격에 사라지고 있어 레오를 찾아 몸을 돌린다. 혁은 낫으로 악의 것들을 베어버리고 그 상처에 빛을 꽃아 힘을 흡수한다.

 

빛과 어둠의 싸움은 비단 천사와 악마만의 싸움이 아니다. 그들을 숭배하는 인간들의 땅에서도 전쟁이 시작했다. 흰 제복은 붉은 피로 물들었으나 검은 제복은 무엇이 묻었다는 흔적을 조금도 알 수 없다. 신전은 무너지고 사제들은 그 속에서 기도한다. 본디 신은 하나지만 인간에게 빛의 신과 어둠의 신은 다르다. 그들은 과연 누구를 섬기고 있는 것일까? 죽은 뒤 하나의 신 앞에서 서로가 마주한다면 그것도 나름 재미있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한평생 경멸하고 무시하던 것이 실은 저가 섬기던 위대한 존재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 전쟁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전쟁은 벌어졌고 그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는 죽어가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우세하다고 하기 어렵다. 빛이 어둠 위를 덮는 듯 하다가도 어둠이 다시 빛을 삼킨다. 천사와 악마 모두 많은 것들이 형체를 잃고 녹아 비가 되어 떨어진다. 그 비를 맞은 인간들 역시 기가 꺾이고 힘이 풀려 지쳐간다.

 

엔이 레오를 찾아 빛의 연기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엔을 홍빈이 뒤에서 잡아당긴다.

 

“그 비린내 나는 눈은 여전하네.”

 

엔은 제 옷을 붙잡은 홍빈의 팔을 쳐내고 바로 손목을 붙잡는다.

 

“네 손은 오늘도 아주 눈이 부시고.”

 

엔이 반대쪽 손으로 안대를 풀려고 하자 홍빈이 저지한다. 엔이 눈을 뜨면 홍빈이 빛의 심장을 가졌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홍빈이 잡은 엔의 손목이 조금씩 타오른다.

 

 “너, 태우는 능력도 있었니?”

“빛은 언제나 따스하잖아. 너희 같은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서로 손을 떼지 않고 버틴다. 홍빈에게 잡힌 엔의 손목은 계속해서 타며 녹아 흐른다. 그 둘을 발견한 라비가 방패를 던진다. 홍빈이 엔을 놓치고 밀려난다.

 

“너는 방패가 무기니?”

“때리는 데 쓰면 때리는 거고, 막는 데 쓰면 막는 거지.”

 

가까이 다가온 라비가 아무래도 괜찮지 않냐며 엔의 타박에 천연덕스럽게 답한다. 천을 풀고 눈을 뜬 엔이 홍빈에게 고개를 돌린다. 홍빈의 심장이 새하얗게, 그의 옷보다도 더 희게 빛난다.

 

“생각보다 심장이 가까이 있었네.”

 

엔과 라비가 홍빈에게 다가간다. 홍빈은 그 짧은 새에 저에게 다가오는 잡것들을 치워내느라 정신이 없다. 주변에 있던 빛의 천사들이 홍빈을 지키기 위해 모여든다. 순간적으로 빛이 늘어나자 강하지 않은 어둠들이 사라진다. 엔이 해사하게 웃는다.

 

“메테오 같은 거로 다 죽여버리면 좋을 텐데.”

“인간들의 상상 보다 못나서 안타깝군.”

“그거 쓸 수 있어도 여기선 어렵겠지? 우리 애들도 다 죽으면 어떡해.”

“어차피 못 쓰는 걸 그렇게 진지하게 생각해야 해?”

“그건 그렇네.”

 

엔의 눈물로 만들어진 것들이 천사들을 찢고 던진다. 라비가 날아오는 빛의 화살을 막아내고 방패를 휘두른다. 엔이 녹아버렸던 손목을 눈에 가져다 대자 핏물이 스며들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새 살이 돋아난다.

 

“그 능력 언제 봐도 참 성가셔.”

 

빠르게 모여든 빛을 감지한 레오가 나타나 엔을 빛의 창살로 가둔다. 엔이 손을 대자 손가락 끝이 녹는다. 엔이 레오에게 묻는다.

 

“천사도 어둠에 닿으면 녹던가?”

“해보던가. 녹는 게 싫으면 빛 말고 혁이 낫에 베이는 걸 추천할게. 그냥 썰리거든.”

“징그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고마워.”

 

레오가 빛으로 둥근 막을 만든다. 그 안에 있는 천사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힘을 얻는다. 레오는 엔의 주위로 촘촘한 창살을 한번 더 만들고 홍빈을 찾는다. 홍빈에게 보호막을 씌워준 뒤 다시 엔에게 가려고 하지만 그새 라비가 방패로 창살의 빛까지 흡수했는지 사라지고 없다.

 

“젠장. 그 방패부터 산산조각 내버려야 했어.”

 

홍빈에게 몸조심 할 것을 당부한 레오는 자리를 옮긴다. 홍빈이 빛의 심장을 가졌다는 걸 그쪽에서 알게 되었으니 계속해서 홍빈을 노릴 것이 분명하지만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 여러모로 낭비였다.

레오의 얼굴 바로 옆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간다.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켄이 서 있다. 레오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혁을 찾는다. 빛과 어둠이 가장 크게 맞부딪히는 한가운데에 혁의 낫이 돌고 있다. 혁에게 홍빈을 찾아가라고 해야 할지, 켄을 잡으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니 엔이 옆으로 슬쩍 다가온다.

 

“같은 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오네.”

“원래 천사들은 다 징그러워? 우리 애들을 다 갈아버리네.”

“너희 애들이 갈아진 그 꼴이 더 징그럽지.”

 

레오가 한 손으로 엔의 멱살을 잡고 다른 손으로 날카로운 빛을 만든다. 그 빛을 엔에게 꽂으려고 하지만 라비의 방패가 가로막는다.

 

“하여튼 악마란 것들은 혼자서는 할 줄 아는 게 없나?”

“좋은 팀워크라고 해줄래?”

“팀워크는 무슨.”

 

레오가 라비의 방패로 보다 강하고 밝은 빛을 내리꽂는다. 라비의 방패는 그 빛을 흡수하는 듯하더니 금방 튕겨낸다. 튕겨 나간 빛에 다른 것들이 상처를 입는다.

 

“팀킬이 대단하네.”

“···뭐야?”

 

라비의 방패는 힘을 흡수한다. 혁의 낫이나 켄의 화살과 같은 것은 막아내지만, 빛이나 어둠은 방패 안에 가둬 라비를 강하게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한계가 있었고, 레오는 그걸 이용한 것이다. 라비의 방패는 이제부터 거울과 같다. 그에게 다가오는 모든 빛과 어둠을 튕겨 또 다른 누군가를 공격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라비가 최대치로 강해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강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다행일지도 모르겠지만, 대신 그의 공격 한 번은 전보다 더 강한 피해를 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않겠니.”

 

새롭게 빛을 만들어내던 레오를 옆에서 유심히 바라보던 엔이 라비를 데리고 몸을 숨긴다. 눈앞에서 또 엔을 놓쳐버렸음에 레오는 한숨을 쉰다.

 

“음침한 것들. 숨는 거 하나는 잘해가지고.”

 

레오는 우선 혁을 도와 어둠의 것들을 없애는 것에 집중한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라비가 엔에게 묻는다.

 

“왜 숨어?”

“레오가 빛을 만드는 속도가 느려졌어. 너한테 힘을 많이 쏟았다는 증거겠지.”

“그럼 지금 당장 쳐도 되잖아?”

“레오는··· 혼자 있을 때를 노리는 게 나아. 홍빈한테서 심장을 거두는 게 먼저야.”

“그것도 맞지만 레오를 죽여놔야 나중에 덜 힘들 거 아냐?”

“너랑 나로는 안돼. 나는 직접 피해를 못 입히니까 안되고, 너는 그냥 안돼.”

“그게 무슨 소리야?”

“신이 어둠을 가르고 빛을 세울 때 제일 먼저 난 천사가 쟤야. 레오가 힘이 빠졌다고 해도 아직은 아냐.

“그 정도야?”

 

엔은 고개를 끄덕이고 켄을 찾아간다. 제 키만 한 활을 든 켄은 그동안 어디 숨어서 공격했던 건지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엔은 켄에게 어둠을 화살 삼아 쏠 것을 명령한다. 레오의 빛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레오에게 물리적 공격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 레오는 피를 흘리는 유일한 천사였고, 그 피는 빛에는 약이고 어둠엔 독이다. 엔은 그런 식으로라도 빛에게 좋은 일을 하느니 어둠으로 삼켜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켄이 만들어내는 어둠은 레오의 빛을 정면으로 막아내기엔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화살로 삼아 레오가 모르는 새에 공격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

 

천사와 악마 사이에도, 그들을 섬기는 인간 사이에도 한쪽으로 승세가 기울지 못하고 전쟁이 계속되었다. 신이 빛과 어둠 사이에 만들어 놓은 균형이 그 탓이었다.

라비의 방패는 혁의 낫에 조금 깨지면서 그 안에 가둬두었던 빛과 어둠의 힘을 조금 풀어주었다. 엔은 레오의 빛에 한쪽 눈을 내줬다. 켄의 활은 홍빈의 손에 부러졌다. 혁의 낫은 라비의 방패를 완전히 깨뜨리지 못하고 무뎌졌다. 레오는 엔의 핏물에 발이 녹았다. 홍빈은 켄의 화살에 맞아 한쪽 팔이 마비됐다. 빛을 대표하는 세 천사와 어둠을 대표하는 세 악마 모두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어느 한쪽의 심장이 부서져야 끝나는 전쟁은 계속해서 길어졌다. 신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생명이 죽어가는 그 모든 고통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 전쟁을 직접 끝내려 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 지쳐갈 뿐이었다. 회의에 빠져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가 다시 전장으로 나오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지는 않았다. 없던 일로 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것들이 죽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천하고 추악한 것들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을 어떻게든 움직이게 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지는 곳에선 전투가 멈추지 않았다.

 

레오는 군데군데 찢긴 날개로 발을 대신해 움직인다. 빛의 구름 사이에 몸을 숨기며 전에 비해 느리고 힘 없는 빛으로 악마들을 녹여낸다. 홍빈과 혁은 빛이 시작하는 곳에 남아 있다. 홍빈은 빛의 심장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혁은 그런 홍빈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혼자서 열심히 돌아다니네. 날개 안 아파?”

 

켄이 레오를 먼저 발견하고 물었다. 켄은 화살 몇 개만 들고 앉아있었다.

 

“너 말고 너네 왕 어디 있어?”

“엔? 최초의 악마이긴 한데, 우리 왕이었나? 뭐. 어디 있게?”

“활도 부러진 주제에 무슨 깡으로 까부나 모르겠어.”

“나도 어둠을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점이지.”

 

레오가 한쪽 입꼬리를 가득 당긴다. 곧 켄이 앉아있던 흰 구름 밑에서 빛이 솟아난다. 웃던 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는다.

 

“네가 앉아있는 거 우리 영역이거든.”

 

켄은 손에서 어둠을 만들어 내지만 레오의 빛이 한발 빠르게 켄에게 다가간다. 빛이 켄의 손바닥 위를 지나가자 어둠은 어떤 형체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흩어져 사라진다. 켄의 얼굴이 구겨진다.

 

“이거 집어넣으면 엔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알고 있으면 먼저 말해.”

“이거 풀어. 아니면 말 안 해.”

“너 하나 없다고 엔을 못 찾는 건 아니라서. 누가 손해인 것 같아?”

 

레오가 무언가를 잡아채듯 허공에 주먹을 쥐자 빛이 켄의 몸을 감싼다. 빛은 켄에게 어떠한 틈도 주지 않고 곧장 그 몸을 녹여낸다. 켄이 정말로 엔의 위치를 알고 있었는지, 레오가 빛을 풀어준다면 그것을 말해주었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도움이 안 된다면 위험한 것은 하나라도 더 없애는 것이 나았다.

레오는 짧은 순간 마주쳤던 눈을 생각한다. 겁먹은 악마의 눈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레오는 구름 위에 남은 검은 얼룩을 바라보다가 깊게 생각하길 포기하고 몸을 돌린다.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잡것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어찌 됐든 나머지 두 악마만 죽이면 빛의 승리로 막을 내릴 것이다. 레오가 빛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혼자서 엔과 라비를 상대하긴 버거운 일이었기 때문에 위험하더라도 홍빈과 혁을 데리고 어둠으로 내려갈 요량이었다. 그리고 그 시작에서 엔과 라비를 만난다.

 

“뭐야. 여기까진 어떻게 올라왔어?”

“날아왔지. 너만 날개 있는 거 아니잖아.”

“그딴 걸 묻는 게 아닌데.”

“너네 체력 좀 길러야겠더라. 어떻게 방패 하나에 그렇게 픽픽 쓰러지고 그래? 아. 이제 사라질 것들이라 굳이 그럴 필요도 없겠구나.”

“뭐?”

 

엔이 빙그레 웃는다. 더는 피를 흘리지 않는 한쪽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켄이 너한테 죽은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린 더 큰 일을 해냈으니까 괜찮아. 모든 큰 일엔 희생이 필요하잖아.”

“무슨 소리야?”

 

레오가 인상을 쓴다. 그리고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엔과 라비를 지나치려 한다. 그러나 저를 가로막는 라비의 손과 엔의 목소리에 지나가지 못하고 돌아와 그 둘을 바라본다.

 

“이거 봐.”

 

엔이 활짝 펼친 손 위로 빛의 심장이 떠오른다. 레오는 순간 할 말을 잊는다. 두 악마가 빛의 심장을 두고 웃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감히 악마 따위가 빛의 심장을, 성스러운 빛을. 어떻게? 홍빈이는, 혁이는?”

“물어 뭐해.”

 

라비가 시큰둥하게 답하며 바닥을 가리킨다. 녹아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

“무기도 없는 악마 하나 죽이느라 네 동료가 둘씩이나 죽어 나가는 건 몰랐어? 너도 참 둔하다.”

“그럴 리가 없어. 거짓말. 그거 진짜 심장 아니지?”

 

레오는 저 웃는 얼굴에 빛을 꽂아버리리라 주먹을 쥐지만 그저 미약한 빛이 피어나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빛의 힘이 사라져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레오가 켄을 녹이기 위해 사용했던 빛이 그가 가진 마지막 힘이었다.

 

“널 기다리고 있었어.”

 

엔이 레오에게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 웃으면서 말한다.

 

“신께서 어둠을 가르사, 어둠 위에 빛을 세우시고, 태초의 천사를 만드시니 그의 이름을 레오라 하였다. 신께서 레오에게 빛과 같이 흰 머리칼과 투명한 피부를 내리시고, 빛의 능력을 하사하시어 예사 인간과 구분되게 하였다. 그의 빛은 본디 어둠 속에서 난 것이나 그는 신께서 내려주신 고결함을 이유로 어둠을 멸시하니, 이것은 훗날 그의 손으로 빛을 사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뭔데?”

“인간들이 새롭게 쓸 경전에 네 소개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엔이 레오의 어깨를 두드린다. 레오는 경멸 어린 눈으로 엔을 바라본다. 엔은 그저 웃는 눈으로 그 시선을 받아낸다. 레오는 빛의 심장을 눈앞에 두고도 바라만 볼 뿐 그걸 도로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얘기가 얼마나 길어지든 간에 이미 승패는 결정됐다.

 

“신께서 새 생명을 만들고, 그 생명은 죽으면 빛으로 가서 천사가 되거나 어둠으로 와서 악마가 돼. 그럼 천사나 악마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레오.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그래서?”

“그러니까 잘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내가 죽어서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 얘기해줘.”

 

빛의 심장이 엔의 손 안에서 어둠에 휩싸인다. 세상에 빛이라곤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하늘이 검게 덮인다. 레오의 몸이 끝부터 서서히 녹아 구름을 적신다. 빛의 심장이 어둠 속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빛의 흰 구름마저 검게 변하고 레오의 흔적이 하얗게 남아있다가 곧 사라진다.

 

엔과 라비는 끝내 빛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았음을 신에게 알리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신은 저를 찾아온 엔과 라비를 보며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인간의 땅에 해는 뜨지 않고,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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