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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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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 RAVI
@Ravithep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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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픽션이며, 사용된 인물과 지명, 단체 등은 실제와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

 

 

 

 

 

본디 없던 것에서 존재를 빚으시매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

어둠은 이에 그림자가 되더라

 

빛과 어둠을 나누어 빛을 위에 어둠을 아래에 두고

제일 귀한 것을 감추어 두니 가로되

가장 큰 빛에게 이르기를

너는 가서 가장 귀한 것으로 남으라 하시니

 

본디 빛이었던 것이 어둠으로 떨어지매

빛이 이를 비웃고 어둠이 이를 시기하더라

 

 

-묵시록 1장, 계전屆戰 중-

 

 

 

 

 

0. Revelation 계시

 

 

 

타다다다, 다다다닥.

 

 

"죽어! 죽어, 좀!!"

 

 

흐릿한 안경을 쓴 청년이 컴퓨터 자판만 죽어라 두들겨댄다. 시종일관 어두컴컴한 방은 발 디딜곳 없이 쓰레기더미였다.

그 안에서 홍빈은 모니터속에 빠져들어갈 듯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산란하는 그래픽이 얼룩진 안경 렌즈에 반사되어 눈을 흐릿히 덮고 있다. 언제 갈아입었을지 모를 꾀죄죄한 옷에 눈이 안보이도록 덮수룩히 자란 머리칼이 딱 봐도 은둔형 외톨이 그 자체였다.

 

하루가 다르게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통 속 홍빈의 유일한 낙은 게임이었다. 바깥이 어떻게 미쳐돌아가든 간에 게임 속 세상은 그 어떤 잔혹한 것이라해도 밖보다 안전했으니까, 그 곳이 그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몇달간 질리지도 않고 몰두하던 게임의 엔딩이 코 앞이었다. 이 날을 위해 얼마나 삽질에 노가다를 해 왔는가. 그 거창한 마지막 스테이지는 미쳐버린 신을 그의 집에서 쏴 죽이는 것이었다.

극악스럽게도 도전기회는 단 한 번. 여기서 실패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홍빈은 이 순간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아, 아! 나 진짜. 거, 거길 왜 쏴!! 핑 미쳤나!!"

 

 

고지가 눈 앞이었는데. 잠깐 버벅거린 사이 보스몹이 내지른 스킬에 결국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홍빈은 애꿎은 키보드만 쾅쾅 내리쳤다. 그래봤자 흑백화면에 쓰러져있는 캐릭터는 묵묵부답이었지만.

 

모니터 말고는 아무런 조명도 없는 방 안, 홍빈은 어딘가 두었던 컵을 따라 손을 더듬었다. 휘적거리는 손등에 책상 가장자리 아슬하게 걸쳐져있던 머그가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찌든때가 잔뜩 낀 컵은 산처럼 쌓여있는 과자 봉지와 배달음식 포장지의 잔해 위로 온 사방에 음료를 뿌리며 나동그라진다.

 

 

"에이, 씨. 되는 일 드, 드럽게 없네..."

 

 

쓰고 있던 헤드셋을 벗고 홍빈이 컵을 주워들려 몸을 숙이는 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듣거라.]

 

 

보스몹의 엔딩 나레이션 같았다. 무슨 죽여놓고도 말이 많아. 구시렁대다가 문득 홍빈은 컴퓨터를 돌아봤다. 헤드셋 잭은 얌전히 꼽힌 채였다.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오르는 가운데 멈춰있던 화면이 제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홍빈이 큰 맘 먹고 장만한 제 책상만한 크기의 와이드모니터 가득 흰 빛이 소용돌이 치며 그를 향해 뻗어왔다. 누워있던 그의 캐릭터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내가 지금 뭘 보는 건가 싶어 홍빈이 비비던 눈을 떴을 때, 그는 더 이상 제 두더지 굴 같은 방 안이 아니었다.

 

그 곳은 게임의 마지막 스테이지, 미쳐버린 신이 또아리 틀고 있던 신전이었다. 숨막히게 흰 대리석으로만 지어진 그 곳은 불순물 하나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듯 정결했다. 처참한 잔해들은 언제 전투가 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었고, 모든 것이 그 홍빈만이 유일한 오점이라 말하듯 그를 하얗게 내리보고 있었다.

 

홍빈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위축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에게 덤벼드는 자를 버러지보듯 상대하던 그 '신'이라는 형태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부른 '그'는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듣거라.]

 

 

그것은 의식의 대지를 덮치는 해일이었다. 영혼의 등골을 꿰뚫는 창이었다.

꽂아내린 번개에 쓰러지는 나무처럼 홍빈은 무릎을 꿇었다. 무엇이 두려운 지도 모른 채 그는 경외감에 바닥에 엎드린채 벌벌 떨었다.

한낱 미물처럼 옹송그린 등 위로 태워버릴듯 강렬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볕 드는 창 하나 없는 곳에서 빛은 곧은 의지를 담아 그에게만 내리꽂혀왔다.

 

홍빈은 제게 닿는 빛을 향해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두 손바닥 위에 공포와 경외가 덕지덕지 눌어붙어 숙인 머리 위로 바쳐졌다. 제물처럼 거둬진 것들은 이에 따가운 증표가 되어 피부를 타고 올랐다.

 

 

"아악!"

 

 

손이 타오르고 있었다. 희디 흰 불꽃이 뱀처럼 양 손목을 칭칭 휘감고 팔을 타고 올라오며 화상 같은 표식을 새긴다.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그는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신음조차 크게 내지 못한 채 제게 내려진 것을 황송히 얼싸안고 바르작 댈 뿐이었다.

독처럼 핏줄을 타고 그것은 온 몸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그리고 괴로워 일그러진 눈가에 닿았을 때, 암갈색 동공이 희게 바랬다.

 

머릿속까지 태울듯한 열기 속에서 홍빈은 정신을 잃었다. 죽음같은 정적 속에서, 누군가 칼 끝을 세워 그의 머릿속에 글을 아로새겼다. 모든 뼈와 살을 단번에 발라내고 나서 마지막 남은 영혼의 겉가죽에 새겨지는 그것은 계시이자 올가미였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큰 빛을 찾아 가장 높은 제단에 바치라]

[그의 머리 뼈로 성배를 들지니]

[흐른 피가 제단을 적실 때 모든 업을 사하리라]

[그리하여 서로 증오하여 죽이는 이들로 말미암아]

[스스로 멸하게 하실지어다]

 

 

 

 

 

 

Fallen

 

PINK RAVI

 

 

 

 

 

 

 

 

1. The Apostle and a Priest 사도와 사제

 

 

 

 

로스엔젤레스.

천사의 도시라고 이름지어진 이 도시는 5천년간 이어져온 성마전쟁의 유일한 중립구역이다. 땅에서 솟는 유황불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갯불을 모두 피해간 이 곳은 중립구역이자 무법지대였다. 모든 범죄가 향락으로 포장되는 최전선은 전쟁 한 가운데의 태풍의 눈과 같았다.

끝날 기미 보이지 않는 전쟁에 지친 인간들이 스스로 중재자를 자처하며 제안한 것이 이 웃기지도 않는 발상의 시초였다. 살겠다는 갸륵한 발악에 어둠과 빛은 동의했다기보다는 방관 했다. 그들에게는 지루한 전쟁에 특이한 유흥거리 하나 늘어나는 것 뿐이었다.

 

세상이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철저히 그들이 모르는 곳에서 벌어지던 참혹한 전쟁은 어느날 발견된 경전의 마지막 장, 13번째의 서에 의해 인간의 터로 내려오고야 말았다. 그것도 인간이 제 손으로 불러들인 일이었다.

이미 존재하는 성전聖典의 소실되었던 마지막 장은 읽혀져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세계의 창조를 담은 경전에서 첫장부터 금했던, 계시록을 알려고도 하지 말 것이며 입에 올리지도 말라는 엄중한 경고를 무시한 채 인간은 끝끝내 열세번째의 성전을 찾아내었다. 그리고 대지의 뼈마디 사이에 숨겨져있던 그 내용이 세상에 인간의 언어로 읽힌 순간, 성전聖戰은 불화살처럼 그들의 땅으로 날아들었다.

성마전쟁이 발발한 원인, 신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아 어둠으로 내쳐진 자, 빛의 시기와 어둠의 포악을 들쑤신 자 - '가장 큰 빛'을 불러들이는 도구인 성배가 인간의 땅에 있다는 한 구절 때문이었다.

 

그 순간부터 땅은 무덤이나 진배 없었다.

전쟁이 인간의 땅에서 발발한 것은 고작 반세기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의 터를 잿더미로 만드는 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천계와 마계의 모든 것들은 인간에게 버거운 독기였으므로. 악마의 잘린 목에서 후득 떨궈진 피 한방울로도 빌딩은 흐물 흐물 녹아내렸다. 천사의 깃털이 떨어진 자리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로 변했다.

사고는 천재지변과도 같아서 인간의 힘으로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저 지나갈 때까지 숨 죽이고 기다리는 것 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유일한 구명줄이라 할 만한 것은태풍과 지진과는 다르게 이 영원의 존재들과는 말이라도 통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이 얻어낸 중립구가 바로 이 도시였다. 물론 애초의 숭고한 목표와는 다르게 온갖 고인물이 다 썩는 하수구가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는 적어도, 빗방울처럼 떨어진 악마의 핏방울에 사람이 녹는 일은 없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가 천사의 광휘에 눈이 머는 일도 없다.

 

중립구역 안에서 천사와 악마를 포함한 모든 종족은 분쟁하고 살생하여서는 안된다. 이를 어길시 즉시 구역 밖으로 추방되며, 다시는 중립구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된다.

이 조항이 지켜지는 것은 오로지 영원을 사는 존재들의 무료함 덕분이었다. 천사와 악마에게 이건 일종의 게임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채 서로를 염탐하는 것은 꽤 신선한 유흥거리였다. 이 같잖은 룰 아래 도사린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서로를 구역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는 것밖엔 없었다.

 

모두가 인간을 가장한 이 곳이기에 존속 가능한 공간이 있다. 빛의 신전.

의지할 곳 찾아 인간들이 부나방처럼 모이는 신전은 대개 어둠의 종속들에게 아주 손쉬운 타겟이었다. 위엄을 세우겠답시고 사방팔방 과시하며 세워둔 첨탑이며 기념비 덕분이었다. 때문에 빛의 영광됨을 찬미하기 위해 지어진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들은 족족 파괴되고, 사제들은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 숨어들었다. 아마 땅 위에 온전히 제 모습을 갖추고 있는 신전은 이제 이 곳 밖에는 없을 것이다.

 

홍빈은 제 발로는 처음 찾아간 신전 앞에서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로스엔젤레스 대성당. 인간이 모든 혼을 불태워 치장한 최후의 신전은 앞에 선 것 만으로도 존재를 압도한다. 녹슨 해를 가르며 잿빛으로 바란 첨탑들은 마치 경건한 감옥같았다.

 

깊은 심호흡 끝에 그가 발을 떼었다. 하늘을 찌를듯 솟은 종탑 위, 빛의 사도라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본뜬 부조물이 무감하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

 

 

엔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되물었다. 느닷없이 나타난 눈 앞의 안경잡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여긴 교구의 중심이며 종교의 정신적 보루, 로스엔젤레스의 대성당이다. 위용을 자랑하며 건재히 서있는 성전 자체만으로도 빛의 진영은 사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한 곳에 몸 담는 사제라는 사실만으로도 엔은 자긍심에 넘치고 있었다. 전쟁의 최전선에 위치한 성전을 지키는 사제들은 날붙이처럼 벼린 신앙심으로 무장하고 교리로서 갑옷을 둘렀다. 이 곳에만큼은 삿된 것이 발 딛게 해서는 안된다는 일념 하나로 고행처럼 저를 갈고 닦았다.

엔은 한시도 자신이 그 일원임을 잊은 적 없었고 제 사명의 숭고함을 의심치 않았다. 이 성전의 대사제로 임명받은 날에는 그 소명의 무게에 잠조차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전쟁은 커녕 학교에도 나가본 적 없을 것같은 행색을 한 멀대같은 청년이 대뜸 나타나서는 더듬거리며 이딴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제, 제가 성전을 멈, 멈출 방법을 알아요. 계, 계시를 받았어요."

 

 

엔은 무심코 혀를 찰 뻔 했다.

사이비 교주 꿈나무의 흔한 발로이다. 이렇게 계시니 묵시니를 떠들어대던 자들 때문에 인간의 대지에 전쟁이 내려온 것이다. 13서의 묵시록을 파헤쳐낸 자도 유명한 어둠 계열 이단의 교주였다.

엔은 잠자코 이 또라이를 잘 달래어 소란 없이 건물 밖으로 옮길 요량으로 입을 떼었다. 경건과 엄숙을 가장한 협박조였다.

 

 

"형제님. 압니다. 참으로 잔혹한 세상이지요. 너무 많은 이들이 화마에 고통받고 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는 형제님의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그리 불시에 쉽게 멈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게 아니라요!"

 

 

말더듬이 안경잡이는 기어코 소리를 높였다. 성전 안, 기도하러 온 노파가 소란에 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엔은 제 인내심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자애로운 미소로 불청객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가 그리 분한지 거친 숨을 식식대며 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여댔다.

 

 

"꿈, 아니, 환... 환상을. 봤어요. 들었다고요! 나한테 들으라고 했다고요! 목소리가. 흰 신전에서... 저거. 저거같은 신전에서요!!"

 

 

불경스러운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신전의 스테인드글라스였다. 투명한 유리에 흰 안료의 농도로만 색을 조절하여 섬세히 짜낸 빛의 신전의 부조는 대성당의 상징이자 종교의 보물이었다.

그것이 그리고 있는 형상은 지구상에서 가장 거룩한 빛의 성전이었다는 소피아 대성당이다. 거울같은 바다 위 떠있는 오롯이 빛만을 위한 낙원. 이제는 잔악한 발톱들에 의해 산산이 부서져 파도 아래로 가라앉아버린 오천년의 유산.

자신이 가리킨 것이 무엇인지도 모를 사내는 눈도 보이지 않게 흐릿한 안경을 추켜올리며 연신 침을 튀겨댔다.

 

 

"가장 큰 빛을, 가장 큰 어둠에서-"

"형제님."

 

 

듣다못한 엔이 말을 끊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단상에 올라가 설교라도 할 태세였다.

 

 

"이 곳은 기도하는 곳입니다. 허황된 말로 소란을 피우시면 안됩니다."

"그럼 내가 본 건 뭔데요. 어, 사람이 그렇게 가, 갑자기! 다른 곳에 뚝 떨어졌다가! 막 팔이, 이.. 이렇게...!"

"일단 나가시죠."

 

 

꾀죄죄한 제 옷 소매를 걷어올리는 남자를 우선 치우는 게 급선무일것같아 엔이 그의 팔을 잡고 잡아끌었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이태껏 덥수룩한 앞머리와 흐릿한 안경에 가려 보이지 않던 눈동자가 번뜩였다.

엔은 찰나 눈을 의심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투과된 빛에 닿아 점멸하는 한 쌍의 눈동자는 세상 모든 어둠을 부정하듯, 희디 희었다.

그리고 옷깃 아래로 드러난 그의 맨 팔이 손이 닿자, 그와 동시에 엔은 거대한 환영을 보았다.

 

 

오롯이 희디 흰 성전이었다.

엎드린 등 위로 내리쬐는 빛이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빛과 어둠과 제단과 성배에 대한 이야기는 천오백장에 달하는 경전 어디에도 없는 구절이었다.

 

그것은 계시였다. 가장 눈부신 곳으로부터 내리꽂힌 전언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바닥에 볼썽 사납게 넘어진 채였다. 엔은 한참을 거친 숨을 몰아쉬고 나서야 제 팔다리가 몸을 지탱 못할 만큼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피가 반응하고 있었다. 저 자의 몸에 깃든 신의 손길에.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황망한 눈을 하고 그가 홍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뒤로 찬연한 후광이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환상에서 메아리쳐 나온 목소리가 뒤따랐다.

 

 

[듣거라.]

 

 

아아. 엔은 어쩌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토록 바라온 음성이었다. 그가 일평생 염원하던 곳으로부터의 전언이었다. 바라마지않던 손길이자 구원의 확언이었다.

 

 

"사, 사제님."

 

 

남자가 그를 일으켜 세우려 손을 내밀었지만 엔은 감히 맞잡지 못했다. 그 대신 경건히 무릎 꿇은 채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엔의 조심스런 손길 아래 홍빈의 안경이 벗겨졌다. 확언의 눈동자가 드러난다. 엔은 눈가로 줄줄 흐르는 눈물 속에서 답했다.

 

 

"받듭니다, 사도使徒시여."

 

 

빛을 닮은 한 쌍의 찬란한 눈동자에서 그는 신을 보았다.

2. 가장 어두운 곳 The Dark One

 

 

 

Los Angeles, Six Stars Casino.

 

타락의 랜드마크, 악마의 디즈니랜드. 사람들은 도시 최대 규모의 카지노를 그렇게들 불렀다. 그다지 썩 호의적인 별칭은 아니었다.

육망성의 네온사인을 내건 66층의 거대한 카지노는 딱히 그 별명들을 불명예스럽다고 여기지 않는 듯 했다. 평판이야 어떻건 간에 그들은 지구상에 남은 그 어떤 신전보다 높은 빌딩을 온갖 사치와 향락으로 치장한 채 얼빠진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바빴다.

인간인지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를 자들은 뒤섞여 룰렛을 돌리고 한 테이블에 앉아 카드게임을 한다. 카지노 밖의 전쟁이야 알 바 아니었다.

위스키 한 글라스, 시가 한까치, 싸구려 데낄라 한 샷에 코인이 던져진다. 룰렛 테이블 위에는 집 한 채가 놓인다. 담보는 무엇이든 받았다. 독을 뿜는 악마의 송곳니, 푸른 피가 뚝 뚝 흐르는 천사의 한 쪽 날개, 인간의 조잡스러운 무기들, 혹은 목숨과 영혼, 무엇이든. 카지노의 금고는 그것들을 게걸스레 받아먹고 코인을 뱉었다. 값어치만큼 갚지 못하는 자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 바 아니었다.

 

슬롯머신 돌아가는 소리가 멎지 않는 불야성은 여전히 호황이다. 밖에서 일어나는 전쟁이 참혹할수록 이 곳은 북적이게 되어있다. 전쟁의 불씨로 한껏 치장한 그 빌딩 로비로 흰 스포츠카가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흰 마세라티의 운전석에서 온통 까만 수트를 빼입은 남자가 내려선다. 그의 등장과 함께 로비에는 죽음같은 침묵이 카펫처럼 깔렸다. 카지노의 주인이 도착한 것이다.

 

로비로 들어서며 남자가 옆으로 따라붙은 비서에게 고갯짓한다. 비서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 시가를 건넸다. 검은 가죽장갑을 낀 손이 불 붙은 시가를 받아든다. 얇은 가죽 아래로 손등의 뼈가 맹수의 발톱처럼 험악히 불거진다.

 

남자는 시가를 받자마자 한 모금 빨아들이고, 내뱉는다. 자욱히 피어오른 연기는 지옥의 아가리에서 도망쳐나오듯 순식간에 꽁무니를 뺀다. 그의 시가에서는 유황의 냄새가 났다.

 

남자의 검은 머리칼은 타오르는 불의 형상을 하고 제멋대로 뻗쳐 너울거렸다. 선글라스에 가려져 눈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닿으면 베이기라도 하는듯 화드득 놀란 눈길이 흩어졌다. 그는 마치 맹수처럼 아름다웠다. 다가가는 순간 숨통이 끊어질만큼.

 

까만 대리석으로 짜맞춘 로비 안은 흡사 거대한 동굴같았다. 고개를 꺾어야만 까마득하게 보이는 천장에는 천사의 깃털과 악마의 발톱, 인간의 머리뼈로 치장된 샹들리에가 드리우고, 그 섬뜩한 장식물이 가리키는 로비 정중앙에 이 카지노의 상징이 위치한다. 로스엔젤레스를 통째로 팔아도 못산다고 소문이 자자한 그 것은, 끊임 없이 샴페인이 솟아나는 분수대였다.

온통 검은 로비에 그것만이 태풍의 눈처럼 하얗다. 어느 신전을 깨부수고 공수했을지 모르는 흰 대리석을 깎아 둥글게 짜둔 샘 가운데, 6피트에 육박하게 쌓아올려진 샴페인타워는 통으로 조각된 크리스탈이다. 그 자체로 보석이기도 한 분수대는 샹들리에의 조명을 받아 온 사방에 과시하듯 번쩍번쩍 빛을 뿌린다.

 

카지노의 주인, 라비가 그 휘황찬란한 것을 지나며 장갑 낀 손으로 샴페인의 폭포를 가른다. 파도처럼 터지는 기포들은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움츠러들며 길을 텄다.

 

온 로비에 진동하는 샴페인의 향은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취하게 한다. 날개달린 것이든 뿔 달린 것이든 정신이 몽롱해져서 제 가진 걸 갖다 바치고 룰렛을 돌리게 할 것이다. 그렇게 그의 금고는 배가 부르고 왕국은 비대해져 갈 것이다. 그의 나라에서 탐욕은 미덕이었다.

 

술 한방울 안묻은 손으로 그가 선글라스를 치켜올리다가 문득 코 끝을 찡그리며 걸음을 멈췄다.

샴페인 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라비의 시선이 먼 곳을 향했다. 거대한 로비를 가로지르는 동안 말 한마디 없던 주인이 입을 열었다.

 

 

"어디서 이렇게."

 

 

비틀려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비져나왔다.

 

 

"시궁창 냄새가 솔솔 날까."

 

 

무언가 있다. 아주 미미한, 하지만 손톱 밑의 가시처럼 신경을 긁는 무언가가 그의 왕국 안에 기어들어온 것이 느껴졌다.

무슨 변덕인지 그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카지노 안으로 향했다. 침묵속에서 그의 구둣발 소리만 거대한 로비에 뚜걱뚜걱 울려퍼지고, 주인을 환영하듯 쇳소리 내며 우는 슬롯머신들 사이로 그가 모습을 감췄다.

 

주인의 모습이 감옥 안으로 사라지자 로비의 끔찍하고 거대한 샹들리에가 그제야 세차게 흔들리며 머리를 털어댔다. 인간의 머리뼈와 천사의 깃털이 부딪히며 달그락 달그락 삐걱 삐걱 악마처럼 나불댄다. 폭풍우의 전조를 예감한듯이.

 

 

 

 

 

검은 바닥 위, 피처럼 깔린 카펫을 따라가면 카지노의 게임필드다. 그 중 가장 먼저 위치한 것은 슬롯머신의 감옥이었다. 그 비좁은 창살 사이를 지나면 룰렛게임의 늪이고, 가장 큰 액수가 오가는 카드게임은 가장 깊고 외진 독방들에서 이루어진다. 이 거대한 빌딩은 층층이 미궁과도 같아서, 그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가진 것을 다 탕진할 때 까지 게이머를 감싸고 놓아주지 않는다.

 

주인이 무서워서라도 좀처럼 일어날 일 없는 소란은 그 미궁의 가장 깊은 독방중 하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카드게임이 한창인 테이블은 여느 게임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무슨 일인지 등치 산만한 핏보스들이 하나 둘 테이블 주위로 모여들어 삼엄하게 주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다른 게이머들은 그 분위기에 기가 질려 얼른 이번 라운드를 끝내고 내뺄 궁리에 바빴다. 단 한사람을 빼고.

 

연이은 다섯판을 이기며 그 날 하루에 카드게임에 나온 판돈을 다 끌어모은 남자는 양 옆에 코인을 산처럼 쌓아두고도 별다른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시위하듯이 같은 테이블에서 따고 따고 또 따기를 반복했다. 여기 온 목적이 돈은 아닌게 분명했다. 덮수룩한 앞머리 사이로 비치는 남자의 눈동자는 섬뜩한 흰색이었다.

 

홍빈은 더이상 안경을 쓰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들은 이후 그런 것이 없이도 눈이 잘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른 것들도 꽤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라든가. 홍빈은 손 안에 든 패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들었다. 그가 가까이 오고있는 것이 느껴졌다.

 

 

역겨운 냄새가 점점 짙어진다. 진원지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었다. 라비는 코를 떼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되어 카드 테이블들 사이를 신경질적으로 헤치고 들어갔다. 그가 문제의 테이블에 다다를수록 주위는 점점 쥐죽은 듯 고요해져간다. 그리고 그 억눌린 정적의 물결이 홍빈에게까지 와 닿았을 때, 그가 기다렸다는 듯 손에 들고 있던 카드 패를 내려두었다.

 

 

"로열스트레이트플러쉬."

 

 

텐, 잭, 퀸, 킹, 에이스. 모두 새빨간 하트무늬이다. 게임 테이블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질린 표정으로 두 손 두 발 다 들고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이미 카지노 주인의 머리 꼭지가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엉덩이를 들썩이고들 있었다.

 

라비는 내뺄 생각도 없이 저를 똑바로 쳐다보는 한쌍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받아치며 그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꾀죄죄한 홍빈의 행색에 입술을 삐뚜름히 올렸다. 이거, 참. 누가보면 쓰레기장에서 떡이라도 치다 온 줄 알겠어. 하지만 입 밖으로는 그런 신랄한 말 대신 제법 예의차린 인사가 나왔다.

 

 

"젠틀맨. 오늘 대단한 행운의 여신과 함께 하시나 보군요."

"제게 신은 하, 한 분 뿐입니다."

"오, 저런."

 

 

홍빈에게서 나온 답에 라비가 진심으로 딱하다는 듯 웃었다. 그린듯 잘생긴 얼굴에 조롱기가 진동을 했다.

 

 

"앞 뒤 꽉 막힌게 정말 익숙한데. 우리 혹시 어디서 본 적 있습니까?"

"다, 당신은 저를 모, 모르지만, 전 당신을 아, 압니다."

 

 

이 말더듬이 반편이가 지금 누굴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 건지. 라비가 심기 불편한 티를 숨기지 않고 눈썹을 치켜떴다. 그에 반응해 주위에 선 핏보스들이 어깨를 부풀려대었다. 하지만 홍빈은 아랑곳도 않았다. 진정으로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라비가 생각할 때에 홍빈이 그를 '불렀다'.

 

 

"벨리알."

"하."

 

 

기가 찬 듯 웃은 라비가 손 끝으로 선글라스를 내렸다. 지옥불처럼 너울거리는 검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은 피의 색이었다. 덫에 걸린 사냥감의 절박한 울음소리처럼 붉은, 잔혹한 빛깔.

 

 

"이 새낀 뭔데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대."

 

 

보통 버러지들은 악마의 진명을 입에만 담아도 유황불에 주둥이부터 튀겨질 것이었다. 선홍의 눈동자 안에서 염소의 것을 닮은 길쭉한 동공이 찌를듯 홍빈을 쏘아보았다. 성가신 버러지를 보는 눈이었다.

 

 

"뜬금없이 어디서 이렇게 닭똥내가 나나 했더니. 겁도 없이 신의 표식을 보란듯 눈깔에 달고 이 곳에 기어들어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입 밖에 내지 않은 협위는 흉흉한 송곳니가 대신했다. 이미 가죽 장갑을 뚫고 나온 시퍼런 발톱들이 테이블 위를 까드득 긁어대고 있었다.

 

 

"그 딴걸 달고 있으면 얌전히, 눈에 안띄게, 그 잘난 닭장에 처박혀 살아도 모자랄 마당에. 남의 업장에 와서 이딴 장난질이나 쳐대고 말이야. 영업방해라고 들어봤어?"

"나,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습니다."

"뭐라는 거야, 이 정신 나간 파리새끼가."

 

 

라비가 신경질적으로 선글라스를 벗었다.

 

 

"니가 이뻐서 봐주는 줄 알아? 성가신 일 만들기 싫으니까 용무 있으면 얼른 보고 빨리 꺼져."

 

 

명목상은 중립구역이라 말이지. 유감이라는듯 덧붙이며 라비가 시가를 빨아들였다. 매캐하게 퍼지는 연기 가운데 겁대가리 없는 흰 눈동자가 반들거린다. 욕지기가 나오는 색이다. 하필 저딴걸 달고 있어서 모르는 척 지옥불에 쳐 넣지도 못하고. 한 쪽 쯤은 뽑아도 그다지 문제 될 건 없지 않을까 라비가 고민하던 차에 성가신 버러지가 입을 열었다.

 

 

"당신이, 가, 가장 큰 빛을 수, 숨기고 있죠?"

"....뭐?"

"아, 아무리 탐내도, 그건 다, 당신 것이 될 수 없어요."

 

상상도 못한 말에 일순 멍해졌던 라비가 파안대소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 아, 이거 진짜 골 때리는 새끼네."

 

 

한참을 웃던 라비가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닦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간에, 천계놈들이란. 오천년을 보아와도 항상 한결같고 새롭게 또라이들이다. 저딴 무슨 거창한 사도 같은 걸 만들어 미끼질을 하나 했더니. 겨우 진정한 그가 홍빈에게 몸을 기울였다.

 

 

"잘 새겨 들어, 파리야. 니가 진짜 신의 사도 씩이나 된다면 잘 듣고 가서 전해."

 

 

이어 그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둘만 아는 비밀을 만들듯 은밀한 어조였다.

 

 

"애초에 그 뭔지도 모를, 큰 빛이니 좆이니를 내 땅에 허락도 없이 쳐박은 게 누군데 이제와서 내노라 마라야? 난 그게 어디 틀어박혀 있는지도 몰라. 급하면 지가 와서 직접 찾아가라 그래. 탐을 내? 지랄하네. 똥내 나는 닭대가리들 갖고 노는 걸 왜 내가 탐을 내느냐 이말이야. 그딴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여기까지 기어들어와서 깐족대?"

 

 

제 할말을 마치자 마자 라비가 눈짓했다. 그러기 무섭게 산더미만한 남자들이 와서 홍빈을 강제로 일으켰다.

 

 

"이, 이거 놔요! 벨리알! 계,계시는 이미 내려졌고, 겨,결국...!"

 

 

성가시다는 듯 라비가 손짓하자 입마저 틀어막혔다. 붙잡혀 발버둥치는 홍빈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대고 지옥의 왕이 경고했다. 빨간 눈동자가 잔인하게 반짝거렸다.

 

 

"다음에 또 내 눈에 띄면, 그 땐 친히 내가 지옥 워홀 비자 내줄게. 산채로 노동의 참맛 좀 보게 해주는 건 문제 없거든."

 

 

라비 그가 허공에 손짓하자 온통 까만 로드가 나타나 그의 손 안에 쥐어졌다. 그것을 잡고 그가 바닥을 쿵 내리치자 그의 발 밑으로 검은 소용돌이가 나타나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무저갱 안으로 홍빈을 던져넣기 전, 마왕이 그의 귓가에 대고 더없이 친절히 뇌까렸다.

 

 

"그러니까 조용히, 없는 듯 살아. 벌레답게 바닥이나 기면서. 알겠어? 지금 니 목이 붙어 있는 거에 나한테 감사할 줄 알면 더 좋고."

 

 

포악한 작별인사와 함께 추락하며 홍빈은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카지노 밖에 나동그라진 채였다.

 

 

홍빈이 겁도 없이 마왕의 카지노에 쳐들어갔다가 탈탈 털려 쫓겨나온 것을 들은 엔은 기가 막히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인간 알기를 흙 파먹는 벌레보다 못하게 보는 지옥의 왕이 그에게 귀를 기울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식해서 용감할 수 있었던 무쌍한 신의 사도를 데리고 엔은 이 곳을 찾았다. 원군을 얻기 위한 담대한 결정이었다.

 

[Bar 7th Heaven]

 

군데군데 빛이 바래고 먼지가 낀 네온사인은 이 바가 얼마나 오래 이 자리를 지켰는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술냄새가 눌어붙은 듯 끈적이는 나무문은 경첩도 녹슬어 잘 열리지도 않았다.

이내 홍빈이 온 몸으로 겨우 밀어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비좁은 계단이 나온다. 입구에서부터 절고 절은 담배냄새가 훅 끼쳤다. 홍빈은 미간을 찡그리며 옷소매로 코를 틀어막았다. 정작 뒤따르는 엔은 고저 없는 얼굴이었다.

매한가지 무모한 일을 벌이면서 엔은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천사라고 해서 인간을 그보다 나은 것으로 여기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바 안은 담배냄새와 함께 위스키향을 닮은 재즈피아노의 선율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틀어 놓은 트랙이 아니었다. 건반 위를 노니는 노트들이 각기의 색을 담고 찰랑거리는 라이브 연주였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 위화감이 흐르는 그 멜로디에 홍빈이 잠시 넋을 빼앗겼을 때 카운터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던 종업원이 지배인을 찾는다는 엔의 말에 대뜸 인상부터 구겼다.

그를 찾는 사람 치고 뒤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 아니, 이것들은 사람새끼이긴 한가. 그는 얼치기라고 얼굴에 번히 써놓은 둘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나는 사제, 하나는... 인간. 하긴 저것들이 어찌될지 그가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그의 보스는 뒷처리하나는 깔끔했으니까.

 

 

"어이, 레오. 자네 찾는다는데."

 

 

그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친 방향은 라운지 중앙에 놓인 그랜드피아노였다. 정확히는 그 앞에 앉은 남자를 향해.

 

루프가 열려 아름다운 골조를 드러낸 피아노는 샹들리에가 달린 저택의 고상한 파티에 더 어울릴 법 했다. 이런 담배냄새 찌든 바닥 끈적한 바가 아니라. 하지만 그를 연주하는 남자를 본 순간 홍빈은 이 바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내 떨치지 못했던 지독한 위화감을 말끔히 잊었다.

 

장소같은 건 상관 없었다. 탁하게 바랜 누런 전구가 조명의 전부인 공간에서 남자는 저 혼자 맑았다.

늘씬한 실루엣을 타고 흐르는 스트라이프의 더블버튼 수트를 멀끔히 차려입은 남자는 감히 수식하기 버거울만큼 아름다웠다. 입에 문 담배에서 연기가 그의 숨을 따라 주위로 퍼질 때면 광휘라도 두른 듯 성스러웠다. 가장 순도 높은 빛을 고르고 골라 제련한듯한 은발, 빛을 죄 녹이는 용광로를 닮은 금빛의 눈동자. 검고 흰 건반 위를 노니는 가는 손가락 끝에서 정제 되지 않은 음들이 맹수의 목울음처럼 그르릉대며 터져나오고 있었다.

 

순수한 경외에 압도 당한 채 홍빈과 엔은 말을 잊었다. 마침내 불협 화음과 하모니 위를 흥청이던 손가락이 멎고 나서야 남자는 고개를 들어 둘을 봤다. 홍빈은 그 시선이 닿는 순간 숨을 턱 멈췄다. 그리고 환상을 보았다.

찬란한 여섯장의 날개가 그의 뒤로 펼쳐지는 환상이었다. 태양보다 눈부신 광휘가 그의 머리칼 뒤로 나부끼는 환상이었다.

 

홍빈은 깨달음과 함께 바닥으로 엎어졌다. 제 존엄 따위 저 존재 앞에서 한낱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릎을 꿇어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잡은 홍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카마엘이시여."

 

 

빛의 검, 권능의 창, 가장 앞에 서는 고결한 방패시여.

레오는 올려다보는 인간의 눈에 담긴 말을 읽었다. 그리고 어렵잖게 저를 찾아온 두 머리통의 피를 꿰뚫어보았다.

깊은 호흡을 따라 담배가 타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연기가 독안개처럼 퍼질 때, 마른 웃음이 함께 비집고 나왔다.

 

 

"하하."

 

 

재미있다. 반쪽짜리 버러지와 그냥 버러지. 대체 이 둘이 무슨 용무로 맹랑히 저를 찾는단 말인가? 게다가.

레오는 가늘어진 눈으로 저 앞에 무릎을 꿇은 인간을 훑었다. 저 자에게서 역겨울정도로 맑은 향이 났다. 방금 천계의 강에서 멱이라도 감고 나온 것처럼. 한낱 버러지에게서 말이다.

 

 

"너. 몸에 뭘 두르고 다니는 것이냐."

 

 

흥미롭단듯 말하며 레오가 몸을 일으켜 홍빈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꿇어앉은 그에게 눈높이를 맞추며 서서히 몸을 낮췄다.

저 쪽 구석에서 경악에 굳은 사제가 무릎을 꿇을 생각도 못한채 굳어 서 있었다. 대천사의 기운에 퍼렇게 질려 사시나무처럼 떠는 게 퍽 가련했으나 알 바 아니었다. 더욱이 반쪽짜리임에야. 버러지만 못했다.

 

레오는 바르작대는 개미를 보듯 홍빈을 살피다가, 그의 공손히 모은 두 손 위로 무언가 발견하고 미간을 움찔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긴 손가락을 뻗었다.

처음은 장난스레 건드리려했으나, 홍빈의 양 손목을 비늘처럼 타고 오른 흰 상흔으로 다가갈수록 수려한 미간에 금이 곧게 패였다.

그리고 마침내 손가락이 닿았다 떨어졌을 때, 카마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죽일듯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짓씹어 뱉은 말엔 경악이 서려있었다. 까드득, 우득. 그의 분노에 반응해 등 뒤로 거대한 날개가 장엄히 솟았다.

 

 

"네가 어찌 이 빛을..."

"계시를 받았습니다."

 

 

빠가가각. 기어이 카마엘의 등 뒤에서 터져나온 세쌍의 날개가 좁은 바 안을 가득 채웠다. 뺨을 길게 베며 스쳐지나가는 천사의 깃털을 느끼며 홍빈이 줄줄히 읊었다. 그는 더 이상 말을 더듬지 않았다.

 

 

"제게 들으라 하셨습니다. 가장 큰 빛을 찾아 성배에 피를 취하라 하셨습니다. 제단에 그 피를 흘러 싸움을 멎게 하라 하셨습니다."

 

 

레오는 수려한 미간을 사정 없이 구겼다.

 

전쟁의 선봉에서 여태 저 냄새 나는 악마들을 쳐 온 것은 자신이다. 그의 세쌍 날개를 걸고 그는 자신이 가장 많은 어둠을 몰아내었다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신은, 구태여 저 버러지에게 친히 사명 같은 걸 하달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발치 아래 그의 잘 벼러진 검이, 자신이 있는데 무엇하러. 그에게 직접 가서 멸하라 하시면 따를 것인데.

 

홍빈은 눈 앞의 대천사의 눈치를 부던히 살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분노가 아닌 의구심이 모습을 비췄을 때를 파고들었다.

 

 

"벨리알이, 벨리알이 계시를 거역했습니다. '가장 큰 빛'을 내어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습니다."

"벨리알?"

 

 

튀어나온 호칭에 카마엘의 눈이 번뜩였다. 약삭빠른 '신의 사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가장 큰 빛'은 '가장 큰 어둠'인 그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히 그와 대적할 수 없습니다. 가장 고결한 방패시여, 부디..."

"되었다."

 

 

구태의연한 미사여구에 질린듯 그가 손을 내저었다. 이미 날개는 언제 나왔냐는 듯 모습을 감춘 후였다. 그와 함께 거두어진 기운에 간신히 서있던 엔이 풀썩 주저 앉는 소리가 뒤에서 들렀다.

 

홍빈은 마른침만 겨우 삼키며 제 앞을 서성이는 대천사의 발치만 보았다. 멀끔히 반짝이는 구두코. 저기에 걷어차이면 인간의 도시 하나는 순식간에 지도에서 사라진다. 일만의 파멸천사를 이끄는 대천사란 그런 존재였다. 오로지 전투를 위해 벼려진 무기. 가장 고결한 방패이자 가장 잔혹한 검.

 

레오는 계시의 권능을 값비싼 거적떼기처럼 두른 인간의 앞을 서성이며 저에게 주어진 퍼즐조각들을 쥐고 전체의 그림을 가늠했다. 저 인간은 눈 앞의 언어의 의미들에 머리를 들이미느라 정신이 없다. 당초 그것 밖에 안되는 그릇이니까.

기실 가장 큰 빛이 어디 처박혀 있는지 그에겐 중요치 않았다. 이미 왜 이 해묵은 전쟁이 일어났는지 따위의 명분이나 시발점등은 5천년의 세월동안 잿가루도 못될만큼 산화된 지 오래였다.

 

다만. 레오의 입꼬리가 슬쩍 비틀렸다. 벨리알의 웃기지도 않은 성채가 공교롭게도 이 도시에 있다. 그는 여봐란듯 요새를 지어올려 디즈니랜드라도 연 것처럼 요란 법석을 떨고 있었다.

계시가 이 곳에 떨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벨리알이 비열하게 중립구역에 둥지를 튼 것도, 또 자신이 이 냄새나는 지하 골방에 처박혀 왠지 모를 허탈감에 젖어있던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

 

뜻이 그러하시다면. 가장 고결한 방패는 대번에 흉흉하게 날붙이를 비껴들었다. 전장의 사자가 비틀린 입매로 웃었다. 중립의 어쩌구 따위, 애초 시시껄렁한 소꿉장난일 뿐이었다.

 

 

"내어주지 않는다면, 앗아오면 될 것 아니냐."

 

 

대천사의 눈이 잔혹하게 빛났다.

3. 머리뼈 The Crown

 

 

 

인간의 말은 카마엘에겐 훌륭한 빌미일 뿐이었다. 그깟 표식좀 달고 있다고 버러지에게서 날개가 솟지는 않는다. 성무를 이행하는 것은 결국 천사의 손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그 선봉의 가장 날카로운 창은 늘 그러했듯 자신일 거라고 레오는 확신했다.

손에서 솟구친 신성한 불의 칼에 악마의 피를 적시는 순간 그는 기꺼이 인정했다. 그는 목이 말라 있었다. 그것도 아주 타는듯이.

머리를 잘라내어도 질기게 달려드는 늑대의 몸뚱이를 그의 날개가 잡아채 갈갈히 찢어놓는다. 등허리를 후둑 적시는 악마의 피가 덥고 따갑다. 카마엘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소명은 달디 달았다.

 

광휘를 갑옷으로 두른 대천사가 여섯장의 날개를 펼치고 날아든 카지노의 로비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건물 안에서 도망쳐 나오던 무리들 중 섞여있던 악마들은 그 날개를 보고 저도 모르게 뿔을 드러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둠은 두려움을 광기로 만들고, 광기의 가장 단순한 색은 폭력이기 마련이다. 두려움에 이지를 잃은 악마들은 카마엘 앞에 짖어대는 개떼처럼 몰려들었다.

단죄의 불길이 퍼렇게 타오르는 팔로 휘젓는 족족 악마들은 재도 남지 않고 부스러진다. 카마엘은 양떼 가운데 떨어진 이리처럼 새카만 악마들 사이를 뚫고 들어와 마침내는 로비의 중앙에 다다랐다. 다분히 악취미적인 샹들리에 밑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분수대를 보고 레오가 조소했다. 그리고 그의 불칼이 거침없이 그것의 위로 내려쳐지는 순간이었다.

 

-쩡!

 

어디선가 튀어나온 새카만 로드가 칼과 맞물렸다. 까드드득, 퍼런 불똥을 튀겨대면서도 끝끝내 힘에 밀리지 않던 그것이 기어코 천사의 검을 튕겨내었다.

반동과 함께 날개를 펼쳐 공중에 떠오른 레오가 서슬퍼런 눈으로 공중에서 튀어나온 그 막대기를 노려보았다.

 

두욱, 둑. 로드를 타고 새카맣고 끈적이는 기름이 분수대 위로 떨어진다. 지옥의 가장 깊은 곳, 악마의 뼈가 삭아 졸아든 기름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기라도 하듯 맑은 술을 순식간에 거멓게 삭이며 물들인다.

로드가 나온 틈이 점점 벌어지며 너울대는 암염暗炎의 머리가 먼저 모습을 보였다. 이어 드러난 멀끔한 얼굴은 화를 굳이 숨기고 있지 않았다. 두상을 빙 둘러 솟은 장엄한 뿔 아래, 카마엘을 응시하는 시뻘건 눈은 저걸 당장 찢어죽여도 시원찮다는 듯 형형했다. 줄줄 흐르는 독기를 시가 연기처럼 뿜으며 마왕이 송곳니 새로 말을 박박 갈아뱉었다.

 

 

"이 천박한 쌍놈의 새끼가. 이게 얼마짜린 줄 알고 무식한 걸 갖다대고 지랄이야."

"벨리알."

"이건 보험도 못들어. 니가 오천년동안 몸을 팔아도 못갚는다고. 알아?!"

"이런 시시껄렁한 곳에 숨어서 뭘 하나 두고 봤더니. 인간놀음이 퍽 재미있었나보군."

"이....!"

 

 

악마의 자존심을 긁는 작전은 언제나 유효했다. 바드드득, 깎은듯 수려한 두상을 빙 둘러 왕관처럼 뿔이 자라난다. 그와 동시에 뼈를 분질러 장식한 듯 흉흉한 돌기들이 난 거대한 골조가 등 뒤에서 솟아났다. 질긴 피막도 없이 뼈만 남은 날개를 까드득대며 라비가 로드를 고쳐잡았다. 흉포하게 말려올라간 입술 아래로 송곳니가 길게 자라났다.

 

 

"견적 보니까 손해배상으로 날개 여섯장으론 택도 없겠는데. 온 김에 장기까지 빼두고 가. 배는 내가 갈라줄게."

"전쟁이 겁나서 인간들 틈에 숨어 산 주제에, 여전히 입만 살았군."

"넌 이 새끼야, 명예훼손까지 추가야. 변호사 선임 할거라고. 어?!"

 

제 사유지에 쳐들어와 깽판을 친 것도 모자라 적반하장 버러지취급까지 한 천사 덕에 마왕은 제대로 꼭지가 돌았다. 터져나오는 꺼먼 독무와 함께 릴리스의 등뼈로 만든 로드가 휘둘러져온다. 레오는 새하얀 불길이 날름대는 칼날을 들어 그것의 궤적 정중앙을 향해 들이밀었다.

 

까아아앙!

 

빛의 불길과 어둠의 날이 팽팽히 맞닿는다. 부글대는 기운을 견디지 못하고 닿은 곳이 활화산처럼 진동했다. 거대한 두 파도 사이의 미세한 틈이 기우는 순간이었다.

 

꽈광!

 

굉음이 울려퍼지며 빌딩의 유리창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이런, 씨발..."

 

 

그 꼬락서니를 보고 라비가 망연자실하다가 빽 소리쳤다.

 

 

"저거 다 방탄유리란말야 이 새끼야!!!"

 

 

이윽고 빛과 어둠이 다시 맞붙었다. 날름대는 불꽃들 아래로 새카만 지옥의 용암이 움틀대었다. 이미 그 곳은 명백한 전장이었다.

 

 

 

 

 

 

 

엔과 홍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들이 갑자기 떨어진 신전 안을 둘러보았다. 카마엘이 계시의 단서를 찾게 해주겠다며 팔을 휘저음과 동시에 둘은 빛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 곳으로 떨어졌다. 홍빈은 옆에서 아직도 어질거리는지 연신 비틀대고 있었다.

엔은 그 내부를 보다가 짚이는 바가 있는듯 아, 하고 탄성을 냈다. 거친 암벽 빼곡히 양각으로 새겨진 경전으로 보아, 자신의 추측이 맞다면 이 곳은 돌 사막 한가운데 바위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바위의 신전 까스텔라 디 테라 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곳은, 13번째의 경전이 발견된 장소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 엔이 마른 침을 삼켰다. 계시록은 인간의 언어로 읽힌 순간 실현되었다. 계시는 언령이고 언어는 실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의 의지를 담은 계시의 원문은 그 자체로 가늠할 수 없는 성력의 원천이다. 계시록이 발견되자마자 천군은 이 곳을 성지로 명명하고 삼엄히 경비를 둘렀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바에 의하면, 이 곳을 지키는 수문장은...

 

 

"누구냐."

 

 

암벽에 빼곡히 새겨진 알 수 없는 문자들을 더듬던 홍빈이 갑자기 울린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았다가 눈이 부셔 황급히 팔로 눈을 가렸다. 신전 깊은 곳의 허공에서 무언가 찬란히 빛나고 있었다.

차츰 빛이 잦아들자 실눈 뜬 가느다란 시야로 먼저 보인 것은 장엄한 에메랄드 빛의 날개였다.

 

켄, 비전과 기록의 천사 라지엘은 눈 앞에 떨어진 인간 하나와 반쪽짜리를 보며 대번에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중립구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마엘이 사도와 사제를 둘만 달랑 올려보낸 것은 순전히 제 계획에 거추장스러울 것 같다는 잇속에서임이 분명했다. 직진밖에 모르는 전장의 사자는 제 하기 싫은 뒷처리를 남에게 떠넘기는 버릇은 여전한듯 했다.

 

 

"라, 라지엘님."

 

 

켄은 저를 알아보고 바닥에 엎드리는 두 날파리를 보며 한숨을 삼켰다. 두툼한 경전을 들고있는 손에 저도 모르게 희게 힘이 들어갔다. 이 책 모서리로 레오의 정수리 먼저 찍고 시작하고 싶은 맘이 굴뚝이었지만 사자는 쌈박질에 한창 바쁠터였다.

켄은 귀찮음이 역력한 표정으로 코를 타고 내려온 안경을 고쳐올리다가 자신을 맹랑히 올려다보는 한 쌍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흰 동공이 꽤 흡족한 빛깔이어서 그는 조금 마음이 풀렸다.

 

 

"...소명을 안고 온 게로구나."

 

 

신께서는 종종 그들이 이해 못할 방법으로 역사하곤 하신다. 그래서 그 분의 계획에 의구심을 갖는 것은 헛된 일이다. 지나고 나서야 우매한 머리로 발자취를 더듬으며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제 멋대로 뛰쳐나가 설치는 대천사와 달리 라지엘은 그것을 알았다. 그러기에 계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고 그들을 충실히 <계시>가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허나 기록하는 자는 호기심이 많았다. 그것은 소명만큼 당연한 이치였다. 전장의 사자가 피에 갈기를 적시고 싶어하듯, 비전의 파수꾼은 비밀로 귀를 적시고 싶어 목말라한다.

울퉁불퉁한 바위동굴은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비좁아지는 구조였다. 점점 더 깊은 곳으로 그들을 이끌어 머리 위 천장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동굴에서 사람 하나 겨우 지날 만큼의 틈새로 졸아들 때 까지 길을 묵묵히 앞서가던 천사는 입을 간질이는 호기심을 끝내 참지 못하고 뒤따르던 사도에게 물었다.

 

 

"계시를, 뭐라고 받았다 했느냐?"

"네, 네?! 악!"

 

 

앞서가는 켄의 구둣발만 내려다보며 걷던 홍빈이 깜짝 놀라 튀어올랐다가 동굴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그가 머리를 감싸쥐고 주저앉아있을 동안 뒤에서 잠자코 있던 엔이 입을 열었다.

 

 

"가장 어두운 곳에서..."

 

 

그 때 자줏빛 눈동자가 새카만 어둠을 뚫고 그에게 내리꽂혔다. 그 시선을 마주치자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어서 엔이 입을 벌린 채 파들거렸다. 켄은 서릿발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게 묻지 않았다."

"......"

"수치를 안다면 고개를 숙여라."

 

 

시선이 거두어짐과 동시에 졸린 목이 풀려나듯 엔이 컥컥 대며 숨을 몰아쉬었다. 생리적 현상에 의해 눈물을 둑둑 흘리며 엔이 비집고 나오려 하는 감정을 구욱 온 힘을 다해 내리눌렀다. 천사와 인간의 혼혈. 자신은 존재만으로도 천사들에게는 수치였으니.

 

이어 홍빈이 덜덜 떨리는 턱을 겨우 놀려 줄줄 외운 글자들은 라지엘에게는 감로수와 같았다. 사도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한 글자까지 탐욕스레 들이마신 후에야 켄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들어본 적 없는 신의 전언이야말로 그를 먹이는 양식이었다.

하지만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계시의 방 앞에 멈춰선 켄이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가장 어두운 곳... 가장 큰 빛... 가장 높은 제단."

 

 

탁, 탁, 탁. 뼈마디가 불거진 흰 손이 검붉은 암벽의 위를 두드릴때마다 손 끝에서 흰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에메랄드빛의 머리칼이 그 빛을 반사해 보석광산처럼 동굴을 밝혔다.

 

 

"머리뼈. 성배... 자멸."

 

 

톡. 그가 가볍게 친 바위벽에 금이 난 것을 보고 홍빈이 물러섰을 때에는 이미 돌벽이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후였다.

 

-콰가가각!

 

이윽고 바닥에서 무언가 맞물리는 듯한 마찰음이 났다. 거친 단면을 비비며 몸을 깎아대는 소음이 동굴 안을 시끄럽게 울려댐과 동시에, 돌이 한꺼풀 부서져내린 동굴 벽에 입구가 생겨나고 있었다.

 

입구 사이로 푸르게 발광하는 빛이 은은히 비춰져 나온다. 홍빈은 세차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무언가 자신의 의지 너머에서 속삭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곳이라고.

 

한편 문을 열고 나서도 켄은 계시의 방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못박힌 채 서 있었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 위로 자줏빛 눈동자가 생각에 잠겨 허공을 본다.

계시는 해석을 열어둔 암시이고 의미는 행하는 자에 의해 바뀌므로 섣부른 판단은 금해야한다. 하지만. 켄은 뒷골을 서느렇게 훑고 지나가는 예감에 기어이 굴복하고 말았다.

 

 

"여기까지."

 

 

켄은 인간 하나와 반쪽짜리 하나를 입구에 남겨두고 발을 물렸다.

 

 

"그 안에서 원하는 걸 찾도록."

"라지엘님?"

"필요하거든 구하거라. 그럼 누구든 응답하겠지."

 

 

켄은 그 말을 끝으로 날개를 펼쳐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떨어진 에메랄드빛 깃털만 그가 머문 증거로 남긴 채.

 

홍빈과 엔은 당황스러운 낯으로 마주보다가, 입을 벌린 어둠 안으로 조심스런 발걸음을 떼었다. 5천년을 봉해져있던 비밀의 음습한 뱃속으로.

 

"와..."

 

계시의 방에 들어선 홍빈이 탄성을 흘렸다. 불빛 하나 없는 조그마한 벽 가득 문자가 새겨져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그 글자들은 정교하고 유려한 필체로 거친 암벽의 벽면을 천장까지 빈틈없이 둘러 성인 남자 둘만 들어와도 꽉 차는 비좁은 공간 전체에 빼곡했다.

 

엔은 그 기록을 보자마자 알아차리고 말았다.

그의 몸에는 천사의 피가 흐른다. 그는 인간의 땅에서 벌어진 성전 후 태어난 천사의 혼혈들 중 살아남은 몇 안되는 자들 중 하나였다. 그 피가 입을 열었다. 처음 사도에게서 표식을 보았을 때와 같은 선연한 본능의 외침이었다. 그는 저 문자들을 알았다. 누군가 펜을 들고 머릿속에 적어내리듯 그는 생전 처음 보는 저 글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밀려드는 비참함에 눈꼬리를 떨었다.

 

 

"빛의 언어입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엔이 말했다. 홍빈은 조심스레 벽에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들을 더듬다가 그를 돌아보았다. 푸른 안료의 빛에 비친 사제의 얼굴은 어딘가 평소와 달랐다. 그에게 익숙히 보이던 침착함이 아니었다. 푸르게 진 그늘에서 홍빈은 불안과 혼란의 냄새를 맡았다.

 

 

"사제님. 제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도의 부드러운 위로는 길 위의 돌멩이를 차듯 엔의 자존심을 치고 지나간다. 엔은 익숙한 모멸감에 입술을 감물었다. 그는 모른다. 모르니 쉽게 말할 수 있고, 그러니 자신도 쉽디 쉽게 상처받는다.

자신의 피는 그에게 수치스런 자긍심이었다. 그런 양날의 검을 품고 평생을 저 자신을 찌르며 살아온 그에게 진실은 입밖에 내어 소용 없는 것 된 지 오래였지만, 사도의 말은 자체로 신의 종들에게는 경전이나 다름 없는 의미를 지닌다. 엔은 순종하는 자세로 입을 열었다.

 

 

"여기에서 경전을 쓴 또 다른 사도는, 자신의 피와 살로 글을 새긴 것 같습니다. 이 푸른 자국들 모두, 천사의 피입니다."

 

 

섬짓한 홍빈이 벽에서 물러섰다. 그러다 발 밑에 무언가 채인다는 것을 깨닫고 내려보았다가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거친 돌바닥에는 사람의 백골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굴러다니고 있었다.

엔은 슬픈 눈으로 몸을 굽혀 사방에 흩어진 뼈들을 조심스런 손길로 한 데 모았다. 사방을 푸르게 밝힌 핏빛을 띄고 예언자의 뼈는 생전 그의 절규만큼이나 거칠었다.

 

 

"천사의 언어를 알고 천사의 피와 살을 가졌으나, 인간의 몸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존재이니. 저와 같은 반천사였을 겁니다."

 

 

홍빈은 그 말에 머리를 맞은 기분이 되어 엔을 바라보았다. 까맣게 몰랐다. 엔은 겉으로 보이는 특징 하나 없이 그저 인간으로만 보였다. 천족 특유의 금색 눈이나, 날개의 흔적 같은 것 하나 없었다.

 

그제서야 놓쳤던 것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가 제 살을 찔러 피를 묻혀 새긴 마지막 경전, 신열에 들떠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생살을 파헤쳐가며 이것을 완성한 후 그는 이 곳에 갇혔을 것이다.

벽의 모서리마다 참혹한 손톱자국이 선명했다. 바위를 살덩이로 갈고 갈아 파는 것보다 닳는게 더 잔혹했을 그 곳은 피 거듭 묻은 자국만큼 유난히 파랗고 밝았다. 반천사의 예언자는 완성된 경전과 함께 이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그러다 홍빈은 그 암벽 구석에서 무언가 다른 기록을 발견하고 엔에게 손짓했다.

벽면과 천장에 경건한 글자로 적힌 13의 서와는 사뭇 다른 필체로 적힌 그것은, 숨이 멎을 때 까지 그것을 지키려는 듯 위를 가리고 있는 예언자의 유골에 반쯤 덮여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지만 홍빈이 그것 위로 손을 쓸자 기다렸다는 듯 뼈들은 순식간에 가루가 되어 그 밑에 고인 글자들을 향해 모여들었다.

인간의 뼛가루가 내는 희미한 푸른색을 어른거리며, 누구도 보지 못했던 진정한 비전이 그들 앞에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엔은 눈물을 흘리며 그 잔혹한 흔적을 읽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내리보는 신의 눈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정황의 기록이었다. 반쪽짜리 천사의 몸을 붓삼아 신이 담아둔 진실, 훗날 때를 기다리며 그와 함께 생매장한 비밀.

 

 

[가장 큰 빛에게 가장 어두운 곳으로 가 가장 귀한 것으로 남으라 하시매]

[사명을 다하고자 샛별이 가장 어둔 곳을 찾아 나설때에]

[어둠이 삭일의 한밤중 찾아와 그에게 속삭이더라]

[샛별이여 당신이 찾는 곳을 내가 아노라 하니]

[그가 의심치 아니하고 따라 길을 나서매]

[삼켜지고 나서야 샛별은 제가 어둠의 뱃속임을 알더라]

 

[가장 큰 어둠은 그의 영혼을 삼키고]

[육신은 다 삼키지 못하여 봉하여 두니]

[그의 뼈와 날개와 관만이 제단에 남겨지도다]

 

[성배는 가장 큰 빛의 머리 위에서야 매오로시 빛날 것이며]

[그의 피만이 제단을 흘러 씻겨 정결케 하니 가로되]

[가장 높은 곳의 대지에 빛과 어둠이 있나니]

[시작과 끝이 모두 그 곳에 있으리라]

 

 

사제는 무정한 신의 증거 위를 믿기지 않는 듯 덜덜 떨리는 손으로 더듬거렸다. 흐른 그의 눈물이 점점히 글자 위로 고였다. 눈물에 얼룩진 기록은 보석처럼 어른어른 빛나고, 그 서글픈 빛을 보며 홍빈은 차마 함께 울지 못하고 기도했다.

거친 바위바닥은 차고 아팠다. 제 무게만으로도 아픈 이 곳에서 소명에 짓눌려 죽어갔을 영혼을 위해, 그는 손을 맞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기를, 신이 그에게 이어주신 사명을 해낼 때에 필요한 희생은 그 자신에게서 마무리할 수 있기를.

 

 

기도히는 사도의 옆에서 사제는 멍한 눈으로 이젠 유골도 남지 않은 그의 흔적을 거듭해서 쓸고 또 쓸고 있었다.

그를 버티게 한 것은 신이었다. 그의 존재는 천사에게는 수치였고, 악마에게는 만만한 장난감이었고, 인간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모두에게 배척당하며 어디에도 섞이지 못했어도 그가 끝내 제 자신을 보듬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세상에 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피에 신의 흔적이 흐른다는 누구도 부정못할 증거 때문이었다.

아무리 기도해도 신은 그에게 응답하지 않았다. 꿈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껏 그것을 자신의 신앙이 미욱한 탓이라 여겼다. 어둠을 비워내고 유리처럼 맑은 영혼이 되면 닿아주시리라 여겼다.

 

그러나 신마저 다를 바 없었다.

사제의 손톱이 거친 바닥을 긁었다. 돌부리에 짓이겨진 손 끝에서 피가 배어나와 바위 위를 희게 적신다. 푸르른 피. 어둠 속에서 그의 피는 발광한다. 제 태어난 곳이 빛임을 증명하듯 발악한다.

 

이 반쪽짜리 신성력, 제멋대로 나눠준 이 힘 때문이었다.

13의 서를 쓴 예언자 또한 반쪽짜리였기 때문에 이용당한 것이다. 그의 힘을 미약하게나마 발현하여 도구로 쓰이고 인멸할 수 있는 증거였기 때문에.

 

엔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원인은 이 미욱한 버러지같은 자신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멋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자에게 있었다.

 

그가 일 평생 믿은 교리대로 가장 어두운 곳을 찾아 비추는 것이 신이라면, 응당 계시를 받는 것은- 신의 손이 닿은 것은 저 기도문 한글자 모르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이어야 맞다.

그 자신이야말로, 신이 창조해두고 방임하여 어디에도 융화되지 못한 채 멸시당하는 자신이야말로, 그의 무책임의 방증인 자신이야말로!! 그의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가장 깊은 곳으로 물이 흐르듯 그것이 당연한 이치여야 했다. 그가 자신을 조금이라도 불쌍히 여긴다면, 그의 손으로 빚은 것들에게 조금이나마 지비라는 것이 남아있다면 마땅히 그리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신은 끝내 단 한 번 굽어보지 않았다.

 

그를 응시하던 라지엘의 시선이 손에 잡힐듯 선명히 떠오른다. 벌레가 바르작대는 것을 관찰하는 눈.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카마엘이 떠오른다. 존재조차 인정하기 싫다는 아집이 가득한 거부. 푸른 피를 흘리는 그를 괴물취급하던 수많은 인간들, 인간이 아니기에 꿈조차 꾸지 못했던 새카만 밤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원망과 분노의 화살이 향할 과녘이 비로소 정해졌다.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 짓이겨졌던 조롱과 멸시의 얼굴을 하고 머릿속에서 너울너울 춤춰댔다. 눈 앞을 흐리는 것이 눈물인지 분노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어디선가 유황냄새가 일어 싸하게 그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어둠에 눈이 멀어버린 사제는 알아채지 못했다.

 

그 때였다.

 

 

-우르릉.

 

공기가 진동했다. 홍빈이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꿇어앉은 그를 중심으로 푸른 원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낯익은 음성이 천둥처럼 꽝꽝 울리고 있었다. 그에게 계시를 전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가장 큰 빛의 영광된 관은 어둠과 함께 남을지니]

[그의 머리 위로 샛별은 뜨리라]

 

 

-꽈르르르릉!!!

 

발 밑이 흔들리자 홍빈은 반사적으로 그의 옆에 있던 사제를 붙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단단히 받치고 있던 돌바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며 그들은 빛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들어갔다.

 

파스슥.

 

그들을 휘감았던 신의 불길은 조그맣게 남아 바닥을 태우다가 이내 사그러든다. 암굴 위 까맣게 불탄 자국만 남긴채, 둘은 그 곳에서 사라져버렸다.

 

 

 

 

눈을 떴을 때 홍빈은 그의 기도가 응답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떨어진 관짝처럼 을씨년스러운 밀실의 가운데에 그가 그토록 찾던 것이 떡하니 놓여있었던 것이다. 온통 검은 제단 위에 놓인 그것은 흰 뼈로 덩쿨처럼 얽어진 왕관이었다.

 

 

"사제님. 이것 보세요. 관이에요!!"

 

 

갑작스런 이동에 대비하지 못해 온 몸으로 추락한 엔이 정신을 못차리고 고개를 연신 털었다. 시야가 어질거리고 머리가 핑핑 돌았다. 옆에서 사도가 손에 뭔가 들고 무어라고 신나게 떠들어댔지만, 이 곳에 떨어졌을 때부터 뇌를 쪼갤듯 울리는 이명에 전혀 들을 수 없었다.

 

 

"응답하셨어요!! 라지엘님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응답 하셨어요!! 이 싸움을 끝낼 수 있게 성배를 달라 기도 드렸는데. 이게 그 관이 틀림 없어요! 머리뼈로 성배를 들라는 게 이걸 말했나봐요!! 이제 이걸 제단으로 가져가서-"

 

 

우르르릉.

 

다시한번 공기가 진동했다. 홍빈이 말을 멈추고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지만 아까같은 빛의 원은 보이지 않았다. 추락의 여파로 환청이라도 들었나 할 때, 이번에는 공간이 흔들렸다.

 

 

"어....?"

 

 

홍빈은 어디가 다친 것인지 영 몸을 추스리지 못하는 사제를 부축하며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지만 헛수고였다. 밀실은 창도 입구도 길도 없었다. 마치 관을 두고 봉한 것처럼 사방이 모조리 막혀있었다.

도망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에 눈 앞이 까매질 때에, 문득 어딘가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는 발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홍빈은 그 것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몸을 낮춰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작은 웅얼거림처럼 들리던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는듯 차츰 또렷하고 선명해졌다.

 

 

-.....치킨......

 

 

...치킨 뭐라고? 홍빈이 바닥에 귀를 댈 기세로 붙었을 때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 쩌렁 공간을 울렸다.

 

 

-당장 그거 놓으라고, 이 닭대가리야!!!!!!

 

 

꽈광!!

 

그리고 이번엔 발 밑이 무너져내렸다.

 

 

 

 

 

 

"이 씨발놈이 지금 뭘 건드려!!!"

 

벨리알이 입에서 불이라도 뿜을 기세로 소리를 질러댔다. 카마엘이 불칼을 휘두르다가 기어코 샹들리에를 치고 말았던 것이다. 넝마조각이 된 그의 최애작을 넋빠진 얼굴로 보던 라비가 이를 까드득 사리물었다.

 

저 것을 만들기 위해 몇년이 걸렸던가. 그가 한땀 한땀 손수 모은 천사의 깃털과 지옥불에 곱게 말린 인간의 해골과 정성스레 조각한 악마의 뿔... 무엇 하나 손길 안간 것이 없거늘... 저 뇌까지 근육으로 된 쌈질밖에 모르는 군인새끼가 저걸 .... 꼭 지처럼 무식한 광선검으로.....

 

그리고 '저것'은, 건드려서는 안된다. 그는 단지 그럴싸한 장식품의 용도로 제 성의 정중앙에 저 것을 둔 게 아니다. 그가 손수 세운 저것은 제 손으로 살해한 무언가를 화려하게 기념하는 추모비이자, 신을 향해 치켜든 장엄한 가운뎃손가락이자, 봉인이었다.

 

마왕은 화가 한계까지 치밀어 되려 차분해진 손놀림으로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완연히 드러난 손 끝에서 어둠을 깎아 만든듯 날카로운 손톱들이 위협적으로 까닥이고 있었다.

 

 

"이... 예술도 모르는... 무식한 새끼가.... 내 작품을...."

"하하하하하하!!!!"

 

 

레오는 그 모양을 보고 아주 속이 시원하다는 듯 몸을 젖혀가며 폭소했다. 그러다 장난스런 얼굴로 덜렁거리며 내려온 샹들리에의 골조 하나를 손으로 잡았다. 커튼줄 잡듯 의미 없고 가벼운 동작처럼 보였지만, 라비는 그가 그것을 잡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그의 검은 머리마저 일순 희게 보일 정도였다.

카마엘은 입귀를 비틀며 웃었다. 마왕의 악취미는 천계에 소문이 자자했다. 온갖 비유와 상징으로 비꼬고 조롱하기 좋아해서 말 한마디 그냥 하는 법 없는 저 치가 빌딩 정 가운데에 이런 해괴한 것을 그냥 놓아두었을 리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그거 놔라."

"말? 우리가 말이 통하는 사이였나?"

"아오!! 씨발 진짜. 내가 차라리 치킨이랑 대화를 하고 말지. 당장 그거 놓으라고, 이 닭대가리야!!!!!"

 

 

벨리알의 처절한 절규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카마엘은 들은 체도 않고 손에 쥔 것을 잡은 것도 모자라 여섯장의 날개를 펼치고는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다. 마왕의 핸드메이드 샹들리에는 대천사의 권능앞에서 맥을 못추고 시든 나뭇가지처럼 천장에서 뜯어졌다.

 

빠가가각!

 

샹들리에가 뼈를 보이며 늘어졌다. 그것을 지탱하던 육중한 쇠사슬이 건물 에서 통째로 뜯어져나오며 천정을 허옇게 부숴놓았다. 팔을 잘라놓으려 달려드는 벨리알을 피해 카마엘이 그것을 손에서 놓았을 때는 이미 그 거대하고 흉측한 구조물은 로비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발목을 잘라놓을 기세로 라비가 뻗은 그림자에서 날개를 휘둘러 벗어난 레오가 신성력을 담은 검격을 금이 간 천장을 향해 후려쳤다. 확인사살이었다.

 

꽈광!!

 

천장이 무너져내렸다.

 

 

"하하하. 이거야 원."

 

봉인이 아주 좆창이 났다. 마왕은 초조함을 감추려 실소하며 고개를 모로 비틀었다. 그 잔해와 함께 떨어지는 버러지 두마리를 보며 라비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으나 눈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그 둘 중 낯익은 버러지가 들고있는 것을 발견하자 눈초리는 한층 더 흉악해졌다.

 

 

"이 바퀴벌레들이 언제 내 집 안으로 기어들어왔담."

 

 

홍빈은 떨어지는 그를 발견한 카마엘의 손에 낚여 바닥에 무사히 착지할 때 까지도 한 팔로 끌어안은 사제의 몸과 손에 움켜쥔 관을 놓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태워버릴듯한 눈으로 응시하며 벨리알이 한쪽 눈썹을 쓱 치떴다.

 

 

"손버릇도 나쁜 바퀴벌레네. 남의 집 금고에 있는 걸 함부로 갖고 나오면 안되지."

"제가 말했죠. 결국에는-"

 

 

맹랑한 버러지가 급기야 마왕의 말을 받아쳤다.

 

 

"결국에는 당신 것이 되지 못할 거라고."

 

 

라비의 눈이 일순 무감해졌다. 그가 마치 무기질처럼 느껴진 순간 인영이 사라졌다. 그리고 홍빈의 그림자에서 솟구친 검은 칼날이 그의 몸을 꿰뚫기 직전, 간발의 차로 레오가 그를 낚아채어 제 뒤에 숨겼다.

 

까강!

 

뒤이어 펼쳐진 대천사의 결계가 마왕의 기운을 가까스로 막았다. 허나 앞을 막아선 것이 뭐든간에 마왕의 진노를 온전히 받아내기는 버거워 보였다. 힘겨운듯 요동치는 반투명의 결계 너머로 그림자와 함께 솟아난 마왕이 날카롭게 자라난 손톱을 치켜세웠다. 새빨간 동공이 용암처럼 이글댔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벌레새끼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그가 결계 안으로 손을 콰득 박아넣었다. 뱃가죽을 뚫듯 박힌 마왕의 손톱이 홍빈을 막아선 레오의 눈동자를 손가락 한마디만큼 남겨두고 막혔다. 분노로 갈라진 음성은 천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깟 눈깔 좀 달고 있다고 네가 신이라도 된 줄 아느냐?"

 

 

까드드드득. 라비가 힘을 주어 손을 우그러트렸다. 마왕의 손아귀 안에서 천사의 결계가 뻣뻣한 종잇장처럼 구겨진다. 그리고 마왕이 그것을 손에 쥐고 잡아뜯기 직전, 레오가 온 힘을 다해 홍빈을 날려보냈다.

곧바로 그림자로 몸을 바꿔 쫓으려 하는 라비의 앞을 여섯개의 날개가 가로막았다. 기어코 내어주지 않겠다는 레오를 보며 라비가 성가시다는 듯 으르렁댔다.

 

 

"눈깔 하나 희번득 하다고 싸고 도는 꼴이란. 말해봐, 가장 고결한 방패여. 저 벌레에게 진실로 네 몸을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어?"

"내 판단은 그분의 뜻 앞에 중요치 않다."

"물어본 내가 병신이지."

 

 

마왕의 인내심은 이제 한계였다. 풀려서는 안될 봉인이 저 벌레 때문에 깨졌다. 그가 봉인을 여기에 둔 것은 그의 발 밑에 두고 지키기 위함이었지 벌레 밥이나 하라고 둔 건 아니었다.

이대로 '그것'을 넘길 수는 없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라비가 굳은 얼굴로 한쪽 팔을 치켜들었다.

 

구우우욱, 구우욱.

 

질펀히 고인 악마의 잿더미에서 또 다른 어둠들이 솟아났다.

주인의 부름에 응해 지옥에서 올라온 것들은 늑대를 닮은 길다란 주둥이를 공중에 쳐들고 열심히 냄새를 맡았다. 더운 피의 냄새, 유황불의 잿더미에 기생하는 악령인 데몬들이 죽고 못사는 그 체취를 찾아 그것들은 본능밖에 남지 않은 머리를 옴질거리며 그 곳에 있는 유일한 인간을 향해 차츰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욱 찢어진 아가리에서 흘리는 침이 바닥에 둑둑 떨어져 매캐한 연기와 함께 대리석을 녹였다.

 

이윽고 그들의 주인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것을 신호로 데몬들은 개떼처럼 홍빈을 향해 달려들었다. 킬킬킬, 마왕의 웃음소리를 배경으로 독을 뿜는 발톱들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따가닥대며 건물을 울렸다.

 

 

"비겁하게...!"

"비이겁? 니들한테 들을 소린 아닌 것 같은데?"

 

 

개미 뒷다리를 잡아뜯는 듯한 눈으로 홍빈을 구경하던 라비가 레오의 비난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몰아쳐오는 대천사의 검을 검은 로드를 소환해 모조리 받아쳤다. 한 번씩 공격이 맞부딪힐 때마다 내뱉는 신랄한 어조에는 뼈마디가 가시처럼 날카롭게 돋았다.

 

 

"묻지. 마지막 경전을 감춘게 나였나? 응? 고결한 척 하려 똥내나는 속을 파묻은 게 누구였느냔 말이야. 그것도 제 손에 묻히기 싫어서 마지막까지 저런 똥파리들이나 이용해먹는 주제에. 비겁?"

까강!

 

"어느게 더 비겁하다 생각하나? 탐하여 취하는 것, 욕망도 제대로 못해 비틀려 멸시하는 것. 어느게 더 비겁하냐고! 말해봐!!"

 

깡!!

 

"그것도 신의 뜻인가? 제 동족을 생매장한 것도 그 대단한 분의 뜻이야?! 그래?!!!"

 

콰쾅!

 

 

머리 위에서 마왕의 어둠과 천사의 광휘가 하늘을 가를 기세로 충돌하고 있었다. 이따금씩 그 힘의 파편이 바닥으로 튀길 때마다 발 밑이 파도처럼 요동쳤다. 그 가운데 휘말리지 않으려 애쓰며 홍빈은 손에 관을 쥔 채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사실 이 관을 손에 쥐자 마자 그가 해야 할 일은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었다. 그에게 새겨진 표식이 나침반처럼 그를 인도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로비 중앙의 분수대였다.

 

로비에 길게 드리운 기둥의 그림자마다 불룩불룩 알이 맺히고, 그것을 찢어발기며 악마들이 튀어나왔다. 산성의 악취가 진동하는 주둥이가 발치에서 헥헥 더운 김을 뱉으며 그를 쫓았다. 홍빈은 자신을 먹으려 돌진하는 그것들을 보며 기도했다. 부디 지켜주소서. 그러자 그가 발 딛는 자리마다 찍히는 푸른 발자국이 그 곳에 몸 닿는 악마들을 녹이고, 팔의 표식에서 뿜어져나온 흰 빛이 앞을 가로막는 이리떼를 태웠다.

끔찍한 소리를 내며 부식하는 그것들의 재 사이로 사도의 눈이 희게 빛났다. 팔을 뒤덮은 올가미같은 표식은 혈관처럼 흘러 손에 들린 관을 향해 빛을 냈다.

그의 뒤로 높게 튀어오른 악령 하나가 홍빈의 목덜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낸 순간, 관을 움켜쥔 그의 손이 분수대 제일 위에 닿았다.

 

-쩌엉!

 

공기가 산산조각나는 소리가 나며 관이 폭발했다.

 

경악으로 흡뜬 홍빈의 눈동자에 흩날리는 관의 파편들이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그것들은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처럼 꺼멓게 오염된 분수대 위를 덮으며 쏟아져 내리다가 차츰 군집을 이뤄 그 위로 모여들었다.

잠시 날파리들처럼 웅성이던 그것들은 곧 맹렬한 기세로 벨리알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

 

 

카마엘이 든 불의 검을 쪼갤 기세로 로드를 내려치던 라비가 그를 발견하고 날개를 펼쳤다.

 

까가각!!

 

요란스런 마찰음을 내며 마왕의 거대한 골익骨翼이 세차게 퍼덕였으나 그것이 일으킨 돌풍에 끄떡도 없이 파편들은 날벌레처럼 집요하게 파고들어 마침내 그를 덮쳤다. 경악에 치뜬 눈을 깜박일 새도 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곧 커다란 빛이 공간을 삼켰다.

 

 

잦아드는 빛 속에서 홍빈은 눈을 가렸던 팔을 내려 조심스레 시야를 내다보았다. 한 때 벨리알의 몸이었던 육신이 눈이 멀듯한 광휘를 두르고 강림하고 있었다.

 

 

라비가 눈을 떴다. 그것은 더이상 짐승의 눈이 아니었다.

새벽을 밝히는 가장 큰 빛, 샛별의 눈동자였다.

 

 

 

 

4. 가장 큰 빛 The Lucifer

 

 

 

 

찬란한 황금의 눈동자가 새벽을 비추는 별처럼 떴다. 어둠을 밝히는 가장 첫번째의 별, 루시퍼.

인간의 사도는 눈물을 흘리며 악마의 잿더미 위로 이마를 대고 엎드렸다. 그 눈동자의 색을 닮아 빛나는 다섯쌍의 날개는 현신만으로도 영광된 찬미요 신성한 간증이었다.

벨리알은 그를 속여 그의 영혼을 탐욕스런 뱃속으로 삼키는 것은 성공했으나 끝내는 제 것으로 녹여 취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기어이 오랜 공백 후, 가장 귀한 것으로 남으라는 최초의 사명을 마친 첫번째의 빛은 저를 가두고 있던 첫번째의 어둠의 몸을 빼앗아 당당히 바로섰다. 빛을 섬기는 자라면 감격에 눈물을 줄줄 흘릴만한 광경임에도 정작 빛의 권속인 카마엘은 사뭇 다른 표정을 하고있었다.

냉엄한 은빛의 갑주같은 얼굴에 드러난 것은 절대 반가움은 아니었다.

"형제여."

그런 카마엘에게 루시퍼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레오에게 흐르는 희미한 이질감을 알아채서인지 입꼬리에는 쓴웃음이 묻어있었다. 익숙해보이는 체념이었다.

"이리 다시 보는군."

"...."

" 낯선 모습이겠지만, 이해해줘. 내게 남은 선택지가 이것밖엔 없었으니."

라비가 씁쓸한 눈으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까만 발톱이 창날처럼 솟은 손은 거친 뼈마디마다 흉포했다.

벨리알과 같은 모습을 한 루시퍼는 눈을 들어 참상을 내려다보았다. 폐허가 된 로비를 떠나 모든 수평선과 모든 지평선을 내다보는 눈이 화마로 상처입은 대지를 구비구비 돌았다. 이어 황금의 눈동자가 안타까움으로 흐려졌을 때 카마엘이 나지막히 말했다.

"그게 정말 더는 없는 선택지였나?"

의아한 눈으로 루시퍼가 형제를 내려보았다. 같은 어미에게로부터 빚어진 권속은 뿌리가 같다고는 하나 그와 자신은 예전부터 닮은 구석 하나 없었다. 권능의 부속임을 증명하는 눈동자 색만 유일하게 같을 뿐 그 안에 담긴 눈빛은 노을과 여명만큼 달랐다.

카마엘은 제가 갑옷처럼 두르고 있던 분노의 날붙이를 떼어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차마 겨누지는 못하고 손에 꼭 든 채 목적없는 책망을 늘어놓았다.

"항상 너는 그랬지.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쓸데 없는 것들만 동경하며 그리워하곤 했어."

탄생의 등뼈를 이어 얽은 루시퍼의 관은 오직 가장 큰 빛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저 온 하늘을 다 덮을 다섯쌍의 황금빛 날개 또한 그이기에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온 몸에 창조자의 편애를 둘둘 두르고도 루시퍼는 하잘것 없는 것들을 사랑하여 안타까워 하는 것을 즐겼다. 레오가 보기에는 그랬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저 사랑과 권세를 누리는 것이 자신이었다면, 그는 그리 쉽게는 먹혀주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하여 레오는 오만히 단언했다.

"아니야, 형제여. 너는 패배하여 선택한게 아니라, 도망쳤던 거야."

"......"

"네가 짐이라고 여겼던 모든 책임과 율법으로부터."

속이 사납게 들끓었다. 불씨가 피어난 질시는 바싹 메마른 초조와 불안을 짚단삼아 금세 몸집을 키워서, 열기에 발을 다 태우고 나서는 눈앞까지 다 가려버릴 정도로 어른거리고 있었다.

레오가 손에 들고 있던 불의 검을 고쳐잡았다. 그 주인의 마음만큼 요동치는 불길이 너울너울 건너편의 루시퍼를 투영했다. 라비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순간이 올 것을 예감한 듯이.

그리고 그가 눈을 감았다 뜰 찰나, 카마엘의 검이 루시퍼의 머리 위로 쪼갤듯 내리꽂혔다.

-쩡!

루시퍼가 손에 들고있던 벨리알의 로드로 그것을 막았다. 그 모습을 이글거리는 질시 사이로 보며 레오가 삐뚤게 웃었다.

 

 

"나는 널 인정할 수 없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 악마의 뱃속으로.

가장 큰 빛의 광휘에 압도되어 무릎을 꿇었던 홍빈은 막 플려난 그가 뿜는 힘이 조금 소강에 이르고 나서야 겨우 몸을 다시 일으킬 수 있었다. 계시가 이끄는 대로 머리뼈를 찾아 가장 큰 빛을 소환하는 것에 성공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는 폐허로 변한 로비 구석 피투성이가 되어 처박혀있는 엔을 발견하고는 혼비백산해서 그에게로 달려갔다.

 

 

"사제님!!!!"

 

그의 몰골은 처참했다. 추락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팔은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있었고, 루시퍼의 빛에 피가 감응해 한쪽 등에서만 튀어나오다가 만 날개뼈가 허옇게 뒤틀린 채 넝마조각이 된 사제복 뒤로 커다란 피웅덩이를 그리고 있었다. 악령들이 물어뜯었는지 다리도 온통 피투성이였다.

어찌 손 쓸 수가 없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홍빈은 엔의 목덜미부터 짚었다. 다행히 아직 맥은 뛰는 중이었다.

줄줄 눈물을 흘리며 그는 사제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 때 갑자기 엔이 눈을 반짝 떴다. 피와 상처에 짓눌린 까만 눈동자가 홍빈을 바라본다.

 

 

"사도님..."

"정신이 드세요? 말씀하지 마세요, 몸부터 편히 누이시고.."

"기도... 기도해주세요."

 

 

그 말에 홍빈은 말문이 턱 막혀 울음만 입술새로 씹어삼켰다. 뜨거운 그의 눈물로 볼을 적시며 엔이 입을 달싹였다.

 

 

"너무....아파요..... 삶은 내겐 항상 너무.... 아팠어요."

"......."

"나를 위해... 기도해주세요."

"...네."

"나를 이 고, 쿨럭! 고통에서, 구해주세요...."

 

 

거센 악력이 사도의 손을 옥죄며 마주잡아왔다. 홍빈은 손톱을 세워 제 살을 파고드는 그 힘이 살고자하는 절박함 때문이라 여겼다.

사도는 안타까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는 추운듯 웅크려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기 시작한 그의 등을 덮어안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붉은 근육을 찢고 혈관과 힘줄을 늘이며 튀어나온, 만들다가 만 채 굳어버린 반쪽짜리 날개 위로 기도를 담은 더은 숨이 흩어진다. 부디 평안을. 부디 불쌍히 여기사, 이 분이 바라는 고통에서의 해방을 주소서.

 

 

"흐.......아흐흑......"

 

 

기도하는 사도의 품에 안겨 반쪽짜리 천사는 몸을 떨며 신음했다. 흐느낌같은 웃음소리가 입으로 자꾸 비어져나와 참기가 힘들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명이 멈추지 않았다.

 

까드드득.

 

그의 이마 중앙으로 까만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꽈광!

카마엘이 쏟아내는 빛의 검기가 온 사방에 줄기줄기 흩뿌려졌다. 조각을 내겠다는 듯 방사형으로 뻗어오는 것들을 날개 한번 휘둘러 순순히 받아내주며 루시퍼는 한 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대답받지 못한 카마엘은 더 날뛰어댔다.

그리고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몸을 물리던 라비가 벽을 등졌을 때에, 기다렸다는 듯 레오의 창이 돌진해왔다.

콰득!

라비의 목덜미를 간발의 차로 빗겨간 곳에 불칼이 박혔다. 레오는 거칠게 그것을 잡아빼려 했으나 창대를 단단히 쥔 루시퍼에게 저지당했다. 성난 레오가 온 날개를 퍼덕이며 끌어당겼으나 고작 그가 한 손으로 잡고 있는 창대는 못박힌 듯 벽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저 스스로도 모르는 불안감에 내몰린 레오가 성마르게 날개를 퍼덕거렸다. 대천사의 흰 깃이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창대에 꽂힌게 저인양 퍼드덕대며 레오가 피 토하듯 소리쳤다.

 

"너는... 자격이 없어!"

"....."

"보아라. 네가 네 발로 사탄의 손아귀로 기어들어가는 바람에 벌어진 전쟁을 보란 말이다. 이 재 밖에 남지 않은 폐허 위에 네가 나타난다고 무어가 달라지나?"

"....."

"벨리알의 뱃속에서는 들리지 않았나? 천사들이 악마의 뿔에 꿰뚫려 죽어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느냐고!"

"....."

"벨리알이 그 많은 무고한 영혼을 먹어삼키고 기어이 인간의 땅에까지 불을 지르는 동안! 수 많은 영들을 제물삼아 제 뱃속을 채우는 동안!"

"......"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넌 무얼 했어!"

 

검보다 날카로운 책망에 루시퍼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흔들리는 눈동자에 레오가 가당찮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속죄해!! 네 피로 제단을 적시고 네 스스로 머리뼈를 파내 성배를 들어! 목숨으로 참회하란 말이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과 함께 레오가 불칼을 잡아당길 때, 처참한 빛이 폭발했다.

수명이 다한 촛불이 스러지듯 한 순간에 명멸한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레오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들고있던 불의 칼이 제 팔을 태우고 있었다. 신성력에 타 죽는 악마들처럼.

 

 

".....!!!"

"...형제여."

 

 

새카맣게 타버린 손을 감싸쥐고 혼란스러워하는 레오에게 라비가 심연처럼 가라앉은 눈으로 선고했다.

 

 

"너는 더이상 권능을 다룰 수 없다."

 

파스스슥.

 

그의 머리칼을 닮아 정갈한 은빛을 머금고 빛나던 날개깃들이 낙옆처럼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퍼득여도 더이상 날지 못하는 날개를 달고 카마엘이 추락했다. 허공을 향해 뻗는 팔은 온통 타락의 색으로 그을려 있었다.

 

그때 폐허 한구석에서 비명소리가 찢어졌다.

 

 

"아아악!!"

 

 

후흐, 후우욱. 흐하하학. 날뛰는 심장을 감당못해 엔이 널뛰는 호흡으로 웃었다. 사제복 소매 아래로 길게 자라난 팔은 더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질긴 피복이 덮인 파충류의 팔이 흉악한 손톱 끝에 홍빈의 목을 옥죈채 허공에 대롱대롱 들어올렸다. 홍빈은 양 손으로 그 발톱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발 끝은 허공만 세차게 저을 뿐이었다.

날개를 접고서 그에게로 다가오는 라비를 보며 벨리알은 입맛을 다셨다. 끝이 갈라진 새빨간 혀가 입술을 훑는다. 까맣게 반짝이던 사제의 눈은 어느새 뻘건 핏빛이었다.

급한대로 반쪽짜리에게 들어오긴 했지만 이것으론 영 부족하다. 그나마 썩어도 준치라고, 신의 피가 흐르던 몸이라 그냥저냥 버러지보다야 나은 수준이다. 바르작대는 홍빈의 목을 바투쥐며 엔이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린다. 가장 큰 어둠이 육신을 차지했음을 나타내는 뿔이 여봐란듯 허공을 이리저리 가른다. 이어 지그시 감았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가느다란 동공이 루시퍼를 찔러죽일듯 쏘아보았다.

 

 

"야. 내 몸 내놔."

"그를 풀어줘."

"내가 왜? 누구때문에 이모양 이 꼴이 났는데. 어디서 굴러먹은지 모를 빈대새끼가 내 66층짜리 초가삼간을 다 태웠잖아! 이거 정당방위야. 난 지금 얘를 예순여섯번 죽여도 모자라거든?"

 

엔이 모가지를 잡은 손을 짤짤 흔들자 그가 괴로운듯 신음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소멸시킬 듯 날카로운 기세로 다가오던 루시퍼는 문득 벨리알이 차지한 육신을 알아보고 발을 멈칫 했다. 벨리알은 귀신같이 그의 혼란을 알아채고 킬킬거렸다.

 

 

"너, 알아봤구나?"

"-설마."

"맞아! 가장 보잘것 없는 것을 사랑한 가장 큰 빛이여. 이게 바로 네가 만든 작품이란다."

 

 

벨리알이 여봐란 듯 라비를 향해 가슴을 폈다.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가 엔의 몸을 훑었다. 모든 진실을 보는 샛별의 눈동자에 타락한 사제의 몸에 한때 흘렀던 푸른 피의 자국이 선연히 펼쳐졌다. 그것은 그가 낳은 비극이었다.

 

 

"어찌... 어찌 이렇게."

"사랑이 죄는 아니지만 말이야, 샛별이여. 무책임은 죄란다. 어때, 네가 자초하고 방치한 죄를 본 소감이?"

 

 

엔이 새빨간 입매를 늘이며 통쾌하게 웃어제꼈다. 라비는 송곳처럼 속을 긁어내리는 괴로움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심장도 피도 없는 악마의 몸은 파충류처럼 차갑다. 그가 온전히 그의 몸일 적에, 그의 심장을 뛰게 했던 유일한 존재. 루시퍼는 사제의 몸에서 그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마침내는 신보다 더 사랑하게 되어 그가 유배를 떠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의 모습이었다.

 

 

"난... 몰랐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는 하지 마. 그건 얘를 두번 죽이는 거고, 네가 저지른 죄악을 간증하는 거니까. 사랑에 눈 먼 천사님."

 

 

클클클. 잇새로 새는 웃음을 참기 어려워 엔이 숨을 겨우 고르며 어깨를 떨었다.

 

 

"하여간에, 재수없는 새끼. 신이랍시고 세상 고결한 척은 다 해대면서. 피 한번 섞였기로서니 제 자식을 내쫓아? 너도 참 미련해. 뒤지러 가라는 말을 그렇게 듣고 억울하지도 않았냐? 반문 한번 안해봤냐고. 내가 인간을 사랑해서 새끼를 친게 죄인가? 신은 분명 서로 사랑하라고 하지 않았나? 뭐 그런 물음들."

 

 

벨리알의 혀를 뜯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루시퍼가 창을 바투쥐었다.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엔이 경박하게 깔깔댔다.

 

 

"했구나! 했어! 하하하하! 그래! 얼마나 억울했겠어. 니가 그 때 자식새끼가 생긴 줄이나 알았겠냐? 죄라고는 종족을 뛰어넘을만큼 미치도록 사랑한 것 밖에 없는데. 근데 그거는 아니? 네 죄를 니 자식도 살았어."

 

 

루시퍼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다시 없을 감로수를 들이마시듯 벨리알이 가장 큰 빛에게서 흘러나오는 비참과 슬픔을 들이켰다. 그것을 온 몸에 적시고 커지는 그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13의 서라고, 들어봤어? 네가 나랑 그 멋진 내 몸 안에서 동거하기 시작한 후에 쓰인 마지막 경전인데. 그걸 쓴 예언자가 잡종이었어. 얘처럼. 아주 최초의 잡종이었지, 너처럼."

"......"

"애가 신열이 올라서 헛소리를 하는데. 걔를 천사들이 잡아다 땅굴속에 가두고 문을 바위로 막았어. 그래서 경전을 어떻게 쓴 줄 알아? 지 살을 파내서 피를 묻혀다가 썼다더라. 종이쪼가리도 없이 바위에다가 빼곡히."

"......."

"그리고 걘 거기서 죽었어. 안타깝게도, 가장 큰 빛씩이나 되는 아비 덕에 인간도 못되는 바람에 그 동굴에 갇혀서 몇백년을 죽지도 못했다네. 그렇게 말라죽었지 뭐. 물 한모금 햇빛 한조각 없는 곳에서 몇백년을 갇혀있다가. 반쪽은 동족이라는 작자들 손데!"

 

 

눈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하지만 라비는 이게 분노인지 슬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천사는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므로.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주제에 사랑을 해서 이런 비극을 만들었다. 루시퍼가 발갛게 물든 눈을 들어 엔을 바라보았다. 제가 만든 업보가 악마의 모습을 한 채, 계시를 손에 쥐고 날뛰는 모습을.

 

 

"그게 쓰여지자마자 천사들이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알아? 인간에게 읽지 못하게 했어. 왜일까?"

"....."

"그 잡종 예언자가 앙큼하게 복수를 했거든."

 

 

엔이 다분히 악마적인 얼굴로 웃었다.

 

 

"성배가 인간의 땅에 있다고 써두는 걸로 말이야."

 

 

루시퍼가 믿을 수 없단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마왕은 어깨를 으쓱하곤 가벼운 어조로 덧붙였다.

 

 

"그게 어딨는지 알게 뭐야. 안그래?"

 

 

그리고 공깃돌 던지듯 홍빈을 허공위로 던져올렸다.

 

 

"뭐가 어딨든 전쟁만 하면 그만인데!!!"

"안돼!!!"

 

 

비명처럼 외치며 루시퍼가 떨어지는 홍빈을 향해 날아들었다. 지금이다. 엔이 입을 찢어 웃었다. 저 멀리서 그의 그림자를 입은 것이 쏜살같이 루시퍼를 향해 날아온다.

 

퍼억!

 

그것은 홍빈을 안아드는 라비의 어깻죽지를 기어이 꿰뚫었다. 어깨에 박힌 한 때 천사의 것이었던 날개뼈 조각을 손으로 잡으며 라비가 고통에 차 신음했다. 벨리알의 그림자를 까맣게 두른 카마엘이 잿빛으로 바랜 눈을 하고 그 날카로운 것을 잡고 있었다.

천사의 푸른 피가 맑디 맑은 크리스탈의 분수대 위로 점점이 떨어진다. 라비는 상처보다 비극에 괴로워하며 열장의 날개를 온전히 펼쳤다.

태양이 쏟아지듯 권능의 광휘가 공간을 메운다. 금방이라도 소멸할 듯 찬란한 빛이었다.

 

퍽!

 

"...어?"

 

자신이 준비한 명장면을 고대하며 손을 비비던 엔이 갑자기 제 몸을 뚫고 나온 것을 보고 멍청하게 눈을 끔벅였다. 심장이 있는 곳에 황금색 천사의 날개깃이 비집고 나와있었다.

 

 

"이익...!"

 

 

저 약아빠진 루시퍼 놈에게 당했다. 뒤늦게 벨리알이 심장이 멎어가는 엔의 몸을 버리고 타락천사 레오의 몸으로 옮겨갔을 때에는 이미 루시퍼가 날개로 그의 양팔을 효시한채 제 몸만큼 커다란 불의 검을 꺼내든 직후였다.

샛별의 권능에 붙들려 오도가도 못하게 된 벨리알이 울부짖었다.

 

 

"안돼. 안돼...! 이럴 순 없어!!!!"

"죄는 어둠으로,"

 

 

루시퍼가 잠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가 가장 큰 광휘를 무기삼아 휘두르고 다니며 입이 닳도록 외웠던, 단죄의 경이었다.

 

 

"...어둠은 재로."

 

 

불의 칼에 닿은 타락천사의 육신은 마왕의 영혼을 담은 채 소리도 없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 그렇게 가장 큰 어둠은 가장 큰 빛에 의해 소멸되었다.

 

서로 죽이려 했던 자들은 모두 스스로 멸하게 될 지어다. 죄는 어둠으로, 어둠은 재로.

 

스러지는 잿더미 위로 루시퍼가 읊는 기도문이 모래처럼 덮인다. 황금빛 눈동자는 비오는 하늘처럼 흐렸다.

 

 

 

 

 

5. 업 The Karma

 

 

 

 

홍빈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모든 것이 다 끝나 있었다. 황량한 폐허 가운데서 루시퍼의 열장 날개만이 태산처럼 솟아 하늘처럼 흔들거린다. 한낱 인간인 사도는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숨을 까닥거렸다. 그의 기척을 알아채고 라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사도여. 잘 해내주었구나."

"가장 큰 빛이시여..."

 

 

홍빈은 경외감에 압도당해 저도 모르게 줄줄 울었다. 라비는 끌어모은 그의 두 손 아래서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문득 그립다고 생각했다. 여명의 빛을 닮은 눈동자가 슬픔과 허무에 물들었다.

 

 

"전쟁은 없을 것이다. 더이상은, 증오를 위한 증오도 오로지 살육을 위한 싸움도... 없어야 한다."

 

 

루시퍼는 비로소 알 것 같았다. 그의 소명을. 가장 일찍 뜬 별은 가장 먼저 어둠에 닿는다. 그러니 이 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은 이를 위한 여정이었을지 몰랐다.

 

그가 머리위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푸른 빛, 천사의 피를 닮은 색의 빛망울들이 비구름처럼 그의 품을 향해 몰려들었다. 그가 사랑했던 인간의 대지에 깃들어있던 것들이 주인의 부름을 받고 그에게로 되돌아온다. 나무 꼭대기를 흔드는 바람에, 황량히 마른 사막의 모래에, 거친 파도의 거품에, 작은 꽃 하나 피워내고야 마는 들풀에 머물러있던 그의 조각들은 손 안에 모여들어 그가 숨겨둔 그의 가장 귀한 것이 된다.

심장. 푸른 빛으로 뛰는 루시퍼의 성배, 가장 처음 태어난 빛이기에 그가 가질 수 있었던 심장이 그의 품으로 되돌아왔다.

 

그와 함께 그가 제 손으로 날개를 찢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홍빈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갈갈이 찢긴 등에서 터져나온 천사의 피가 바닥을 다 적시며 콸콸 넘쳐흘렀다. 열장의 날개가 하나하나 꺾일 때마다 라비는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웅크렸다.

마침내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마지막 날개가 떨어져 나갔을 때, 기다렸다는 듯 그의 등 뒤로 뼈마디가 솟아오른다. 질긴 비늘이 덮이기 시작하는 살가죽을 잔혹하게 뚫고 나온 생뼈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더니 그 뼈 위로 초록의 혈관이 오르고, 곧 뱀의 가죽이 돋아 근육을 감싸고 갈퀴같은 뼈 사이로 바닥을 다 덮을 정도로 거대한 피막을 잇는다.

 

라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은 더이상 여명의 색이 아니었다.

스스로 빛을 내버린 자는 신을 의심하여 다리 잃은 뱀이 된다.

가장 큰 빛은 인간을 살리고 가장 악한 것을 죽이고, 제 자신이 가장 어두운 것이 된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버지."

 

 

가장 큰 어둠이 된 자가 말했다. 최후의 고해성사였다.

 

 

"제게 당신을 원망하게 하신 것, 의심하게 하신 것. 명하신 바와 달리 가게 하신 것... 그것이 다 내 의지로 행한 일이었다고 믿게 하신 것. 끝내 한 번도 답해주지 않으신 것. 그게 제가 가장 큰 빛이었던 이유겠지요."

 

 

엄숙하고 맑던 목소리는 이제 갈라진 혀끝처럼 숨이 줄줄 샜다. 탁해지는 목소리로 그는 메마른 성대를 쥐어짜며 울지못해 고해했다.

 

 

"제 존재 자체가 당신의 대답이었음을 제가 미처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리 멀리 돌아왔습니다."

 

 

그가 빛이 스러져 까맣게 변한 로드를 들어올렸다. 릴리스의 등뼈가 새 주인을 맞아 기쁨에 까드득 몸을 떨어댔다. 그의 힘이 로드를 타고 오르며 검은 불꽃이 피어난다. 생겨난 암염의 창으로 라비가 온 힘을 다해 땅을 내리치자 대지가 쩌억 입을 벌렸다.

 

 

"제가 있을 곳은 여기 입니다."

 

 

지옥이 새로운 지배자를 환영하고 있었다.

 

아가리를 벌린 지옥문으로 본디 땅 아래에 있던 것들이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악마의 잿더미부터 시작해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던 악마들과 땅에 흩뿌려진 독과 뿔과 송곳니와 발톱들이 모조리 원래 있던 곳의 중력에 이끌려 속절없이 끌려들어간다.

그 거대한 파도 가운데에 서있던 루시퍼가 고개를 들었다. 서쪽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그 곳에서부터 무언가 내려오고 있었다.

 

 

"가브리엘."

 

 

퍽 반가운 목소리로 루시퍼가 나타난 천사에게 인사했다. 계시의 천사 가브리엘, 혁은 천둥을 품은 먹구름 같은 눈을 하고 가장 일찍 어둠에 닿은 샛별을 바라본다.

 

 

"기어이 가려 하는가."

"소명이잖나."

 

 

명쾌하게 떨어진 대답에 혁은 더는 묻지 않았다. 소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거짓보다 루시퍼가 제 발로 걸어들어가는 저 곳이 비할 바 없이 거룩함을 알았으므로.

 

가브리엘은 잠자코 칼로 하늘을 찢는다. 그의 손길을 따라 본디 하늘에 속한 것들이 위로 빨려들어갔다.

위의 거것은 위로, 아래의 것은 아래로 돌아가는 광경을 보며 가브리엘은 조용히 차게 식은 반천사의 시체를 안아들었다.

 

13의 서가 쓰여질 때부터 이미 천사들은 알고있었다. 루시퍼를 되살리는 일이 전쟁을 끝낼 조건이라는 것을. 하지만 그들은 루시퍼의 딸, 13번째의 예언자, 그의 핏줄인 반천사와 함께 그 것을 묻어버리는 것을 택했다.

 

타락해버린 카마엘처럼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루시퍼를 질시했기 때문이었다.가장 큰 빛으로 빚어져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첫번째의 자식인 그가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죄를 지어 유배당했으니 그를 구하러 가는 것은 어긋나는 일이라 목소리를 높이고, 의미없는 전쟁만을 이어온 것이다.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었고, 모두가 다 그들의 업이었다.

 

가브리엘은 다정한 손으로 엔의 몸을 보듬었다. 그의 손길 아래서 펼쳐지지 못한채 뒤틀린 날개가 온전히 돋아나고, 마왕을 몸 안에 받아내느라 터져나간 장기들이 치유된다.

사랑의 결실은 생살 섞듯 어렵고 증오의 되물림은 생채기 내듯 쉽다. 13번째의 서를 쓴 예언자는 루시퍼의 딸이라는 이유로 모든 천사들의 멸시를 받았고, 증오는 쉬이 이어져 결국에는 이 반천사에게까지 왔다. 모두 죄 없이 고통 받은 자들이었다.

 

어느새 평온한 표정이 된 엔의 몸을 안아올린 가브리엘이 날개를 펼쳤다. 폭풍우 친 날의 노을과 닮은 보랏빛의 날개가 무지개처럼 뜬다. 회한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계시의 대천사는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자신이 지켜야 할 곳을 향해 돌아갔다. 같은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뒷모습이었다.

 

"자, 이것을."

 

 

홍빈은 라비가 건네는 것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루시퍼의 심장은 마치 커다란 유리잔같았다. 보석같이 투명하고 단단한 그것은 안에 푸른 천사의 피를 머금고 찰랑이며 맥동하고 있었다.

 

 

"마지막을 부탁한다, 사도여. 계시를 완성하길 바란다."

 

 

루시퍼는 홍빈에게 웃어보였다. 그 얼굴이 후련해보여서 홍빈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히 제가 그를 동정하거나 가여이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저 입술을 꾹 물고 울음을 참을 뿐이었다.

 

루시퍼가 로드를 다시 내려친다. 시뻘건 속을 내보이며 벌어졌던 지옥의 아가리가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다.

하늘 문을 닫고 올라가버린 천사처럼 그 또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영영 닫혀버릴 그 문 사이로 몸을 던진다. 어떠한 약언도 미련도 일부러 뿌리 끝 까지 잘라냈다. 다시는 돌아오면 안되는 곳이기에 더 그랬다.

 

 

대지의 검은 이빨 사이로 사이로 너울거리는 그의 머리칼이 모습을 감추었을 때에야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서 루시퍼를 배웅하던 홍빈이 걸음을 옮겼다. 폐허 가운데, 아직 저 혼자 화려하게 빛나는 샴페인 타워를 향해.

가장 높은 제단 위로 다다라 홍빈은 망설임 없이 그 위로 루시퍼의 심장을 떨어트렸다.

 

빛의 심장은 산산히 부서져 공기중으로 흩어지고, 푸른 피만 폭포처럼 흘러 분수대를 적셨다. 밤하늘처럼 빛나는 천사의 피가 악마의 재로 얼룩진 까만 대리석 위로 속죄하듯 퍼져나간다.

인간의 눈물이 그 위로 흐르니 비로소 세 종족을 갉아먹던 오천년의 전쟁은 끝이 났다. 한데 뒤섞이는 그것들을 보며 홍빈은 그제서야 마음껏 울 수 있었다.

 

 

홍빈은 발 밑을 적시는 루시퍼의 피를 보며 미소지었다. 가장 보잘것 없는 것을 사랑한 가장 고결한 빛은 가장 위대한 구원자가 되어 가장 깊은 곳으로 돌아갔다.

 

죄는 어둠으로, 어둠은 재로. 정의는 빛으로, 빛은 생명으로.

 

 

"-모든 것은 제자리로."

 

 

 

 

 

 

-Fallen,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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