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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첸
@LYN_CHENNN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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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한가운데 들어앉아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외관에 비해 궁전 내부는 수수하다 못해 초라했다. 어두컴컴한 지하 깊은 곳, 얼기설기 미로처럼 뒤엉켜있는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가고, 다시 회랑을 건너 계단을 내려가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숨겨진 장치를 움직이면 드러나는 비밀통로. 단 한 조각의 빛도 허용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신성한 공간은 초대 황제께서 손수 그 문을 봉하신 이후로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던 문을 활짝 연 채 충격에 휩쓸린 이들의 경악을 온전히 받아내고 있었다.

제국의 심장, 가장 깊숙하고 어두운 곳에서 보관하던 가장 신성하고 밝은 것이 사라졌다. 숨가쁘게 움직이는 검은 그림자들 사이로, 무언가 알 수 없는 형체가 검은 옷자락을 드리우고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낯선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채 돌아다니는 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미지의 불청객은 비릿한 조소를 가득 껴안고 방을 나서려다 문득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위가 온통 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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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린첸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천신전 소속 사제 라비입니다.”


덜커덕!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 잠시 열렸던 쪽창이 순식간에 닫히고, 그 누구보다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레오는 손수 빗장을 열고 야밤의 방문객을 맞아들였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교묘하게 만들어진 쪽문 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결을 상징하는 흰 사제복을 걸친 사내가 발을 내딛자 레오는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시원스레 자리한 오뚝한 콧날과 굳게 다물린 입술, 훤칠한 키와 독특한 마스크는 그가 일반적인 사고의 범주를 초월한 신관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요 근래 들어 천신전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사제란 이름에 걸맞게 그가 지나온 자리는 자잘히 하이얀 빛을 뿌리고 간 듯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반쯤 뛰다시피 앞서 가는 레오의 뒤를 따라 라비는 걸음을 옮겼다. 신을 모시는 사제의 기품과 엄숙함은 잃지 않았으나 다급한 마음이 투영되기라도 한 듯 발을 내딛을 때마다 거친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퍼졌다. 궁전에서 수십년간 일하는 시종들도 알지 못하는 복도와 계단을 아무렇지 않게 안내하는 레오는 제국의 제 1 수석 보좌관. 오로지 황제의 명과 제국의 안녕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였다. 그런 그가 이런 야심한 시각에 신전에 연락을 취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이제 곧 라비가 보게 될 광경 때문이었다.

끝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복도에 도착하자 레오는 이쪽이라는 듯 손짓했다. 언뜻 보면 벽처럼 보이지만 레오가 힘을 실어 밀자 벽이 밀려나며 숨겨져있던 계단이 드러난다. 횃불이 켜져있다하나 어딘가 음침한 기운이 있는 돌계단을 내려가면 나타나는, 황궁 가장 밑바닥에 지어진 공간. 그 곳이 그들의 목적지였다.


신성제국을 수호하는 초대 황제의 혼이 깃들어있는 천계의 돌은 천 년 가까이 지나오면서 제국의 번영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존재였다. 제위 17년, 그 해에 떨어진 운석은 일명 별돌이라고도 불리는, 저 미지의 공간에서 떨어진 성스러운 수호석이었다. 제국의 상징이자 자부심, -그 자체만으로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에 힘을 실어주는- 황궁 가장 밑바닥에 보관하던 돌이 사라진 것이다.


문은 반 뼘 정도 열려있었다. 보통 때 같았으면 주술로 굳게 닫혀있었을 문은 레오가 발끝으로 살짝 밀자 힘 없이 열렸다. 누워있는 형체는 한때 사람의 것이었다 할 수 없을 만큼 처참했다. 온 내장이 사방팔방에 흩어져있고 부서진 뼛조각과 힘줄이 널려있었다. 썩어버린 얼굴 부분과 군데군데 불에 탄 듯한 부분까지.

라비는 무릎을 꿇고 시신에 손을 대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가웠다. 레오는 감히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서 사제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 역시 한 때 전장을 누비던 장군이었지만 눈 앞의 광경은 믿기 힘들 정도였다. 절로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모습에 레오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냈다.

“평범한 사람이 천신전의 훈련받은 문지기 사제를 이리도 잔인하게 죽일 순 없습니다. 필시 악마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조용, 조용히 하십시오. 악마가 듣고 있습니다.”

라비는 눈을 찡그리며 일어나 단상 -돌이 놓여있어야 할 자리- 위에 쌓인 먼지를 손가락으로 슥 문질러보았다. 구불구불한 선이 그려지자 그는 유심히 바라보다 손을 털어버렸다.

“문지기가 발견된 건 언제입니까?”
“대략 1시간 전입니다.”
“돌이 사라진 시점은 아십니까?”
“그것이, 아직…… 아시다시피, 이 문은 초대 황제께서 봉하신 이후로 단 한번도 열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제국이 최근 내리막길을 걷게 된 7, 8년 전쯤으로-”
“9년은 지났습니다.”

9년. 단정짓는 라비의 말에 레오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수석 서기관이란 자리는 9년이라는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몇 안되는 자리였다.

“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을 겁니다. 그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시간을 들여 문지기를 세뇌시킨 것이 분명하고요. 다만 왜 이 시점에 와서 문지기를 죽였는지, 그 점을 알 수가 없군요. 일단 사안이 사안이니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마련해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믿음직한 사제의 말에 레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칫했다. 엄습하는 지하실 특유의 음침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얼음창을 들고 추위를 진두지휘하던 성자는 이미 깊숙한 잠에 빠져든 지 오래였지만 아직은 미처 물러나지 못하고 남아있는 잔재가 옷깃 속으로 차디찬 손을 집어넣는 듯했다. 이유 모를 두려움이 밀려와 레오는 저도 모르게 오른손을 들어 소름이 돋은 왼팔을 문질렀다.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죽은 듯 고요한 새벽, 흑색에 가까운 짙푸른 바람을 헤치며 온통 하얀색의 마차 하나가 대로를 가로질러간다. 안개는 축축한 도시의 상공 위에 날개를 편 채 여전히 잠들어 있었으며, 가로등은 둥근 석류석처럼 흔들리는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양 궁전은 성문을 열어 형식적인 절차나 검문도 없이 마차를 맞이했다. 이른 시간부터 움직인 말들이 옆구리를 씰룩이며 들어와 투레질을 하며 멈춰서자 마차 문이 열리고 후드를 눌러쓴 두 사람이 내렸다.

“이쪽입니다. 따라오십시오.”


성(聖) 엔 테스파오 성하. 비록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하나, 어릴 적부터 신의 순수한 그릇이라 불리며 역대 그 어떤 교황보다 권위 있고 기품이 넘친단 성망은 여즉 그대로였다. 교황의 최고 고문이자 그의 다음 가는 성직에 있는 추기경 -최근 노환으로 쓰러진 이후 반 공석이다시피 했다- 을 대신해 온 사제는 라비였다. 제국과 처음으로 연결이 닿았단 이유였다.

알현실로 향하나 싶던 발걸음은 단상 옆으로 난 조그마한 문 안쪽으로 난 비밀통로를 지나고,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어 회의실처럼 구성된 작은 방 안에 다다라 멈추었다. 황제인 켄은 굳이 불러올 것도 없이 이미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일국의 황제가 있기엔 소박한 공간이라 하나 엔과 라비가 둘러보기도 전에 레오는 거기 서있지만 말고 얼른 앉으라 손짓해보였다. 객이 앉기도 전에 이야기를 시작하는 건 실례인지라,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레오는 속사포처럼 참았던 말을 쏟아냈다.

“천계의 돌이 사라진 것이 이제야 발견되었지만, 그간 제국에 닥쳐왔던 모든 기근과 자연재해, 질병과 반란들도 모두 설명이 됩니다. 천신전에서 파견했던 사제이자 문지기가 당했다면 다음은…”
“뭐야, 설마 나야?!”
“폐하 제발 진정, 또 진정!”

그 생각까지는 미처 해보지 못했던 듯, 호들갑을 떨며 유난을 부리는 켄을 레오가 익숙하게 달래는 모습을 라비는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제국의 태양이자 젊은 사자, 오만해보일 정도로 근엄하고 진지해보이던 이미지는 전부 대외적이었단 말인가? 반쯤 벌려진 입이 다물릴 새도 없이 옆에 앉아있던 엔이 차분한 어조로 소란을 정리했다.

“책임을 통감하네. 라비, 사태에 대해 신전 측의 조사와 입장을 설명드리게.”
“예. 아시다시피, 천계의 돌이 사라진 지 정확히 10년이 지나면 제국은 파멸에 이를 것입니다. 이는 태초에 정해진 맹약이자 동시에 초대 황제께서 제국을 세우실 때 받았던 천신의 가호와 그분께서 보이신 사랑과 자비의 상징으로 정해졌던 규율입니다. 어제 조사했던 바로는 9년이 이미 지났을 시기이니, 언제 10이란 숫자가 채워질진 지금으로선 알기 힘듭니다. 문지기의 세뇌… 그 건에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엔과 눈짓을 짧게 나눈 라비가 망설이다 뒷말을 이었다.

“제국에서도 문지기 사제의 처우에 대해 제대로 신경 써주시지 못한 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선 저희 신전 측에서도-”
“그 말씀은. 우리 제국에도 책임이 있다, 이 말입니까?”

싸늘한 목소리로 레오가 되받아쳤다. 사람을 압도시키는 기세는 역시 제국 제 1 수석 보좌관의 것다웠다. 역시는 역시나인가. 라비는 침음성을 삼키며 사람 좋은 미소를 애써 지어보였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만…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이번 일의 배후는 홍빈이라, 물론 제국 측에서도 어찌할 도리는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디 노여움을 거둬주시지요.”

즉각적인 반응은 황제 쪽에서 터져나왔다.

“홍빈?! 걔 마왕이잖아!”
“맞습니다. 제국의 전복과 동시에. 신전의 몰락을 꾀하는 듯합니다.”
“시간이 일년도 채 안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시려고…”

염려와 혼란이 뒤섞인 레오의 말을 받으며 라비가 보좌관을 안심시켰다.

“방법을 최대한 찾아보겠습니다, 마왕과 관련된 이상 평범한 인간의 힘으론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제국의 협조를 요구합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포고문을 올려보고, 전 지역과 각 신전들에 협조 요청 공문을 보내겠습니다. 천신의 가호 아래 있는 모든 신전이라면 미약하지만 보탬이 될까 싶습니다만.”
“좋은 생각이십니다, 레오 보좌관님.”
“뭐야, 그건 아까 내가 얘기한 생각이잖아! 내 생각이라구!”

난입한 황제의 말에 라비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켄은 눈길도 주지 않고 따발총처럼 레오를 향해 고성을 쏟아붙였다.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듯한 보좌관의 기다랗게 찢어진 눈커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보지 않을래도 볼 수밖에 없었다.

“폐하, 제가 교황 성하와 사제님이 오시기 전 제안했던 제 의견 아닙니까. 심지어 폐하께선 별로라고 하셨습니다.”
“아냐. 내가 낸 의견이라니까? 감히 황제의 말에 토를 달 생각이냐?!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폐하! 극비리에 이 자리에 와 계신 것 벌써 잊으셨습니까!”
“아 헐… 몰라. 들은 자가 있으면 아무도 모르게 묻어버리자.”
“폐하!!!!”

하루이틀도 아니라는 듯 떼를 쓰는 황제와, 또 시작이라는 듯 이마를 짚는 보좌관을 쳐다보는 시선에서 측은함이 느껴진 것은 비단 착각이 아니리라. 툭탁툭탁거리는 둘을 뒤로 하고, 후드를 다시 뒤집어쓰고 방을 나서는 엔과 뒤따른 라비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 궁성 옆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던 마차로 귀환했다. 마차 안엔 함께 동행해왔지만 같이 입궁하진 못한 인영 하나가 그 둘을 반가이 맞이했다. 몸에 이상이 있는 자는 궁 안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쓸데없는 규율 때문이었다.

“어찌 되셨습니까?”
“……”

어두운 표정으로 답이 없는 교황의 태도에서 느껴진 암울함에 사내는 입을 꾸욱 다물어버렸다. 밖에서 희미하게 채찍 소리가 나고, 해골 소리처럼 마차가 덜거덕거리며 출발하자 축 늘어진 침묵이 세 사람 주위를 빙빙 돌았다.

“혁아. 창문을 열어다오.”

한참을 있다 엔이 겨우 한 마디를 꺼내자 더듬거리는 손이 가까이에 있는 창문으로 향했다. 굵은 손마디는 혈색 없이 야위어보였다.

 


창을 열자 피폐하고도 죽음이 감도는 거리의 풍경이 보인다. 겉으로 언뜻 보기엔 활기차보이지만 어딘가 불편해보였다. 간간히 바람에 섞여 이른 새벽의 언성이 오고가고, 불법적인 행태가 이제는 대놓고 이뤄지고 있었다. 무게추에 장난질을 해댄 상인과, 몰래 곡식 자루에 모래를 섞는 일꾼. 위쪽에는 상등품의 물건을 올리고 아랫쪽에 하등품을 섞어 진열해놓은 가게들. 그리 가깝지 않은 때부터 그리하였다.

 

신은 관조자였다.

저 드넓은 하늘 위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세상을 바라보기만 하며 그 어떤 손길도 건네어주지 않은 자였다. 신이시여 우리를 굽어살펴주소서, 외쳐대어도 결코 답하지 않는 성정의 소유자였다.

 


지진이 일어났다. 강력한 대지의 힘에 터전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눈물이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수도는 아직 무사했지만 언제 또다시 지진이 덮쳐올지 모르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제국을 혼돈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9년 전, 제국의 모습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아름다운 수목들과 푸르런 풍경들은 지천에 가득했고 어려움에 처한 빈민들에게 아낌없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귀족들과, 서로 어울려 살며 진정한 화합을 추구해나가던 신민들. 그러나 이젠 그런 과거들도 모두 옛 위명이었다. 풍요로운 자연은 피폐해졌고 메말라갔으며, 후하던 사람들의 인심은 야박해졌고 더 이상 신을 찾지 않는 이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귀족들은 입을 다물고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몸을 사리거나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여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신은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신전의 힘은 나날이 약해졌다. 교황이 아직 건재하다, 신께서는 아직 완전히 자신의 종들을 버리지 않으셨노라 말하며 미약하게 잔재되어있는 성스러운 그 힘을 지켜나가는 중이었다.

신전을 향한 발걸음이 뜸해졌다. 신성 제국에서 신전이 힘을 잃어가고 있는 것에, 그리고 신의 영향력이 약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들만이 하이얀 건물을 바라보며 탄식을 흘릴 뿐이었다. 성스러운 신의 힘은 고작해야 신의 대리인인 교황과 몇몇 고위 사제들에게서 겨우 지탱되어 이어지고 있었다.

“혁아.”
“예.”
“제국의 앞날이 어떠한 지 봐 주겠느냐. 과연 앞으로, 이 제국과 신전이 잘 해낼 수 있을까……”

혁은 무너져가는 교국의 상징과도 같았다. 사제보다도 드물게, 신으로부터 선택받아 태어나는 예언자는 서른이 되면 눈이 완전히 멀어버린다. 육체를 담은 세상의 눈을 잃는 대신 영적인 시각을 가지며 새로이 태어난다는 예언자의 숙명이었다. 회백색으로 탁해진 눈동자는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그가 눈이 멀어가고 있단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교황의 말에 잠깐 허공을 더듬던 시선이 흔들린 건 일순간이었다.

“너무… 너무 앞이 안 보여요. 이런 적은 없었는데……”

혁의 능력은 신전의 몰락과 함께 날이 갈수록 약해졌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소실된 건 아니라, 희뿌옇게 흐리거나 단편적인 조각들이 겹쳐보일지언정 그간 그가 봐왔던 예언들은 전부 연속되는 파노라마처럼 보였었는데,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아예 보이지 않는 일은 처음이었다.

“혁 예언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신기하기도 합니다. 사실 그간 말씀으로만 들었지, 눈 앞에서 앞날을 읽으시는 모습은 처음 뵙거든요.”
“드물지만 이런 일이 있기도 합니다. 두 분의 기가 너무 강해서일 수도 있고, 간혹 선악이 상쇄될 만한 강력한 매개체가 있다면… 그럴지는 미지수지만, 지금으로선 모르겠네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길 바라야죠, 라비를 바라보며 희게 웃어넘기는 혁의 표정을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엔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복잡함에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신전의 안위를 엮어가는 마차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이내 새들도 잠든 거리 속으로 사라진다. 위태롭게 따라가는 긴 그림자를 배웅하는 건 제 힘을 잃어가는 가로등의 온기뿐이었다.

 

 

***

 

 

거대한 단상 위에 놓여있는 단 하나의 의자, 홍빈은 그 위에 앉아있었다.

마계는 네 개의 태양과 여섯 개의 달이 뜨는 기이한 세계 한가운데 위치해있었다. 더럽고 추악한 마족들, 그에 군림하는 마왕의 외모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천사의 현신을 하고 있었다. 투명한 피부와 온 우주의 가장 뛰어난 장인들을 모아 완벽하게 빚어낸 듯한 얼굴. 뭣 모르는 하룻강아지들이 여려보이는 그 외양에 얕보고 덤벼들었다가 영원한 지옥, 발할라에 던져졌단 소문은 구름 같이 공공연하게 마계를 맴돌았다.

마왕의 의자 옆,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는 차원의 틈에선 언제나처럼 이글거리는 불구덩이가 넘실대는 중이었다. 허공이 찢겨나간 듯한 공간 밖으로, 뜨거운 열기 사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고운 미간이 찌뿌려졌다.

“이젠 그 돌을 돌려줄 때가 된 것 같군.”
“또 그 소린가?”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한 목소리가 쇠처럼 탁하게 들끓는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홍빈의 머리 위로 소름끼치는 그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지금이 적기야. 올해로 벌써 9년째라고. 10은 신의 수, 9는 가장 불완전한 수. 언제 천신의 결계가 깨질지 모르니 빨리 돌려놔야해.”
“저 돌은 마계에 9년 동안이나 있었는데도 제 힘을 잃지 않더군. 미치도록 아름다우면서도 더러운 기운을 내뿜어. 이쪽에서는 막 환한데, 저쪽에서는 흉측해. 돌려보면 온통 검은 빛인데, 다시 제대로 보면 따뜻한 온기가 나오고…”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야?”

일신 불이 제 몸집을 키워가더니 순식간에 돌을 낚아채간다. 홍빈은 순식간에 든든한 무게감을 잃은 제 손이 허공을 헤매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주먹을 쥐어들었다.

“굳이 다시 이걸 돌려놔야해? 돌을 부수든, 지금 1년만 더 기다리든 결과는 똑같을 거 아냐.”
“달라.”

묘하게 다른 말투가 확고하게 못 박았다.

“내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상황 아래에 놓여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지. 어찌 되었든 제국의 멸망은 이미 정해진 일이고, 지금 돌을 돌려놓으면 내가 힘이 더 생기니까.”
“그 힘, 어차피 전혀 상성이 다른 곳에서의 권력은 하등 쓸모 없는 거 아닌가?”
“선과 악은 본디 종잇장 하나 차이거든. 선과 악을 동시에 품고 있단 건 얼마나 짜릿한 지.”
“인간들 사이에서만 지내다보니 그렇게 된 건가? 아니. 말은 똑바로 해야지. 단지 그런 척 하는 게 재밌는 거 아니고?”
“글쎄.”
“이런 악마 같으니라고.”

대답 없이 사라지는 불구덩이에 홍빈은 픽 웃어보였다. 그가 알던 존재가 아닐 리 없었다.

 

 

***

 

 

새하얀 벽과 대비되게 여러 문양으로 끼워진 스테인글라스에서는 시커먼 먹구름이 어둑하니 방 안을 스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바람이 새는 것인지 일렁이는 불빛과 함께 녹아내렸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새벽 기도가 끝날 시간이었지만 아직 해가 뜨려면 족히 두 시간은 남아있었다.


쾅쾅쾅쾅!

감히 그 누가 신성한 기도시간을 방해한 것인지. 엄숙함과 법도로 침잠된 신전 내부에서 이리도 소란을 피울 수 있는 자가 있단 말인가? 엔은 분노보다도 의아함에 앞서 자세를 갈무리하고 문가로 발치를 옮겼다. 문 밖에선 황망하게도 익숙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교황 성하! 소인이 말렸사온데…”
"대예언자 혁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성하, 문을 열어주십시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도 급하게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엔이 문을 열자 제일 먼저 마주한 것은 당황하는 하급 보좌 사제의 얼굴이었다. 소인이 인도해드리고자 하였으나 한사코 마다하시곤 이리로 뛰어오셨습니다! 그러하였느냐. 사제의 말대로 혁의 몸엔 다급하게 달려오느라 온통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제대로 앞을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뛰다 장애물들과 부딪혀 난 모양이었다. 헉헉거리며 숨을 겨우 고르는 혁이 첫 운을 띄울 즈음,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든 목소리는 예언자의 말을 압도해버렸다.

“새로운 신탁입니다. 돌은 돌아올 것이나-”
“성하! 돌이 돌아왔습니다!”

바람 같이 달려들어 엔의 앞에 나타난 사제는 라비였다. 혁의 앞을 반쯤 가로막다시피 하며 소식을 전한 라비는 횡설수설 전말을 늘어놓았다. 사제실로 돌아가는 와중에 신의 부름인지 알 수 없는 이끌림을 받아 그대로 따라가보았더니 인적이 드문 신전 한 구석에 돌이 놓아져있었다는 애기가 제대로 끝나기도 전에 엔은 사태 파악을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뭐?! 아니, 시급히 돌을 원래대로 되돌려놓아야해. 당장 황궁으로 가야겠네. 라비, 나를 따라오게.”
“예.”
“신탁은 나중에 들으마, 혁아.”

급하게 주변을 휘저으면서도 마지막으로 제 팔을 붙잡고 안심시켜주려한 손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황망하게 엔이 떠난 빈 자리를 보던 혁은 천천히 몸을 돌려 깨끗한 천에 덮여있는 단상을 바라보며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사위가 어둠으로 물든 가운데 단상만 홀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신의 마지막 징표를 간절히 응시하던 혁이 나지막하게 뇌까렸다.

“그러나… 제국은 앞으로 더 큰 위험에 빠진 것 같습니다.”

 

 

***

 

 

돌이 되돌아오자 제국은 놀랄 만큼 빠르게 다시 안정을 되찾았다. 9년 전, 가히 제국의 태평성대라 불렸던 시기와 애당초 능력이 있었던 황제와 그의 수석 보좌관, 신전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백성들의 지지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모두가 평화롭던 시기의 안정을 익숙하게 여기게 될 즈음이었다.

“…이상으로 월말 제국 결산 총 보고를 마치겠습니다.”
“수고 많았어, 레오.”
“검토하시고 날인 부탁드립니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한다니깐.”
“예예, 어디 하루 이틀이십니까.”

투덜거리는 황제를 능숙하게 닦달하며 레오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대소신료들과의 경연과 업무를 병행하며 일을 해내던 레오는 주변을 살피다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갔다. 억지로 걸음을 옮겨 계단을 내려가고, 숨겨진 문을 열어 통로를 내려간다. 돌이 제대로 잘 있는지, 일이 모두 해결된 후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단 사실이 떠올랐던 참이었다.

목적하였던 곳에 당도한 레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던 얼굴들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 바뀌었던거지? 문지기 사제로 서 있는 두 사제는 전혀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살해당한 문지기 사제 이후로 신전에서 파견한 사제들은 제가 직접 신전에 가서 데리고 왔었는데. 심지어 인수인계까지 제가 대신해서 모두 마무리지었었는데. 

“저… 언제부터 이 문을 지키고 계셨습니까?”
“라비 추기경 전하께서 직접 명령하셨고, 혹독한 시험과 훈련을 통과하여 명을 받고 온 사람들입니다. 황제 폐하의 인가 아래 공식적으로 승인받은 일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감히 천신전의 사제 분들을 몰라뵈옵고. 그럼.”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는 다시 지상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텅 빈 복도, 그가 딛는 발걸음 소리는 무거운 초침처럼 부메랑같이 돌아왔다. 한 발, 또 한 발.

그래, 돌이 되돌아온 이후로 천신전의 지위는 더더욱 공고해졌고…… 관련된 이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지? 예언자 혁의 행방은 묘연해졌고. 라비 사제는 어느덧 추기경이 되었구나. 노환으로 인해 물러난 추기경이 마침 공석이라 그렇게 되었지. 라비 사제에겐 천운인건가……?

계단을 올라오며 생각을 곱씹던 레오는 계단 중반에서 우뚝 멈춰섰다. 그제야 그가 놓쳤던 점이 하나 떠오른 탓이었다. 위태로이 흔들리는 횃대 뒤로 그림자가 무섭도록 소용돌이쳤다. 소름끼치도록 악마의 형상을 닮아있는 어둠이 그의 뒤를 서늘히 비춘다.

쓰러진 문지기 사제를 보자마자 신전으로 연통을 넣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을 받고 도착했다던 사제, 라비.


왜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을까.

 

연락이 닿을 만한 시간이 아니었음을.

 

 

 

 


/이반 발스트로카 作 ‘선악의 경계’ 제 3장 149절

 

(선략)
…오랜 기간 연구한 결과, 악마는 육체의 구속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본질적인 것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악마는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유기체라면 필연적으로 지니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도 실재한다. 이는 때때로 믿음에 따라 존재의 유무가 판단될 여지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악마는 분명히 존재한다. 악마는 우리 스스로의 마음 속에 실존할 수도 있고,
우리 옆에서 살아가는LIVE, 그 누군가로서 악마EVIL는, 명명되어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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