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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안(黊眼)의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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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네프린
@epinephrine_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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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안(黊眼)의 아이들

 

 

w. 에피네프린

 

 

黊(규) - 샛노랗다

眼(안) - 눈, 눈동자

 

 

22세기 중반, 오래 전부터 진행된 환경오염이 극에 달해 생태계가 무너졌다. 그 결과 곳곳에서 분쟁이 벌어졌고 지구의 인구는 3분의 1로 줄었다. 주요 기관들의 훼손과 지성인들의 사망으로 여러 분야의 지식과 기술이 20세기 후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많은 국가가 멸망했다. 그나마 남아있는 곳들도 어려운 처지임은 마찬가지라 타국의 원조는 상상도 못했다. 각자도생에 여념이 없어 국가 간의 외교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재건이 이루어진 국가가 소수 있었다. 과거의 대한민국이 있던 곳도 그 중 하나였다. 건국 초에는 6인의 위원회가 다스리는 공화정 국가였다. 하지만 42년 전, 위원회의 합의 하에 한 명의 황제가 통치하는 제정일치 국가가 수립됐다. 그 자세한 경위를 국민들은 알지 못했다.

 

제국에는 국교(國敎)에 따른 연례 행사로 매년 인간 두 명을 황제이자 신관이 직접 죽여 제물로 바쳤다. 첫 해에는 한 명, 다음해에 제국으로 바뀌고 두 명으로 늘었다. 제물이 되는 대상은 노란 눈을 지닌 미성년자였다. 인간에게 드물게 나타나는 호박색 눈이 아닌, 민들레처럼 샛노란 색의 눈. 사람들은 이를 규안(黊眼)이라 명명했다. 규안의 아이는 일 년에 적으면 한 명, 많으면 다섯 명이 태어났다. 황실에서는 규안은 악마의 저주이니 신께 규안의 아이를 바쳐야 그 아이를 구원하고 제국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알렸다. 제물이 될 아이들은 매년 제비 뽑기로 선정됐다. 규안의 아이들이 성인이 된 사례는 없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법령 때문이었다.

 

신에게 바칠 제물은 부정을 타면 안 된다. 원칙적으로 규안의 아이에게 신체적,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행위는 금기시되어 있었다. 어기면 엄벌에 처하니 표면적으로는 잘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알게 모르게 드러내는 편견과 적의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물론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황제와 기득권층에서 공포 정치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 의식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규안은 악마와 관련이 없었다. 단지 환경 오염으로 유전자가 변이된 돌연변이일 뿐이라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 말대로라면 규안인 아이들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명백한 인권침해였다. 인권 운동가, 의료직 종사자, 규안인 아이들의 가족들을 중심으로 꾸준히 시위가 이어졌다. 몇 번인가는 황실 내부를 침입해 황제를 습격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황실 직속 군경대(軍警隊-군인과 경찰이 통합된 조직)에 매번 제압당했다.

 

 

올해 제물이 될 아이들은 다른 때보다 특이했다. 한 명은 19살 청소년으로 역대 최연장자, 다른 한 명은 백 일이 조금 넘은 역대 최연소자였다.

 

19살의 한상혁은 군경대에 잡힌 이후 며칠을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그는 죽을 날을 받아 놓고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이 상황이 끔찍했다. 눈을 감으면 도망치라고, 살아남으라고 외치는 부모님과 형의 외침이 들렸다.

 

 

상혁은 가족의 헌신 덕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상혁이 태어난 날, 그의 부모님은 의료진들에게 돈을 쥐어 입막음을 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는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그를 보여주지 않았다.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을 때는 부모님의 홈스쿨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집밖을 거의 나갈 수 없어서 허약해지지 않기 위해 집에서 체력 단련을 했다. 상혁의 연년생 형이 체육관에서 배우고 집에서 동생에게 가르치는 방식이었다. 돌이켜보면 사실 형도 어린 나이에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었을 텐데 전혀 싫은 내색일 비친 적이 없었다. 혹시나 이웃의 의심을 살까 봐 이사도 자주 다녔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결국 밟히기 마련이다. 상혁은 어이없는 이유로 한순간에 규안을 들켰다.

 

그 날은 상혁의 생일이었다. 생일에는 특별히 눈을 감추고 밖에 나갈 수 있었다. 그는 형하고 둘이 집 근처 공원에 놀러 갔다. 오랜만의 외출에 신난 상혁은 공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빠른 박자에 맞춰 춘 격한 안무에 선글라스가 흘러내렸다. 놀란 형이 재빨리 그에게 선글라스를 씌웠다. 그러나 하필 순찰 중인 2인조의 군경대가 그 상황을 목격하고 말았다. 그들은 상혁이 제국에 등록되지 않은 규안의 아이임을 간파했다. 그 정도까지 성장한 사람은 없었으니까. 상혁의 형은 그들 중 한 명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는 군경대를 제지하며 상혁에게 외쳤다.

 

“뛰어! 아버지, 어머니한테 가! 나 신경 쓰지 말고 달려! 살아! 꼭 살아야 돼!”

 

상혁은 있는 힘껏 달렸다. 형이 걱정돼서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군경대에 잡힐까 봐 그러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은 혼자 급하게 돌아온 상혁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지만 상혁이 입을 떼기도 전에 그를 추격한 군경대가 집을 침입했다. 부모님은 군경대의 앞을 가로막으며 상혁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지만 집 앞에 대기한 군경대에 잡히고 말았다.

 

황제의 명령으로 상혁의 부모와 형은 군경대에 즉결 처형됐다. 제물이 될 규안의 아이를 채택할 때 가족을 죽이는 일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상혁의 경우, 올해를 넘기면 성인이었다. 숨긴 기간이 긴 만큼 대가도 컸다. 그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가족들을 살려달라 빌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상혁은 규안으로 태어난 자신을 원망했다. 자기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부모님과 형이 자신을 지키느라 허망하게 죽을 일은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그를 괴롭혔다. 그때 맞은 편 방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기와 같은 날 제물로 바쳐질 아기의 방이었다. 누가 아이를 보러 온 걸까? 제물로 바쳐질 아이들은 직계 가족의 면회를 받을 수 있었다. 제국에서 베푸는 일말의 배려였다. 그러나 상혁과 아기를 찾아오는 이는 없었다. 그는 문에 달린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봤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간 사람을 아이를 돌보는 여인 한 명 뿐이었다. 상혁은 아기도 자신과 비슷한 처지이리라 짐작했다.

 

'차라리 저 아이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때 제물로 바쳐졌으면 좋았을까.’

 

상혁은 문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작아지는 발자국 소리를 듣던 상혁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어?’

 

문을 잠그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가 있다고 문도 안 잠그는 걸까 생각했지만 평소에는 분명 잠깐 자리를 비울 때도 문을 잠갔다. 특히나 아기는 누군가의 손길이 많이 필요하니 어지간하면 한 명 정도는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지만 아기가 걱정됐다. 상혁은 답답한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갇힌 방의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문이 열렸다. 상혁은 너무 놀라 몸이 굳었다.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기회였다. 살 수 있는 기회. 어쩌면 수용소 바깥에는 군경대가 지키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군경대라도 제물이 될 규안의 아이를 해칠 수는 없다. 그는 뭐라도 행동하기로 했다.

 

출구를 향하다 아기의 방을 지나친 상혁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여기서 벗어난다면 아기는 정말로 혼자였다. 상혁은 혼자 남겨졌을 때의 공포를 잘 알고 있었다. 아까는 아기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과연 그럴지 의문이었다. 그는 아기의 방으로 갔다.

 

상혁은 아기가 있는 방의 문고리를 돌렸다. 역시나 문은 잠기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기가 노란 눈을 굴리며 얌전히 누워 있었다. 그는 아기를 안아 올렸다. 혹시나 아기가 울까 봐 걱정했지만 얌전했다. 상혁은 아기가 순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바깥은 어두웠고 아무도 없었다. 막상 밖으로 나가니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상혁은 수용소로 끌려왔을 때의 기억을 더듬어 길을 찾았다.

 

그때, 누군가가 상혁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자를 눌러 써서 얼굴의 반 정도는 보이지 않았다. 상혁은 들켰다는 공포에 몸이 떨렸지만 아기를 품에 더 꽉 끌어 안았다. 그 사람은 미소를 지었다.

 

"안심해. 널 구하러 왔어. 아기와 같이 왔구나. 고마워. 혼자서 무서웠을 텐데. 덕분에 수고를 덜었어."

 

젊은 남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남자가 팔을 뻗어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군데군데 흉터가 새겨진 어두운 피부색의 손이었다.

 

"누구세요?"

“너희를 구하러 온 사람.”

“제가 밖으로 나갈 걸 어떻게 알았죠?”

"감시자들 중에 우리 측 사람이 있어. 그 분의 희생이 없었다면 너희는 이 자리에 없었을 거야."

 

남자는 상혁과 비슷한 나이인 것 같았다. 그는 머리에 눌러 쓴 모자를 벗었다. 남자의 눈은 규안이었다.

 

"그쪽도 규안이었어요?"

 

상혁은 깜짝 놀랐다. 그가 아는 바로는 자기와 비슷한 연령대인 규안의 아이는 없었다.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그는 따뜻한 눈빛으로 상혁과 아이를 바라봤다.

 

"몇 살이에요?"

"열아홉 살? 아마도?"

 

아마도? 나이 뒤에 붙은 부사가 어색했다. 상혁은 그가 어떤 사정으로 본인의 나이를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짐작했다. 열아홉 살이라면 동갑이지만 어째서인지 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사실 상혁은 가족 이외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어서 누군가와의 소통 자체가 생경했다. 일단 존댓말을 계속 쓰기로 했다.

 

"이름이 뭐예요?"

"차학연이야.."

“저는 한상혁이라고 해요. 이 아기는….”

 

상혁은 아기를 내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아기의 이름도 몰랐다.

 

”죄송해요, 저도 얘 이름을 몰라요. 근데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렇게 돌아다녀도 괜찮은 거예요? 위험하잖아요.”

“나는 괜찮아.”

 

학연은 상혁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 규안이었던 눈이 갈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눈빛이 조금 차가워졌다. 살짝 머금었던 미소도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쓰던 모자를 상혁에게 건넸다.

 

“어떻게?”

“나중에. 지금은 아니야.”

 

상혁은 어쩐지 그의 말투까지도 달라진 것 같았지만 몸을 피하는 게 우선이라 넘어가기로 했다. 그는 아기의 눈을 잘 가리고 학연의 뒤를 따랐다.

 

 

학연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은신처는 버려진 대형 체육관이었다. 황실과 가까운 위치였다.

 

“이런 데에 있어도 괜찮은 거예요?”

“걱정 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잖아. 어차피 몇 달 뒤면 황실에서 여기를 습격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학연의 눈은 다시 규안으로 돌아왔다.

 

 

감시자들은 황제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제물이 될 아이들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벌이었다. 군경대 훈련소 생활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세 사람, 이재환, 김원식, 이홍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정면을 향해 시선을 유지했다.

 

"그대들에게 거는 기대가 크네."

 

황제는 방금 전 감시자들의 숨통을 끊었던 단검을 천으로 닦아내고 칼집에 넣었다. 촘촘하게 짜인 검은 베일을 머리에 얹어서 입술 위로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받은 모든 훈련을 최고의 성적으로 마쳤다지.”

“네, 그렇습니다.”

 

홍빈이 대답했다. 그의 시원시원한 대답에 황제는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내가 새로운 인재들을 최측근으로 두고 싶어서 이렇게 자네들을 불렀네.”

 

그들은 황제가 굳이 자신들의 눈앞에서 감시자들을 처벌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는 두려움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게 할 셈이었다.

 

“이 자들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겠지? 올해 있을 연례 행사 때 제물이 될 아이들을 감시하는 데 소홀했어. 그래서 말인데.”

 

황제가 책상을 내리쳤다.

 

“둘 다 데려와. 의식이 시작되기 전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질문이 있습니다.”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원식이 물었다.

 

"한상혁이라는 녀석을 잡아야 하는 이유는 알고 있습니다. 규안의 아이는 성인이 되기 전에 죽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아기를 급하게 데려와야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매년 그랬던 것처럼 제비 뽑기로 정하면 되지 않습니까?"

 

원식의 질문에 황제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 아기는 그 어떤 아이들보다 특별한 아이야."

"그게 무슨 뜻이죠?"

"인간에게는 원죄가 있고 그 원죄 중 하나는 모친이 고통을 겪게 한다는 점도 있지. 잉태되고 태어나는 과정에서 타인을 고통스럽게 하는 악행을 저지르는 거야. 하지만 걔는 달라. 태중에 있을 때 모친이 사고로 뇌사에 빠져 산고라는 고통을 겪을 일이 없었거든. 그러니 최대한 죄 없는 상태에서 제물이 되어야 신께서 더 기뻐하지 않겠는가."

 

원식은 속으로 질문을 하지 말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 홍빈은 떨리는 손을 애써 감췄다. 사실 두 사람은 국교를 믿지 않았다. 가정 형편만 아니었으면 군경대에 입대할 일도, 황제와 마주할 일도 없었다. 군경대는 가진 게 건강한 신체 밖에 없는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그나마 나은 직업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재환은 그 어떤 내색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재환."

 

황제가 재환에게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황제의 창백한 손이 살짝 드러났다. 몇 십 년을 통치했다는 황제의 손은 짐작되는 나이에 맞지 않게 고왔다.

 

"그대의 집안 사람들에게 항상 큰 신세를 지고 있네."

"아닙니다. 제국을 위해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잘 부탁한다."

"감사합니다."

“그래, 저들의 시신은 그대들이 처리하도록.”

 

황제가 자리를 떠나고 세 사람은 시신들을 수습했다. 재환은 시신들을 옮기다 한 명이 아직 숨이 붙어있음을 눈치챘다. 아기를 돌보던 여자였다. 여인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는 목소리를 듣기 위해 여자의 얼굴에 귀를 가까이 댔다. 여자는 재환에게 뭐라 속삭이고는 그대로 숨이 멎었다. 재환은 여자가 하는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 동료들과 시신들을 마저 처리했다.

 

 

상혁이 지내는 은신처에는 혁명을 준비하며 훈련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도 다른 어른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각지에서 데려온 규안의 아이들이 보호받고 있었다. 아이들 중 나이게 제일 많은 상혁은 아이들과 곧잘 놀아줬다. 하지만 마음이 제일 가는 아이는 자신과 함께 탈출한 아기였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했다.

 

상혁은 은신처에 지내면서 학연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았다. 황실 습격을 주도한 사람은 학연이었다. 손에 남은 흉터들로 전투의 흔적이었다. 충격적이게도 열아홉 살인 줄 알았던 학연은 사실 몇 십 년을 살았다.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어색한 대답은 이 때문이었다. 상혁의 부모 뻘 되는 사람도 학연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했다. 얼마 후, 상혁은 학연에게 놀라운 말을 들었다. 학연에게 이 모든 일이 가능했던 건 천사가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눈 색깔이 바뀔 때마다 미묘하게 말투나 태도가 달라졌다. 규안일 때는 다정했다면 갈색 눈일 때는 약간의 위압감이 있었다. 그에게 어쩌다 천사가 깃들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묻지 못했다. 학연은 상혁에게 때가 되면 알려주기로 약속했다.

 

 

재환은 황제를 알현했다. 그는 죽은 여자가 자신에게 전한 말을 황제에게 알렸다. 반대파들의 은신처. 탈출한 아이들도 그곳에 있으리라. 황제를 군경대를 소집해 은신처를 습격하기로 했다. 날짜는 몇 달 후에 있을 의식 당일이었다.

 

 

상혁은 오래 전부터 마음에 담았던 질문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곧 황실이 여기를 습격한다고 했던 말, 기억해요?”

“응. 기억나지.”

“어떻게 알았어요? 그것도 천사의 능력인가요?”

“아니, 내가 생각한 거야. 그때 감시자들 중에 있던 우리 측 사람에게 일부러 정보를 흘리게 했어.”

“네? 어째서?”

 

학연이 흉터투성이의 손등을 내밀었다.

 

“그 동안의 황실 습격이 왜 매번 실패했는지 아니? 천사는 본래 공격하는 존재가 아니야. 지키는 존재이지. 그럼에도 계속 습격을 했던 거는 우리의 존재를 그들에게 상기시켜야 했거든. 안 그러면 정말 마음대로 활개칠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정말 마무리를 지어야 해. 은신처의 존재를 일부러 알려서 그들이 습격을 하면 우리는 이곳을 지키기 위해 싸울 거야. 그제서야 천사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어.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여기가 우리의 홈그라운드지.”

“그렇다면 그들이 언제 습격할까요?”

“의식 당일. 그 악마 녀석은 극적인 걸 좋아하거든.”

 

학연의 눈이 갈색으로 바뀌며 번득였다.

 

 

드디어 의식 당일, 황제는 군경대를 이끌고 반대파의 은신처를 습격했다. 바깥에서도 그는 촘촘하게 짠 검은색 베일로 코 밑까지 가렸다.

 

“황실의 적은 모조리 죽여라! 단, 규안의 아이들은 상처 하나 없이 주의하도록!”

 

군경대의 일사분란하게 은신처를 습격했다. 그러나 저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상혁은 아이들이 있는 곳을 지켰다. 그리고 그는 학연에게 은밀한 부탁을 받았다. 학연의 규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황제에게 깃든 악마를 처리할 방법은 하나 밖에 없어. 천사가 깃든 자의 피가 묻은 무기.”

“그렇다면?”

“응. 어떤 무기이든 상관없어. 나랑 황제를 같이 죽여.”

“…….”

“살인을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 줘. 모두를 구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야.”

“어떻게 그런? 왜 저에게 이런 일을 맡기는 거죠?”

“규안의 아이로 시작했으니 규안의 아이로 끝을 내야지.”

 

상혁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과 같은 눈을 한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학연이 자리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경대 세 사람이 아이들의 방을 습격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다고 하지만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자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상혁은 원식과 홍빈에게 제압당했다. 재환이 문을 열었다. 아이들이 겁에 질려 있었다. 재환은 아기를 안아 올렸다. 그들은 상혁과 아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재환의 옷깃을 잡았다.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요! 아직 아기 이름도 못 지어줬는데!”

 

아이들이 일제히 울음을 터뜨렸다. 상혁은 자신을 붙잡은 손의 힘이 약해졌음을 놓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뿌리쳤다. 간신히 원식과 홍빈을 제압한 그는 아기가 재환과 함께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당신들도 지금 이 상황이 잘못됐다는 건 알고 있겠지?”

 

원식이 그 말에 시선을 피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기 어디로 데려갔어?”

“어디겠어. 황제한테 갔겠지”

 

홍빈이 체념한 듯 말했다. 상혁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황제 그 자식 어딨어? 안내해!”

 

 

재환은 건물 입구에서 황제와 접촉했다.

 

“아기를 찾았군. 한상혁은?”

“제 동료들이 곧 데려올 겁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자, 아기를 내게 넘겨.”

 

그러나 재환은 아기를 넘기지 않았다.

 

“내 말 못 들었어? 아이 이리 내!”

 

황제가 아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상혁은 원식과 홍빈의 안내를 따라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와 재환이 건물 입구에 있었다. 아기는 재환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런데 당황스러운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재환이 황제에게 총을 겨누었다.

 

"내 아이한테서 손 떼!"

 

홍빈과 원식은 당황했다.

 

"재환 형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형님, 지금 뭐라고? 형님 아이라구요?"

 

상혁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수용소에 있을 때 아이에게 면회를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의 곁에는 황실에서 고용한 사람들만 있었기에 자신처럼 아이의 가족들도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다.

 

택운은 재환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뭐야? 없던 부성애가 갑자기 생기기라도 한 거야?"

“닥쳐.”

 

재환은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된 선택을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바로잡고 싶었다.

 

 

군경대에 입대하기 전, 재환은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학생이었다. 그는 같은 학과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수석 입학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은 장학생이었다. 이른 나이에도 독특한 작품 세계를 인정받아 장래가 촉망 받는 인재였다. 재환은 자신과 달리 아무런 배경 없이 자기만의 재능과 열정으로 예술을 펼치는 그 사람이 빛나 보였다. 그는 여인이 자신의 마지막 사랑임을 직감했다. 재환은 여인에게 마음을 고백을 했고 여인도 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1년 여의 연애 끝에 그들은 결혼을 결심했다.

 

어른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여인의 부모님은 아직 젊은 나이 때문에, 재환의 집안은 여인의 별 볼 일 없는 집안 배경 때문에. 그들은 긴 설득 끝에 여인의 부모님의 허락은 받았지만 끝내 재환의 집안에서는 허락을 받지 못했다. 두 사람은 관공서에 혼인 신고를 했다. 재환은 집안의 지원이 끊겨 다음 학기에 휴학을 해야 했다. 아내 만은 장학금 덕분에 학업을 이을 수 있었다. 몇 달 뒤, 둘 사이에는 예정보다 빨리 아이가 생겼다. 놀랐지만 기쁜 마음으로 이름을 미리 지어놓았다. 재환은 아르바이트로 번 학비와 생활비를 모으며 아이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예정일을 한 달 정도 남기고, 아내는 친정 식구들과 외출을 했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사고로 아내의 부모님은 즉사, 아내는 뇌사 판정을 받았다. 다행히 뱃속의 아이는 무사했다. 재환은 아이를 꺼내고 아내의 호흡기를 제거하기로 했다. 그러나 인큐베이터 비용을 감당할 돈이 부족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을 찾아갔다. 그들은 재환의 사정을 듣고 조건을 걸었다. 첫 번째, 미술을 그만두고 군경대에 입대할 것. 두 번째, 인큐베이터보다 엄마 뱃속에 있는 게 태어날 아이에게 좋을 테니 예정일까지 호흡기를 그대로 둘 것. 이 조건을 받아들이면 병원비와 향후 아이의 양육까지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재환은 아내를 자신들의 핏줄을 품을 도구로 여기는 그들의 태도에 분개했다. 아이를 꺼낸 다음에 부모님을 찾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는 제안을 거절하면 아이까지 잘못될까 봐 두려워 받아들이기로 했다.

 

훈련소 생활은 힘겨웠다. 하지만 재환은 고위층 집안 출신이라고 편법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김원식과 이홍빈이라는 마음에 맞는 동료들이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그가 훈련소에서 집안의 도움을 받은 적이 딱 두 번 있었다. 원식과 홍빈의 가족의 병원비를 대주기 위해 집안 어른들께 걸 전화를 쓰기 위해서였다. 한 달이 지나 아이의 예정일이 왔다. 재환은 이틀 휴가를 내어 병원으로 갔다. 그는 아내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아이가 나올 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의료진들이 아이를 재환의 품에 안겼을 때 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규안이라니! 아내의 안식을 미루고 자신의 꿈을 버리면서까지 지킨 아이가 규안의 아이라는 사실은 재환을 절망에 빠트렸다. 얼마 살지도 못하고 제물로 바쳐져 죽을 아이였다. 집안 사람들은 아이의 규안을 보고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집안에서는 자진해서 아이를 제물로 바치기로 했다. 이제껏 자진해서 아이를 바친 경우는 없었다. 재환은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네 동료들은 몰랐나 보네. 왜? 지 새끼 버린 인간이라는 비난은 듣기 싫었나?”

 

재환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너희 집안은 살아남으려면 자기 핏줄까지도 자진해서 바친단 말야. 옛날에도 그랬어. 동료들이 죽어나가도 자기만 살겠다고 나를 황제로 추대했거든."

 

원식과 홍빈은 혼란스러웠다. 그들에게 재환은 단순한 동료 이상이었다. 원식은 누나가 조카를 낳았을 때의 병원비를, 홍빈은 어린 여동생의 수술비를 재환 덕분에 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배경으로 거들먹거리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힘든 훈련소 생활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형이었다. 재환이 있어서 그들도 버틸 수 있었다. 그들은 재환이 휴가를 갔다 복귀한 날 딱 하루 어두웠던 얼굴을 기억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식이 규안의 아이라도 그렇지 자식을 죽여달라고 갖다 바친 꼴이 아닌가. 홍빈과 원식은 재환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상혁은 죽은 가족들을 떠올렸다. 부모님과 형은 그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의 삶을 희생했다. 상혁의 존재가 들켰을 때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를 지켰다. 그에게 재환의 말은 변명에 불과했다.

 

"위선 떨지 마! 이제 와서 이런다고 당신이 그런다고 아이를 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때 황제가 비소를 지었다.

 

“쏴 봐. 사람 한 명 죽여본 적 없는 주제에.”

 

황제는 재환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재환이 방아쇠를 당겼다. 황제는 어깨를 맞고 쓰러졌다. 재환은 그를 제압했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그는 뒤를 돌아 동료들을 바라봤다. 자신을 향한 그들의 시선이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재환이 입을 열려 하던 찰나, 갑자기 어깨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황제가 단검으로 그를 찔렀다. 재환은 통증에도 자신의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황제가 베일을 벗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황제의 눈은 규안이었다.

 

“그깟 총알로 날 해칠 수는 없어.”

“그래, 단순히 총알 만으로는 말이지.”

 

황제의 앞을 학연이 가로막았다. 학연을 보는 황제의 눈빛이 갈색으로 바뀌었다.

 

"차학연!"

"정택운, 오랜만이야!"

 

황제, 아니 택운은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학연의 눈도 규안에서 갈색으로 변했다.

 

“재미있네. 은신처가 개판 나니까 기분이 어때?”

“뭘 모르나 본데 은신처가 알려진 건 내 계획이야. 어리석기는”

“쳇! 상관 없어. 니들 모조리 다 쓸어버릴 테니까.”

“이제 규안의 아이들을 죽이는 일은 그만 둬.”

 

학연은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모든 일을 끝내야 했다. 비극의 시작은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은 몇 십 년을 걸쳐 그를 괴롭혔다..

 

 

학연과 택운은 공화정 시절, 6인의 위원회 집안의 자제였다. 그리고 나라가 세워진 후 처음으로 태어난 규안의 아이였다.

 

인간은 소수자를 쉽게 차별한다. 규안인 아이들은 눈 색깔이 노랗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과 잘 섞이지 못했다. 학연과 택운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차별과 편견을 견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그들은 서로 엇갈렸다. 사교적이었던 학연은 규안이 아닌 아이들과 곧잘 친해졌다. 반면 택운은 내성적이어서 학연을 제외하고는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딱히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학연에게 그가 겪은 부당한 일이나 자신의 속내를 얘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일은 학연과 택운이 19살이 되던 해에 일어났다. 위원회는 여러 민족의 토속 신앙을 잡다하게 섞은 종교를 세웠다. 옛날 같았으면 사이비 취급을 받았을 종교였다. 성공적으로 국교를 수립한 위원회는 종교적인 이유를 앞세워 규안의 아이들을 한 명 씩 제물로 바지기로 했다. 국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서였다. 규안의 아이들을 처리할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위원회에게 소수자의 인권은 다른 문제들에 비해 하찮게 여겨졌다. 사실 규안의 아이들은 눈 색깔만 다를 뿐 시력이나 그 밖의 신체적, 정신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다. 국민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위원회의 자제인 학연과 택운 둘 중 한 명을 선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택운은 모범 따위의 문제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규안의 아이를 바칠 것은 제안한 사람이 택운의 아버지였다. 택운의 부모에게 그는 짐짝일 뿐이었다. 어차피 살아있어 봤자 남들에게 외면 받는 삶. 택운은 죽는 게 차라리 편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는 자신이 제물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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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학연은 자신이 죽을지 언정 가장 가까운 친구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는 택운이 살아 남아 세상이 그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곳이라고 느끼기를 바랐다. 그는 택운을 살린다는 조건으로 자청해서 제물이 됐다. 학연의 부모는 그의 선택에 당황했지만 위원회의 체면이 있기에 말리지 못했다.

 

의식 당일, 택운은 그제서야 자신이 아닌 학연이 제물이 됐음을 알았다. 그는 의식이 거행되는 곳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본 의식은 이미 끝났고 남아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제단 위에 쓰러져 있는 학연을 제외하고. 택운은 친구를 보고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나았어. 너라는 친구가 있어서 간신히 버틸 수 있었어. 그런데 이게 뭐야? 내가 의지할 사람은 너 밖에 없었는데! 니가 대신 죽으면 내가 고마워하면서 열심히 살 줄 알았어? 아무리 너라도 내 삶을 마음대로 휘두를 순 없어!"

 

택운은 절규했다. 그는 의식에 사용됐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이딴 어른들한테 이용만 당하다 죽게 되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런 죄 없이 죽는 게 나아. 내가 직접 나 같은 아이들을 구할 거야. 악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그 말 진심인가?”

 

택운은 깜짝 놀라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와 똑같이 생긴, 그러나 눈 색깔 만은 갈색인 남자가 있었다.

 

“당신은 누구야?”

“나? 방금 전에 네가 찾던 악마.”

“악마? 진짜로… 있었어?”

 

택운의 형상을 한 악마가 그에게 다가왔다.

 

“네 몸을 내게 빌려줘. 내 힘을 빌리면 네가 원하는 걸 할 수 있어.”

 

택운은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곧 악마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그는 위원회와 그 일행들이 마무리 연회를 벌이는 곳으로 떠났다.

 

한편, 학연의 숨은 아직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 멀어져 가는 택운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친구를 막을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신께 간절히 빌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거라”

 

그 말과 동시에 몸에 힘이 돌아왔다. 학연은 몸을 일으켰다. 곁에는 학연과 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있었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갈색이었다.

 

“신께서 그대의 기도를 듣고 나를 보냈어. 그대는 친구를 위해 그런 선택을 했겠지. 하지만 선한 의도가 반드시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아. 자, 보렴.”

 

천사가 손을 뻗은 곳에는 거울이 있었다. 옛날 동화에서 나오는 마법의 거울 같았다. 학연은 악마가 깃든 상태로 위원회와 그들의 가족들, 위원회의 직속 부하들을 죽이고 있는 택운을 거울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왜죠? 왜 택운이에게 악마가? 택운이는 지금까지 나쁜 짓을 한 적이 없어요.”

"악마는 악한 자에게만 찾아오지는 않아. 마음이 약한 자에게도 찾아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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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학연에게 손을 내밀었다.

 

"친구에게 깃든 악마는 나의 숙적. 그대의 몸을 나에게 빌려주면 친구를 구할 수 있어. 어때? 받아들일 텐가?"

 

학연은 친구가 악업을 쌓는 걸 막기 위해 천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게 학연은 천사가, 택운은 악마가 깃들었다. 그 영향으로 그들의 육체는 몇 십 년이 지나도 노쇠하지 않았다.

 

학연은 간신히 살아남은 남동생을 찾았다. 동생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형을 반겼다. 그는 학연을 도와 은밀히 오랜 시간을 들여 혁명을 일으킬 사람들을 모았다. 학연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동생은 몇 년 전 황실 습격 때 사망했다.

 

 

“그렇다면 규안은 저주 따위가 아니란 말이지?”

 

상혁의 말에 택운이 미친 듯이 웃었다.

 

“저주 좋아하시네! 아까도 얘기했잖아. 너네 윗세대 녀석들이 갖다 붙인 거라고. 인간들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건 악마한테 갖다 붙이는 습성이 있단 말야! 가끔은 너희한테 한 수 배울 정도야.”

“그래, 규안은 저주 따위가 아니야. 단순한 돌연변이일 뿐이지.”

 

상혁은 분노를 담은 눈빛으로 학연과 택운을 노려봤다. 지금까지 이루어진 학살은 위원회를 포함한 윗세대들의 탓이 제일 크다는 점은 상혁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잘못된 선택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특히 택운의 선택은 자신과 같은 규안의 아이들에게 재앙이었다.

 

결국 택운도 학연과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삶의 의지는 각자의 권한. 그는 규안의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로 생사를 선택할 자격을 박탈한 셈이었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의 생사를 결정해? 단지 같은 규안의 아이라는 이유로? 웃기지 마!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어. 너도 차학연하고 다를 게 없잖아!”

“시끄러워! 날 훈계하려 하지 마. 지금 여기서 죽어버려!”

 

택운이 상혁에게 총을 겨누었다. 학연이 재빨리 그를 제압했다. 그는 택운과 몸싸움을 하며 상혁에게 외쳤다.

 

“지금이야! 어서!”

 

상혁은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눠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학연의 몸을 관통해서 택운의 몸에 박혔다. 천사가 깃든 인간의 피는 악마가 깃든 인간에게 독이었다. 택운은 단말마를 질렀다. 두 사람의 몸을 빛과 어둠이 감쌌다. 빛과 어둠은 뒤엉키며 하늘로 올라가다 크기가 작아지더니 곧 소멸했다. 바닥에는 학연과 택운이 쓰러져 있었다. 둘 다 눈이 규안으로 돌아왔다.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어. 용서 받지 못할 거야. 살아서 속죄할 수도 없겠지 비겁하게도.”

“택운아, 너를 이렇게 만든 나를 용서해줘.”

“아니야, 내 의지로 선택한 결과야. 나한테 죄책감 갖지 마. 학연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에도 우리 친구가 됐으면 좋겠어.”

 

학연과 택운의 숨이 멎자 육신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천사와 악마가 오랜 시간 깃들었던 후유증 탓에 그들의 죽음으로 영혼이 빠져나가자 육체가 한계에 다다라 남아날 수 없었다. 그들의 곁을 지킨 상혁은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남은 일이 있었다.

 

한편, 재환은 자신에게 끝이 왔음을 직감했다. 원식과 홍빈의 응급조치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택운의 칼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었다. 눈꺼풀이 무겁고 손에 힘이 빠졌다. 그는 간신히 눈을 떠 품에 안긴 자신의 아이와 눈을 마주쳤다.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는 시간을 곁에서 함께할 수 없을 것이다. 아이와 어떠한 감정의 교류도 나눌 수 없을 것이다. 그 때 상혁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재환은 아이를 그에게 넘겼다. 그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이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부탁이 있어. 아이가 크면 전해줘.”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아내... 아이 엄마 이름은 백민경이야. 내 이름은 이재환. 아이 이름은… 딸이라면 '소희'라고 짓기로 했어. 소희한테 전해줘. 너를 버려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

 

점점 숨을 쉬기 힘들어졌다. 재환은 자신의 사후에 아내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은 아이를 버린 대가로 지옥에 있을 테니까. 재환은 간신히 팔을 뻗어 아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재환은 입을 벌려 무슨 말을 하려 했지만 끝내 눈을 감았다. 원식은 통곡을 했고 홍빈은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른들이 울자 여태껏 울지 않았던 아기도 따라 울었다. 상혁은 묵묵히 아기를 달랬다.

 

 

제국은 무너졌다. 사람들은 옛날의 민주주의 국가로 돌려놓기 위해 대통령제를 시행했다. 재환의 집안을 포함한 고위층들은 몰락했다. 고위층 대부분이 재판에 회부됐고 무거운 처벌을 받았다. 군경대는 과거와 같이 군대와 경찰로 분리됐다. 제국의 국교는 폐지됐다. 당연히 종교 의식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규안의 아이들의 학살도 중단됐다.

 

원식과 홍빈도 황제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됐다. 그들은 집행유예를 판결 받았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안정적인 소득을 위해 군경대에 입대했고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규안의 아이들이 희생되는 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적이 없음이 인정됐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음을 바꿔 은신처의 사람들과 규안의 아이들을 구한 점도 참작 사유가 됐다. 두 사람은 모든 비극의 진상을 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었기에 규안의 아이들을 보호하던 사람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군경대 소속이었던 점을 감안해 그들은 앞으로 국가기관에서 일할 수 없었다.

 

소희는 상혁이 키우기로 했다. 아이의 어머니 쪽은 남은 친인척이 없었고 아버지 쪽은 아이를 버린 전적이 있어 친권을 잃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은신처에서도 가끔씩 했던 일이지만 혼자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를 도맡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다행히 은신처에서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 가끔 도와주러 와서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다.

 

 

어느 따스한 봄날, 상혁은 소희와 함께 외출했다. 그는 성인이 됐고 아이는 돌이 지나 걸음마를 했다. 거리에는 이따금씩 가족들과 함께 있는 샛노란 눈의 아이들이 보였다. 이제 규안의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눈을 드러내고 바깥을 다닐 수 있었다. 옛 황실을 지지하는 잔당들의 테러가 간혹 있었지만 규안의 아이들에 대한 인식은 이전과는 확연히 변화했다. 상혁은 꽃집을 들러 하얀 국화꽃 두 다발을 샀다.

 

상혁과 소희는 예전에 쉘터가 있던 장소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그 동안 희생당한 규안의 아이들과 아이들을 지키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을 위한 추모 공원이 조성됐다. 그들은 추모 공원과 이어진 뒷산의 공동묘지로 올라갔다. 상혁은 오르막길을 걷기 힘들어하는 아이를 안아 올리다 위에서 내려오는 두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원식과 홍빈이었다. 상혁은 그들이 재환에게 다녀왔음을 눈치챘다. 재환의 이름이 추모비에 새겨지고 유해가 아내와 함께 공동묘지에 합장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공이 컸다.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그때 원식이 멍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다. 아이를 향한 인사였다. 소희는 그들을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원식은 어색하게 웃었고 그걸 지켜보던 홍빈은 코를 훌쩍이며 하늘을 봤다. 상혁은 말없이 목례를 하고 느린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빠이-라고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식과 홍빈은 멀어져 가는 상혁과 소희를 하염없이 바라봤다.

 

산 중턱에 상혁의 가족묘와 재환 부부의 묘가 나란히 있었다. 상혁은 소희를 내려놓았다. 그는 부모님과 형의 묘비에 꽃다발 한 송이를 놓았다. 그리고 아이에게 꽃다발을 쥐어 주어 재환 부부의 묘비에 놓게 했다. 묘지 주변에는 아도니스가 피어 있었다. 상혁은 묘비에 기대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이는 흙장난을 하면서 놀았다.

 

소희가 좀 더 커서 학교에 들어가면 규안의 아이들이 겪었던 일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상혁은 아이의 부모가 누군지, 아버지 쪽 사람들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할 예정이었다. 그는 아이가 그들에게 분노를 하든, 용서를 하든 아이의 선택을 지지하기로 했다. 다만 아이가 맹목적인 분노나 무기력한 체념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휩쓸리지 않게 곁에서 지켜주는 그런 어른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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