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랍택] Guilty
GUCCI - Guilty Absol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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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340_LEO
랜선 연애 : 인터넷으로 하는 연애. 좁은 의미로는 채팅이나 온라인 게임 등의 통신수단을 이용하여 소통하며 사이버 공간에서 하는 연애를 말한다. 통칭으로는 인터넷 등 통신수단을 통해 연애가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온라인에서 만난 두 사용자는 서로의 익명성을 보장하기 위해 절대 만나지 않는다. 시간차를 두어 같은 장소를 방문하거나, 비슷한 시간대에 같은 활동을 즐김으로써 교감을 나누고 이를 인터넷에 다시 올리는 식으로 유대감을 느낀다. 시공간이 한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 방식은 무한하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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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귈래요?]
택운은 눈앞에 뜬 하얀 글자를 내려다봤다. 파란 바탕에 하얀 글씨, 택운이 설정한 단조로운 글씨체였다. 택운이 눈을 비비거나 깜빡여도 내용은 달라지지 않았다. 글자가 둥둥 떠오르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초의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없던 말로 하자는 메세지가 연이어 도착하는 일도 없었다. 액정 너머의 그 사람은 담담히 택운의 대답을 기다렸다. 택운은 잠시 생각을 멈췄다. 졸음이 급격히 쏟아져서였다. 눈가를 꾹꾹 누른 택운은 자신이 얼마나 책임감을 요하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손가락을 놀렸다.
[네.]
온점을 붙일까 말까. 택운은 사소한 걸 고민했다. 붙이면 말이 지나치게 무거워 보였고 붙이지 않으면 경솔해 보였다. 택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온점을 떼고 메세지를 전송했다. 택운의 단어 옆에 1:28이라는 숫자가 떴다. 택운이 옆으로 돌아눕자 이불이 부스럭거렸다. 계속 깔려 있었던 한쪽 어깨가 피가 통하며 저릿저릿했다.
월요일이 시작한 지 1시간 28분 째였다.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는 회사원인 택운에게는 더할 것 없이 맥이 빠지는 사실이었다. 택운은 우울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답장만 기다렸다. 좋다는 말이라도 붙일 걸 그랬나 싶었다. 네, 좋아요. 흔해 빠진 드라마 시작처럼 말이었다. 액정을 빤히 노려보고 있노라니 회색빛 메세지가 상대편에서 올라왔다.
[오늘부터 사귀는 거예요.]
문장에 군더더기 하나 없었다. 하려는 말이 복잡하지도 않았다. 택운이 며칠간 대화해 온 이 사람은 실수로라도 맞춤법을 틀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면에 그런 식의 기본적인 호감이 쌓여 있었기에 뜬금없는 고백을 받아준 거였을지도 몰랐다. 택운은 그 메세지를 한 번 곱씹곤 휴대전화를 껐다. 택운은 감정표현이 짠 사람이었다. 할 말이 없다면 하지 않았다. 대화창 너머의 그도 그간 그런 택운과 대화해왔으니 그 정도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이면 다시 문자를 보내올 사람이었다. 왜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택운은 휴대전화를 머리맡에 툭 튀어나온 충전기에 꽂고 머리를 베개에 바로 눕혔다.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내내 몸을 새우처럼 구부리고 있었던 통에 바로 누우니 허리가 뻐근했다. 눈앞에 새까만 천장이 보였다. 택운의 집은 아파트 중에서도 꽤 높은 층이었는데도 전망에 보이는 차도에 자동차가 지나가면 빛이 스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밝은 액정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이렇게 홀로 남아 돌아오니 현실감이 없었다. 택운은 잠을 재촉하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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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서로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익명성이 높은 한 SNS로 알게 된 그 사람은 처음에는 거래처 직원인 줄로만 알았다. 회사 계정이 아닌 택운의 개인적인 계정이었기에 불편했지만 택운은 내색하지 않았다.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고 서로 팔로우를 했다. 회사 관련 인물이면 지속적으로 정보를 나눠야 할 줄 알아서였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그 사람은 택운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하진 않았지만 택운이 올리는 게시글마다 동조하는 등 말을 걸어왔다. 음식 사진을 올리면 맛있겠다고 한다든지, 일에 지친 푸념을 하면 힘내라는 말을 했다. 택운은 그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이유 없는 단순한 호의일 수도 있었지만 택운이 확실히 알 만한 이유가 없어서 더욱 신경쓰였다. 이제는 거래처 쪽 사람인지도 의심스러웠다. 택운은 혹시라도 친구들 중 하나가 몰래카메라를 펼치고 있는 건 아닌지 주변 지인을 다 들볶았다. 공교롭게도 범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람은 눈치가 없는 건지 택운이 답장을 해 주는 시간차를 조금씩 늘리거나 퉁명스런 어조로 답장해도 꾸준하게 말을 걸었다. 어느 날 스스로 올릴 글을 검열하고 있는 자신을 본 택운은 답답함에 먼저 그 사람에게 쪽지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제 업무용 계정을 알려 드릴게요. 그동안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거래처분과 제 개인적인 계정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조금 불편합니다.]
택운의 말이라면 5분을 채 넘기는 일이 없었던 그가 처음으로 30분가량 택운의 말에 답장하지 않았다. 택운은 후련하게 할 일로 시선을 돌리면서도 계속 답장이 왔나, 혹시 보지 못한 건 아닌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회사에서 휴대전화 소리가 울리면 눈치가 보였던 택운은 진동으로 바꿔 둔 휴대전화가 울리는 순간 알림을 확인했다. 택운이 학수고대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그 사람이 답장을 해 왔다.
[저 거래처 사람 아니에요.]
되려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택운은 그저 알겠다, 아니면 싫다는 대답만 예상하고 있던 터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애초에 어떻게 택운의 계정으로 연락한 건지 그것부터 미지수였다. 택운은 어쩌면 그 말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회사 동료였어도 알기 힘들었겠지만 동료마저도 아니라면 택운의 개인 계정을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아니면 정말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연락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택운은 답장을 하려 꺼내둔 키패드를 쉽게 두드리지 못했다.
그 이후로 며칠 동안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투로 똑같이 행동했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 사람은 매일같이 택운의 게시글에 답장을 했다. 그래도 나름의 오해는 풀렸으니 택운은 더 신경쓰는 사람이 지는 거라는 마음으로 그 사람을 받아들였다. 바로 차단을 할 수도 있었지만 택운은 왜 자신이 진작 그러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사람은 항상 택운이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일어나 있고 택운이 잠들기 전까지 자지 않았다. 택운이 회사에서 점심을 먹으러 나와도, 잠시 외근을 했을 때도 그 사람은 인터넷에 있었다. 대화를 먼저 끊는 건 항상 졸음에 지친 택운이었다. 주로 열린 곳에서 짧게 한두 마디 주고받던 말은 어느새 문자로 옮겨갔다.
둘은 서로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혹시 저 알아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도 그 사람은 모른다는 답장을 보냈다. 취미는커녕 이름도, 나이나 성별도 알지 못했다. 그간 한 대화를 통해 무작정 쌓은 신뢰와 믿음 말고는 기댈 것도 없이 시작한 연애였다. 아직 택운에게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아서 시작한 연애이기도 했다. 좋은 사람이면 계속 만나고 아니면 말고, 어쨌든 택운은 잃을 게 없다는 안이한 생각 덕분이었다.
둘은 서로를 애인이라 부르기로 했다. 아무것도 단정 지을 수 없는 둘의 관계에 가장 적합한 단어라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택운은 애인에 관해 아는 것이 그저 프리랜서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집에 상주하고 원할 때 일어나며 잘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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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소한 커피를 볶는 냄새가 났다. 택운은 그 향을 맡고 있으면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기계가 돌아가며 커피콩을 가는 소리가 나면 얼마 안 가 스팀이 쏟아져나왔다. 카페에서 일하는 바리스타가 라떼아트를 하는 장면을 곁눈질로 바라보는 것도 택운이 즐기는 것 중 하나였다.
"어디 봐?"
튀지 않고 결코 낮지도 않은 목소리가 택운의 턱을 잡아끌었다. 택운은 반쯤 돌아갔던 고개를 제자리로 돌렸다. 학연은 사람을 불렀으면 얘기를 하든지 들어주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하는 것처럼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택운이 할 말은 없었다. 학연을 먼저 부른 건 택운이었고 얘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보릿자루처럼 학연을 방치한 것도 택운이었다. 학연은 얼음이 둥둥 뜬 아메리카노를 소리 나게 빨대로 빨아들였다.
"오랜만에 얼굴 보재서 왔더니. 다 거짓말이지? 결혼하냐?"
"아니."
"난 청첩장 됐어."
"아니라니까."
택운은 한숨을 옅게 쉬었다.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게 빠르겠단 생각에 택운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택운은 잠금화면을 풀고 휴대전화 화면이 천장을 보게 탁자에 바르게 올렸다. 택운은 개인 계정으로 들어가 그간 애인과 나눈 메세지를 학연에게 보여주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학연은 택운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휴대전화를 낚아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엔 꼼꼼하게 읽던 학연은 금방 흥미를 잃었는지 메세지를 대강대강 넘기기 시작했다.
"이게 뭔데?"
"사귀기로 했어."
"주어랑 목적어는 어디 갔는데?"
"...나랑 저 사람이."
학연은 설마 그거 하나 얘기하려고 여기까지 자기를 불러냈냐는 표정으로 택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게 끝이냐는 눈으로 택운을 쳐다보았지만 택운은 입을 조개처럼 꾹 다물었다. 학연은 탁자를 피아노 치듯 두드리다가 말했다.
"우리 오늘부터 1일이에요, 그런 거야?"
택운은 말없이 화면 스크롤을 끝까지 내려 어젯밤에 대화한 내용을 보여주었다. 뜬금없는 고백과, 짤막한 답변, 그리고 확인이 전부였다. 학연은 고백방식이 조금 별나긴 해도 이해할 수는 있지 않냐고 했다.
"서로 좋으면 그럴 수도 있지. 이 사진은 키우는 강아지야?"
문자를 다 읽은 학연은 자연스럽게 애인의 계정으로 들어가 이것저것 훑어보고 있었다. 학연의 질문은 그 사람의 프로필 사진에 있는 강아지를 보곤 한 것이었다. 택운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택운도 애인의 계정을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게시글을 올리진 않고 택운의 글에 말을 걸었던 흔적만 정직하게 묻은 계정이었다. 둘이 사귄다면서 존댓말을 쓰네. 학연은 중얼거리면서 더욱 오래된 게시물로 손을 뻗었다.
"누군데? 근처 지인?"
"아닐걸."
"이름은?"
"글쎄..."
학연은 그 말에 잠깐 스크롤을 내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택운은 자신을 예리하게 훑는 학연의 눈초리를 피했다. 택운의 목소리는 택운이 눈치채기도 전에 한층 작아졌다.
"이름을 몰라?"
"그럴 수도 있지."
"글쎄."
학연은 택운의 말을 따라 하고 휴대전화를 돌려주었다. 이미 학연이 택운을 잔뜩 흘겨보고 있었다. 학연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택운이 그 사이로 빨대를 물렸다. 빨대를 문 학연은 눈만 동그랗게 뜨고 택운을 쳐다봤다. 택운은 그제야 봇물 터진 것처럼 하려고 했던 말을 쏟아냈다. 사실 그 사람에 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고, 그땐 아무 생각 없이 수락했는데 다시 돌이켜보니까 괜히 받아준 것 같았다. 후회스러웠다. 택운은 머리를 탁자에 콩콩 박다가 가볍게 헤집듯 쥐어뜯었다.
"그래서 나 어떡해?"
"화상아."
학연은 택운을 안아줄 것처럼 양팔을 뻗었다가 택운의 등짝을 내리쳤다. 넓은 등에 제대로 맞아들어가 짝 소리가 났다. 맞은 것에 비해 소리가 컸지만 택운은 그대로 엎어졌다.
"다시 헤어지면 되잖아."
"그렇게 갑자기 통보하는 건 별로야."
"솔직히 말해봐. 너도 기대하고 있지?"
택운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학연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중학생 때는 축구에 미쳐 살았고, 고등학생 때는 대학교만 가면 연애할 수 있다는 말에 속아 넘어간 택운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취직하고 일하느라 결국 연애의 연 자도 꺼내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택운이 이 연애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학연은 사람 한 번 제대로 만나본 적 없는 택운이 걱정되기만 했다. 요즘 세상 험한 줄 모르는 택운이 눈에 뻔했다.
"술 취해서 얘기한 건 아니야?"
"그런 느낌은 없었어."
"네가."
술 말고 잠에는 취했었는데. 택운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사실 현재 애인의 고백을 받아준 데에는 여러 복합적인 원인이 섞여 있었다. 호기심도 있었고, 조금 외롭기도 했고, 그냥이라는 이유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택운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학연은 까만 화면을 바라보다가 탐정처럼 휴대전화를 딱 소리내 내려놓았다. 택운이 어떻게 보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학연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다단계네."
"그건 아닐 거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빨리 빠져나와."
학연은 방금 택운이 자신의 입에 물렸던 검은 빨대를 잡고 허공을 휘저었다. 그 끝에서 아메리카노가 조금씩 떨어졌지만 학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다단계는 농담이었겠지만, 택운은 어쨌든 그 하루짜리 연애를 그만두기를 바라는 학연이 못마땅했다. 택운은 부루퉁하게 입술을 툭 내밀었다. 변명 아닌 대책이라도 내 보고 싶었다.
"절대 안 만나면 되지. 내 얘기도 안 해주고."
"이름도 모르고 나이도 뭐도 모르는 사람이랑 연애한다 쳐. 다단계도 아니고 인신매매도 아니고 만에 하나 범죄 조직도 아니라고 해도, 어떻게 사귈래? 그냥 폰 잡고 히히덕거리는 걸로 땡이야? 네 얘기도 안 해주고 그 사람 얘기도 못 들으면 무슨 연애를 해? 차라리 친구 정도로 만족하는 게 훨씬 낫겠다 나는."
예전부터 차학연이 하는 말은 이길 사람이 없었다. 택운은 답답함에 입을 크게 벌렸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학연이 하는 말이 옳았다. 택운은 꿀로 입술을 붙인 것처럼 목소리를 잃었다. 너 예전부터 사람 낯은 엄청 가렸으면서 왜 인터넷으로 만나는 사람한테는 그렇게 유해? 학연은 한참 열변을 토하곤 숨을 돌리듯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아예 얼음도 하나 꺼내 아득아득 씹었다. 한쪽 팔로 턱을 괸 채 한숨 쉬는 학연은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정택운, 인생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갑자기 좋은 사람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고 그러지 않는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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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운은 해가 질 즈음이 되어 뽀작뽀작 집에 들어왔다. 주말이라 상대적으로 피곤이 덜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씻은 택운은 곧바로 소파에 누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홀로 사는 집에 적막이 싫어 텔레비전을 의무적으로 틀어 놓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마무리 지었다. 그런 택운을 기다렸다는 듯 택운이 쥐고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좋은 저녁이에요.]
아무 생각 없이 답장하려 손을 놀리다가 택운은 멈췄다. 아직 학연이 해 준 말이 이명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조용하더라도 언젠가는 애인도 택운에게 만나자고 할 거였다. 그때면 택운이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학연이 우려한 것도 전부 해결되겠지만 택운은 마냥 불편한 마음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역시 이건 잘못된 것 같았다. 어쩌면 택운이 여고생인 줄로만 알고 다가오는 경찰서 횟감 변태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지금에서라도 그만두는 게 나았다. 택운은 잠시라도 헛된 인연을 꿈꿨던 택운이 어렸다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좋은 저녁이라는 말에 어떻게 다시 이별을 고해야 할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게 전부였다.
택운은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처음으로 남에게 이렇게 크게 휘둘려 본 적이 없었다. 당황스러우면 일단 싫다고 했지 마음도 그닥 없는 상태로 누가 사귀잔 대로 사귄 적은 없었던 것이다.
[저랑 왜 사귀는 거예요?]
[그런 얘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냥 궁금해서요.]
[사귀는 거 싫어요?]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택운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직접 얼굴을 대면하는 것도 아닌데 기가 죽었다. 그래서 싫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대답할 수가 없는 택운이 미웠다.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저는 좋아요. 사귀는 거.]
[제가 누군 줄 알고요?]
순수한 질문이었다.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아 직업은 알겠다마는, 아는 게 거의 없는 사람에게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다가가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지 택운은 궁금했다. 그 사람은 잠시 답장이 없었다. 이럴 때만 답장이 늦는 기분이었다. 괜히 물었나 싶어질 즈음에 답장이 돌아왔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문득 택운은 이 대화창 너머에 있는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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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도 부담스러울 거 아니에요. 솔직히 절 그렇게 많이 신뢰하실 것 같지도 않고요.]
택운은 혹시 이 사람이 어디에서 자기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니면 학연이랑 지인인가 싶었다. 사실 학연도 이 사람이랑 한통속이고 택운을 적당히 만류한 것일 수 있었다. 택운의 청개구리 기질을 악용하려고 말이다. 하지만 생각이 더 뻗어 나가기 전에 그건 지나친 억측이라는 걸 스스로 느꼈다. 택운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찰나 애인은 택운의 답장이 돌아오기도 전에 먼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보고 싶어도 만나는 건 보류해둬요. 저도 밖엘 자주 안 나가서 보기 좋은 행색은 아니거든요.]
누가 보고 싶댔나? 오늘 아침에도 나갔다면서 자주 안 나가긴. 순 거짓말밖에 안 해. 택운은 차마 손가락으로 못 낼 말들을 속으로 생각했다. 할 말 못 하게 막힌 입술이 씰룩거렸다. 애인은 택운의 답이 점차 느려지자 귀신같이 택운의 상태를 눈치챘다.
[늦었는데 슬슬 자는 게 어때요?]
[그쪽은 언제 자요?]
[일하기 8시간 전에요.]
택운은 문득 시계로 고개를 쳐들었다. 새벽 1시를 살짝 넘긴 시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8시간 뒤면 딱 택운이 출근해 직장에 앉아 있을 시간이었다. 택운은 놀라움 반 의아함 반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이 말은 하지 않아도 으스대는 것 같았다. 거 봐요, 늦었잖아요. 또 올빼미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상사한테 혼날지도 모르는데요. 택운은 잘 자겠다는 짤막한 인사를 하고 휴대전화를 껐다. 혹시 몰라 휴대전화는 진동으로 해 두었다. 택운의 바람과는 반대로 택운이 까무룩 잠에 빠질 동안 휴대전화가 다시 울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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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여덟 시에 맞춰둔 알람은 잘 울렸다. 알람을 끄고 다시 잠에 빠지려던 택운을 붙든 건 정신을 살짝 흔들고 지나가는 진동음이었다. 단순한 아침 게임 접속 광고였다면 택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진동 하나로 온 알림의 종류를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택운은 직감적으로 휴대전화에 손을 뻗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바로 지금 온 메세지였다. 혹시 미리 예약해두나 싶었다. 택운은 메세지를 보다가 그 위에 있던 내용을 하나씩 지우기 시작했다. 연애를 제안하는 내용도, 아직까지는 만나지 말자는 말도, 택운이 했건 애인이 했건 어제 했던 모든 말들을 하나씩 지웠다. 망설임이 없었던 손은 점차 빨라졌다. 단 두 문장만, 택운의 질문과 애인의 답장만 남겨두었다. 제가 누군 줄 알고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애인이 보낸 문자를 읽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시선이 그 단어에 머물렀다. 이유는 몰랐지만 눈꼬리가 가늘게 접혔다.
[문자 보내고 다시 자나요?]
왠지 프리랜서라는 애인의 유일한 정보가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주 짧은 백수 생활을 했던 택운도 불가피한 자유라는 게 주어지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절제할 이유가 없으면 절제는 먹히지 않는 법이었다. 버틸 수 있을 만큼 잠을 안 자고 버티다가 결국 사흘을 꼬박 새고 한나절을 잠드는 그런 삶일 터였다. 이 사람은 그랬던 택운의 삶이 현재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텐데도 이 사람은 아침이면 문자를 보내고 저녁이면 택운과 대화했다. 택운이 문자를 보낸 시점에서 분침이 두 번 정도 움직였을 때 답장이 돌아왔다.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지금은 아니에요.]
[강아지랑 아침 산책 나가려고요.]
반려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택운과 그간 연락한 계정에 있던 강아지 사진도 다 그 강아지인 모양이었다. 택운은 침대에 다시 털퍼덕 엎어졌다가 히, 웃으며 천장을 보고 돌아누웠다. 애인의 새로운 걸 알아낸 아침이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어야지. 그 사람이 택운에게 새로운 걸 알려 줬으니 택운도 하나쯤은 새로 알려줘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택운은 아침 산책 준비를 하고 있을 그 사람에게 짤막한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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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운은 정시보다 일찍 출근했다. 오늘따라 버스가 막히지 않은 탓이었다. 부장님 안녕하세요, 평소 고개만 꾸벅 숙이고 지나쳤던 택운이 밝게 인사하자 부장의 동공이 크게 떠졌다. 그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택운은 숨죽여 웃었다. 너 어디 아프냐? 부장은 그렇게 물었다. 너 무슨 좋은 일 있니? 라는 표정이었다. 실수든 고의든 바꿔 말한 게 분명했다. 아뇨, 그 한마디로 대답하는데도 택운이 방싯거리며 웃자 부장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택운을 쳐다보았다. 지나쳐가는 택운을 더 잡지도 못했다. 분명 어딘가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은 변화였다. 택운은 자기 자리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11월이어도 택운의 귀에는 벚꽃 노래가 잔잔히 울려 퍼졌다.
점심시간에 탕비실이나 휴게실은 대부분 임자가 있었다. 건강을 명목으로 도시락을 싸와 먹는 사람들이 있었고 택운은 가끔은 먹고 가끔은 안 먹는 식의 점심을 살았다. 아침이 부실했거나 배가 고프면 먹고, 중간중간 간식으로 때웠다면 그냥 넘겨버렸다. 그렇게 점심을 넘겨버리고 나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 오늘은 그닥 입맛이 없었고 택운은 평소처럼 빈 시간 동안 자기가 있을 곳으로 향했다. 사무실을 조용히 빠져나온 택운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는 금방 택운이 있는 층에 다다랐고 택운은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최고층을 눌렀다.
'36층입니다.'
초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으면 순식간에 귀가 먹먹해졌다. 택운은 침을 연달아 삼키며 문을 빠져나왔다. 36층에서 한 층을 더 올라가 철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옥상의 탁 트인 전경이 보였다. 학생 때부터 학교 옥상에 버티고 있던 버릇 못 버린 게 맞았다. 다행인 점이 하나라면 택운은 고소공포증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학교 옥상보다야 몇 배는 높은 그곳에서도 택운은 항상 멀쩡했다. 새파랗다. 택운은 그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아래로 빼곡히 들어찬 키 작은 건물들이며, 검은 차도, 오가는 자동차들이 전부 작은 장난감 조각처럼 보였다.
택운은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아 몸을 움츠렸다. 확실히 추운 날씨였다. 기모를 과신하고 니트 하나만 걸치고 나온 택운이 미련했다. 바람이 안 불어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택운은 팔을 연신 쓸다가 최대한 햇빛이 닿는 자리에 서 난간에 가벼이 기댔다. 햇빛의 온기를 약하게나마 느끼고 있을 때 놓고 온 줄 알았던 휴대전화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액정은 학연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띄웠고 택운은 미룰 것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차학연이네."
"왜 실망스런 목소리지?"
이거 뭔가 있어. 차학연 특유의 뱁새 말투가 통화음을 넘어 들렸다. 특유의 논리가 나온 시점이기도 했다. 또 시작이구나. 택운은 눈을 반쯤 뜨고 학연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왜 전화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그냥 듣기만 하는 게 상책이었다.
"너 그 사람이랑 벌써 진도 뺐구나? 문자에서 전화까지. 이게 정규 교과 진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비교과인가 보지."
누가 차학연이 중등 교사 아닌 거 몰라주기라도 했는지. 택운은 어물어물 답했다. 우리? 벌써 우리 된 거 봐. 학연은 그런 택운의 마음도 모르고 택운을 더 몰아붙였다.
"아직 안 헤어졌지?"
"안 헤어질래."
"너 그러다가 진짜 새우잡이 배 탈 수 있다니까."
"됐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야, 정택-"
왜 전화했나 했는데 이런 거라니. 택운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학연의 목소리가 다급했지만 지금 택운에게 학연은 방해꾼이었다. 남이라면 전부 의심해보고 먼지 나오도록 털어봐야 안심하는 학연에 비해 택운은 자신이 있었다. 괜히 어깨가 우쭐해지고 제멋대로 으쓱이는 것만 봐도 그랬다. 택운은 잠시 어깨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꼭 겉옷 챙겨입고 오기로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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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내려온 오후 두 시의 사내는 딱 잠이 쏟아지기에 좋은 온도였다. 택운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아랫꺼풀에게서 떨어트리려고 갖은 수를 썼다. 눈을 자주 깜빡이고 고개를 젖혀 인공눈물도 넣어봤다. 주변의 시선을 감수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스트레칭까지 했지만 의자에 다시 앉기 무섭게 눈꺼풀은 꿀 붙인 것처럼 착 달라붙어 감겼다. 독서실처럼 조용한 분위기에다 가끔씩 돌아가는 복사기, 프린터 소리 말고는 달칵이는 키보드 소리밖에 없어서 더 노곤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택운은 귀가 시끄러우면 잠을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노래를 찾았다.
손은 금방 흥미 없는 할 일에서 미끄러졌다. 어차피 하기 싫은 일을 미루기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 게 없었다. 세 칸 떨어져 있는 부장님에게 들키지 않는 선 내에서라면 말이었다. 노래를 찾던 택운은 금방 흥미를 잃고 잠깐 게임에 접속했다가 거의 텅텅 빈 갤러리에 들어가 보고, 안 쓰는 계정에 쌓인 스팸메일까지 확인했다. 택운이 마지막으로 다다른 건 몇 시간 전에 대화한 애인과의 메세지창이었다. 말은 걸고 싶었지만 자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택운은 말을 걸고 싶은 상대에게 뭐라고 운을 띄워야 자연스러운지도 몰랐다. 애인 씨? 그건 좀 아니었다. 처음부터 호칭을 좀 편하게 정할 걸 그랬다. 오늘처럼 택운이 어휘력이 달린다는 걸 절실히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택운은 네모난 대화창을 놓고 없는 머리를 끙끙대다가 결국 짧은 한 단어를 써냈다.
[자요?]
시간감각이 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애인은 언제 자고 있을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나름의 선방이라고 스스로 평가를 내렸다. 택운이 홀로 뿌듯해하고 있을 찰나 답장이 돌아왔다. 잠은 자나? 의아해진 택운은 한번 새벽 즈음에 문자를 보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택운이 문자를 보낼 때마다 깨어있지 않았는가. 마음대로 잔다기보단 아예 안 잔다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아뇨. 심심해요?]
어쩌면 잠이 아주 옅게 드는 편이라 택운이 문자를 보낼 때마다 깨는 것일 수도 있었다. 뒤늦게 좇아온 생각에 택운은 애인에게 살짝 미안해졌다.
[그건 아닌데... 제가 깨운 거 맞죠?]
[왜 사람을 벌써 재우려고 해요. 아직 해가 창창한데.]
그건 그랬다. 하지만, 택운은 분명 변명할 말이 많은데 한 마디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해 입술만 움찔거렸다. 택운이 이리저리 여지를 돌려보는 사이 그 사람은 자기 할 말을 택운보다 한 수 앞서 정리한 듯 보였다.
[문자한 이유 있을 거 같은데. 뭔지 물어봐도 돼요?]
하여간 부드럽게 말 돌리는 건 잘했다. 택운이 입술을 앙다문 채 당겨 입 양 끝에 보조개와 비슷한 골이 생겼다. 생각해보니 애인에게 문자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심심해서. 조금 더 살을 붙이자면 회사에서 할 일 좀 미루려고. 고작 그거 때문에 잠을 깨웠다고 하면 택운이라도 화가 날 것 같았다. 택운은 곰곰이 구실을 찾았다.
[노래 듣고 싶어서요.]
구차했지만 택운에게는 떠오르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부디 애인이 좀 넘어가 주기를, 그리고 애인이 택운을 노래 하나조차 제대로 못 찾아서 쩔쩔매는 그런 사람으로 보지만 않기를 바랐다.
[어떤 노래요?]
[그냥 아무거나 좋아요. 새로운 게 듣고 싶어요.]
[아무거나라는 노래가 있었어야 했는데.]
농담이겠지? 택운은 애인의 약간 이해할 수 없는 농담에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다. 애인은 택운이 답이 없자 빠르게 다음 타자를 쳤다.
[그럼 같이 들을래요? 저 지금 듣고 있는 거 있어요.]
[제목이 뭔데요?]
[보내줄게요.]
굳이 보내줄 필요가 있나? 제목만 알려주면 유튜브에 검색할 수 있는데. 택운이 고개를 갸웃할 사이에 음원 파일이 도착했다. 제목 없음-3. 음원이라기엔 이상한 제목이었다. 요즘 음성 녹음도 저런 식으로는 녹음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다. 택운은 반신반의하며 파일을 내려받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예상보다 평범한 음악이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왔다. 기타로 리듬과 기본 멜로디를 잡고 중간중간 다른 악기가 들어와 멜로디를 전개해 나가는 형식의 노래였다. 1분 50초 남짓한 노래에 1분이 지나도 가사가 나오지 않길래 원래 가사가 없는 노래라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 즐겨 듣는 건 대중가요였고, 가사 없는 노래라면 클래식 말고는 모르는 택운에게 이건 분명 생소한 노래였다. 노래가 거의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에 애인이 물었다.
[어때요?]
[나쁘진 않아요.]
빈말은 아니었다. 잔잔한 코드와 강하지 않은 비트가 딱 일하면서 듣기에는 좋은 템포를 유지했다. 그리고 택운은 평가에 짠 편이 아니었다. 택운에게 추천할 정도면 어쨌든 애인의 마음에는 든 곡이라는 소리였다. 택운은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저는 아마 오늘까지는 이거 계속 듣고 있을 거예요. 편할 때 들어요.]
한편으로는 그렇게 좋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좋게 말해서 간단하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음은 음악이라기보다는 여러 음을 모아둔 것에 더 가까웠다. 좋은 사람이야 좋다지만 오늘 하루종일 듣다 보면 질릴 법도 했다. 그래도 개인 취향이겠거니, 택운은 그렇게 생각하고 노래를 들었다. 애인은 별난 음악 취향을 가진 사람이었나 보다. 약 100곡이 안 되게 저장되어 있는 택운의 휴대전화는 금방 다른 노래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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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6시에 회의를 했다. 택운은 신입과 함께 프린트물을 인원수대로 미리 출력해 정리하고 회의실 각 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을 했다. 간단한 다과와 음료는 기본이었고 각 맞추기는 예의였다. 무슨 회사 드라마 말마따나 꼬투리 하나 잡히지 않게 진행해야 했다. 회의 도중에 나온 임원급의 사탕이 좀 달다는 불평 하나가 회의 전체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사탕이 달지 그럼 짠가. 택운은 소금 사탕을 다과함에 가득 채워 넣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몇 번이고 재확인을 한 뒤 비로소 준비가 끝이 났다. 신입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지만 택운은 회의실 준비를 총괄한 격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부담이 더했다. 몇 번이고 손부채질을 한 택운은 마지막으로 혼자서 회의실을 둘러보고 나왔다. 온 신경을 그러모으고 난 뒤엔 녹초가 되어 자리에 눕듯이 기대앉았다. 택운이 준비를 하러 나갈 즈음의 조용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고 사무실 안은 어수선했다. 몇몇 자리는 비어 있기까지 했다. 여러 사람이 가방을 싸고 외투를 챙겨 입었다. 다 외근 나가나? 택운은 그쪽을 흥미롭게 쳐다보다 친했던 사원 하나랑 눈이 마주쳤다.
"택운 씨, 정시에 퇴근해도 좋대요."
"네?"
"부장님이 회의 들어가기 전에 말씀해주셨어요."
말도 안 돼. 그 부장이? 오늘 인사해서 그런가? 택운은 고작 아침에 목소리 한 번 낸 것 가지고 이렇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앞으로도 못 할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좋은 일만 생기는 좋은 날인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운이 좋게도 택운은 일찍 퇴근했다. 퇴근하는데 오랜만에 하늘에 뜬 해를 보는 경험은 아주 색달랐다. 어둑히 지는 황혼을 보며 마음이 붕 뜨면서도 그런 걸 보고 좋아하는 처지에 한탄이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택운에게 닥쳐온 사실은 택운이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고, 이제 저녁에 밀린 취미생활을 즐길 시간이 자그마치 몇 시간이나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택운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매달린 재생 버튼을 눌렀다. 막 노래 하나가 끝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전주가 흘러나와 택운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아, 그 사람이 보내 준 노래였다.
긴 구름이 주홍과 분홍빛이 섞인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 구름은 끝도 없이 뻗어 방금 택운이 나온 회사의 위를 건너갔다. 쌀쌀했지만 맑은 하늘이었고 택운은 목도리를 고쳐 매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새 몇 마리가 비행하며 향하는 하늘의 한쪽 구석은 푸르다 못해 짙은 남색의 수채화였다. 전신주에 다닥다닥 붙은 채 반쯤 뜯겨나간 전단지, 파란 청테이프 조각들, 한산한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행복해 보였다. 택운은 발걸음을 옮겨 그 거리에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지금도 듣고 있을까?
택운이 숨을 쉴 때마다 시린 입김이 하늘로 퍼졌다. 가벼운 의문도 희뿌연 김을 따르듯 택운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아무런 가사도, 전하려는 의미도 정해지지 않은 노래를 듣다 보니 생각이 많아진 탓이었다. 애인은 이 노래를 오늘 내내 듣고 있을 거라 했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도 듣고 있을 것이었다. 그 사람은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지만 하는 말은 믿음직스러웠다. 그러니까 택운은 믿어보기로 했다. 같은 음악이 지금 두 사람의 귀에서 울리고 있을 것이었다. 택운이 한평생 듣도보도 못한 음악이었으니 꽤 인지도가 낮은 편일 것이었다. 그러면 전 세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한국에서는 단둘이서만 지금 듣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았다. 단둘이서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제목없음-3' 이라는 노래에 걸맞는 생각은 아마도 서로에게 서로밖에 없을 터였다.
거리 어딘가에서부터 맛있는 호떡 냄새가 풍겼다. 택운은 공연히 미소를 짓곤 총총 뛰듯이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들고 있는 가방이며 신발이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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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토요일 오전, 택운이 카페에 도착하기 몇 분 전에 택운은 애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애인이 택운의 눈에 띄지 않고 그 카페에서 나올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서였다. 애인은 택운에게 카페에서 나왔다는 말을 했다. 서로의 인상착의는 묻지 않았다. 아주 만약에 마주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일은 없었다. 방금 지나쳤던 저 사람이진 않을까. 시도 때도 없이 그런 생각이 들어 택운은 주책 맞게 가슴이 떨렸다.
[어느 자리예요?]
[창가 모서리에서 세 번째 자리요. 2인용 협탁.]
애인의 말대로 창가 세 번째 자리가 비어 있었다. 택운은 자리를 뺏길까 가방만 툭 놓고 곧바로 주문대로 걸어갔다. 만약 애인이 몰래 자신의 자리에 앉는 사람을 지켜본다면 택운을 못 알아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택운은 자신에게 먼저 이 수수께끼같은 연애를 제안한 사람이니만큼 그가 먼저 택운을 알아내려 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문을 하러 간 택운은 괜히 메뉴판만 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평소처럼 카페라떼를 시키면 될 일이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애인이 시키진 않았지만 택운은 기왕 해보는 연애 제대로 해 보잔 생각이었다. 택운은 주문을 기다리는 직원에게 자기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가 오기 전에 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시켰던 걸로 주세요."
"네?"
직원이 반문했지만 택운은 꿋꿋하게 했던 말을 한 번 더 읊었다. 민망함에 귓가가 조금 홧홧해졌지만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었다. 직원은 조금 이상한 표정으로 택운을 바라봤지만 택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진 않았다. 택운은 고개를 푹 숙이고 카드를 내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직원이 뭐라고 하는 것도 전혀 들리지 않아 고개를 대충 끄덕이거나 젓기만 했다.
택운은 진동벨과 영수증 한 장을 들고 돌아와 앉았다. 오늘따라 주문이 힘들었다. 택운이 몸을 편하게 앉히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느껴지는 게 있었다. 어렴풋이 느껴지는 이질적인 향은 건조하고 질 좋은 목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분명 비싸고 둔탁했다. 이런 곳에는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은근하게 사람을 이끌었다. 택운은 깊은 숲에나 찾아가야 맡을 수 있을 것 같은 독특한 향을 찾아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지만 그 근원지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택운은 허공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지만 오로지 택운의 근처를 감싸던 은은한 향은 이제 갈 곳을 잃은 것처럼 점차 옅어질 뿐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택운은 직감했다. 이 향수는 분명히 방금 다녀간 애인이 쓰던 향일 것이었다.
택운은 애인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히 여성을 목표로 하고 제작된 향수는 아닐 터였다. 코 끝에 살짝 남은 향이 더 맡고 싶은 미련을 더했다. 택운이 혹시 어딘가에 더 향이 남은 곳이 있지 않을까 손을 살살 허공에 흔들어 볼 찰나에 진동벨이 울렸다. 택운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운터에 가서 받은 음료는 택운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마셔보지 않은 것이었다. 시도해보지도 않은 것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택운은 김을 모락모락 뱉는 그 검은 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차가워도 마실까 말까였는데 심지어 뜨거운 것이었다. 아메리카노에서 김과 같이 퍼진 향이 아주 옅게나마 남아 있던 향수의 잔향을 전부 잡아먹었다. 택운은 잠시 고민하다가 사진부터 찍었다. 따뜻한 잔을 조심스럽게 들고 창밖을 배경으로 해 손만 나오도록 사진을 찍었다. 애인에게 보낼 증거 사진이었다. 찍는 김에 손이 나오지 않은 배경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구름 한 줄이 갈라진 하늘은 오늘따라 새파랗고 청명했다.
택운은 그래도 시도는 해보자는 마음에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었다. 4800원을 그냥 버릴 만큼 마음이 부자인 편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개찼던 택운은 반 모금도 더 입에 담지 못하고 바로 떼어내야 했다. 입 안 가득 퍼진 쓴맛은 고사하고 택운에게는 지나치게 뜨거웠다. 막 끓는 찌개는 먹어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도통 적응이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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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온 택운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골랐다. 아무런 생각 없이 커피와 손이 나온 사진을 보내려고 사진을 선택했다. 하지만 전송에서 잠시 멈춘 택운은 선택했던 사진을 무르고 손이 나오지 않은 배경 사진을 올렸다. 인스타그램에 사진이 올라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누군가가 흔적을 남기고 갔다. 애인이었다. 카페가 어땠냐는 질문이었다. 택운은 휴대전화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던 자기 손으로 시선을 뻗었다. 하얗고 길다지만 누가 봐도 여자 손은 아니었다. 택운은 계속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궁극적인 질문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애인이 정택운을 알게 된다면 싫어하진 않을까?
저 건너의 사람이 생각하고 있던 이상형과 정택운이 지나치게 많이 달랐던 탓에, 어쩌면 그게 하필이면 정택운이라, 싫어할지도 몰랐다. 택운이 아마도 같은 남자라서, 나이가 적은 편은 아니라서, 문자로 보이는 것만큼 밝은 성격이 아니라서, 모든 게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번 생각하니 끝도 없게 느껴졌다. 아무리 편견을 가지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간 서로를 알아가면서 택운이 나름대로 애인의 모습을 구축해놓은 것처럼, 그 사람도 택운의 형태를 두루뭉술하게나마 가지고 있을 거였다. 택운은 거기에 어긋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애인이 구체적으로 택운의 모습을 상상했다고 말한 적은 없으니 택운도 특정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건 갑자기 툭 떨어진 불청객이자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이젠 남성이라는 자신의 기본적인 모습마저 고민하게 된 것은 그 애인이 남자여서였다. 향수는 약했지만 택운에게 그 간단한 사실 하나 정도는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애인은 당연히 택운이 여성이길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택운은 점차 아파지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나는 어떻게 반응했더라. 택운은 애인이 남자라는 걸 알았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잠시 뜨거운 커피와 향에 취해서 생각도 내려 놓았었나 보다. 애초에 정택운은 사람을 연애 대상으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아들 혹은 동생이 연애하는 걸 알게 된다면 30센치는 펄쩍 뛸 부모님과 누나들이 있었다. 남자든 여자든 만나본 적이 없어서 택운에게 사람의 감촉은 어쨌든 허구의 무언가였다. 물론 상상과 현실은 다르겠지만, 머릿속으로 상황을 전개했을 때 남자라고 해서 갑자기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았다. 진짜 안 해봐서 그런 거겠지만. 택운의 상상 끝에는 항상 자조적인 말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애인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른다는 거였다. 택운보다 어릴 확률이 높았고 택운에게 말하는 걸로는 봐서 처세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뒤집어 말하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안다는 거였고 그건 많은 사람을 만나봤다는 뜻도 되었다. 그게 택운을 한층 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애인은 분명 못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좋은 일이었지만 동시에 그렇지 않은 택운을 초라하게 느끼게 했다.
[카페 어땠어요? 제가 자주 다니는 곳이에요.]
방금 전에 확인했던 메세지가 벌써 몇 분 전을 달려갔다. 택운은 의미 없이 좋았다는 답장을 하려다가 문자를 지우길 반복했다. 분명 카페에서 사진을 찍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렇게 기분이 우울하진 않았다. 커피 한 잔에 사라질 옅은 향 하나 때문에 이렇게 축 처질 수도 있나 싶었다. 택운보단 조금 더 애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의 모습이고 싶었다. 택운은 어느새 애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을 좋아해요?]
본의 아니게 질문에 답장이 아닌 새로운 질문을 했다. 택운은 무엇이든 좋으니 택운이 바꿀 수 없는 것만 아니기를 바랐다.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오는 것들 말이었다. 쾌활한 성격이 좋다고 한다면 고쳐보면 되고, 마른 사람이 좋다면 살을 빼면 되었다. 애인이 바라지 않았어도 택운이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애인이 택운을 보고 행복해하길 바랐고 그거 하나 때문이었다.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택운 혼자서는 그런 생각을 고쳐먹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던 택운에게 선을 긋는 것처럼 답장이 왔다.
[남의 눈치 안 보는 사람이요.]
택운에게 선을 긋는 느낌처럼 다가왔다. 그 무엇이든 간에 따라할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건 분명히 택운을 위해서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어떻게 항상 듣고 싶은 말만 골라서 해요?]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정말 독심술이라도 있는 건지, 사실 택운을 잘 아는 사람이라서 그런 건지, 이 모든 게 장난인 것인지. 잠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번처럼 기다리는 시간이 초조했던 적은 몇 없었다. 손가락이 간질거렸지만 택운은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이상한 질문이 올 때마다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더라고요. 웬만하면 정답이고요.]
[그럼 진짜 이상형은 남의 눈치 안 보는 사람이 아니겠네요.]
[그렇긴 하죠.]
담담했다. 택운은 문득 애인의 어조가 부러웠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애인은 진짜 이상형을 말해주진 않았지만, 택운은 이제 더이상 이상형을 캐묻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건 알 필요가 없었다. 이 작은 네모창 안의 사람은 택운의 생각보다도 훨씬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학연의 말을 빌려 정말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오롯이 택운에게 찾아온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한 사람이었다.
그저 어리광부리고 끝낼 사이도 아니고 택운도 어엿한 성인이었다. 그런데도 택운은 끝도 없이 불안한 탓에 항상 애인에게 부담만 주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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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안에는 따뜻한 팝콘 향이 진동했다. 본래 영화관이라고 한다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찌든 팝콘 냄새를 맡으며 설렘 가득한 마음을 다스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택운은 영화 한 편을 보고 나오면 온몸에 찐득하니 두터운 버터향이 묻어 나오는 게 싫었다. 영화를 보고 난 뒤면 다른 곳을 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워졌다. 평소에는 잘 맡지 못하던 진한 냄새를 맡다 보니 아무리 맛있는 향이라도 금방 코가 피로해지는 것도 이유였다. 택운은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관을 끊은 지가 약 몇 년이 넘었다.
실로 오랜만에 온 영화관은 새로운 것투성이였다. 낯선 것도 많고 사람도 많아 택운은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치였다. 택운은 미리 예매해 둔 자리표를 찾고 메뉴판 앞에 서서 고심하다 갑자기 생각난 애인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슨 팝콘 먹어요?]
영화 보러 왔다고 먼저 말할 걸 그랬다. 잠깐 후회가 스쳐 지나갔지만 택운은 애인이 그 정도는 알아들을 거라고 믿었다. 조금 억지스럽더라도 택운은 이제 그만큼 애인을 믿었다.
[저는 영화 볼 때 팝콘 안 먹어요.]
누가 뭐랬나. 사람은 역시 믿을 구석 하나 없댔다. 택운은 메세지를 못 본 척 휴대전화를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고 캐러멜 팝콘과 사이다 한 잔을 샀다. 기왕 데이트 하는 거 비슷하게 해야지 않겠냐는 마음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정말 이 팝콘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간식 하나를 안 먹었다고? 그건 분명, 애인이 이상한 거였다. 힘주어 말할 수 있었다.
카드를 내밀고 한 품 가득 음료수와 팝콘을 받은 택운은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직 영화가 시작하려면 꽤 남은 시각이었다. 예매를 미리 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영화관에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면 30분은 미리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런 택운같은 사람들이 꽤 많았는지 영화관은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한 다른 시설들로 가득이었다. 택운은 한 어린아이와 어머니가 인형 뽑기 기계 앞에서 인형을 구경하는 걸 꿀 떨어져라 바라봤다. 멍청한 표정의 포켓몬 인형이 한가득 쌓인 인형 뽑기는 탐이 났지만 시도해보고 싶진 않았다. 택운은 인형을 뽑는 데는 재주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 큰 성인 남성이 혼자 인형 뽑기 앞에 죽치고 있는 모습도 상상하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택운이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한 남자가 인형 뽑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그 앞에 척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계산대에서 바꿔온 것 같은 천 원짜리 다발이 그의 한 손에 수북이 들려 있었다. 택운은 구경꾼이 되기로 했다. 그는 지폐 한 장에 집게를 세 번 움직이며 인형 뽑기를 시도했다. 택운은 빨대를 입에 문 채 그걸 구경했다. 어차피 택운에게는 등지고 있는 모습이라 마음 놓고 구경해도 들킬 게 없었다. 한참동안 열정적으로 조이스틱을 조종하던 그는 어느새 돈이 다 닳았는지 기계를 발로 한 번 차곤 사라졌다. 결국 인형은 못 딴 모양이었다. 택운은 남자가 헤집은 탓에 위치는 조금 바뀌었지만 결국 달라지지 않은 인형들을 바라보았다. 멍청한 표정이 되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갇혀 있는 건 자기들인데도 말이었다.
택운의 배는 핫팩을 품은 것마냥 따뜻했다. 아직 팝콘이 자기들은 따뜻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택운은 달달한 냄새를 풍기는 카라멜 팝콘을 하나 집어 먹었다. 되도록이면 천천히 먹으려고 참고 있었지만 영화관 팝콘은 원래 영화 시작 전에 다 거덜나기 마련이었다. 택운은 문득 달달한 것들을 씹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혼자여도 다 할 건 하는구나. 애인이 없었더라면 택운은 애초에 이렇게 홀로 주말에 나와 영화를 보는 일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택운에게야 애인의 유무 때문이라지만, 어쨌든 택운을 보는 다른 사람에게는 혼자 영화를 보는 사람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영화관 안은 북적거렸고 인산인해였는데도 택운이 앉은 벤치의 일정 반경 내로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택운은 기분이 묘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간 옆에 아무도 없다고 해서 외롭지는 않았다. 정확히 말해서 택운은 외로울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랑 가야 하는 곳을 혼자서 간다던지 하는 일 말이었다. 택운은 할 일이 없으면 집에 틀어박히길 가장 좋아하는 척했고 혹시라도 보고 싶은 영화가 생긴다면 역시나 기다린 뒤 집에서 봤다. 애써 애인이 있어서 온 거라고 합리화를 마치더라도 택운이 혼자 영화를 보러 나왔다고 생각할 사람들에겐 일일이 해명할 수 없었다.
애인은 며칠 전에 이미 이 영화를 봤다고 했다. 똑같이 영화관에서 봤다고 했다. 애인도 그때 택운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공허함을 이겨냈을지는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족한 정보와 직감을 그러모아 예상해보길 애인은 그런 걸 신경조차 쓰지 않을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혼자 소비해야 할 시간이 떨어지면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었다.
택운이 앉은 긴 벤치의 맞은편 끝에 두 명이 다가와 앉았다. 택운과 마찬가지로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지 영화 표 두 장과 팝콘을 옆구리에 낀 채였다. 택운은 그 두 사람을 멍하니 바라봤다. 나란히 앉아 정답게 서로 어깨를 기대고 있지만 두 사람 모두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있었다. 마치 싸우기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떠한 기류도 없었다.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끼리 피치 못한 사정으로 영화를 같이 보러 왔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였다. 설마 저 사람들도 저걸로 둘이서 대화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서로가 바로 옆에 있는데. 둘이 계속 휴대전화만 두드리고 있자 급기야 든 생각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서글픈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택운은 저 사람들의 현실보단 택운의 현실이 한 숟가락 정도는 더 슬플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오늘 볼 영화는 대충 애인의 설명만 듣기로는, 신파극이랬다. 사회에 나오면서부터 학자금 대출에 생활은 험난하고 매달 월세 내기도 빠듯한 그런 뻔한 설정의 여자 주인공이 등장한다. 심지어는 집에 얹혀사는 숨 쉬는 쓰레기 같은 남자친구도 있댔다. 남자친구에게는 이미 권태기가 와 여자 주인공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지만 여자 주인공은 그런 남자 주인공에게 연민을 느껴서 아직까지 월셋방에 같이 살게 놓아둔다. 고되고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살아나가는 그런 인생 드라마랬나. 별로 안 중요한 스포일러 하나 하자면 마지막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이랑 헤어져요. 되게 뻔한 영화긴 한데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택운은 꺼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문자 하나를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화 지금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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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어땠어요? 괜찮았죠?] - 5:13
[아직 안 끝났어요?] - 5:18
[무슨 일 있어요? 걱정되는데.] - 5:22
[잘 자요.] - 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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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운은 그 이후로 애인에게 답장하지 않은 채로 사흘을 보냈다. 정확히 말해서 애인도 그 이후로 사흘간 택운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애인이 마지막으로 보냈으니 택운이 그다음으로 찾아가는 게 옳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애인은 항상 택운에게 아침저녁으로 문자를 해주었다. 택운은 그닥 할 말이 없어 애인에게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냥이었다. 생각을 정리해야 한다는 얄팍한 핑계 하나조차 없었다. 시계를 들여다볼 때마다 불편함 반 초조함 반으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택운은 그 쉬운 잘 잤냐는 인사 하나 먼저 보내지 않았다. 만일 먼저 애인이 아무런 일도 없었단 것처럼 문자를 보내준다면,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게 답장할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절대 먼저는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대로 끝날까 불안해졌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올 문자를 상상할 수가 없어 더 착잡했다. 택운은 그 끝을 찾아볼 자신이 없었다.
애인에게 문자가 온 건 토요일이었다.
[할 말이 있는데요.]
꼭 마음 정리를 끝냈다는 듯한 어조였다. 애인은 택운이 토요일에는 바쁘지 않다는 걸 알고 일부러 오늘을 선택한 게 분명했다. 택운이 정 할 말이 없어 침묵하더라도 택운이 확실히 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생각은 그대로 맞아들어갔고 택운은 그 할 말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묵직한 분위기가 택운의 손을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정 힘들면 그만해도 괜찮아요.]
쿵. 둔탁한 감각이 심장 고동이 되어 뛰었다. 척추에 찌르르한 감각이 올라오는 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아직 제대로 듣지도 않았지만 택운은 알 수가 있었다. 사람에겐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리고 그 직감이 지금 택운의 귓가에 대고 소리 질렀다. 지금 저 너머의 애인이 택운에게 이별을 고할 거라 느껴졌다. 고하는 것도 아니었다. 시작도 끝도 제안이었던 계약 연애에는 합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택운은 턱을 잠시 위로 들었다가 모른 척을 해보았다.
[뭘요?]
[저도 알아요. 갑자기 인터넷으로 사람 만나는 게 의심스럽고 마음 여는 것도 어렵다는 거.]
[불안하긴 했지만 그동안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았어요.]
당신이 정말 괜찮은 것처럼 보여서. 당신 보면 괜히 마음이 불편해져서 더 잘 챙겨주려고 했던 건 사실이에요. 택운은 애써 모른척해 봤다. 애인은 그래 왔던 택운의 수고를 무참히 까뒤집었다.
[그때 연락 끊긴 날부터 생각 많이 해 봤어요. 그쪽은 제가 그쪽을 마음에 뒀던 것보다는 저를 더 가볍게 생각해왔던 것 같아요.]
애인이 하는 말은 작은 부스럼조차 긁어낼 수가 없었다. 오목조목 따져 말하는 방식은 다정했고 틀린 것도 없었다. 택운이 할 말을 생각했다가도 잃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저 오면 오는가 보다 하는 식으로 문자를 받기만 했던 사람하고 아침저녁으로 상대를 챙겼던 사람하고 그 노력의 가치를 매기라면 어느 쪽이 더 무거울지는 뻔한 대답이었다. 택운은 다음 말로 무엇이 나올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련 많이 남고 붙잡아보고 싶지만 싫다는 사람 안 잡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요.]
고작 그 정도로 표현하고 끝낼 수 있는 게 예의였다. 밤낮없이 본인 컨디션대로 자고 일어나야 했을 텐데 택운이 일어날 아침이면 꼬박꼬박 같이 일어나 문자를 보내고, 밤이면 택운이 잠들 때까지 같이 있어줄 정도였다. 그 사람은 아직도 택운을 더 생각해주었다. 오해로 점철되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까지 말이었다. 그 사람은 계속 잘해왔지만 마지막에 한 줄을 틀렸다.
[인터넷으로 낯선 사람 만나는 게 문제였어요?]
[꼭 그런 건 아니었지만요. 복합적으로. 제 말 무슨 뜻인지 알잖아요.]
[인터넷 아니면 되잖아요.]
알기야 알았다. 차고 넘치게 이해시킨 게 그 사람이었다. 하지만 택운은 모른척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겨우 붙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택운의 마지막 말에는 답장이 없었다. 애인이 지금 부연 설명이 필요한 문장에 열심히 주석을 다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 사람은 항상 신중했다. 택운은 더 망설일 게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한 번만 만나줘요. 그리고 결정하면 되잖아요.]
왜 멋대로 그만하라고 해. 택운은 결국 그 그쪽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결정이 아니라 다시 생각해달라는 뜻이었지만 택운에겐 그걸 번복할 정신도 없었다. 택운은 항상 답이 결정된 채로 주어지는 선택지에 눈물이 나서 못 견딜 지경이었다. 저 뒤편에선 보이는 것도, 돌아오는 답장도 없었지만 분명히 며칠짜리 애인이 계속 화면을 주시하고 있을 거라고 택운은 확신했다. 어떻게 답장해야 할지 전혀 감조차 못 잡은 채로 택운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사실 보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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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티지한 느낌으로 연출한 카페 안은 낡은 나무 향이 나면서도 아늑했다. 신발 아래로 느껴지는 러그의 촉감마저도 부들거렸다. 처음 애인이 쓰는 향수를 마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어려웠던 향은 전부 날아가고 가장 밑바탕에 깔린 은은한 나무 향만이 퍼졌다. 택운은 다 쓴 향수병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왜 굳이 애인이 여기에서 만나자고 했는지 택운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애인은 어쨌거나 생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었다.
사람도 얼마 없고 한산한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려니 주문도 하지 않았는데 간단한 음료와 쿠키가 나왔다. 택운이 잘못 나온 줄 알고 손사래를 치자 카페 주인은 이상하단 듯한 눈빛으로 택운을 흘겨봤다. 레오 씨 아니세요? 미리 예약해두셨잖아요. 레오는 택운이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별칭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분명히 택운이 모르는 일이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택운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이 일의 배후에는 분명 애인이 있을 것이었다. 입술이 데지 않을 정도로 미지근한 모카 라떼가 택운의 앞에 놓여 있다는 건 한층 그 신빙성을 높여 주었다. 택운은 라떼를 홀짝였다. 익숙한 단맛이 한층 부드럽게 택운의 빈속을 달래주었다. 택운은 하릴없이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지만 결국 다다른 건 대화창이었다. 절대 독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이 만남에 혼자 속 태우고 초조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직 그 사람과 택운이 약속한 시간이 되지도 않았지만 택운은 계속 문 너머를 보려고 고개를 길게 뻗었다. 택운은 발을 동동 구르다 못해 손가락이 저절로 움직이는 경험을 했다.
[언제 도착해요?]
[거의 다 왔어요.]
마치 택운의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답이 왔다. 괜히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원망스러워 답장을 빤히 노려봤다. 미리 예약해둔 거 그쪽이죠? 택운은 그렇게 물으려다가 문장을 지웠다. 답이 확실한 질문을 굳이 해야겠냐는 생각이었다. 해야 할 말은 따로 있었다.
[잘 먹었어요. 맛있더라고요.]
[저보다 일찍 도착해 있을 것 같았거든요.]
어느 순간부터 주어가 없어도 통하고 있었다. 즐거운 일이었다. 택운은 잠시 휴대전화를 내려놓았고 라떼가 식기 전에 몇 모금을 더 마셨다. 나무 향이 나는 쿠션 하나를 가져와 배에 안고 있으니 조용한 클래식 음악만 흐르는 카페 안에서 딸랑이는 종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릴 때마다 흔들리는 것이었다. 택운의 시선이 절로 그쪽으로 돌아갔다. 막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자마자 마주친 시선에 택운은 엉거주춤 일어섰다. 훤칠한 키에 택운이 예상했던 대로 남자였다. 축 처진 눈은 웃는 모양이 예쁠 것처럼 생겼다. 머리카락은 짧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택운에게 걸어오는 짧은 시간 내내 택운에게서 시선을 놓지 않았고 택운도 눈을 맞췄다. 택운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그렇게 놀라거나 심각해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계속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웃음이 나왔다.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택운에게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해준 그 사람에게서 누구보다 다정한 향이 느껴졌다. 그 사람은 미소를 지은 채 택운을 바라봤다. 서로 어떻다고 인상착의를 얘기해주지도 않았는데 이미 상대를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목이 간지러운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김원식입니다."
"정택운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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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