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의 도서관
BYREDO - BIBLIOTHÈQUE
에피네프린
@epinephrine_Y
누나가 사라졌다. 그런데 아무도 택운의 쌍둥이 누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택운은 미칠 것 같았다. 그날 누나를 더 적극적으로 막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죄책감에 괴로웠다. 누나의 실종은 김원식, 그 자식 때문이 틀림없었다.
김원식은 택운의 집 근처 구립 도서관의 신입 사서였다. 택운과 누나는 책을 좋아해서 도서관을 자주 들렀다. 그래서 사서들과도 친분이 있었고 누나는 당연히 원식과도 친해졌다. 그런데 택운은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원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이유 없이 불편했다. 무엇보다 원식이 곁에 있으면 도서관 냄새가 났다. 오래된 책들이,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책들이 모여서 나는 냄새였다. 어쩌면 사서에게 걸맞은 체취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택운은 원식이 곁에 있으면 불안한 이유가 그 향 때문이 아닐까 추측했다.
원식이 나타난 직후 도서관에는 특별 전시회가 열렸다. 누나를 통해 원식이 아이디어를 냈다고 전해 들었다. 전시회 첫날, 전시회장에는 박물관에 있을 법한 고서적들이 진열됐다. 실제로 박물관에서도 보관만 하고 전시는 잘 안 하는 책들이라고 했다. 택운은 전시관에 들어갔을 때 봤던 누나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눈빛이 반짝이다'라는 표현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날부터 누나는 매일 학교가 끝나면 도서관에 갔고 주말에도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가끔 너무 늦는다 싶을 때 택운이 누나를 찾으러 갔다. 그러면 누나는 특별 전시회장에 진열된 책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책도 전보다 자주 빌렸다. 택운도 누나가 책을 빌리면 한 두 권은 같이 읽었다. 누나가 빌린 책에는 유독 고전 소설을 많았다. 고등학생이었던 누나의 행동은 부모님의 걱정을 샀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누나는 교내 시험과 모의고사에서 전교 순위권의 성적으로 부모님을 안심시켰고 그 후로는 부모님도 뭐라 하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 누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했다.
"나 도서관 좀 갔다 올게."
"또? 지겹지도 않냐?"
"사서 오빠가 보여줄 게 있대."
"아, 김원식이?"
"어쭈? 이름 막 부른다?"
"뭐, 어때. 면전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도 아닌데. 야,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부른다고 그렇게 덜컥 가? 솔직히 그 녀석이 누나 너 유인해서 뭔 짓을 할 지 모르잖아."
"얘 말하는 거 봐라. 원식 오빠는 그런 사람 아냐."
"무슨 근거로?"
"있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통하는 감."
택운은 누나의 막연하고도 낙관적인 발언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김원식… 형이 뭘 보여준대?"
순간 누나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거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야 돼."
누나가 택운의 귀에 속삭였다.
"『설공찬전』의 뒷부분이 발견됐대."
『설공찬전』은 누나가 제일 좋아하는 고전소설이었다. 1997년 이문건의 『묵재일기』 이면에 발견됐을 당시 뒷부분이 적혀있지 않아 아주 짧은 분량인 소설이었다. 원본이 특별 전시회에 진열된 책이기도 했다. 누나는 묘한 느낌이 마음에 든다며 몇 번이나 『설공찬전』이 수록된 책을 빌렸다. 누나가 전시회장에서 들여다보는 책도 『설공찬전』이었다. 택운도 누나가 빌린 『설공찬전』을 읽었을 때 묘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누나와 택운이 겪은 묘한 느낌이 사뭇 달랐다. 누나가 단순히 흥미로워 했다면 택운에게는 꺼림칙함이 더 컸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문서를 일개 사서가 고등학생한테 보여주겠다니 수상했다.
"그걸 왜 너한테 보여줘?”
"왜겠어? 내가 그 책에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 아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리고 나 혼자 가는 거 아냐. 나랑 같은 반인 연주 알지? 걔도 같이 가기로 했어."
"안 가면 안 돼?"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가든가."
택운은 잠시 고민했다. 누나가 원식과 같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택운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여러 번 봤었고 그때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무엇보다 누나 친구가 같이 간다니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늦으면 자신이 데리러 갈 테니 괜찮겠다 싶었다.
"에이, 됐다. 니 말대로 별 일 있겠어? 나중에 어땠는지 얘기나 해줘."
하지만 누나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따라 저녁 일찍부터 잠이 쏟아져 누나를 데리러 가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누나의 신발이 안 보였다.
"엄마, 누나는 먼저 갔어요?"
"뭐?"
"누나요. 누나 오늘 학교 일찍 갔어요?"
택운의 엄마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풋 웃었다.
"얘가 아침부터 이상한 말을 하네. 너한테 누나가 어딨어?"
택운은 엄마야말로 아침부터 이상한 말을 한다 생각하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 들으셨어요? 엄마가 저한테 누나가 없대요."
"너야 말로 뭔 소리야? 니가 무슨 누나가 있어?"
"아빠까지 이러시기예요? 있잖아요, 쌍둥이 누나."
"요놈 봐라. 너 외아들이잖아. 왜 아침부터 갑자기 있지도 않은 누나를 찾아?"
택운이 보기에 부모님의 표정은 진지했다. 불길한 느낌이 들어 누나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방 안에는 누나의 책상이며, 옷가지, 소지품들은 하나도 없이 온갖 잡동사니로 채워져 있었다. 택운은 방에서 나와 거실 벽에 걸린 가족 사진을 봤다. 사진에는 부모님과 택운, 세 사람 밖에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택운은 부모님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학교로 달려갔다.
택운은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누나네 반으로 갔다. 교실에는 누나의 친구인 연주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연주!"
"어? 나? 나 찾은 거야?"
"그래, 너."
연주가 쭈뼛거리며 택운에게 왔다. 누나의 친구이지만 택운과 연주가 단 둘이 얘기를 나눈 적은 처음이었다.
"무슨 일이야?"
"우리 누나 어딨어?"
"누나… 라니? 누나가 누군데?"
"너 내 쌍둥이 누나랑 친구잖아! 너랑 같은 반! 누나가 너랑 구립 도서관 같이 간다고 나간 다음에 사라졌다고!"
택운의 외침에 연주가 놀라 눈이 커졌다. 연주는 택운의 가슴에 붙은 명찰을 확인했다.
"나 어제 도서관에 안 갔는데?"
"그게 무슨…."
"우리 반에 정 씨인 여자애는 없어. 반 잘못 찾아온 거 아니야? 니 누나 이름이 뭐니?"
대답할 수 없었다. 누나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택운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연주를 뒤로 하고 교실을 나섰다. 하지만 자기 반으로 가는 대신 학교를 벗어나 구립 도서관으로 갔다. 김원식을 찾아야 했다. 택운은 원식이 속한 어문학 자료실에 들어갔다. 원식은 없었다. 대신 이 도서관에 오래 근무해서 택운 남매와 친한 사서가 있었다.
"어? 이 시간에 어떻게? 오늘 학교 쉬어요?"
"김원식. 여기 신입 사서 김원식 어디 있어요, 누나?"
"우리 도서관 신입 사서 중에 김원식이라는 사람은 없어요."
"김원식이 여기 특별 전시회 아이디어 냈잖아요! 6층에 있는 고서적 전시회요!"
"여기는 그런 전시회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여기는 5층 건물이에요."
"그럴 수가…. 그럼 『설공찬전』은요? 우리 누나가 『설공찬전』 뒷부분이 발견됐다는 얘기에 여기 간다고 한 뒤로 돌아오지 않았는데…."
"처음 듣는 말인데요. 그런 얘기가 나오면 사서인 제가 모를 리가 없죠. 설령 사실이라도 그런 건 대학 연구소나 전문 기관에서 관리하지, 구립 도서관하고는 무관해요. 그런데 학생, 학생한테 누나가 있었어요? 경찰에 실종 신고는 했어요?"
택운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누나가 사라졌는데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제일 의심스러운 사람도, 사건의 근원도 모두 사라졌다. 결정적으로 유일하게 누나를 기억하는 자신이 누나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머리가 아팠다. 곁에 있던 사서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지며 택운은 그대로 기절했다.
택운이 눈을 떴을 때는 병원 입원실이었다. 의사는 택운에게 신경쇠약 판정을 내렸다. 그는 입원한 동안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틈만 나면 누나의 행방을 물었다. 택운의 부모님과 친구들은 택운이 이러는 게 입시 스트레스 때문이라 여겼다. 결국 택운은 점차 누나를 없는 사람이라 받아들였다.
퇴원하고 며칠 후, 택운은 연체 도서가 있다는 문자에 방을 뒤졌다. 자신의 방에는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기억 속 누나의 방이었던 창고 방으로 갔다. 그 방에서 『설공찬전』이 수록된 도서관 책을 찾았다. 무심코 책을 펼치자 비단에 금박이 붙은 서표(書標-책갈피)가 있었다. 누나가 친구들과 북촌에 놀러 갔을 때 들른 금박 공방에서 직접 만들었다는 서표였다. 택운은 누나의 서표를 끌어안고 숨죽여 울었다. 누나가 실존했음을 이 서표가 증명했다. 단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제외한 모두에게 잊혀졌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의 택운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연체 도서를 반납한 후 다시는 구립 도서관에 가지 않았다. 대신 어디를 가든 항상 누나의 서표를 간직했다.
시간이 흘러 택운은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은 재수를 해서 나쁘지 않은 곳으로 들어갔다. 학과는 누나가 가고 싶어했던 학과를 선택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택운은 독서 동아리에 가입했다. 그리고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이홍빈을 만났다. 그 후로 다른 동기들보다 홍빈과 제일 친해졌다. 알고 보니 사는 곳도 가까웠다. 홍빈이 누나와 친구였던 연주의 사촌 동생임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좀 지난 후였다.
어느 날, 택운은 평소처럼 홍빈과 둘이 대학 도서관에서 빌릴 책을 고르고 있었다.
"형, 이번에 구립 도서관에서 특별 전시회 연대요. 같이 갈래요?"
"아니, 안 가."
"에이, 형, 고서적 전시회래요. 박물관에서도 보관만 하고 전시는 잘 안 하는 책들이라고 들었어요. 집 근처에서 그런 거 볼 수 있는 기회 흔치 않잖아요. 원식이 형이 아이디어 낸 거라 이 참에 형한테도 원식이 형 소개해주려고 했는데."
택운은 멈칫했다. 찾았다. 그 생각이 택운의 머리를 스쳤다. 김원식은 누나에 이어 친한 동생까지 나한테 뺏으려는 걸까. 택운은 이를 악물었다. 친구인 홍빈마저 누나처럼 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갈게.”
“진짜죠? 그럼 이번 주말에 가요.”
주말 오후, 택운과 홍빈은 구립 도서관으로 갔다. 택운으로서는 오랜만에 들르는 도서관이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김원식이 계단 난간에 기대고 있었다.
"드디어 왔군."
"김원식!"
"오랜만이다, 정택운."
"우리 누나 어딨어!"
"알고 싶어? 그렇다면 따라와."
택운은 원식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홍빈이 어리둥절해하며 그들을 따라가려 했다.
“너는 여기 있어.”
“형, 무슨 일이에요?”
“나중에 설명해줄게. 이따 보자.”
“알았어요. 기다릴게요.”
택운은 원식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오르고 올라 5층을 넘어 6층에 도달했다. 눈앞에는 긴 복도가 있었고 복도 끝에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원식이 문을 열자 오래된 책 냄새가 훅 끼쳤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는 오래된 책들이 책꽂이에 진열되어 있었다.
“여기는 금서의 도서관이야”
“금서의 도서관?”
“옛날부터 인간들이 제 입맛대로 금서라 낙인 찍은 책들을 위한 안식처.”
“무슨 구립 도서관에 이런 곳이 있어?”
“이곳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도서관이지.”
그 말에 택운은 이곳이 평범한 장소가 아님을 직감했다.
“그리고.”
원식이 택운의 멱살을 잡았다.
“그 불손한 의도로 책을 없애고 죄 없는 자들을 희생시킨 사람들을 벌하는 곳이기도 하지.”
택운이 원식의 손을 뿌리쳤다.
“그게 나랑 누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원식이 한 쪽 입꼬리를 올렸다.
“데려오거라.”
그 말을 신호로 어둠 속에서 세 명의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뒤에는 불탄 흔적이 역력한 한복을 입은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얼굴과 온몸에는 화상의 흔적이 가득했다.
"누나?"
"……."
"어떻게 된 거야, 누나?"
택운은 물집이 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누가 이런 짓을? 김원식 저 자식이 그런 거야?"
"누나, 누나, 누나. 진짜 못 들어주겠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에 택운은 뒤를 돌았다. 어느 틈에 홍빈이 들어와 있었다.
"…홍빈아? 여긴 어떻게? 언제 들어왔어?"
"그렇게 친근한 말투로 부르지 말아주시겠어요?"
홍빈은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택운을 노려봤다.
"인사 드리겠습니다. 저는 500여 년 전 당신의 누님과 인연이 있었던 성주 이씨 집안의 이홍빈이라고 합니다."
"뭐라고?"
택운은 홍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이름을 기억 못하는 건 당연해. 처음부터 너한테 누나는 없었으니까. 정확히는 이번 생애에는 말이지. 오늘을 위해 네 기억을 ‘약간’ 조작했지."
"누나가 없다고?
기가 막혔다. 택운은 누나와 함께했던 추억들을 떠올렸다. 기억 속의 누나는 택운에게 큰 의지가 되는 존재였다. 그런데 원식의 말대로라면 누나와 관련된 모든 기억이 거짓이었다는 말이 된다. 택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기억이 거짓이면 감정도 거짓인 걸까. 그렇다고 해도 가슴 한가운데가 너무나 아팠다.
"그럼 이 사람은?"
"정확히는 '전생의' 너와 남매의 연을 맺었던 여인이지."
택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머리를 감싸 쥔 택운을 보며 홍빈이 입을 열었다.
"그대 누이와 나는 벗이었습니다."
500여 년 전이면 조선시대인데 그 시대에 남녀가 친구였다니. 택운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믿기지 않겠지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일반적이지 않은 인간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저희도 그런 사이였지요."
홍빈은 눈을 감았다. 그에게는 정 소저를 처음 만났던 500년 전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홍빈과 정 소저는 한양에서 처음 만났다. 소설을 구하기 위해 방문한 책쾌(책의 매매를 중개하는 상인)의 집에서였다. 그 책쾌는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김 선생'이라 불렸다. 김 선생은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아서 원하는 책을 구하려면 자주 들러야 했다. 안에 들어가니 장옷을 어깨에 걸친 여인이 김 선생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여인이 홍빈과 눈을 마주쳤다. 잠시 멈칫하더니 다급하게 복주머니에서 동전 몇 닢을 꺼내 김 선생에게 쥐어줬다.
"구하느라 고생 많았소, 김 선생. 다음에 또 오리다."
여인은 김 선생에게 책을 받았다. 그리고 장옷을 머리에 두르고 재빨리 뛰쳐나갔다. 홍빈은 김 선생을 봤다. 김 선생은 홍빈에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의미를 눈치챈 홍빈은 저만치 멀어진 여인을 다급히 쫓았다.
"이보시오."
홍빈이 여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신을 경계하는 여인의 행색을 살피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보아하니 양반 댁 여식인데 대낮이라지만 하녀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니, 평범한 성정의 여인은 아니구나 싶었다.
"그대가 김 선생한테 구한 책, 채수 선생의 『설공찬전』이 맞지요?"
『설공찬전』은 상주에서 시작해 조선 전역에 큰 인기를 끈 소설이었다. 주인공인 '설공찬'이 귀신이라는 설정과, 그 귀신이 조선 전반을 지배하는 유교를 비판한다는 파격적인 내용이 읽는 사람의 마음을 후련하게 했다. 특히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사람들을 더 자극했다. 그러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해 어지간해서는 구하기 힘든 책이었다.
홍빈은 여인에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저는 성주 이씨 집안의 이홍빈입니다. 청이 있어 실례를 무릅쓰고 그대를 막았습니다. 혹시 괜찮다면 저에게 빌려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여인이 장옷을 벗고 얼굴을 드러냈다. 여인은 굳은 표정으로 홍빈과 눈을 마주쳤다.
"성주 이씨 집안이면 제가 엮여 좋을 게 없습니다."
"혹시 정 대감 댁 여식입니까?"
"그걸 어떻게?"
"저희 집안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말에 짐작했지요. 소저, 집안 어른들의 문제에 우리가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책이 귀한 건 소저도 아실 테지요. 간곡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정 소저께서 다 읽으시면 저에게 빌려주십시오. 언제가 되든 상관 없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정 소저는 홍빈의 정중한 제안에 고민되는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감았다.
"좋습니다. 사흘 후에 김 선생 집 앞에서 뵙지요."
소저는 홍빈에게 인사하고 자리를 떠났다. 홍빈은 행여 소저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약속한 날이 될 때까지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약속한 날에 김 선생의 집으로 가자 다행히 소저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자주 만나 각자가 갖고 있던 소설을 교환했다. 제일 자주 교환한 책은 물론 『설공찬전』이었다. 그들은 주로 김 선생의 집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의견에 대체로 수긍하고 때로는 대립했다. 그러다 각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 그들은 서로를 제일 잘 이해하는 벗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홍빈은 김 선생의 집 근처에서 한 사내를 만났다.
"그대가 성주 이씨 집안의 이홍빈입니까?"
홍빈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 소저와 조금 닮은 얼굴이었다. 정 소저의 쌍둥이 오라비인 정택운이었다.
"정택운?"
"누이 때문인가.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그대는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관직에는 관심이 없다지요? 사대부 집안의 사내라면 소설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걸 감추기 마련인데, 그대는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말입니다.”
홍빈이 머쓱해했다.
"헌데."
택운이 홍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 누님과는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소."
"저희 집안과 그대의 집안이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때문입니까?"
"잘 알고 있군."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만 당신의 누이는 제 소중한 벗입니다."
그 말에 택운이 큰 소리로 비웃었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사내와 여인이 벗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내나 여인이나 같은 인간인데 벗이 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얄팍한 소설 나부랭이나 읽는 자의 머릿속이란 이해할 수가 없구려. 다시 한 번 경고하겠소. 그대가 진정 내 누님을 소중히 여긴다면 누님 앞에 나타나지 마시오. 혼인도 안 한 남녀가 가까이 지낸다면 둘 중 누가 더 큰 질타를 받겠소?"
홍빈은 대답할 수 없었다. 택운은 홍빈을 잠시 노려보고 자리를 떠났다.
며칠 후, 홍빈은 마지막으로 정 소저를 보기로 결심했다. 지기지우(知己之友)와의 이별은 마음이 아팠지만 자신 때문에 소저가 곤란해져서는 안 된다 생각했다. 그들은 정 소저의 집 앞에서 몰래 만났다.
소저가 한숨을 쉬었다.
"제 오라비 일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소저께서는 괜찮으십니까?"
"저도 괜찮아요. 사실 어릴 때는 제 오라비도 소설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빨리 관직에 올라 집안의 버팀목이 되라고 성화하는 통에 소설을 멀리하게 됐지요. 그 덕분에 일찍 급제하게 됐지만 정치 싸움이 힘겨운지 점점 냉정해졌어요."
소저는 슬픈 기색을 내비쳤다. 홍빈도 그런 벗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런 세상이 온다면….”
“네?”
“『설공찬전』에 그런 구절이 있잖습니까. '이승에서 비록 여자의 몸이었더라도 약간이나 글을 잘하여 저승에서 어떤 소임이라도 맡으면 잘 지낸다'라구요. 만일 그런 세상이 온다면 관직 말고도 뭐든 할 수 있겠죠.”
“네. 그렇겠죠.”
“그런 세상이라면 여인뿐 아니라 사내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압한다는 자체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격이니까요.”
"동의합니다."
"홍빈 도령,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 제가 선물로 『설공찬전』을 드리겠습니다."
"『설공찬전』을요? 하지만 그건 소저도 어렵게 구한 책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 벗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지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가져다 드릴 테니."
하지만 소저는 집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당황한 표정으로 홍빈에게 달려왔다.
“없어졌어요! 아마 택운이가 그랬을 거예요. 금서를 처리하는 일을 책임진다고 들었거든요.”
“아… 『설공찬전』이 금서가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수거할 줄이야.”
며칠 전, 조정에서는 『설공찬전』이 나라의 체제와 반정으로 세운 현재의 왕실을 부정하고, 귀신이 나오는 이야기로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여겨 금서로 지정했다. 책은 모두 수거해 불태우기로 결정했고, 소지한 자들은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요망한 내용이 담긴 책을 숨긴 죄를 다스리는 법)로 엄히 다스린다는 어명이 내려졌다.
홍빈과 소저는 크게 낙담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침묵을 깨고 소저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우리의 연을 끊지 말아야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지요. 김 선생을 통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저는 인사도 없이 급히 집으로 들어갔다. 홍빈은 이번만큼은 소저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다음날, 홍빈은 김 선생의 집에서 정 소저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궁궐의 뜰을 가득 채웠던 『설공찬전』이 버려진 창고에 모여 있고 곧 불태울 예정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오라비와 오라비의 벗들이 나눈 대화를 엿들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홍빈은 정 소저의 집을 찾아갔다. 마침 정 소저가 집을 나서고 있었다.
"제가 갔다오겠습니다."
"안 됩니다. 그러다 소저께서 위험해집니다. 책 때문에 위험한 일을 하다니요."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꿉니다. 저는 『설공찬전』도 그런 책이라 생각해요. 걱정 마십시오. 그곳에 제 오라비와 오라비의 벗들이 있습니다. 설령 들키더라도 누이인 저 한 명 정도는 몰래 빼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저도 같이 들어가겠습니다.”
"안 됩니다. 택운이가 도령은 절대 봐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저에게 맡기세요. 정 걱정되면 창고 근처까지만 같이 가요. 대신 혹여 제가 위험해지더라도 숨어 있으셔야 해요."
홍빈은 다짐에 다짐을 하고 소저를 따라 버려진 창고로 갔다. 소저는 홍빈에게 장옷을 맡겼다. 다행히 창고를 지키는 사람은 없었다. 소저는 재빨리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저가 들어간 직후, 무관의 복식을 하고 횃불을 든 세 명의 사내가 나타났다. 그들은 소저가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문을 잠갔다. 그리고 횃불은 창고 안으로 던졌다. 홍빈은 눈앞의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세 사람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들이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창고에 접근할 수 있었다. 다행히 불이 생각보다 빨리 번지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저! 괜찮습니까?"
"홍빈 도령!"
책 한 권이 불길을 뚫고 홍빈에 발치에 던져졌다. 홍빈은 불이 붙은 책을 급히 껐지만 절반 이상이 타버렸다. 홍빈은 도움을 청하고 싶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한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누구냐!"
"절 두고 가요! 들키면 도령께서 위험해져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인간된 도리로 그럴 수 없습니다!"
"택운이 목소리예요! 아까도 말했지요. 제 오라비라면 저 하나는 빼줄 수 있다고요. 그러니 어서 가요!"
홍빈은 혼란스러웠다. 망설이는 동안 택운의 모습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는 소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가까운 뒷골목에 숨었다. 소저의 비명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하지만 택운은 잠시 문 앞을 지켜보더니 그대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목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비명이 멎었다. 이 모든 일을 홍빈은 그저 지켜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소나기가 내려 불길이 금방 사그라들었다. 비가 그치자 다시 불을 피우기 위해 세 남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잔해 속에서 화상을 입고 쓰러진 여인을 발견했다.
"이 여인은 누구지?"
"책을 몰래 빼내려던 것 같습니다, 학연 형님. 어차피 국법을 어겼습니다. 대가를 치른 것이지요."
"그걸 떠나서 우리가 안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도 안 하고 불을 피웠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재환아."
"골치 아프게 됐습니다, 형님들."
“여기서 뭐해?”
“택운아.”
택운은 세 사람의 발치에 쓰러진 여인을 발견했다. 여인의 몸에는 노리개 대신 매달린 서표가 붙어 있었다.
“이건 서표?”
“용케도 불타지 않았습니다. 택운 형님.”
재환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택운은 대답이 없었다. 택운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누이의 서표를 알아봤다. 하지만 애써 침착하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멍석에 말아 뒷산에 묻어버려. 너무 깊게 묻지는 말고. 상혁아, 네가 옮겨."
“네. 알겠습니다.”
세 남자들은 멍석을 가져와 여인의 몸을 감쌌다. 그들 중 제일 체격이 큰 상혁이 여인을 안아 올렸다. 그들은 뒷산으로 갔다. 홍빈이 뒤를 밟았다. 그들이 땅을 파 소저를 묻는 모습을 눈을 피하지 않고 지켜봤다. 그들이 떠나고 홍빈은 맨손으로 흙을 팠다. 멍석을 걷어내자 화상을 입은 소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벗의 참혹한 모습에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소저의 숨이 희미하게 붙어 있었다. 홍빈은 장옷으로 소저의 몸을 덮고 자신의 집으로 옮겼다.
그는 몰래 의원을 불렀다. 의원은 소저의 상태를 보고 가망이 없음을 알렸다. 화상이 심해 피부가 벗겨지고 몸 곳곳에 물집이 잡혔다. 연기를 너무 많이 흡입한 탓에 폐가 제 기능을 못했다. 홍빈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소저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뿐임을 깨달았다. 두꺼운 이불로 소저의 몸을 덮었고 소저가 의식이 돌아올 때면 술을 먹여 통증을 잊게 했다. 사흘이 채 지나지 않아 정 소저는 홍빈의 곁에서 숨이 멎었다.
홍빈은 비밀리에 정 대감의 집에 사람을 보냈다. 갑작스레 딸이 사라졌으니 걱정할 게 당연했다. 천륜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정 대감의 식솔들이 소저의 시신을 수습하고 떠나는 모습을 마음이 아파 볼 수 없어 방에 틀어 박혔다.
"하나 뿐인 벗을 죽게 한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홍빈이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책쾌 김 선생이었다.
"내 방에는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다 수가 있습니다."
"인간이 아니군요."
"오, 제법이로군."
홍빈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복수? 네, 하고 싶습니다. 인간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그들을, 하나뿐인 벗을 죽게 한 그들을 처단하고 싶습니다."
"나한테 맡기게."
홍빈은 그대로 쓰려졌다. 숨이 멎은 그의 눈에는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소저가 목숨과 맞바꾼 『설공찬전』은 죽은 홍빈의 방을 정리하던 성주 이씨 집안의 가까운 친척이 보관했다. 후에 그의 후손이 『묵재일기』의 이면에 『설공찬전』을 필사했다. 그 덕에 일부나마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홍빈은 환생한 후, 사촌 누나인 연주를 따라 구립 도서관에 갔다. 그곳에서 정택운을 목격했다. 그 순간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자신의 벗을 죽인 정택운이 합당한 벌을 받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홍빈의 곁으로 김 선생, 원식이 다가왔다.
"방해꾼들 때문에 벌을 주지 못했네."
"그래서 이대로 두고 보고만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것이야. 대신 그대의 도움이 필요하네."
"좋습니다."
그들은 계획을 짰다. 원식은 택운의 기억을 조작했다. 그 덕에 택운이 소중한 사람을 잃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원식의 도움으로 그의 곁에 접근할 수 있었다. 홍빈은 때를 기다리며 택운이 등을 보일 때마다 이를 갈았다.
택운은 홍빈과 원식이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택운이 겪었을 리 없는 기억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내면에서 휘몰아쳤다.
"너는 그곳에 네 누이가 있는 걸 알면서도 외면했어! 누이가 숨이 막히고 살이 타 들어가는 고통에 괴로워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
"그럼 어떡하라고! 자칫하면 누님 때문에 연좌제로 우리 집안 모두가 처벌을 받을 수도 있었어!"
"그건 그대가 융통성을 발휘하면 아무 문제 없었어."
"나도! 나도 누님처럼 맘 편히 소설을 읽고 싶었어! 그런데 집안을 위해서 일부러 멀리 했다구! 그래, 난 누님을 질투했어. 내가 봤을 때 누님은 다른 여인들보다 훨씬 혜택을 받으면서 살았어.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어. 어이가 없더라구. 그래서 그곳에 누님이 있는 걸 알면서도 홧김에 외면했어! 하지만 누님을 죽게 할 생각은 없었어. 조금 더 일찍 구하려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난 그때 누님이 이미 죽은 줄 알았어. 얼굴을 다치고 사지를 쓸 수 없더라도 내가 평생 돌보고 속죄하고 싶었는데 너무 늦어버렸어…. 그 후로 나에게 남은 삶은 지옥이었어! 내가 환생하기 전에 벌을 줄 것이지, 이제 와서 왜!"
"그거라면 저 녀석들 때문이지."
원식이 팔을 뻗어 누나의 곁에 있는 남자들을 가리켰다.
"저들의 얼굴을 자세히 봐."
택운은 그들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낯이 익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얼굴을 보던 택운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학연아… 재환아… 상혁…아…."
"이제야 떠올렸나? 그대의 벗들을."
택운은 세 사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택운의 옛 친구들도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원식이 세 사람과 택운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이 어리석은 자들이 신의를 위한답시고 나를 방해했거든."
“나 때문에 너희들이….”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구. 어차피 이곳에서 벌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어. 주어진 형벌을 다 받았지만 그대 때문에 환생도 못하고 이곳에 갇혀 있었지.”
원식이 세 사람을 돌아봤다.
"너희는 이제 이곳을 벗어나도 좋다."
학연, 재환, 상혁은 슬픔과 연민이 담긴 눈빛으로 택운을 바라봤다. 잠시 후, 세 사람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나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택운은 목놓아 울었다. 원식이 입을 열었다.
"그대의 사연이 안타깝지만, 그대의 고통과 불행이 악행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어."
택운은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누나의 서표를 지금까지 간직했던 이유를, 누나가 가고 싶어했던 학과로 굳이 진학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늘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
"당신이라면 할 수 있겠지."
원식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나랑 누나를 바꿔줘."
택운은 항상 간직했던 누나의 서표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누나에게 다가가 서표를 누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서표가 손에 닿자 누나는 택운이 알던 모습으로 돌아왔다. 누나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택운아.”
택운은 누나를 끌어안고 또 다시 목놓아 울었다. 한참을 울다 진정하고 누나와 눈을 맞췄다.
"누나, 미안해. 그때 누나를 외면해서 미안해. 너무 늦게 사과해서 미안해. 누나가 그 시기에 겪었을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 않은 것도 미안해. 누나, 다 잊어. 과거도, 이곳에서의 기억도, 나도. 읽고 싶은 거 읽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줘."
원식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원식이 누나의 머리에 손을 얹자 누나의 눈이 감겼다. 바닥에 머리가 닿기 전에 홍빈이 택운의 누나를 붙잡고 안아 올렸다. 택운은 홍빈과 눈을 마주쳤다.
"홍빈아."
홍빈은 여전히 원망 섞인 눈빛으로 택운을 노려보고 있었다.
"누나를 부탁해."
"그쪽이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그럴 거니 신경 끄시죠."
홍빈이 등을 돌려 출입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잠깐만."
택운의 부름에 홍빈이 멈칫했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고마워. 짧은 시간이었고 너는 진심이 아니었겠지만 내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잊지 않을게."
홍빈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택운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고 누나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를 속삭였다.
"안녕. 희아 누나."
희아를 안은 홍빈이 출입문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이홍빈."
원식의 부름에 홍빈이 뒤를 돌았다.
“이제 네 역할은 다 했다.”
“정택운은 마땅한 벌을 받겠죠.”
“당연하지. 그러니….”
원식이 홍빈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너도 이제 그만 잊거라."
홍빈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홍빈은 자신이 안고 있는 벗이 혹시나 다칠까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희아를 끌어 안았다.
홍빈이 눈을 떴을 때 도서관 창문을 통해 보이는 바깥이 캄캄했다. 오늘따라 오래된 책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폐관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았는데 몇 시간이 지났다. 홍빈은 옆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는 선배를 깨웠다.
"누나, 희아 누나, 일어나요."
희아가 자신을 부르는 속삭임에 눈을 떴다.
"아우, 너무 깊게 잤나 봐. 몸이 무겁네."
"저도 오늘따라 한 것도 없는데 피곤하네요. 누나, 여기 이제 문 닫을 시간이에요."
"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
희아가 급한 마음에 책상에 늘어놓은 짐을 서둘러 가방에 넣자 홍빈이 진정시켰다.
"천천히 해요, 누나."
"오케이. 거의 다 됐어."
"이번에도 『설공찬전』 빌리네요?"
"응. 하도 읽었더니 이제 다음 내용이 짐작이 갈 정도야."
"에이."
"진짜야. 얘기해줄까?"
희아가 책을 펼쳤다. 책 사이에는 희아가 직접 만든 서표가 끼워져 있었다. 홍빈이 씨익 웃었다.
"나중에. 나중에 얘기해줘요, 누나."
두 사람은 빠진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도서관 정문에 도착할 즈음, 희아가 스마트폰을 꺼냈다.
"홍빈아, 연주가 치킨 쏜대."
"오오, 진짜요?"
"근데 나만 사준대. 니 꺼는 내가 사래."
"하하, 그게 뭐야. 연주 누나 진짜."
희아와 홍빈은 대화를 나누며 도서관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잠에서 깨어 도서관을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두 남자가 지켜보고 있음을 눈치채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