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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mhole

magnlogan - wormhole

라율

@SeRenDifiTy_V

  • 트위터 - 블랙 서클

가끔 신이 원망스럽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원망스럽고 또 원망스럽다.

 

하지만 너만큼이나 하늘이 원망스러울까.

 

 

무능한 나 때문에

넌 몇 번이고...

 

 

 

 

끼이익 -

 

 

 

 

같은 죽음을 반복해야만 하는데.

 

 

 

 

 

 

 

 

 

Wormhole

: 과거의 너에게 인사를. 안녕.

 

 

 

 

 

 

*트리거 요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향기는 우리를 과거와 미래의 세계로 데려다준다’ 는 맥앤로건 브랜드의 컨셉에 영감에 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난 신을 증오한다.

 

아니, 신이 나를 증오하는 것일까.

 

 

 

“아 뭐야. 아저씨 길막하지 말고 좀 비켜 봐요.”

 

 

 

내가 아니라 너를 증오하는 거라면.

 

지금 내가 발악하는 것들은 정말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일까.

 

 

 

“안녕.”

 

 

 

하지만 내게는 다른 선택이 없다.

나를 증오하고 또 너를 증오하는 신은 내게도 또 너에게도 아무런 선택권을 주지 않았기에.

 

그저 나는 그가 떨어뜨려 놓는 이 시간으로 돌아와 네게 똑같은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안녕, 상혁아.”

 

 

 

오늘도 난 너에게 인사를 한다.

 

25번째의 너에게.

 

 

 

 

 

 

 

 

 

*

 

 

 

 

 

 

 

 

 

“뭐야. 아저씨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요?”

 

 

상혁의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에 학연이 검지로 상혁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명찰.”

 

“아. 근데 저 아세요?”

 

 

상혁의 물음에 학연은 그저 어딘가 슬퍼 보이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윽. 그 느끼한 미소는 뭐예요. 저 학원가야 하니까 길막 그만하고 비켜주실래요?”

 

“학원 째고 피방 갈 거잖아.”

 

“와... 아저씨 용하시네요. 제 미래도 한 번 봐주실래요? ...라고 할 줄 알았죠? 스토커라고 신고하기 전에 가요 좀!!”

 

 

빽 소리를 지르고 쿵쾅거리며 그 자리를 벗어나는 상혁의 뒷모습을 학연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

 

 

 

 

 

 

 

 

 

“아저씨 진짜 스토커예요?”

 

 

며칠 전부터 대뜸 우리 학교 앞에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더니 그 이후로 계속 내가 가는 곳마다 얼굴을 비추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

 

마주칠 때마다 그는 내게 안전을 당부했고 내가 신고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그 뒤로는 아무 말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고는 또 그 다음날 내지 며칠 뒤에 다시 나타났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아저씨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내가 아저씨한테 뭐 잘못한 거 있어요?”

 

 

오늘은 알아야겠다.

 

이 이상한 사람이 이토록 이상한 행동들을 하는 그 이유를.

그리고 이 이상한 상황들이 이상하리만큼 익숙한 그 이유를.

 

 

난 기필코 알아내야겠다.

 

 

“아저씨 나랑 얘기 좀 해요.”

 

 

익숙한 상황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내 말.

 

 

이 빗나감이 나에게 진실을 가져다줄까.

 

 

 

 

 

 

 

 

 

*

 

 

 

 

 

 

 

 

 

“아저씨 나랑 얘기 좀 해요.”

 

 

반복된 상황들.

 

하지만 반복을 벗어난 네 말.

 

 

이 빗나감이 너에게 다른 미래를 가져다줄까.

 

 

“말해 봐요, 이제.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처음 시간이 되돌아간 그 날 난 내가 마주했던 그 끔찍한 사고가 악몽이었던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너를 다시 마주하게 되었고 그제 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바보같이 그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넌 또 내 앞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되풀이했다.

똑같이 반복된 사고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사고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날 지배했다.

 

아니, 어쩌면 본능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사고가 똑같이 두 번째로 반복되는 날 알았다.

넌 날 쳐다보고 있었다.

 

오로지 나만을 향하고 있던 네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네 몸에서 유일하게 힘을 지니고 있던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내가 무엇을 하든 날 옭아맸다.

 

그래, 사실은 널 살리려고 이러는 거야라는 말은 변명이었다.

 

난 날 옭아매던 그 눈동자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당신이 날 죽인 거예요. 나 왜 죽였어요. 왜요. 대체 왜. 라고 수없이도 많은 질문들을 곧게 내 쪽으로 뻗어대던 그 눈동자를.

 

일단은 내가 살아야 하니까.

 

수없이도 많은 방법들로 널 살리려고 해봤다.

그 끔찍한 미래를 바꾸려고 해봤다.

 

사고 현장에 가지 않으려 동선도 바꿔봤고

너를 찾아가 제발 그날 그곳에 있지 말아달라고 사정도 해봤고

아예 너를 없는 사람처럼 무시도 해봤다.

 

하지만 내 동선이 바뀌면 네 동선 또한 바뀌면서 또 같은 날에 내 앞에서 넌 그 사고를 되풀이했고

너를 찾아가 안전하길 사정할 때마다 넌 날 이상한 사람이라며 신고했다.

 

신고를 당해서 네 곁에 접근 자체를 못하게 되면 비극적인 미래가 바뀔 줄 알았다.

내가 널 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시간은 또 다시 되돌아갔다.

 

내가 아니어도 세상을 떠날 수 있었다.

 

너를 없는 사람으로 무시하는 방법은 정말 가장 최악의 방법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서도 사라져버린 너를 난 무의식적으로 또 치고 말았다.

 

 

어쩌면 나는 벌을 받고 있는 걸까.

 

벌이 맞다면..

대체 이 벌은 언제 끝나는 걸까.

 

 

“말해보라니까요.”

 

 

내가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방법.

 

 

너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다.

넌 날 미친놈이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계속 반복돼. 넌 날 처음 보겠지만 나에게 지금의 넌 30번째 한상혁이야.”

 

 

이상한 사람이라고 신고를 하겠지.

신고를 당하면 난 또 아무것도 못하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릴 거고 네가 또다시 다른 누군가 혹은 다른 어떠한 이유로 목숨을 잃게 되면 시간은 다시 그전으로 돌아갈 것이다.

 

대체 신은 내게 어떠한 방법을 선택하길 바라는 걸까.

마치 정답이 정해져 있는 듯이 그 방법이 아니면 계속해서 시간은 되돌아갈 것 같았다.

 

이제는 더 이상 시도할 방법도 없는데...

 

너는 또 나를 이상한 사람 취급할거고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떤 방ㅂ...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어?”

 

“시간이 반복된다면서요.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요.”

 

 

 

 

 

 

 

 

 

*

 

 

 

 

 

 

 

 

 

“시간이 계속 반복돼. 넌 날 처음 보겠지만 나에게 지금의 넌 30번째 한상혁이야.”

 

 

그래서 무언가 익숙했던 걸까.

 

사실 저 말을 백퍼센트 다 믿지는 않는다. 내가 그 정도로 순진하진 않다.

 

하지만 속는 셈치고 들어보기로 했다.

나를 따라다니고 안전해야 한다는 이상한 말들만 하는 이유를 아니, 어쩌면 핑계를 들어보고는 싶었다.

 

 

시간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내 질문에 그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는 듯이 잠시 멍하게 있다가 이내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네가 죽지 않아야 해. 네가 그 사고를 피해야 해.”

 

“사고요? 그 사고라는 게 정확히 뭔데요?”

 

 

잠깐의 머뭇거림.

 

 

“내가...”

 

“네.”

 

“...널 죽여.”

 

 

날.... 죽인다고?

 

 

“사고였어. 사고였는데.... 그 첫 번째 사고 이후로 계속 그게 반복이 돼. 나도 미치겠어.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들은 다 시도를 해봤는데 바뀌지가 않아...”

 

“그 말은...”

 

“...”

 

“그쪽이 저를 지금까지 29번 죽였다는 거네요.”

 

 

숙연한 침묵.

 

 

“다른 방법은 없는 거예요? 사고를 막을 방법.”

 

“..시도해볼 만큼 다 해봤는데 결국 시간은 다시 되돌아가더라.”

 

“그럼 지금의 나도 또 그쪽 손에 죽겠네요.”

 

“....미안하다..”

 

“음주운전이었어요? 아니면 졸음운전? 그것도 아니면 신호를 잘 못 봤다거나 도로가 어두웠다거나 뭐 그런 거 없었어요? 그런 게 있었다면 그걸 조심하거나 바꿔보면 되잖아요.”

 

“있었어.”

 

“뭔데요.”

 

“네가 무단횡단을 했어. 내가 어찌할 틈도 없이. 갑자기.”

 

 

내가...? 내가 무단횡단을 했다고?

 

그제야 조금씩 아귀가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가 계속해서 본인이 아닌 내게 안전을 당부한 이유.

 

이 모든 일의 원인은 나였던 걸까.

 

 

“저 무단횡단 평소에 안 하는데요.”

 

“그래. 몇 번 반복되니까 이상한 걸 느끼겠더라.”

 

“이상한... 거요?”

 

“그 때의 너... 무언가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언가가 네 정신을 온통 잡아간 듯이 내가 아무리 경적을 울려도 내 쪽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허공만 응시하고 가더라. 마치 무슨 일이 있는 사람처럼.”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하지만

내가 정신을 못 차릴 만큼

그 요란한 경적 소리를 못 들을 만큼

그런 큰 일이 생길 일이 나에겐 없다.

 

나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 나에게는 그런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 일... 없는 것 같은데..”

 

“혹시 네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거 아닐까? 지금은 아니어도 나중에 갑자기 뭔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뭐.. 그럴 수도 있겠죠.”

 

 

나 잠시 화장실 좀 하면서 그가 이내 자리를 비웠고 이제는 다 물이 되어 층이 생긴 스무디를 잠시 휘젓다가 마시기를 포기하고 그가 있었던 곳을 쳐다보는데 문득 익숙했던 향수 냄새가 다시 생각이 났다.

 

어딘가 익숙했던 냄새.

이상하리만큼 익숙했던 그런 향.

 

나에게 향수 자체는 익숙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내가 뿌리지도 않고 내 주변에도 뿌리는 사람이 없는데 내 몸이 이 향이 익숙하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던 것은 그와 내가 이미 이전에도 만났었기 때문인 걸까.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코트 소매를 들어 향을 맡았다.

 

가까이서 맡아보니 살짝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비누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어쩌면 이 향이 익숙했던 이유는 비누 냄새와 비슷하기 때문일 수도 있어.

 

시간이 반복된다는 거 그거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잖아.

그리고 저 사람이 진실만 말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고.  

툭.

 

 

 

“뭐야 이건 또..”

 

 

소매 자락을 내려놓는데 무언가 내 다리를 치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아래로 해보니 코트 주머니에서 살짝 삐져나와 있는 작은 다이어리가 보였다.

 

뭔 다이어리를 코트 주머니에 넣고 다녀 이 사람은...?

하여간 하나부터 열까지 평범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사람이네.

 

 

흠... 다이어리라..

내가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지도 써보지도 않은 물건인데..

 

다이어리 쓰는 사람은 뭘 써놓는지 한 번 보자.

 

 

“뭐야.”

 

 

텅 비어있었다.

 

정말 다이어리를 방금 사온 사람처럼 날짜만 성실하게 적어놓고 나머지는 텅.

 

아니, 날짜도 모든 달을 착실하게 다 적어놓은 건 아니었다.

딱 하나의 달만 날짜가 적혀있었다.

 

 

10월.

 

 

마치 이 사람은 10월에만 갇혀있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확 풍겨왔다.

 

그럴 정도로 10월에만 무언가가 적혀있었고 그 무언가는 정말이지 내 몸에 소름이 오소소 나게 만들었다.

 

 

10월에 적혀있는 단 하나의 일정.

 

 

 

 

한상혁 사고사

 

 

 

 

내가 죽는 날짜를 미리 보는 기분이란.

 

 

설령 내가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이 하는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믿지 않는다 해도 기분이 그리 썩 좋을 일은 아니었다.

 

 

10월 26일.

 

 

내가 죽는다는 그 날짜.

 

 

“얼마 안 남았네요. 한 달 조금 남짓 정도.”

 

 

어느새 돌아온 그는 내 뒤에 서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이제 알 것 같네요.”

 

“...”

 

“나한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로 밑밥을 깐 이유가.”

 

 

몸을 돌려 그를 똑바로 마주봤다.

 

 

“10월 26일. 그날 내가 죽는 거죠?”

 

“...”

 

“대답해요. 내가 그날 죽는 거죠?”

 

“...그래.”

 

“그쪽이 정한 날짜죠.”

 

“그건...”

 

 

그래.

잠시라도 믿을 뻔 했던 내가 바보지.

 

 

“상혁아.”

 

“그렇게 부르지 마요. 당신 나랑 아는 사이 아니잖아. 당신이 했던 얘기들 다 거짓이잖아. 이 다이어리도 당신 이야기의 증거로 삼으려고 만들어낸 거잖아.”

 

 

실상은 이거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날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이려는 사람이다.

마치 타임루프라도 하는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놓고는 내가 그를 믿어 내 동선을 조작하고 예상해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사고사로 위장하려는 살인자.

 

 

“왜 나예요? 내가 당신에게 뭘 잘못했는데요? 아니, 이유가 있기는 해요? 대체 왜 이런 짓까지 하면서 내 동정심을 사면서 날 혼란에 빠뜨리면서까지 날 죽이려는 이유가 대체 뭔데요.”

 

“죽이려는 거 아니야. 난 널 살리려고...”

 

“거짓말.”

 

 

다 거짓말이다.

 

 

완벽하게 아무도 모르게 내 의심조차도 사지 않게 그렇게 날 이 세상에서 없애려는 계획.

 

그리고 나중에 그는 경찰에게도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심신미약을 주장하겠지.

 

소름 돋아.

 

 

난.

 

 

난 당신 장난에 놀아나지 않을 거야.

당신 장난에 이만하면 많이 놀아준 거잖아.

 

이젠 안 해.

 

 

“가요. 꺼져요. 내 앞에서.”

 

“내가 다 설명할게.”

 

“필요 없어요. 안 들을 거니까. 아니, 들을 가치도 없는 거니까. 다시는 내 눈 앞에 띄지 마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왔다.

 

정처 없이 길거리를 걷는데 서러운 감정이 어찌할 새도 없이 한 번에 울컥 하고 올라왔다.

 

 

누군가가 내가 죽길 바라고 있다.

누군가가 내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

 

 

목이 멤과 동시에 눈앞 보도블럭들이 눈앞에서 마구 춤을 췄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그런 춤.

 

그 춤에 붉은 빛도 합류를 했다.

 

 

그리고 그 정체모를 춤에 호응이라도 해주듯이 눈을 멀게 할 듯한 조명이 일순간 나와 그 빛들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

 

 

 

 

 

 

 

 

 

“필요 없어요. 안 들을 거니까. 아니, 들을 가치도 없는 거니까. 다시는 내 눈 앞에 띄지 마요.”

 

 

반복을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난 또 반복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마치 이것이 유일한 내 루트라는 듯이.

 

 

넌 내게서 돌아섰고

난 미래를 바꿀 기회를 또 잃었다.

 

 

 

네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고 난 차를 끌고 그를 따랐다.

 

네가 날 믿든 안 믿든

그 날짜가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난 널 보호해야 한다.

 

 

저만치서 터덜터덜 걷고 있는 네 모습이 보였다.

 

속력을 냈다.

 

여기서 널 놓치면 정말로 넌 30번째로 죽게 될 것이다.

 

 

빠른 속도로 널 따라잡아갈 때쯤 갑자기 네가 방향을 틀어 도로를 건너려는 듯한 모션을 보였다.

 

네 앞 쪽으로는 빨간 불빛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비극을 암시하듯. 그렇게 붉게.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렸다.

 

이제 와서 속력을 늦추기엔 난 너무 빨리 달려왔다.

 

 

 

난..

 

그렇게 또 너를 치고 말았다.

 

 

병원으로 이송된 너는 혼수상태로 한 달 남짓한 시간을 버텼지만 결국 10월 26일이 되는 그 날 30번째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난...

 

 

 

다시 네 학교 근처에 서있다.

 

 

문득 외투 주머니 속 다이어리를 만지작거리다 꺼내든다.

 

이제 이 종이 쪼까리들은 필요 없다.

수없이도 반복된 시간들에 이제는 너무도 정확하게 외워버린 날짜들이었고 패턴들이었다.

 

내 말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네가 볼 수 있도록 눈에 띄는 곳에 두기도 해봤지만 쓸모없는 짓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이어리는 그렇게 쓰레기통 속에 처박혔다.

 

 

네 학교 앞으로 가는 길에 향수 하나를 산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사고로 혹은 다른 무엇인가로 기억을 잃은 사람들도 간혹 향기나 냄새로 익숙함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고.

 

기억은 없어도 기억은 못해도 자신도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고.

 

 

네가 날 그렇게 느껴주길.

 

 

그렇게 난 오늘도 같은 향수를 샀다.

 

지독하게도 지속성이 긴 이 향수를.

 

 

 

 

 

 

 

 

“안녕 상혁아.”

 

 

 

 

 

 

 

 

 

Wormhole

: 과거의 너에게 인사를. 안녕.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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