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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Fille de Berlin

Serge Lutens - La Fille de Berlin

 PINK RAVI

@RAVITHEPINK

  • 트위터 - 블랙 서클

금요일. 12월. 2028, 뮌스터, 독일.

 


초겨울의 교외는 오가는 인적 하나 없어 더 스산했다. 상혁은 포장도 없이 바퀴 자국만 패인 산길로 들어가는 초입에서 핸들을 잡은 손을 잠시 물렸다. 숲 꽤나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이곳부터 사유지라는 팻말만 덩그러니 그의 차를 반기고 있었다. 

지직, 지지직. 

틀어둔 라디오는 국도를 벗어나 마을로 들어 왔을 때부터 간헐적으로 버벅 댔다. 상혁은 새삼 뮌스터시 경찰청 강력과로 발령 온 후 몇 년이 지났어도 주로 시내를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을 상기했다. 이렇게 외진 곳에서 그가 직접 출동을 할 만한 강력계 사건이 일어난 게 얼마만인지.  

상혁이 흘끗 창밖을 곁눈질 했다. 얼마 전까지 드라이브웨이 옆으로 이어지던 가지런한 초원은 온데 간데 없이 빽빽한 암녹색의 침엽수림이 돌담처럼 높게 솟아있다. 

[근 이백 년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명작 <베를린의 소녀>가 연일 화제인데요. 이 작품을 둘러 싸고 또다시 미스테리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

상혁은 인상을 구기며 라디오를 껐다. 시골 도시의 별별 시덥잖은 소식을 다 전하는 채널은 사건이 버젓히 수사 중임에도 아랑곳 않고 떠들어 대기 바빴다. 하기사 어느 집 말이 새끼 몇 마리 낳았다는 소리가 뉴스 첫 꼭지 였던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은 대단한 가쉽거리였다. 천문학적인 경매가의 미술 작품에 얽힌 일가족 살인이라니. 몇 년 전 유행 하던 추리 소설 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이었다. 
그 떠들썩한 사건을 담당하게 된 형사 상혁은 경박한 라디오가 침묵하는 복잡한 정적 속에서 묵묵히 차를 몰았다. 덜컹이는 비포장도로 저편으로 검은색 저택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La Fille de Berlin  베를린의 소녀

By. PINK RAVI







뉴스에서 이 사건을 언급할 때 가장 즐겨 사용되는 문구는 이것이었다. 이백년만에 세상 밖으로 나온 명작, <베를린의 소녀>. 

그림은 빨간 장미에 둘러 싸여 뒤를 돌아 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유화로, 1800년대 후반활동한 여류화가 가브리엘 뷘터의 작품으로 추정 된다. 
그녀는 당시 세기의 스캔들이라고 불렸던 동료 화가와의 염문설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유명한 화가였는데, 이번 발견된 작품이 그녀의 유작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림이 발견된 장소는 뮌스터시의 어느 한 낡은 저택 창고였다. 당시 뮌헨 지방 기반으로 활동하던 작가의 작품이 어떻게 독일 북서쪽 끝의 외진 시골마을 저택에서 발견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작가가 죽음을 맞기 전 기행을 일삼았다는 일화가 작품에 얽힌 사연을 짐작케 하며 더 큰 각광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특히 최근 여류화가 작품의 미술학사적 가치가 재조명 되고 있던 학계의 흐름에 힘입어 이 작품의 발견 소식은 적잖은 센세이션이었다. 뉴스는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내노라하는 호사가들이 아직 경매에도 나오지 않은 작품을 사겠다고 현금 가방을 들고 뮌스터로 모이고 있다는 말까지 도는 가운데 사건은 터졌다. 
작품이 발견된 저택에 상주하던 가족 중 한 명이 살해 당한 것이다. 

아니, 그게 <살해>이긴 한가. 상혁은 사유지 중앙 호숫가 가득 자라난 허리까지 오는 들풀을 헤쳐 걸어가며 미간을 찌뿌렸다. 
고등 교과를 마치자 마자 그가 독일에서 그가 경찰 일을 한지도 햇수로 8년이었다. 새파랄 적부터 온갖 강력계 사건을 맡아 왔지만 이 사건은... 뭔가 달랐다. 그러니까, 사람이 죽긴 했는데. '이런 방식'으로 살해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바로 어제가 복귀일이었다. 모처럼만의 긴 휴가에서 돌아온 상혁에게 그의 동료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 사건 먼저 그에게 떠넘겨버렸다. 1차 참고인 조사를 마쳤을 시점, 이건 도저히 더 못붙들고 있겠다며 막 오피스에 들어와 자리에 앉은 상혁의 앞에 대뜸 사건파일만 던져두고 부리나케 도망쳤던 것이다.
그렇게 처음 사건파일을 열어본 직후의 충격이 생생했다. 싸늘한 시체와 그 시체를 둘러싼... 논리적으로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정황들. 그리고 무언가 석연치 않게 그의 감각 끝을 지분거리는 껄끄러움까지. 여러모로 골치가 아팠다.

컹컹컹, 멀리서 경찰견들 짖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12월 초, 겨울 초입 바람은 잠시만 서있어도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갑다. 상혁은 빨갛게 얼어가는 귀를 문지르며 걸음을 빨리했다. 오늘은 이 집에서 두번째 살인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


수색차 먼저 와 있던 동료들은 뭐 하나 건진 것 없이 빈 손으로 돌아갔다. 저택에 있는 용의자이자 참고인과 할 이야기가 남은 상혁은 그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사유지 정 가운데의 거대한 호수 앞에 서 있었다. 

시체는 보란듯이 전시되어 있었으므로 사체를 찾는 것은 아니었다. 범행 도구랄지 그런 조그마한 단서 같은 걸 찾기 위해 뮌스터시 경찰들은 어제 이 호숫가를 이 잡듯 들쑤셨지만 결과는 별 볼 일 없었다. 
범행도구, 그 살인에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상혁은 사건을 맡기 시작할 때 부터 이런 회의적인 느낌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건 죽임을 당했다기 보다는, 처형을 당했다는게 더 적당할 정도의...

잔잔히 일렁이는 호숫가 앞에 서서 생각에 빠진 그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악, 가아악. 가아아악. 석유처럼 반들거리는 눈깔을 검벅이며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서 까마귀가 운다.


생각에 빠져 있던 상혁은 문득 시야 저편에서 무언가 발견 하고 고개를 들었다. 호수에 무언가 까맣게 무리 지어 떠다니고 있었다. 살아있는 듯 움틀거리다가 퍼득이기도 하는 그것을 자세히 보려 걸음을 내디뎠다가 상혁이 인상을 찌뿌렸다. 검은 섬처럼 보이는 그것은 덕지덕지 둘러 앉은 까마귀 무리였다.

까마귀들은 구더기처럼 모여 무언가 열심히 쪼아먹고 있었다. 까닥이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작은 머리통 사이로 붉게 물은 무언가가 섬처럼 출렁거린다. 
시체. 머릿털이 쭈빗 서는 것을 느끼며 상혁이 황급히 발치에 있던 아무 돌이나 손에 쥐곤 까마귀의 섬을 향해 던졌다.

첨벙!
가아아아악, 가악. 가아악.

방해 받은 게 불쾌한 듯 홰를 쳐 대는 검은 깃털들 아래로 모습을 보인 건 다행히 사람은 아니었다. 흰 배를 까 뒤집고 누운 것은 처참히 파먹힌 백조였다. 그것은 사정 없이 살이 뜯긴 채 핏빛으로 헤집어져 검은 물 위로 뻣뻣한 다리를 내놓고 있었다.

그 광경에 상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스산한 바람이 그런 그의 주위를 맴돌며 웅얼거렸다. 까마귀들이 박차고 떠나 넘실 대는 수면 위로 치솟은 백조의 누런 발이 요동치며 손짓 하고 있었다. 그에게 환영인사를 건네듯이.




*



[뮌스터시 경찰서 강력계 형사 헨리 한이라고 합니다. 켄 리 씨, 참고인 조사차 왔습니다.]
[아... 형사분이시라고요.]

휑한 저택의 현관에서 그를 맞은 젊은 남자는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전화로 들은 목소리로는 상당히 젊은 인상이었는데. 상혁은 기억을 더듬어 열번은 더 훑어본 조사파일을 떠올렸다. 나이가 스물 중반이랬나. 두번째 피해자의 동생이자 현재 이 저택의 상속자가 된 켄 리는 그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며칠간 겪은 일을 증명하듯 거뭇해진 눈가의 그가 무거운 흑단나무 문을 열고 상혁을 안으로 인도했다. 커튼을 죄 내려 덮어 어두컴컴한 저택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그 안이 더 음울했다.

[아... 죄송합니다. 집이 좀 어수선해서...]
[괜찮습니다.]

짤막하게 답하며 상혁은 집안을 빠르게 훑었다. 로비를 들어가자 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커다란 응접실에는 오늘 일어난 살인사건의 흔적이 아직 여실했다. 감식반이 쳐 둔 폴리스라인 너머로 검붉게 졸아든 핏자국이 묻은 카페트가 적나라했다. 

로비 정 중앙을 양 옆으로 둥글게 둘러 내려오는 계단 가운데를 지나며 상혁이 문득 위를 올려다보았다. 오래된 체리나무 색의 목조 벽에는 으레 독일의 고저택들이 그렇듯 무거운 금빛 프레임에 달린 액자들이 드문 드문 했다. 
그리고 천장 중앙에는 특이하게도 크리스탈로 된 샹들리에 대신 달아둔 지 몇 백 년은 되었을 법한 투박한 은촛대 장식이 달려있었다. 종종 사용했던 모양인지 유동체의 모양으로 눌어붙은 촛농과 거뭇하게 쌓인 먼지를 상혁이 유심히 살펴 보던 때였다. 

2층 난간에서 무언가 얼핏 비쳤다. 
기척을 알아챈 상혁이 발을 멈추자 마자 그것은 모습을 감췄다. 흰 얼굴이었다. 

상혁은 검고 긴 머리칼의 실루엣을 보고 한 인물의 프로파일을 떠올렸다. 켄 리의 여동생이자 이 저택 가족 삼남매의 막내, 리오나. 저택에서 일어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혹시 한국 분이신가요?]

조금 망설이던 켄은 그에게 따듯한 커피 한잔을 건내며 결국 그렇게 물었다. 상혁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켄을 처음 보자마자 그의 얼굴에서 보이는 아시안적인 터치가 신경쓰이던 차였다. 

[그럼 혹시 한국말도...?]
"네, 합니다."
"와, 정말 반갑네요. 한국말 들어본 지가 오래되어서..."
"이쪽 지역이 한국인이 많은 곳은 아니니까요."

켄은 상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우울한 얼굴을 했다.

"사실 저희 할머니가 한국말을 가르쳐주셨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할머님이 한인이신거로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네. 간호사로 파견 오셔서 할아버지와 여기서 결혼 하셨죠."

저희 어머니를 따라 저도 할머니의 성을 따랐고요, 하고 덧붙이며 그가 김이 오르는 머그를 손으로 쥐었다. 

응접실 대신 안내받은 다이닝룸 또한 거대한 12인 식탁이 놓인 거창한 공간이었다. 
두터운 모서리마다 정교히 올리브 잎사귀가 양각된 대리석 테이블 정중앙에는, 언제 꽂아 두었는지 모를 커다란 흰 장미 한다발이 갈색으로 시들어 흉물스럽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켄은 상혁에게 자리를 권하고 자신은 식탁에 몸만 겨우 기대서며 그 쓰레기 더미 같은 화병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졌다.
  
켄은 따지자면 한국인 쿼터였다. 그의 어머니는 독일인 할아버지와 한인 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한인 혼혈이고, 아버지는 러시아인이다.
아시아보다는 유럽쪽 피를 더 진하게 갖고 있어서인지 그의 외양은 극동아시아보다는 북유럽의  터치를 더 강하게 갖고 있었다. 특히 조각칼을 대고 단번에 내리 그은 듯한 날카로운 하관과 러시아의 고집스런 산맥처럼 솟은 콧날이 그랬다. 피곤으로 얼룩진 눈가가 그런 날선 인상을 한층 더해주고 있는 가운데 켄은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형편없이 부르튼 입술 위에서 손가락이 의식을 더듬듯 멈칫거린다.

그는 충분히 혼란스러워 보였다. 두 눈은 먼 곳을 보는 듯 시종일관 멍했다. 상혁인 그런 그를 대놓고 관찰하다시피 했지만 눈 앞의 젊은 남자는 그 집요한 시선을 알아챌 정도의 정신적 여유 조차 없어 보였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그는 배우 쪽으로 진로를 틀어야 할 거라고 생각하며, 상혁이 먼지처럼 뿌옇게 내려 앉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디자인을 공부 하셨다고요.]
[네. 뉴바우하우스... 일리노이에 있다가, 런던에 인턴쉽 기회가 생겨서 졸업 하고선 그 쪽에 있었죠.]
[출입국 기록에 그렇게 되어 있더군요. 가장 최근에 독일에 입국하신 건...]
[어머니의 장례식때요.] "음, 그러니까... 3년 전이네요."


켄의 부모, 피해자 부부가 이 저택을 구입한 것은 삼남매가 차례로 독립하고 난 후였다. 첫번째 피해자인 아놀드 뮐러는 자식들을 각각 베를린, 시카고, 파리로 유학보내고 난 후, 아내의 오랜 소원대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독일 서쪽 교외의 저택을 구입해 번잡한 도시에서 빠져나왔다. 
선천적 기관지 질환을 앓는 아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환경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지병을 이기지 못하고 켄이 스물다섯이 될 무렵 병사했다. 
그 후 부친 혼자 저택을 돌보다가 파리에서 유학하던 막내 딸이 소설 작가 일을 시작하며 저택에 다시 돌아와 함께 살기 시작했고, 그게 바로 3년 전이었다. 



첫번째 피해자, 아놀드 뮐러가 사망한 것은 그림이 발견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베를린의 소녀>의 진품 감정 때문에 한 차례 떠들썩한 폭풍이 저택을 흔들고 지나간 직후였다. 

최초 발견자이자 신고자는 그 때 집에 있었던 리오나 뮐러였다. 
그녀는 당시 진술에서, 작품의 진품 감정 후 경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집을 나서던 아놀드가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이미 도착 해 있는 건 아닌가 해서 그의 차가 주차 되어 있는 지 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자 마자 관짝처럼 시체를 담고 있는 아놀드의 차를 발견한 것이었다.  

시동이 걸린 채 집 앞에 서 있던 차 안에는 이미 숨이 끊어진 시체가 뻣뻣히 굳어 있었는데, 무언가 공포스러운 것이라도 본 듯 경악과 두려움이 사체의 회색빛 얼굴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고 했다. 
놀란 리오나가 아놀드의 차 문을 열자 마자 갈색으로 문드러진 빨간 장미 꽃잎들과 바싹 말라 바스러진 벌레 시체들이 열린 차문 밖으로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꽃잎이 썩는 들큰한 냄새가 머리가 울릴 정도의 진한 장미향과 함께 퍼져 나갔다. 그리고 곧, 그 짓무른 꽃잎 무덤을 헤치고 주먹만한 거미떼들이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뭉근한 피냄새와 함께.

신고를 받은 경찰이 도착했을 때 시체는 거미줄에 칭칭 뒤덮여 하나의 거대한 고치가 되어있었다. 감식반이 사진을 찍으며 스트로보가 펑펑 터질 때 마다 둥근 배에 알을 그득 품은 거미들이 은색 고치 안에서 우글거리는 것이 비쳤다.  

상혁 역시 그 현장을 사진으로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이 생생했다. 그건 누가 봐도 살해현장이 아니었다. 범인을 찾는다는 것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그 날 있었던 조사에서 리오나는 그 시각 평소 앓던 우울증으로 인해 처방받은 안정제를 먹고 잠이 들었었다고 진술했다. 작가인 그녀는 보통 새벽시간에 깨어 글을 쓰고 아침에 잠들어 오후 느즈막히 일어나곤 하는데, 그 전날에는 오전 내내 집이 시끄러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처방 받은 안정제를 먹고 잠을 청했는데, 자신이 일어나는 시각까지 아버지의 기척이 없자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를 찾던 중 집 밖에서 아놀드의 시신을 발견했다는 주장이었다.   

경찰은 처음 사건이 일어난 후 당연히 동생을 제1용의자로 두었다. 다소 플레인한 추리에 의하면, 그녀가 그림을 혼자 독차지하려 한 게 아닌가 하는 가설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180에 80키로가 넘는 커다란 성인남성을 제압할 힘이 없을 뿐더러, 시신에 반항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정말 자다가 죽은 듯 고요히 질식사 했다는 게 부검의의 일관된 소견이었다. 
무엇보다 시체 옆에 쌓인 장미꽃잎과 벌레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가 무슨 수로 그 많은 수의 거미와 벌레시체를 구해다가 차 안에 풀어놓을 것인가? 경찰은 리오나를 조사하다가 풀어줄 수 밖에 없었다.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한 구석이라곤 그의 사망 추정시각인 오후 4시경 리오나도 저택에 있었다는 점 밖에는 없었다. 

그 후, 3남매중 독일에 거주하던 장남 댄 뮐러가 부친의 상 소식을 듣고 저택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음 날 같은 방식으로 사망했다. 


[댄 뮐러씨 사망현장 최초 발견자가 본인이시죠. 당시 상황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예. 아버지 소식 듣고 바로 왔는데, 보시다시피 문을 들어오자마자...]

켄은 당시를 회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몇번을 노크해도 집안에선 기척이 없었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며 그가 무거운 흑단문을 조심스레 열자마자 낯선 냄새가 났다. 아니, 분명 익숙한데 어딘가 이질적인 냄새. 

현관의 짙은 잿빛 러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그가 향기의 정체를 고민할 때였다. 
현관 바로 오른편 위치한 응접실의 카페트 빛깔이 이상했다. 그의 어머니가 이 집을 꾸미기 시작할 때 가장 오래 고민하고 선택했던 터키산의 고상한 암적색 페이즐리 카페트를 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 문양은 분명 저런 거무죽죽한 얼룩이 아니었다. 

그 짙붉은 얼룩 위로 거미 한마리가 지나간다. 아니, 두마리, 세마리, 아니... 점점 더 많이. 
그리고 거미가 기어나오는 그 길 끝에 반쯤 거미줄에 뒤덮인 형제가 있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가족은 벌레더미가 되어 그를 맞았다. 끔찍했다. 두개골을 쪼갤듯 풍기는 장미향과 피냄새 가운데서 켄은 그대로 구토했다. 겨우 정신을 차려 경찰에 신고한 후 그제야 생각이 미쳐 리오나를 찾아 저택을 뒤졌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서 약에 취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원래 걔가 약을 먹고 잠이 들면 잘 깨질 못해요. 한번 잠들면 거의 반나절을 그렇게 자니까... 동생도 잘 안먹으려고 하긴 하는데, 요즘 스트레스가 더 심해져서 먹지 않고선 잠이 들 수가 없었다나봐요. 그날도 한참을 깨워도 못 일어나더라고요.]

잠에서 깨어나 소식을 들은 리오나는 그대로 실신할 뻔 했다. 그녀는 켄과 함께 거처를 옮기기를 원했지만, 경찰측에서는 원칙상 그녀가 제1용의자인 상황에서 그 요청을 수락해 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켄과 함께 현재 수사가 마무리될 때 까지 자택에 구금된 상황이었다. 
경찰은 2차 사건이 일어난 후 주변을 봉쇄하고 일대를 싹 뒤지며 제 3자가 드나든 흔적이 있는지 살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상황은 더욱 그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그녀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켄이 동생의 이야기를 하며 까끌한 턱을 쓸었다. 그가 형과 썩 가까운 사이는 아녔을지라도 가족은 가족이었다. 그런 자신에게도 충격이 큰데 동생에게는 오죽하겠는가. 

[리오나가 충격이 클 거예요. 형이 걜 정말 아꼈었거든요.]
[사망하신 댄 뮐러씨와 동생분은 평소 사이가 가까운 편이었단 말씀이시죠.]
[그런 편이었죠...]

말꼬리를 흐리며 켄이 나보다는요, 하는 뒷말을 삼켰다. 그의 입가에 남은 미묘한 뉘앙스를 눈치챈 상혁이 무언가 되물으려는 때였다.

그르르릉.

하늘이 짐승 울듯 울렸다. 켄은 다이닝룸 전체를 묵직히 두르고 있는 자가드 커튼을 열어 창문 밖을 내다보곤 깜짝 놀랐다.알아채지 못한 새 사위가 꽤나 어둑해져 있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아직 오후 3시. 해가 지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꽤나 퍼부을 것 같은데요.]

이미 새까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켄이 걱정스레 말할 때, 흰 실루엣이 그의 시야를 스쳐지나갔다.

"....!!!"

소스라친 켄이 돌아서자 저 멀찍이 로비 계단을 내려와 다이닝룸으로 들어서는 동생이 보였다. 켄은 그제서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혁은 그의 행동을 영문 모르는 얼굴로 지켜보다가 켄이 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았다. 

[리오나. 깼어?]

아까 계단참에서 본 그 얼굴이 맞았다. 유난히 흰 얼굴, 검은 머리칼의 여자는 독일보다는 동유럽 사람에 가까운 외양을 하고 있었다. 자다 깬 듯 짙은 남색의 슬립 드레스 차림으로 내려온 그녀 때문에 상혁은 잠시 헛기침 하며 눈을 굴렸다.

[잠든 지 얼마 안되었잖아. 좀 더 쉬지....]

불면증이라는 말을 증명하듯 검은 그늘이 깊은 눈가 아래로 짙게 내려온 그녀는 켄의 다정한 염려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입을 굳게 다문 채 그 둘을 스쳐 지나 부엌으로 향했다. 팔을 훤히 드러내고 종아리를 덮고 내려오는 긴 슬립자락은 초겨울에 입기에는 지나치게 얇았으나 그녀는 추운기색이 전혀 없었다. 짙은 색의 슬립 위에서 푸르게 질린 팔이 그녀가 움직일 때 마다 이질적으로 도드라졌다.

"죄송해요. 애가 지금 심적으로 많이 힘들 거라..."
"괜찮습니다."

잘라 말하며 상혁이 그녀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훑었다. 그러다 문득 코를 찡그렸다. 
장미향이 났다. 





-꽈르르릉! 

상혁이 그녀를 인터뷰하기 시작할 땐 본격적으로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곳곳에 놓인 무드등의 누런 빛에 의지해 밝힌 다이닝룸은 해가 완전히 구름 뒤로 사위자 금방이라도 정찬을 해야할 듯 엄숙한 분위기가 되었다. 켄이 아까 전 들춰보고 미처 닫지 않은 커튼 틈새로, 번갯빛이 가끔 창백하게 커다란 테이블 위를 쪼개고 지나갔다.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리오나는 인형처럼 상혁 앞에 앉아 한결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넓은 식탁 사이로 마주앉은 둘 옆으로 변질된 정물화같은 장미 화병이 이질적으로 놓여 있었다. 상혁은 그 갈색으로 문드러진 장미들에서 나는 향이 유난히 독하다고 느끼며 코 끝을 찡그렸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향이 진했다.

[두번째 피해자인 댄 뮐러씨를 켄 리 씨가 발견했을 때. 본인은 약을 먹고 잠들어 있었다고 하셨죠.]
[....]
[켄씨가 시신을 발견한 시각은 오전 8시. 뮐러씨의 사망 추정시각은 적어도 4시간 전인 오전 4시입니다. 그 때도 자고 계셨습니까?] 
[....]

침묵 속에서 상혁은 절로 찌뿌려지는 미간을 손으로 애써 꾹꾹 눌러 폈다. 이 여자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 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리오나 뮐러씨. 당신은 제1용의자예요. 직접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지만 모든 정황 증거가 본인에게 불리하다는 것 알죠. 진술이 곧 자기 변론이 될 겁니다. 지금 내 앞에서 침묵시위 하는 건 본인에게 좋을 것 하나도 없어요.]
[....]

꽈르릉!

여전히 묵묵부답인 그녀를 대신해 천둥이 답했다. 상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수사에 진척이 없다. 상혁이 목각인형처럼 앉은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노트북을 턱 덮었다.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비협조적이시면 저도 어떻게 리오나씨를 도울 방법이 없다는 건 알아두세요.]
[....]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상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때였다. 줄곧 미동 없이 앉아있던 리오나의 고개가 갑자기 홱 옆으로 돌아갔다. 상혁은 일어나다 말고 엉거주춤 서서 그녀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봤다. 저택 현관 쪽이었다. 

[쯧.]

작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려 상혁이 고개를 돌렸을 땐 그의 앞에 앉아있던 창백한 여자는 그새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상혁이 그녀를 다시 부르기도 전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쾅쾅쾅.

리오나의 조사가 다이닝룸에서 이어지는 내내 로비에서 초조하게 계단참을 오가던 켄이 다소 거친 그 노크소리에 제일 먼저 반응했다. 현관으로 달려나가는 발걸음이 내내 기다리던 손님을 맞이하듯 급했다. 

[선생님!]

켄이 반갑게 연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얼핏 앳되어 보이는 외양의 동양인이었다. 
동그랗게 두상을 타고 내려오는 검은 생머리를 차분히 길러 자른 남자는 빗물에 푹 젖은 우산을 접고 조심스런 동작으로 문 안으로 들어서며 주위를 살피다 상혁과 눈이 마주쳤다. 

[켄씨. 리오나양은...]
[지금 다이닝룸에-]

그리고 뒤를 돌아선 켄은 홀로 서있는 상혁을 발견하곤 놀라서 물었다.

"리오나는요?"
[조사 받다가 갑자기 사라지시는 바람에.]

켄이 뱉은 한국 말을 독일어로 받으며 상혁이 턱짓으로 갑자기 등장한 손님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 분은.]
"아, 한국계 분이시군요. 안녕하세요. 리오나양 상담 주치의, 차 학연입니다."
"...안녕하세요. 형사 헨리 한입니다. 오늘 한국 분들 많이 만나네요."
"저도 뮐러씨 가족분들 외에 한국분 여기서 뵙는 건 처음이예요."

학연은 리오나가 뮌스터에 이사와 살기 시작할 때 부터 줄곧 그녀와 상담을 해 온 정신과 주치의였다. 일어난 사건이 워낙 큰 사건인지라 리오나의 상태가 걱정된다며 그녀를 보러 오겠다고 켄에게 알리고는 곧장 그 길로 저택으로 달려온 것이다. 
유창하게 인사하는 그의 뒤로 또 다른 누군가의 실루엣이 비췄다. 켄도 처음 보는 사람인 듯 그를 보며 의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쪽은-.]

다소 머뭇거리는 학연의 뒤로 흰 얼굴이 로비 안을 비추는 희미한 무드등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사를 방해 받았다는 불쾌감에 젖어있던 상혁의 얼굴에 순수한 놀라움이 스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빈센트라고 합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하관을 가진 남자는 코트 밑으로 보이는 사제복과 성경에나 나올 법한 이름으로 알 수 있듯 카톨릭 사제였다. 하지만 상혁이 놀란 건 그 이유가 아니었다. 딱딱하게 차려입은 사제복 위로 수려하게 빛나는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남자는 주위를 압도하는 미남이었다. 성경에서 묘사된 성 미카엘 대천사를 사람으로 빚어 놓는다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밝은 고동색의 머리칼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희고 반듯한 이마를 내어 놓고 있었고, 직선으로 떨어지는 콧날 밑으로 다물린 입술은 기도문처럼 경건했다. 쉽게 국적이 가늠되지 않는 외양을 가진 남자는 숱 짙은 속눈썹의 눈을 깜박이며 허락을 구하듯 호스트인 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이 사람의 방문은 예상에 없었던 듯 놀란 것은 마찬가지로 보였다. 켄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학연과 빈을 번갈아 보았다.

[신부님. 저희는 추모의식을 청한 적이 없는데...]
[저는 추모의식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더욱 황당한 표정이 된 켄에게 학연이 무언가 설명하려는 듯 망설일 때, 빈이 선고하듯 말했다.

[저는 구마사제입니다.]

꽈르릉!

커다란 천둥이 저택을 울리고, 한참을 메마른 정적이 로비에 감돌았다. 켄이 자신이 지금 뭘 들은 건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되물었다.

[구마요?]
[그, 켄씨. 파더 빈센트는 제 청으로...]
[선생님 청으로요?]

학연의 개입에 켄이 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황당함이 분노로 바뀌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해가 안되는군요. 그러니까 우리 리오나가 지금-]
"귀신에 씌였다?"

다소 탁한 음성의 대답은 상혁에게서부터 나왔다.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굳은 표정의 학연을 응시했다. 

[정신과 주치의가 샤머니즘적 처방까지 하십니까? 처방이 독특하시네요.]
[이게,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리오나양에게 우울증 진단 내린 건 본인 아닙니까.]
[-네. 제가 내렸던 진단이예요. 하지만...!]
[그 진단으로 처방하신 약이 지금 리오나양 주요 알리바이인건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처방한 약이라니요?]

상혁이 서늘한 얼굴로 죄치는 소리에 학연이 도리어 모르겠단 얼굴을 할 때 학연이 몰리는 것을 보다 못했는지 빈이 설명을 자처했다. 

[차 선생님과 전 개인적 친분이 있는 사이입니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함께 와서 부마 여부를 확인 해보고 싶다고 말씀 드린 건 저고요. 선생님께선 몇 주 전부터 환자 상태가 변한 것 같다며 제게...]
[당신 뭐야.]

그 때 성큼 걸어나온 켄이 학연의 멱살을 잡았다. 이미 혼란으로 가득했던 눈이 폭풍우에 표류하는 배처럼 사정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누가 뭐에 씌여?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럼 지금 내 동생이 귀신 씌여서 사람 죽이고 다닌다는 거야 뭐야! 그딴 말을 애를 몇 년을 봐온 주치의가 해!? 당신이야말로 미친 거 아냐!!]
[켄씨. 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설명을-]
"설명은 무슨 얼어 죽을 설명이야!! 저 사이빈지 뭔지 모를 신부 데리고 우리 집에서 당장 꺼져!!"

쾅!

켄의 노성과 함께 이태껏 빈의 뒤에 열려 있었던 현관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저절로 닫혔다. 그 굉음에 로비에 있던 모두가 잠시 움찔 굳었다. 저 문은 성인 남성이 온 몸으로 밀어야 겨우 조금씩 밀려 열리는 무거운 문이었고, 밖은 빗줄기만 세찰 뿐 바람이 거세지는 않았다. 
그 때 빈이 번뜩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올려다보았다. 로비 정면에서 보이는 2층의 발코니 방향이었다. 상혁도 덩달아 그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똑, 똑. 

빈센트의 흠뻑 젖은 긴 코트자락에서 빗방울이 떨어져내려 로비의 대리석 위로 물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 작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무언가의 전조를 알리는 불안한 초침처럼 커다랗게 울리는 감각 속에서, 상혁은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리오나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문득 데자뷰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이 저택에 도착 했을 때와 비슷했다.

[리오나씨!]

그녀를 발견한 학연이 반가운 목소리로 불렀지만 그녀는 싸늘한 눈으로 아래에 모인 넷을 훑곤 다시 뒤돌아 사라졌다. 빈센트는 무심코 마른 침을 삼키며 쥐고 있던 묵주를 더듬었다. 어둠 속으로 물러나기 전 자신을 향해 번뜩이던 시선이 너무나 선명했다.

 

 

 


쿠르릉.

여전히 성을 내는 하늘 아래 오토바이 하나가 거센 빗줄기를 뚫고 저택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사위에 오토바이의 헤드라이트가 번개 대신 저택의 외관을 창백히 비추며 가까워진다. 

부르릉, 부르르르릉.

오토바이는 꽤나 먼 길을 달린듯 몸에서 김을 풀풀 뿜고 있었다. 숨 고르듯 진동하는 바이크에 올라탄 늘씬한 남자는 목적지에 도착하고 나서도 한참을 그 위에 그대로 앉아 헤드라이트 아래 모습을 드러낸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가 걸친 검은 레인코트의 모자가 벗겨지고, 헬맷 아래로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무언가를 주시한다. 

쏴아아아.

바람 한 점 없이 일직선으로 꿰뚫을 듯 내리는 장대비 가운데 남자는 천천히 헬맷을 벗었다. 짧게 깎여 군인처럼 올려친 검은 머리칼은 금새 젖어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드러난 목덜미에는 검게 새긴 타투가 지느러미처럼 휘감겨있었다. 언뜻 딱딱하지만 불길처럼 이글대는 그 글자들은 목덜미를 올가미처럼 휘감아 등 뒤를 향해 사라진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빗물은 전혀 개의치 않는듯 남자는 눈을 좁힌채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맞게 찾아왔군.]

바이크에서 내려선 그는 문득 발치에 채인 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주변 땅을 돌아보았다. 한밤중 같은 사위에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하늘이 번쩍일 때 마다 고르게 손질된 저택의 앞마당에서 이질적으로 불뚝 불뚝 널브러진 '그것들'이 기름칠 한듯 반들거리고 있었다. 
빗물과 진흙에 푹 젖은 그것을 대롱대롱 손에 매달고 걷는 남자의 앞으로, 시뻘건 장미를 피칠갑처럼 두른 저택이 그를 위압적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오나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져버렸다. 유령보다 더 유령같은 그 모습에 싸하게 내려앉은 정적을 틈타 상혁이 끼어들어 상황정리를 시도했다.

[자, 하여튼. 두 분 다 진정 하시고. 닥터 차? 마침 잘 됐습니다. 리오나씨가 수사에 영 비협조적이어서. 온 김에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 좀 받고 가세요. 그 구만지 뭔지도 수사 끝나기 전엔 못하니까 그렇게 아시고요.]
[만약 저 분이 진짜 부마자라면 수사보다 구마가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구마라니!] "우리집에서 그래서 굿판이라도 벌이겠단 거예요?!"

기도문 읊듯 나온 빈의 말에 켄이 또다시 언성을 높였다. 화가 치받아 거친 억양의 독일어 뒤로 한국어가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학연이 그 말을 듣고 착잡한 얼굴로 말했다.

"굿이 아니라 구마의식입니다. 파더 빈센트는 바티칸 직속 구마사제시고요. 제 오랜 친구인데 특별히 제 부탁으로 어렵게 와주신..."
"그러니까 댁이 무슨 권리로 부탁을 하는데."
"그러니까..."

켄의 비웃음에 학연이 또 예의 그 할 말이 많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단 표정을 하자 상혁이 농담하듯 툭 내뱉었다.

"왜, 선생님도 신기 같은 거 있으신가보지. 귀신 보는 그런 거."
"...."

그 말에 학연이 정곡 찔린 듯 아무 말 없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상혁이었다.

"아니, 이봐요. 농담하지마요. 무슨,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그런 식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게 더 말이 안되잖아요."
"...."

학연이 조용히 말을 받았다. 그 자리서 얼어 붙은 켄은 적잖이 충격 받은 얼굴이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에게 빈이 담담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의 독일어 억양은 경전 읽듯 딱딱했으나 어미에서 미세한 이탈리아어의 미끄러지는듯한 악센트가 느껴졌다.

[지금 당장 구마의식을 하지는 못합니다. 의식은 교황청의 승인과 감독 하에 엄격한 절차를 거쳐 진행되어야 하니까요. 정신계열 질환이 아니라는 의사의 확실한 소견도 필요합니다. 오늘은  차선생님의 최종 진찰 후에, 리오나양이 부마자인지 간단한 확인 정도를...]

쾅쾅.

빈센트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 누군가 또 현관문을 두드렸다. 상혁은 또 부른 사람이 있냐는 얼굴로 켄을 쳐다보았고 켄은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학연과 빈센트도 의아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볼 때 또 다시 아무도 모르는 손님이 성내듯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쾅.

마지못해 켄이 정말 내키지 않는 듯 현관을 향했다. 우르릉, 하늘이 거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한 차례 울리고 나서야 켄이 조심히 문을 열었다.

[누구세... 아아악!!]

켄의 비명소리에 상혁이 놀라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 때 경악에 차 뒷걸음질 치는 켄과 열린 문 사이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총 부터 홀스터에서 꺼내려던 상혁이 무심코 떨어진 그것을 봤다가 욕을 뱉으며 저도 모르게 발을 물렸다. 철퍽 하고 대리석 바닥에 나동그라진 것은 혀를 빼물고 죽은 까마귀 시체였다. 

다짜고짜 동물 시체를 저택 안으로 던져 넣은 사람은 유유히 열린 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진흙투성이인 투박한 워커가 말끔한 대리석 바닥에 사정 없이 발자국을 찍으며 침입했다. 그리고 그는 누군가 말릴 새도 없이 또 무언가를 바닥에 내던졌다. 자신의 발치에 무언가 떨어지자 학연이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시꺼먼 레인코트를 두른 남자가 던진 것은 새빨갛게 핀 장미 송이였다. 

[저택에 장미가 아주 화려하게 피었더군.]

입을 열고 나온 목소리는 바위를 허옇게 갈아뭉갠듯 탁하고 무거웠다. 키가 멀쓱히 크고 날렵한 남자의 눈은 깊게 패인 아이홀의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등장만으로도 주위를 얼어붙게 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악마 냄새가 진동을 해.]

으르렁대듯 나온 말에 당황스러움에 굳어져있던 켄이 벌컥 화를 냈다.

[이봐요. 당신 뭐야?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옵니까? 그리고 이건 또 뭐예요!]

바닥에 널브러진 까마귀 시체는 딱 봐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보였다. 아직 까만 깃털에서 기름이 반질반질 묻어나 빗물에 갈고리모양의 원을 그리며 번지고 있었다.

상혁은 별 꼴을 다 본다고 생각하면서도 머리로는 지극히 논리적인 분석을 하고 있었다. 사체에서 핏물이 나오지 않으며 부자연스럽게 꺾인 부분도 없다. 저건 저런 악취미적 쇼맨쉽을 위해 일부러 갖고 들어온 게 아니라 정말 자연사한 시체를 주워온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장미? 상혁은 좀 질린 얼굴로 빗물을 머금고 생생히 피어난 벌건 장미꽃을 내려다보았다. 밖은 이가 딱딱 부딪히도록 추운 12월 초였다. 그리고 저택 밖에 피는 장미는 흰색이다. 다이닝룸에 놓인 화병에 대해 묻자 켄이 말해준 사실이었다. 여름 초입마다 저택 벽을 휘감고 피는 흰 장미는 저택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어디서 살인 사건 났단 소리에 괴짜 하나가 꼬여들었나보군. 상혁이 그리 단정짓곤 혀를 차며 그를 저지하기 위해 다가가려 할 때였다. 남자가 로비에 모여있던 네명 중 누군가를 알아보곤 입귀를 비틀며 웃었다. 전혀 반가운 표정은 아니었다.

[이게 누구신가. 파더 빈센트. 우리의 신실한 종, 미카엘 대천사의 현신.]

검은 머리의 침입자가 이죽거리는 소리에 빈은 시종일관 미사포처럼 덮어쓰고 있던 엄숙함을 내던지고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가 그의 동기를 모를 리 없었다. 파문된 자. 유다의 이름을 스스로 새긴 자. 복수에 불타 악마를 쫓는 자. 

[아직도 그러고 다니나?]
[그럼, 이러기 위해서 쫓겨났으니까.]
[저런 것들로 사람들을 위협하면서?]
[눈에 뻔히 보이는 증거를 위협이라고 하는 건 겁쟁이들이나 하는 변명이지.]

남자는 시니컬한 어조로 빈센트의 말을 되받아쳤다. 하지만 빈센트도 결코 지지 않았다.

[악마를 쫓아다니면서 그 증거들을 들이밀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거야 말로 사탄의 존재를 입증하고 돌아다니는 것 아닌가! 사냥? 하! 누가 사탄에 홀린 것인지 모르겠군!]

사냥. 그 두 글자를 입 속으로 읊조리며 남자가 들고 온 커다란 트렁크를 바닥에 쿵 내려놓았다. 쩔그렁, 안에 든 것들이 부딪히며 내는 쇳소리가 먹먹한 빗소리를 날카롭게 저몄다. 

[그래. 사냥개. 퍽 좋아하던 별명이었는데 말야. 악마사냥꾼. 사탄에 미친 사냥개.]
[돌아가. 초대받지 않은 곳에 들어와 사람을 동요시키고, 사탄의 존재를 떠벌리고! 넌 구마 할 자격이 없어!]
[너 혼자서 하겠다고? '이걸'?]
[의식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진행 될 거고 그걸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하! 절차. 형식. 질서! 그런 거 하나하나 챙기다가 또 사람이 죽겠지.]

빗물에 젖어 무겁게 늘어지는 레인코트를 벗어 그가 트렁크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코트자락 밑으로 검은 경찰견을 연상케하는 날렵한 몸이 드러났다. 검은 바지 검은 워커 검은 라이더자켓 안으로 검은 티. 목덜미 위에 선명히 도드라지는 타투에 모두의 시선이 꽂힐 무렵 그가 손에 끼고 있던 검은 가죽장갑을 벗었다. 섬세한 뼈가 도드라진 양 손등 위에는 그가 차마 목에 걸지 못한 십자가가 불꽃의 형상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집에 사탄이 깃들었어. 모든 징조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구마가 필요해.]
[징조라니요!]
[첫번째, 역병.]

켄의 항의에 남자가 손을 들어 까마귀를 가리켰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직전에 숨이 끊어진 듯 멀쩡하던 사체에 구더기가 허옇게 끓고 있었다.

[두번째, 이변.]

길다란 팔이 이번엔 벌건 장미를 가리켰다. 바닥에 고인 빗물들 가운데 고고히 빛나는 그것은 생생한 만큼 섬뜩했다. 

[세번째-]
[그만해!]

듣다 못한 빈센트가 저지했다. 

[네 말대로 이 집에 있는 것이 사탄이라면, 네가 그 증거를 읊는 것 만으로도 그것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된다는 걸 모르나?]

세번째를 꼽으며 어둠 속의 2층 발코니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빈의 지적에 시선을 돌렸다. 입가엔 뜻모를 미소를 지은 채.

[들으라고 하는 소리였어.]

꽈릉!
지직. 

그가 내뱉은 말의 끝에 하늘을 쪼개는 천둥소리와 함께 갑자기 저택이 어둠에 휩싸였다. 놀라 비명을 지르는 켄의 목소리가 울리고 상혁이 침착히 허리춤에 차고 있던 손전등을 꺼내 켰다. 정전인 모양이었다. 

[젠장, 가지가지 하네.]

상혁이 욕을 한 사발 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 켄부터 찾았다. 그에게는 이 집 가족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다. 계단 손잡이를 손으로 붙들고 선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상혁은 그에게 다가서며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세요?"
"하..."

대답 대신 떨리는 한숨이 되돌아왔다. 하루 새 일어난 일들이 버거울 만도 했다. 힘이 풀렸는지 스르륵 주저앉으려는 그를 상혁이 급히 부축했다. 상혁의 팔을 짚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폭우 때문에 정전된 것 같은데요. 누전차단기를 점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상혁의 말을 들으며 켄은 이성적인 생각을 하려 온 힘을 다했다. 자신은 이제 이 저택의 호스트이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가족, 리오나는 아프다. 집에 손님이 있고, 자신이 책임지고 이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집을 지켜야 한다. 
옷 단추를 채우듯 되뇌이며 그가 상혁에게 부축 받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책임감이 척추를 타고 뻣뻣이 굳어 그를 바로 서게 했다. 

[퓨즈박스는 저택 밖의 창고에 있어요.]
[함께 가죠.]
[아뇨, 손전등만 빌려주시면...]
[켄씨, 전 당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상혁의 다소 딱딱한 말에 비로소 찬 물 뒤집어 쓴 듯 정신이 되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이 집은 연쇄살인사건이 일어난 곳이고, 켄 본인은 사건의 관계자이자 맥락상 가장 유력한... 타겟이기도 했다. 상혁은 그 혼자는 위험하다고 말 한 것이다.

[...알겠습니다. 같이 가죠.]

말을 하고 나서도 못내 미심쩍은 듯 켄이 머뭇거렸다. 켄은 두리번거리며 그 정체불명의 남자를 찾았지만 어둠 속에 묻힌 듯 그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저택을 뒤져 리오나에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하는 생각에 그의 인상이 점점 구겨져 갈 때에 그 기색을 알아챈 학연이 재빨리 그를 안심시켰다. 

[여긴 저희가 보고 있을게요.]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못 미더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없는 것 보단 낫다 생각했는지 켄이 순순히 답했다. 학연의 옆에서 빈센트도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켄은 저택을 나서면서도 몇 번을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까 그 침입자를 다시 보지는 못했다.




켄과 상혁이 저택을 나선 후 저택엔 기이한 정적이 찾아왔다. 학연이 밝힌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지해 남은 사람들은 다이닝룸으로 장소를 옮겼다. 거대한 식탁, 썩은 꽃들의 잔해 옆에 빈센트가 의식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촛불이 하나 덩그러니 놓였다.
테이블에 장식용으로 놓여있던 은촛대가 마침 있었다. 그 위에 꽂아 불을 밝힌 촛불이 시들어 빠진 장미꽃 더미 옆에 놓이자 분위기는 한층 더 음산해졌다. 부엌에서 촛불을 한아름 찾아 들고 온 학연이 그 광경을 보고 멈칫 하고 발을 물렸다. 촛불 그림자가 꽃잎 더미 위에서 기괴하게 일렁거리는 것이 공포영화가 따로 없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빈센트가 나지막히 말하곤 자기 가방에서 꺼낸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칙,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듯 작은 불꽃들이 초 심지에 옮겨가 타오르며 사위는 시나브로 밝아졌다. 워낙 큰 홀이라 전체를 다 밝히긴 어려웠지만, 중앙에 촛불 두개를 놓으면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보일 만큼은 되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학연이 괜히 경건해져 숨을 죽였다. 길다란 초를 은촛대에 꽂고, 불을 피워 테이블 위에 놓는 일련의 동작마저 기도하는 것 같았다. 
빈센트는 정말 사제의 정석같은 사람이었다. 마이클란젤로가 조각해둔 성 미카엘 대천사의 현신 같은 외모. 바티칸 직속 구마사제는 처음 보는데, 검은 사제복이 괜히 더 무겁게 느껴진다.


학연은 흔히들 말하는'영매'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학연은 많은 것을 읽었다. 그것은 오래된 사물의 기억이기도 했고 영혼의 속삭임 일 때도 있었다. 학연은 자신에게 알고싶지 않은 것들을 알려주는 그 목소리들을 거부하기 위해 심리학을전공하고 사람에게 몰두했다. 사람은, 그에게 원치 않는 것들을 강제로 보여주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함부르크에서 심리학 과정 석사를 마치고 뮌스터로 온지 이제 3년 차가 되었다. 그러니까 리오나와 상담을 시작한 것도 그가 뮌스터에 살기 시작했을 때와 거의 같은 시기였다. 

영매의 감이란 무섭다. 그가 리오나에게서 평소의  단순한 우울증의 그림자 아닌 다른 무언가를 느꼈을 때에 학연은 그동안 죽은듯 숨죽이고 있던 자신의 영혼이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것이 희열에 차 주절거렸다. 저길 봐. 너만 볼 수 있는 걸 저 여자가 준비 해놨어. 아주 화려하고 대단할 거야. 그녀는 정말 커다란 축제를 벌일 계획이거든. 
그리고 그 무렵 그녀에게서는 아주 차가운 향이 나기 시작했었다. 언뜻 피냄새로도 느껴지는 그런 비릿하고 차가운 장미향. 

리오나의 가라앉은 얼굴 뒤로 스멀스멀 느껴지는 '무언가'의 존재를 애써 모른 척 하며 버텨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가 마을을 온통 떠들썩하게 달군 <베를린의 소녀>가 발견 된 집이 리오나의 집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학연은 저도 모르게 빈센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수면제를 처방한 게 사실입니까?]

빈센트가 건조한 목소리르 묻는 말에 학연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빈센트의 시선은 촛불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장미 꽃잎들에 고정되어 있었다. 갈색으로 썩어가는 그것은 발악하듯 주위에 진한 향을 뿌리고있었다. 

[아주 예전에요. 잠이 잘 오지 않는다길래, 아마 6주 전에...]
[그녀가 그걸 먹었다는 게 사실일까요?]
[....]

학연이 의아한듯 빈센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바티칸의 가장 유능한 구마사제이기도 했지만 가장 회의적인 종이기도 했다. 
그는 사탄을 내쫓으면서도 끊임 없이 악마의 존재에 대해 의심했다. 항상 입버릇처럼 구마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고 그 이전, 인간 본연의 악의와 싸워 이기는 진실한 회개로 신자를 인도하는 것이 사제의 도리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그가 환자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악마의 존재부터 의심 하는 것은 학연으로서는 상상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학연은 그것을 티내지는 않았다. 어둠 속에서 둘을 주시하는 다른 시선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마사냥꾼, 유다 라비. 빈센트에게서 종종 듣던 이름이기도했다. 그 이름을 언급할 때의 빈센트의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안타까움 또한 기억하고 있었다.

[ 수면제를 처방하긴 했지만, 워낙 오래 전이기도 하고... 늘상 복용 해오던 거라서 정신을 잃고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의 효과는 아닐 겁니다. 본인이 원체 수면제 복용을 싫어 하기도 했었어요. 정말 버티고 버티다가 잠이 안올 때 한 알 씩 먹는다고 했고요. 제 의지와 상관 없이 잠이 쏟아지는 게 싫다고. 6주전에 한 달 치를 처방했으니 아마 꾸준히 먹지 않았다면 약이 남아 있을 가능성은 있군요.]
[그렇군요...]

빈센트가 말 끝을 흐렸다. 여전히 목소리에는 그 자신도 납득하지 못한 석연찮음이 느껴졌다. 
그가 단순히 전해들은 정황만으로도 이미 이 사건은 충분히 기이했으며, 비인간적이었다. 사탄의 짓이 아니라면 인간을 의심해야 하나 그것은 그것대로 참담한 일이다. 일가족의 막내딸이 제 아비와 형제를 죽였다. 그것도 벌레밥으로, 유충에게 시체 살이 다 파먹혀 표피 아래에 뼈만 앙상히 갉혀 껍데기만 남은 모습으로.

 [닥터 차. 저는...]

주저하며 말을 꺼내던 빈센트가 어딘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학연을 보고 입을 굳게 닫았다. 학연의 시선 끝에는,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얼굴 하나가 계단위에 서 있었다. 때마침 번개가 커튼 틈을 가르고, 천둥이 울었다.

쿠르르릉. 

리오나였다. 








퓨즈박스가 있는 창고는 아놀드의 시신이 발견된 곳 바로 옆이었다. 앞도 보이지 않게 쏟아지는 빗 속에서 상혁의 손전등 불빛에만 의지해 걸음을 옮기는 켄과 상혁은 걸음이 더딜 수 밖에 없었다. 눈 앞의 웅덩이를 피하기 위해 켄이 잠시 멈칫 한 순간 번개가 하늘을 쪼갰다. 

꽈르르릉. 

켄은 번갯불에 드러난 저택의 외관에 일순 말을 잃었다. 저택 담을 따라 피칠갑 한듯 핀 꽃은 붉은 장미였다. 그것들은 파충류의 눈알처럼 빼곡히 피어 빗물에 반들거리며 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택을 둘러 가는 길목은 저택의 외벽과 같은 색의 벽돌로 짜여 있었는데, 가끔 울퉁불퉁한 모서리들이 발치에 채여 둘은 어둠 속을 더듬어 가며 연신 기우뚱거렸다. 이 장대비속에서 엎어지는 일만은 면하려 손전등으로 발치를 살피며 걷던 상혁은 발치에 돌덩이처럼 널브러진 것들을 보곤 애써 경악성을 입 속으로 삼켰다. 아까 그 수상한 남자가 집어들고 저택 안으로 집어 던진 까마귀 시체들이었다. 
상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따라 오는 켄을 살폈다. 그는 저택 밖에 만개한 장미들 때문에 발 밑에 뭐가 널려 있는 지는 아직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눈치 못 채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을 하며 그가 고개를 털었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지만 인정도 할 수가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그 것의 실체를 대면하게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이미 어둠 속에 도사린 그것이 언제라도 뼈와 살을 주워입고 튀어나올 것만 같은 위기감. 
상혁은 문득 등 뒤를 돌아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을 애써 꾹 참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비는 여전히 저택이 떠내려갈듯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쿠르르릉, 쿠르르르...

저택과 동떨어진 창고는 밖에 들이치는 비에도 마른 먼지냄새가 자욱했다. 켄이 저 구석에 위치한 퓨즈박스를 찾아 덮개를 열고 이리저리 만지는 동안 상혁은 그에게 손전등을 넘기고 어둑한 창고 안을 돌아보고 있었다. 

"이 창고는 보통 어떤 때 쓰시던 곳입니까?"
"원랜 아버지의 트럭이 있었어요."

관짝이 되어버린 그 트럭말이다. 상혁이 침음성을 삼키든 말든 켄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나갔다. 

"원랜 아버지가, 말을 키우고 싶어 하셨었거든요. 이사 오면서 여기에 마굿간을 만들고 싶어하셨는데. 어머니가 점점 상태가 안좋아지시는 바람에 결국 말은 데려오지 못했었죠."

창고 곳곳은 허름하긴 해도 집주인이 꾸준히 정리정돈 한듯 멀끔했다. 상혁은 창고 안을 돌아보며 아놀드가 얼마나 이 저택에 애정을 쏟았는 지를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고용인 한 명 없이 이 넓은 저택을 오로지 혼자 관리했다. 그나마 일손을 도왔던 사람들은 저택을 감싸고 있는 황무지나 호숫가를 정리했을 뿐, 집을 드나들지는 않았다. 그는 마치 가족 아닌 누군가를 집에 들이기를 꺼리는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하며 문득 상혁이 천장으로 시선을 향했을 때 전기가 잠깐 들어왔다가 나갔다. 

"어? 뭐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조치가 먹히지 않자 당황한 켄이 다시 퓨즈박스쪽으로 손을 뻗을 때 무언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상혁인줄 알고 무심코 돌아보고는 그가 비명을 내지르며 어깨를 털었다. 

"으아아아악!!!!"

 주먹만한 거미가 켄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서슬에 손에 들고 있던 손전등도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궤적 그대로 빛이 포물선을 그리며 창고 안을 비췄고, 상혁은 그 찰나 드러난 광경에 굳어버렸다. 
철근과 나무로 프레임이 짜인 창고의 천장에는 거미떼가 바글바글했다. 그것들은 털이 숭숭 난 가는 다리를 까닥거리며 벽을 타고 몇몇은 제 배에서 자은 줄을 타고 창고 안에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바닥을 빼곡히 덮을 정도로 밀려온 거미떼 사이로 바닥의 손전등이 비추는 그림자가 벽에 기괴하게 일렁거렸다. 상혁은 아직 고치지 못한 퓨즈박스 쪽을 흘끔 보곤 빠르게 포기했다. 벽은 원래 색조차 분간 되지 않을 정도로 벌레로 뒤덮여 있었다. 

[켄씨!]

상혁이 공포에 얼어붙은 켄을 잡아끌고 창고 밖을 향해 잡아끌었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거미를 연신 털어내고 밟고 차내며 길을 튼 상혁이 억수처럼 내리는 비 속으로 그를 끄집어 내고 나서야 켄은 정신을 차렸다. 켄은 그 거미를 본 적 있었다. 오늘 아침 그의 형이었던 시체 속에서 기어나오던 그 것 말이다.

쿠르르릉!

그를 위협하듯 천둥이 울리고 켄은 그것을 신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저택을 향해 뛰었다.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발목을 물어 뜯으려 뒤쫓아오는 것 같았다. 잡아먹힌다. 잡아먹힌다! 똑같이 죽는다! 일제히 그를 향해 밀려오는 거미의 눈알이 도륵도륵 합창하는 것을 그는 들었다.

"으헉!"

정신없이 내달리다가 무언가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멈췄다. 넘어지며 바닥에 있던 돌부리에 박았는지 정강이가 쪼개질 듯 아팠다. 진흙바닥에 쓸려 엉망진창이 된 손으로 땅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던 켄은 불현듯 무언가 발치에서 물컹하게 뭉개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까 걸려 넘어진 것이 돌부리가 아닌 모양이었다. 
고개를 숙여 그것의 정체를 확인한 켄이 경악에 뒷걸음질 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으, 으으, 으아아아악!!!"

그것은 진흙 범벅이 되어 구더기가 드글거리는 까마귀 시체였다.








[리오나씨.]

그녀를 발견한 학연이 반갑게 맞이하려 다이닝룸에서 걸어나갔지만 리오나는 그를 보고서도 여전히 싸늘한 얼굴이었다. 발소리도 없이 둥근 계단을 미끄러지듯 내려온 그녀가 학연의 앞에서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다이닝룸에서 켜놓은 촛불들이 만들어낸 불빛이 닿지 못하는 거리, 그 곳에서 리오나는 멈춰섰다. 
빗소리가 정적처럼 깔리고 그 위를 바람소리가 웅얼대며 서성거린다. 학연은 문득 무언가에 짓눌리듯 가슴이 답답해져서 밭은 숨을 연신 들이쉬었다. 장미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무언가의 비린내.

[선생님이 어쩐 일이세요?]
[리오나씨가 걱정되어서...]

그 때 학연의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저벅 저벅 발소리를 숨기지 않고 다가온 빈센트가 마찬가지로 숨김 없는 눈으로 리오나를 응시했다. 알 수 없는 눈으로 빈센트를 보던 리오나가 툭 뱉었다.

[걱정이 되어서 바티칸의 개를 데리고 오셨어요?]
[...네?]

꽝! 꽈르르르릉.

집이 쪼개질듯 천둥이 침과 동시에 갑자기 촛불이 일시에 꺼졌다. 암전된 사위에 학연이 당황할 때 누군가 귓가에서 속삭였다. 낮고 거친, 피처럼 끈적한 목소리로.

"너, 알고 있었구나?"

학연이 소스라쳐 주춤 주춤 물러나는데 누군가 그를 세게 밀치고 앞으로 튀어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 반동때문에 한참을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뒷걸음질 치던 학연이 날카롭게 째지는 비명소리에 놀라 멈춰섰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그 어둠 속에서 팔이 붙잡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라비는 고양잇과 맹수처럼 암흑 속을 내달려 리오나의 팔을 결박하고 무언가를 그녀의 머리에 대고 눌렀다. 그것이 살갗에 닿자마자 리오나가 죽을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빈센트는 차츰 어둠에 익숙해지는 시각으로 학연을 부축하며 라비의 손에 들린 것이 번갯빛을 받아 계시처럼 희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은으로 된 십자가였다. 

꽈르르르릉!
[아아아아악!!!!! 사람살려!!!!!! 오빠!!!!!! 오빠아아아악!!!!!]
[뭐하는 짓이야!!!]

천둥과 함께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얼굴이 허옇게 질린 켄이 뛰쳐들어와 라비를 거칠게 밀쳤다. 진흙과 빗물을 바닥에 뚝뚝 떨구며 켄이 절규하듯 소리쳤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당신!! 우리 리오나한테 무슨 짓 했어!!]
[부마자가 확실합니다. 구마 의식 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대답은 저 멀찍이 서있던 빈센트에게서 나왔다. 선고처럼 떨어진 말에 켄이 망연한 얼굴이 되어 그를 돌아봤다. 빈이 조용히 라비를 턱 끝으로 가리키고, 라비는 손에 들고 있던 십자가를 그에게 보였다. 켄은 그의 뒤에서 떨리는 숨을 몰아쉬던 리오나가 그 순간 움찔 하는 것을 느꼈다. 

[지금 당장 구마의식-]
[그건 안 돼.]

기다렸다는 듯 나서려는 라비를 빈센트가 막아섰다. 그리고 켄을 향해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구마의식에도 절차가 있는 법입니다. 확인이 끝났으니, 교구에서 승인을 받고 나서-]
[저 부마자가 죽인 사람이 벌써 둘인데?]
[죽였다니!!]

켄이 발악하듯 외쳤다. 그 난리통에 그제서야 쫄딱 젖어 로비로 들어온 상혁이 온통 어두컴컴한 저택 안을 보고 어리둥절해서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녀를 보호하듯 버티고 선 켄의 뒤에서 리오나가 얇은 잠옷 차림으로 부들부들 떨고있었다. 
상혁은 그녀가 심신미약으로 주의가 요해지는 상태인 걸 상기해냈다. 일련의 상황들은 그녀에겐 큰 자극일 수 있었다. 아까 들린 비명소리도 아마 그녀의 것이리라 짐작한 상혁이 일단 그녀를 안전한 그녀의 방으로 올려 보내야겠다는 판단 하에 그녀에게 다가가며 입을 뗐다.

[리오나씨. 괜찮습니까?]
"손 대지 마! 이 고아 새끼야."

히스테릭하게 외치며 허옇게 번뜩이는 두 눈에 상혁이 얼어붙었다. 부축하려는 그의 팔을 거칠게 쳐낸 리오나가 바람같이 로비를 가로질렀다. 누가 붙잡을 틈도 없었다.

그녀의 검남빛 옷자락이 계단을 올라 2층 층계참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뚫어져라 응시 하던 학연이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쥐었다. 그의 피가 흥분에 미쳐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피냄새를 맡은 사냥개처럼.





 

*



비가 멎을 생각을 앉는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저녁. 상혁은 손목시계를 한번 보곤 시간이 6시가 겨우 넘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밖은 한 밤 중처럼 어두웠고 저택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무겁게 쳐진 커튼 너머로 억눌린 빗소리만 추적대고 있었다.

상혁은 손전등 불빛에 의지해 저택 안을 돌아 보고 있었다. 저택 규모는 지상으로 2층과 지하실, 2층 위에는 다락이 있다. 그 다락은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빈티지 가구들을 그대로 쌓아두던 곳이라고 했다. 여태 정리 안하고 두고 살다가, 그 쪽 방으로 오래된 피아노를 옮겨두려 구조를 바꾸던 중 문제의 그림이 발견된 것이다.

이웃들 사이에서 이 저택은 주인 없이 남겨진 폐가로 유명 했던 곳이었다. 그들은 입을 모아켄 가족들이 들어와 살기 전 몇 십 년간 저택이 비어 있었다고 주장 했다. 저택의 옛 주인은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그림이 발견 되고 나서 아놀드가 그림의 소유권 문제로 수소문 했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부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도 갖고만 있었을 뿐 드나들지는 않았었다고,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게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었다. 


문제의 그림은 2층, 켄의 모친인 한나 리가 생전 쓰던 작업실에 옮겨져 있었다. 상혁은 방을 들어서자 마자 짙게 풍기는 유화 물감 냄새에 코를 찡그렸다. 켄의 말로는 그녀의 사후 아무도 방을 쓴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방 안에는 방금 막 물감을 짜서 벽에 펴바른 듯 물감 냄새가 진동을 했다. 오랜시간 머물러 벽에 배어 버린듯한 냄새다.
 
그림 그리는 것이 취미였던 그녀의 작업실에는 벽에 걸린 그녀가 그린 그림과 이제는 텅 빈 이젤들, 그녀의 손을 탄 흔적이 역력한 화구들이 가득했다. 이젠 세상에 없는 사람의 흔적 가운데에서 <그림> 은 혼자 막 잠에서 깬듯 고고했다.

가시광선에 노출되면 유화는 변색된다. 원래 유화를 그리던 방은 그래선지 빛 하나 안들어오게 무거운 벨벳의 커튼이 천장에서부터 떨어져 창문을 벽처럼 완벽히 가리고 있었다. 빛이라곤 오로지 상혁의 손에 들린 손전등 밖엔 없었다.
짙은 자주색의 천이 뒤덮인 그림 앞에서 상혁은 한참 망설였다. 사람들은 이 저택에 일어난 기이한 사건이 이 그림의 저주라고 하기도 했다. 그림에 깃든 저주가 불행을 불러오고 사람들을 해친 거라고. 진부한 공포영화 소재로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소문의 그림 앞에서 그는 왜 자신이 망설이는 지도 모른 채 숨을 골랐다. 
지금 이 천을 걷어 내고 그림을 본다고 해도 이미 일어 난 일이 달라 지지는 않는다. 그림은 그림 일 뿐이다. 이성이 읊어주는 소리를 되풀이하며 상혁이 그림에게로 손을 뻗다가 불현듯 굳었다. 

-손 대지 마! 이 고아 새끼야.
 
실체. 상혁은 그 순간 반짝이던 리오나의 눈을 떠올리곤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경멸에 찬 목소리완 다르게 눈동자는 숨길 수 없는 희열에 빛나고 있었다. 그는 그 눈을 아주 잘 알았다. 유년 시절 내내 시달리고도 끝끝내 벗어나지 못한 그 굴레였으니까. 고아 새끼. 더러운 고아 새끼.  냄새 나는 거지 새끼. 몸 위로 쏟아지던 발길질과 멸시는 뼛속 어딘가에 박힌 채 그와 함께 자라버렸다. 그의 척추 안에 또아리를 틀고. 그녀는 그 기억 속의 한 장면을 생생히 재연해냈다. 실체를 갖고 나타난 악몽처럼.

끝내 상혁은 천을 걷어내지 못했다. 몇 번이고 허공에서 멈칫거리던 손이 결국 거둬지고, 뒤돌아 상혁이 방을 나섰다. 

끼이익, 쿵. 

무거운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림 위에 걸린 천이 저 스스로 툭 떨어졌다. 
허물 벗듯 미끄러진 천 뒤로 그림이 어둠 속에서 화려한 얼굴을 내밀었다. 

화려하게 피어난 붉은 장미 속에서 눈매 끝이 보일만큼 아슬히 뒤를 돌아 보고 있는 소녀, 소녀의 흰 얼굴 위로 문득 무언가의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도 같았다. 



*


지긋지긋한 비는 아직도 내리는 중이었다. 천둥 번개는 이제 좀 멎었나 싶더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저택을 통째로 날려 버리겠다는 듯 매서운 바람소리가 건물 외벽을 타고 살벌하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비에 쫄딱 젖은 사람들에게 급한 대로 수건을 나눠 주고 응접실의 벽난로에 불을 지핀 켄은 문득 자신이 아침에 도착한 후로 아직 짐도 못 풀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마른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이제 겨우 저녁시간인데. 하루가 유독 길었다. 

"선생님."

켄이 건네준 타월을 어깨에 두른 채 불길 앞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던 학연이 한국어로 부르는 소리에 어깨를 흠칫 떨며 돌아보았다. 켄이 겸연쩍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일단 여기서 쉬고 계세요. 제가 오늘 도착해서 아직 하나도 정리를 못해서. 방에서 정리 좀 하고 다시 내려오겠습니다."
"예, 천천히 하고 오세요."
"리오나는..."
"너무 걱정 마세요."

학연이 불안해보이는 켄을 일단 안심시키려 말했다.

"리오나씨도 심적으로 상당히 궁지에 몰린 상태 였을 겁니다. 충분히 쉬고 나서 다시 대화 나누면 되니까요. 괜찮을 겁니다."
"...네."

상당히 묻고 싶은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켄은 결국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돌아섰다. 삐걱삐이걱, 그가 오래된 나무계단을 오르는 소리와 테이블 저 쪽에서 빈센트가 기도하며 매만지는 묵주가 테이블에 간간히 부딪히는 소리가 함께 울렸다. 다그락, 다그락. 

타닥거리며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길로 고정된 학연의 눈은 보이지 않는 곳을 배회 하듯 먼 곳을 향해 있었다. 







라비는 저택 밖을 나오자 마자 코 끝을 스치는 강한 향에 무심코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뻔 했다. 땅을 때리는 비에 튕겨 올라오는 흙냄새가 피냄새와 뒤섞여 오묘한 장미 향기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 짐승내 하나 없이, 오로지 붉음을 치장하려는 듯 화려하게 핀 향, 그 끝에 묻어나는 희미한 단내. 

초겨울의 비바람 부는 밤, 살이 에이게 추운 날씨에도 장미덩쿨은 여봐란듯 아찔하게 피어 저택 벽을 온통 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원래는 흰 장미라고 했었나. 라비는 핏물을 뒤집어 쓴듯 괴기스러워진 저택의 외관을 올려다보며 눈을 가늘였다. 
어두운 외벽 색깔에 묻힌 덩쿨 아래는 더 가관이었다. 까마귀들이 가시덩쿨에 죄어 하나 같이 거꾸로 매달린 채 오너먼트처럼 매달려 죽어 있다. 땅을 향해 늘어진 부리 끝에서 피가 뚝뚝 흘러 덩굴로 스민다. 너무도 확연한 역십자가의 표현이었다. 

악취미로 점철된 그 광경을 보며 라비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이 악마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을 치장하고 싶어 한다. 피와 가시덩쿨로 치장된 시뻘건 왕관을 머리 위에 얹겠다고 과시하고 있었다. 마치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다.

그림. 그 그림이 정말 이 악마와 관련이 있을까. 이 저택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 그림에 대해 말했다. 그림이 발견되고 나서부터 모든 이상한 일들이 시작된 거라고. 있을 수 있는 추측이다. 악령은 물체에 깃들어 오랜 세월 먹잇감을 기다리며 잠을 자기도 하니. 하지만 발현에는 매개가 필요하다. 
저택 주변에 분명 저 악령을 깨운 매개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 불사르기만 해도 악령은 큰 힘을 잃는다. 라비가 빗속을 뚫고 또 저택 밖으로 나온 이유도 그것에서였다. 

그림이 있는 저택의 2층을 올려다보던 라비가 그 때 무언가 외벽을 타고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치켜올렸다. 거미였다. 손바닥만한 거미가 꽃잎 새에서 기어나와 장미 덩쿨을 넘고 외벽을 타고 오른다. 
아니, 한 마리가 아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 길고 검은 다리를 까닥이며 그것들이 빨간 꽃 안을 헤집고 나와 어디론가 향한다. 개미떼처럼 일사불란히 움직이는 그것들이 향하는 방향을 알아채고 라비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창문 너머로 촛불이 일렁이는 켄의 방 쪽이었다.





*



이게 꽤 옛날의 기억이라는 걸 켄은 자각하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왜 내가 이걸 잊고 있었지? 켄이 당혹스러워하며 제 앞에서 무어라 울며 말하는 동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리오나는 절망으로 하얗게 질린 손으로 자신을 붙들고 매달리고 있었다. 

-오빠, 나 진짜 무서워.

지금 같았으면 당장 무엇이 널 힘들게 하냐고 물었겠지만, 그 때의 그는 관심이 없었다. 동생이 역시 유별난 구석이 있다고만 여겼다. 귀찮다는 듯 팔에 매달린 손을 떼어 낼 때 리오나가 갈고리 같은 손으로 그의 팔을 억세게 쥐어잡았다. 그 악력에 놀라 눈을 치켜뜬 켄이 손에서 벗어나려 그녀를 밀치지만 고개만 숙인채 꿈쩍도 않는다. 놔. 이거 놔! 그의 몸부림이 무색할만치 강하게 켄을 그러잡고 석상처럼 박혀 땅만 쳐다보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있잖아 오빠.  

퀭하게 말라버린 눈동자. 그 밑의 선명한 그림자가 눌어붙은 눈가가 시체의 머리뼈처럼 그를 노려본다.

-그 때 왜 그랬어?

켄은 무어라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너무나 편리하게, 모조리 잊어버렸기 때문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기억 저 편으로, 일회용품처럼 버려 버렸기 때문에. 리오나는 이미 그 것을 훤히 아는 신랄한 어조로 대답을 바라지 않는 질문을 던지며 그를 옥좼다. 

- 나한테 왜 그랬어?




*



[헉....!]

쨍그랑!

학연이 갑자기 커피잔을 집어 던지는 바람에 잠시 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던 상혁이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으로 학연을 보자 그가 아직 경악이 안가신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거미, 거미가....]
[거미요?] 

상혁은 거미라는 소리를 듣고 얼굴을 굳혔다. 학연이 쳐낸 거미는 그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져서 몸을 까뒤집어 발을 바르작대고 있었다. 불현듯 아까 창고에서 개미떼처럼 그들을 덮쳤던 가느다란 다리들이 생각난다. 그걸 떠올리기 무섭게 툭, 툭 하고 천장에서부터 무언가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학연이 옆에서 기겁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걸 들으며 상혁이 돌아버리겠단 얼굴을 했다. 천장이 우글거릴 정도로 많은 거미떼가 그들을 향해 모여 들고 있었다. 

[으아아악!] 

학연이 어찌할 바 모르며 무작정 그것들을 손에 집히는 수건으로 털어내려고 했지만 소용 없었다. 가느다란 털이 난 수백개의 다리가 쟈근거리며 사방에서 그를 타고 오르려 했다. 뒷덜미를 타고 소름이 쭉 올랐다. 학연이 잠시 멈칫한 사이 그것들은 득달같이 몰려들었다. 

[히익...! 사, 살려...!]
부웅!

어디선가 커다란 불덩이가 날아온다 싶더니 천장에서 줄을 자아 내려오던 거미들이 불에 타 후드득 떨어졌다. 상혁이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 하나를 아예 집어들고 불로 거미들을 지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 지긋지긋한...벌레새끼들...!]

상혁이 불을 한 번 휘두를 때 마다 벌레 타는 노린내가 공기중에 훅 번졌다. 그것들이 그슬리며 나는 연기에 학연을 덮은 거미들이 주춤 할 때 빈센트가 입을 열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빈센트는 미약한 떨림이 채 가시지 않은 손길로 성수병의 뚜껑을 열고 최대한 침착히 손을 적셨다. 성모님, 지켜주소서. 당신의 종이 당신의 권세로써 물리치게 하소서. 들리지 않는 기도는 묵주처럼 목에 걸려있었다.

[하느님께서 일어 나시니, 그의 원수들은 흩어지고.] 

빈센트가 성수로 흠뻑 적신 손을 세차게 털자 그의 손 끝에서 은빛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당신을 미워하던 자는 그 면전에서 -도망치도다.]

챠아아아악! 
샤아악! 

흡사 산이 살을 녹이는 듯한 작열음이 성수에 닿은 거미들에게서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그가 흩뿌린 성수 방울에 맞은 벌레들은 즉시 맥을 못추고 다리가 곱은 채 배를 까뒤집었다. 

[연기가 사라지듯, 불 앞에 밀초 녹듯,]

그가 지나는 자리는 신의 권세로 바다를 트듯 길이 생긴다. 그는 커다란 보폭으로 나아오며 보이지 않는 칼을 휘두르듯 팔을 떨쳤다. 그 기세에 눌려 새까맣게 모이던 거미들이 도망 쳐 흩어진다. 학연과 상혁 앞에 도착한 빈센트가 병에 남은 성수를 흠뻑 손에 적셔 그 둘의 이마를 짚으며 선언하듯 읊었다.

[-악인들이 하느님 앞에 사그라지도다.]

이윽고 두 사람에게서 빈센트의 손이 떨어져 나갔을 때엔 죽어 나동그라진 시체 빼고는 거미들은 썰물 빠지듯 사라져 있었다. 
학연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지만 바닥이 온통 배가 터져 죽은 거미 시체 투성이란걸 알고 겨우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거친 숨만 헉헉 내뱉었다. 
긴장이 풀려 들고 있던 불덩이를 그대로 바닥으로 떨굴 뻔 한 상혁이 겨우 난로에 그걸 되돌려 놓고는 성수 병을 갈무리하는 빈센트에게 물었다.

[방금 그거, 뭐였습니까?]
[성수입니다.]

답을 들은 혁이 기가 차다는 얼굴을 했지만 빈센트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었다. 성수에 죽어나가는 거미들이라니. 

[..외람된 말씀이지만, 형사님.]

빈센트가 무거운 어조로 꺼내는 말 뒤에 이어질 내용을 혁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골치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그에 아랑곳 않고 빈센트가 예의 그 기도문 읊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구마의식, 필요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불러올 수 있는 재앙이 아닙니다.]
[.....]

상혁은 침음성을 삼켰다. 처음부터 이 사건에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했던가. 이 더럽게 잘생긴 신부의 말 대로, 그저 인간으로서 어찌할 도리 없는 초월적인 존재에 의한 초자연적 현상이니 관여할 수 없다고 물러나버리면 오히려 모든 게 다 설명 되지 않나. 이 저택은, 두고 두고 악령씌인 저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말이다. 망할! 상혁이 욕을 지껄이며 뻑뻑한 눈 위를 거칠게 비볐다. 그건 절대로 그가 형사로서 원하는 결론이 아니었다. 

상혁이 입을 열어 수사권이 어쩌구 하는 진부한 원리원칙을 들먹이려는 때에 학연이 다급히 빈센트를 불렀다.

[신부님, 신부님!]

그리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새까만 거미의 파도가 벽을 덮고 일제히 2층을 향하고 있었다.  




*


켄은 가위에 눌리고 나서야 자신이 깜박 침대에 누워 잠들어 버렸었단 걸 알았다. 사지가 보이지 않는 밧줄에 꽁꽁 묶인듯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피곤했긴 피곤했나보다 생각하며 켄이 눈을 굴렸다. 이럴 때 어떻게 하면 풀어진다고 했더라, 생각하던 때 시야 끝자락으로 옷자락이 스쳤다. 

리오나가 침대맡에 서 있었다. 

리오나! 켄이 입도 뻐끔거리지 못한 채 시체처럼 누워있을 때 그녀가 손에 들고 있던 흰 수건을 입으로 가져가 받쳐들었다. 그리곤 곧 그 수의처럼 흰 수건 위로 그녀의 눈 코 입에서 넘쳐나오는 시뻘건 피가 폭포처럼 흘러 내리기 시작했다. 

구구궁. 
도독, 도도독. 다가가각.

하늘이 울린다. 무언가 천장에서부터 몸 위로 떨어져내린다. 하지만 켄은 눈도 떼지 못하고 그의 동생만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벌건 피눈물이 흐르는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그를 노려 보고 있었다. 이윽고 피로 흥건히 젖은 천이 켄의 시야 위로 덮인다. 

둑, 둑. 두둑. 

얼굴 위로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이 눈물처럼 흐른다. 피에 젖은 천이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켄이 차라리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을 때 그 것이 켄의 얼굴을 덮어 눌렀다. 

"....!!"

물보다 점도 높은 액체로 젖은 천은 숨 통할 공간이 없었다. 코와 입이 다 틀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다. 피비린내. 머리가 띵하도록 기도를 틀어막는, 장미향. 숨이 막히는데 신음도 뜻대로 내지 못하고 켄의 정신만이 몸부림쳤다. 이대로 죽는다. 정말 죽는다... 이윽고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리오나가 꿈에서, 아니, 아주 먼 옛날 자신에게 했던 말이 아련히 메아리 친다.

-오빠, 제발 내 말 좀 들어줘.
 


쾅!!

그때 방문이 떨어져나갈 듯 열리고 상혁이 뛰쳐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 마자 침대 위에 누운 켄의 위로 올라타 그의 얼굴을 천으로 덮어 누르고 있는 리오나를 발견 하곤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커헉! 꺽! 커흑!]

상혁이 리오나를 떼어 내자 마자 켄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를 결박 하던 보이지 않는 밧줄이 삽시간에 사라졌다. 힘겹게 기침을 토하는 그를 뒤따라 들어온 학연이 부축 해 앉히고, 성수를 든 빈센트가 막 거미떼를 헤치고 방에 들어올 때였다. 

쨍그랑!! 

 침대 머리맡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며 커튼이 휘날렸다. 유리창을 박살 내고 커튼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검은 옷의 악마사냥꾼이었다. 그는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상혁이 수갑을 찾는 사이 리오나의 뒷덜미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며 무언가 그녀의 목에 감았다.

[-꺽! 꺼억! 끄어어어억! 꺽!]

묵주가 닿자 마자 리오나가 온 몸을 뒤틀며 발악했다. 그저 목에 그것을 두르고 있을 뿐인데 목이라도 졸린 듯 발을 바닥에 질질 끌며 그녀는 올가미에 걸린 짐승처럼 울었다. 눈자위가 희게 뒤집혀 괴로워하며 손을 휘저어대던 그녀가 머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댔다. 

[까아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그만 하세요!!!]

영문도 모른 채 튕겨져 나갔던 상혁이 발작하는 리오나를 라비에게서 힘으로 떼어놓았다. 라비는 그저 묵주를 대고만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순순히 그녀를 상혁의 손에 넘겼다.

방 안에 드글거리던 거미들은 빈센트가 들어온 후로 그림자 속으로 녹아 사라지기라도 한 듯 보이지 않아, 시뻘겋게 젖은 천만 숨막히는 정적 가운데 덩그러니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상혁은 품에서 꺼낸 수갑으로 리오나를 결박하며 씹어 뱉었다. 
 
[리오나 뮐러씨. 살인 미수로 체포하겠습니다.]
[저건 저 여자가 하는 일이 아니야.]
[그게 범행 현장 목격한 경찰 앞에서 그게 할 소린가? 방금 이 여자가 죽이려고 했잖아. 뭐 다른 게 어떻게 설명이 되건 안되건 간에!!]

라비가 그를 저지하려 하자 그에게 잡힌 어깨를 뿌리치며 상혁이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핏대 세워 터져나오는 그의 목소리 끝에 묻어나는 여실한 불안감에 학연이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구마, 그래, 못할 거 없지. 감옥에서 하면 될 거 아냐. 비켜!]

방문 앞을 가로 막은 사람들을 제치고 기어코 상혁이 리오나를 끌고 나간다. 조용히 비켜선 그를 스쳐지나간 그 뒷모습을 빈센트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촛불이 그의 얼굴 위에서 일렁거린다. 





탁! 

그는 리오나를 차 뒷자석에 태워 놓고 운전석에 올라타며 거칠게 문을 닫았다. 설명 못할 분노가 마음 속에서 드글거렸다. 실체? 하! 결국은 죄다 인간이 하는 짓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포, 그런 건 인간이 벌일 수 있는 추악한 짓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악마? 사탄? 

"-개소리!"

자기 자신에게 하는 일갈처럼 씹어 뱉으며 상혁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를 헤드라이트가 창백히 헤집는다. 

상혁은 거칠게 핸들을 돌렸다. 길이 굽어질 때 마다 백미러로 언뜻 보이는 리오나의 검은 머리칼이 커튼처럼 흐느적거리며 시야 끝을 맴돌았다. 차창 위 핸들에 수갑으로 결박된 그녀의 가늘고 흰 팔이 힘없이 덜렁거린다. 

차체를 사납게 두들기는 빗소리 속에서 차 안의 죽음 같은 고요가 아까 그 피에 젖은 천처럼 숨을 틀어 막는 것 같았다. 상혁은 치솟는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식은땀에 젖은 손으로 핸들을 더 세게 움켜잡았다. 빗물로 젖은 흙길은 진창이라 타이어가 자꾸 미끌렸다. 
놓치면 안된다. 모든 건 그의 통제 아래 있다. 자신에게 확인을 구하듯 되뇌이며 상혁이 잇새로 숨을 골랐다. 심장이 미친듯이 펄떡대고 있었다. 무언가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한 것처럼. 

호수에서부터 이어진 물길 위로 놓여 저택과 숲을 잇는 조그마한 돌다리 앞에 다다랐을 때는 상혁은 저도 모르는 새 식은땀에 흠뻑 절어 있었다. 저 다리를 건너 500미터 정도만 가면 포장도로다. 상혁은 숨을 고르다가 문득 백미러를 흘끗 보았다. 그리고 리오나와 눈이 마주쳤다. 

[흐흐흐흐....]

치렁치렁 늘어져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 사이로 바람 새는 듯한 웃음 소리가 흘러 나왔다. 상혁은 온 몸을 타고 오르는 소름에 저도 모르게 손을 꾹 말아쥐었다. 애써 무시 하며 앞을 다시 보기 무섭게 상혁이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앞으로 쏠린 몸에 클락션이 눌려 요란한 경적음이 빗소리를 꿰뚫었다.

꽈르르르르릉!
빠아아아앙!

상혁이 차를 세우기 바로 직전, 새하얀 번개가 시야를 난폭히 찢고 내리꽂혔다. 상혁은 숨을 헐떡이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몸을 웅크렸다. 번개가 꽤나 가까운 곳에 친 모양이었다. 일단 차에 맞은 것은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기 무섭게 무언가 땅을 울리는 파열음이 울렸다.

-꾸궁!

희게 질린 상혁의 시야 앞으로 까맣게 불탄 거목이 다리 위로 쓰러지고 있었다. 

꽈르릉! 
쿠구궁-

이내 쓰러지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저택과 도로를 잇는 단 하나의 통로가 완벽히 차단되었다.

[푸흐....으흐흐흐흑....]

리오나가 낄낄댔다. 

[푸힉... 으히힉....으히히히히히!!!!]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떨어가며 그녀가 웃는다. 상혁은 경악에 굳어 멍해졌다가 백미러로 리오나를 보곤 결국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아-학학학학학!!!!]

그녀의 흰 얼굴은 온통 피범벅이었다. 





*




상혁은 결국 차를 몰고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설상 가상 전화도 터지지 않았다. 무전으로 연락을 시도했지만 역시 먹통이어서, 상혁은 일단 기다렸다가 비가 좀 잦아들면 다시 시도해보기로 결론 내렸다. 자리에 모여 있던 이들은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로써 꼼짝 없이 저택에 갇히게 된 것이다.  

리오나는 빈센트의 인도에 따라 그녀의 방에 감금조치 되었다. 제 눈 앞으로 쓰러지는 거대한 나무를 생생히 기억 하고 있는 상혁은 이번만큼은 그에게 반기를 들지 않았고 그건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켄도 마찬가지였다. 

절그렁, 절그렁.

라비가 제 몸만한 트렁크를 손에 들고 리오나와 빈센트의 뒤를 따라 엄숙히 계단을 올랐다. 트렁크가 그의 다리에 부딪힐 때 마다 안에 든 의식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견고한 프레임을 뚫고 들렸다. 상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그와 빈센트가 지금 구마 의식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되는데. 말도 안되는 일인데. 그녀는 먼저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머리가 중얼 거리는 소리는 미친듯 씨근대는 심장소리가 다 먹어 삼키고 있었다. 공포. 그가 잇새로 갈아 대며 억누르던 것의 이름은 이젠 겉잡을 수 없는 진동으로 그의 가슴 위에서 널을 뛰어 댔다. 

도망쳐. 문득 그 안의 무언가가 속삭였다. 그 때 얌전히 빈센트의 손에 이끌려 걷던 리오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했는 지는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혁은 똑똑히 들은 것 같았다. 그녀가, 아니, '무언가'가 뼈마디를 우득우득 맞추며 몸을 일으키는 소리를 말이다.





*




어느새 시각은 밤 열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두 사제가 구마의식을 위해 리오나의 방에 들어간 이후, 학연과 다른 둘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리오나의 방 근처에 있어야 한다는 의견 하에 그녀의 방 바로 옆에 있는 방으로 장소를 옮겼다. 그 곳은 공교롭게도, <그림> 이 있는 방이었다. 

[파더 빈센트의 말씀에 의하면, 악마가 찾아온 매개가 있을 것이라고 해요.]

학연이 말하며 천에 덮인 그림을 흘끗댔다. 빈센트는 처음엔 그 것이 그림이라고 생각했으나, 아까 살펴본 바로는 특이점을 찾지는 못했다. 

[그림은, 음, 그러니까... ] "아, 독일어로는 단어가 잘 생각이 안나네요."

학연이 숨 토해내듯 한국어를 주르륵 뱉었다. 

"발현체. 발현체래요. 그림에 악령이 깃들 수는 있지만, 그게 힘을 쓰고 영혼에 손을 뻗기 위해선 감정의 어두운 부분을 좀 먹는 매개가 있어야 한다고..."
"감정의 어두운 부분이라."

상혁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선생님에게는 리오나씨가 별다른 이야기를 한 게 없었나요?"
"딱히요."

상혁의 물음에 학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분명 리오나를 궁지에 몰아간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자신은 캐치 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리오나의 마음을 파고든 것이라는 죄책감이 어쩔 수 없이 학연을 괴롭게 했다. 아무리 인간의 의지로 제어되는 일이 아니라 해도.

"리오나씨는 항상... 어려운 분이었어요. 상담을 시작 하고 나서 마음을 열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음. 자신을 감추는 데에 능숙한 분이어서."

학연의 눈이 과거를 회상하며 흐릿해졌다. 

항상 고상한 몸가짐의 그녀는 상담실의 의자에 등을 편히 기대고 앉기 까지 일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었다. 리오나는 그만큼 쉽사리 자신의 엉클어진 내면을 타인에게 풀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소설을 쓰는 일을 하는 사람이란 걸 알았을 때 학연은 그래서 쉽사리 납득했다. 그녀의 말들은 언제나 작품의 시놉시스처럼 잘 갖춰진 문장들의 나열에 지나지 않을 뿐, 미처 정제되지 않은 것- 흔히 마음의 빈틈이라고 하는 것은 없었으니까.  

"켄씨. 최근에 리오나씨가 심적으로 많이 흔들리거나 상처 입은 일이 있나요? 그러니까, 그림이 발견될 때 쯤에."
[그 애가 말을 안하는 건 선생님에게 뿐만이 아니라서.]

켄이 가라 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숨길 수 없는 피곤이 주렁 주렁 매달린 눈가를 그가 거칠게 쓸었다. 아직도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겪은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얼굴에 말라 붙은 핏자국이 증명 하고 있었다.
켄은 아까 그 흔적을 문질러 닦으며 그가 정말로 꿈에서 들었던 동생의 목소리를 멍하니 곱씹었었다. 그 애가 그렇게 간절하게 무언가 말 하는 애였었나. 내게 그랬던 적이 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해소되지 못한 의문은 금새 자괴감으로 번졌다. 나는 왜 그 때 그 애의 말을 듣지 않았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않았다. 동생이 그렇게 된 데에는 분명 자신도 어느 부분 일조하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니 자신을 죽이려, .....죽이려고. 

켄이 떨리는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두 손으로 싸맸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막다른 길로 내몰았단 말인가. 아버지와 사는 3년 간 둘 사이에 커다란 트러블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친구를 학교 다닌 곳에 다 두고 떠나 온 리오나는 종종 외롭다고 하긴 했었지만...

"아."

무언가 깨달은 듯 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개. 리오나가 개를 키웠었어요."
"아."

학연이 그 말을 듣고나서 생각났다는 듯 탄식했다.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 개가, 얼마 전에 새끼를 낳다가 죽었다고..."
"네. 그게 아마-"
"한 달 전이요."

학연과 켄의 눈이 마주쳤다. 그림이 발견되기 직전이었다. 상혁이 싸한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 개 시체, 어디 묻었다고 했습니까?"









빈센트가 경건히 촛불을 밝히고 제식용 견장을 어깨 위에 둘렀다. 은촛대 위에 밝혀둔 촛불들이 방 안을 빙 둘러 밝히는 가운데, 격식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아무것도 허락 되지 않은 라비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묵주를 쥔 손을 아프도록 말아쥐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침대 기둥에 묶은 여자가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것 좀 풀어주세요. 너무 아파요.]

리오나가 손목을 묶은 천을 잡아당기며 애원했지만 침대 바로 옆에 서 있는 빈센트는 들은 척도 않았다. 이윽고 그가 성호를 긋는 것을 신호로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기도를 시작하자 곡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Pater noster, qui es in caelis, sanctificetur nomen tuum(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파..... 흐으윽.... 아파.....]
[Adveniat regnum tuum(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이러지 마세요... 제발요... 제가 어떻게 아버질 죽여요...]
[Fiat voluntas tua, sicut in caelo et in terra(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뤄지소서).]
[제가 어떻게 제 가족들을... 둘씩이나....]

리오나가 애원했다. 처절하게 일그러진 눈가가 비탄에 젖어들었다. 빈센트는 내리뜬 눈으로 그런 그녀의 흰 얼굴 위를 성경 보듯 읽어 내렸다. 줄곧 손에 들고 있던 성서가 탁자에 놓이고, 그가 성수 병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sicut et nos dimittimus debitoribus nostris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

빈센트의 손이 느릿하게 성수병의 마개를 뽑고 내용물을 손가락에 적시는 것을 리오나는 떨리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까만 눈이 주체할 수 없이 흔들리는 것을 계시의 창 같은 시선으로 직시하며 라비가 주기도문을 읊는 목소리에 더욱 힘을 실었다.

[Et ne nos inducas in tentationem(저희를 유혹에서 구하옵시고).] 
[...................]

부릅뜬 눈에서 아까 전의 애절함은 감쪽같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리오나는 희멀건한 눈으로 서서히 자신의 얼굴로 다가오는 빈센트의 손가락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빈센트는 마지막 한 구절을 뱉으며 엄지손가락을 리오나의 이마 정 가운데로 가져다 대었다. 

[-sed libera nos a malo (악에서도 구하옵소서).]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손에 닿은 곳이 타들어가기라도 하듯 리오나가 찢어지게 비명질렀다. 거칠게 도리질치는 그녀의 머리를 라비가 두 손으로 붙들고, 빈센트의 엄지 손가락은 그의 이마 위에 또렷한 십자가를 그린다.

[Quia tuum est regnum, et potestas, et gloria in saecula(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갹갹갹갹갹갹갹갹갹갹갹!!]

이빨로 뼈를 갉아대는 듯한 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연신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리오나가 빈센트를 올려다본다. 빈센트가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마지막 남은 한마디를 꺼내려 할 때 리오나가 툭 뱉었다.

[아ㅁ-]
"홍빈아."

그녀에게서 갑자기 튀어나온 또렷한 한국어에 빈센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리오나가 입을 죽 찢어 웃었다.

"내게서 동생을 보았니?"
  

빈센트가 얼어붙었다. 리오나가 무어라 말하는 지 모르는 라비가 그의 상태를 보곤 먼저 구마기도를 시작했지만 그녀는 입을 나불대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천상 군대의 영광스러운 지휘자이신 대천사 성 미카엘이시여.]
"알고 있었지?"

리오나가 뱀처럼 목을 꺾어 그를 올려다본다. 빈센트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굳어있다가 그 눈을 마주치고 소스라쳐 시선을 돌렸다.

[권세와 폭력과의 싸움에서 저희를 보호하시며.]
"저 등신 같은 둘째는 몰랐어도, 너는 알고 있었잖아. 니 동생이 하던 말, 고스란히 다 들으면서 모른 척 한 거잖아."
[이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 아래 악마들과의 싸움에서-]
"동생이 결국 낙태한 거, 알고 있었잖아!!!"
[-우리를 보호하소서.]

라비가 기도문의 첫 문단을 마침과 동시에 빈센트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빈센트가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본다. 라비의 눈이 질책을 담고 그를 보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현혹되지 마!]
"그 아기, 눈 코 입이 다 있었지. 다섯 달이나 품고 있었잖아, 어미가. 응? 배가 이렇게 불러서는. 그 부른 배 붙잡고 기도하러 오는 동생을 보면서, 네가 삼켰던 말. 기억해?"

리오나가 정말 즐겁다는 듯 낄낄대다 표정을 싹 굳히고 소리질렀다. 

"더러워! 창녀같은 년! 어디서 아비도 모를 애를 배어 와서! 집안의 수치!"
"아니야!!!!"
"그래! 차마 동생 앞에서 말 하지는 못했지. 역겨운 위선자! 그녀가 모를 거라 생각했어? 네가 저지른 수많은 거짓말을? 그녀를 위해 기도 한다고 했으면서 네가 속으로 지껄였던 경멸과 혐오들을 모를 거라 생각 했냔 말이야! 수치도 모르는 년! 더러운 년! 걸레 같은년! 창년!!"

즐거워 죽겠다는 듯 리오나가 발을 굴렀다. 보다 못한 라비가 두 손으로 빈센트의 귀를 막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게 했으나 아랑곳 않고 '그것'이 주절댔다. 

"더러워! 더러워! 수치도 모르고 어디서 내가 있는 성당을 드나들어. 더러워!"
[정신 차려, 빈센트.]
"누이가 자살 하는 그날 까지 그렇게 생각 했잖아! 자살이라니! 천주교 집안에서! 끝까지 도움이 안돼! 더러운 년!"
[정신 차려!!!!]

환희에 찬 목소리는 더이상 리오나의 것이 아니었다. 음습하고, 차가운 목소리. 잿더미 부스러트리듯 스산한 음성은 귀를 틀어막은 라비의 손 사이로 양잿물처럼 스몄다. 

"제 장기를 제 입으로 꺼내 씹은 누이 시체 앞에서도 더럽단 생각 먼저 했잖아."

빈센트가 이내 들고 있던 묵주를 떨궜다. 챠르륵 하고 그것이 바닥에 나뒹구는 소리에 '그것'이 기뻐했다. 낄낄대는 리오나와 텅 비어버린 빈센트의 얼굴을 보며 라비는 눈앞이 깜깜하도록 저를 찍어누르는 절망에 지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구마는 이제 막 시작이었다.





*




-분량 관계로 2부는 추후 블로그를 통해 업로드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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