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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Inspiration)

LE LABO - Thé Noir 29

​린첸

@LYN_CHENNNNN

  • 트위터 - 블랙 서클

0

 

 

여긴 어디지?

 

발걸음마다 점점이 향기가 묻어나온다. 걸어들어가는 곳은 눈이 부시도록 시리다. 허나 춥지 않다. 온기가 그를 감싼다.

 

 

 

 

 

 

 

 

 

 

영감 (Inspiration)

 

w. 린첸

 

 

 

 

 

 

 

 

 

 

1

 

 

시야가 흐려졌다. 어두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밝은 조명 아래 나는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무의미하게 꺼내어 펼쳐보다가, 탁자 위에 놓인 멋대가리 없는 풍경 사진을 쓸어보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대롱대롱 다리를 늘어뜨리기도 하고.

 

사람들이 보았다면 삭막하다고 표현했을 법한 느낌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에 더 마음이 끌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색채로 아름답게 치장되어있는 공간. 그 공간을 빈틈없이 맞물리며 채우는 그의 손길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유일한 이가 바로 나였으니까. 이따금씩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거나, 묘하게 늘어진 눈매가 동그랗게 휘어지며 미소 짓는 모습은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모습이었다. 때로는 그가 채워넣은 책장 앞에 무의미하게 서서 애꿎은 손만 쥐락펴락하거나 선반 위에 올려놓은 꽃을 봐달라고 알아주지 않는 말을 건네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그는 내게 상냥한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좁디좁은 방 안에서 만족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나는 필요한 것이 있다며 징징거리지도 않았고, 시도때도 없이 그에게 붙어 귀찮게 굴지 않았으니까. 그건 아마 나의 역할을 비교적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주체적인 사람인데다 한 곳에 얽매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서.

 

 

 

 

2

 

 

"도망치고 싶네요."

 

멍하니 생각에 잠긴 줄 알았던 그가 불현듯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린 그의 까만 눈동자가 묘하게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살짝 그을린 듯한 까만 피부가 관능적인 도발이라 나도 모르게 긴장해버렸다.

 

"무엇에서 도망치고 싶은데요?"

"뭐든."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지긋이 눌러대는 손에 걱정이 되어서 가까이 있는 의자에 그를 앉혔다. 별말없이 순순히 따라주는 몸에 다행으로 생각해야하나, 고민하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많지 않다는 생각에 미쳤다. 어찌할 바를 몰라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고 있으니 저절로 초조함이 밀려들었다. 힘든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항상 웃는 얼굴로 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오늘은 한계에 도달한건지 얼빠진 사람처럼 구는게 안쓰러웠지만 도대체 뭘 해야하지?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는 단정한 화이트 셔츠를 걷어올리고, 고급스러운 까만색 수트팬츠에 검정 앞치마를 허리 뒤로 끈을 묶어 둘러매고 있었다. 눈썹 직전까지 단정하게 내린 머리도 검은색이라 단조롭기 그지 없다 여길 수도 있지만 그 말고 무슨 색이 어울릴까,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도망치고 싶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툭 끊어질 듯 지쳐있어서 나는 방 안을 휘 둘러보았다. 책상 하나, 책장 하나와 선반 서너개, 탁자와 의자 두 개, 아무렇게나 널브러져있는 병들과 종잇조각들. 그 사이에서 커피포트를 발견한 나는 물을 채우려다 말고 그에게 물었다.

 

"...차 좋아해요?"

 

조용히 속삭이는 내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아무 말도 없어서 나는 그냥 밀어붙이기로 결심했다. 물을 붓고, 마침 그 옆에 있는 홍차잎을 가지고 차를 만들기 시작했다. 팔팔 끓기 직전 코드를 빼고 최대한 찻잎이 잘 움직이도록 둥근 주전자에 물을 넣자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온다. 물감으로 그린 그림 위에 물을 엎질러 쏟은 듯, 번져나가는 색깔은 물 안에서 요동쳤다. 챙겨줄 만한 다과도 없어서 소매로 문질러 닦은 찻잔 두 개를 집어들고 그의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따라낸 차는 온통 붉었다. 진한 향기가 코 끝을 스쳤다.

 

"향기는 어때요?"

 

찻잔이 들리고, 그리 크지 않은 잔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나타날 때까지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살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마른침을 삼켰다. 뜨거운 게 뱃속에 들어가니 기분 나쁜게 웅크려 들어찬 듯 눈썹을 찌뿌리면서도 그는 등을 좀 더 뒤로 기댔다. 움직임 하나하나가 여유로웠다.

 

"좋군요. 하지만 당신보단 못해요."

 

묘한 안도감으로 그제야 찻잔 쪽으로 손을 뻗다가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차에선 아직도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당신의 세계는 어떤가요?"

 

입 밖으로 내뱉고 나서 후회했다. 하지만 다리를 꼬고 관조하는 듯한 행동에 나는 밀어붙여보자는 식으로 그를 도발했다. 아, 돌이켜보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나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으면 좋을텐데."

 

불쾌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툭 잘라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맴돌았다. 먹잇감을 기다리는 맹수처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나를 갈구하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가 간절히 열망하는 것을 나는 가지고 있으니까. 머금은 것이 뜨거워서 그런지, 유독 새빨개진 입술이 가늘게 올라갔다.

 

"글쎄요."

 

 

 

 

 

3

 

 

"존재하다가도 금방이면 사라져버릴 찰나의 순간을 위해 일평생을 바쳐왔어요, 라고 하면 믿을래요?"

 

무슨 말을 해야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지. 착실히 그의 심경을 짚어내며 머리를 굴리는 날 관찰하는 시선을 알지만 모른 척 한다. 낯설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는 알까, 이 말을 하는게 처음이 아니란 사실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벽에 기대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스스로에게 되뇌이듯 질문하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날 시험하는 건가요?"

"대답해요."

 

어조는 따뜻하지만 날이 선 듯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거부할 수 없이 끌리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반항할 수 있을까. 그는 불안해하고 또 두려워했다. 하지만 자신감에 차있고 오만했다. 이율배반적이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아닌 거 같은데."

"그런가요?"

 

그의 말은 이 공간 안에서 법이 된다. 단단한 족쇄가 되어 날 구속하려들고, 도망칠 수 없게 무거운 철퇴로 온몸을 내려치고 만다. 본능적으로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디찬 공포가 아직 솜털이 여물지 않은 목덜미를 타고 스며들었다. 실망한 얼굴을 하고 그가 저 높은 곳에 좌정한 재판장처럼 판결을 내릴 때, 나는 무력감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난 정말 진심이라구."

 

 

 

 

4

 

 

"뭐해요?"

 

부드럽고 섬세한 손가락이 사뿐사뿐 날아다녔다. 나른한 제스쳐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슬슬 지겨워져서 일부러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밤하늘을 펼쳐놓은 듯한 머리칼 아래, 새까만 눈동자가 닿는 곳마다 톡톡 꽃망울이 피어나는 듯 했다. 먼저 말을 걸었다는 자각도 없이 나는 홀린 듯이 오밀조밀한 코와 그밑에 자리한 앵두 같은 도톰한 입술, 턱선을 따라 흝었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감각을 느끼고, 피부로 와닿도록 조절하고, 총천연색의 빛깔들 중에서 원하는 걸 골라내 나만의 것을 창조해내는 중이에요."

 

투명한 액체를 적정량에 맞추어 혼합하고 유리 막대로 젓고, 여러 실험 기구에 연결해 끓이고, 머리가 아플 정도로 어지러운 책상 위에서 그는 분주했다. 작은 몸짓 하나도 경건하기 이를데 없었다. 차분하지만 우아한 손놀림에 액체는 점점 제 색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뭣 모르는 내가 봐도 능숙하고 절도있는 모습이었다.

 

"어렵네요."

 

고뇌한 그의 흔적을 쫓는게 일상이라, 나는 제법 진심을 담아 말했다. 믿지 못하는건지 고운 이마가 찡그려졌지만, 그는 집어들던 페트리스를 다시 내려놓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손을 잡고 가까이 이끌었다. 맞닿은 부분이 화끈거렸다. 감히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 일은 뭐든 어렵죠. 당신도 해볼래요?"

"복잡한건 질색이라."

"복잡이라뇨. 예술을 모욕하지 말아요."

"......."

"하기 싫으면 관둬요. 내가 하면 되니까."

 

에둘러 거절하려했을 뿐인데 명백히 화가 난 말투에 나는 슬그머니 잡힌 팔을 빼내었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확실한건, 둘 중 어느 하나는 완벽하게 미쳐버렸단 것이다.

 

"예술이란건, 당신이 하는 일을? 아니면 그 일을 하는 당신을?"

 

그는 말없이 어디선가 가져와 책상 위에 펼쳐놓고 한동안 방치해뒀던 꽃잎을 한데 그러모아 액체 속에 집어넣었다. 다 말라 갈색이 되어버린 장미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액체에 녹아 가라앉았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내 처지와 비슷한 것 같아 나는 예전처럼 피식 웃지도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5

 

 

방 전체가 난장판이었다. 그가 아끼던 유리병들은 어지럽게 깨져 파편들과 부스러기를 만들어내고, 그 위로 쓰러진 책들은 폭격이라도 맞은 듯 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 그를 붙잡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 싶었지만 다가설 배짱도 없어서 주위를 빙빙 돌아다니기만 했다. 너무 뜨거워서 서늘하단 느낌이 들 정도로 무서웠다. 길길이 날뛰며 눈에 보이는 물건이라곤 얼마 없는 방 안에서 죄 내다버리려는 것처럼 쓸어내는 뭉퉁한 손길이 거칠었다. 감정을 가지지 않은 듯한 얼굴로, 선연한 분노를 쏟아내는 손만이 모든 감정을 비추는 듯 빈틈없이 움직였다.

 

"진정해요, 진정!"

 

불같이 화를 내는 그의 몸은 놀랍게도 아기처럼 떨고 있었다.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 못해 엉엉 울어버릴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어미를 찾아 헤매다 서서히 무너지는 가엾은 아이.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팔을 어깨에 걸치고 의자에 데려가 앉혔다. 제가 만든 삭막한 공간을 원망하는 눈으로 보는 시선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애써 그와 눈을 마주치려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자꾸 돌아가려는 고개를 고정시키고 심호흡을 시키자 그는 순순히 따라했다.

다행이다. 안정시키고 나니 손에서 피가 흐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유리 조각에 찔린 건지, 제법 길게 난 상처에서 망울져내리는 핏빛이 그가 만들던 액체와 별반 다르지 않아보여서 나는 치료할 생각도 없이 배어나오는 피를 손바닥으로 꾹 눌러쥐었다. 피가 멈출 때까지 그의 온기에 감사해하며, 그가 살아있는 인간임에 감사했다. 죽으려 한것도 아니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상처도 아니었지만 나는 그저 그 작은 손에 내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눈을 감고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 나는 미칠 것 같았다. 계속되는 순환 고리, 끊어지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는 내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다가도 조용히 할 일을 하고 지금처럼 화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우물거리는 말들 중에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얼마 되지 않았다. 웅얼거리는 잡음들의 연속이었다.

 

"슬플때나 기쁠때나 당신이 있어줬으면 좋겠어요."

"난 언제나 이곳에 있을거에요."

 

확신을 주려 한 말이 오히려 그를 더 불안하게 만든 양, 그는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가 그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를 돌볼 새도 없이 나는 속절없이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아뇨. 당신은 절대 그럴 수 없어요."

 

그는 슬픈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영민함을 담은 그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던, 지난 기억이 겹쳐보여 묘하게 짜증이 났다.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는거에요? 나를 단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물어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는 그저 허탈하게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왜죠?"

"당신은 삶의 이유를 어디에서 찾나요?"

 

대답이 올거라 생각했는데, 역으로 들어온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망설이는 내 머리 위로 대답을 바라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는 듯, 그의 말이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여전히 의문투성이였다. 해결되지 않은 궁금증이 많았다.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삶의 이유는 당신의 존재 자체거든요."

 

 

 

 

6

 

 

그는 비를 부르고 다녔다. 그리고 비를 좋아했다.

 

 

방 안에는 창문이 없었다. 그날의 날씨도, 심지어 지금이 몇 시인지 알 수도 없도록 지독하리만치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한 방에서 나는 온종일 돌아다녔다. 적어도 이 방 안에선, 그가 있건 없건 난 자유로웠다.

 

우산을 가지고 나갔으면서도 그가 흠뻑 비에 젖어 돌아오자 나는 걱정이 되어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수건으로 이리저리 물기를 털어내줄 때마다 움찔움찔하면서도 내 손길을 고맙게 받아들이는 그는, 이상하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나 고민하는 내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그는 일부러 아직 마르지도 않은 몸으로 난 밀어냈다. 애시당초 온몸이 푹 젖을 때까지 비를 맞고 오는게 목적이었단 듯이.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있는 빈 종이를 끄집어 맹렬하게 무언가를 써나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물이 책상과 종이를 포함해 그가 다니는 곳을 침범하는데도 그는 한 글자라도 더 적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옆자리를 차지할 순 있지만 경험은 되어주지 못한다. 씁쓸한 감정이 날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왔다.

 

 

 

7

 

 

환희로 물들어있는 얼굴로 그는 기뻐 방방 뛰며 내게 소리쳤다.

 

"드디어 해냈어요!"

"축하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올라간 버선코, 단정한 이목구비, 무엇보다 가장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까만 눈이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다정한 사람이었다. 제 스스로를 절제에 가두어 틀로 짜맞추어 내려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단걸 왜 알지 못했을까. 방 안에서야말로 그는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물 속에서 먹먹하게 퍼지지못하고 응어리진 외침들이 바깥에서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그는 저 혼자만의 세상 안에서 모든 색채들을 지배하고 부리는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당신이 그랬죠. 차를 좋아하냐고."

 

나는 인상을 찌뿌렸다. 그래, 그런 말을 했었지. 하지만 내가 그랬다고 할 수 있나? 고개를 든 의구심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나는 억지로 잠재워 눌렀다. 너무도 기뻐하는 그의 얼굴이 해맑아보여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즐겁게 웃으며 가볍게 손뼉을 치기도 하고, 유려한 움직임으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내게 말을 걸고 있었다.

 

"상상해봐요. 홍차의 알싸하면서도 달큰한 향내가 짙게 가라앉아요. 장미의 중후함이 밑바탕을 잡아주고, 나무를 태운 듯한 스모키함이 식물들과 만나서 친숙하면서도 은은한 아름다움을 풍기죠. 그러다가 비가 오면. 봐요. 비가 오면 온 세상이 달라지죠. 추적추적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무거워지고. 우울한 색채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하지만 비가 온다고 해서 항상 어두운 건 아니잖아요? 떠오르는 심상이나 공간 같은거, 그런거 없어요?"

 

무어라 답해야 그가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하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 횡설수설하는 듯해도 기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차게 마음을 굳혔다. 내가 해야할 말은 정해져있었다. 속사포처럼 그만의 세계에 푹 젖어든 마침내 내게로 고개를 돌리자, 나는 살며시 입가에 미소를 띄워냈다.

 

"아름답군요."

 

 

꼭, 당신처럼요.

 

 

 

 

 

 

 

 

 

8

 

 

 

 

 

여긴 어디지?

 

발걸음마다 점점이 향기가 묻어나온다. 걸어나가는 곳은 타오르는 불처럼 붉다. 허나 뜨겁지 않다. 온기가 그를 감싼다. 향기는 곧 그의 영감이 된다. 이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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