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 poisoning
YvesSaintLaurent - BLACK OPIUM
퍼플
@Purple_Ravixx
Be poisoning
; 중독되고 있다.
*이 글은 픽션이며, 등장하는 인물과 지명이 사실과 무관함을 알립니다.
또한 직설적인 욕설, 범죄묘사, 흡연요소, 폭력적인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절망의 구석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등을 밀려 떨어지듯이, 핏대 세운 목구멍에서 처절하고도 음울한 나락이 찢기듯이 뛰쳐나왔다. 뜨겁게 뛰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뫼비우스의 띠마냥 그 끝은 보이지 않았다.
안돼, 더 이상은. 더 이상은 버텨낼 자신이 없어.
날 가만 놔둬.
*
타닥타닥-강릉청을 가득 메운 타자 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낮이건 밤이건, 불안과 긴장을 주워입으며 똥줄타듯 기다리는 형사라는 직업도 오래였다. 선배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개같은 생활 한 것도 이미 지난 날이었다. 숫기 없어 우물쭈물하며 눈치만 보던 그는 이제 없었다.
당당히 강릉청을 주름잡는 강릉청의 저승사자, 정택운 경위.
경찰이라면 누구나 골머리를 앓는 뒷세계의 조직을 수 년동안 쫓아온 그는 그 누구보다도 앞서 뿌리뽑으려고 애썼다. 강릉청의 실무자로서 어찌보면 청을 잘 굴러가게 하는 듯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직, 조직, 언제나 그랬다. 왜 그것에만 집착하는지 거의 병적인 수위만큼. 조직을 처리하는 데 중독된 건 아닌지, 다른 형사들이 가장 꺼려하는데도 그는 항상 조직에 사활을 걸었다.
잘못 꼬이면 인생 좆된다는 말도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일 처리도 잘하고 머리 회전도 빨라서 그걸로 욕먹진 않았지만 제 몸 챙기는 데에는 관심조차 없이 매일 야근. 늦게까지 청에 켜진 불은 당연히도 그의 것이었다. 그의 팀원들은 이미 퇴근한지 오래되어도 그는 꼼짝않고 앉아 있거나 자리에 없다 싶으면 외근을 나가 있었다. 밑사람들을 시키면 되는 일도 굳이 제가 나서서 조사하고 뛰어다녔다,
지랄은.
*
[○○○]
어릴 적 자신에게 누나가 남긴 쪽지. 왜 갑자기 그 쪽지가 기억났을까. 알파벳으로 된, 세 글자의 단어. 사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흐릿해진 기억에서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그 해 겨울은 끔찍하게 추웠다. 세상을 떠난 부모님이 미웠고, 나를 떠난 누나가 미웠다. 단칸방에서 오손도손 살던 누나의 빈자리는 시렸고, 차가운 혹한의 공기만이 그 공간을 채웠다. 며칠 후에 왔던 갈색의 봉투에, 나를 찾지 말라는, 너 때문이 아니라 조직 때문이라는-조직, 누나에게 조직이란 무엇이었을까-우편이 왔었다. 마치 지금처럼.
우편이 왔다고 알려준 팀원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갈색의 봉투가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를 찡그린 그가 편지칼로 주욱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저 회색조로 프린트 된 사진, 작은 비닐봉지, 그리고 시간과 장소, 세 글자의 알파벳이 적힌 쪽지.
작게 접힌 그것을 꺼내 펼친 그의 두 눈이 이내 찢어질 듯 커졌다.
그 검은 종이를 부서질 듯이 구긴 그는 봉투에 담겨있는 사진 하나를 조심스레 꺼내 들여다 보았다.
이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모습.
얼핏 보면 누군가를 닮은 듯도 하고. 순간 사진 속 남자와 비슷한 사람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그는 서둘러 그 잔영을 지워버렸다. 대신 그는 정체불명의 흰 가루가 담겨있는 비닐봉지를 들어올렸다.
"......."
검은 자켓을 챙긴 그는 서둘러 청을 빠져나왔다. 발걸음이 점차 빨라지며 그는 자신의 차에 날듯 달려들어 시동을 켰다.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인 그가 이내 눈빛을 빛냈다. 거칠게 엑셀을 밟고 나가는 그의 차를 피한 차들이 경적을 울려댔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어지러운 골목들을 지나, 희미한 가로등 옆 그늘에 차를 요란하게 세운 그는 차에서 내려 가볍게 심호흡했다.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는 쪽지를 더욱 꽉 구기며 그는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
똑, 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며칠 동안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음침하게 내려앉은 뒷골목의 어귀마다 축축한 습기가 가득했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바닥까지 내려앉은 전깃줄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흔들거렸다.
그 사이에서, 한 남자가 좁은 골목의 사이를 비집듯이 지나갔다. 물기를 머금은 양쪽 벽이 그의 어깨를 스쳐 물기어린 자국을 만들어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랫동안 앓아왔던 마음 속 무언가가 움찔, 기어나오는 듯해 그는 있는 힘껏 눌러담았다. 뭔가 잃어버린 것처럼 공허한 그것이 내뿜는 공기는 그의 뇌리에 이미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시리도록 아프고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남자는 다 허물어진 골목, 그곳에서 벗어나 어느 번듯한 건물로 발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거뭇한 방들의 문이 나열되어 있는, 조직의 소굴에서 그는 원한다면 어디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조직에서 난감한 일이 터지고 난 후라 그의 눈빛에는 검은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엿 같은 기분에 괜히 발을 보다 세게 내딛으며 제 방으로 향하는 그의 뒤로 어둠 속을 밝히는 작은 조명들의 눈빛이 따라붙었다. 언제나처럼 회색의 탁한 공기가 그를 뒤따라 연기처럼 그를 휘감았다가 빠른 그의 발걸음에 나가떨어졌다. 뚜벅뚜벅 내리찍는 걸음이 칙칙한 복도의 끝까지 여릿하게 들렸다.
건물의 로비에는 검은 정장의 남자들이 잔뜩 시립하고 있었다. 조직에서 요즘 경찰과 부딪히는 일이 잦았기에 조직을 둘러싼 경호가 조금씩 두터워지고 있었다.
이 엿같은 지하세계에서 아등바등 살아가겠다는데, 짭새들은 그걸 막아보겠다고 또 저들끼리 아득바득 달려들고 있는 걸 보며 그는 이를 갈았다. 형사라고, 경찰이란 것들이 혈기만 왕성해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었다. 귀찮은 피라미 새끼가 붙어 조직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듯한 묘한 기시감에 그는 몸을 떨었다.
언제부터 우리 조직이 경찰한테 쩔쩔매게 된거지. 몇년 전까지만 해도 조직은 이 일대에서 누구도 건들지 못하는 거물이었는데.
요즘따라 일진이 좋지 않아 사납게 가시를 잔뜩 세운 그는 씩씩거리며 방 안에 들어갔다. 익숙한 검은 방의 책상, 소파, 의자-미묘하게 달라진 그 흔적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정장 안의 홀스터에 손을 뻗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딱딱한 금속의 끝에 닿기 직전,
"....재환이 형."
익숙하게 자신의 방 안에 앉아 있는 손님에게 재환이라 불린 남자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입술 사이로 중저음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비집듯이 빠져나와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노크 하랬잖아, 새꺄."
"방에 아무도 없어서. 나 들어온지 10분은 지났을걸?"
잔뜩 심기불편함을 표출하는 재환에게 넉살좋게 웃어넘긴 남자가 책상 끝에 걸터 앉은 엉덩이를 떼며 다가왔다.
"형, 이번에 건수 있다며?"
유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에 찰나, 차가운 미소가 드리워졌다가 사라졌다.
"한상혁."
하여간 수완도 좋아. 어떻게 알아냈대?
표정을 구긴 재환이 손가락 끝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상혁을 밀어냈다.
"뭐, 여기저기 찔러보면 다 알게 되지. 요즘같은 최첨단 사회에 사는데."
칠칠맞은 애들이 한둘인가.
그의 책상 위에 있던 검은 볼펜을 손 끝에서 빙빙 돌린 상혁이 싱긋 웃었다.
"잔챙이들 밟았냐?"
자기 휘하의 조직원들의 정보가 새어나갈 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병신들, 앞가림도 못해?
조직원들의 실력을 비웃던 재환이 손을 뻗어 상혁의 손 끝에서 돌아가고 있는 볼펜을 홱 하고 채갔다. 한순간에 손이 비어버린 상혁이 머쓱하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초조해 보이는 손가락 끝을 무릎에 대고 톡톡 두들기던 그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재환에게 말했다.
"재환이 형, 그건 그렇고, 요즘 잡겠다고 분위기가 안 좋아. 내가 서포트 해 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적당히 잘 해 봐. 괜히 나까지 걸려서 인생 종치게 하지 말고."
"그걸 말이라고,"
"형이 아니면 누구한테 말하겠어? 다 잘 살자고 하는 얘기지."
"그걸 아는 놈이 졸라 떳떳하게 짭새 짓이나 하고 있으니까 문제네. 조직 소굴 하나 발견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본데,"
"그래."
재환의 말을 끊은 상혁이 소파에 몸을 깊숙히 묻다가 그의 쪽으로 날카롭게 눈동자를 돌렸다.
"....뭐? "
"나 뵈는 게 없어. 그러니까 형사 일 하면서 이런 뒷세계 조직한테서 뇌물이나 받아 처먹는 거지."
"....."
몇 번 주고받은 대화가 험악해져 갔다. 결국, 손 든 쪽은 재환이었다.
둘 사이의 관계에서 승기를 잡고 있는 것은 상혁이었다. 지금은 재환의 쪽이 더 아쉬웠다. 꼬리를 잡히고 있는 것은 그의 조직이었으니까.
상혁이야, 청에서 쫓겨나는 정도면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쪽은 조직 전체가 줄줄이 쇠고랑차고 끌려갈 판이었다. 떳떳함 없이 돈을 바란 상혁과 경찰을 싸그리 믿지 못하는 재환의 거래였지만 서로 거짓도 없었다. 그것을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그래, 알았다고. 하여간 존나 성질 급해. 내려가면 있을 테니까, 가져가."
"매번 고마워, 형."
눈꼬리가 휘어지게 웃은 상혁이 그제서야 푸스스 풀린 얼굴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랬다가 재환을 뒤돌아본다.
"형, 내가 형 믿는 거 알지."
"갑자기 뭔 개소리야."
눈을 가늘게 여미며 의심하는 눈초리로 자신을 쏘아본 재환에게 상혁이 하고 싶던 말은 속으로 집어넣고 얼버무렸다.
"그냥, 그렇다고."
"....무슨 약 처먹었냐."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은 재환이 상혁에게 꺼지라며 구시렁댔다.
"아니, 아니야. 나 갈게."
딸깍, 방을 나온 상혁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가 가라앉았다.
*
그는 건물의 안으로 긴 다리를 옮겼다. 텅 빈 로비를 가득 채우는 구둣발소리에 구석에 있던 작은 조명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잠에서 깬 불빛들이 그를 따라잡았다.
띵-동-띵-동-띵동띵동-
여러번 초인종을 눌렀으나 허사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그는 문고리를 잡았다. 처음부터 잠겨있지 않았던 건지, 문은 쉽게 열렸다.
"상혁아, 안에 있지? 들어간다."
텅 빈 공간에 뜨거운 그라는 존재만 가득했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가슴은 들썩거렸고 거친 숨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조심스럽게 집 안에 들어와 앉은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집 안에서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택운은 다시 일어났다. 이제서야 집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집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여러가지 단서를 보지 못하고 마음만 급해져서 달려들어온 것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제기랄...감 다 죽었네, 정택운.
낄낄, 감 없으면 형사는 어떻게 하려고. 시곗바늘이 돌아가며 그에게 물었다. 닥쳐. 택운이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머리가 푹 젖은 상혁이 걸어나왔다. 알고 있었다는 듯, 피식 웃은 상혁이 너스레를 떨었다.
"춥네. 이제 여름도 다 갔나."
반팔과 반바지 차림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냉장고를 뒤진 상혁이 택운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손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삼각김밥을 보며 택운이 물었다. 얘는 무슨 냉장고에 삼각김밥밖에 없나. 지난번에도 이거 먹은 것 같은데.
"우편은 뭐야."
"형, 또 일한다고 밥도 안먹었지."
"대답은."
"그거 먹으면."
"지랄한다, 또. 내가 니 자식새끼냐?"
차가운 맥주 캔을 하나 꺼내 마실 거냐고 묻는 상혁에게 택운이 고개를 저었다. 나 공무집행 중이다, 임마.
"새꺄, 나 바빠."
"나만 할까."
택운의 물음은 슬쩍 피하면서 제 할말은 조곤조곤 다 하는 상혁에게 졌다는 듯 택운이 비닐을 뜯었다.
"그러니까.....사실 그 우편도 내가 보낸 게 아니야. 얼마전에 속초청에 익명의 제보라면서 온 건데, 좀 께름직해."
떨떠름하게 얘기하는 상혁이 난처한 듯 두 손을 비볐다.
"머리 꼬리 자르고 본론만."
"아직 LEE가 조직의 수장이라고 알려진 건 우리 속초청이랑 형네 강릉청 뿐이잖아. 근데 그게 발표되고 얼마 안 있어서 우편이 왔어."
"속초청에선 뭐래?"
"보고 안 했어. 정확히 내 앞으로 온 거기도 하고, 아직 정보가 확실하진 않잖아."
"얌마, 그거 증거 은폐다."
"썅, 어쩌라고."
상관없다는 듯 상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넌 어떻게 생각해? 이게 진짜 조직에서 보낸 건지, 아니면 찌라시를 돌린건지."
"진짜라면 아마 내부자의 소행이겠지. 뭐 어쨌든 간에. 일반인은 아닐거야."
미간을 찡그린 상혁이 말했다.
"그러겠지. 아니면 경찰서에 잠입한 새끼가 작정하고 보낸 거일 수도 있고."
순간 상혁이 몸을 가늘게 떨었지만 택운은 알아보지 못한다.
"급하게 찍었을 거야. 이것밖에 없는 걸 보면."
"혹시 아는 사람이야?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이런 사람은 없어서."
"나도.....!"
흠칫, 하며 택운이 말을 멈춘다. 그랬다가 다시 흑백의 사진을 노려본다. 익숙한 이름이 뇌리에 가서 박혔다.
차에서 내리는.....이재환.
그를 쫓는 것은 그 혼자 벌인 독단적인 일이었지만 택운은 재환이 조직과 어떠한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미행을 할 때마다 소름끼치도록 눈치 좋은 재환은 작은 소리라도 나면 그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같은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곤 했다. 다행인건지 당연한 건지 주변에 누군가 있을 때는 전혀 듣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는구나."
상혁이 입가를 길게 늘였다.
".....아니, 그냥 혼자 생각한 거야."
아직 확실치 않은 정보를 나불대기엔 코가 석자였다. 상혁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마치 악어가 먹잇감을 눈 앞에서 놓치고 입을 텁, 닫는 것처럼.
그와 5살 차이가 나는 후배 상혁은 언제나 자신을 잘 챙겨주었다. 끼니든, 자료든 뭐든. 이미 자신이 속초청을 나와 강릉청으로 옮긴지 꽤 되었지만 여전히 상혁은 잔소리와 함께 엄마처럼 택운을 키우다시피 했다.
그냥, 챙겨줘야 될것 같다나.
"그 가루는 뭔데."
"헤로인. 그래서 형한테만 말한 거라니까."
이런 씨발...? 택운이 상혁을 돌아보며 어이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거기 있는 장소가 그냥 속초항으로만 돼 있어서 아직 정확히 어딘진 몰라. 근데 제보자가 진심이었다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거래가 있겠지."
아-이거 걸리면 골치아파지는데.
그가 중얼거렸지만 상혁은 형이 얼마나 조직 잡고 싶어하는지 아는데, 강력 4팀으로 넘기기 싫었어, 하고 변명아닌 변명을 했다.
"......어쨌든 고맙다. 조사해 보고, 나중에 알려줄게."
서둘러 일어나는 그의 반대로 몸을 빙글, 돌리던 상혁이 뭔가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아, 형. 이거 가져가."
조잡한 문양의 반지가 그의 큰 손바닥 위에서 뒹굴거렸다.
"뭔데."
"음....부적?"
"너 이런 거 믿었냐?"
수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택운이 상혁을 쳐다보았다.
"지난번에 밥값 갚을 겸, 몸 조심하라는 의미에서 줄게. 잠복근무 좀 작작하고. 위험하잖아."
디미는 그 반지를 마지못해 받은 택운이 결국 손가락에 은색의 반지를 끼웠다. 그의 하얀 피부와 썩 잘 어울리는 그것이 조명을 반사해 반짝였다.
"알았어, 끼면 되잖아, 끼면."
"존나 비싸게 구네. 쨌든, 그거 빼지 말고 잘 갖고 다녀."
투덜대며 반지를 낀 손을 흔들며 상혁의 집을 나온 택운이 암흑 속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 올렸다.
실마리를 잡았으니 그 끝을 풀어내야 했다.
반짝, 어둠 속에서 은반지가 빛났다. 반지에 박힌 까만 큐빅이 거미의 눈알마냥 그를 노려보았다.
*
"여기 있습니다."
"흠..."
그녀는 상혁에게 두꺼운 봉투를 무표정하게 넘겼다.
이 바닥에서 일한지도 몇 년이 지났고 또 상혁을 마주하는 것도 처음이 아니지만 그에게서는 무언가 형사보다는 조직의 이인자나 되는 거물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신이 따르는 LEE가 조직의 헤더였지만 그녀는 내심 상혁도 형사 일이 아니었으면 어디선가 한 가닥 했을 법 하다고 생각했다.
"지난번보다 많이 넣어준 걸 보니, 꽤 큰 건인가 봐?"
"......"
눈썹을 치켜올리며 관심을 보이는 상혁에게 돈봉투를 넘기고 무미건조한, 형식적인 인사를 건넨 그녀는 그의 질문을 그저 무시하고 돌아섰다.
이미 LEE에게 상혁에 대해 들은 바 있기 때문에 물어볼 것도 없고,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로 그를 스윽 돌아다본 그녀는 이내 복도를 따라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도 그저 어깨를 으쓱한 상혁은 이내 별다른 말 없이 돌아섰다. 이미 청을 빠져나온지 오래되어 늦지 않게 가야 했다.
그가 조직의 소굴을 발견한 건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악연의 연줄이라 해야 하나 종잡을 수 없었다.
타락한 뒷골목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꽤 오랫동안 형사와 조직 사이에서 아찔한 줄타기를 해 왔다.
재환에게 뇌물을 받는 대가로, 경찰들이 골머리를 앓는 조직에 대한 정보를 넘기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그도, 재환의 쪽도 그리 어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돈만 넘기면 됐으니까.
처음엔 킬러를 보낼까 하다가 그가 예상 외의 실력자라는 것을 알고 재환도 그만 두었다. 괜히 사람 하나 처리한다고 조직원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재환은 상혁을 눈독들이고 있었다. 냉철한 판단력, 투철함과 신중함 그리고 무기 사용 면에서 재환은 그를 높이 샀다. 형사를 그만 둔다면 조직으로 회유하려 호시탐탐 노리면서.
"이런, 궁금해지네."
중얼거린 상혁이 지하세계의 눅진한 공기에서 벗어나 청명한 하늘을 마주했다. 소금기 어린 바닷바람이 그의 깊고 날카로운 아이홀에 베인 듯 뒤로 훅 하고 지나갔다.
뒤따라온 파도 소리가 그의 낮은 웃음소리를 채어갔다.
운명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누군가를 치졸하고 깊숙한 검은 늪으로 밀어넣기 위해.
*
부재중 전화 1통.
핸드폰 액정에 지문처럼 찍혀있는 알림에 어이없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며 쳐다본 택운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중얼거린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아, 정 경위님! 공문 내려와서 메일로 보내놨습니다."
"뭔 공문?"
"아침에 청장님이 설명하셨잖아요, 속초랑 공조한다고."
그랬었나.
"....어쨌든, 꼭 확인 하시라고 전달하라고 하셨어요."
고개를 그에 맞춰 대충 끄덕인 택운이 그대로 청을 나온 그가 호주머니에서 하얀 막대를 꺼냈다.
불을 붙인 그가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후, 회색빛 연기를 뱉어냈다. 희미한 기억의 저편처럼, 어지러운 연기가 그의 주변에 배회하듯 떠다닌다.
손목에 은색의 수갑을 찬 범죄자 새끼들이 청으로 끌려 들어가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 인상을 콱 찌푸리지만 그는 외려 빙글빙글 웃는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안 볼 새끼들, 같이 대응해 봐야 꼴값떠는 것뿐이다. 분명 저들은 생각할 것이다. 또라이라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던 듯, 전화 신호음은 세 번도 울리기 전에 뚝 하고 끊겼다. 대신 쾌활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택운이 형! 통화 괜찮아?]
"어, 뭔 일이냐?"
[오늘 시간 돼?]
"딱히 일정은 없는데."
[형, 오랜만에 한 잔 해? 형 요즘 일 때문에 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안힘들 때도 있냐. 이번에 속초랑 공조한대."
[뭐? 조직 때문에? 강릉은 원래 속초랑 공조 안 했잖아. 웬일이래?]
"나야 모르지. 높으신 분들 생각까지 알면 내가 여기 있겠냐."
[수고하네. 항상 마시던 데 예약해 놓을 테니까, 6시, 알지?]
"너 밖에 없네."
[그걸 이제 알았어?]
이홍빈 답네.
피식 웃은 택운이 손에 든 것을 떨어뜨려 발로 뭉갠다. 아스팔트 위에 검은 그을음이 흐릿하게 비쳤다.
[끊는다.]
"그래."
이마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그가 불현듯 쓸어 올렸다.
길고 날카로운 눈매가 화를 잔뜩 담고 있었다.
청장님도 참, 속초랑 공조하면 서끼리 싸움 붙을 거 뻔히 알면서.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야?
말 끝에 육두문자를 덧붙인 택운이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코웃음치며 자리에 앉아 메일을 확인해 보니 과연 공문이 상단에 떠 있었다. 하얀 바탕에 떠 있는 검은 글씨들이 벌레처럼 꾸물대며 그에게 다가왔다.
신경질적으로 읽어내려가던 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멈췄다.
[....공조수사를 위해 강릉 경찰청의 강력 2팀을 차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씨발."
절로 욕지거리가 나왔다. 하필 강력 2팀이라니.
하고 많은 팀들 중에 왜, 왜!
그는 속초 쪽 형사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네들은 저들이 더 잘난 것인양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어디까지나 그의 판단이지만, 어느 정도는 맞았다. 강릉과 속초 부근에서 활발히 날뛰는 뒷세계의 조직을 없애 뿌리까지 뽑아야 하는 것은 모두의 일이었지만, 속초 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이전에 작은 거래 현장 하나 잡았다고 그렇게 기세등등해 할 것 까지야 없지 않나?
물론 속초가 처음으로 조직원을 잡은 것은 맞지만 현장에서 발각된 조직원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자살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데.
"제길, 재수가 없으려니까...."
택운이 입술을 지분거리며 점점 아파오는 머리를 짚었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상혁이 속한 속초청 강력 3팀과 공조한다는 것이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향한 비난 가득한 한숨을 폐 깊숙한 곳에서 끌어내놓은 택운은 자기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액자에 손을 뻗었다. 묘하게 자신과 닮은 듯한 여자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택운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려 줘, 내가 꼭 찾을 테니까."
몇 년째 바뀌지 않는 낡은 사진, 그것만은 그에게 남은 마지막 보루였다.
그가 이 자리를 버티고 서 있을 수 있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 둔 동아줄.
비록 그게 썩은 것이더라도, 이미 쓸 수 없는 것이라도.
*
똑똑.
노크 소리에 그제서야 긴 상념에서 벗어난 재환이 들어오라 일렀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오후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문 틈 사이로 살짝 목례한 조직원이 통화중이었는지 손에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연락이 왔습니다."
심기가 불편한 듯 내내 찡그려 있던 재환의 미간이 그제서야 펴진다. 그의 떨떠름한 기색이 조직원에게 날아들었다.
"N한테서?"
고개를 끄덕인 조직원이 전화기를 넘겼다. 네모반듯하고 까만 것을 귓가에 갖다대자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상황을 보고해 왔다.
[code name N, in France. Return to Korea in about a month later.]
비틀리게 입가를 말아올린 재환이 길게 뻗은 다리를 꼬아 건들거렸다.
언제 갔는데 이제야 연락을 해? 차학연, 넌 죽었어 진짜.
손을 내저어 방 안의 사람들을 내보낸 그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이름값 하네. 도대체 얼마나 떠나 있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또 한 이름값 하지. 그걸 찾기 전에는 나 복귀 안 해. 한 달은 겨우 임시 마지노선일 뿐이라고. 어쩌면 더 길어질 수도....]
말 끝을 흐리는 그에게 재환이 빠르게 쏘아붙였다.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기 위한 향을 찾는다고 떠난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더 이상은....
"한 달이면 돌아올 때도 됐잖아, N. 그거면 충분히 시간을 줬다고 생각하는데. 부족해?"
[.....최대한 빨리 찾을게. 그러니까 그동안은 나 찾지 말아줘, 재환아.]
미안함이 가득 담긴 말투로 N이 대응했다.
친한 사이라 자부하며 코드 네임보다는 이름을 고집하는 N에게 재환은 딱딱한 코드 네임으로만 부르고 대했다.
섭섭하게시리, 좀 사근사근해지면 얼마나 좋아.
툴툴대는 그에게 조금 누그러든 재환의 고저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N, 유능하단 건 알겠는데, 조직에 피해는 주지 말라고. 그렇게 훌쩍 떠나버리면 뒷감당은 어쩌라는 거야.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게 조향사라는 거, 알고 있잖아."
얼굴을 구긴 재환이 손에 집히는 검은 볼펜을 손가락 사이에서 빙빙 돌렸다. 그것의 끄트머리에 각인되어 있는 금색의 알파벳 이니셜 세 글자가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미안...그래도 꼭 찾고 싶었단 말야, 내 맘에 쏙 드는 향.]
"그건 둘째치고, 왜 코드네임 두고 이름으로 부르는 거야? 멀쩡한 코드네임으로 부르면 어디 덧나?"
[그건 아니지만....정 떨어져 보이잖아. LEE는.... 아니, 어쨌든, 찾으면 연락할 테니 그 사이에는 연락하지 마. 죽으면 죽었다고 연락할 테니까.]
"그건 또 뭔 소리야."
[나중에 보자!]
"N! 아니, 학연이 형!"
매정하게 끊겨버린 전화에 재환이 실소를 흘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꼭 이런 식이네, 학연이 형은.
씁쓸하게 웃은 재환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번 거래에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인물인지 알면서, 학연은 조직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나, 뭐라나.
캔들 만들기를 소일삼아 하는 그의 방에는 항상 양키 캔들과 향수, 주로 향과 관련된 것들이 많았다. 방에 들어갈 일이 있을 때마다 방문만 열어도 복도에 흐릿한, 그의 방에서만 나는 특유의 여러가지 향들이 뒤섞인 향기가 날 정도로, 학연은 그것들을 좋아했다. 또 잘하기도 해서 결국은 조직의 일과 공부를 병행하면서 조향사 자격증도 따냈다.
지금은 지난번 일을 해결한 포상 휴가로 프랑스에서 놀고 있지만, 머지않아 돌아오기를 그는 바랐다.
"빨리 돌아오라고, 학연이 형."
재환이 씩 웃으며 중얼거렸다.
"형도 이제 바빠질 텐데."
말 끝에 독사의 독니처럼 날카롭고 치명적인 조소를 덧붙인 그가 더욱 길게 입꼬리를 빼며 창문 너머를 가만히 응시했다.
비가 오고 있었다.
*
"어? 비오네."
"...그러게."
술잔과 술잔이 부딪히며 내는 소리가 난무하는 왁자지껄한 홀과 동떨어진 룸에서 젊은 남자 둘이 조용히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포근한 분위기를 조장하는 은은한 조명이 둘의 머리 위를 비추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 꽂힌 협죽도 모양의 조화가 위험할 정도로 붉은 꽃잎을 내보였지만 그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 공조는 어떻게 됐어?"
"뭐, 똑같지. 속초 쪽이랑 만나서 기싸움하고, 자료 주고받고, 대충 얘기하는 척 하다가 나오는 거."
그게 뭐야, 홍빈이 피식하고 웃었다.
너는, 별 일 없어? 택운의 가벼운 물음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나야 프리하니까, 뭐.
"....그렇구나."
평소라면 조곤조곤 하루에 있던 일들을 얘기할텐데, 조용히 술잔만 들이키는 그에게 홍빈이 낮게 물었다.
"택운이 형, 고민 있구나."
"....."
택운이 투명한 술잔 너머로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를 흘깃, 쳐다보다가 고개를 젓는다.
"없어, 그런거."
고개를 저으며 부인했지만 상대는 그와 5년지기 친구같은 동생이었다. 속지도 않고 반문하는 그에게 대꾸하기가 참 뭣했다.
"에이, 아닌 거 같은데? 말해봐, 얼른."
"....아니야, 없어."
까득, 옆에 놓인 초록 소주병을 새로 깐 택운이 홍빈에게 눈짓했다.
잔을 투명하고 알싸한 술로 채워준 택운이 제 술잔에도 가득 따랐다.
넘치기 바로 전까지.
흔들흔들, 위태롭게 떨리는 액체가 왠지 자신의 상황 같다.
택운이 술 한잔에 미안함과 쓰라림을 억지로 삼켜 냈다. 괜히 연거푸 들이키는 술맛이 쓰디 썼다.
"거짓말."
홍빈이 자작하며 중얼거렸다.
"말 할 수 있을 때 지금 말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그 말에 조금 용기를 얻은 택운이 고개를 들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황색의 조명 아래 홍빈의 얼굴은 희뿌옇게 빛났다.
웃으며 긴장을 풀어주는 그의 입 양 옆에 깊은 보조개가 생겼다.
"홍빈아."
그는 고민했다. 과연 홍빈이에게 사실을 알려줘도 되는 걸까.
어렵사리 입을 열었지만 그는 계속해서 망설였다.
짙은 검은색의 어둠이 순간 그의 얼굴에 스치듯 지나가 박혔다.
"왜, 뭔데. 뭐 때문에 그래? 뭐든지 말하라니까."
입꼬리를 말아올린 홍빈의 말투가 가볍다. 무엇이든 말해도 된다는 듯이. 지그시 그를 쳐다보는 홍빈을 보며 자꾸만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택운이 결국 입술을 깨문다.
하지만 결국은 토해내듯 억지로 자백하듯 말한다. 사실을, 홍빈이에게 살인과도 같은 진실을.
후, 한숨을 내쉬며 겨우 홍빈과 눈을 바주친 택운이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자료 조사하다가 알게 된 건데, 조직의 헤더가 LEE라는 사람이래. 근데,"
그에게는 청천벽력같은, 하지만 꼭 일러줘야 하는.
그런 말 끝이 여과없이 그대로 빠져나가 홍빈의 심장에 검을 겨눴다.
"얼마전에, 내 앞으로 우편이 하나 왔어."
택운이 품 속을 뒤져 작은 갈색 봉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은 홍빈이 그것을 받아들어 내용물을 꺼냈다.
무릎 위로 툭 떨어지는 검은 쪽지를 펼쳐본 홍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이 사진은...."
"......"
"......!"
순간 홍빈이 손에 든 것을 부서뜨릴 듯이 움켜쥐었다. 부들부들 경련하듯이 떨리는 주먹을 가까스로 말아쥔 홍빈이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재환, 재환이 형이? 그럴 리 없어.
아까까지만 해도 입가에 떠올라 있던 웃음은 증발하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자책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리고 언젠간 홍빈이 알게 될 사실이기도 했다.
그가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재환을 막을 수 있는 방법.
그래, 이게 최선이야.
과연, 이게 정말 최선이었을까?
둘 사이를 비집고 자리한 창문에서는 계속해서 굵은 빗줄기가 두들기고 있었다.
장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비는 추적추적 오래도 내렸다.
웅덩이에 찍힌 발자욱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대신 매섭게 내리치는 천둥과 뒤따라온 번개를 그 위에 그렸다.
*
"형, 집에 있어?"
양 볼이 붉어져 집으로 돌아온 홍빈은 자신의 형부터 찾았다.
"....취했어?"
날카로운 목소리가 둘만 있는 널찍한 집안을 갈라 그에게 들려왔다.
"....."
거실의 검은 가죽 소파에서 다리를 꼬고 패션 잡지를 읽던 남자는 이내 흥미가 사라진 듯 그것을 덮고 일어났다.
"술이나 좀 깨라."
자신을 지나쳐 제 방으로 가려는 남자를 홍빈이 붙잡았다.
"...나 할 말 있는데."
방금 전까지 취해서 비틀대던 사람은 온데간데 없었다.
또렷한 눈빛이 형형한 기세를 담고 있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멈춰 섰다.
"뭔데."
"...요즘....별 일 없어? 재환이 형."
"...."
아주 잠깐, 그의 얼굴에 미묘한 놀람이 스쳐 지나갔지만 홍빈은 알아보지 못했다.
"신경 꺼. 네 알 바 아니야."
"......"
묻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었지만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속으로 질문을 삼켰다. 형을 위해서라도, 그는 그래야만 했다.
차갑게 대답하고는 홍빈의 손을 뿌리친 재환이 발을 떼려는 찰나, 홍빈의 말이 다시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형....향수 바꿨어?"
표정이 일그러진 재환이 벌컥 화를 내며 뒤돌아섰다.
"개기지 말라고, 이홍빈."
"....미안."
잔뜩 얼어 놀란 표정을 지은 그에게 없던 측은지심이라도 생겼는지, 재환은 한 발 물러나 홍빈의 등을 떠밀고 자신 역시 몸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가서 자. 너 취했다."
"....."
그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홍빈은 재빨리 전화기를 들었다. 조향사 시험장에서 처음 만나 친해진 차 선배는 약간 능글맞은 부분이 없잖아 있었지만 향을 배합하고 만드는 실력도 괜찮은 편이었다.
"....여보세요? 형, 지금 시간 돼요?"
[으음, 홍빈이가 전화할 때도 다 있네. 뭐, 나야 네가 전화할 때면 항상 괜찮...]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마자 홍빈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학연이 형, 향수인 것 같은데, 블랙 커피 플로랄 계열이거든요? 블랙 커피 어코드, 오렌지 블라썸, 바닐라, 그리고....또...핑크 페퍼가 들어있는 거. 혹시 전에 맡아본 적 있어요?"
[음....그거라면 최근에 맡아본 적 있는 것 같아. 그거 요즘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거 같던데. 근데 정식 제품은 아닌가 봐. 파는 곳은 없더라.]
"그래요?"
[대신에 그거 향이 좋아서 나도 한 번 만들어 봤거든. 테스터 있는데, 보내줄까?]
"그럼 고맙죠."
[그러면 홍빈아, 나중에 텀블러 캔들 하나만 선물해 줘. 무슨 향이냐면....]
"나중에 사고 싶은 거 문자로 보내시면 사 드릴게요. 끊어요, 형!"
[야, 잠깐ㅁ...]
뒷말이 들려왔지만 그는 매정하게 끊어버렸다. 아마 보고싶다느니, 한 잔 하자는 말이겠지. 같은 조향사라 친하긴 한데, 가끔 저렇게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니까.
홍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다가 텅 빈 공간에 사람의 온기라곤 찾을 수 없는, 넓지만 그를 옭아매는 자신의 방을 물끄러미 돌아보았다.
"......."
그곳에 내뱉은 한숨소리를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그는 고개를 숙였다.
재환이 형은 언제부턴가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기 시작했다.
소박하지만 웃음이 끊이질 않던 둘만의 식탁에 무채색 안개가 날이 갈수록 짙어졌다.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음식을 씹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완전히 세상에서 지워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밥을 먹는 것만 같아 차라리 홍빈은 그와 겸상하지 않았다. 자꾸 숨이 턱 막히는 공간에 둘만 있는 어색한 침묵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쯤 다시 내가 알던 재환이 형으로 돌아와 줄거야? 난 기다리고 있는데.
"....형."
홍빈이 제 문 너머에 있는, 재환의 꽉 닫혔을 방문을 머릿속에 까맣게 그려냈다.
*
"....."
재환은 방문 안쪽에 기대어 스르르 허물어져 내렸다.
거래 상대에게 샘플로 받은 향수가 그의 책상 위에 간잔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그의 거래 상대는 프랑스의 거물급 조직이었다.
프랑스의 조직을 원체 미더워하지 않는 그를 위해 보내준 샘플을 시험삼아 한 번 뿌려봤는데, 그는 천재 조향사인 제 동생을 간과했다.
순간 선득한 느낌이 들어 그는 뒷목을 쓸어내렸다.
헤로인을 넣은 향수라니.
초조한 마음으로 방 안을 배회하던 재환이 이내 향수를 집어들고 조직으로 향했다.
더 이상 이곳에 있으면 긴장감에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하얗게 뜬 달이 이지러진 어둠을 몰아내며 그의 앞길을 밝혔다.
Nuit blanche, 새하얀 밤이었다.
*
[형. 소포 잘 받았어?]
홍빈의 문자가 화면에 둥둥 떠다녔다. LEE에 대해 알려준 후 얼빠진 얼굴로 집으로 돌아간 그에게서 온 며칠만의 연락이었다.
택운은 자신이 뜯어놓은 물건을 내려다 보았다. 검은 상자 안에 담긴 완충제와 그 사이에 있는 작고 투명한 병, 그 속에 담긴 무색의 액체.
[아는 조향사 선배한테 부탁해서 받은건데, 프랑스에서 유행하는 비매품 향수래. 근데 재환이 형이 그걸 뿌리고 있더라고.]
오, 향 좋은데. 향수에 대해서 문외한인 그에게도 꽤나 매력적인 향이었다. 자꾸만 맡고 싶어지는 향이랄까. 달달한 커피향이 그에게 가득 들어찼다.
[향수 시장이 활성화된 프랑스에서 거래를 하지도 몰라.]
".....!"
택운이 향수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홍빈이는 냉정한 걸까. 아니, 아니면 재환에게 빨간 줄이 그어지게 되더라도 본래 자신이 알던 형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감상에 젖은 걸까.
[형, 재환이 형을 잘 부탁해.]
홍빈이 보낸 문자를 그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렇게 하면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 것마냥.
더 이상의 문자는 없었다.
택운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향수와 핸드폰 액정을 번갈아 쳐다보던 그는 손바닥 위에 턱을 괴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이것저것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
짙은 회색의 안개가 그의 눈앞에 깔려 있었다.
몽혼한 꿈의 끝자락마냥 느릿하고 허공을 부유하던 그는 어느 순간 멈춰섰다. 단아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저를 돌아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택운아."
"..... "
"이제 여기서 살지 않아도 돼. 나가자, 여기서. 우리도 도심에서 살 수 있어."
"어머니."
택운이 그녀의 양어깨를 잡쥐었다. 기억 속의 어머니는 언제나 중년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미 자신은 어머니의 키를 훌쩍 넘었지만 꿈속의 어머니는 젊고, 언제나 자신을 향해 웃음을 지어주시고 계셨다.
자꾸 어딜 나가신다는 거에요, 어머니. 초점없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굽어보며 택운은 물었다.
"....너는 여전히 여기가 어딘지 모르는구나."
실망한 듯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택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침대 하나가 심플하게 배치되어 있는 방, 검은색의 바닥, 좁은 창문으로 흘러들어오는 작은 빛줄기.
혼탁한 방 안의 공기가 코 끝을 스쳤지만 낯설지 않았다.
해 봐야 대여섯평의 좁은 방이지만 아늑한 공간에 위화감이란 없었다. 그리고 방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있는.....그래, 아이 장난감.
....뭐?
택운이 뒤를 돌아보지만 어머니는 아무데도 없다.
본래부터 없던것처럼, 존재하지 않는 그녀의 방도 함께.
순간, 물 밀듯이 밀려오는 공허감에 택운이 가슴을 부여잡는다.
속이 텅 빈 눈동자의 그늘이 파르르, 얕게 떨었다.
*
"속초 쪽에서 보내준 사진입니다."
그의 귓가에 나지막히 보고한 조직원이 그에게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상혁이가?"
흥미롭다는 듯 한 쪽 눈썹을 들어올린 재환이 책상 위에 사진들을 툭 던졌다.
열린 봉투 사이로 수북한 인화 사진들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것들 중 하나를 집어든 재환이 사진 속 남자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다시 던져 두었다.
"고작 형사 하나가 뭘 하겠어. 그냥 놔 둬."
고개를 끄덕인 조직원이 물었다.
"그럼 거래는..."
"예정대로 진행한다. 준비해."
"알겠습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 조직원을 한 번 스치듯 쳐다본 재환이 전화 상대에게 물었다.
"꼬리라는 게, 정 형사였어?"
의외라는 듯, 전화기 너머에서 상혁이 되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고개를 끄덕인 재환이 습관처럼 손에서 검은 볼펜을 돌려댔다.
까만 몸체의 매끈한 필기구가 그의 손가락 끝에서 돌아갔다.
"내가 아는 사람이랑 친하게 지내서 몇번 본 적 있어."
[우리 쪽에서는 유명해. 조직 잡는다고 날뛰는 강릉 쪽 형사로.]
"그래?"
[근데 말이야...전에 너희 때문에 자기 누나가 사라졌다고 하던데. 한 7, 8년 됐나?]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리는 상혁의 말을 들은 재환이 얼굴을 찡그린 채 기억을 더듬었다.
사라졌다고? 그럼 죽었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한 재환이 심각한 표정이 되어 불현듯 턱을 쓸어내렸다.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데.
[뭐, 이런 얘기 하려고 전화한 건 아니고. 그냥, 조심하라고.]
싱겁기는. 피식 웃은 재환이 그렇게 쉽게 잡힐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았지, 하고 중얼거렸다.
"걱정은. 오지랖이다, 인마."
[....뭐, 형이야 어지간히 하겠지.]
안심한 듯 내뱉는 말 끝에도 여전히 걱정이 스며 있었다.
언제부터 상혁이 감성적으로 변했는지, 자신을 걱정해 왔는지 그는 깨닫지 못했다.
"그래 그럼. 끊는다."
[잠깐만, 형.]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은 상혁이 잔뜩 소리를 낮췄다.
[형, 프랑스랑 오늘 새벽에 거래한다고 했지.]
"어떻게 알았냐, 그건 또."
눈을 흘기며 짜증을 내는 재환에게 그가 멈칫거리다가 경고했다.
[....그 사람을 너무 믿지 마, 형. 이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말이야. 이제 끊어. 몸 조심하고.]
"......"
황급히 끊어버린 통화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재환이 머리를 톡톡 두들겼다.
요즘따라 상혁이 자신에게 몸조심하라느니, 걱정된다느니 하는 말들이 수두룩하게 많았다. 평소에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는데.
검은 의문이 응어리져 목구멍에 턱 걸리는 느낌이었다. 보이지 않는 수렁이 제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늘어지는 기분에, 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인상을 찌푸렸다. 진득한 타르같은 끈적끈적한 기시감이 뇌리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그 사람', 이라.
고민하던 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창문 앞에 섰다.
꾸욱 눌러붙은 비가 창문을 가득 적시고 있었다.
마치 아침 이슬에 젖은 가느다란 거미줄같은 비가.
태풍도 아니고, 오랫동안 이어진 장마로 방마다 꿉꿉한 곳이 많았다.
이젠 습관처럼 굳어진 펜 돌리기를 하며 재환은 잔뜩 미간을 찡그리며 돌아섰다. 창문 앞에 희미하게 비치는, 어둠의 뒷세계에 찌든 저와 저의 방을 어렴풋이 노려보면서.
*
"....형, 택운이 형!"
"ㅇ, 어?"
"깜빡 졸았어. 수사 회의 하다가 조는 건 또 뭐야. 여기서 자다가 입돌아가면 나는 몰라."
"....꿈이었네."
"뭐라고?"
아냐. 일이나 해, 자식아. 택운이 핀잔을 주며 파일철로 상혁의 뒤통수를 두어번 쳤다.
형은 졸았으면서 지랄은...
상혁이 밉지않게 눈을 흘기고는 그의 손에 커피 한잔을 쥐여주었다.
"형이 졸 때 이미 스팟 나왔어. 여기, 여기, 여기, 여기까지 이 네곳이 유력한 장소인데, 그중에서도....나는 이쪽이 제일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
톡톡, 그가 마커 끝으로 가리킨 곳에는 빨갛게 표시가 되어 있었다.
"항구랑도 가까워. 스팟에서 항구까지 거리도 비슷비슷하고."
"....."
끝내야 했다. 조직을 없애야 했다.
그리고 그 방아쇠는 그이고 싶었다. 아니, 그였어야 했다.
*
"오늘인가?"
그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LEE, 조직의 보스 밑에서 일한지도 꽤나 오래되었다. 그만큼 그에게서 실력을 인정받았고 그의 비서이자 오른팔로써 든든히 제 몫을 해내는 중이었다.
"약 20분 후 접선입니다. 준비는 다 되셨나요?"
"물론. 잘 보고 있으라고."
"걱정 없네요."
운전대를 잡은 그녀가 고개를 까딱거렸다. 무언가를 질겅대며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던 그녀가 불현듯 그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왜 하필 정택운입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넌지시 물은 그 속에 담긴 것을 그는 눈치챘다.
여전히 잘라내지 못했구나.
"내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잘 다녀오세요, LEE."
하여간 또라이야, 진짜.
짜증을 내는 그녀에게 멋쩍게 웃은 그의 긴 손가락이 문 손잡이에 닿았다.
"갔다올게, J."
달콤하고 진득한 어둠의 거래를 위해서.
*
[정 경위! 잘 들리십니까?]
"네, 현재 스팟 D, 잠입 대기중입니다."
[현재 시간 오전 3시 27분, 지금 들어갑니다.]
"카피."
무전을 주고받은 택운이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는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가.
속초청에 전달된 그 정보 자체가 거짓이었다면 모두 부질없는 짓이겠지만, 익명으로 청에 도착한 정보를 굳이 거짓이라 폄하할 이유도 없었다.
수상한 것이 없다 판단한 동시에 택운이 쏜살같이 달려 창고의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을 열어제낀 그는 빠르게 창고 안을 훑었다.
그는 입에 고인 침을 조심스럽게 삼켰다. 귀에 꽂힌 인이어에 팀원들의 목소리가 왕왕댔다. 전부 허탕을 쳤다는 내용이었다.
작은 창고 안에 가득 쌓여있는 박스들 중 하나를 뒤적거리던 재환이 팔짱을 끼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에게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그럼...."
워낙 작게 말해 뒷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충 흐름을 보아하니 거래가 성립되는 방향으로 이어지는 듯 했다.
오랫동안 박스들 사이의 좁은 공간에 긴 다리를 억지로 욱여넣느라 온몸이 욱신거렸고, 무전기를 쥐고 있는 오른손은 땀에 젖어 자꾸만 미끄러졌다.
상혁이가 짚은 스팟은 아무래도 틀리지 않았다. 한 사람씩 창고에 잠복해 있기로 했는데, 가장 유력한 장소에 택운이 배치되었다. 아니, 사실 자청한 것은 그였다. 긴긴 복수를 하기 위해 택운이 직접 시발점을 도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때, 무언가 말을 하다 만 남자가 유창한 프랑스어로 경고했다. 잇새로 짓씹듯이 내뱉은 말 끝이 날카로웠다.
"......Il y a quelqu'un.(누가 있어.)"
"......!"
그 말에 재환이 고개를 휙 돌려 창고 안을 훑어보았다. 재환의 시선이 닿기 전에 택운은 조용히 몸을 낮췄다. 아무래도 들킨 것 같았다.
"Tu ne le savais pas?(몰랐어?)"
피식 웃고 차갑게 말하는 남자가 계속해서 말했다, 프랑스어였다.
씨발,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택운이 입 속에서 들끓는 조바심을 억지로 잠재웠다.
".....Il mourra de toute façon. C'est le pauvre gars."
재환이 남자의 말을 듣고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누가 죽고, 누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거지?"
"......"
재환이 싸늘하게 물었지만 다른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택운은 느낄 수 있었다.
무언가 흐름이, 언제부터인가 뚝 끊겨있었다.
늘어져있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묵직해진 공기에 숨조차 멎어버릴 것만 같아 그는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나와."
재환의 말이 창고 안에 낮게 울려퍼졌다.
이런 좆같은. 중얼거리며 택운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던 재환과 눈이 마주쳤다.
"누구야?"
그것 보라는 듯이 남자가 고개를 까딱했다. 부들부들 치를 떨며 침입자를 바라보는 재환의 눈빛이 성난 맹수의 그것마냥 번뜩거렸다.
"....강릉청 정택운 형사."
"뭐야, 짭새였어?"
심기불편하게 얼굴을 찡그린 남자가 정장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검은 총신이 그의 손 안에서 덜걱댔다.
"잠깐만, RAVI."
그를 말린 재환이 이내 택운에게로 눈동자를 돌렸다. 잡아먹을듯이 노기가 번들거리는 눈빛을 쏘아보낸 재환이 다그쳤다.
"여긴 어떻에 알고 왔지? 정보는 어디서 털었어?"
"글쎄....."
어깨를 으쓱하며 택운은 옷에 붙은 먼지들을 털었다.
불편한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에게 다가서며 조그만 입을 열어 무언가 말하려는 그를 저지하며 재환이 품에서 꺼낸 새까만 총구 끝으로 그를 조준했다.
"거기까지."
뭐, 정 그러시겠다면. 택운이 옆에 있던 박스를 열었다.
향수를 담은 박스들의 수를 어림잡아 세어보던 택운이 뜨악했다.
창고 안을 가득 메우는 상자 수가 어림잡아 육백개, 박스 하나당 향수가 여덟개. 헤로인이 들었을 테니 가격도 어마어마하겠지.
택운은 여전히 그를 노려보던 재환을 무시한 채 그 중 하나를 들어 허공에 뿌려보았다. 순간, 핑 도는 현기증과 함께 몰려오는 따뜻한 느낌이 택운에게 들이닥쳤다.
"....."
뒷세계에선 비싸게 팔리겠군, 택운이 중얼거렸다.
하나당 얼마지? 몇백? 몇천? 아니면 더한가?
비아냥거리는 그에게 재환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어떤 새끼가...."
젠장, 정보가 어디서 샜지? 설마, 한상혁 그 좆같은 짭새새끼가....
"도망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택운이 허리에 손을 짚는가 싶더니 빠르게 등 뒤에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졸라 깝치네. 왜, 빽이라도 있냐?"
눈썹을 치켜올리며 띠껍게 묻는 재환이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었다.
택운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아주 천천히 눈을 치켜올려 사납게 마주 떴다.
"눈물겹도록 도망쳐 봐야 넌 결국..."
쾅! 굉음과 함께 단단히 걸어잠근 창고 문이 박살났다.
환한 불빛을 앞세운 경찰차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잡힐 테니까."
말 끝을 매듭지은 택운이 희열을 느끼며 입꼬리를 잔뜩 비틀어 올렸다.
드디어 끝났다.
길고 끈적한 검은 실로 이어져 있던 악연이, 갈라졌다.
"경찰이다! 양손 머리 위로 들어올리고 무기 버려!"
"씨팔! 짭새 새끼들이...."
재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상혁이가 말했던 게 이건가? 그 사람이란 건, 나 자신을 믿지 말라는 거였나. 자신했던 게, 결국 자만으로 드러났다.
재환이 두 손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가 총을 난사했다.
탕탕탕탕! 팔로-업-샷으로 반동을 제어하며 연속 사격을 하는 그의 에임에 걸린 형사들이 정확히 머리를 맞고 쓰러졌다.
"억!"
"으악!!"
"그만둬 이 새끼야!"
재환이 쏘는 총 때문에 겁에 질린 신입들이 총을 쏠 생각은 하지 못하고 굳어서 서 있기만 했다. 덕분에 그에게는 이주 좋은 사격 목표물이 되었지만.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걷어차려고 다가가는 순간 택운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어깻죽지가 뜨끈하다. 돌아보지 않아도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새빨간 핏물임을 알 수 있었다. 비릿한 쇠 향이 공중에 번져올랐다.
입에서 느껴지는 듯한 피 맛에 택운은 인상을 구기고 재환에게 발을 걸었지만 단단한 빙벽마냥 그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되려 다리가 채인 택운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씨발, 택운은 어느 형사가 넘어지면서 떨어뜨린 총을 주워들고 재빨리 바닥을 굴렀다. 기다렸다는 듯 그의 궤도를 따라 바닥에 총알이 박혔다. 계속해서 탄창을 갈아끼우는 재환은 스나이퍼처럼 완벽한 조준과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철컥, 슬라이더를 당겨 잠금장치를 해제한 택운이 박스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눈만 내놓았다.
등을 돌리고 있는 재환의 손을 어림잡아 조준, 그리고-
탕!
은폐물에서 벌떡 일어난 택운이 조준한 그 구멍 끝은 그의 손가락 끝을 향해 뜨겁고도 성마른 비명를 내뿜었다.
"이런 씹.....!"
묵직한 금속을 놓친 재환이 바닥에 있던 총을 주워 그를 조준하려고 했지만 택운이 더 빨랐다.
재환의 손을 쏘자마자 달려온 그는 이미 재환의 지척까지 와 있었다. 피 흘리는 그의 손을 쳐낸 택운이 그와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짐승마냥 눈이 시뻘게진 재환은 이성이라곤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에게 달려드는 재환을 한 끗 차이로 피한 택운은 그의 뒤로 다가가 등에 주먹을 메다꽂았다.
억, 소리를 내며 비틀거리던 재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균형을 잡았다. 광기로 인해 분노에 찬 그가 택운에게 주먹을 휘둘렀지만 그의 가까이도 가지 못하고 힘없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잡아 위로 꺾어 올린 택운이 그대로 훅을 날려 바닥에 재환을 내리치고 뒷 주머니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수갑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환은 넘어지면서 빈 탄창이 틱틱 텅 빈 소리를 낼 때까지 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좆같은 새끼들이!! 가만 안 둬!!"
발악하듯 핏대세워 소리치는 재환이 택운의 몸 밑에 깔려 버둥거렸다.
"어떤 새끼야!! 썅, 누구냐고!!!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여전히 고래고래 악을 쓰는 재환은 경찰차에 태우는 순간까지 발작하듯 바르작거렸다.
그가 경찰차에 임시 감금 될 때까지, 택운은 양 손을 부들부들 떨며 그 다리에 서 있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쫓아왔던 조직의 뿌리가 이렇게 잘렸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잠깐, 그 프랑스 새끼는?
"형! 괜찮아?"
상혁이 달려와서는 엉망이 된 그의 꼬라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몸 조심 하라고 했잖아, 형. 이게 다 뭐야?"
온 몸은 생채기 투성이에, 옷도 찢어지고 어깨에서는 붉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일단 응급처치부터..."
"씨팔, 그 프랑스어 하던 새끼 토꼈다."
"하나라도 잡혔으면 됐지. 그 새낀 나중에 잡아도 되잖아."
상혁이 택운의 상처를 보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굴리기만 하고 고치진 않아, 이 인간은.
그 뒤로 그의 잔소리가 뒤따랐지만 택운은 말을 끊으며 돌아섰다.
"상혁아, 미안. 나 전화좀."
"어? 어. 누구?"
근데 이 시간에 전화 받을 사람이 있나? 상혁이 중얼거리는 사이 택운은 이미 통화 연결음을 듣고 있었다.
[여보세요.]
"......"
[.....재환이 형은?]
알고 있었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더욱 미안함에 택운이 아무말 않자 홍빈은 그에게 장소를 물었다.
그가 금방 가겠다며 전화를 끊고도 택운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고뇌했다.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일까, 아니, 뭐라 말해야 하지. 조직을 무너뜨리는 것을 고대하던 그의 면에서는 홍빈에게 축하를 받아야 함이 분명하지만 조직의 선두에 선 사람은 그의 친형이었다.
이율배반적인 미안함과 통쾌함이 공존하는 마음에 갈피를 잡지 못한 택운은 홍빈이 올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형."
어느새 현장에 도착한 홍빈이 왜 이렇게 다쳤냐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를 본 것인지, 택운을 죽일듯이 노려보던 재환이 뭐라뭐라 소리치며 창문을 두들기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재환을 발견한 홍빈이 고개를 숙이며 택운에게 묻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서 있는 모습이 위태롭다.
"형, 우리 다른 데서 이야기 하면 안 돼?"
이미 그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았음이라, 택운은 그를 데리고 눈에 보이는 창고로 발을 옮겼다.
어두운 창고의 문이 둘을 집어삼켰다. 깜빡, 암흑 속에서 적응하지 못한 눈을 깜빡이던 택운의 어깨를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두개의 손이 우악스럽게 잡쥐었다.
씨발, 이건 또 뭐야? 재빠르게 피한다고는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
"개새끼야, 이거 안 ㄴ....!"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로 단단하게 그를 무릎꿇린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택운이 눈을 부릅떴다.
"RAVI, 좀 조심히 다뤄줄래?"
".....죄송합니다, 보스."
싸하게 표정을 굳힌 택운이 고개를 외로 틀며 홍빈에게 물었다.
".....뭐냐 너?"
뭐야, 이건. 등줄기에서부터 끔찍하고 불길한 예감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지금 왜 이런 상황인 건데."
"......"
홍빈과 RAVI, 그 옆을 지키는 검은 정장의 남자 하나.
거짓말, 다 거짓말이라고 말해.
미안. 홍빈이 보조개를 만들며 웃음지었다.
"나도 이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는데, 형이 내 얘길 듣고 가만히 있을 것 같진 않아서. 걱정 마, 금방 끝..."
"이런 썅.....너 조직 애새끼였냐? 어떻게 나를, 나를 속일 수가 있어?? 난 너를 믿었는데!!"
역시, 그런 반응일 줄 알았다니까. 홍빈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대며 역류하는 감정의 목덜미를 잡았다. 아직은 기뻐하기 일렀다.
"미안하지만, 재환이 형은 LEE가 아니야. KEN이지. 안타깝게 됐어.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의심 한번 안했어?"
"처음부터, 그 익명의 제보자란 것도 다 네 짓이었냐?"
홍빈은 부정하지 않았다. 뭐, 어쨌던 간에 자신이 상혁에게 시킨 일은 맞았으니까.
"...씨팔, 씨팔!! 이런 좆같은!"
택운이 악다구니를 썼다. 뭐 이런 엿같은 상황이 다 있어!
"워, 워, 진정해, 형. 아직 할 말은 많이 남았는데, 벌써부터 지치면 안되지."
모멸감에 떨며 그는 홍빈을 노려보았다. 몇 년 전, 왜 나는 갑자기 그의 삶에 끼어든 홍빈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을까. 왜 저 아가리 벌린 뱀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까.
"흠...시간 순서대로 해 볼까. 형네 부모님부터 내려가야겠네."
"네까짓 게 내 부모님에 대해서 뭘 알아!!"
닥쳐, 이홍빈.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여버릴거야. 그의 눈동자가 그렇게 짓씹듯이 말하고 있었다.
"형네 부모님은 선대 보스인 VIX밑에서 일했어."
".....!!"
누나가 남긴 쪽지. [VIX], 왜 이제서야 기억났을까.
택운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아니, 사실 그러고 싶었지만 RAVI가 다친 어깨를 꾹 누르는 바람에 그는 씨근덕대며 소리칠 수 밖에 없었다.
"이홍빈, 네가 뭔데! 네가 뭔데!!"
어깨의 상처가 벌어져 온 몸이 찢어지는 듯 고통스러웠다. 아니, 가슴이 찢어지는 건가.
홍빈이 인상을 찌푸리며 RAVI에게 손짓했다. 쩔꺽, 차가운 금속의 끝이 택운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가 벌레씹은 표정을 했다.
"한 번만 얘기할 테니까 잘 들어. 우리 조직에서 일하던 형네 부모님이 결혼하고, 아버지는 조직의 브레인이 합쳐졌다고 좋아하심과 동시에 무서워하셨지. 조직을 넘기거나 배신하지는 않을지 걱정했던 거야. 그래서 형이 4살쯤 되니까 선심 쓰는 척 하면서 도심에 집을 얻어줬지. 물론 계속 조직에서 일하는 조건으로."
"......."
"그래서 형은 기억나지 않겠지만 형도 조금은 조직 사람이었다고. 거기에서 살기도 했고."
문득, 그가 꾸는 악몽이 생각났다. 나가자 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방. 언제나 꿈의 한 장면, 그저 허상에 그치고 마는 망상의 공간인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게,
"......"
"나도 형네 부모님을 좋아했어. 일도 잘 하고, 무엇보다 머리 회전이 빨랐지. 아버지는 나한테 둘은 놓치지 말라고 했어. 근데 KEN은, 그 새낀 형네 부모님이 조직을 휘어잡을까 봐 걱정했어. 내가 아무리 말하고 설득해도 소용 없었지. 그래서 보스가 조직을 넘겨준 거야, 나한테. 꽉 막힌 놈보다 미래를 보라고."
나약한 새끼. 머리야 죽으면 다 끝인 것을. 게다가 이미 그 둘은 조직에 사활을 바쳤는데.
"그래서 내가 필요했냐? 껄끄러운 이재환도 처리하고 나도 조직으로 영입하려고?"
"빙고. 바로 맞혔네."
머리가 참 잘 돌아가, 그치? 이래서 마음에 든다니까.
"형 말고도 내가 아끼는 애들을 풀어야 했어. KEN이 모르는 조직원이어야 했으니까."
"이런 미친, 미친 새끼."
"상혁이도 그렇고, 여기 있는 RAVI도 그렇고."
한상혁 그 새끼가.
"특히나 RAVI는 프랑스 유학파거든.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지. 프랑스어 공부시킨다고 애를 좀 썼어."
처음부터 거래할 프랑스 조직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고.
"뭐, 본론으로 돌아가서. 형네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죽고, 참 안타까워. 그렇게 갑자기 죽을 줄은 몰랐는데. 아까운 인재만 날린 셈이지. 그리고 며칠 후에 형네 누나가 찾아왔어. 다 알고 있다고, 부모님이 무슨 일을 했는지까지 다. 부모가 못 다한 꿈을 자기가 그걸 연계받아서 한다고 하니까, 뭐, 능력도 되고, 똑똑한 건 그대로 닮아서 잘하더라고."
뭐? 택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도 몇 년 동안 찾아다녔던 누나의 행방을, 넌 알고 있었어?
"누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에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홍빈은 그것을 무시하고 대답했다.
"아, J는 잘 있어, 내 비서로. 상혁이도 가거래 한답시고 몇 번 만났을 텐데."
썅, 다 알고 있었으면서.
"....물론 형한테 연락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받아줬지. 옛 정 때문에 감성에 젖는 거, 졸라 귀찮고 따분한 일이니까."
그래도 한 번쯤은 소식 흘려줄 법도 한데, 저런 매정한 새끼.
"어때, 조직에서 일하는 거, 관심 있어?"
"....죽여, 이 씹새끼야."
자청하지 않았으면 했는데. 그렇게 싫었어?
홍빈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내려다 보았다.
"좆같은 조직, 조직!! 씨발, 꺼지라고!!! 내 인생에 끼어드는 지랄맞은 것들, 알 게 뭔데!"
차가운 바닥에서 피끓듯이 절규하는 그의 모습은 절망보다는 한탄에 가까웠다. 긴긴 악연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절망의 구석에서 끝없는 나락으로 등을 밀려 떨어지듯이, 핏대 세운 목구멍에서 처절하고도 음울한 나락이 찢기듯이 뛰쳐나왔다. 뜨겁게 뛰고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뫼비우스의 띠마냥 끝이 보이지 않았다.
충혈된 두 눈동자에서 울먹임을 지우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그의 흰 목덜미가 안쓰러울 만큼 꺾여 있었다.
"그럼 내가 너같은 새끼들을 잡으려고 바친 시간은, 힘은, 노력은!! 좆같이 일했는데 이제와서 다들 그 엿같은 조직 사람이라고,"
숨을 들이킬 새도 없이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말 끝이 젖어있었다.
흐느낌처럼 변해버린 그의 대답아닌 대답에 홍빈은 어깨를 으쓱하고 일어섰다.
"뭐, 지금 선택하진 않아도 돼."
택운에게 시간을 주고 천천히, 타락한 늪의 수렁이 그의 발목을 타고 점점 올라가기를, 뒷세계의 사람이 되도록. 그 늪이 그를 중독시키도록.
삐이걱, 홍빈과 RAVI가 빠져나간 창고의 조명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자리에 못박힌 듯 앉아 착잡하게 바닥만 내려다보는 택운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철컥, 문이 닫히는 소리에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 번들거렸다.
*
"보스."
상혁의 부름에 홍빈이 그쪽으로 돌아섰다.
"또 덫입니까?"
그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싱긋, 입가를 길게 늘였다.
"응."
"덫 치는 게 그렇게 재미있으면, 저는 좀 빼주시죠?"
"쉿. 보스한테 그런 말 하면 안되지."
홍빈이 짐짓 화난 표정을 지었다가 금세 풀어졌다.
"재밌잖아."
전 보스가 하시는 일 뒷처리하느라 재미 없는데요.....언뜻 상혁이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 홍빈은 그를 깔끔히 무시했다.
어깨의 먼지를 털며 무심하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순간 광기 어린 빛이 스쳤다.
"뭐, 이로써 그 집안 전체를 끌어온 게 되는 건가?"
"하기야, 보스가 실패한 적은 없었잖습니까."
지나치게 완벽주의자시니까요. 뒷말을 속으로 꾸역꾸역 집어넣은 상혁이 고개를 끄덕여 그에게 동조했다.
"맞아. 그래서 더 마음에 들어. 저 집안은 대대로 머리가 좋아. 유리하게 써먹을 수 있을거야."
".....소시오패스 새끼."
귀꿈맞게도 낮은 목소리가 홍빈을 질타했다. 자신을 욕한 그 간 큰 자에게 고개를 돌린 홍빈은 그가 누군지 깨닫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RAVI, 죽을래? 콱 그냥..."
.....표정 때문에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왜, 맞잖아.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자 새끼."
무미건조하게 홍빈을 압박하는 말투로 입을 연 RAVI가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안 그러냐, 상혁아?"
"저는 여기서 왜 나옵니까. 두 분 알아서 하십쇼."
졸지에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긴 상혁이 관심 없다는 듯 두 손을 벌리고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홍빈이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협박조로 말했다.
물론 절대 그럴 생각은 없었다. 기실 그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을 괜한 트집으로 등 돌려 세우게 만드는 것은 가혹하니까.
"허, 요즘 친구라고 봐줬더니 이제 기어오른다? 한 번만 더 그러면...."
탕-!
난데없는 총소리에 놀란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
고개를 치켜든 홍빈이 창고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총성이 들린 건 여기다. 설마,
"....젠장."
홍빈이 그답지 않은 욕을 내뱉으며 창고 문을 열어젖혔다.
얼굴의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머리가 뚫린 시체가-한순간은 살아 숨 쉬는 것이었던-바닥에 누워 뜨겁고 시뻘건 핏물을 뭉텅뭉텅 쏟아내고 있었다. 창고 안에는 비릿한 혈향이 그득했다.
진하고, 거짓에 점철되고, 분노라는 자아에 중독된 피가.
"....영원한 오점이 생겼네요."
"....닥쳐."
홍빈이 앞머리를 쓸어넘기면서 귀찮게 됐다는 듯 허리에 손을 짚었다.
썅, 아까 총이 있었는지 확인했어야 했는데.
이미 죽은 사람을 돌아오지 않았다. 추적추적, 회색의 먼짓비가 그들을 천천히, 깊숙하게 적셨다.
*
"보스, 보스가 맞았습니다."
상혁이 노트북을 뚫어지듯이 쳐다보다가 홍빈을 보고는 그에게 보고했다.
거기 들어가겠다, 인마.
그의 옆으로 가 앉은 홍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역시, 머리가 좋은 건 확실하네. 위치는?"
화면에서 빨갛게 반짝거리는 작은 점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이동중입니다."
".....너무 빠른데. 확대해 봐."
의심스럽다는 듯, 홍빈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이만큼은 아닐텐데.
상혁이 지도를 확대했다.
"좀 더."
"....보스. 아무래도 눈치채고 버린 것 같은데요?"
아마도요. 상혁이 검지 손가락을 책상에 두어번 두들기더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화면 돌려 봐."
상혁은 자판을 몇 개 두드리더니 노트북을 홍빈의 쪽으로 밀었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화면에는 푸른 빛을 띤 물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천에 던진 듯 합니다."
"이런, 그걸 함부로 버리다니."
홍빈이 중얼거렸다. 그 반지가 얼마짜린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을 툭툭 털고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찾아낼거야."
".....어쩌시려고요."
"글쎄....일단 재환이 형 처리해 준 것에 대한 사례는 해야겠지."
소름끼치도록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홍빈은 즐거워보였다.
그는 품 속을 뒤져 웃옷 주머니에서 나온 향수를 뿌렸다.
치익- 수억 개의 향기 분자가 공기 중에서 그의 주위에 달려나왔다가 홍빈에게 살포시 내려앉았다. N이 소포로 주었던, 투명한 용기에 담긴 것이 아니다.
검고 네모난 용기에 담긴, 향은 비슷하지만 그 뒤에 중독이라는 마수가 붙은 그의 작품-
YvesSaintLaurent-BLACK OPIUM EAU DE PARFUM.
; 중독, 하얀 밤(Nuit blanche).
fin.
by. Purple
